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작은 고을 베들레헴아, 너 잠들었느냐?(Lewis H. Render)
- 인간이 은총 없이 무엇을 할 수 있으며, 은총과 함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1.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루카 1,26-38 2.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1,1-18(2023년) 3.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1,1-18(2022년) |
1.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루카 1,26-38
성탄의 기쁨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글을 시작한다.
우리가 누리는 기쁨이 기뻐야한다는 당위에서 비롯된 기쁨 욕구인가? 아님 실존의 질을 결정하는 실체적인 기쁨인가?
루카복음 사가는 가브리엘천사의 인사를 통해 은총이 가득한 것 때문에 기뻐하라고 전한다. 요한복음 사가는 은총과 진리가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라고 기쁨의 실체를 전한다. 구약의 예언들 역시 이구동성으로 환호하라!는 실체의 중심에 우리를 구원할 한 아기가 왔다는 것을 전한다. 그 모든 것을 종합하건데, 성탄의 기쁨이란 그분의 충만함에서 비롯된 <은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기쁨의 근원이 <은총>인데, 왜 교회사에서 은총론에 대한 논쟁이 그토록 치열했던 것인가? 그 보다는, 정작, 우리에게 한 아기가 왔다는 이 전무후무한 강생의 신비 앞에서 실체적인 기쁨을 느끼고 살기가 왜 만만치 않은 것인가? <은총>은 예정설과 같은 전적인 수혜인가? 아님 하느님의 구원의지와 인간의 자유의지의 만남인가?
우리는 성서에서 전하는 수많은 은총 사건을 통해, 무엇보다 우리의 삶을 통해 하느님의 구원의지와 인간의 자유의지가 어떤 관계를 맺는가 하는 것에서 은총이 왜 기쁨의 충분조건인가하는 답을 스스로 찾기에 이르렀다. 결국 은총론의 논쟁은 인간을 무엇으로 규정할 수 있는가하는 인간학의 향방에 관한 것이었다. 인간은 신에 대해서 알고 싶었지만 인간에 대해서도 알고 싶었던 것이다. 나라는 인간을 모르면서 신의 사랑을 논하는 것이 과연 이치에 맞는 말인가? 하는 것을 조금만 생각해보면 은총론에 대한 논쟁이 결코 무의미한 혈전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성탄의 기쁨을 내재화하고 실체화하기 위해서 은총은 하느님과 인간관계 설정에서 반드시 짚고넘어가야할 본질적인 관계론라고 할 수 있다. 지난주 성령이 할 일이 따로 있고, 우리가 할 일이 따로 있다는 것에서 은총 질서가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또 우리가 느끼는 영적 기쁨은 <모른다/안다>를 통한 실체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을 성찰해 보았다.
그런 맥락에서, 루카 복음 사가가 전하는 기쁨의 실체가 무엇인가 이제 생각해 본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 28)
성탄축제의 기쁨을 말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은총은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그 성찰과정에서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인간이 은총없이 무엇을 할 수 있으며, 은총과 함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하는 질문이다. 그 질문에 대해 루카복음 사가는 다음과 같이 가브리엘 천사의 인사로부터 포문을 연다.
마리아가 가브리엘 천사의 수태고지에 네!하고 받아들인 것은, 하느님의 구원의지와 마리아라는 인류의 자유의지가 어떻게 길항작용을 하고 있었는가를 바라보는 것이 그 답이라고 할 수 있다.
마리아를 통해 제시된 답은 아우구스티누스 이래 20세기까지 진행되었던 은총론을 관통한다. 기스펠트 그라사케가 정리한 『은총-선사된 자유』에서 은총론의 방향은 대략 세 가지로 종합된다.
Ⓐ“하느님이 왜 모든 사람이 구원되도록 행하지 않고 특정한 사람들을 선택해서 그들에게는 당신 은총을 선사하고 다른 사람들은 선택되지 않아서 죄악에 방치되는가? 하느님이 절대적 주권을 소유하셨다면, 왜 구원은 보편적이지 않는가?”(65)
Ⓑ“하느님의 은총이 인간의 상태를 형성한다. 하느님으로부터 인간에게 선사된 창조된 은총은 모든 인간행동을 새로운 뿌리가 되어서 인간이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생활하고 하느님과 인간을 사랑하게 된다.”(77)
Ⓒ“하느님의 전능이 바로 인격적 자유인 때문에 피조물과 그의 능력을 억압하지 않는다. 하느님 전능의 위대함은 바로 인간을 자유에로 해방시키고 함께 협력하도록 해방시키는데서 드러난다”(120)
은총론이 봉착했던 첫 번째 과제는 “은총은 본성을 전제하며 이를 완성한다.”라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견해로부터 수면위로 떠올랐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다만 은총의 수혜자인가?하는 인간 본성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인간의 본성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하는 인간학과 닿아 있는 인간존엄의 문제였다. 본성 개념은 토마스아퀴나스의 스승인 아리스토텔레스의 공리로부터 시작된다. “본성은 한 존재가 자신을 성취하게 되는 선험적 테두리이다”라는 것에서 바오로나 아우구스티누스에서 그 예를 찾곤 한다. 그들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은총이 순간적으로 그들에게 닥쳐와서 그들의 자유를 정복하고 그들의 내면에서부터 급격히 그들 삶을 송두리째 변모시키는 사건으로 체험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의 본성을 무엇으로 규정할 것인가에 의해 은총의 일방적 수혜론이 표출된다. 그렇다면, 거기에 합세해 모든 인류는 왜 그런 특별한 체험에서 제외되는가?하는 예정설에 불을 지피는 기재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에 대해 은총론이 답해야 했던 것은 하느님의 구원의지와 인간의 자유의지가 어떻게 길항작용을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인간은 아무것도 쓰여지지 않은 타블라라사-빈 서판을 지닌 존재일 뿐이라는 사조가 만연했고, 이에 부응하여 은총이 거룩한 협박, 그리스도의 가현설처럼 인간의지의 무화설에 힘을 싣는 인간도구론이 팽배할 때, 은총론은 인간은 도구적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해명해야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그런 맥락에서 인간의 본성과 자유의지, 그리고 하느님의 구원의지의 관계를 가장 잘 보여준 사건이 바로 루카복음의 마리아의 수태고지였다고 할 수 있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라고 전하는 루카 1,26-38을 읽어본다.
