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에게 백만송이 성모님의 장미를!
축복과 천형(天刑)의 변증법, 코나투스 세세 콘세르우디(conatus sese conservandi)
- 연중6주 “그는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다.”를 중심으로
1. 하인리히 하이네, 「고백」
땅거미 앞세우고 저녁은 찾아오고/물결은 더욱 거세게 날뛰었다,/바닷가에 앉아 하얗게 부서지는/파도의 춤을 바라보고 있자니,/내 가슴은 바다처럼 부풀어올랐다./그때 너를 향한 사무치는 그리움이/나를 사로잡았다, 너의 아름다운 모습,/그 모습 내 주위 곳곳에서 떠돌고/어디에서나 나를 부른다,/어디에서나, 어디에서나,/세찬 바람소리 속에서나, 거친 파도소리 속에서나,/내 가슴의 한숨 속에서도./①나는 가벼운 갈대를 꺾어 모래 위에 썼다:/"아그네스, 나는 너를 사랑한다!"/하지만 심술궂은 파도가/그 달콤한 고백 위로 덮쳐와/그 말을 흔적도 없이 지워버렸다./나약한 갈대야, 먼지처럼 흩어지는 모래야,/사라지는 파도야, 난 이제 너희를 믿지 않겠다!/하늘은 점점 어두워지고, 내 마음은 더욱 날뛴다,/②나 이제 이 억센 손으로 노르웨이 숲에서/가장 커다란 전나무를 뽑아/에트나 화산의 불타는 분화구에/담갔다가,/불에 적신 그 거대한 펜으로/캄캄한 하늘에다 쓰리라:/"아그네스, 나는 너를 사랑한다!"/③그러면 매일 밤 그 하늘 위에서/영원한 불의 글자가 활활 타올라,/후대의 자손들이 대대로 환성을 지르며/하늘에 쓰여진 그 말을 읽으리라:/"아그네스, 나는 너를 사랑한다!"
하인리히 하이네의 「고백」은 한 개인의 사적인 사랑의 고백이 아니라, 사랑이 지닌 영원성에 대한 갈망을 노래한 것으로 읽을 수 있다. 이때 고백은 의지로 표출된 인간 본연의 본성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 파괴에의 저항을 담고 있는, 즉 자신을 존재하고자 하는 노력, 자신을 보존하고자 하는 선의지의 절정이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①거친 파도 속에서도./나는 가벼운 갈대를 꺾어 모래 위에 썼다:/"아그네스, 나는 너를 사랑한다!"/하지만 심술궂은 파도가/그 달콤한 고백 위로 덮쳐와/그 말을 흔적도 없이 지워버렸다./나약한 갈대야, 먼지처럼 흩어지는 모래야,/사라지는 파도야, 난 이제 너희를 믿지 않겠다!/
②나 이제 이 억센 손으로 노르웨이 숲에서/가장 커다란 전나무를 뽑아/에트나 화산의 불타는 분화구에/담갔다가,/불에 적신 그 거대한 펜으로/캄캄한 하늘에다 쓰리라:/"아그네스, 나는 너를 사랑한다!"/
③그러면 매일 밤 그 하늘 위에서/영원한 불의 글자가 활활 타올라,/후대의 자손들이 대대로 환성을 지르며/하늘에 쓰여진 그 말을 읽으리라:/"아그네스, 나는 너를 사랑한다!“
①에서 갈대로 모래위에 쓴 고백은 정서적 고백, 시간 속에서 명멸하는 유한자의 망각의 고백에 해당한다면 ②의 고백은 전나무를 화산의 분화구에 담갔다가 캄캄한 밤하늘에 쓴 불멸에 대한 갈구에 해당한다. 후자의 고백만이 ③에서 영원으로 수렴되고 후대의 자손들이 세세대대 읽을 수 있는 코나투스(Conatus)적 사랑이라고 이름 할 수 있다.
2. 코나투스 세세 콘세르우디(conatus sese conservandi-자기보존에의 코나투스conatus)
우리가 했던 사랑이 어떻게 영원 불멸이 되게 할 수 있을까? 또한 이 사랑을 가능케 하는 자신을 완전한 자신으로 존재하고자 하는 노력, 자신을 보존하고자 하는 노력은 어떻게 유한자에게 가능한 것인가?
