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실존의 배고픔을 넘고, 질투의 심리학을 건너, 빛의 존재론으로

나뭇잎숨결 2024. 1. 26. 10:19

 

 

 

 

남마리안나 수녀님께서! 감사합니다!

실존의 배고픔을 넘고, 질투의 심리학을 건너, 빛의 존재론으로

- 연중4주“예수님께서는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다”를 중심으로

 

 

 

 

 

1. 기형도, 「질투는 나의 힘」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 밖에 없어/ 저녁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 두고/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1989)

 

기형도의 「질투는 나의 힘」은 내가 나를 몰랐다는 통렬한 반성을 담고 있는 작품으로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와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라는 시구로 수렴된다. 화자는 자신의 아름다운 시간을 현실에 뿌리내리지 못한 ‘개’에 비유하면서, 가진 것은 한탄 밖에 없고, 청춘을 저녁거리마다 물끄러미 세워두었다고 뼈아픈 자화상을 토로한다.

 

롤랑 바르트는 『사랑의 단상』에서 <질투>는 결국 자신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자의 자학이라고 진단한다.

 

질투하는 사람으로서의 나는 네 번 괴로워하는 셈이다. 질투하기 때문에 괴로워하며, 질투한다는 사실에 대해 자신을 비난하기 때문에 괴로워하며, 내 질투가 그 사람을 아프게 할까봐 괴로워하며, 통속적인 것에 노예가 된 자신에 대해 또 괴로워한다. 나는 자신이 배타적인, 공격적인, 미치광이 같은, 상투적인 사람이라는 데 대해 괴로워하는 것이다

 

자신과 우정을 맺지 못하고, 자기를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질투의 근원은 무엇인가?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와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에서 알 수 있듯,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는 이의 자기 결핍의 외적 표출, 자신이 자신을 자신으로부터 추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네가 나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진정 모르는 것이 질투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을 알지 못하는데 자신을 사랑할 수 있을까? 자신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누군들 제대로 사랑할 수 있을까? 그런 맥락에서 모든 사랑은 결국 자기 사랑의 크기와 넓이와 깊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제도서관

 

 

 

2.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저물어야 그 날개를 편다.(헤겔)

Die Eule der Minerva beginnt erst mit der einbrechenden Dämmerung ihren Flug.

 

그렇다면, 자기와의 우정, 자기애의 진정한 출발점은 어떻게 가능할까?

 

모든 철학은 세상을 근심하면서 자신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함을 근심한다고 할 수 있다.

 

헤겔이 『법철학 강요』(Grundlinien der Philosophie des Rechts; 1820)에서 남긴 경구(警句).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저물어야 그 날개를 편다.(헤겔)에서 지혜의 결핍에서 그를 찾고 있다.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황혼이 저물어야 날개를 편다는 의미는 철학은 앞날을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현상이 일어난 뒤에야 비로소 역사적인 조건을 고찰하여 철학의 의미가 분명해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혹은 황혼을 시간에 대한 비유로 해석하여 '지혜와 지혜가 본격적으로 필요할 때는 세상이 어둠에 휩싸이고 인간성이 사라져갈 때'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를 헤겔은 지혜는 진리를 찾는 여정인데, 『정신현상학』에서 <빛-어둠- 나의 존재이유>에서 변증법으로 제시한다. ‘정신현상학’이란 일차적으로 ‘의식의 경험학’인 바, 이는 우리의 의식이 여러 가지 경험을 통하여 진리를 파악해 가는 과정을 서술하는 것이다. 진리가 나를 자유롭게 할 수 없을 때, 우리는 타자를 질투할 수밖에 없는 자신이 자신을 추방하는 자기추방은 필연적이라고 본 것이다. 헤겔은 정신이 감각적 확실성에서 출발해 과학적 오성[지성], 이성적 사회의식, 종교 등의 단계를 차례로 거치며 끝까지 올라가 끝내는 절대지(絶對知)인 완전한 자각에 이르는 도정을 서술하고 있다. 그때 우리가 자주 접하는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정신현상학』을 ‘인류의 철학적 자서전’이라고 부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실존은 빛과 어둠에서 나를 발견하는 과정을 치르게 된다. 이를 헤겔은 변증법이라고 명명했다. 辯證法Dialectic[1] / Dialektik 다양한 사상을 하나의 정의로 통합시키거나, 여러 가지 종류로 분할하여 그러한 사상의 본질을 파악하는 방법론으로 또는 헤겔 논리학의 고유한 체계를 의미한다. 헤겔 변증법은 그 체계적 방대함 때문에 정의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그러나 이것을 간략히 도식화한 트리아데(Triade), 또는 정반합이라고 불리는 이 진리에 이르는 과정은 직관적으로 그 체계를 간략화하기엔 적합한 공식이다. 트리아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명제(테제, thesis)와 반명제(안티테제, antithesis)를 사용하여 이 모순되는 주장들의 합명제(진테제, synthesis)를 찾거나, 최소한 대화가 지향하는 방향의 질적 변화를 일구어내는 것으로, 판단의 부정을 추리에 의해 긍정으로 바꾸는 것이 이른바 헤겔의 변증법이다. 그러므로 개념은 모순을 지니고 있다. 이렇게 해서 주어의 논리를 전개하는 것이 그 목표가 된다. 이는 주어가 술어 속에서 부정되는 데 그치는 술어의 논리가 아니라 그 부정을 통해서 주어를 회복하려는 논리이다. 따라서 나라는 주어가 회복될 때까지 모든 진리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며, 이 과정이 더 이상 과정이 아니게 되는 순간에 비로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진리의 절대지가 나타난다. 이때 주어와 술어, 실체와 주관, 대상과 인식은 완전히 일치한다. 이 변증법적 과정의 전체적인 전개는 넓게 보자면 역사이자 의식의 편력이며, 개인으로 보자면 나의 자기형성 과정이라 할 수 있다. 헤겔의 통찰은 주인과 노예의 도독이라는 명제로 수없이 많은 논의로 이어진다.

