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기쁨의 ‘성채’(城砦), ‘모른다’는 해자(垓字)와 ‘안다’라는 커룹(Cherub)

나뭇잎숨결 2023. 12. 15. 07:01

호수, 계곡, 강이라는 세겹의 해자를 갖고 있는, 독일의 노이슈반슈타인 성(Schloss Neuschwanstein)

_https://www.neuschwanstein.de/

 

기쁨의 ‘성채’(城砦), ‘모른다’는 해자(垓字)와 ‘안다’라는 커룹(Cherub)

-대림3주,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를 중심으로

 

 

 

 

1. 정지상의 「신설(新雪)」과 고흐의 「아몬드 나무」

 

 

정지상의 「신설(新雪)」

 

 

昨夜紛紛瑞雪新작야분분서설신:어제 밤에 펄펄 상서로운 눈이 내더니,

曉來鵷鷺賀中宸효래원로하중신:새벽엔 뜨락의 원추 새가 신년하례를 드리네,

輕風不起陰雲捲경풍불기음운권:바람도 일지 않고 구름도 산뜻 걷혀,

白玉花開萬樹春백옥화개만수춘:나무마다 백옥 같은 꽃이 피어 새봄이로세.

 

 

고려조 정지상(鄭知常)이 읊은 「신설(新雪)」과 고흐가 그린 「아몬드 나무」 는 시.공간 차이뿐 아니라 장르적으로 맥락이 닿지 않는다. 눈과 꿏이라는 소재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데 누군가 「신설」을 읽으면서 고흐의 「아몬드 나무」를 떠올렸다면. 그것은 이성이 아니라 정서의 다른 차원일 것이다.

 

마치 베드로와 바오로가 서로의 열정을 예찬하면서 여차하면 맹렬히 분노하듯, 내면을 들키며, 슬퍼한 것 같은...어떤 과잉으로 초과된 열정과 그에 의해 촉발된 상반된 정서...끌리면서 동시에 밀어내는...외면한 채 바라보는, 당분간은 멈출 수 없는 자신의 열정에 대한 투신이 더 중요한... 그것을 그냥 '열정의 병치'라 부르기로 하자. 그 정서는 베드로와 바오로의 열정의 방향을 가르킨다. 두 사람은 예수님에 대한 같은 '사랑'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내 열정이 과연 사랑인가?라고 물을 수 있는 시간이 아직은 오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 안의 어떤 사랑은 밖(원심력이고)이고, 어떤 사랑은 안(구심력)이다. 안에서 멀어지기 위해 더 멀리가야 하고, 멀어지는 것과 더 멀어지기 위해 안으로 안으로 더 깊이 침잠하는 것과 같다.

 

꽃과 눈. 꽃과 눈은 생태적으로는 서로에게 상극이다. 눈이 오면 꽃이 피기 어렵다. 꽃이 피려면 눈이 오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눈과 꽃, 이 역설같은 모순이-눈속에 핀 꽃이라는 자연현상을 아주 자연스럽게 연출한다. 눈이 꽃을 극복한 것인지, 꽃이 눈을 극복한 것인지 우리는 모른다. 다만 눈과 꽃이라는 상극의 자연현상에서 어떤 관계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는 저항은 결국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다. 극복된 저항은 언제나 저항하는 쪽으로 끌려간다 - 어떤 사랑들은 강한 저항으로 시작된다. 꽃이 눈에 저항하고 눈이 꽃에 저항하듯...

