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문장들, 빨리 봄이 오면 죄를 짓고, 눈이 밝아지고 싶다.(윤동주)
주님공현대축일-“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를 중심으로
1. 빨리 봄이 오면 죄를 짓고, 눈이 밝아지고 싶다.(윤동주)
윤동주의 『또 태초의 아침』을 읽어본다.
하얗게 눈이 덮혀 있고/전신주가 잉잉 울어/하느님 말씀이 들려온다//무슨 계시일까// 빨리/ 봄이 오면/죄를 짓고/눈이 밝아(지고 싶다)//이브가 해산하는 수고를 다하면/무화과 잎사귀로 부끄런 데를 가리고/나는 이마에 땀을 흘리고 싶다(1941년)
윤동주(11917-1945)의 『또 태초의 아침』(1941)은 스물셋, 윤동주가 쓴 청춘의 문장이다. “빨리 봄이 오면 죄를 짓고, 눈이 밝아지고 싶다.”는 반어이자 역설이다. 이 시는, 시인이란 슬픈 천명을 안고 사는 윤동주가 지고가야 했던(시대의 짐을 진) 청춘의 내혈이라고 할 수 있다. 윤동주는 윤동주여서 결코 이육사가 될 수 없었던 부끄러움의 고백이다.
윤동주다움은 죄를 짓지 않고도 죄인이 되는 시간을 통과해야 했고, 시인이 감당해야 하는 것은 모든 이브(독립운동가)가 해산처럼 쟁취한 독립 앞에서, 홀로 침전하면서 시를 혹은 시나 써야했던 시간을 성찰하며, 모든 이들이 저쪽으로 가자고 할 때, 그 길에 합류하지 않은 시대의 초상이라고 할 수 있다. 부끄러움을 강요하는 시대를 무화과잎으로 가리고, 변명의 여지조차 없는 자기추인의 골방에서 진땀을 흘리며, 죄인의 상징인 아담이 되어서라도 독립을 원하는 바람을 드러낸 시다.
시인 장석주는 김연수의 『청춘의 문장들』이란 산문집 발문에 이런 글을 덧붙인다.
“청춘은 미쁘고 가혹하다. 분별의 지혜는 빈약하고 혈기는 뻗쳐오르기 때문이다. 꿈은 멀고 현실은 척박해서 괴롭다. 실패는 잦고 방황은 길어서 고통스럽다. 그러나 누가 청춘을 두려워하랴. “빨리 봄이 오면 죄를 짓고, 눈이 밝아지고 싶다.”(윤동주)고 노래한 것도 청춘이다. 주리고 목마를 때조차 청춘은 이루지 못한 꿈들 때문에 빛나고 순수한 활력으로 아름다운 것들을 움켜쥔다. 실패와 방황을 두려워하지 않고 ‘저 바다’를 향해 언제라도 떠날 수 있는 게 청춘이다"
어떤 시대의 청춘은 누구는(윤동주) 골방으로, 누구는(이육사) 광야로 나가는 것이었을 거다.
2. 환대는 편안함의 해체이고, 해체는 타자에 대한 환대이다(자크 데리다)
청춘! 하면 떠오르는 철학자가 데리다다. 해체라는 말은 데리다가 쓴 청춘의 단어라고 할 수 있다. 데리다의 사유의 일면을 다시 읽어본다.
데리다의 화법은, 어머니가 곁에 있을 때, 어머니는 애증의 대상이다. 그런데 어머니가 부재하자 어머니는 애증의 농도만큼 그리움의 대상이 된다. 모든 그리움은 유령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또 다른 화법, 환대는 거짓 우정을 해체하고 불편한 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이다, 라는 너무나 직설적이고 솔직한 사유로 인류의 모든 사유체계를 해체하고 싶어했던 사람, 자크 데리다.
데리다의 『우편엽서(La Carte Postale/The Postcard)』의 절반을 차지하는 1부 발송(Envous/Sending)편에는 두 연인 사이에 주고받은 우편엽서를 모아놓은 것들이 나온다. 두 연인이 사귀다가 사이가 안 좋아져 서로 소통한 내용물들을 다 태워버리는 내용이다. 그런데 우편엽서들을 모두 태우고 남은 잔여물들이 있었다. 끝끝내 없앨 수 없는 시간의 흔적, 재. 의미가 소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의미를 태워버렸음에도 남아있는 것들. 데리다는 모든 텍스트는 흔적을 남기듯, 이 세상이 아무리 그 흔적을 지우려해도 남아 있는 유일한 텍스트는 무엇인가?
