사진작가 분이가, 탱큐
본성과 인격의 형이상학적 이원론을 넘어선 십자가의 존재론적 필연성
-사순2주,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를 중심으로
1. 김춘수의 「누란(樓蘭)」 & 곽재구의 「누란樓蘭」
그 명사산(鳴沙山) 저쪽에는 십년(十年)에 한 번 비가 오고, 비가 오면 돌밭 여기저기 양파의 하얀 꽃이 핀다. 봄을 모르는 꽃. 삭운(朔雲) 백초련(白草連). 서기(西紀) 기원전(紀元前) 백이십년(百二十年). 호(胡)의 한 부족(部族)이 그 곳에 호(戶) 천 오백 칠십(千五百七十), 구(口) 만 사천백(萬四千百), 승병(勝兵) 이천구백이십 갑(二千九百二十甲)의 작은 나라 하나를 세웠다. 언제 시들지도 모르는 양파의 하얀 꽃과 같은 나라 누란(樓蘭)(김춘수, 「누란(樓蘭)」)
내가 처음 그대를 만난 곳은 / 사막 한가운데였습니다/돈황 버스 정류장 대합실에서 뜨거운 쟈스민차 한 잔에 마른 빵을 찍어 먹었습니다/바로 그때 당신이 내 앞에 나타났지요//네가 찾는 것은 이 세상에 단 한 군데밖에 없지/사랑하는 이여/그 말을 듣는 순간 내 가슴이 얼마나 설레였는지/당신은 모릅니다/삶과 죽음이 영원히 교차되지 않는 땅/영혼과 육체의 핍박이 한 번도 이뤄지지 않는 곳/사랑하는 이여 오늘도 나는 樓蘭으로 가는 모래밭 길을 걷고 있습니다(곽재구, 「누란樓蘭」)
누란은 역사적으로 사라진 나라다. 그런데 누란의 모나리자라는 이름이 붙여질 정도로, 기원전 1880-1800년경에 생존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미아라가 발견되고 나서 누란은 역사적으로 그리고 문학적으로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비단길 무역의 길이었던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발견된 청동기 시대의 공간과 인물이 사람들에게 회자되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영원불멸에 대한 갈망이라고 할 수 있다.
김춘수의 「누란(樓蘭)」과 곽재구의 「누란樓蘭」은 그 초점 대상이 다르다. 김춘수는 인간역사의 유한성에도 불구하고 “언제 시들지도 모르는 양파의 하얀 꽃과 같은 나라 누란(樓蘭)”라고 인간이 살 수 없는 척박한 땅에서라도 삶을 꾸리고 싶어 나라를 세워 함께 모여살았던 이들을 소환하면서 삶의 엄중함을 바라보았다면,
곽재구 시인은 “삶과 죽음이 영원히 교차되지 않는 땅/영혼과 육체의 핍박이 한 번도 이뤄지지 않는 곳/사랑하는 이여! 오늘도 나는 樓蘭으로 가는 모래밭 길을 걷고 있습니다” 라고, 타클라마칸 사막에 들어갔던 그 누구도 결코 살아서 나오지 못했다는 것을 순례의 여정으로 비유하고 있다. 이는 “네가 찾는 것은 이 세상에 단 한 군데밖에 없지”라고 의식에서 솟구친 독백은 인간은 삶과 죽음이 영원히 교차되지 않는 곳을 찾아 헤메는 존재임을 말하고 있다.
Exterior de la casa Wittgenstein en la actualidad
2. 들판으로 열리는 문은 세계의 등 뒤에 자유를 주는 것 같다(라몬 고메즈 세르나)
누란처럼 열린 공간이 아니라 닫힌 공간에서도 인간은 어떤 근원적인 것을 찾아헤메고 있다.