 

스피노자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열정이 사랑인가?라는 숙고 끝에, 열정이 처음에는 자기가 하는 사랑에 도취되다가 이성이 개입되는 순간, 타자가 하는 사랑이 드디어 보이게 된다고 말한다.  “증오는 증오의 보복에 의해 증대되고 반대로 사랑에 의하여 제거될 수 있다. 또 사랑에 의하여 완전히 정복된 증오는 사랑으로 변한다. 그리고 사랑은 이전에 증오가 없었던 경우보다 한층 더 크다”

 

 

 

 

 

 

고흐의 아몬드나무

 

 

 

 

2. 관념의 질서의 결합은 사물의 질서의 결합과 똑같다(스피노자)

 

 

대림3주는 <기쁨>주일이다. 기쁨 주일에 상황이 기뻐서 기쁜 사람이 얼마나 될까? 상태가 상황을 기쁨으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 기쁨은 근육의 미소가 아니라, 내면의 기쁨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위에서 스피노자가 한 말을 조금 더 생각해 보기로 한다. 스피노자는 유대사회에서 진리의 충돌 때문에 파문당한 유태인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대분의 날들이 거의 기뻤다. 낙천적이었다. 성격적 낙천성이 아니라 모른다와 안다를 통과한 안분지족이었다. 누가 스피노자를 좋아하지 않을까? 라는 말이 돌 정도로 스피노자는 멜랑꼴리아에 젖어있는 모든 지성인들에게 애증의 필독서가 되었다.

 

정리 43.증오는 증오의 보복에 의해 증대되고 반대로 사랑에 의하여 제거될 수 있다. 또

 

정리 44. 사랑에 의하여 완전히 전복된 증오는 사랑으로 변한다. 그리고 사랑은 이전에 증오가 없었던 경우보다 한층 더 크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이원론(정신과 물질)을 극복하기 위해서 물질과 정신을 통일시키려고 하였다. 『에티카』 정리34에서는 어떻게 같은 선을 지향하는 바오로와 베드로가 대립할 수밖에 없으며, 그럼에도 정리35에서는 바오로와 베드로가 일치할 수 있는지 예를 들어줌으로써, 열정이라는 코나투수를 지닌 인간들이 정서와 이성의 대립과 일치를 통해, 관념의 질서와 사물의 질서는 같다는 명제를 도출한 것이다.

 

정리32. 인간들이 열정에 복종하는 한 그들은 본성상 일치한다고 말할 수 없다.

 

정리33. 인간은 열정적 정서에 사로잡히는 한 본성상 다를 수 있으며, 그러한 동일한 인간조차도 변하기 쉽고 불안정하다.

 

정리34. 인간은 열정적으로 정서에 사로잡힐 때 서로 대립할 수 있다.

 

정리35. 인간은 이성의 지도에 따라 생활하는 한 본성상 언제나 필연적으로 일치한다.

 

흔히 스피노자를 결정론자라고 부른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이성 중심주의의 데카르트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이성중심주의자들이 폄하한 신체에 그는 주목한다. 신체 역시 서로 인과관계를 가진 무수히 다른 개체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개체들의 이합집산에 따라 인간을 이루는 개체들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거나 상실하게 된다는게 그의 출발점이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무수히 많은 '개체'로 이루어진 하나의 '집합'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신체'를 구성하는 질서와 연결은 고스란히 인간의 '정신'를 구성하는 질서와 연결에 적용된다. 정신과 신체는 한 실체의 두 가지 표현 방식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신체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정신은 서로 다른 여러 '관념'의 '집합'으로 구성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정신이 서로 다른 관념들로 구성되어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참된 인식에 도달할 수 있을까? 물론 인간은 신이 아니므로 이러한 관념들의 인과관계 질서 전체를 다 알지는 못할 것이고, 참된 인식에 도달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피노자는 우리가 '적합한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부적합한 인식'을 하게 되는 것은, 우리 인식의 대부분이 원인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결과에 대한 부분적인 인식이기 때문이라고 스피노자의 견해다.

