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보다 아름답고, 보다 완전한, 연역적인 선택의지(Prohairesis)

나뭇잎숨결 2024. 1. 19. 09:27

 

by 우두망찰님! 

 

'보다' 아름답고, '보다' 완전하고, '보다' 훌륭하고, '보다' 복스러운 연역적인 선택의지(Prohairesis)

-연중3주, “때가 차서- 버리고- 따르다”를 중심으로

 

 

 

 

 

 

1. 백석, 「나와 나타샤와 휜 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나타샤를 사랑은 하고/눈은 푹푹 날리고/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산골로 가자 출출히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눈은 푹푹 나리고/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나타샤가 아니 올리 없다/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서 버리는 것이다//눈은 푹푹 나리고/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어데서 휜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휜 당나귀」 는 시인 자신이자 화자가 눈이 푹푹 내리는 밤, 혼자 소주를 마시며, 부재하는 나타샤라는 대타존재를 소환해, 시인의 베아트리체(Beatrice)를 완성시키는 사랑의 의지라고 할 수 있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서 버리는 것이다

 

어째서 백석의 시에서 나오는 선택의지들은 눈처럼 하얀 빛일까? 이는 <눈-나타샤-휜당나귀-산골(마가리)>이라는 이질적인 세계가 <세상>의 입장에서는 ‘진 것’이 분명한데, 화자의 입장에서는 ‘더러워서 버린 것’으로 세상으로부터 길을 끊는 <외롭고, 높고, 쓸쓸한>(「흰 바람벽이 있어」) 자기매장방식- 풍장이기에 그렇다고 할 수 있겠다.

 

살면서 수많은 것들을 원하고, 선택하고, 선택한 것들을 얻고, 얻지 못해서 결국 지고, 끝내 버릴 수 없는 것들마저 버리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 버린 것들은 어느 시점에서 ‘내가 세상을 이겼다’라고 자신을 설득하게 된다. 세상을 이겼기에 자기자신으로부터 보다 더 자유로워지기도 한다.

 

 

 

 

 

에픽테토스

 

 

 

 

2. ‘내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과 ‘내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것’

 

 

무엇을 포기할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는 백석이라는 시인이 있었다면, 무엇을 포기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포기된 상태로 태어나는 사람들도 있다.

 

사랑하는 사람은 특히 자신에게서 자유롭다(에픽테토스)라는 명제로 내적자유를 추구했던 스토아철학자로 불리는 에픽테토스가 후자의 그런  사람일 것이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자신이 노예라는 신분을 받아들이며. 동시에 자신은 결코 누구의 노예일 수 없다는 것을 또한 받아들였다. 실존의 층위는 노예였지만, 존재의 층위는 자유인이었던 이중의 삶의 방식에서 살아남은 에픽테토스 철학의 바탕은 신에 대한 긍정과 자기 이해였다.

 

스토아철학하면 떠오르는 <아파테이아apatheia-평정심>는 대체로 감정이나 정열, 특히 고통·공포·욕망·쾌락과 같은 정념에서 완전히 해방된 상태를 말한다. 에픽테토스는 이 평정심을 <자기이해>로 받아들인 철학자였다고 할 수 있다.

 