 

[질문하는 인간 호모 퀘스천즈(Q)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 ‘본질과 존재의 변증법’으로](2022년 연중18주에서)

 

내가 나를 알 수 없다는 것은 내가 진리로 인해 나를 자유롭게 하지 못했다는 고백이다. 바오로 사도는 그것을 탐욕이라고 불렀다. 내가 내가 되려고 하지 않고 타인이 되려고 하는 것은 탐욕이기에 그것은 자기 '우상숭배'라고 규정하고 있다.

 

탐욕은 인간이 지닌 욕망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욕망 자체가 우상숭배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욕망은 인간 자신에게 주어진 실존을 끌어가는 추동의 힘, 순수에너지이기 때문이다. 즉, 욕망 그 자체는 순수한 어떤 동인이라고 할 수 있다. 욕망이 궤도를 벗어나 질주할 때, 욕망은 탐욕이 된다. 그때, 탐욕은 물신주의를 낳는다. 물신주의는 재물이 신의 자리를 대체한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생명과 목숨과 대척점에 놓여 있다고 보는 것이다. 물신주의는 죽음과 닿아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티로, 시돈, 벳싸이다, 카파르나움, 소돔과 고모라, 이런 특정 지역에서 그분의 축복과 경고가 어떤 상황에서 있었는지 이미 알고 있다. 바오로 사도가 탐욕을 우상숭배라고 지칭할 때, 그 탐욕은 세 방향에서 거론된다. 즉 육체적, 정신적, 물질적인 방면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질투의 물질성이다.

 

그런데, 그 모든 탐욕을 경계하되, 특히 물질적인 면에서 탐욕을 목숨과 생명의 대척점에서 바라보는 이유가 무엇인가? 재물이야말로 영원한 것과 영원하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를 극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고, 그것은 자기 존재이유를 물질에서 찾으려 한다는 점에서 재물 그 자체가 아니라 재물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영원과 영원 아닌 것으로 갈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탐욕이라는 우상숭배를 경계하여라”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탐욕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탐욕(貪慾)은 대부분의 종교에서 악의 근원으로 보는 7대 죄악 중 하나로 7대 주선에서 권하는 <자선, 선행, 절제>와 반대 개념으로 쓰인다. 또 분노와 무지와 함께 ‘삼독’으로 불리기도 한다. 사람이 진정으로 알아야 하는 것을 모르는 무지가 탐욕과 분노의 근원으로 보기로 한다. 사람이 진정으로 알아야 하는 <상생의 원리>를 모르는 것이 삼독으로. 이 삼독은 모두 나의 욕망의 과잉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사물의 존재 원리를 이해할 수 없는 (후안)무치와 무지에서 비롯된다고 보고 있다. 무치와 무지가 나에게 맞으면 욕망은 탐욕으로 치닫고, 나에게 거슬리면 분노로 표출된다고 본 것이다. 탐욕은 <상생의 고리>를 끊는 것으로 그 자체가 이미 죽음의 상태라고 본 것이다.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이 명제를 질문으로 바꿔본다면)------------->“욕망은 어떻게 탐욕이 되는가?”---욕망은 어떻게 결핍을 낳는가?--->결핍은 어떻게 질투를 낳는가?

 

질투를 이해하는 것은 탐욕을 이해하는 것과 그 뿌리가 같다. 이는 다른 말로 거짓 욕망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탐욕의 뿌리가 욕망이기 때문이다. 탐욕은 그 뿌리에 <결핍, 요구, 욕구, 욕망>이라는 실존의 '충족이유율-배고픔'이 내재해 있다. 어떤 사람도 한순간에 탐욕의 화신으로 이 세상에 던져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를 '의식의 자립성'과 관련하여 정신과 물질의 충돌, <주인의 도덕과 노예의 도덕>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사회주의 이념인 유물론의 단초를 제공하기도 하지만,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통해 <내가 욕망하는 것은 타자의 욕망>이라는 대리충족의 욕망이론을 낳기에 이른다.

 

①주인의 자립성이란 다만 사물을 가공하는 노예에게 떠맡겨버리는 것이다. 주인이 성취한 의식은 자립적인 의식이 아니라 오히려 비자립적 의식에 지나지 않는다.(헤겔, 『정신현상학』 한길사, 임석진 역, 2005)

 

헤겔은 정신과 물질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가를 <주인과 노예>의 도덕으로 규명하려 했던 사유의 첨탑이었다. 인류 역사는 헤겔 이전과 헤겔 이후로 갈라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헤겔을 철학사에서 선험론과 경험론을 넘어선 관념론자로 분류하지만 헤겔은 그 어떤 철학사조에도 집어넣을 수 없는 그냥, <헤겔철학>이라고 해 두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너무나 다방면으로 그는 인류역사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헤겔이 말한 <주인과 노예>의 도덕을 이해하지 않고는 오늘 글의 주제인 <탐욕>에 대해 <천당 가고 싶으면 탐욕을 내려놓아라>, <자유롭고 싶으면 탐욕에서 벗어나라>는 교조적 동어반복을 할 뿐이기 때문이다. 자기 삶으로 스며들지 못한 그런 동어반복을 J가 원할까?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 없지만 빵 없이도 살 수 없다. 빵과 사랑의 관계를 아는 것이 주체다. 그것이 헤겔이 <주인과 노예>의 도덕을 쓰게된 이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게될 <사랑과 빵>의 문제에 대해, 헤겔은 <자아<--->비아>에서 '주체'의 변증법으로 통합하라는 가설을 제시한 것이다. 그렇다면 헤겔에게서 나라는 주체는 어떻게 만들어 지나? 나라는 주체란 생동하는 실체 즉 현실적 존재여야 한다. 주체는 동일률에 의해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자신을 정립하는 운동이어야 한다. “스스로 자기를 타자화하는 가운데 자기와의 매개”를 행해야 한다. 자신을 타자화하는 분열 과정을 거쳐 회복된 동일성 즉 “밖으로 향하면서 곧 다시 자기 자체 내로 반성 · 복귀”한 동일성만이 진정한 주체이자 나의 실체라고 보았다. 이것이 진리라고 본 것이다. 헤겔은 나, 주체, 자아조차도 대립과 통일의 산물이어야 했다.