그때에 26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27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28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29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30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31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32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33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34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35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36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37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38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결어를 먼저 말하자면, 성탄은 우리가 그분을 잉태하고 그분을 낳는 시간이다. 그러니까 특정시간이 아니라 모든 날들이 실은 성탄인 셈이다. 마리아가 몸과 마음과 영혼, 전 인격으로 예수를 잉태하고 낳았듯, 우리도 우리 구원을 위해 그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를 구원하는 은총을 낳기 위해선 은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빛으로만 빛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은총을 잉태하고 낳는 과정을 가장 모범적으로 보여주신 분이 성모마리아다. 마리아가 신자상의 표본이라는 것은 가브리엘천사와 주고받은 대화맥락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분이 자신의 본성과 자신에게 주어진 은총을 사유속에서 점검하고 결정했다는 것이다. 일방적이고 전적인 수혜자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위격과 인격의 결합을 마리아는 곰곰이 성찰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자유의지를 통해 은총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거룩한 경외심에 그냥 여기있습니다! 라고 신적 두려움에 굴복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라는 것에서, ‘곰곰이’ 라는 시간부사에서 마리아는 자신의 자유의지를 통해 네!를 선택하고 수행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은총의 본성이 밝혀진다. 시혜와 수혜가 같아진 지점이 바로 은총이다.
하느님의 은총은 그 자체로 인간 구원이 목적이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인간이 필요하지만 목적에서 수단을 분리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목적과 수단이 분리되지 않을 때 그 목적은 실현된다. 은총이 충만하다는 것은 목적과 수단의 일치가 이루어내는 에네르기, 창조의 힘이라는 것을 바라볼 수 있다. 이것이 루카복음 사가가 전하는 은총의 본성이자, 성탄의 기쁨이라고 할 수 있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라고 전하는 루카 11,26-38는 대체로 두 가지 양식으로 이해하고 있는 부분이다. 하나는 구약에서 예언된, 예언의 성취이고 다른 하나는 구원의 은총론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이사야7,14)
Ⓔ딸 시온아 환성을 올려라. 이스라엘아 크게 소리쳐라 딸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스바니야, 3, 14-20)
Ⓕ그러나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것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그 자신이 평화가 되리라.(미카5, 1-4.)
예언과 은총의 일치,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에서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이 어떻게 구원의 협력자가 될 수 있는지, 어떻게 사랑을 잉태하고 사랑이라는 아들을 낳을 수 있는지에 대한 거룩한 표징에 해당한다. 가톨릭신자들이 흠숭지례와 상경지례를 넘나들면서 마리아를 공경하는 것에 대한 이해라고 할 수 있다.
인류의 그 어떤 사람도 사랑을 하지 않고, 사랑으로 태어나지 않은 생명은 없다. 그런데 그 사랑의 출처를 알 수 없기에 사랑을 하면서 자신이 한 그 사랑임에도 스스로 구원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사랑의 출처를 제대로 알려주는 은총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은총은 우리로 하여금 사랑의 출처를 알게 한다. 사랑의 출처를 안다는 것은 단순히 신자가 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여부와 상관없이 사랑을 하면서 그 사랑을 구원받는 사랑이 되게 한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사랑은 그 자체로 천상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마리아는 어떻게 사랑을 잉태할 수 있었고 낳을 수 있었고 기를 수 있었을까? 이미 인류에게 이천년전부터 유출되었던 정답이 있다. 하늘의 구원의지, 성령으로 잉태했다. 성령으로 잉태했기에 성령으로 낳을 수 있었고, 성령으로 기를 수 있었던 것이다. 구세주탄생의 강생의 신비는 하늘이 쓴 구원의 시나리오다. 인간이 쓴 드라마가 아니다. 하늘은 이 구세사의 시나리오에서 절대적으로 인간을 필요로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라는 응답을 강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신이 이 세상에 올 수 있는 길은 수없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하늘은 마리아를 통해서 인류 구원의 길을 열었다. 여기서 하느님에게 드리는 흠숭지례. 성모님에게 드리는 상경지례, 성인들에게 드리는 공경지례의 그 경계가 모호해지는 신앙감(센수스 피델리움sensus fidelium)이 표출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성탄은 구약에서 예언된, 예언의 성취와 인간의 자유의지가 어떻게 길항작용을 이루는지를 보여준 은총론의 표징이자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2.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1,1-18(2023년)
이제, 요한 복음이 전하는 기쁨은 무엇인가?를 생각해볼 차례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라고 전하는 요한1,1-18에서 이미 창세기 저자에게 심어주었던. 삼위일체교리가 만들어지기 전, 성서저자는 우리라는 복수형의 신을 예표한다. <우리를 닮은 인간을 만들자>라는 것과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신과 인간의 경계가 사라진 <인터스텔라> 차원을 능가하는 문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한 아이가 베들레헴 구유에서 태어난 사건이 태초이전의 사건이자, 영원과 불멸을 여는 사건이 된 것이다. 이는 아래와 위(요한3,3/요한8,23) 지상과 천상(요한3, 31)으로 구별되고 단절된 우주론적 이원론이 극복되었음을 시사한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라고 전하는 요한1,1-18에서 우주론적 이원론이 극복되었다는 것은, 신이 인간이 됨으로써 새로운 은총질서가 형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한1,1-18을 다섯단락으로 나누어 읽어본다.