모든 것이 사라져도 마지막까지 남아 있을 것들, 그 것들은 선험적인가? 경험적인가? 아님 데리다식으로 독약인가? 양약인가? 모든 것이 사라져도 또 끝끝내 남아있을 것들은 선험인가 경험인가가 왜 중요할까? 예컨대, 그것이 사랑이라고 하자! 사랑이 선험이라면 생성도 소멸도 없을 것임으로, 즉 스스로 자존할 것임으로 어떤 노력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이 경험의 산물이라면 우리는 부단히 노력해야 획득할 수 있는 그 무엇이 된다고 볼 수 있다.
⒜타불라라사tabula rasa: 정신을 아무것도 쓰지 않은 칠판에 비유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에 관하여 De anima〉가 처음이다. 그후 아리스토텔레스의 소요학파와 마찬가지로 스토아 학파도 정신의 본래상태는 <빈서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두 학파는 정신이나 영혼이 감각을 통해 관념을 받아들이기 전에는 단지 잠재적이거나 활동하지 않을 뿐이며, 지적 과정에 들어서면 관념에 반응하고 이 관념을 지식으로 바꾼다고 강조했다. 타불라 라사를 새롭게 강조한 철학자는 영국의 경험론자 존 로크였다. 로크는 『인간 오성론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에서 정신은 원래 '아무 글자도 쓰지 않은 백지'와 같아서 경험을 통해 '이성과 인식의 모든 원료'를 얻는다고 주장했다. 로크 자신은 주어진 '원료'를 이용하는 마음의 힘인 '반성'을 매우 중시했지만 그가 옹호한 타불라 라사는 그후 철학자들이 더욱 급진적인 입장으로 나아가는 신호탄이 되었다.
⒝파르마콘pharmakon: 그리스어 ‘파르마콘 Pharmakon’이 지닌 중의성은 플라톤의 대화편 '파이드로스(Phaidros)' 에서 나오는데, 파르마키아(Pharmakeia, 제약술)의 이중성과 연관되어 있다. 소크라테스가 더위를 피해 아테네 교외의 일리소스(Ilissos)에 갔는데, 그곳에서는 치유의 효능을 가진 샘을 뜻하는 요정을 '파르마키아'라 부른다. 이 말에서 약과 독을 의미하는 '파르마콘(pharmakon)'과 지금 약국을 의미하는 'pharmacy'란 단어가 유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플라톤은 『파이드로스의』 대화편에서 진리란 영혼의 말(logos)을 통해서 전해지는 것이지, 결코 외적인 흔적을 빌려서 표시하는 문자(grammatology)를 통해 전달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진리는 인간의 '숨결'처럼 선험적이라고 본 것이다.
⒞파르마코스(pharmakos, 희생양): 데리다는 『파이드로스』를 통해 문자의 이중성과 파르마콘의 이중성을 비교하면서, 텍스트와 진리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예컨대 폴리스는 본래 정결하고 완전한 텍스트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폴리스 안에서 균열이 일어나고 누수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구성원들은 원인이 밖에 있다고 생각한다. 경계를 더 삼엄하게 서면서 구멍과 틈을 메우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다. 왜일까? 문제의 원인이 폴리스 안에 있었던 것이다. 그 원인을 덮고 감추기 위한 ‘희생양’을 만들게 되는데 그것이 ‘파르마코스’다. 그 후 파르마코스는 균과 독을 끌어 들인 자로 간주된다. 마땅히 폴리스의 평안을 위해 파르마코스는 추방되어야 하지만 질서유지에 필요하므로 파르마코스를 일시적으로 허용한다. 파르마코스는 국적 불명의 외국인 노동자처럼 있지만 없는 자, 안에 있지만 밖에 있는 자, 혹은 안에도 밖에도 없는 자로 아웃사이더로 낙인찍힌 존재를 의미한다. 모든 시대가 희생양을 요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타불라라사(tabula rasa)는 경험론에 관한 것이고, 파르마콘(pharmakon)은 선험론에 대한 것이다. 파르마코스(pharmakos, 희생양)는 경험론과 선험론을 해체하는 것이다. 선험론과 경험론과 해체는 모두 <몸>과 <정신 혹은 영혼>의 관계에 관한 인류의 정신사의 궤적, 사유의 흔적(痕迹·痕跡)에 해당한다. “사랑은 죽음과 같이 강하다(아가서8.6)” 라고 할 때, 사랑을 몸의 죽음에 비유한 이유는 사랑은 선험과 경험을 동시에 아우르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지닌 몸이라는 현실은 경험을 요구하지만 영혼과 정신은 경험 이전에 선험이라고 보는 관점이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의 개인사도 <몸>과 <정신 혹은 영혼>의 역사를 쓰고 있는 중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세운 계획에서 육신의 안락이나 보호나 즐거움과 관련되어 있지 않은 것이 있을까? 반대로 어떤 지난한 시간 속에서 평화에 이르게 되었을 때, 어둠의 밤을 통과하다 어떤 빛을 체험했을 때, 오랫동안 진행하던 일에서 어떤 목표를 달성했을 때, ‘나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는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전자는 지나치게 힘의 근원으로 몸을 숭배하고 있다면, 후자는 몸을 잊은 상태라 할 수 있다. 전자는 경험론적 삶이라 본다면 후자는 선험적 삶의 자세라 볼 수 있다.