스피노자 (1632년 - 1677년)는 「에티카」 (1677년)에서 코나투스 Conatus가 인간이 지닌 성향, 충동, 욕망으로 표출되며, 이 세가지 자기보존의 욕망이 고도로 오나성되면 쾌락이 되고 낮은 수준으로 완성되면 고통이 된다고 보았다. 정서적인 축면을 나타날 때는, 워룬타스(voluntas)로 몸과 마음에 연결되는 개념일 때는 압페티트스 (appetitus)로 자신을 보존하려는 노력은 코나투스 Conatus를 사용했다. 그는 이 말을 종합해 코나투스 세세 콘세르우디(conatus sese conservandi)(자기보존에의 코나투스conatus)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했다.
스피노자는 인간 최고의 의식은 궁극적인 원인을 아는 것, 곧 신에 대한 인식이고 인간의 실체는 유한자 뿐만 아니라 신의 영원한 부분이므로 영혼불멸은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 본성에 가깝다고 보았다. 근원적 원인은 신에게 있으므로 최고의 인식은 영원히 남기 때문에 영혼은 불멸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정리2: 서로 다른 속성을 소유하는 두 실체는 서로 간에 공통되는 어떤 것도 갖지 않는다.
정리8: 모든 실체는 본성상 무한하다.
정리15: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 안에 있으며, 신 없이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도 또 파악할 수도 없다.
정리29: 사물의 본성에는 어떤 것도 우연적으로 주어진 것이 없으며, 모든 것은 일정한 방식으로 존재하고 작용하게끔 신적 본성에 위해 결정되어 있다.
정리7: 각 사물이 자신의 존재 안에서 지속하고자 하는 성향(conatus)은 그 사물의 현실적 본질일 뿐이다.
정리15: 자기자신과 자신의 정서를 명석판명하게 인식하는 사람은 신을 사랑하몀, 자기자신과 자신의 정서를 더 많잉 ᅟᅵᆫ식할수록 더욱더 신을 사랑한다.
스피노자는 “무엇도 외적인 원인이 없으면 파괴될 수 없다”라는 자명한 진리를 설명하려고 할 때에 이 존재하고자 하는 노력, 자신을 보존하고자 하는 노력인 코나투스 Conatus」의 일반적 원리가 존재한다고 단언했다.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모든 것의 정의는 그것이 존재하는 것을 단언하고 있어, 부정할 것은 없다”라는 것은 자명한 것이었다. 이 자기 파괴에의 저항을 스피노자는 인간의 계속 존재하려는 노력이라는 말로 정식화한다. 또, 코나투스 Conatus는 이 힘을 나타내기 위해서 그가 가장 잘 이용하는 말이다. 스피노자의 세계관에서는, 이 원리는 모든 것에 적용 가능하고, 게다가 인간의 마음이나 도덕을 포함한 만물의 본질을 구성한다는 것도 세계에는 신이 만든 유한의 모델이 존재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스피노자가 「에티카」 (1677년)에서 코나투스 Conatus는 유한한 시간안에 존재한다. 물체가 존속하는 한 코나투스 Conatus도 존속한다. 스피노자는 물체의 힘을 증대하는 경향을 나타내는데 코나투스 Conatus라는 말을 사용한다. 모든 존재는 단지 정적으로 계속 존재하려는 것보다 오히려, 완전으로 향해 노력할 것이고, 게다가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있어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든가, 혹은 증대시킬 때, 그리고 그러한 때에만 그 활동을 실시한다. 또, 스피노자는 데카르트가 이전 사용한 것 같은, 기본적인 의미로의 관성을 나타낼 때에도 코나투스 Conatus라는 말을 사용했다. 사물은 외적인 힘의 활동 없이는 파괴될 수 없기 때문에, 운동과 정지도 교란시켜지지 않은 한은 무기한으로 계속 존재한다고 본 것이다.
스피노자는 흔히 이 코나투스의 고나점 때문에 결정론자라고 부른다. 인간과 자연은 시종 일관 갖춤의 법칙아래로 통일될 것임에 틀림없다고 믿었다. 스피노자는 마음, 지향성, 윤리, 그리고 자유가 물리적인 존재나 사건으로부터 되는 자연 세계와는 나누고 생각할 수 있는 이원론적인 억설을 부정한다. 그의 목적은 자연주의적인 골조/틀 아래에서 이러한 모든 것의 통일적인 설명을 주는 것으로, 그가 생각하는 코나투스 Conatus는 이 계획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활동이나 선택을 포함한 자연적 세계의 모든 사건은 피할 수 없는 보편적인 자연법칙에 따라서 결정되므로 인간은 완전하게 자연의 일부로 바라보았다. 스피노자는 표출된 불규칙한 인간의 행동을 사실은 자연으로, 코나투스 Conatus에 동기부여 당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 그 과정에서, 자유 의지라는 생각을 코나투스 Conatus, 말하자면 인간뿐만이 아니라 자연 전체에 적용할 수 있는 원리로 치환했다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행복은 “인간의 자기를 보존하려는 능력으로 귀착한다”라고 규정하며, 이 코나투스 Conatus는 인간 행복의 본성이라고 바라보았다.