 

여기서 결핍은 질투를 낳게되고 질투는 결핍을 공고히 한다는 <주인과 노예>의 도덕이 무엇인가? 우리 자신안의 두 자아다. 주인은 노예시장에서 사들인 노예에게 자신의 삶의 모든 물질적인 것을 가공-생산하게끔 주문하고 동물적으로 노예를 길들인다. 그리고 자신은 노예가 노동하는 동안 '자립적인 의식'만 기르면 된다고 생각한다. 노예는 동물적인 노동을 감당하면서 주인을 위해 오직 물질을 생산-가공하는 동물적인 상태로 생명을 유지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노예는 주인을 욕망하기에 이른다. 주인이 매일 그토록 갈망하는 것이 <자립적 의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노예는 주인의 그 정신을 흠모하다, 드디어 자립적 의식을 지닌 주체로 각성되기에 이르고, 주인에게 죽음을 무릎쓰고 부당함에 대해 항거하기 시작한다. 노예가 담당했던 물질의 가공-생산하는 일은 주인이 할 수 없는 일이다. 노예는 주인이 갖고 있는 자립적 의식을 가질 수는 있지만 주인은 노예가 담당하는 그 육체노동을 할 수가 없다. 여기서 주인은 노예를 버릴 수도 곁에 둘 수도 없는 딜레마에서 서서히 각성된 노예를 두려워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노예에게 자신의 지분을 나눈다. 노예를 건드리지 않을 만큼 조금씩 양도하게 된다. 자신의 주체적인 의식이라는 것이 노예가 없다면 영위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도 없지만 정신만으로도 살 수 없다는 것을 주인은 안 것이다. 정신(주인)과 물질(노예)의 이 변증법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순수이론이었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영국의 노동자-자본가를 모델로 이 정신적인 <힘의 의지>를 정:노동자(노예)<-->반:자본가(주인)로 끌어들여 합: 사회주의 이론을 만들게되고, 그것을 레닌은 정치적 이념으로 받아서 실천한다.

 

②우리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알렉상드르 코제브, 『역사와 현실 변증법』, 설현영 역, 한벗, 1981)

 

헤겔의 『정신현상학-헤겔 독해 입문』의 연구자인 A. 코제브는 20세기 프랑스 지성사에 큰 영향을 미친 사회-철학자다.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연구하고 강의하면서 노예와 주인의 의식이 전도되는 지렛대인 자립적인 의식이 도출되기도 하지만,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노예는 주인을 보고 주인의 주체적인 의식을 욕망하면서 닮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 주인은 노예를 보면서 노예의 거짓 추앙일지라도 그것을 갈구하는 자신을 보고 그런 존재라는 환상을 갖기에 이른다. 그러면서 둘은 공존의 존재라는 또 다른 합을 도출한다고 보았다. 노예가 없다면 주인도 없고, 주인이 없다면 노예도 없는 상태에 이른다는 것이다. 주인은 처음에 노예를 쉽게 갈아치워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어떤 노예의 노동에 의해 삶의 질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노예 역시 자립적 의식을 갖게되면서 그동안 자신이 했던 노동을 경멸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다시 주인과 노예의 입장은 뒤집힌다. 여기서 주인과 노예는 엎치락뒷치락 하면서 종속적인 삶을 살게되는 공식이 만들어진다고 본 것이다. 코제브는 이를 연인과의 관계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내가 연인을 사랑하기 보다는 연인이 나를 더 사랑해주기를 원하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우리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욕망이론의 초석을 놓는다. A가 먼저 B를 사랑했는데, 어느 순간 B는 A가 없으면 살 수 없는 존재가 된다는 역삼각형의 변증법을 도출한 것이다. 이것은 당시 그의 강의를 듣던 조르쥬 바타유, 메를도 퐁띠, 르네 지라르, 앙드레 브르통, 자크 데리다, 미셜 푸코, 자크 라캉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특히 주인-노예의 해석은 라캉의 욕망이론에서 <거울단계의 모방욕망>이론을 낳기에 이른다.