 

『에티카』에서 외부의 자극에 따른 이미지는 나의 활동 역량인 '코나투스'를 증가시키거나 감소시킨다. 코나투스는 질병, 상해, 쇠약 내지 유사한 요인들에 의해 감소될 수 있으며, 마찬가지로 운동, 영양공급, 교육 내지 수많은 긍정적 영향에 의해 증가될 수 있다. 물론, 감정적인 요인도 여기에 포함된다. 여기서 정신의 활동 역량이 감소될 때, 코나투스는 더 낮은 상태의 완전성으로 이행하며 스피노자는 이를 슬픔(tristitia)이라 부른다. 반대로 정신의 활동 역량이 증가할 때, 코나투스는 더 높은 상태의 완전성으로 이행하며 스피노자는 그것을 기쁨(laetitia)이라 부른다. 즉, 우리는 자신의 역량이 증가하면 기쁨을 느끼는 반면, 역량이 감소하면 슬픔을 느끼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인간은 기쁨을 추구하며 슬픔은 멀리하게 된다.

 

이렇게 코나투스의 증감에 따라 나타나는 인간의 감정 상태를, 스피노자는 정서(affectus)라고 부른다.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꽤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수많은 정서들을 '열정', '기쁨', '슬픔'의 세 가지 기본 정서로 분석함으로써, 그가 윤리학에서 코나투스에 따른 정서 분석을 얼마나 중요시 여기는지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정리34. 인간은 열정적으로 정서에 사로잡힐 때 서로 대립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은 수많은 마주침에서 자신의 코나투스를 증대시켜줄 수 있는 '기쁨'의 정서만 찾으면 되는 것일까? 그러나 스피노자에 따르면 『에티카』 에서 정서는 그것이 기쁨이든 슬픔이든 간에,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외적인 마주침에 의해 생겨난 것이므로 수동적인 정열(passion)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우연적이고 외적인 마주침에서 생겨나는 '정념'에 따를 경우, 서로가 대립될 수밖에 없고 따라서 분쟁과 갈등을 피하기 어렵다. 정념에 의해서는 동일한 사람조차 변하기 쉽고, 심지어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보더라도 해로운 것에 이끌리기 때문이다. 그들의 판단을 결정짓는 것은 자신의 이성이 아니라, 우발적으로 마주치게 된 다른 외적 원인들이다. 물론 우리는 스스로를 어느 정도 제어할 수 있으며, 외적으로 야기된 정서의 공세에 맞서 자신을 내세울 모종의 활동 코나투스를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매우 빈번하게 정서를 야기하는 외부 영향은 종종 우리의 능동적인 역량보다 더 강하며,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느낌, 정서 혹은 행동들을 제어하지 못한다. 정서가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기에 스피노자는 이러한 상태를 예속이라 정의한다.

 

정리35. 인간은 이성의 지도에 따라 생활하는 한 본성상 언제나 필연적으로 일치한다.

 

그렇다면 이성적인 사고를 통해 '적합한 인식'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의 접근이 필요한가? 그것은 외적 자극에 의해 우연하게 파악되는 이미지의 인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우리의 코나투스에 관한 것이므로, 사물의 '내적 원인'에 대한 인식이어야 한다. 게다가 우리의 코나투스가 증가하기 위해서는 우리와 반대되는 힘이 아니라 우리와 공통의 힘이 필요하다. 따라서 이는 곧 많은 사물을 동시에 명료하고 뚜렷하게 관찰하여 사물의 '내적 원인'에 대한 공통점과 차이점을 인식함으로써 사물에 대한 적합한 관념을 가져야 된다는 것을 말한다. 스피노자는 이러한 공통적인 것에 대한 관념을 공통 개념이라 부른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능동적인 역량인 '이성적인 인식'을 통해서 이러한 내적 원인의 공통 개념을 찾을 수 있다.

 

스피노자는 윤리에 관하여 그 어떤 것도 그 자체로 선이거나 악인 것은 없다고 단언한다. 왜냐하면 동일한 사물이 동시에 선이고 악일 수 있으며, 또 양자와 무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선악은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느냐에 따라서 주관적으로 '판단'되어지는 것에 불과하다. 만약 어떤 것이 우리의 활동 역량(코나투스)을 증가시키면, 우리는 기쁨을 경험하고 그것을 '선'이라고 하면서 그것에 의해 더욱 변용되기를 원할 것이다. 반대로 어떤 것이 우리의 활동 역량을 감소시킨다면, 우리는 슬픔을 경험하고 그것을 '악'이라고 하면서 그것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원할 것이다. 그리고 개인은 이러한 선악의 윤리를 바탕으로 더 큰 역량, 활동성, 기쁨 및 자유를 위해 나아가고자 할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스피노자의 이러한 주장은 매우 이상적인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다.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살아간다면, 그들 사이에 분쟁과 갈등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지 않는가?