자유기고가인 발터 슈미트는 『공간의 심리학-인간의 행동을 결정하는 공간의 비밀』에서, 왜 인간은 보다 ‘편안’하고 ‘안전’한 공간을 찾으려 하는지 사람의 심리 법칙을 진화심리학과 행동과학으로 밝힌다. 예컨데 사무실을 꾸밀 때나 주차할 곳을 찾을 때, 산에 오를 때나 버스나 기차의 좌석을 예약할 때, 파티에서 모르는 손님과 대화를 나눌 때나 엘리베이터에 오를 때, 사람들은 어디에 자리를 잡고 타인과 사물로부터 얼마만큼 간격을 둘지 늘 심리적인 시험대에 오른다. 공간에 머물거나, 공간을 이동할 때 편안함이나 불편함을 느끼기도 하고, 심지어는 한 영역을 두고 다툼이나 갈등이 싹트기도 한다.
①권력을 연출하는 효과적인 방법으로 입증된 것은 예나 지금이나 건축물이다. 로마 황제를 알현하고 그 앞에 무릎을 꿇기 위해 당시 사람들은 지금으로부터 약 1700년 전에 지어진 트리어의 콘스탄틴 바실리카까지 길고 험한 길을 감수해야 했다. 바실리카의 중심 홀은 길이 67미터, 폭 27미터, 높이 33미터로 고대 건축물 중 지금까지 남아 있는 최대 규모의 홀로 일컬어진다. “천장은 네 벽으로만 떠받쳐진 채 중간에 기둥이 없어 당시 황제가 앉아 있는 곳으로 가려는 사람은 그 긴 홀을 홀로 걸으며 적막감과 격리감을 느꼈을 것”이라고 트리어 관광사무소 관계자는 전한다.
②남성이 앞서 걷는 것은 그들이 여성보다 목표지향적으로 걷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목표 지점에 빨리 도착하려고 빨리 걷는 것이다. 쇼핑하는 모습만 봐도 그렇다. 남성은 평소 습관대로 신속히 이동하는 반면, 여성은 득템거리가 없나 좌우를 살피며 천천히 걷다가 눈에 띄는 품목을 발견하면 곧장 그리로 달려간다. “여성은 서둘러서 목적지에 도착하려 하지 않습니다. 목적지로 나아가는 과정이 곧 목적인 셈이죠. 게다가 여성에게 산책이란 쇼핑할 때처럼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대인관계적 이벤트이기도 합니다.”
③진화과정을 거치면서 인간 종은 신체적 특징 외에도 결과적으로 유리한 다수의 행동 패턴을 발전시켜 왔다. 이 행동양식 및 반응방식들은 생물학적 종으로서의 인간 생존에 유리하게 작용함은 물론 ‘존속’의 열쇠가 되기까지 했다. 진화심리학자 베냐민 랑에가 생존 방식의 하나로 거론한 말을 들어보자. “우리는 다수가 하는 일은 크게 잘못될 리 없다고 생각합니다. 혹여 다수가 잘못된 결정을 내려 문제가 생기더라도 모두 같은 배를 탄 처지이기 때문에 다 같이 해결해나가면 된다고 여기죠.
④화가 아우구스트 마케(August Macke)도 1921년 완성한 작품 〈정원의 길〉에 이 ‘미스터리 효과’를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길이 바위와 관목 뒤로 신비스러운 자취를 남기고 사라지는 풍경을 그린 그림이다. 안체 플라데의 말을 빌리면 미지의 공간으로 흐르듯 난 길 너머에 “내가 꼭 알아야 할 무언가가 더 있을 듯한”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미지의 길이 주는 기분 좋은 기대감도 약간의 불안감이나 위협감을 일으키는 순간 연기처럼 사라지고 만다. 신비감이 으스스함으로 돌아서는 순간이다.
⑤녹색식물을 풍부하게 접할 수 있는 환경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아파서 결근하는 빈도도 낮다. 모든 사무실이 공원이나 녹지를 내다볼 수 있는 환경은 아니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창문이 아예 없거나 있더라도 전망이 변변치 못하다면 실내에 화분을 여러 개 갖다 놓아보자. 그마저도 여의치 않다면 푸른 식물이 그려진 그림을 걸어놓자. 워싱턴 주립대학교의 조경학 교수인 버지니아 로어(Virginia Lohr)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진화과정을 거치면서 식물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방법을 배웠죠. 식물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겁니다.”