3. <그는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다.> 마르코 1,40-45/마태오8,10=-4/루카5,12-16
Ⓐ그때에 40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하였다. 그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하였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41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42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43 예수님께서는 그를 곧 돌려보내시며 단단히 이르셨다. 44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45 그러나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께 모여들었다.
<그는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다.>라고 전하는 마르코 1,40-45은 공관복음(마태오8,10-4/루카5,12-16)에 함께 실려 있는 치유기적사화이다. 나병은 오늘날도 격리의 대상일 만큼 치명적인 천형에 속한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나병 치유기적 사화에 시간, 장소, 환자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나병환자와 예수님의 대화를 통해 익명의 치유기적사화를 넘어서는 보편적인 축복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이 축복은 단지 수동적인 은총이 아니고 나병환자의 적극적으로 살려는 의지, 자기를 보존하려는 의지의 발로로 보고, 거기서 표출된 행위를 통해 인간은 자신도 모르게 완전한 창조본성을 추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치유는 무엇이고, 믿음은 무엇이고, 복음 선포란 무엇인가?라는 삼중의 주제를 전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모든 치유기적사화를 통해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나라의 복음을 선포 하셨는데, 이제 천형을 앓던 치유된 나병환자가 예수님의 복음을 선포했다는 점에 방점이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복음을 선포할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치유받은 이들의 필연적 응답으로 바라본 것이다. 그렇기에 나병을 치유받았다는 결과 뿐 아니라 복음 선포의 과정이 참으로 아름답고,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치유받은 사람은 곧 복음 선포자"라는 이 축복의 명제는 ---와서- 무릎을 꿇고-하고자 하시면-그러자 바로 깨끗해 졌다 -떠나가서- 알리고 퍼트리고---라는 능동사의 연쇄로 이어진다.
(1)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하였다(40절)
수많은 나병환자 가운데, 어떤 나병화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하였다. 여기서 나병에 걸린 사람이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였다는 그 자체가 이미 사회의 금기를 넘어선 축복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성서에서는 문둥병 뿐 아니라 온갖 피부병도 나병이라고 칭한다. 1871년 노르웨이의 의사 한센에 의해 나환자의 결절 조직에 세균이 모여있는 것을 발견함으로써 발견자의 이름을 따 한센병이라고 병명이 불리기 까지 문둥병- 나병이라고 불렀다. 이 병은 21세기 오늘날에도 완치가 되지 않아 예방 의학 차원에서 격리치료를 하는 분리의 병이다. 일단 나병에 걸린 사람은 완치가 아닌 나병의 진행만 막는 치명적인 병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람이지만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한 저주받은 인생이나 다름없었던 그들은 자타가 천형이라고 바라보았기에,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나아가 병의 고침을 받는 과정 그 자체가, 예수님께 나아간 자는 누구인가? 라고 묻지 않을 수 없는 놀라운 일에 해당한다. 나병환자는 일정한 거주지에 살며 95미터나 45미처 떨어진 거리에서 자신의 육체적 부정을 외쳐야 하며, 그는 성읍이나 성전 등 공공의 장소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런 그가 예수님께 먼저 다가갔다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사회적 금기를 어기며 예수께 도움을 청한 그를 측은히 여기신 예수님이 손을 내밀어 그를 치유하신 사건은, 하느님 사랑의 무한과 연결되어 절대로 사람 앞에 나갈 수 없는 그가 예수님께 자발적으로 나아갔다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데 방점이 놓인다.
레위기에선 <부정한 사람은 진영 밖에 혼자 살아야 한다.>라고 나병화자의 사회적 축출의 실상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13,1-2.44-46)
Ⓓ“누구든지 살갗에 부스럼이나 습진이나 얼룩이 생겨, 그 살갗에 악성 피부병이 나타나면, 그를 아론 사제나 그의 아들 사제 가운데 한 사람에게 데려가야 한다. 그는 악성 피부병에 걸린 사람이므로 부정하다. 그는 머리에 병이 든 사람이므로, 사제는 그를 부정한 이로 선언해야 한다. 악성 피부병에 걸린 병자는 옷을 찢어 입고 머리를 푼다. 그리고 콧수염을 가리고 ‘부정한 사람이오.’, ‘부정한 사람이오.’ 하고 외친다. 병이 남아 있는 한 그는 부정하다. 그는 부정한 사람이므로, 진영 밖에 자리를 잡고 혼자 살아야 한다.”