아무도 누군가에게 악한 것 혹은 선한 것을 줄 수 없다. 오히려 모든 사람은 자신의 행위를 통해서 스스로에게 악한 것을 주거나 선한 것을 줄 수 있다. 인간들은 사건 때문에 혼란스럽게 되는 것이 아니라 사건에 대해 스스로 형성된 표상 때문에 혼란스럽게 된다. 자신의 참된 자아에 의해 인도를 받는 사람은 자신의 능력 밖에 아무것도 갈망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에픽테토스(50?~135)는 후기 스토아 철학의 대표적인 학자였으며, 철학적 이념을 현실 속에서 능동적으로 구현하고자 노력했던 노예출신의 철학자였다. 이미 그는 태어나자 마자 선택의 여지없이 현세적인 가치들을 포기당한 상태였다. 에픽테토스의 『엥케이리디온Encheiridion』에서, 그는 세상만사가 자신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허황되게 바라지 말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벌어지는 모든 현실에 뜻과 바람을 맞추라고 가르친다. 또한 당면한 현실에서 무엇을 얻고 무엇을 버릴 것인지 선택할 권한을 가진 자가 바로 삶의 주인임을 강조한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근사한 것이 있어 탐이 난다면, 이것을 기억하라. 그러한 것들은 적당하게 노력한다고 다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어떤 것들은 완전히 포기해야 할 줄도 알고, 어떤 것들은 현실을 위해 뒤로 제쳐놓을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다. 내 뜻대로 가질 수 없는 것을 탐하거나 부귀영화를 바라는 마음이 들 때도 마찬가지다. 내 소관에 속하지 않는 이러한 것들을 탐하고 좇느라 내 소관에 속하는 것들을 놓칠 수 있고, 그로 인해 내게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는 것들도 정작 놓쳐버릴 수 있다.뭐든 겉이 번지르르한 것을 보고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이것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일 뿐 완전한 실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습관을 만들어야 한다. 그다음에는 자신이 신봉하는 원칙에 따라 따져봐야 한다. 제일 먼저 따져봐야 할 중요한 원칙은 ‘이것이 과연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냐, 아니냐?’이다. 만약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내 이성으로 하여금 이것은 나와 아무 상관없는 것이라며 무시하도록 하라.

 

어떤 일에 임하기 전에 그 일이 어떤 일인지 먼저 머릿속에 그려보라. 예를 들어 목욕탕에 갈 일이 있다면, 먼저 목욕탕에서 어떤 사람들로 인해 어떤 일들을 겪게 될 것인지 머릿속에 그려보라. 목욕탕에 가면 물을 튕기는 사람도 있고, 밀치는 사람, 짜증나게 하는 사람, 남의 물건을 훔치는 사람 등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목욕을 하되 사람다운 태도를 유지하며 원하는 것을 지키도록 주의하겠다고 다짐을 하면, 보다 안전하게 목욕을 마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행동을 하든지 이와 같은 태도로 임하라. 목욕탕에서와 같은 일들로 방해를 받게 되면, 내가 하려던 일은 목욕뿐만이 아니라 사람다운 태도를 지키며 원하는 것을 잃지 않도록 주의하고 조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자신에게 계속해서 상기시켜야 한다. 내가 어떤 일을 당해서 누군가에게 짜증을 낸다면 이는 마음먹은 바를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는 증거라고 생각할 수 있다.

 

상실을 겪었을 때는 결코 잃어버렸다고 생각하지 말고 돌려주었다고 생각하는 버릇을 들이자. 자식을 잃었는가? 자식은 제자리로 돌아간 것이다. 여인을 잃었는가? 그 여인은 제자리로 돌아간 것이다. 재산을 잃었는가? 그 재산은 제자리로 돌아간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내게서 도로 가져간 자가 악한 자일 수도 있지만, 원래 내게 주었던 자가 되찾아 가겠다는데 그 자가 어떤 자인지 내게 무슨 상관이 있는가? 주는 자가 준 것을 잘 간수했다가 돌려주는 것이 받은 자의 몫이다. 이는 숙소를 찾은 나그네가 자기가 든 방을 잘 사용하고 난 뒤 돌려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누군가 에픽테토스에게 어떻게 하면 그의 형이 자신에 대해 더 이상 나쁜 마음을 먹지 않도록 설득할 수 있는지를 상담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철학은 인간에게 어떤 외적인 것들 중 하나를 획득한다고 약속하지 않는다네. 그렇지 않으면, 철학은 그 고유한 주제 바깥에 있는 무언가를 보증하게 될 테니까 말이네. 나무가 목수의 재료이고, 청동이 조각가의 재료인 것처럼, 삶의 기술도 각자 자신의 삶을 그 재료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네.

 

그는 또 그렇다면 많은 사람을 혼란스럽게 하고 두렵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참주와 그의 경호원?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네. 본성적으로 자유로운 것이 자신 이외의 다른 무언가에 의해 혼란스럽게 되거나 방해받게 되는 것은 불가능하네. 오히려 그 사람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그 자신의 판단이네. 참주가 누군가에게 ‘너의 다리에 족쇄를 채워 주겠다’라고 말할 때, 자신의 다리에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은, ‘아니요,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라고 대답하지만, 반면에 자신의 의지(선택의 힘, 프로하이레시스)에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은, ‘그 편이 당신에게 더 이득이 될 것으로 보인다면 제발 족쇄를 채우십시오’라고 말할 것이네.