(1)머리말. 1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2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요한복음이 시작되는 이 머리말은 당시 공동체에서 불리던 로고스 찬미가를 통해 앞으로 전개될 요한복음의 선재사상, 삼위일체론, 창조론, 은총론, 구원론 등을 포괄한, 창조이전까지 아우르는 모든 것을 담는 영원의 빅피쳐에 해당한다. 한처음에는 단지 시작의 시간적 시점 중 맨 처음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시간이 사라진 영원속의 실재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말씀의 선재성은 창조이전의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 그분은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기에, 강생의 신비속에 이미 부활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하느님과 말씀의 위격적인 일치를 통해 삼위일체의 관계를 함축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말씀을 예수그리스도와 동일시함으로써 말씀은 창조되지 않고, 이미 영원 속에 절대적으로 <있음>의 원인이었다는 점이다.
(2)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4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5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창조론은 언제나 삼위일체론과 함께한다. 복음사가는 창세기 1장과 연결하여 말씀은 하느님의 창조행위에 동참했음을 전한다. 말씀의 유일무이한 가치와 모든 창조물의 가치를 천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4절과 5절에서 창조주와 장조물의 관계가 빛의 확산으로 이루어진다. 모든 것은 말씀으로 인해 존재할 뿐 아니라 그 실존 역시 말씀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여기에 인간 존엄성의 근거가 주어진다. 그것이 빛이자 생명이고, 그것을 바라보지 못하는 것이 어둠이자 죽음이다. 또한 여기서 주목할 것은 복음사가가 이원론적인 우주관을 해체하면서 빛과 어둠의 이원론은 여전히 작동된다는 것에 방점을 찍었다는 것이다. 빛과 어둠이라는 이 대척점은 인간의 자유의지의 영속성을 바라볼 수 있는 중요한 부분이다. 이는 요한사도가 전하는 은총론의 핵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톨릭의 4대 믿을교리 가운데 상선벌악은 인간 스스로의 결정이라는 함의가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3)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7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8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9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10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1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모든 사물은 그 사물의 실체를 결정하는 빛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말씀에서 나오는 빛은 그냥 빛이 아니라 그 빛을 가능케 하는 빛의 근원, 참빛이라는 강조어법으로 말씀만이 참된 빛이고, 말씀만이 생명을 줄 수 있는 빛으로 생명과 빛은 동의어가 된다.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반드시 필요한 생명의 근원임을 강조한 것이다. 여기서 세상이라는 표현은 두 가지 용법으로 사용되는데, 그분에 의해 창조된 세계의 총체⒜⒝⒞<------>인간의 선택에 의한 ⒟어둠의 세상으로 나눠진다. 누가 그 생명의 빛을 받아들이느냐에 의해서 빛과 어둠으로 갈라진다는 것에서 하느님의 구원의지가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제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 수 있다.
(4)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13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14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로고스찬미가는 14절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셨다”로 모아진다. 여기서 우주론적 이원론이 극복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하느님과 말씀의 관계에서 아버지와 외아들의 관계가 나온다. 그 관계에서 영광, 은총, 진리라는 하느님의 충만이 해명된다. 영광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드러나며, 은총과 진리는 그분을 맞아들이는 세상에게 주어지는 근원이 된다. 하늘의 영광은 곧 땅의 충만함으로 이어진다. 하늘과 땅의 경계가 사라진다. 여기서 <은총이 가득하다>는 표현은 은총의 난이도가 아니라 은총의 본성이 충만 그 자체인 가득하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마리아에게든 목자들에게든 하늘의 은총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에게 충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은총의 보편성, 본성이라고 할 수 있다.
(5)요한은 그분을 증언하여 외쳤다. “그분은 내가 이렇게 말한 분이시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16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 17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 18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
은총론에 이어, 16절에서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가 은총에 은총을 받게 된다는 것에서 다시금 은총이 가득하다는 것을 강조된다. 이 연쇄적인 강조는 사랑의 출처가 어디인가를 열게된다. 그 은총은 누구로부터 연유되는가? 18절에서 예수그리스도 외에 하느님께 이르는 길은 없으며ㅡ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느님을 알 수 있다(14,6-9)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그분의 정체가 바로 은총론의 주어이고, 은총에 은총을 이라는 것에서 성령의 은총이 주어진다는, 은총은 하나이면서 겹은총의 충만이 제시된다.
다시 정리해 본다. 성탄은 무엇인가?
우리 안에서 그분이 태어나는 시간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분을 우리 안에서 출산하는 시간이 성탄이다. 동정녀가 아들을 낳았는지, 처녀가 아들을 낳았는지가 초점이 아니다. 마리아라는 인류가 성령으로 인해 아들을 낳았다는 것이 초점이다. 그리고 그것을 요셉이라는 인류가 동행하여 함께했다는 사실이 참으로 중요하다. 요셉의 영적 출산은 마리아의 육적 출산과 다르지만 궁극적 본질은 은총론에서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성탄의 기쁨은 내가 예수를 출산했는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구유에서 태어났는지 오성급 호텔에서 태어났는지 그것도 문제가 아니다. 아기예수는 언제나 가난한 구유에서 태어난다는 것이 초점이다. 그분 앞에 가난하지 않은 인류란 없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가난한 구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유 앞에 붙는 가난한 이라는 형용사를 물질적인 가난으로 축소 국한시키는 것은 유물론적인 사고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가난한 구유라고 할 때, 가난을 물질적으로 국한시키려면 물질이 가난하면 마음도 가난할 확률이 높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 앞에서 부자는 가난하지 않은가? 어쩌면 어느 시대에나 부자는 물질의 가난보다 더 가난한 계층에 속할지도 모른다. 부의 출처를 모른다면 말이다. 공존의 의미를 모른다면,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을 스스로에게 주기로 결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난한 구유라는 것은 물질여부를 떠나서 바라보아야 한다.