그가 어떻게 사회적 축출과 격리의 벽을 넘어서 예수님께 갈 수 있는 힘은 무엇인가? 그를 파괴하는 병과 금기로 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그의 갈망은 어떻게 그 내부에서 촉발되었을까? 여기서 우리는 그의 나가감은 인간 본성의 고귀함-창조의 본성을 바라보게 한다. 그것이 인간이 지닌 생명의 코나투스라고 할 수 있다. 어떤 고통과 절망의 나락속에서도 그분을 향해 기어서라도 나아갈 수 있을 때, 그것 자체가 기적이고 믿음의 고귀함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때 한 인간이 겪는 고통과 절망은 그분이 내민 손을 잡을 수 있는 은총의 도구가 된다. 창조를 회복하는 하늘과 땅이 연결되는 순간이 된다.
그분께 나아간 사람들이 어떻게 치유라는 축복을 받게 되는지, 이어지는 행위인 <무릎을 꿇다>라는 것으로 구체화 된다.
(2) 그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하였다(40절)
우리는 언제, 누구 앞에서 무릎을 꿇나? 무릎을 꿇는 것은 패배의 백기인가?
익명의 그가 무릎을 꿇고---성서에서 무릎을 꿇다라는 행위는 경배하다는 뜻으로 행위 자체가 축복의 그릇이 된다. 마태오 복음은 (어떤 나병환자가)엎드려 절하며, 루카 복음사가는 (온몸에 나병이 걸린 사람이) 얼굴을 땅에 대고라고 전한다.
히브리어 동사 바라크(무릎을 꿇다, 축복을 빌다)는 창세기 73번, 시편 68번을 포함해 구약 전체에 330번 이상 나오는 단어다. 낙타를 쉬게 하다(창 24:11) 솔로몬이 무릎을 꿇다(역대기하 6:13) 주님 앞에 무릎을 꿇다(시편95:6) 정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복을 베풀다(창세기 1:22), 찬양받다(창세시 9:26), 축복하다(창세기 48:20), 복을 빌다(탈출기 12:32) 등으로 번역된다.
마르코 복음 사가는 <무릎을 꿇다>라는 행위동사를 통해 그분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는 그 자체가 지닌 축복을 우리에게 전한다. 성서에 무릎을 굻다(Kneel down)은 히브리어 동사 바라크(Bless)를 사용하여, 복은 주다라는 경배하다의 뜻으로. 이는 다른 사람을 무릎을 굻게 하는 것이 아니라, 혹은 나는 어떤 경우에도 무릎을 꿇지 않겠다는 방어가 아니라, 무릎을 꿇어야 할 대상 앞에, 즉 축복의 보고인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축복으로 넘어간다는 의미로 전이된다. 이어지는 일련의 행위들이 그를 뒷받침한다. 성서에는 무릎을 꿇다라는 행위가 330번 이상 나오는 것에서 축복의 그릇이 무엇인가를 추론하게 한다.
Ⓔ땅 깊은 곳들도 그분 손안에 있 고 산봉우리들도 그분 것이네. 바다도 그분 것, 몸소 만드시었ㄴ네. 들어가 몸을 굽혀 무릎 꿇으세. (시편95, 1-6)
Ⓕ땅 끝들아, 모두 나에게 돌아와 구원을 받아라, 나는 하느님, 다른 이가 없다. 내가 나 자신을 두고 맹세한다.(...)정녕 모두 나에게 무릎을 꿇고 입으로 맹세하며 말하리라. 주님께만 의로움과 권능이 있다(이사야45, 22-25)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취하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히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히=하셨습니다(필리비서2,1-11)
여기서 중요한 것은 히브리어의 축복이 다른 언어들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축복을 하는 사람의 행위를 기준으로 하지 않고 축복 받는 자의 자세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복을 받는 자가 무엇을 받을 것인지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축복은 하느님으로부터 시작되는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주님 앞에 무릎을 꿇는 우리의 자세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최후의 만찬 전, 세족례 때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기 위해 무릎을 꿇는 것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무릎을 꿇는 행위 다음에 이어지는 나병환자와 예수님의 대화에서, 무릎을 꿇는 외적인 행위안에 내포된 하느님과 나누는 인간의 대화라는 측면에서 누가 하느님의 대화상대가 되었습니까?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고 할 수 있다.