슈미트는 특정한 공간에서 사람들이 왜 그런 행동을 취하는지, 행동과학과 진화심리학의 관점에서 분석하고 그 배경을 설명해준다. 우리가 어떤 공간을 자기 것으로 만들 때 그곳은 그저 우연히 선택된 것이 아니며, 엄연한 심리학적 원인에 따른 것이라고 말한다. 게다가 생물학적 원인까지 더해진다. 우리는 아직도 석기시대 사람처럼 행동할 때가 많은데, 그 옛날 동굴을 차지하려는 곰을 피해 언제든지 도망칠 준비가 되어 있는 원시인처럼, 현대인들 역시 침대의 위치를 정할 때조차 똑같은 심리가 작용한다는 것이다.
더불어 살려면 ‘거리 두기’가 필수다! 우리는 아주 친밀한 사이가 아닌 이상 다른 사람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경계하는 경향이 있다. 친밀한 사이일지라도 공간과 시간에 따라 허용할 수 있는 근접 거리가 바뀌기도 한다. 인간도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허락 없이 자신의 영역에 들어오는 타인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 물리적 ‘거리 두기’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인간의 본능이라 할 수 있다.
신체에서 45~50센티미터까지가 ‘밀접영역’, 50센티미터에서 약 1.2미터까지가 ‘사적영역’, 1.2미터에서 3미터 사이가 ‘사회적 영역’, 더 먼 거리인 3.5미터 정도의 구간은 ‘공적영역’으로 구분한다. 사회적 영역에서부터는 상대방의 동의가 필요하고(물론, 상황에 따라 그 거리는 유동적이다), 사적영역은 호감도를 가늠할 수 있는 거리다. 하지만 친한 사이라도 자칫 밀접영역에 함부로 침범했다가는 신고를 당할 수 있다.
슈미트는 우리가 담장과 성을 쌓고 울타리를 치며 국경에 선을 긋는 일, 넘지 말아야 할 경계선을 그으며 남들도 이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적당한 거리에 대한 인간의 욕구가 반영된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예의를 갖춰 상대를 대하고 서로의 밀접영역이나 사적영역을 존중하려고 할 때 팔짱을 끼거나, 다리를 꼬는 등의 상대방의 방어신호도 더 잘 알아챌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이처럼 인간에게 ‘거리 두기’는 ‘더불어 살기’를 가능하게 해주는 필수적인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슈미트는 자신의 자아를 최고로 끌어올리 수 있는 공간을 찾아 적극적으로 움직이라고 조언한다. 공간심리학적 결정의 중요성! 공간이 인간에게 끼치는 영향은 매우 크다. 환경에 따라 인간의 생각과 행동이 바뀌고, 일의 능률과 성과에도 차이를 만든다. 환경심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녹색식물을 풍부하게 접할 수 있는 환경의 일터에서는 아파서 결근하는 빈도가 낮다고 한다. 빛이 들고 녹색식물이 잘 보이는 창가 자리는 그만큼 희소성 이상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자기 주변을 화분을 두는 등, 약간의 초록색으로 꾸미는 일은 공간심리학적으로 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슈미트는 공간심리학적인 시각에서 우리가 적극적으로 공간을 선택하기를 주문한다. 중요한 계약을 할 경우에는 자신의 사무실 혹은, 적어도 자신이 익숙한 공간에서 하라고 충고한다. 그런 공간에서 편안함과 안정감을 느낄 수 있고, 자신감을 바탕으로 유리하게 협상을 진전시킬 수 있다. 상황을 제어할 수 있게끔 공간적인 뒷받침을 받는 데서 오는 위안감 덕분에 심리적 우위를 점하게 된다. 그밖에도 공간의 어떤 요소가 나를 불안하게 하고, 그것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지 여러 힌트를 알 수 있다.