 

당신은 노예가 분명한데 왜 당신은 자유인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만일 내가 내 보잘것없는 몸에 가치를 부여하면, 나는 ‘나 자신’을 노예로 삼는 것이네. 내가 내 보잘것없는 소유물에 가치를 부여하면, 마찬가지로 나는 노예가 되는 것이네. 그렇게 함으로써 즉각 내가 어떤 힘에 의해 사로잡히게 될 수 있을지를 나 자신에게 보여 주는 것이기 때문이네. 뱀이 자신의 머리를 움츠릴 때, 내가 ‘지키려고 하는 그 부분을 쳐라!’라고 말하는 것처럼, 너도 또한 네가 가장 보호하고 싶은 바로 그 지점을, 네 주인이 공격할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어야만 하네. 이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으면, 네가 더 이상 누구에게 아첨하고 누구를 두려워하겠는가?

 

 

에픽테토스는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자유라고 말하는데, 아니 사랑할 수 있을 때만 자유롷울 수 있다고 말하는데, 무슨 근거로 그럴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누군가가 진지하게 마음에 담아 두는 것, 그것을 그는 당연하게 사랑하는 것이네. 그렇다면 사람들은 나쁜 일들에 관해 진지하게 마음에 담아 두겠는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네. 아니면, 그들 자신들에게 아무관계가 없는 것들에 관해 진지하게 마음에 담아 두겠는가? 그것들에 대해서도 또한 결코 그럴 수 없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좋은 것들 자체에 관해서만 진지하게 마음에 담아 둔다는 것이 남을 것이며, 또 그들이 그것들에 관해 진지하게 자신들의 마음을 둔다면, 그들이 그것들을 또한 사랑한다는 것이 따라 나오는 것이네. 그렇기에 좋은 것들에 대한 지식이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것들을 어떻게 사랑하는지도 알게 될 것이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나쁜 것들로부터 좋은 것들을 구별할 수 없고, 또 양자로부터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들을 구별할 수 없다면, 어떻게 그가 여전히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사랑할 수 있는 힘은 단지 지혜로운 자에게만 속하는 것이어야 한다네.

 

에픽테토스에게 신은 지성이고, 앎이고, 올바른 이성이고, 좋음(선)이다. “신은 지성(nous)과 운명(heimarmenē)이고, 제우스와 하나이며 동일하다”는 생각은 초기 스토아로부터 내려왔던 뿌리 깊은 전통이다. 본성적으로 인간만이 신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교섭할 수 있는 것은 ‘이성에 의해’ 신과 결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은 세상의 사물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특별히 우리 각자에 대해서 돌보는 섭리(pronoia) 자체이다. 에픽테토스에 따르면, 우리는 신으로부터 왔으며, 신의 조각이며, 우리는 죽은 후 신에게로 돌아간다. ‘신은 네 안에 있다.’ 신과 인간은 떨어질 수 없는 일체라는 신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 에픽테토스 철학의 바탕이다.

 