 

③자신이 욕망하는 것이 진실로 자신이 소망하는 것인지, 소망하지 않는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 ‘주체’는 다시 태어날 수 있어야만 한다. (자크 라캉, 『에크리』, 새물결, 홍준기 역, 2019)

 

라캉은 프로이드와 코제브의 영향을 받으면서 욕망은 항상 요구를 넘어서서 요구 이전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욕망이 요구를 넘어서 존재한다는 것은 욕망이 요구와 욕구를 초월하며, 욕망이 충족된다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탐욕이 왜 만들어지는지 알 수 있다. 욕망의 열광을 모방한 요구는 욕망의 토대가 되는 존재의 근본적인 결여를 상기시킨다. 그러므로 욕망은 늘 요구의 공격을 받는다. 즉 욕망은 요구에 의해서 심리적으로 점령당한다. 요구에 의해서 욕망은 또 다른 것을 욕망하기 위해 끊임없이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요구도 욕망을 완전하게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라캉은 모든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라는 그 유명한 명제를 도출하기에 이른다. “욕망이란 욕망에 대한 욕망이다. 즉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예컨대, 거울단계의 아들은 어머니의 사랑을 놓고 아버지와 경쟁한다. 아들은 자꾸 아버지의 스타일을 흉내 내거나 아버지를 미워한다. 여기서 아버지 살해의 오이디푸스 신화가 등장한다. 그러나 아들은 성장하면서 어머니의 사랑이 완전히 자신의 요구를 채워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새로운 대상을 욕망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사회적으로 성공한 아버지다. 아들은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아버지의 욕망을 욕망하게 된다. 그런데, 거울 단계를 지난 아들은 아버지의 욕망이라는 것이 우물안 개구리의 욕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아들은 여기서 아버지의 욕망에서 벗어나 세상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기에 이른다. 아버지의 욕망을 능가하기에 이른다. 아들은 욕망이 집대성된 물신주의를 낳고 모든 종교에서 삼독으로 규정하는 탐욕의 화신이 된다. 스스로 자신의 신이 되어버린다. 탐욕의 두려움을 쾌락이 마비시키기 때문이다.

 

④욕망은 결여가 아니라 그 자체로 생산적인 것이다(들뢰즈, 『앙띠-오이디푸스』, 최명관 역, 민음사, 1994)

 

헤겔-코제브-프로이드-라캉으로 이어지는 모방욕망은 들뢰즈에 이르러 욕망을 결여로 볼 수만은 없다는 <생성이론>으로 갈라진다. 욕망을 종교와 윤리, 심리학에서 해방시키려 한다. 실존주의의 근거다. 그렇다면 욕망은 왜 탐욕이란 악으로 보편종교의 3대 악이자 삼독의 원흉으로 표상되는가? 이는 욕망이 들뢰즈가 간파한 대로 생성의 이론에 머물지 않고, 요구를 감당하지 못하는 욕망이 탐욕으로 넘어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욕망이 요구와 욕구를 감당하지 못하고 탐욕으로 넘어가는 구체적 현장을 소유의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신을 대체할 물질에 대한 우상숭배, 물신주의라는 끊을 수 없는 고리를 인류는 낳기에 이른다. 존재 자체로 자신의 존재의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재물로 존재의의를 바라보기에 이른 것이다. 물질적 욕망은 쾌락원칙과 동행하여 쾌락이 존재를 대체하게 된 것이다. 재물이 많으면 훨씬 쾌락적인 삶을 살 기회도 많다. 본능은 쾌락의 극한을 맛보려 한다. 그뿐 아니라 물신주의와 쾌락주의는 세상 권력에 의해 보호를 받기조차 한다. 자신이 주인의 위치에 있다는 착시현상에 방점을 찍게된다. 자신의 탐욕에 도취된다. 신이 들어설 자리가 없어진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탐욕을 우상숭배>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여기서 묘한 현상이 벌어진다. "모든 탐욕을 경계하라"는 J의 언명은, 물신주의에 길들여진 어떤 이들에게 좋은 말씀으로 밑줄이 그어진다는 것이다. 나하고는 상관없는 좋은 말씀으로, 추종과 믿음이 섞이는 순간이다. J를 믿는 것이 아니라 J의 추종자가 된다. 추종은 거룩한 취미와 다르지 않다. 그런데 그 거룩한 취미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영원한 것과 영원하지 않은 것, 합쳐질 수 없는 두 세계를 넘나드는 것이다. 차라리 <신은 죽었다>라고 물신주의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그래도 신은 있다>라는 물신주의의 이쪽과 저쪽을 넘나드는 신인류가 탄생한 것이다. 왜 물신주의라는 쾌락을 숭배하면서 동시에 영원한 생명을 꿈꾸게 되는가?에 대해 질문하게 되는 부분이다. 그리고 이것이 인간을 이해하는 변곡점이다.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도덕에서 인간이 정신과 물질의 충돌을 어떻게 다루려고 고뇌했는지 소략해 살펴보았다. 또 코제브를 통해 인류 역사가 빵의 시대에서 정신의 시대로 오락가락 하면서 둘의 공존을 모색했으나, 결국 인간은 라캉의 통찰처럼 욕망과 쾌락과 힘에의 의지가 뭉쳐지면서 물신주의로 흘러간다는 사실을 바라보았다. 그럼에도 인간에게는 일말의 향수가 문신처럼 남아서 물신주의자이면서 동시에 신을 믿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영원하지 않은 삶의 방식으로 영원을 꿈꾸는 아이러니는 인간의 심연, 혼란 그 세 측면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어떤 <두려움-실존에 대한 두려움과 구약의 백성들처럼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에 포위당해 있으며, 한편으로 <자기원인>을 그리워하고 있는 존재이며, 다른 한편으로, 욕망은 알아도 <영원은 모른다-예수님의 사랑을 모른다>고 할 수 있다. 두려움의 신에 끌린 것이지 사랑에 끌린 것이 아니기에 그렇다. J에게 끌리기는 했는데 J의 사랑을 할 수는 없다. 이 딜레마 속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그 무엇인가를 찾아서 헤메고 있는 중이라고 할 수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와 그 연구자들은 이런 딜레마에서 해방되는 길을, 사물이라는 실존의 껍질을 뚫고 들어가서 만나는 <존재>만이 우리가 그토록 찾아헤메는 <순수현실태>라고 바라보기도 한다. 많은 성인들의 고백처럼, 당신 안에서 쉬기까지 우리는 그 어떤 휴식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바라보게된 바로 그 지점이 <순수현실태>라는 것이다.