같은 공간에서도 나이, 성별, 지위, 처한 상황 등에 따라 심리적 반응은 제각각이다. 공간심리학은 행동으로 나타나는 심리적 반응의 이유를 설명해주고, 적절히 공간을 벗어나거나, 다른 공간을 선택하게끔 도와준다. 공간심리학적인 관점으로 타인의 행동을 관찰한다면 그에 맞게 배려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는 공간의 비밀은 인간은 근원적으로 어떤 공간을 그리워하고 그것을 추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공간은 결국 어떤 시간에 대한 향수라고 말 할 수 있겠다.
3.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마르코 9,2-10
이 글은 [사랑이 십자가는 아니지만, 십자가는 사랑이다](1)(2)의 연장선에서 쓴 글이다.
Ⓐ그 무렵 2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3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4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5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6 사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제자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7 그때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더니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8 그 순간 그들이 둘러보자 더 이상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그들 곁에 계셨다.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10 그들은 이 말씀을 지켰다. 그러나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저희끼리 서로 물어보았다.
사순2주 마르코 9,2-10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와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라고 상이하게 다른 성격의 공간을 투샷으로 보여준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라고 전하는 마르코 9,2-10은 공관복음(마태오17, 1-9/루카9,28-36)에 동시에 실려 있는 말씀으로 주님의 거룩한 변모축일( 9월14일)에 묵상하는 복음에 해당한다. 이는 성 십자가 현양 축일 40일 전에 변모축일을 지내는 것에서도 영광과 십자가는 불가분의 관계로 인식되고 있음을 바라볼 수 있다. 교회의 전승에 의하면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하시기 40일 전에 일어난 사건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축일은 1457년 제209대 교황인 갈리스토 3세가 로마 전례력에 도입했다.
사순2주에 이 거룩한 변모의 영광과 십자가 길을 동시에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것은 십자가의 길, 광야 여정 중, 예수님의 사랑의 폭을 감당하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당신 영광스러운 변모를 미리 체험케 하신 자비로운 은총이라고 할 수 있다. 신앙의 여정은 그 누구도 예외없이 산위와 산 아래라는 두 공간을 통합하는 영적 삶의 리듬을 살아내야 하며, 그 리듬은 영광과 십자가 가운데 하나만 선택할 수 없는 관상과 활동을 통합하는 삶이기도 하다.
사순1주 광야의 유혹사화에서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것이 우리의 실존의 상항이었다면 사순2주는 그리스도의 영광과 십자가의 통합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실존의 상황임을 역설한 것이다. 빛과 어둠이 대척적인 존재양식이라면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9절)라는 측면에서 산위와 산아래에서 삶을 어떻게 통합할 것인가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공생활위주로 복음 서술에 초점을 맞추던 마르코복음사가에게 이 신비로운 변모사건은 언뜻, 서술의 어조가 달라진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여기서 변모사건을 가로지르는 영광-십자가라는 모순을 이해하는 것은 마르코 복음사가가 바라본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내용을 세 차례 언급한 이유에서 찾을 수 있다. 세례때 하늘의 소리를 통해, 두 번째 변모사건을 통해, 세 번째 십자가의 죽음을 바라본 백부장의 고백을 통해. 