이것들은 신과 인간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즉 우주의 시민으로서의 인간, 신과 인간. 노예 신분으로 태어나 대철학자의 자리에까지 오른 에픽테토스가 평생에 걸쳐 몰두하고 가르쳤던 스토아 철학은 그리스 로마 사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이었다. 무엇이 에픽테토스의 철학으로 하여금 수천 년의 공간과 시간을 뛰어넘어 지금까지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하는 것일까? 에픽테토스 철학의 핵심은 ‘안으로는 자유, 밖으로는 불굴의 저항’이다. ‘안으로의 자유’를 얻기 위해 에픽테토스가 가장 강조한 것은 ‘내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과 ‘내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을 철저히 구분하는 것이다. 여기서 자유는 어떤 외부의 힘에도 굴복하지 않는 내면의 자유를 말한다. 현실에 적용 가능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에픽테토스의 철학을 내면에 습득해 필요한 상황이 올 때마다 반사작용처럼 적용할 수 있다면, 그 어떤 역경과 어려움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남아 최후의 승리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내면의 자유를 추구했던 에픽테토스의 철학의 기조는 대략 네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내 권한 밖에 있는 것들을 바라지 말라’는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것의 본질을 늘 기억하고 내가 가진 것을 자랑스러워하라고 조언한다. 우리를 괴롭히는 것들은 대개 행위 그 자체가 아닌 우리의 생각일 때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에픽테토스는 어떤 일을 당할 때마다 스스로를 들여다보라고 말한다. 그 어떤 시련도 자신의 의지에는 장애가 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힘들고 괴롭다면 내 감정부터 돌아보자’고 한다. 남의 권한에 속하는 것을 얻거나 버리려 들지 말고, 누구를 부러워하거나 시기를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과 똑같은 영예를 대가 없이 누릴 수는 없는 법이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연극의 배우에 불과할 뿐이며 다른 사람에 의해 내가 못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매사에 철학자 같은 태도를 지키는 데서 만족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충언이다. 셋째, ‘내게 일어나는 일을 기꺼이 받아들이자’에서는 남의 장단에 놀아나도록 내 마음을 맡기지 말고, 행동의 결과를 생각한 후에 행동을 취하라고 조언한다. 내가 원하지 않는 한 그 누구도 나에게 해를 끼칠 수 없으며 늘 지켜야 할 태도와 본보기형 인간을 정해두어야 한다. 또한 재산은 일신에 필요한 만큼만 있으면 된다. 이에 만족한다면 분수를 제대로 지키는 것이고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원한다면 점점 물욕에 사로잡혀 깊은 수렁에 빠지고 말 것이다. 마지막으로 네째 ‘남에게 인정받는 것을 갈구하지 말라는 것에서, 추앙의 대상이 되지말라는 것이다.  육신보다는 마음에 더욱 신경을 쓰라고 당부하며 사람은 재산이나 언변으로 판단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철학자인 척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에서 배운 것을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철학자의 자세이며, 남에게 인정받는 것을 갈구하거나 탐하지 말고 성인으로서 보다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하라고 말한다.

 

 

 

 

 

 

두초((Duccio di Buoningegna, 1260-1319) , 베드로와 안드레아를 부르심

 

 

 

 

3.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마르코 1,14-20

 

 

Ⓐ14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15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16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18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19 예수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시고, 20 곧바로 그들을 부르셨다. 그러자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섰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고 전하는 마르코 1,14-20은 갈릴레아에서 전도를 시작하다(14-15절/마태오4,12-17/루카4,14-15)와 어부 네 사람을 제자로 부르시다(16-20절/마태오4,18-22/루카5,1-11)는 두 주제를 연결하여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전하는 보편적인 구원의지인 회개와 믿음의 궁극적인 태도와 소명사화를 연결한다.

 

일반적으로 제자 될 사람이 스승을 선택하고 추종하는 자유의지보다는 스승의 주도권에 의해 <버리고-따름>이라는 포기의 신학을 통해, 지난주 요한복음이 전하는 소명사화와는 다른 맥락으로 예수님이 친히 제자들을 선택하셨다는 선택의지(프로하이레시스Prohairesis)가 그 초점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코 복음사가가 전하는 이 소명사화가 우리에게 어떤 은총의 초대인가를 바라보기 위해서, 자연법에 기반하고 있는 실존의 상황에서 몇 가지 질문이 불가피하다.

 

Q1. <버리고-따름>의 대상은 창세기 1장의 <보시니 참 좋았다>는 자연법을 초월하는 것으로 무엇에 근거해서 복음적 권고들을 따르고 현세적인 것들(결혼, 재물, 자유의지 등등)을 버릴 수 있는가?

 

Q2. 하느님께서 현세적 차원에서는 도저히 정당화될 수 없는 포기를 통해서 당신의 초월적이고 종말론적인 사랑의 표상이 구현되기 바라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느님께서는 왜 이 포기를 용인하시고 또 그 길로 부르시기까지 하시는 것일까?

 

Q3, 그리스도교적 포기는 명상, 영성, 타종교에서 말하는 <텅빈 충만>과는 어떤 차별성을 지닌 복음적 권고인가? 가시적인 복음적 권고를 받지 않은 세속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어떤 포기를 요구하시는가?