 

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실존의 껍질에 불과한 本質이라는 표피를 뚫고 들어가서 存在의 순수현실태를 찾아내었다”(E.질송, 『토마스트 실재론과 양식비판』, 서광사, 이재룡 역, 1994)

 

이에 대해 루시 멜러리는(톨스토이, 『인생독본』에서 재인용, 박형규 옮김, 문학동네, 2020) 생명의 법칙에서 그것을 다르게 표현하고 있다.

 

 

⑥생명의 법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을 만든다는 것이다. 원인은 보이지 않지만 결과는 눈에 보인다. 원인은 무한하지만 결과는 유한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은 모든 힘의 원인을 믿는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인정하는 사람은 자신이 쓸모없고 무익한 죽음이 예정된 덧없는 존재라는 의미다.

 

<존재>를, 모든 있음의 원인으로, 원인이 세상에 드러난 결과를 <본질>로 설명하는 이런 이론들의 최종 귀결점은 왜 인간은 눈에 보이는 물질이라는 유한한 것을 추구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동시에 꿈꾸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존재와 본질>의 변증법이 생기게 된다. 그것은 <형상과 담론>, <정신과 물질>의 변증법과 비슷한 맥락이다. 존재인 "있음"은 비존재인 "있지 않음"이라는 것으로만 이해될 수 있고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아닌 것과의 관계속에서만 나를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탐욕'은 '비움' 속에만 설명되기 때문이다. 이렇듯, 말씀이 사람이 되신 강생의 신비는 모든 질문에 대한 답에 해당한다. 그래서 J는 모든 탐욕을 경계하라고 이르신다. 남은 문제는 어떻게? 경계하라는 것인가? 를 찾는 일이다. 그것이 우리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찾는 길은 우리의 실존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다. 질문하면 그 답을 들을 수 있다. 들으면 그 길을 갈 수 있다. 또한 들으면 말해야 한다. 말할 상황이든 말할 상황이 아니든, 말해야 한다.

 

위에 인용문들에 나오는 헤겔, 코제브, 라캉, 들뢰즈, 질송, 루시멜러리는 세계와 인간과 신에 대해 모두 질문하고 질문한 사람들이었다. 누군가 내려준 답을 보고 다 안다고 고개를 끄덕인 이들이 아니었다.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실존의 숙제-<빵과 정신>의 영역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본질적인 그 무엇(나의 존재이유)을 찾으려고 세상과 세상 너머를 뚫고 들어가 찾은 답을 세상에 투척하듯, 혹은 뛰어내리듯 던진 것이다. 왜 탐욕이 생명과 목숨과 대척점에 있다고 볼 수 있는지, 즉 탐욕으로는 즉 눈에 보이는 물질의 부유함으로는 결코 영원한 생명에 도달할 수 없는지를 바라보게 된 것이다. 수단이 목적이 될 수 없다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재물 혹은 물질의 복은 분명 축복이다. 그러나 그것이 탐욕으로 인해 재앙의 도구-상생의 고리를 끊는- 가 된다는 것을 J는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왜? 모든 인간이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인류는 무엇이 진정한 행복인지에 대해 모든 세대, 모든 공간에서 누군가는 그것을 계속 질문하고, 고민하고, 그가 바라본 것을 그 시대의 언어로 말하고 또 말했다. 어떤 본질을 본 사람들은, 혹은 들은 사람은 말해야 했다. 먼저, 들은 그 자신을 위해서라도 말해야 했다. 듣던지, 듣지 않든지 말해야 했다. 말하는 자신이 그 말과 괴리가 있음을 알 때도, 그 쓰라림을 감당하면서라도 말해야 했다. 모든 탐욕은 그 근저에 욕망이란 이름의 생존에 대한 두려움과 쾌락주의가 있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실존의 두려움을 쾌락으로 마취시킨 것이 물신주의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곳에서 결핍의 아버지가 나오고 질투라는 아들이 태어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풍랑이 치는 파도 위를 걸어가는 것과 다르지 않다. 어쩌면, 물질과 정신이라는 풍랑이 치는 호수 위를 건너는 것이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호수 위를 걸어가면서 물에 빠졌다는 것은, 물질과 정신의 균형감각을 잃은 상태를 상징한다. 이는 자기결핍이 낳은 질투의 물질성에 자신을 넘겨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코 복음사가

 

 

 

 

3. <예수님께서는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다.> 마르코 1,21ㄴ-28

 

 

 

그들은 카파르나움으로 갔다. 21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22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23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그가 소리를 지르며 24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25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26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27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이게 어찌 된 일이냐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며 서로 물어보았다. 28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

 

<예수님께서는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다.>라고 전하는 마르코 1,21ㄴ-28(루카4, 31-37)은 가파르나움의 하루라는 이름이 붙여질 정도로 복음사가의 치밀한 사건 구성을 통해 <하느님 나라>가 무엇인지를 구체화시킨다. 예수님과 율법학자들과의 가르침의 비교, 그리고 구마이적사화를 통해, 예수님 자신이 하느님 나라라는 것을 보여주신 이 복음은 말씀의 권위에 대한 놀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진정 하느님 나라의 복음(빛)을 경험했는가를 묻는다고 할 수 있다.