변모사건의 흐름은 8장에서 베드로의 고백과 대비되고 수난예고와 짝을 이루며 곧 이어 선언될 재림을 미리 예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가 받은 영광과 고난의 통합은 인간 예수 안에 내재한 완전한 신이며 완전한 인간이라는 신적인 능력과 인간의 약함, 위대함과 비천함이라는 모순적인 특성이 곧 사랑임을 역설하고 있으며,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메시야인 하느님의 아들은 수난당하고 죽는 사람의 아들임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인간 예수야말로 하느님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표징임을 알 수 있다. 예수의 거룩한 변모사건을 통하여 하느님의 광휘와 비천함을 동시에 드러냄으로써 어떤 사랑만이 하느님의 사랑인가를 보여준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제자들에게 내린 함구령의 의미-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 다시 살아날 때까지에서- 그분이 고난을 겪고 죽으시고 부활하실 때까지는 그 누구도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바르게 이해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침묵중에 성찰하고 머물러야 하는 부분이다. 왜 약함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신 것인지. 따라서 부활의 의미를 바로 알아야 변모사건의 의미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늘과 땅만큼의 이 사랑의 낙차 앞에서 .제자들이 겪은 혼란은 세속의 가치기준으로 하느님의 현존(사랑)을 바라보려는 바로 우리들의 영적 혼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혼란은 제자들의 혼란보다 그 유서가 깊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전생애를 알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영광과 십자가의 리듬을 살지 못한다면 영적 장애를 극복하지 못한 상태이기에. 제자들이 변모 사건 앞에서 정치적인 메시야, 승리하는 메시야를 기대하였듯(8, 32/ 10, 37) 우리도 세속적 가치기준에 멈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베드로는 분명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했지만 십자가의 수난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에서 그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변모의 현장에 있었던 세 제자처럼 산위의 영광과 산아래의 십자가의 길을 어떻게 통합할 것인가가 사순2주가 던지는 묵직한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높은 산에서 예수님의 원래의 모습을 보여주셨다면, 산아래로 내려오면서 인간적인 나약함이 극대화되는 인간 예수의 길을 제자들에게 알려주신 것에서 전자를 믿으면 사실 후자를 수용해야 함에도, 즉 표면적으로는 영광과 십자가라는 극명한 차이처럼 보이는 사건이 본질적으로는 하느님의 사랑이 그 안에 동시에 관류하고 있다는 것을 바라보지 못한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하늘과 땅만큼의 사랑의 낙차를 그분을 따르는 우리는 어떻게 신앙으로 내재화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사순2주 성찰의 포인트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의 영광스런 변모사화는 바로 8장의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한다>(마르코8, 27-30/마태오16,13-20/루카9,18-21), <수난과 부활을 처음으로 예고하시다>(마르코8, 31-33/마태오16,21-23/루카9,22)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마르코8,34-38/마태오16,24-28/루카9,23-27)와 연결하여, 산위와 산아래라는 두 공간을 통해, 예루살렘을 입성을 앞에 둔 예수님과 같은 길을 걸어야 하는 제자들에게 준 위로의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공관복음에만 실려 있는 예수님 변모의 영광이 정작 변모사건의 목격자인 요한복음 저자는 이 사건을 복음에서 다루지 않았다. 이는 변모사건의 핵심이 무엇인가를? 역으로 추론해 볼 수 있는 침묵의 언어에 해당한다. 이는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신앙 안에서 '십자가는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는가'를 묻는 십자가신학의 영성에 대한 이해가 변모의 영광을 이해하는 키워드라고 할 수 있다.
마르코 9,2-10은 예수님의 변모사건(2-8)과 제지들의 목격담과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상황(9-10)을 통해 영광과 십자가의 길을 통합할 것을 제시한다.