 

 

<버리고-따르다>는 이 연속된 행위는 경험 이전에 연역으로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의 선택의지(프로하이레시스Prohairesis)는 ‘때가 차서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에서 강생의 필연성과 연계된다.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15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갈릴레아의 영주 헤로데 안타파스는 요한을 체포하여 사해 동부에 있는 마케론트 별장에 가두었다가 참수형에 처했다(요세프스, 『유대고사』) 마르코 복음사가는 요한이 처형당한 후, 예수님의 공생활을 전면에 배치하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신다는 표현을 통해 구세사의 문을 활짝 연다.

 

하느님의 복음은 바오로가 처음 사용한 것으로(1데살로니카2,2-9/2코린토11.7/로마1,1:15.16) 바오로가 전한 복음의 내용은 주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인데 이 두 사건에 하느님이 깊숙이 개입하셨기 때문으로 보았다. 마르코는 바오로의 1차, 3차 전도여행의 동반자로써 하느님의 복음은 하느님나라에 관한 예수님의 생 전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예수의 공생활이 하느님 나라가 된다.

 

여기서 마르코 복음사가는 바오로 사도처럼 <때가 차서>라는 시간부사를 통해 하느님은 역사의 흐름을 미리 정해놓으셨다는 묵시문학의 어조를 끌어들인다. 인간의 역사가 완결될 때, 하느님이 공공연히 그리고 결정적으로 당신의 통치를 드러내는 데 그것을 우리는 종말론적 통치라고 부른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은 하느님의 종말 통치가  가까운 장래에 실현될 것이라는 것과, 그 통치는 이미 예수님을 통해서 실현되고 있다는 것에서 구원의 현재성을 담고 있다. 예수의 삶과 사랑으로 드러난 이 종말론적 통치는 인간의 멸망이 아니라 구원하는데 그 초점이 놓여있다는 것에서 하느님 나라는 결국 하느님 자신을 내어줌에 이른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는 것은 임마누엘의 하느님이 함께하다는 것으로, 하느님 나라로 들어간다는 것은 결국 하느님께로 간다는 의미를 함축한다고 하겠다. 우리는 생물학적으로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순례를 하지만, 영적으로는 하느님께로 와서 하느님께로 가는 영적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하느님 나라를 구체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인간이 취할 태도는 회개와 믿음이다. 회개가 하느님께 돌아서는 것이라면 믿음은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는 기쁜 소식을 수락하는 것이다.

 

이를 바오로 사도는 역사적 시간의 정점에 이른, <때가 차서>에서 산발적으로 흩어져있던 그리스도의 지체들을 한데 모은다라고 표현한다.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갈라디아서4, 4) 그것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는 계획입니다.(에페소1,10)

 

 

바오로 사도는 <때가 차자>, <때가 차면>이라는 역사적 시간이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시간으로(영원으로) 귀결될 때, 인류를 하나로 모으기 위한 하느님의 계획이 그리스도를 통해 실현된 것이라고 전한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선택하시어, 만물을 당신이 결정과 뜻대로 이루시는 하느님의 의향에 따라, 그리스도에게 희망을 둔 이들은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안에서 믿게 된 이들에게, 하느님의 소유로서 속량될 때까지, 성령께서 우리가 받을 상속의 보증이 되어주시도록 성령의 인장을 찍어 주셨다고 전한다. 마치 “주님께서는 카인에게 표를 찍어주셔서 어느 누가 그를 만나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다”(창세기4,15)라는 맥락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그 약속의 실현이 이어지는 16절-20절에서 제자를 부르시는 소명사화를 관통하는 포기의 신학으로 나타난다. <지나가시다가-보시고-이르셨다-나를 따라오너라>, <곧바로- 버리고 –따랐다>, <곧바로- 부르시고-버려두고-따라나섰다>라는 부사어와 행위 동사들에서 그분의 선택의지가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력하게 추동한다는 것에서 그를 추론할 수 있다. <때가 차서>라는 이 시간부사는 이어지는 <곧바로>와 연결하여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는 부르심의 목적으로 곧바로 이행한다.

 

 

 

 

아버지와 삵꾼, 그물과 배를 버리고

 

 

 

 

<버리고 따른다>는 것이 <사람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는 부르심의 은총에서 왜 중요한 명제인지? 마르코복음사가가 속전석결로 전개한 서술의 이면을 생각해 보기로 한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18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19 예수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시고, 20 곧바로 그들을 부르셨다. 그러자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섰다.