이렇듯 우리 순례의 여정은 형상(몸)과 말씀의 길항(拮抗) 과정을 살아낸다고 할 수 있다. 몸과 영혼을 대척점서 바라본 두 사람, ‘몸은 영혼의 감옥’(플라톤)이라고 보았다면, 반대로 ‘영혼은 몸의 감옥’(푸코)이라고 바라본 이 상반된 인식은 인류 역사의 변곡점breakpoint 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 하는 세계관을 대변한다. ‘몸은 영혼의 감옥’이라고 보던 시대는 형이상학이 시대를 끌어가는 <영혼>의 시대였다면, 푸코처럼 ‘영혼은 몸의 감옥’이라고 보는 우리의 시대는 형이하학이 세계를 이끌어가는 <몸>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세계는 아직도 통합보다는 이분법으로 나누는데 익숙하다. 이분법으로 세상을 나누다보면 중심부담론과 주변부 담론으로 세계는 어떤 힘의 질서에 의해 재편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세상을 끌어가는 힘의 논리가 곧 희망의 원리가 된다. 이 분리의 논리는 언제나 힘의 논리에서 비롯되었기에 이 세계가 말하는 희망은 보편적 이름의 닫힌 개념이 된다.
세계를 이분법으로 나눈 그 근본적인 기원을 로고스 중심주의 즉 형이상학이라고 바라본 자크 데리다는 중심부 담론과 주변부 담론으로 나뉘어지는 이 거대한 세계를 해체하여 하나의 텍스트로 바라본다. 그는 <텍스트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Il n'y a rien en dehors du texte)>라는 명제를 통해 세계가 질서, 혹은 힘이라고 말하는 것들이 어디에 기원하고 있는지 묻는다.
⒟흔적은 차이/지연이다. 흔적은 어떠한 청각적 시각적, 음성적, 문자 표기적인 감각적 충만함에도 종속되지 않는다.(125) 모든 언어는 말하기 위해서 만들어졌고, 문자 언어는 음성언어에 대한 보충으로만 쓰일 뿐이다.(580) 희망이라는 초조함으로부터 해방되어서 또 조금씩 욕망의 초조감을 잃어버릴 것을 확신하면서, 또 과거는 나에게 아무 것도 아니었음을 터득하면서 나는 새롭게 살기 시작하는 사람의 상태에 들어가려고 애썼다.(594)
⒠우리가 어떤 작가들에 이름들에 부여하는 지시적 가치는 무엇보다 문제에 대한 이름이다.(...) 여기서 담론과 역사적 총체성의 분절을 생각하기 위해서 제안된 모든 개념이 형이상학적 울타리에 사로잡혀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203) 우리는 어떻게 연민의 정이 우리 자신을 감동시키도록 할 수 있을까? 우리를 우리 자신 밖으로 옮겨놓아야 가능하다. 우리와 고통받은 존재를 동일시하면서, 우리는 그가 고통받는다고 판단하는 만큼 고통받는다. 우리가 고통받는 것은 우리에게서가 아니라 그 존재 속에서다.(374)
자크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1967년)는 책 제목이 독자에게 암시할 수 있는 주제 내용과 달리, 결코 하나의 문자학 이론이나 문자 철학 또는 언어철학 등의 단일 주제로 표상될 수 없으며, 생명과 죽음, 자연과 문화, 여성과 남성, 문명과 야만, 기억과 망각, 외면과 내면, 선과 악, 목소리와 그래피즘, 의식과 무의식, 현존과 부재, 충만과 소외, 고유와 은유, 욕망과 쾌락, 성욕과 자기 관능성, 역사의 기원과 과학의 성립 조건, 관음과 자위, 언어와 정치, 음악과 정치, 화성과 선율 등 인문학의 거의 모든 주제를 아우르면서 과연 무엇이 중심이고 무엇이 주변부인가를 해체하고 있다.