 

정리34. 인간은 열정적으로 정서에 사로잡힐 때 서로 대립할 수 있다.

 정리35. 인간은 이성의 지도에 따라 생활하는 한 본성상 언제나 필연적으로 일치한다.

 

스피노자는 인간 본성상 '일치하는' 방식으로 관계 맺는 것과, 사람들이 서로 '대립하는' 방식으로 관계맺는 것을 구분함으로써 사회를 정의한다. 우리가 공통적인 부분을 가지고 어떤 것의 본성을 우리와 일치한다면 그것은 본성상 우리와 하나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과 일치하는 한,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선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관계에 있어서 그만큼의 역량이 증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의 사물이 본성상 우리와 공통적인 것이 많을수록, 그것은 더욱더 우리에게 유익하다. 그러나 열정의 지배를 받는 한, 인간 존재는 어떤 것을 본성상 일치시킬 수 없다. 열정은 우리 자신의 본성보다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외부의 수많은 사물들의 자극을 더 많이 반영하므로, 우리는 그 사물들의 자극이 우리의 본성이라 착각하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념이라는 정서에 의해 갈라지는 한, 사람들은 각기 처한 정념의 상황에 따라 의견이 달라질 수밖에 없고 서로 대립하게 된다.

 

스피노자가 우리에게 제안하는 것은, 열정을 가진 인간들의 불가피한 충돌과 대립에 대해, 정서의 예속으로부터 벗어나 덕과 이성에 따라 살아가는 '열정을 가진 인간들'의 사회를 꾸려라는 제안일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자유와 활동 역량이다. 자유로운 인간들은 자신들의 내적인 역량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스스로를 좀더 유능하고 풍요롭게 만들고자 노력한다. 동시에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결합하고자 하며, 호의와 친절을 베풂으로써 서로의 기쁨을 증대시키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성은 우리가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보다 서로 일치하고 협력함으로써 자신들을 좀더 유능하게 만들 수 있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말하는 윤리란 바로 이러한 일치의 역량, 코나투스다. 그는 일치 안에 자유와 기쁨 있다고 본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반납한 것이므로 스피노자에게 자유의지는 공존을 행할 수 있는 자유의지이지, 천상천하유아독존을 행사할 수 자유의지가 아니라고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아기예수님이 아기 요한에게 물을 먹이고 있다.

 

 

 

 

 

 

 

3.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요한 1,6-8.19-28을 읽어본다. 

 

6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7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8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19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다.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을 때, 20 요한은 서슴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하고 고백한 것이다. 21 그들이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하고 묻자, 요한은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그 예언자요?” 하고 물어도 다시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2 그래서 그들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우리가 대답을 해야 하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오?” 23 요한이 말하였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24 그들은 바리사이들이 보낸 사람들이었다. 25 이들이 요한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 26 그러자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27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28 이는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르단 강 건너편 베타니아에서 일어난 일이다.

 

 