 

<곧바로> 라는 부사에서 베드로, 안드레아, 야고버, 요한, 어부 네 사람은 단념이나, 자제력이나, 점진적인 포기를 한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포기를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선취적 호명이 담고있는 선택의지를 통해, 이미 예수님의 공생활의 여정을 여기서 추론하게 만든다. 제자들이 모든 것을 버렸다면 스승은 무엇을 버릴 것인가?하는 것이다.  예수님 스스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모든 선한 창조질서를 버렸기에, 그분의 목숨까지 버렸기에 그분의 말씀에 이루어내는 힘, 에네르기아, 어령이 깃들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보시고>는 <눈여겨 보시고>와 같은 맥락으로 그리스도의 시선 자체가 한 사람의 인격을 송두리째 바꾸는 힘이 있음을 드러낸다. 그들은 <곧바로 버리고 따랐다>는 것에서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도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마르코6, 7-13/마태오10,1,5-15/루카9,1-6)고 하신 파견의 지침과도 그 맥락이 일관되기에 제자의 도는 버림이 필수적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창세기 1장 '보시니 참 좋았다'는 창조질서와 요한복음의 고별사  '하느님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요한14장)는 것을 연결하여 포기의 영성이 무엇인가를 짚어보아야 할 듯하다.

 

포기라는 것은 순수한 자연윤리의 관점에서는 적절하게 설명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이 크리스쳔의 고유의 것이라는 것 역시 설명할 수가 없다. 창조의 긍정적인 가치들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의 맥락에서 포기는 현행질서가 아님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또한 모든 영성가들, 명상가, 철학자, 타종교에서 <텅빈 충만>의 비움과 버림, 혹은 내려놓음을 말하기 때문에 포기가 그리스도의 고유한 덕행이 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점을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가치의 포기가 포기 자체에 목적이 있다면 그 포기는 종말론적인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적극적인 가치를 희생시킬 수 있는 것은 그보다 상위의 가치를 위해서다. 이 상위의 가치가 직접 경험의 대상이 되지 못할뿐더러 오로지 믿고 희망해야 하는 그런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제자들의 포기다. 이때 상위의 가치를 위해서 어떤 가치를 포기하는 일은 그리스도교적 포기만이 지니는 특성이라고 하겠다. 신앙과 희망으로만 소유하고 있는 어떤 가치를 위해서 경험이 가능한 가치를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주 요한복음이 전하는 소명사화를 영적포기라는 말로 서술했다. 마르코 복음사가가 전하는 포기는 영적포기를 전제한 포괄적이고 전적인 포기를 요구한 것이다.

 

칼라너는 『영성신학논총-포기에 관한 신학적 해명』에서 예수그리스도 강생이후에 포기의 신학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애덕의 우선순위가 되었음을 고찰한다. 그렇기에 버림과 따름, 그리고 십자가와 죽음의 의미에 대해 포기의 명분은 사랑이며, 이 사랑은 그리스도교 초월성과 종말론적인 성격을 담보한다고 할 수 있다.

 

Ⓓ하느님 보시기에 좋다고 하신(창세기1장) 것을 사람이 포기한다는 사실은 자연윤리로서는 해명이 안 된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 근거해서 복음적 권고들을 따르고 현세적인 것들(결혼, 재물, 명예, 권력, 자유의지 등등)을 포기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포기의 초월성과 종말론적인 표지의 특성은 무엇인가? 포기라는 것은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자연법의 어떤 요구이거나 명령은 결코 아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 이전에는 포기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구약에서는 그분의 말씀을 듣는 이들에게 현세적 가치들이 오히려 보상으로 주어지기조차 하였다. 그렇다면 포기는 그리스도의 삶에서 연역되어 나온 덕이라고 할 수 있다.