(3)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40절)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41절)
40절과 41절은 단지 나병치유기적 사화를 넘어서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적시한 대화구조라고 할 수 있다. 기도, 즉 신앙의 구조는 그분과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그 대화를 통해 우리는 믿음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믿는다는 것은 예수와의 상봉이고 이 상봉 안에서 세계의 뜻인 그분의 위격을 내 인격으로 체험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된다. <하시고자 하시면>은 치유를 원하는 이의 간절함을 너머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오직 당신 밖에 없습니다, 라는 신앙고백으로 넘어간다. 이는 예수님의 거룩한 뜻에 자신의 모든 문제를 내맡겼다는 기도의 예표라고 할 수 있다. <스승님께서 하고자 하시면-내가 하고자 하니> 이 대화는 쳔형을 앓고 있는 인간과 그런 인간에게 연민을 갖고 있는 예수와의 아름다운 만남이 어떤 영적 운율을 갖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라칭거추기경(베네딕토16세교황)은 『사도신경강해』에서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스스로 만들어 놓은 뜻은 궁극적인 뜻이 되어주지 못한다, 뜻이란 우리 존재가 전체로서 딛고 설 수 있고 그 위에 살 수 있는 바탕이란,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라야 한다. 그리스도적으로 믿는다는 것은 나와 이 세상의 바탕이 되어주는 뜻에 의존하고 이 뜻을 아무 두려움없이 딛고 설 수 있는 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스스로 만든 뜻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하기에 궁극적인 뜻이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어떻게 나병이라는 치명적인 병에 걸린 환자에게 이런 깊은 믿음이 가능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여기서 고통과 믿음의 관계를 다른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는 여백이 생긴다. 믿는다는 것은 고통의 이름을 아는 것이다. 물론 모든 이들이 겪는고통에서 믿음이 곧바로 연역되어 나올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들에게 사방이 막힌 상황 혹은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면서 가장 연약한 자기 자신을 붙잡을 수도 있고, 가장 고귀한 능력을 잡을 수도 있는 두 갈래의 길이 있다. 나병환자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천형이라 불리는 치명적인 고통에 처해있었다는 점에서 그에게 주어진 선택지 역시 오직 두 갈래의 길이었다. 그런데 신앙의 최상급에서만 발화될 수 있는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였다는 점에서 고통속에서 맞이한 빛의 세례에 그가 에워싸여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분께 고통을 개방했을때, 그 고통은 그리스도라는 빛 앞에 놓이게 된다. 그때 고통은 고통의 이름뿐 아니라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우리에게 그 심장을 열어준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여기서 믿음은 나는 무엇을 믿는다가 아니고 나는 너를 믿는다,는 의미가 도출된다. 너를 믿는다는 것은 인간 예수에게서 하느님을 만나고 바라본다는 의미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세상 끝날까지 함께 있겠다는 그분을 만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 예수에게서 하느님을 본다는 의미가 신앙인들에게 어떤 의미인가?