통상적으로 그라마톨로지에서 그 같은 사상의 전환은 크게 세 방향에서 이루어진다. 첫째, 서양 형이상학의 토대를 받쳐 주는 텍스트들에 대한 해체적 독법 또는 방법, 둘째, 에크리튀르의 학문, 즉 음성 언어와 문자 언어의 고전적 이분법을 넘어서는 새로운 문자 내지는 글쓰기의 학문, 셋째, 이로부터 창발하는 차이의 사상이 그것이다. 예컨대 문자와 관련하여 데리다에게 그라마톨로지라는 학문은 서양 2500년 동안의 역사에 대해서 전혀 다른 빛을 비추어 준다. 여기서 새로운 문자 개념이 무대에 모습을 드러낸다. 달리 말해서, 에크리튀르의 시작은 언어의 역사에서 새로운 사건이 아니라, 이미 시작부터 그 안에 각인된 그 무엇이다. 즉 언어는 이미 늘 에크리튀르였다는 것이다. 데리다가 설정한 서양의 기호 사상사는 서양 형이상학 전반의 논리에 대한 결정적인 진입 지점이다. 서양에서 온축된 기호의 로고스 중심적 사상은 현대 기호학 이후, 우리가 기표와 기의라고 부르는 것의 대립에 기초하여 서술되어 왔음을 데리다는 설파한다.
여기서 중요한 대목은 이 같은 대립은 이어서 현전의 형이상학의 전체를 구성하는 보다 광범위한 대립들의 망으로 유도된다는 것이다. 영혼과 육체, 무한과 유한, 초월과 경험, 지성과 감성 등이 그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서양 기호사상사에 대한 데리다의 독법은 그로 하여금 로고스중심주의 전체의 형이상학적 체계를 해체하려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철학자 장-자크 루소의 저작들을 분석하고 해석함으로써 서양 형이상학 전통에 대한 근본적 비판을 시도했다. 데리다에 따르면, 서양 형이상학을 관통하는 것은 음성언어와 문자언어 간 이분법의 위계다. 이분법의 위계란 음성언어를 이성·합리성과 결부되고 개인의식 속 내면적 진리에 가까운 것으로 보았으며, 문자언어를 이차적 외연, 목소리의 대리보충물, 이성에 본질적이지 않은 보조적 테크놀로지로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서구 형이상학이 갖는 특징 중 하나는 글자보다 음성이, 다시 말해 글보다 말이 로고스에 더 가깝고, 그래서 더 가치 있다고 보는 데 있었다. 이러한 이분법의 위계를 그는 ‘음성 중심주의’ 또는 ‘로고스 중심주의’라고 이름 짓는다.
'중심부'와 '주변부'의 이항대립를 해체하는 전기의 울타리 개념은, 후기에 '나(주체)'와 '타인(타자)'의 이항대립를 해체하는 유령의 존재론으로 대체된다. 우선 데리다는 후설을 포함한 기존의 철학이 '현전하는 것'과 '부재하는 것'의 이항대립에 근거하여 '현전하는 것'을 '부재하는 것'보다 높이 평가하는, '현전의 형이상학'이라고 비판한다. 그리고 데리다는 이러한 이항대립을 해체하기 위해, 현전과 부재의 울타리에 있는 존재로서 '유령'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데리다가 겨냥한 것은 이러한 로고스 중심주의에 내재된 세계의 질서다. 진리와 허위, 정신과 육체, 남성과 여성, 서양과 비서양, 현전과 부재, 문명과 야만 등의 이항대립은, 음성언어와 문자언어의 이항대립처럼, 전자를 지배적인 것으로, 후자를 종속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위계를 이뤄왔다. 그런데 후자가 전자보다 열등하다는 것은 그 근거가 부재한 착각이자 환상이라는 것이 데리다의 주장이다. 이러한 이분법의 위계질서가 그동안 부당하게 이뤄진 억압들을 합리화시키고 정당화시키는 논리로 작동해왔다는 게 그의 통찰이다. 탈구축은 이러한 폭력적 위계를 해체하는 것을 말한다. 탈구축은 외부로부터의 파괴가 아닌 내부에서 그 위계질서를 전도시키고 열등한 것들을 옹호하는 것을 함의한다. 데리다에게 그라마톨로지, 즉 문자학이란 기호, 흔적, 문자 언어에 대한 학문으로 문자학은 로고스 중심주의에 맞서는, 서양 형이상학 전통을 탈구축하려는 시도인 셈이다.
세계는 거대한 텍스트다. 우리 자신 역시 하나의 텍스트다. 우리가 그 텍스트에서 무엇을 읽어냈는지가 바로 우리 내면의 초상이다. <텍스트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Il n'y a rien en dehors du texte)>라는 명제로 제시하고 있다. 결국 세계의 흐름이나 방향을 구축하는 것은 우리의 시선, 우리 자신이 추구하는 어떤 힘의 논리가 만든 텍스트다.
그 힘의 논리 더미에서 이천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텍스트! 우리는 그 텍스트의 이름은 J라고 부른다.