Ⓒ그는(모세) 양떼를 몰고 광야를 지나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갔다(탈출기3, 1-15)
Ⓓ그는(엘리야) 밤낮으로 40일을 걸어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갔다(열왕기상, 19,1-18)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코1,9-11/마태오3,13-17/루카3,21-22)
Ⓕ예수님의 영광스런 변모사화는 바로 8장의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한다>(마르코8, 27-30/마태오16,13-20/루카9,18-21), <수난과 부활을 처음으로 예고하시다>(마르코8, 31-33/마태오16,21-23/루카9,22)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마르코8,34-38/마태오16,24-28/루카9,23-27)와 연결하여, 산위와 산아래라는 두 공간이 어떻게 통합될 수 있는가하는 십자가영성에 그 초점이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땅 끝까지 구원을 가져다주도록 내가 너를 다른 민족들의 빛으로 세웠다(사도11, 47)
Ⓒ~ Ⓖ에서 보여주듯, 산위와 산아래를 어떻게 통합할 수 있는지? 아브라함, 모세, 엘리야, 예수님의 세례사건과 제자들이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여정,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파견 등을 종합해 본다면, 인간은 근원적으로 빛의 자녀이기 때문에 산위와 산아래, 영광과 십자가를 통합할 수 있는 본성을 이미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베첼리오 티치아노 /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천사
Vecellio Tiziano, Sacrifice of Isaac, 1542-44, Oil on canvas, 328x285cm
Santa Maria della Salute, Venice
즉. 빛의 자녀인 우리는 주님 변모의 메시지를 <산위(관상)와 산아래(활동) >이라는 통합적 시선에서 변모 체험의 일상화에 초대된 것임을 바라보아햐 한다는 제언이기도 하다. 이는 하느님이 '어디' 계신지를 찾지말고 '하느님'을 찾으라는 제언이라고 할 수 있다.
Ⓗ 하느님이 계신 곳을 찾지 말고 하느님을 찾으라 했습니다. 하느님을 찾지 않으면 거룩한 성지의 수도원도 세속이 되어 버립니다. 내가 하느님을 찾고 만나야 할 거룩한 성지는 바로 내 몸담고 있는 평범한 일상의 자리입니다. 성지가 있어 성인이 아니라 성인이 있는 곳이 성지입니다.(성베네딕도수도회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따라서, 관상과 활동의 균형감각을 잡으라는 조언은 산위의 영광과 산 아래의 십자가의 길은 사도들에게 뿐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이해의 지평을 초월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그것은 십자가에 대한 오해- 십자가는 고통이고 죽음이고 수난이다는 것에 방점을 찍을 수 없다는 점이다. 이는 수난신심과 사도적 영성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십자가는 파괴가 아니라 사랑에 있음을 바라보는 것으로, 몸을 중심에 놓고 십자가를 바라보면 고통이지만, 영혼을 중심에 놓고 보면 십자가는 사랑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라칭거 추기경(베니틱토16세교황)은 『사도신경강해』에서 하느님이 어디 계신지 특정 장소에서 찾지 알고 하느님을 찾아야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십자가의 궁극적인 방향이 고통이 아니라 사랑임을 전한다.
Ⓘ하느님이 어떻게 당신 피조물의 더구나 당신 아들의 고통에서 기쁨을 얻으며 심지어는 그 고통에서 당신이 화해의 대가를 치루어야 할 화폐를 볼 수 있겠는가? 십자가 신학은 고통 그 자체가 소용있는 것이 아니라 실존을 신장하여 먼 것과 가까운 것을 일치시키고 하느님께 버림받은 인간과 하느님과의 연관을 지어주는 사랑의 폭이 중요하다. 사랑만이 고통에 방향과 의의를 준다.(229)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음성은 오늘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의 뒤를 따르려는 모든 신앙인들에게 주는 하늘의 음성이다. 그 음성을 아브라함이 들었고, 다윗이 들었고, 바오로가 들었고, 베드로가 들은 바, 바로 그 사랑의 음성이다. 또 우리는 사도로 부터 전해지는 말씀을 통해 이미 우리 역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음성을 들었다. 이를 바오로 사도는 아브라함의 믿음에서 희망을 찾는 과정으로 전한다.
Ⓙ 아브라함은 자기가 믿는 분, 곧 죽은 이들을 살리기 다시 살리시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불러내시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 모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너의 후손들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하신 말씀에 따라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로마서4, 17-18)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32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33 하느님께 선택된 이들을 누가 고발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을 의롭게 해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34 누가 그들을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돌아가셨다가 참으로 되살아나신 분, 또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신 분,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간구해 주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로마서 8,31ㄴ-34)
바오로의 십자가론도 고통이 방점이 아니라,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으로 수렴된다. 우리가 믿는 것은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바로 그 사랑이다. 그런 맥락에서 "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라는 것은 예수님이 가신 길을 우리도 갈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 사랑의 방향이 아가페로 설정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하느님이 우리 '편'이라는 것은 편가르기나 분리의식이 아니다. 보편적 사랑, 모두가 하나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십자가는 어디서 유래되며, 왜 우리가 그 십자가를 지고 그분의 뒤를 따라야 하는가?