세례자 요한의 증언은 오병이어의 기적처럼 네 복음서에 모두 실려 있는 중요한 복음이다. 이는 인류의 영적 패러다임이 바뀌는 순간에 대한 보고서라고 할 수 있다. (마태 3,1-12) ; (마르 1,2-8) ; (루카 3,1-9) ; (루카 3,15-18) 공관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통해 세례자요한이 그분의 길을 곧게 하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는 기능에 초점을 맞췄다면, 요한 1,6-8.19-28의 증언은 그 기능을 수행하는 대 전제가 되는 인간 인식에 초점을 맞췄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사도 요한이 세례자 요한과 바리사이파의 대화상황을 통해 세례자 요한은 자기가 무엇에 끌렸는지 정확하게 그 끌림의 정체를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종교지도자 유다인들의 <넌 누구냐?>라는 질문에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다>라고 오단논법으로 자신의 신원을 분명하게 밝히게 된다. 그런데 내가 누구라고 말할 수 있는 그 근거는 나 다음에 오는 그분을 내가 정확히 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너희는 모르는데 나는 그분을 안다는 것이다. 그분을 알기에 나도 내가 누군지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만약 이 대화를 노골적이고 적나라하게 표현하자면, <너, 자신을 모르는 무지한 이들아! 율법학자들아! 바리사이파들아! 사두가이파들아! 모든 종교지도자들아! 너희는 하느님을 모른다. 그래서 너희들은 너희 자신이 누군지 결코 알 수가 없다. 너희는 하늘이 보낸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이름을 팔아서 소명과는 거리가 먼 직업창출이나 하고, 성전에서 장사를 할 수 있는 거다. 그런데 나는 그분을 안다. 그렇기에 나를 안다. 나를 알기 때문에, 진리를 위해 내 생을 걸 수 있다.>라고 확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요한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증언으로 시작하여, 베드로의 고백으로 끝난다. 그런데 두 사람의 공통점은 나는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1,31/1,33)로 시작한다는 점이다. 베드로 사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아십니다(21,15/16/17)라고 자신의 사랑조차 장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목자로서의 소명을 받는다. 자기 행위의 그 바탕을 아는 분은 자신이 아니라 그분이라는 고백에서 <내 양들을 잘 돌보라>는 사명이 주어진 것이다. <모른다>는 것이 <안다>는 것임을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대림3주의 메시지인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요한 1,6-8.19-28)에서 바라볼 수 있는 <기쁨>은 <모른다/안다>의 통합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고백할 수 있을 때, 그분을 <안다>는 축복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요한 복음에 나오는<모른다/안다>는 늘 함께 다니는 동행어에 가깝다. <모른다>는 고백 이후에 <앎>이 있고, <안다>라고 자처할 그 때가, 바로 <무지의 어둠>, <모르는 때>라는 것이다. 요한 복음에서 <모른다/안다>의 용례는 다음과 같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1,31/1,33)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알려주었다.(1, 33)

 

Ⓑ과방장은 포도주가 된 물을 맛보고 그것이 어디에서 났는지 알지 못하였지만, 물을 퍼간 일꾼들은 알고 있었다(2, 9)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을 다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2, 24). 사실 예수께서는 사람 속에 들어 있는 것까지 알고 계셨다(2, 25)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3, 8)너는 이스라엘 스승이면서 그런 것도 모르느냐?(3, 11)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한다(11)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그에게 청하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4, 10)저는 그리스도라고도 하는 메시아께서 오신다는 것을 압니다(4,25)나에게는 너희가 모르는 먹을 양식이 있다(4,32) 저분은 제가 한 일을 알아맞혔습니다(4,39)

 

Ⓕ(왕실관리아들)그 아버지는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하고 말씀하신 것을 알았다(4, 53) 그러나 병이 나은 이는 그분이 누구이신지 알지 못하였다(5, 13)

 

Ⓖ나는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그분의 증언이 유효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요한5, 32)그리고 나는 너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안다(5, 42)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다 알고 계셨다(6, 6-7)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우리가 알고 있지 않은가?(6,42)사실 예수께서는 당신은 믿지 않을 자들이 누구이며 또 당신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것이다(6, 64)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7, 69)널리 알려지기를 바라면서 남몰래 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7, 4)최고 의회 의원들이 정말 저 사람을 메시아로 알고 있는 것을 아닐까요?(7, 26)메시아가 올때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7, 27)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다(7,28)나는 그분을 안다. 그가 그분께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7.29)우리 율법에는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7, 51)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증언하여도 나의 증언은 유효하다. 내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는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또 내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8, 14)너희는 나를 알지 못할뿐 아니라 나의 아버지도 알지 못한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나의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8, 19-20)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면 나도 너희처럼 거짓말쟁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분을 알고 또 그분의 말씀을 지킨다(8, 55)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 저는 모릅니다. 그러나 이 한가지는 눈이 멀었는데 이제는 보게되었다는 것을 압니다(9, 25)그분이 제 눈을 뜨게 해 주셨는데 그분이 어디에서 오셨는지 모르신다니 그것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의 말을 들어주시지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9, 30-31)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10, 4-5)나는 내 양들을 아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10,14)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10, 27)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10,38)