3.<우리는 동방에서 임금님께 경배하러 왔습니다>마태오 2, 1-12
공현대축일 복음, 마태오 2, 1-12은 이어지는 ‘성가정이 에집트로 피난가다’(13-14), ‘헤로데가 아기들을 학살하다’(16-18), ‘성가정이 에집트에서 돌아오다’(19-23)는 일련의 사건들과 연결하여 마태오복음에만 실려있는 극적 서사에 해당한다. 공현과 불행이 교차되는 일련의 사건들은 어떤 액션도 취하지 않은 아기 예수가 지닌 권능의 실체를 바라볼 수 있는 부분이다. 아기는 힘이 세다. 세상이 준 힘이 아니라 하늘이 준 힘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준 힘은 세상의 유한성과 그 맥을 같이 하지만 하늘이 준 힘은, 신성이, 영원이 함께한다. 전자는 고통이 초점이라면 후자는 기쁨이 초점이다. 전자는 과거와 미래가 초점이라면 후자는 오늘과 영원이 초점이다.
따라서 공현을 이끄는 <별>이라는 사물은 낭만적 서정성을 담보하지 않지만, 인간의 사건에 중요한 모멘트를 제공하는 사물의 맥락에 해당한다. 사람-별-아기예수, 어떤 뛰어난 현자가 개인적으로 받은 계시에 의해서 떠난 여행이 아니라, 별이라는 사물에서 촉발된 길위의 사건들이었다는 것에서, 공현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고, 무엇을 만났고, 무엇을 기쁨이라고 생각하는가? 라는 본질적인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성서는 모두 창조의 사랑으로 수렴되듯 공현은 그분의 숨결로 창조된 모든 사물의 존재이유를 알려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주님 <공현>은 아기 예수를 바라보는 모든 인류의 존재이유, 그 은총의 현주소를 드러내는 마중물이라고 할 수 있다.
마태오 2, 1-12를 읽어본다.
예수님께서 헤로데 임금때에 유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 그러자 동빙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듣고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 헤로데는 백성의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을 모두 모아놓고,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어디인지 물어보았다. 그들이 헤로데에게 말하였다. Ⓑ“유다 베들레헴입니다. 사실 예언자가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유다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의 주요 고울 가운데 결코 작은 고을이 아니다. 너에게서 통치자가 나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보살피리라.’” 그 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시간을 정확히 알아내고서는,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말하였다.Ⓒ “가서 그 아기에 관하여 잘 알아보시오. 그리고 그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 Ⓓ그들은 임금의 말을 듣고 길을 떠났다. 그러자 동방에서 본 그들을 앞서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에 위에 멈추었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가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그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으로 돌아갔다.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2절) 라는 질문을 다른 사람도 아닌 왕앞에서 던진 동방박사! 질문만 놓고 본다면, 아주 철이 없거나, 아주 두려움이 없거나, 아주 무모하거나, 아주 솔직한 자기 심장에 집중하는 이들만이 던질 수 있는 청춘화법이다. “이 말을 듣고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3절) 라는 반응에서 우리는 동방박사의 질문이 던진 질문의 파장을 예견할 수 있다.
마태오 2, 1-12를 도식하면 Ⓐ동방박사화법-----> 예루살렘화법Ⓑ, Ⓒ-----.베들레헴화법Ⓓ으로 어떤 현자들이 별이라는 사물의 맥락이 지시하는 힘의 실체를 만나기 위해 걸어간 여정 속에서 그들의 입에서 발화되는 말 혹은 시선에서 그들의 영적 상태(나이)를 추론할 수 있다. 주님공현대축의 서사를 여는 2절의 발언은 그분을 믿는 이들에게는 환호이고, 그분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충격적인 발언에 해당한다. 직설화법에 속하는 동방박사의 질문은 이어지는 내용에서 그 파장의 여파를 확인할 수 있다.
‘성가정이 에집트로 피난가다’(13-14), ‘헤로데가 아기들을 학살하다’(16-18j, ‘성가정이 에집트에서 돌아오다’(19-23)는 것에서 알 수 있듯, 동방박사로 불리는 멜키오르(황금-왕/지혜), 가스파르(유황-사제/기도), 발타사르(몰약-죽음/육신의 고행)는 청춘의 문장을 구사하는 이들이 주로 쓰는 직설화법을 사용하는 이들을 대변한다.
예루살렘에서 헤로데와 백성의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이 쓰는 화법은 진정성이 없는 트릭스터의 화법이다. 헤로데는 자신의 속마음을 타인에게 숨기는 세속적 트릭스터의 화법을 구사한다면,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진리를 발설할 뿐 믿지는 않음으로써 그들은 예루살렘 문법의 한 유형인 종교적 트릭스터의 화법을 쓴다. 자기자신을 속이는 화법이다. 그들이 쓴 화법으로 그들은 그들의 말이 지시하는 그 상황에 머물게 된다. 그 수준에 머물게 된다는 것은 진실의 반대표징을 그들이 수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청춘의 문장은 그 문장의 여파를 재고 따지지 않는다. 계산기를 두드리지 않는다. 오늘의 화법이기 때문이다. 심장에서 튀어나온 즉물적인 발화처럼 지금 이 순간의 갈망이 현실의 파고를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 그것이 청춘의 문장이 지닌 힘이자 무모함이다. 성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화법은 비유조차도 모두 청춘의 문장들이다. 우리가 예수님에게 끌린 것은 사실 예수님의 영원한 청춘에 끌린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수님은 영원히 서른살이거나 서른 세 살의 화법을 구사한다.