칼 라너는 『영성신학논총-그리스도적 고행의 철학적 신학적 기초에서』 한 인간은 자신의 운명 앞에 놓인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한다. 그 답으로 인간이 십자가의 수난과 고통 그리고 죽음은 인간 삶의 마지막 사건으로 생각해서는 안되며, 인간의 모든 삶에 근본적으로 침투하는 하나의 '상황'으로 십자가를 생각해야 한다고 전한다. 십자가는 하늘이 만들어서 인간에게 지라고 준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과 인격의 불협화음이 만들어낸 '상황'이라는 것이다.
Ⓚ 본성과 인격의 형이상학적 이원론은 고난이 가능하다는 존재론적 가정이 된다. 하느님에게 받은 순수한 본성은 고통을 받을 수가 없다. 고통은 인간의 죄의 결과로써만 인간 속에 스며들 수 있다. 그러므로 인격이 있는 곳에서만 고난이 있을 수 있다. 이는 그리스도적 상처를 가지고 그리스도적 죽음을 자기 몸에 지니는 것이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가 보여주는 영광에 앞서 십자가는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는 늘 믿는 이들에게 하나의 의문이었다. " 십자가 신학은 고통 그 자체가 소용있는 것이 아니라 실존을 신장하여 먼 것과 가까운 것을 일치시키고 하느님께 버림받은 인간과 하느님과의 연관을 지어주는 사랑의 폭이 중요하다. 사랑만이 고통에 방향과 의의를 준다."는 것이 산위와 산아래를 통합하는 주님 은총일 것이다. 이는 실존의 상황에서 각자에게 부여된 지상적 가치를 천상적 가치에 수렴시키는 신앙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십자가는 하느님의 지혜, 하느님의 힘이라고 부를 수 있다.(코린토1서2,13-25)
<본성과 인격의 형이상학적 이원론을 넘어선 십자가의 존재론적 필연성>(-사순2주,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를 중심으로)
하느님이 주신 본성만으로 살았다면 우리에게 고통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고유한 인격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십자가를 만들고 지게 된다. 자신의 십자가를 알면서 지는 사람과 자신의 십자가를 모르면서 지는 사람으로 갈리는 것 뿐이지 이미 유한한 생명 자체가 우리가 짊어진 십자가라고 할 수 있다. 그 유한한 생명이 우리 앞에 당도하기 전에 죄로 인해 영적인 죽음을 자신에게 주었다면 이는 본성과 인격을 이원론으로 고착화 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은 본성과 인격을 하나로 일치시키는 과정에서 십자가는 고통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을 바라보게 된다. 십자가는 실존이 만들어낸 십자가가 있고 존재론적인 십자가가 있을 수 있다. 실존이 만들어낸 십자가는 본성과 인격의 불협화음이 빚어낸 상황의 소산이라면, 존재론적인 십자가는 신과 인간의 <있음>이라는 존재의 차이에서 비롯된(창세기1장 인간창조부분) 십자가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라는 최소에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담는 그 자체가 이미 균혈과 파열과 상처를 내장한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라고 전하는 마르코 9,2-10 산위와 산아래라는 공간을 통합하여, 하느님이 어디 계신지 찾지말고, 어디에나 계신 하느님을 찾으라는 축복의 제언이라고 할 수 있다.
글을 마치며,
Ⓐ그 무렵 2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3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4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5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6 사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제자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7 그때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더니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8 그 순간 그들이 둘러보자 더 이상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그들 곁에 계셨다.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10 그들은 이 말씀을 지켰다. 그러나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저희끼리 서로 물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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