요한복음에서 바라보아야 할 1장의 로고스찬가는 예수님의 선재사상을 말함으로써 궁극에 과연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까지 규명 했다고 할 수 있겠다. 인간은 철저하게 빛과 어둠으로 자신을 행로를 결정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지닌 존엄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분의 빛 속에서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것에서, 요한복음 1장에서 전하는 강생의 신비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제하지 않으면서 인간의 품위를 규정한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강생의 신비 못지않게 역설적으로 신비한 존재라는 사실이다. 수천번 수만번의 자유의지의 실패를 통해서 결국 은총의 수혜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걸 기다려 주는 아버지가 계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그의 본질에 있어서나 존재에 있어서나 신비이다. 그는 무한한 신비를 자신 안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그의 본성에 있어서나 그의 시초를 보아 초라한 상태에서 무한한 충족으로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한으로 향하고 있는 우리의 본성을 인식할 수 있는 길이란 결국 우리 자신이 무한에 의해 자신을 포착하도록 하는 것이다.(칼 라너)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그분이 직접 유한한 것의 일부분이 되심으로 유한한 것 전체가 무한으로 넘어갈 수 있는 관문을 만들기 위해, 아니 자기 자신을 이것의 출구이며 문으로 만드시기 위해서이며, 이 보잘 것 없는 것들의 실존이 바로 하느님 자신의 사랑이 되기 위해서이다. 그로인해 인간은 결국 자신을 넘어 자신에게 도달하게 된다는 점이다. 인간은 그 자체로 은총으로 빚어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의 구원의지와 인간의 자유의지가 하나로 만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체적 세계를 결정적으로 각인하고 변형시키기 위해서 우리 세계로 들어온 위격 속에서의 새로운 자유이며, 절대적 긍정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이며 희망이다. 그렇기에 Ⓘ은총은 하느님의 자기전달이다. 인간이 과실과 소외로부터의 해방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은총은 이것을 능가하여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극단적인 사랑의 자기 양도이다. 인간은 이로부터 전적으로 그 자신이 되고 전적으로 자유롭게 된다.(158)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1,11)는 것에서, 위에서 살펴본대로 하느님의 구원의지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제하지 않는다. 여기서, 이 땅의 현실, 구원받지 못하는 사랑에 대해 혹은 구원받지 못한 것 같은 사랑에 조금 더 생각해 보기로 한다.
예컨대1, 하느님을 믿지는 않지만 사랑이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하는 사랑 자체가 하느님께 본성적으로 받은 은총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헌신적으로 누군가를 사랑하다. 그 사랑이 더는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혼란을 겪는 것들을 보게 된다. 현실적인 문제들 앞에서, 특히 물질적으로 힘들어지면 그 사랑은 더는 앞으로나아가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그렇다. 그 사랑에 조금만 은총의 빛이 비추었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랑으로 승화되었을 것인가! 하는 그런 사랑들이 있다. 그때, 사랑은 채워지지 않은 약속으로 남는다는 것이다. 모든 사랑은 불멸과 영원을 갈망하지만 사계에 잠겨있다는 것에서 본성과 의지의 결합인 은총이 우리가 하는 모든 사랑을 구원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스스로 한 사랑조차도 스스로 구원할 수 없다는 것에서 그를 볼 수 있다. 은총이 없는 곳에서 은총을 바라보게 된다는 역설이다.
예컨대2. 하느님을 믿는 이들이 경험하는 은총의 부재현상 같은 것이다. 그분의 구원의지에 자신의 삶을 전적으로 의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은총을 경험하지 못하는 순간순간들 역시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은총의 터널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간헐적 기쁨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위의 두 예에서 보여주는 질문을 토마스 아퀴나스와 율리아나는 다음과 같이 답을 들려준다.
Ⓙ“인간 본성 속에 주어져 있는 하느님께로의 본질 관련성은 ‘지복직관에의 자연적 열망’이라고 할 수 있다(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 본성에는 인간이 무한에 대한 열망의 최후 충만으로의 지복을 가져오는, 하느님 충만의 관상에 대한 갈망이 있다고 전한다. 그가 하느님을 믿든 안믿든 인간은 사랑을 할 수 있는 에네르기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사랑이 스스로에게 줄 수 없는 어떤 것에로 열리어 있고 정향되어 있다는 것에서 모든 사랑은 구원받는 사랑과 그렇지 않은 사랑으로 갈리게 된다.
여기서 인간은 지복직괸의 기쁨만 관상하는 것이 아니라 슬픔, 고통, 절망 같은 것도 수시로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은총에 자신을 맡기지 않은 사람이 경험하는 사랑의 막다른 골목과는 달리 하느님 은총에 자신을 개방했음에도 그런 막다른 골목을 마주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노리치의 율리아나는 다음과 같은 위로를 전한다.
Ⓚ“가장 드높은 것이 나다. 가장 낮은 그것이 나다. 나는 모든 것이다.”(노리치의 율리아나,『사랑의 계시』 )
은총에 우리 자신을 개방했음에도 기쁨과 슬픔의 낙차를 수시로 경험하는 것은 우리가 본성과 은총으로 주님을 안다는 것이며, 우리 자신이 본성과 은총 안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며,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의 속죄이고(정화와 통회가 필요함), 나아가 은인과 지인과 타인에 대한 속죄이며, 나약함의 근원이기도 하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며, 이 세상의 삶이 실은 속죄의 과정이기에 그렇다고 전한다. 따라서 우리가 경험하는 기쁨과 눈물의 의미, 그 모든 것을 영적으로 통합해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아기 예수가 태어날 때 잠들어 있었던 베들레헴은 은총을 은총으로 바라볼 수 없는 인류의 수면상태와, 은총을 은총으로 알아본 이들이 경험하는 영혼의 어둠,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경험하는 이 땅의 시간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오! 작은 고을 베들레헴아, 너 잠들었느냐?(Lewis H. Render)
- 인간이 은총 없이 무엇을 할 수 있으며, 은총과 함께는 무엇을 할 능력이 있는가?