공현 이후에, 동방에서 현자들이 본 별이 무엇인지를 연구하는 이들은 케플러 이후에 수많은 천문학자들의 관심사였다. 그리고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는 여행가들에게는 그들이 어떤 길을 통해 예루살렘을 통해 베들레헴에 도착했는지, 그 여행 경로는 여행마니아들의 패키지 상품이 되기까지 했다. 또 어떤 이들에게 예수님의 공현은 삶의 패러다임 자체를 바꾸는 모멘트가 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공현의 의미는 창조의 차원으로 넘어갔음을 의미한다.
공현(Epiphania)은 창조 이래 산발적이고 파편적으로 드러났던 불가해한 사건, 하늘과 땅이 직접 연결된 언어너머의 사건, 어떤 인간, 어떤 사물, 혹은 자연에서 느끼는 경외심, 장엄함, 거룩함, 성스러움의 총체가 예수라는 한 아기의 인격안에서 그가 지닌 권능을 남김없이 드러난 현현을 의미한다.
따라서 공현은 단지 전례주기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안다는 차원에서 그리스도를 만난다는 차원으로 넘어갔음을 의미한다. 2절의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에서, 동방박사는 별을 보고 유다인의 임금이 태어나실 것을 알았지만, 그분을 만나지는 못했다.(예루살렘)---별이라는 사물의 정보와 미카서(5,1)의 예언을 종합해---베들레헴으로 가게 된다. 이 단선적인 사건이 함유하고 있는 영적 파장은 인생이란 여행 자체의 의미를 바꾸어 놓았다.
따라서, 공현은 신이 누구인가를 모든 민족에게 드러내는 사건일 뿐 아니라, 인간과 신의 유일한 실재관계를 알고-산다는 말이 무엇인가가 함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별이라는 사물을 공현에 끌어들인 이유는 유일한 실재관계인 하느님을 알기 위해서 그분이 창조한 이 세계와 하나가 되었다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요한10,30)라는 언표는 공현의 심장부를 가리키는 볼텍스(소용돌이)라고 할 수 있다.
파편적인 관계속에서 오직 너를 결코 떠나지 않을 것, 그리고 네가 떠나지 않을 것과 관계를 맺으라는 유일한 실재관계를 알기 위해서,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라는 질문의 낙폭에 대해서, 1차적으로 불안한 질문, 혼란스런 질문, 불온한 질문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지배적이다. 그런 불안한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부터 유일한 실재관계가 시작한다는 견해들이다
Ⓔ우리가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첫 번째 장소는 즉 불안한 질문입니다. 이 불안한 질문에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를 예수로 인도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위험은 우리가 내면의 불안을 진정시키기 위해 우리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영혼을 진정시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항상 거기에 계시며, 우리의 쉼 없는 질문 안에 계십니다. 그 질문에서 우리는 "밤이 새벽을 찾는 것처럼 그를 찾습니다... 그는 죽음과 모든 인간의 위엄의 끝에서 우리를 괴롭히는 침묵 속에 존재합니다. 그분은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정의와 사랑에 대한 갈망 속에 계십니다. 그는 완전히 타자에 대한 우리의 갈망에 응답하는 거룩한 신비입니다. 완전하고 완전한 정의, 화해, 평화에 대한 열망"(C.M. MARTINI, Incontri al Signore Risorto. Il cuore dello spirito cristiano, Cinisello Balsamo, 2012, 66)(프란치스코 교황)
Ⓕ동방박사의 등장은 하느님을 믿는 이들 안에서, 또 믿지 않은 이들 안에서 상당한 혼란을 일으킵니다. 하느님을 모르고, 유다 문화를 모르는 이방인인 동방박사가 한 말은 종교적인 차원에서만 이해될 성질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유다인들의 임금”, 이 말은 당시 정치적 권력을 잡고 있는 헤로데에게 큰 도전이었습니다. 하늘에 태양이 두 개 일 수 없듯이, 유다의 임금은 헤로데여야 했습니다.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던 유다의 종교지도자들은 예로부터 기다리던 메시야 신앙을 짚어줍니다. “유다 땅 베들레헴”. 그곳에서 참된 통치자가 나와야 한다는 신앙 고백은 헤로데를 더욱 당황하게 만들었지요.(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
아기 예수를 만나는 것은 불안한 질문과 혼란을 야기하기도 하지만, 신앙의 현주소, 자신과의 관계에서 무엇을 듣고 있는지? 어떤 기쁨을 맛보고 있는지? 보다 본질적인 질문으로 넘어가야 한다는데 초점을 두기도 한다. 내가 지금, 관계를 맺으려는 세계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속에는 예루살렘에서 멈춘 신앙인지? 베들레헴으로 가고 있는 신앙의 여정인가 하는 질문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사야, 시편저자, 그리고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은 계시를 전한다.