 

⒜카파나움에 대한 기적과 그 이후, ⒝더러운 영에 걸린 사람의 상태, ⒞권위를 상실한 율사들의 가르침 ⒟악령들린 사람들을 치유하지 못했던 제자들의 상태, 등을 종합해 <그 많던 사탄은 어디로 간 것일까>를 성찰해야 할 듯하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다.>라고 전하는 마르코 1,21ㄴ-28 카파르타움, 안식일, 성전, 치유기적사화를 통해 말씀의 권위가 무엇인가를 성찰함과 동시에 나는 세상의 소금이고 빛인가를 동시에 바라볼 수 있겠다.

 

카파르나움은 마르코복음에서 세 번 언급되는 곳으로(1,21/ 1,29/2,1/9,33) 네 제자를 부르시고 베드로의 집이 있는 곳이라는 점 등을 통해 공생활 초기에 예수님의 주 활동지였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이 기적을 가장 많이 베푼 곳으로(마태오11,23/루카10, 13-15) 코라진과 베싸이다와 함께 카파르나움은 회개하지 않은 고을의 대명사로 불리우는 역설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이것은 예수님의 기적에 환호했던 이들 안에 내재한 자기결핍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파악할 수 있는 단서이다. 아멘! 할렐루야! 호산나!를 외치던 사람들이 어떻게 저 사람을 십자가에 처하라고 외치게 되는지 그 분노의 근원을 파악할 수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성 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소돔에서 일어났드라면 그 고을은 오늘까지 살아 잇을 것이다.

 

이어지는 키워드인 안식일과 성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당시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총체적인 경침라고 할 수 있다.

 

안식일(마르코2,23-3,6/마태오12,1-14/루카6,1-11)은 율사들의 가르침이 왜 권위가 없고, 본질에서 벗어났는지를 바라볼 수 있는 중요한 관점의 비틀림이 시작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27-28)안식일에 좋은 것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3,4)

 

안식일 규정은 성전 정화(마르코11,15-19/마태오21,12-17/루카19,45-48/요한2,13-22)와 연결하여 성전의 근본적인 방향을 설정한 중요한 테제에 해당한다.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다.

 

복음에 나타나는 기적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 기적을 이루게 되는 근본원리라고 할 수 있다. 마르코복음에 실려있는 이적사화는 18편이나 수록되어 있고, 구마이적사화4편, 치유이적사화8편, 소생이적사화1편, 자연이적사화5편 등이 실려있는 데 카파나움은 하루에 낮(빛)에 해당하는 구마이적사화를 통해 왜 예수님의 가르침이 권위가 있는지, 단지 율사들의 가르침과의 비교에 그치지 않고, 21세기 <그 많던 사탄을 어디로 갔는지>를 추론하는 중요한 영적 포인트가 된다.

 

안식일과 성전은 영적 자유에 대한, 빛과 어둠. 창조의 사랑에 대한(창세기1장, 요한복음1장) 포괄적인 방향설정에 해당한다. 에수님의 정체성과 나의 정체성의 어떻게 연결되는지, 여기에 구마이적사화가 놓여있다고 할 수 있다.

 

구마이적사화의 중요한 키워드인 함구령에 대해서- 예수님은 평소에 당신 신분이 드러나는 것을 꺼리셨다. 더러운 영들에게 내린 함구령(1,24,34/3,12) 기적으로 치유된 이들에게 내린 함구령(1,44/5,43/7,36/8,26)제자들에게 내린 함구령(8,30/9,9)등은 단순히 메시야 비밀사상이 아니라 기적사화가 갖고 있는 파급효과가 예수님의 공생활을 저지할 정도로 그만큼 컸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복음작가에 따라 달리 쓰였던 더러운 영은 유대식 용어이고, 악령은 헬라식 용어로 주로 제의적 부정에 관련해서 쓰인다, 사탄는 악마적 힘과 연결되어 쓰이는데 존재의 본질은 어둠이라는 측면에서 동일하다. 사탄이라는 표현은 하느님이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베드로에게도 썼던 용어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구마이적사화의 현재적 의미가 연결된다고 할 수 있다. 

 

또 예수님을 모함해 베엘제불에 들렸다, 혹은 미쳤다, 라는 표현 등은 모두 성령의 임재를 모독하는 진정한 독성죄에 해당한다는 점에서(마르코3,20-30/마태오12,22-32/루카 11,14-23/12,10) 신성모독죄로 처형당한 그분의 행적이 카파르나움의 표징안에 집약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공관복음에는 구마이적사화가 등장하지만 요한복음에는 이 구마이적사화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마르코복음사가가 공생활의 초반에 이 구마이적사화를 중요하게 다룬 이유와 요한복음 1장에서 빛과 어둠의 대립을 언급한 것이 그 맥을 같이한다는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다.

 

구마와 치유기적사화는 근원적으로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예수의 권위와 권능을 드러내고, 하느님나라가 이미 우리 안에 현존하고 있으며, 복음이 참됨을 실제로 보여준 사건이다. 모든 이가 지닌 인간의 존엄성과 온전성을 회복시키려는 것이 하느님 나라의 근본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에수님 시대에 그렇게 많던 사탄이나 더러운 영은 어디로 간 것일까?

 

 

 


가파르나움 회당에서 Mark 1:21-28/Luke 4:31-37

 

 

 

예수님 공생활 벽두에 나오는 카파르나움-안식일-회당-성전이라는 키워드는 24절, 25절, 27절과 연관되어 예수님 시대애 그렇게 많던 더러운 영이나 그 많던 사탄(Satans)은 어디로 간 것일까?를 생각해 볼 차례다. 