사랑의 출처를 아는 것이 사랑을 사는 것이다. 우리에게 온 사랑이 어디서 온 것인가를 안다는 것이 바로 축복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요한6, 32-33)
우리가 아버지와 맺는 관계는 이 우주와 우리가 맺는 관계를 바라보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맺어야 하는 유일한 실재관계는 아버지와의 관계이다. 그 유일한 실재관계를 알게 하기 위해서 아버지는 우리에게 당신 아들을 보내 주셨다. 당신 아들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창조된 모든 세계도 함께 주셨다.(창세기1장)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존재이유를 안다는 것은 아버지의 사랑이 나에게 어떻게 온 것인가를 바라보는 것이다. 이를 바라본다면 우리는 자신이 한 사랑에 생색내거나 자랑하거나 받은 사랑 앞에서 자존심을 방어하지도 기죽지 않을 수 있다. 바오로사도처럼 내가 할 바를 했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고, 내가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지 않는다면 길거리의 돌멩이가 전할 것이라는 비유의 의미를 알게 된다. 그때, 삶과 사랑이 가벼운 짐이 된다. 내가 사랑을 한다고 생각하니까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스스로를 의인화 하고, 행위로 그분의 축복을 딜하려고 하는 것이다. 받을 것이 없을만큼 부자도 없고, 줄 것이 없을만큼 가난한 이도 없다. 준다-받는다는 것을 오직 돈으로만 환산하기에 준자와 받은 자가 분리된다. 우리는 동시에 받은 자이고 주는 자이다. 우리는 오직 그분 사랑의 통로, 메신저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랑이 어디서 온 것인가를 바라보는 것을 아는 것이 선포하는 자의 필수 덕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때 우리는 이 세상의 가치관에 반하는, 혹은 이 세상의 가치관에 매몰되는 우리 각자의 치명적인 약함들(영적인 나병)을 뛰어넘을 수 있다. 예수의 고통과 나의 고통이 만나 고통의 이름이 부활로 넘어가는 마중물이 된다. 가장 무서운 고통은 고통조차 모르는 영적인 고통이다. 바로 그 고통의 이름이 부활의 여정임을 알게 될때, 우리도 그분의 만짐으로 깨끗해 진 것이다. 그분의 강생의 신비를 구체화하는 것이 바로 이 현존체험이고 그 구체적인 그분의 체험속에서 참을 수 없는, 막을 수 없는 선교와 전교의 출발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4)그러나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온전한 치유는 그 어떤 함구령으로도 막을 수 없다. 그렇기에 치유된 그는 선포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바오로 사도는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라고 우리에게 전한다. 그 권유는 우리의 생명이 하느님의 도구적 수단이라는 의미를 넘어서 우리의 행복이 어디에서 연유되는지 바라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곧 그분에게는 찬미가 필요없으나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이유다. 그분에게 드리는 것이 우리가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타자에게 주는 것이 곧 우리가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 안에서 주는 것과 받은 것이 같은 이유이다. 복음 선포는 바로 이 주고받음이 같음을 예표한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널리 알려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4,20) 만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내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1코린토9,16) 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나는 말하였다’라는 말씀이 성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2코린토4,13)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전하고 끝까지 참고 가르치면서 (2디모테오4,2)<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도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코린토 1서 10,31─11,1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
이를 N 뒤나는 『믿는 다는 것-신앙의 현상학』에서 복음 선포는 권고가 아니라, 신앙인의 필연적인 자질이라고 언급한다. 그가 하느님을 은총을 체험하였다면 어떻게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한다.
Ⓚ선포해야할 복음을 갖지 못하는 신앙인이란 있을 수 없다. 신앙인치고 자기를 사로잡은 진리를 전파하지 않으려는 자도 없다. 용기와 확신 이것은 신앙인으로서 갖춰야할 중요한 자질 중의 하나이다.
세상에 파견된 자는 그분에게서 온전히 치유받은 자다, 라는 명제가 성립하는 이유는, <그는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다.>라고 전하는 마르코 1,40-45이 이천년전에 있었던 어떤 익명의 나병환자에게 주어진 개인적인 치유기적사화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을 바라보는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도착한 사랑이 완전한 치유의 메시지를 지닌 것으로 바라본다면, 나병 치유기적사화가 지닌 은총의 메시지를 오롯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성서에 나오는 모든 사건들은 완성의 여정에 있는 오늘 나의 사건으로 치환해 바라볼 수 있을 때, 우리는 모든 것을 치유받은 파견자가 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 각자가 지닌 바오로의 가시와 같은 약함(영적인 나병 상태)을 축복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영적 변증법을 시도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의 생의 조건인 몸과 마음과 영혼을 통합해 온전한 믿음의 상태로 옮겨감은 곧 우리가 지닌 원래의 아름다운 창조의 본성을 되찾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라는 이 아름다운 대화는 <축복과 천형(天刑)의 변증법, 코나투스 세세 콘세르우디(conatus sese conservandi)>를 바라볼 수 있는 이들에게, 수많은 나병환자 가운데 익명의 어떤 이를 통해 전해진 “그는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다.”는 사건이 이천년에 있었던 일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은총사건임을 바라볼 수 있으리라. 그로인해 그 분 앞에 우리 자신의 영적 나병-받음과 나눔을 분리하는 왜소함을 개방하고 치유를 청할 수 있을 것이다. 온전히 그분에게 치유받은 자는 이 세상이 '하나Oneness'라는 사실을 자명하게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존재의 근원인 그분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을 수 있는 감사함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존재이유를 그리스도의 시선 '연민'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글을 마치며,
Ⓐ그때에 40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하였다. 그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하였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41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42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43 예수님께서는 그를 곧 돌려보내시며 단단히 이르셨다. 44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45 그러나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께 모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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