Ⓖ예루살렘아,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네 위에 떠올랐다(이사야60,1-6) 주님 모든 민족들이 당신을 경배하리이다(시편72,1-13) 다른 민족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한 몸의 지체가 되며 약속의 공동 수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에페소서3,2-6)
빛, 영광, 모든 민족, 경배, 공동상속자, 공동수혜자의 상태는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된 것을 바라보지 않으면 통찰할 수 없는 경지이다. 이는 모든 인간, 모든 사물의 존재이유를 바라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모든 사물의 존재이유를 바라보는 것이 실은 유일한 실재관계를 바라보는 것임을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이라는 공간의 상징성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동방박사들을 깨우는 천사’, 대리석 부조, 12세기, 성 라자로 성당, 오탱, 프랑스(박태범라자로신부님 블로그에서)
동방에서 예루살렘까지는 누구라도 갈 수 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까지는 반드시 말씀을 들어야 갈 수 있다. 말씀을 듣지 않는 신앙생활의 종착지는 예루살렘까지이다. 그러나 말씀을 듣는 신앙은 베들레헴이다. 아기 예수님을 경배했다는 것은 아기 예수로 인해 인생이 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에서 언급한 공현의 의미를 다시 바라보면, "공현(Epiphania)은 창조 이래 산발적이고 파편적으로 드러났던 불가해한 사건, 하늘과 땅이 직접 연결된 언어너머의 사건, 어떤 인간, 어떤 사물, 혹은 자연에서 느끼는 경외심, 장엄함, 거룩함, 성스러움의 총체가 예수라는 한 아기의 인격안에서 그가 지닌 권능을 남김없이 드러난 현현을 의미한다."
예수라는 한 아기의 인격안에서 그가 지닌 권능이 남김없이 드러났다는 것은 그 권능을 우리와 나눴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것을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이라는 공간의 차이에서 바라볼 수 있다.
Ⓗ마태오 복음저자는 별과 동방박사들을 통하여 중요한 메시지 하나를 알려줍니다.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이라도 예루살렘까지는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곳에는 예수님께서는 계시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계신 베들레헴으로 가려면 반드시 ‘하느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말씀을 듣지 않는 신앙생활의 종착지도 예루살렘입니다. 봉사를 통하여, 교우들과 맺는 좋은 관계를 통하여 얻는 기쁨들 역시 예루살렘에서 얻는 기쁨입니다.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는 기쁨을 얻으려면 베들레헴으로 나아가는 여정이 있어야 합니다. 만일 미사를 드려도 살아계신 예수님을 체험하지 못한다면, 그 이유는 ‘말씀을 듣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김재덕 베드로 신부)
동방에서 예루살렘까지는 누구라도 갈 수 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까지는 반드시 말씀을 들어야 갈 수 있다. 말씀을 듣지 않는 신앙생활의 종착지는 예루살렘까지이다. 그러나 말씀을 듣는 신앙은 베들레헴이다. 여기서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언어적 경청이 아니라, 말씀에 머무를 수 있는 은총이라고 할 수 있다. 말씀에 머무를 수 있는 상태는 말씀을 사는 상태로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그것이 진정한 경배라고 할 수 있다.
성서에 ‘머무르다(μενειν, menein)’는 ‘머물다, 살다, 묵다, 함께하다, 일치하다, 소통하다, 깨닫다, 보다, 듣다, 감화되다, 교감하다, 섬기다, 충만하다, 채우다, 느끼다. 하나되다’ 등의 의미로 쓰인다. 이 <머무름>은 공간적인 머무름과 시간적인 머무름을 아우르는 것으로 영적 소통의 채널이 완전하게 가동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머무름은 다른 말로 하늘과 땅의 소통 채널을 하나로 작동시키는 은총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에 두 개의 소통방식이 존재하다면, 그것은 실존의 소통방식과 존재론의 소통방식으로 나누어 볼 수 있겠다. 실존의 소통은 생물학적인 생존과 관련되어 에고가 그 기능을 담당한다. 에고의 소통은 자신을 보호하려는 욕구에 지배를 받기에 생존에 위협을 느끼면 소통을 중단한다. 적자생존 법칙에 종속되는 방어적이고 선택적 소통에 해당한다. 고통과 과거를 담보로 특별한 관계에서 이 소통은 언제나 과거와 미래에 초점이 놓인다. 시간 속에서 생존의 방법을 모색한다. 이 소통은 과거를 담보로 하기 때문에 <오늘>이 없다. 오늘이 없기에 미래는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여기서 나오는 화법은 헤로데와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이 사용한 예루살렘의 트릭스터의 화법이다.