 

사탄은 그리스도교에 등장하는 적대자, 원수, 음해자, 유혹자, 분리자 등으로 쓰인다. 창세기, 욥기, 요한 묵시록에서 주로 나온다. 이를 단순히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에 복종한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권위가 인간에게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 초점이다. 카파르나움의 구마이적사화가 일반가정이나 공공장소에 벌어진 사건이 아니라 성전에서 그것도 안식일, 가파르나움에서 벌어졌다는 것에 초점이 놓여있다. 어떤 사람의 겉모습에서는 그가 어떤 영을 지녔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과 율사들이 가르치는 내용의 차이에서 권위의 여부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24절에서 추론할 수 있다. 율법의 근본정신이 애주애인이라는 것을 율사들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앎이 권위를 지니지 않았다는 것은 단순히 아는 것은 신앙에서 중요하지 않다는 관점으로 접근하는 것은 신앙의 여정에서 그 무엇보다 위험한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성서에 나오는 사랑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본능으로 할 수 있는 그런 사랑이 아니다. 사랑을 모른다는 것은  에로스나 필리아가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애주애인의 아가페를 모르는 것이기 때문이다(1코린토13장)

 

성서에서는 수없이 나는 너를 안다-나는 너를 모른다는 설정이 등장한다. 스스로 자기선택과 결정, 자기처분의 결과로 행복과 불행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특히 가상칠언은 그리스도인들의 앎의 정점을 시사한다는 점에서 그를 추론할 수 있다. 존재하기(앎)가 행하기(표출된 삶)를 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이다.

 

예루살렘 딸들아, 나 때문에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 때문에 울어라(루카23,28)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주십시오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43)

 

예루살렘 부인들이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했지만 그들이 바라보지 못했던 것은 진정 울어야 하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모르는 것이지 육체가 당할 고통이 아니었다. 나아가  예수님 당신을 못박는 자들을 위한 용서의 기도-저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는 행위가 무엇인지 모르니 용서해 달라는 것에서 <모른다>는 것이 어떤 귀결점으로 돌아가는지를 바라본다면 앎이 사랑의 대척점이란 것이 얼마나 위험한 접근인지 바라볼 수 있다. 사랑의 대척점은 나는 그분을 모르고 그분이 한 사랑을 모른다는 것이다. 주님주님 부른다고 다 하느님 나라에 갈 수 없다는 것 이  이를 대변한다.

 

그런 맥락에서 더러운 영에게 내린 함구령은 오늘 우리가 빛인지 어둠인지의 측면에서 바라보아야 할 성찰의 메인 포인트에 해당한다. 더러운 영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았다. 그런데 그 정체성을 먹고 소화시킨후  타인에게 알려주어야 한다는 것을 망각했다는 것이 초점일 것이다. 이미 알고 있는 사람에게 그것을 알려줄 필요가 없다. 더러운 영이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았다는 것이, 하느님과 대척점에 있다는 사실이 신앙에서 앎은 필요없다는 인과를 성립시키지 않는 이유다. 진정한 앎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은 진리의 제1 수혜자가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망각한 것이다. 진리를 무엇보다 먼저, 자신이 말씀에 머무르지 않고 세상을 번화시키겠다는 선생컴플렉스가 먼저 작용하면 그때 말씀은 말이 된다. 자기가 먹지 않은 밥을 타인에게 권하는 것이 된다. 어둠이 된다. 메시지와 메신저를 착각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만나는 모세가 내려준 것이 아니라 하늘이 내려준 것이라는 사실을 착각하는 이유다. 사랑의 출처가 어딘지 분명하게 안다는 것이 빛으로 가는  첫 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네가 한낮에 대로에서 외친 말을 골방에서 너는 어떻게 지키고 있는가?  이 말이 메신저들의 성찰 노트 첫문장이다. 자세다. 자신에게서 발설되는 모든 말은 1차적으로 자신이 수신자라고  생각하면 된다. 자신이 수신자가 되지 않은 말씀은 그냥 좋은 말일 뿐이다. 누에가 뽕잎을 먹고 실을 뱉아 비단을 만들듯, 자신이 먹고 소화시킨 것만 전하라. 메신저교본 1장1절이다.  그런 맥락에서, 이글은, 이 글을 쓰는 사람이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은 삶을 살고자 하는 몸부림이라고 보시면 된다. 

 

사랑하면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자 한다. 삼위일체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삼위일체 사랑에 대해 알고자 한다. 안셀무스는 믿기 위해서 알고 알기 위해서 믿는다, 라는 유명한 명제로 왜 신은 인간이 되셨는가를 평생 연구한 신학자다. 신앙과 이성의 작동을 성령의 은사로 바라본 성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실천하는 바가 바로 그의 앎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존재하기에서 그의 행위가 나오기 때문이다. 성령은 우리에게 7개의 은사와 9가지의 열매를 맺게 하는 데, 그 하나하나를 묵상해 보면 지식(성령의 은사인 앎)이 성령의 은사에 원천처럼 고여있음을 바라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다.>라고 전하는 마르코 1,21ㄴ-28은 예수님의 하느님에 대한 완전한 이해, 당신이 이 세상에 온 이유에 대한 완전한 앎이 드런난 사건이다. 카파르나움이라는 이천년전에 특정장소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국한시키지 말고 <나는 과연 온전히 빛의 사람인가?>를 모든 종교인들에게 묻는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카파르나움의 하루는 우리 신앙의 예형이라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창조의 예형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코복음을 요한복음 1장과 창세기1장과 연결하여 빛과 어둠의 싸움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빛은 우리가 그분의 모상대로 창조되었으므로 사랑받았음을 기억하라고 말한다. 우리의 생이 사랑이라고 말한다. 어둠은 우리에게 너는 결핍되어 있으니 거짓욕망을 추구하라고 부추긴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면 누구나 성전에서 더러운 영처럼 빛 앞에 드러나는 영적 민낯을 숨기거나 드러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를 인류의 집단무의식, 아담과 카인이즘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담은 언제나 카인을 낳는다. 결핍은 언제나 과잉 욕망을 낳고 과잉욕망은 욕망은 질투를 낳는다. 낙원추방은 추방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질투하고 그 끝은 언제나 죽음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이것은 생물학적인 가해로 드러날 수도 있지만 자신의 욕망을 우상화한다는 점에서 영적죽음의 상태로 자신을 몰고간다는 것이다.