 

<버리고 따른다>는 이 포기의 덕을 좀 더 살펴보기 위해 수난과 부활을 처음 예고 하신 다음에 마르코 복음사가는 다음과 같이 십자가신학을 전한다.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마르코9,34-38/마태오16,24-28/루카9,23-27)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따름과 보상(10장 28-30/마태오19,27-30/루카18,28-30)에서 수난과 부활을 세 번째 예고하기 전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때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를 보면, 누군가에게는 분명히 포기에 대한 실존의 응답이 경험적으로 주어질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종말론적인 약속일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이 포기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신학을 현시하는 교회론의 바탕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타종교나 명상에서 말하는 포기와의 차별성이 드러난다. 이 포기가 살아서 평정심의 유지하는 수단이 아니라는 것이다. 포기가 단순히 개인의 영성을 위해서가 아니고 부활 이후의 영원한 삶을 예표한다는 성사의 표지라는 것에서 포기의 본질을 바라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포기는 현세적 가치들을 <백배나 받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서 포기는 이 땅의 현실에서 절대적 가치가 아니라, 상대적 가치의 영역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상대적영역에서 절대적 권고가 함의하는 구원의지의 보편성과 포기를 요구받은 자의 겸허까지 당연하게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포기한 것조차도 망각해야 한다면 그리스도교적 포기란 얼마나 아름다운 포기인가? 

 

이를 칼 라너는 “복음적 포기는 완덕을 향한, 보다 아름답고, 보다 완전한 길이요, 보다 복스러운 선택이다.”라고 <~보다>라는 가치의 선택이면서 이것은 상대적인 영역에 속하지만 상대적인 영역을 초과하는 신적의지라고 보았다. 포기는  한 개인이 신앙의 결단으로 선택일 수 없는 은총사건으로, 그분의 절대적 부르심이 작용되었음을 강조한 것이다.

 

이는 부활논쟁(마르코12,18-25/마태오22,23-33/루카20,27-40)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에게 한 전언에서, 재물을 포기를 할 수 없었던, 하느님 나라와 부자(마르코9=10,17-27/마태오19,16-26/루카18,18-27)의 관계- 부자청년의 비유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포기나 부르심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넘어서는 그 자체로 은총사건에 해당한다.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간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부활논쟁)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슬퍼하면서 떠나간 부자청년의비유)

 

바오로 사도는 이를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코린토 1서 7,29-31)라고 전한다. 형체가 사라진다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인가?

 

Ⓗ형제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물건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포기한 사람은 포기하지 않은 사람처럼, 포기하지 않은 사람은 포기한 사람처럼 살라는 이 통찰!

 

그렇다면, 이 세상은 형체가 사라지는 세계임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그 형체를 과감히 포기하고 누군가는 여전히 그 형체를 생존의 수단으로 삼아야 한다는 문제 앞에 서게 된다. 여전히 형체중심의 삶을 끌어가는 이들에게 주어진 완덕의 길, 하느님을 지향하는 인간의 사랑이 어디까지나 종말론적인 것일진데, 그 사랑을 다른 덕성들과 보조를 맞추어 표출하는 길은 무엇인가?하는 질문은  다른 덕성들과 보조를 맞추어 이 포기의 사랑을 표시하는 길은 긍정적인 현세의 가치들을 포기하는 것들에 의해서 포기하지 않은 것들의 재배지를 요구한다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은 세계라는 중재자가 아니라 당신 스스로 초자연계에 있어서 인간의 목적이 되시므로 이 믿음과 희망과 사랑은 결국 하느님을 향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떤 가치들을 추구하는 것과 어떤 가치들을 포기하는 것이 모두 사랑이라는 명분에서 나와야 하며, 그것은 그분의 선택의지를 받아들이는 것임에서, 어떤 가치의 포기가 포기 자체에 목적이 있다면 그 포기는 종말론적인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잉태한다.

 

적극적인 가치를 희생시킬 수 있는 것은 그보다 상위의 가치를 위해서다. 이 상위의 가치가 직접 경험의 대상이 되지 못할뿐더러 오로지 믿고 희망해야 하는 그런 대상이 되어야 한다. 이때 상위의 가치를 위해서 어떤 가치를 포기하는 일은 그리스도교적 포기만이 지니는 특성이라고 하겠다. 신앙과 희망으로만 소유하고 있는 어떤 가치를 위해서 경험이 가능한 가치를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세적 가치의 포기와 사랑의 실천사이의 객관적 관계를 성립시키는 것은 무엇인가? 어느 범위까지 또 어떤 방법으로 해서 포기가 곧 사랑의 수단이 될 수 있는가? 과연 복음적 권고들의 실천이 신앙을 끌어올리며, 어떤 위험들을 피하게 해주며 동시에 윤리적 위험들을 초래하는가? 이 질문은 왜 그리스도께서는 청빈과 독신과 순명을 하셨는가?라는 질문에 가 닿는다. 도대체 어떤 요소가 당신 아버지께 향하는 당신 사랑의 구체적 행위에 도움이 되었을까?