성탄의 기쁨은 무엇인가? <오늘 너희를 위하여 구원자가 태어나셨다>라고 전하는 루카 2, 1-14에서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는 천사의 알림에서.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라는 천사의 찬미에서,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큰 축복이 되는 사건이고 모든 사건의 사건이고 축복의 축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소식을 제일 먼저 접한 이들이 밤에도 양떼를 지키는 목자들이었다. 깨어있는 자만이 성탄의 기쁨을 알 수 있다는 표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어지는 루카 2, 15-20에서는 <목자들은 마리아와 요셉을 찾아냈다>라고 전한다. 성탄의 기쁨은 <마리아-엘리사벳-요셉-목자들-동방박사>에게서 나타나는 은총의 연쇄고리에서 은총이 지닌 보편질서를 바라볼 수 있다. 은총의 본성이 가득하다는 것은 공존의 원리이기에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마리아-엘리사벳-요셉-목자들-동방박사>는 인간이 은총 없이 무엇을 할 수 있으며, 은총과 함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하는 것을 보여준 이들이었다는 것이다.
은총은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1,37)는 것과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1,14)는 것을 구체적, 실체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들 안에서 경험되는 축복이며, 우리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서, 은총에 은총을 주신 분을 알아보는 지혜에서, 성탄의 기쁨은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된 기쁨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3.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1,14(2022년)
[1] 메리크리스마스! 라는 지극히 단순하고 동화적인 인사에는 인류의 오랜 기다림 끝에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기쁨>이 모든 이에게 무의식적으로 관류하고 있는 듯하다.
성탄이 싼타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전의 날들과는 다른 그 무언가 전 지구를 들뜨게 하고, 설레게하는 그 어떤 시간 속에 안겨 있는 것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성탄은 아이러니 하게도 가장 예수적이지 않은 곳에서 더 기다리는 날이 되었다. 일종의 마게팅전략이 되어버린 장식적인 트리의 시대에,누군가에게 소외감, 박탈감, 결핍감을 더 확인시켜주는 슬픔일 수도 있는 시간앞에서, 어떻게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2,14)를 바라볼 수 있는지 생각해 본다.
이는 <성탄을 축하합니다!>라는 인사는 과연 어떤 의미로 건네지는 것일까?를 자문하는 것이다. 이 물음은 어쩌면 흥을 깨는 주제이자, 기쁨과는 좀 거리가 있는 무거운 주제라고 할 수 있다. 하늘과 땅이 동시에 기뻐하는 성탄의 축제 앞에서 이 땅의 현실을 염두한 것으로,
무엇보다 성탄은 어떤 특정한 날이 아니라, 어떤 상태, 모든 날이 성탄이어야 할 것이라는 의미에서, 무엇보다 모든 이들의 성탄이 되어야 할 것이라는 의미에서, 성탄은 원심력과 구심력을 동시에 지닌 축제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이에게 구원의 문이 활짤 열렸다는 것은 기쁨의 원심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선물로 주어진 그 은총을 모두가 받아 누리는 것은 아니기에 그 기쁨은 구심력이 작용하는 이중의 축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언뜻 미완의 기쁨을 온전한 축제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궁극적으로 메시아의 도래는 창조의 완성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그리고 그 완성은 인간의 힘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완전히 기쁘면서 동시에 완전히 기쁘다고 말할 수 없는 성탄 축제를 보내면서 <성탄을 축하합니다!>라는 인사가 내포하고 있는 몇 가지 단상을 적어본다.
[2]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라고 전하는 요한1,1-5.9-14과 <오늘 너희를 위하여 구원자가 태어나셨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2,1-14)의 인사를 연결하여 하느님 자신이 아기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강생의 신비를 어떻게 매순간 바라볼 수 있을까?
이것은 앞에서 전제하듯, <성탄을 축하합니다!>라는 의미가 어떤 시기가 아니라 매 순간 우리 마음상태라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매 순간 성탄이 우리 마음의 상태라는 것은 신의 현존은 우리의 가장 순수한 상태에서 체험되는 사건이고, 이것은 순전히 선물로 주어진 은총이기에 그렇다.
이는 요한1,1-5.9-14에서 14절의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는 문장의 아름다움은 어디에서 연유되는가?를 묻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그것은 신의 존재양식의 아름다움이자 그 아름다움에서 연유된 사람의 아름다움을 또한 의미한다고 할 때, 그 아름다움이란 대체 어디에서 연유된 것일까?를 질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군가는 이 세상의 사물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사물을 고르라한다면 그것은 <구유와 십자가>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때의 아름다움이란 형상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형상이 지닌 본질적인 아름다움, 치장과 환상을 걷어낸 순수형질의 아름다움, 즉 사랑의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강생의 신비는 예수님의 공생활 전반 그리고 십자가신학을 거쳐 부활신앙을 낳는 모태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근원적인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위대한 존재가 그 위대함을 내려놓을 수 있고, 전능한 존재가 그 전능을 내려놓을 수 있는 그 여유가 아름다움의 실체라고 할 수 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라고 전하는14절이 하느님이자 인간인 그분의 정체성이자 그것은 바로 그분의 모상으로 창조된 우리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그리고 본질적인 정체성은 그렇기에 동시에 아름답다. 본질적인 정체성이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유아독존하는 군계일학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그 아름다움은 만날 수 없는 데 만나고 하나가 될 수 없는 데 하나일 수 있는 빛과 생명이 어우러진데서 이루어진 화음이기에 아름답다고 할 수 있다.