반면 존재론적 소통방식은 성령의 작용이다. 성령에게 소통을 맡기면 영적 교감으로 영혼은 자신의 창조주와 완벽하게 소통하기에 그분의 모든 창조물과도 완전히 소통이 가능하게 이끈다. 소통은 대화가 아니다. 소통은 창조된 모든 것들의 존재이유를 만나게 한다. 동방박사뿐 아니라 그 시대에 별을 연구하는 이들은 많았을 것이다. 그리고 별을 보고 임금이나 왕, 영웅의 출현을 예고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통해 자주 거론되는 신화적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신화적 맥락이 존재의 맥락으로 들어올 때, 우리는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라는 말이 지닌 말씀의 자장안에 놓이게 된다. 이는 종과 횡을 가로지르는 십자가의 소통방식으로 마음은 하느님의 마음과 뜻을 수신하는 통로가 된다. 모든 생명과 사물의 존재이유를 알게 되고, 인간이 맺는 유일한 실재관계는 하느님이라는 것은 체험하게 된다. 창조한 모든 창조물들의 존재이유를 바라보게 되므로, 모든 창조물의 존재를 오용 혹은 왜곡하지 않는다. 오용 왜곡하지 않음으로 사물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
복음사가는 현자들이 어떻게 이 세계와 하나가 되는지 다름과 같이 전한다. 공현은 현자들이 바친 예물이 초점이 아니라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는 것이 초점이다. 경배는 하느님의 창조질서에 대한 통찰과 감사라고 할 수 있다. 감사하기에 예물을 드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자 동방에서 본 그들을 앞서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에 위에 멈추었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가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여기서 ‘경배하다’가 먼저가 아니고 ‘머무르다(μενειν, menein)’가 먼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말씀에 머무르면 누구나 경배할 수 있다. 말씀에 머무르지 않으면 그것은 예루살렘의 경배이지 베들레헴의 경배가 아니다. 예루살렘의 경배는 특정한 사람들과 맺는 고통(혹은 쾌락)이라는 과거의 어떤 시간들로 고리를 맺는 관계에서 비롯된다. 그곳에 <오늘>은 없다. 그분의 말씀에 머무렀을 때, 창조된 모든 것이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선물임을 알게 된다. 우리가 맺는 이 세계는 우주와 맺는 관계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하느님께 속한 이 세계는 우리가 지각하는 분리된 사물들의 총합 그 이상이라는 것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주님공현대축일-“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를 중심으로 마태오 2, 1-12절을 통해 헤로데와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이 사용하는 예루살렘 화법과 동방박사들이 사용하는 베들레헴 화법을 생각해 보았다. 자신이 구사하는 화법은 그 사람이 지닌 세계, 자신의 영적인 신념체계를 표상한다.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이라도 예루살렘까지는 갈 수 있다. 그러나 그 곳에는 예수님께서는 계시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계신 베들레헴으로 가려면 반드시 ‘하느님 말씀’을 들어야 한다. 말씀을 듣지 않는 신앙생활의 종착지도 예루살렘이다.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말씀에 머무르는 것이고, 말씀에 머무른다는 것은 말씀에 자신의 전 생애를 거는 것이다.
다른 표현으로 특별한 관계가 아니라 유일한 실재관계를 사는 것이다. 그것이 베들레헴 화법이 지닌 청춘의 이름이다. 우리는 누구나 청춘에 끌린다. 청춘은 그 사람의 나이가 아니라 그 사람의 신념체계를 의미한다. 모든 사람의 심장에는 별이라는 청춘의 문장이 있다. 그러나 그 청춘의 문장으로 발화하기보다는 생존의 언어를 사용한다. 그런 맥락에서 별을 보고 베들레헴까지 갈 수 있었던 현자들은 청춘은 청춘에 끌린다는 것을 보여준 보시니 참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공현은 신의 현현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확인하는 은총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글을 마치며,
Ⓐ예수님께서 헤로데 임금때에 유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 그러자 동빙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듣고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 Ⓑ헤로데는 백성의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을 모두 모아놓고,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어디인지 물어보았다. 그들이 헤로데에게 말하였다. “유다 베들레헴입니다. 사실 예언자가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유다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의 주요 고울 가운데 결코 작은 고을이 아니다. 너에게서 통치자가 나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보살피리라.’” Ⓒ그 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시간을 정확히 알아내고서는,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말하였다. “가서 그 아기에 관하여 잘 알아보시오. 그리고 그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 Ⓓ그들은 임금의 말을 듣고 길을 떠났다. 그러자 동방에서 본 그들을 앞서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에 위에 멈추었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가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그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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