 

이 포기가 종말론적인 덕행을 현시하는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포기 자체’의 특성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에 이른다. 이것은 희망 안에서 사랑의 구현이라는 기능을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인간의 실존적 중심을 감지할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영역에서 벗어난 이 덕행은 초자연적 은총에 의해서가 아니면 인간 자체가 존재론이나 실존적으로나 가능하지 않다. 일체의 선한행위들이 은총에 의해서 신적 사랑을 구현하고는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초월성을 산출하지는 못한다. 왜냐, 믿지 않는 이들도 현세적 가치의 추구에서는 그 누구보다도 뛰어나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기 실존의 중심을 이 세상에서 저 밖으로 이동시킨다는 것, 포기를 실존의 중심의 변경을 표시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 자체는 하느님의 적극적인 부르심이 아니고는 설명할 길이 없다. 하느님께서 세계에 대한 이같은 초월을 특별히 허락해 주셔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에 모든 것을 버리고-따를 수 있었던 것은 제자들 역시 예수와 함께 이미 부활의 삶을 살아야 하는 교회의 표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부르심을 받은 그 상황에서 제자들이 완전히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했다면 포기의 부르심이 어떤 덕을 요구하는 것인지 알 수 없으므로, 이 세상의 중심적 시선으로 현세의 가치를 바라보게 된다는 점에서 이 부르심은 선험적이고 연역적인 은총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반복해서, 창조질서에서 비롯한 현세적인 가치질서들을 포기할 수 있는 것은 개인의 의지가 아니라 그분의 선택의지에 의한 은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현세적 차원에서는 도저히 정당화될 수 없는 포기를 통해서 당신의 초월적이고 종말론적안 사랑의 표상이 구현되기 바라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느님께서는 왜 이 포기를 용인하시고 또 그 길로 부르시기까지 하시는 것일까?

 

복음적 포기는 완덕을 향한 보다 완전한 길이요, 보다 복스러운 선택이다. 라는 결론에 이를 수 있다면 그것은 대신적이요, 교회론적 특성이며, 초월적이며 종말론적인 표징이자 현시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포기는 인간 수련이 필요한 그 무엇도 아니고 포기는 어디까지나 그리스도교가 지향하는 완덕의 덕성스러운 하나의 길이며, 사랑을 존재상의 최고규범으로 간주할때 가능하다. 향주삼덕 가운데 믿음과 희망이 사랑을 낳게한다는 것을 추론하게 만든 것이 포기다. 

 

그렇다면, 포기에서 면제된 그리스도인도 있는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르는 길이기에 공존이라는 우주적 사랑의 실현에서 모든 것을 포기한 이들의 생존을 책임지는 일, 창조질서를 유지하며, 생산과 재분배의 간접적인 포기를 담당하는 길이 누구에게나 주어졌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포기 자체의 목적은 하느님의 내적 생명의 본질을 이루는 사랑의 종말론적 특성을 인간들이 감촉할 수 있게 현시하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바라볼 수 있으며, 인간은 그리스도의 죽음 안으로 잠겨 들어간 뒤에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전하는 메신저가 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교회는 종말론적으로 세계를 초월하는 신적사랑을 표상하지 않으면 안되고 포기라는 복음적 권고는 교회의 본질적인 불가결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적 포기가 하느님께 가는 유일하고 참다운 길이라고는 주장할 수 없기에 사랑의 초월적 성격과 사랑의 우주적 성격, 둘 다 상호 협력-공존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때, 칼라너가 포기의 신학에서 결론지은 복음적 포기는 그리스도의 삶에서 연역된,  완덕을 향한 '보다' 완전한 길이요, '보다' 훌륭하고, '보다' 아름답고, '보다' 복스러운 선택의지라고 할 수 있겠다.

 

 

글을 마치며

 

14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15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16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18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19 예수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시고, 20 곧바로 그들을 부르셨다. 그러자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