 

[실존의 배고픔을 넘고, 질투의 심리학을 건너, 빛의 존재론으로]에서,

 

실존의 배고픔에 집중하면 누구나 아담이 될 수 있다. 그는 하느님과 사랑하는 이가 있어도 배고픈 이들의 원형이다. 아담을 원죄의 근원으로 바라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원죄는 결핍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계셔도 에와가 있어도 배고픈 상태, 굶주린 상태, 거기에서 멈추지 못할 때 질투의 아들을 낳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결핍의 아들인 카인의 질투는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담이 종적인 죄의 근원이라면 카인은 횡적인 죄의 근원이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모를  때, 즉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사랑받은 존재임을 알 수 없을 때, 나오는 것이 질투의 심리학이다. 자신이 이 세상에 온 존재이유를 알 수 없을 때, 표출되는 것이 신포도의 원리인 질투의 인간학이다. 인간은 처음부터 타자를 부러워하지는 않는다. 질투란 그가 실존적으로 채워지지 않았을 때, 그것을 횡적으로 투영시킨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카파르나움에서 공생활의 문을 열면서 제자를 부르시고, 구마이적사화를 전면에 실은 복음사가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마르코복음사가의 문제의식의 정점은 요한복음과는 표현면에서는 다르지만 빛과 어둠의 싸움, <그 많던 사탄을 어디갔을까?>의 질문을 오늘 우리에게 던진 거라고 할 수 있다. 자기 안에서 빛과 어둠의 변증법을 행할 수 없을 때 나오는 모든 비극의 원천을 물은 것이다.

 

왜 복음을 믿지 않는지, 또 성전에 모인 사람들이 그분을 알아볼 수 없었는지, 또 그분의 권위에 환호하면서, 그분이 베푼 기적에 열광하던 사람들이 왜 그분에게 등을 돌리게 되는지. 왜 더 많은 표징만을 요구하게 되는지? 왜 타자의 달란트를 질투하는 것인지? 세상의 갑질은 문제삼으면서 영적인 갑질은 서슴없이 자행하는지? 왜 율법학자를 비판하면서 율법학자의 길을 가게되는지? 왜 바리사이파의 위선을 비판하면서 바리사이의 길을 가게되는지? 이런 총체적인 결핍에서 나온 자기모순의 어둠, 모든 질문을 종합해 본다면 그 많던 사탄은 바로 우리 안에 에고로 변형되었음 알 수 있다. 에고의 가장 큰 함정은 사탄은 없다는 것이고, 지옥은 없다는 것이고, 죄의 진실한 고백도 없이, 절절하게 청하지도 않은 자비가 주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결핍과 두려움을 통해 분리를 조장한다는 것이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이를 기도의 부족이라고 지적한다.

 

 

제자들이 그분께 따로 어째서 저희는 그 영을 쫒아내지 못하였습니까?하고 물었다.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마르코) (카파르나움에서 하루가 지난 후)그리고 새벽 몹시 어두울 때에 그분은 일어나 밖으로 나가 외딴곳으로 가셔서 거기서 기도하였다(1,35/6,46)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 이후에) 그들과 작별하신 후에 그분은 기도하려고 산으로 물러가셨다(6,46)

 

스승님의 제자들에게 저 영을 쫒아내 달라고 청하였지만 그들은 쫒아내지 못하였습니다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야어제까지 너희 곁에 있으면서 너희를 참아주어야 한다는 말이냐?(루카9,37-43)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갈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다(마태오17,14-18)

 

빛과 어둠을 구별할 수 없는 이유, 빛이 아니므로 빛이 되게 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해, 마르코 복음사가는 이를 기도가 부족한 때문이라고 진단하고, 마태오와 루카는 믿음이 부족한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요한복음에는 7개의 기적사화 가운데 구마이적사화가 없다.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대로 하여라>(2,1-12)처럼 그분의 말씀을 듣고 머무를 수 없다면, 믿음 수 없고 믿을 수 없다면 그것은 모두 어둠에 경도될 수밖에 없다는 요한복음1장의 프롤로그의 구도와 맥을 같이한다고 할 수 있다.

 

연중4주 복음은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어둠이나 오늘날 병으로 규정하는 어둠 뿐 아니라 자신이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것을 망각하게 만드는 결핍과 질투의 이름, 갈등과 분열의 이름을 조장하는 자기 내면의 소란한 에고를 향해 조용히 하여라. 나에게서 나가라.”고 그분의 이름으로 우리 자신에게 명령하라고 전한다.

 

<예수님께서는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다.> 라고 전하는 마르코 1,21ㄴ-28을 묵상하면서 <나는 과연 온전히 빛인가?>를 성찰하기 위해 아래 글들을 기도주제로 삼았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 (시편103)

*믿음을 전제하지 않는 것은 오만이며, 이성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태만이다-믿기 위해서 알고, 알기 위해서 믿는다(안셀무스)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 너는 온갖 일이 잘 되리라는 것을 스스로 보게 될 것이다(Y140)

*나는 지금껏 하느님의 사랑에 기대어 살아왔다(M50)

 

 

 

글을 마치며,

 

그들은 카파르나움으로 갔다. 21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22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23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그가 소리를 지르며 24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25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26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27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이게 어찌 된 일이냐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며 서로 물어보았다. 28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