[3] 14절이 지닌 신의 정체성과 인간의 정체성이 어떻게 만나 본질적인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는 것일까?를 주절과 종속절로 나누고 그것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해 보겠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우리 가운데 사셨다.(14절)
여기서,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가 주절이라면, <우리 가운데 사셨다>는 종속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주절과 종속절의 관계는 독립변수가 아니라 종속 변수다. 우리가 보내는 성탄축제의 이름은 <나 홀로 집에>가 아니라는 점이다.
⒜말씀이,
그리스도 신앙은 <말씀>이 우리 안에 어떻게 정립되고 있는지에 따라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는 의미를 구체적으로 바라보고, 살아낼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근본적인 기쁨의 원천이고, 이 기쁨은 훼손되기는 하지만 사라지지는 않는 불변의 내재성이다. 실재가 비실재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요셉 라팅거 추기경(「오늘에 있어서의 신에 대한 신앙고백」)은 “신에 대한 그리스도적 신앙은 무엇보다도 단순한 물질과는 다른 말씀의 우위를 말하는 결단”이라고 전한다.
이것은 말씀과 물질의 관계를 정립하는 것으로 말씀은 물질과 병치되거나 또는 물질에 끌려가는 그런 위상관계를 논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은 물질의 폄하가 아니라 물질의 제자리 찾아주기에 해당한다. 이는 <구유나 십자가>의 의미를 사랑의 이름으로 바라보게 한다고 할 수 있다. 물질과 자본을 우상숭배하는 시대에 <말씀의 우위를 말하는 결단>이란 단순히 말씀의 존재우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서 전반을 통하여 유일하게 신의 존재양식을 추론할 수 있는 것은 말씀이다. 신의 있음과 없음을 말할 수 있는 그 근거, 사람이 신의 존재를 사유할 수 있는 근거는 오직 말씀에서 비롯된다. 말씀은 존재함이다. 그 말씀은 사람이 신의 존재 방식을 추론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이자, 신의 현존을 체험하는 가장 결정적 순간의 열림이기도 하다. 이 존재방식이 창조의 근원으로, 그 창조의 근원은 빛과 생명으로 현존한다. 또한 말씀은 신의 존재양식일 뿐 아니라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창조근원에 해당한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이 종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태초>에 <한처음>에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종말과 태초가 하나라는 사실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물질의 위치와 근원를 말해주는 말씀의 우위란 사물의 이치를 깨달아갈수록 선험적으로 내재하고 있는 말씀의 운위성, 창조의 근원을 바라볼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말씀의 현존인 빛과 생명에 관한 것이다. 진리란 존재를 증명할 필요가 없으므로 반대쌍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빛은 어둠, 생명은 죽음, 죄는 사랑이라는 반대쌍으로 우리 앞에 놓인다. 마치 빛이나 생명, 사랑이 진리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상황에 처한 것처럼 말이다.
이는 가장 좋은 것을 인간에게 건네기 위해 어둠까지 불사하는 창조의 원리인 자유의지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죄가 사랑의 결핍이라면, 어둠은 빛의 결핍이다. 어둠은 죄와 마찬가지로 어떤 특별한 존재양식이 없다. 어둠, 죄, 죽음은 함께 다니는 블랙트리오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성탄을 축하합니다> 라는 인사는 <어둠, 죄, 죽음에서 해방을 축하합니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빛을 바라보기 위해 어둠에 대해 조금 더 생각을 해 보면,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5절)
그런데 그 빛이 어둠을 비추고 있는데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한다? 빛은 <보시니 참 좋았다>는 충만의 원리라면 어둠을 결핍의 원리다. 결핍의 원리로는 충만의 원리를 결코 깨달을 수 없다.
토를라이프 보만은 『히브리적 사유와 그리스도 사유의 비교』에서 빛과 어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한다.
“빛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는 어둠도 있다. 그러나 어두움은 빛의 무[無]이기 때문에 그것은 빛과는 전혀 다른 것이면서 빛의 존재에 관여한다”
빛의 없음이면서 빛에 관여한다는 이 어둠의 신비, 어둠에서 벗어나는 데는 어떤 단계가 있을 것이다. 어둠을 숨을 수 없다는 인식이다. 그 다음 단계는 설령 숨길 수 있는 능력이 있더라도 숨기고 싶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여기서 숨기고 싶다는 것은 자기환상이라고 할 수 있다. 우상 중에 가장 큰 우상은 자신이 만든 에고라는 환상이라고 할 수 있다.
구유위에 누워있는 한 아기와 십자가의 예수는 숨길 것이 없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표징에 해당한다. 숨길 것이 없다는 것은 두려움이 없다는 말일 것이다. 두려움이 없다는 것은 완전한 사랑을 의미할 것이다. 완전한 사랑만 두려움이 없다.
그러기에 성탄의 기쁨은 본질적인 것을 추구하는 기쁨의 본질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 기쁨은 진리의 열매라고 말할 수 있다. 진리는 시간으로 말하자면 모든 것을 밝히 볼 수 있는 한낮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에 대한 환상, 특히 자기 환상이라는 어둠이 우리 자신안에서 사라진 상태는 평화와 기쁨의 상태로 경험된다. 평화와 기쁨 속에서만 우리는 환상없는 자신과 교감하고 말씀인 하느님과 교감할 수 있는 빛의 상태에 자신을 두게 된다. 어둠의 상태에서는 신을 모르는 것만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어둠은 무명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다시 여기서 <성탄을 축하합니다> 라는 인사는 <온전히 빛으로 창조된 당신을 축하합니다!> 라는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이 되시어
말씀이 사람이 되었다, 여기서 다시 “신에 대한 그리스도적 신앙은 무엇보다도 단순한 물질과는 다른 말씀의 우위를 말하는 결단”을 일면적으로만 생각해보면, 우리는 한없이 기쁜 성탄을 보내야 마땅하다. 이는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이기에 말씀이 지닌 무한한 확장의지는 실은 말씀의 평등성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며, 그 확장의지가 바로 기쁨의 원천, 원심력이고, 인간의 품위를 논할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하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는 빛과 생명과 사랑이 사람의 존재양식이라는 것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인간에 대한 두 가지 사실을 제시한다고 볼 수 있다.
말씀이신 그분이 인간 역사에 인간과 같이 육신을 취하셨다는 것은 “여기서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창세기1, 25-26)”에서 보듯, 하느님과 인간은 종적인 관계, 모상의 근원을 보게한다. 하느님의 거룩함을 인간이 물려받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인간의 품위가 어떤 경지까지 이를 수 있는지에 대한 예견이라고 할 수 있다.
칼러너는 (「강생의 신비, 그 신학적 소고」)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었다는 즉 인성을 취하셨다는 것은 창조주와 모든 피조물의 관계를 “직접 유한한 것의 일부분이 되심으로 유한한 것 전체가 무한으로 넘어갈 수 있는 관문을 만들기 위해 아니 자기 자신을 이것의 출구이자 문으로 만들기 위이해서이며 인간의 실존이 바로 하느님 자신이 되기 위해서이다"라고 전한다.
그런데, 10절과 11절을 보면, 인간은 스스로 만든 환상을 품위라고 추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인간의 자유의지는 환상과 품위를 놓고 빛과 다툰다는 사실 앞에 서게된다. 인간이 생각하는 품위와 말씀의 품위가 다르다는 사실이 세상이 유포한 인간의 또 다른 환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중심엔 물질이 이 세상을 끌고가는 힘이라고 선택하기에 물질의 왜곡까지 가세한다.
10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11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여기서, 인간은 인간이 인정하든 안하든 그분의 창조물인데 자기의 근원 자체를 부정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것은 자기 환상을 공고히 하는 어떤 위치에 자신을 귀속시키고 싶다는 결핍의지가 작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품위유지의 도구가 자본주의가 권하는 자본의 위력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이름 앞에 붙은 어떤 사회적 위치를 유지하거나 지키고 싶어한다. 그런데 그 모든 사회적 위치를 좌우하는 것이 자본이라는 힘이다. 자본을 유일한 힘을로 간주할 때 사물은 본래의 위치를 상실한다.
여기서 <성탄을 축하합니다>라는 인사는 <하느님만으로, 예수님만으로, 성령만으로, 삼위일체만으로 인간의 품위를 유지할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라는 의미가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가운데 사셨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우리 가운데 사셨다.(14절) 종속절에 이르러 우리의 기쁨에 대한 깊은 성찰을 요구한다. 기쁨의 원심력에서 기쁨의 구심력으로 우리의 현재 상태를 가감없이 바라보게 된다고 할 수 있다. 빛 앞에 서 있는 우리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
(개인적으로 성탄 묵상은 그 어느 시기보다 어렵다. 부활 시기보다 성탄 시기에 자비의 기도를 더 많이 바쳤다고 할 수 있다. 나 자신이 교묘하게 은폐하고 있는 심연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빛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아 성탄 고백성사도 세 번이나 봤다. 결론은 모두가 내탓이었다.)
인간이 어떤 위치를 갖고 싶어한다는 것은 함께가 아니라 홀로를 지향하는 단독의지에서 파생한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사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본래적인 타자성을 요구한다고 할 수 있다. 낙원이라는 구조가 함께라는 구조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함께는 어떤 게토화된 함께가 아니라 그 게토화를 무화시킨 함께다. 이것은 윤리적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근원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타자성은 선택 상황이 아니다. 이것은 마치 인간의 자유의지와 상충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 타자성에 관한 요구는 <삼위일체 하느님>이라는 신의 관계성에서 찾을 수 있다. 성탄의 핵심 키워드가 타자성을 담지하고 있고, 종적인 그분과의 관계를 완성하는 것은 횡적인 테제인 타자성이라고 할 수 있다. 사막의 은수자라는 말이 성립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삼라만상이 인간에게는 타자라고 할 수 있다.
신이 인간역사에 개입할 때 마리아를 통하고 요셉의 보호를 필요로하는 신이었다는 것에서 그것을 알 수 있다. <말씀>은 혼자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를 함유한다. 들을 사람이 없다면 말한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냥 신은 있다,가 아니다. 신에게 인간의 찬미와 감사가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인간이 없는 신은 생각할 수 없다. 하이데거는 이를 <인간과 신은 필연적으로 서로에게 내 맡겨진 존재>라고 규정하기도 한다. 홀로 존재하는 신이 아니라 이제 우리 가운데 존재하는 하느님이 되셨다! 이것이 성탄 축제를 마냥 표피적인 축제로 만들 수 없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우리 가운데는 인간과 동료인간과의 횡적인 관계에서 그분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 가운데 그분이 있다는 것이다.
12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13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그분을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이라는 표현에서 관계론의 핵심은 바로 나와 신의 관계는 나와 너의 관계로 치환할 것을 요구한다. 80억 인구가 예외없이 그분의 창조물 이기에, 그 창조물들의 생존을 담보하는 것은 80억 인구가 서로에게 위임된 존재라는 존재일치성을 의미한다. 용서 혹은 자비라는 개념은 단적으로 공존의 존재라는 사실을 염두하고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용서와 자비는 하느님을 통해서 행해지지만 동료인간과의 관계를 복원시킨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구원자가 태어나셨다.>라고 전하는 루카2,1-14의 구원의 첫 번째, 메신저인 목자들을 통해 <우리 가운데 사셨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다음 주 묵상 주제지만 조금 살펴보기로 한다)
그 고장에는 들에 살면서 밤에도 양 떼를 지키는 목자들이 있었다.(8절)
이를 프란치스코 교황은 <밤의 거룩한 질량과 주님 출생의 엄숙함>에서 “그들은 원하는 대로 살 수 없었고, 그들이 돌보는 양의 필요에 따라 조정되고, 무엇보다 가난하고, 무리에 의존하고, 전체의 운행, 자연의 리듬에 따라 살아내야 하는, 인간 존엄보다는 최소에 생존에 맡겨져 있는 사람들”이라고 목자들을 아웃사이더의 표상으로 규정한다.
그렇다면, 최소의 생존의 상황 속에 놓여 있던 목자들이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에 대한 최초의 계시, 그것을 목격할 수 있었던 것은 <성틴을 축하합니다>와 어떤 관계에 놓이는가?
가난한 이들, 소외된 이들, 중심부 담론에서 아웃사이더가 된 이들이 구약에서 모세의 출현을 필연으로 만들었듯, 그분의 강생의 신비는 바로 중심부담론에서 제외된 아웃사이더들에 의해 그 필연성을 담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땅의 울부짖음이 그분을 이 땅으로 오게 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땅이 그분의 창조의 목적에 맞는 그런 유토피아였다면 그분이 왜 이 땅에 사람의 모습으로 오셔야 하겠는가?
여기서 <사셨다>는 그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더욱이 그분이 우리 안에서 <말씀>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물질과는 다른 말씀의 우위성을 선택하는 주동적인 행위의 궁극적인 지점은 말씀으로 타자를 <살게 한다>는 사동적 의미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네가 말씀으로 살아 네 이웃 역시 말씀으로 살게하라는 것. 누군가는 대속의 짊을 함께 지라는-케레네사람 시몬이 되라는 요청이라고 할 수 있다.
복음묵상 [우리 가운데 계시는 하느님-박용욱 미카엘 신부]는 성탄 시기는 싼타클로스가 되어버린 하느님을 동화적으로 환호하는 시기가 아니라 ‘모든 사람’안에 하느님의 빛을 깃들게 하는 시기라고 전하고 있다.
“성탄 신비를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 어디 계시는지 비춰주십니다. 하느님은 우리 누추한 일상 안에 계시고, 자주 흔들리고 넘어지는 우리 안에 계십니다. 하느님은 가난한 이들 안에, 고통을 대물림하는 이들 안에, 죽음의 절망 앞에 선 이들 안에 계십니다."
모든 이에게 빛이 되는 하느님이시기에, 우리는 그 빛을 생명의 빛으로 감지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다가갈 수밖에 없다. 내가 빛이라면 어둠 곁으로 다가가는 것이 당연하고 필연적이다. 다가가지 못했다면 내가 아직 말씀을 입고 빛이 되지 못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우리가 완성해야 하는 성탄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 빛이 되어 다가가기 위해,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를 우리 안에 진정한 기쁨으로 내재하게 하는 일이 <우리 가운데 계셨다>를 가능하게 한다고 할 수 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는 <글로리아 인 엑첼시스 데오>가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사셨다>는 것은 < 오! 베들레헴 작은 고을 너 아직 잠들었는냐>를 묻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가운데 그분이 살도록 하는 일, 그것이 <성탄을 축하합니다!> 라는 인사의 제의적 성격일 것이다. 우리는 이미 누군가에게 빛(별은 별과의 거리가 있듯)이므로, 이미 살고 있는 분을 진정으로 살게 하는 일!에 오늘을 봉헌합니다, 라는 제헌의 의미가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14절 후반부는 그것을 영광이라고 밝히고 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14절)
14절은 공생활, 십자가죽음, 부활을 염두한 복음사가의 표현이 <영광>이라는 말로 수렴된다. 인간은 궁극적으로 십자가에 머무르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극복하는 영원한 생명이라고 할 수 있다. 말씀안에, 즉 성탄 안에 예수님의 전생애가 이미 포괄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성탄을 축하합니다!>라는 의미가 내포하고 있는 중요한 키워드가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14절)라는 한 문장 안에 오롯이 담겨 있다고 할수 있다. 이 문장은 모든 창조의 근원이며 십자가와 부활과 연결되어 구원으로 완성될 것임을 의미한다. 그것이 말씀으로 창조된 창조의 궁극적인 아름다움일 것이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세계가 그리스도의 가치관과는 무관하고 판이하게 다르게 우리 눈에 비칠지라도 인류가, 우주가 아직도 존재한다는 그 자체가 이미 그리스도라는 오메가 포인트를 향해 진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역사는, 인류가 보편적으로 원하는 인간상태를 다각도로 인간을 극단의 상황속에 처하게 하여 그 보고서를 제출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은 인간 스스로 인간을 완벽한 기쁨 속에 머물게 할 수 없다는 보고서의 다름 아니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가 구원을 원하고, 행복을 원하고, 기쁨을 원하고, 사랑을 원하고, 평화를 원하고, 영원불멸을 원하고 있다는 그 자체가, 가장 좋은 것, 가장 아름다운 것, 가장 거룩한 것을 원한다는 그 자체가, <성탄을 축하합니다!>라는 인사에 모두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미래의 어느 시점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갈망이 이미 선취된 것임을 바라볼 때,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2,14)라는 천사의 인사는 이 세상을 끌어가는 궁극적인 축복임을 받아안을 수 있을 것이다.
글을 마무리하며, 14절을 다시 읽어본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1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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