 

Ⓚ여러분은 아무 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11, 49) 내가 하는 일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지만 나중에는 깨닫게 될 것이다(13,7)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14, 5)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뵌 것이다(14, 7) 필립보야,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14,9)세상은 그분을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14, 17)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것을 세상에 알아야 한다. 일어나 가자(14, 31)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주었기 때문이다(15, 15-16)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짓을 할 것이다(16,3)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성령께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16, 15)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17,3) 제가 아버지께서 나왔다는 것을 참으로 알고(17, 8)의로우신 아버지 세상은 아버지를 알지 못하였지만 저는 아버지를 알고 있었습니다(17, 25)

 

Ⓛ누가 주님은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20, 2-3/13-14) 그러나 예수님인줄을 몰랐다(20,15)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님인줄 알지 못하였다(21, 4)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21, 12-13)!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즐을 주님께서는 아십니다(21,15/16/17)

 

 

Ⓐ~Ⓛ 현상적이고 물질적이고 혈연적으로는 그분을 알지만, 정작 그분의 정체를 알지 못하였다는 것이 당시 종교적인 풍토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아버지를 모르면 아들도 알 수 없고 아들을 모르면 아버지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을 모르면 진정한 기쁨을 알 수 없고, 결국 자신이 왜 이 세상에 한 생명으로 왔는지 결핍에 시달리다 간다는 것이다.

 

복음 사가는 성서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에게 이 <모른다/안다>는 도식을 적용해 그리스도 제자상을 검증한다. 2장의 가나의 혼인잔치에서보면 성모님마저도 아들의 시간을 알지 못한 채 기적을 체험하는 과정을 거쳐 하느님의 시간과 아들의 시간을 알게 된다고 서술한다. 마리아막달레나마저도 빈무덤 체험을 통해 부활의 사랑을 알게 된다. 베드로도 난 저분을 모른다는 부정에 부정을 통해 <모른다/안다>의 도식을 거친 후에 <예수그리스도>가 왜 메시야인지 알게 되고, 자신에게 천국의 열쇠가 주어진 것이 어떤 목자로서의 역할인지 비로서 알게 된다고 할 수 있다.

 

복음사가는 <모른다/안다>는 이 도식을 성서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에게 철저하게 적용함으로써 삼위일체 하느님의 현현 안에서만 그분을 알 수 있고,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라는 앎으로 수렴된다고 전한다. <모른다>를 통해서 예수그리스도를 따르는 삶, 그러기에 <모른다>를 통해 알게된 앎만이 진정한 기쁨이라고 할 수 있다.

 

<모른다>는 세속의 가치기준을 벗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육안에서 영안으로의 시선교체가 <모른다>에서 이루어진다. 세속의 영리함, 재치, 영민함, 처세술, 얄팍한 꾀로는 결코 그분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분이 당신 자신을 드러내기 전에는 그 누구도 그분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기쁨은 철저하게 <모른다>는 시간을 거쳐 각성된 자기 신원에 대한 인식에서만 가능한 내적 기쁨이라고 할 수 있다.

 

성서에서 <안다/모른다>는 다의적 의미로 사용된다. 세상의 상식으로는 <안다>는 것만이 긍정적으로 사용되지만. 신앙의 여정에서는 계시의 은폐성과 개방성을 감안한다면  <모른다>는 것이 <안다>의 길을 여는 키워드에 해당한다. 때로는 <모른다>는 것이  <안다>는 의미를 더 많이 내포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라고 전하는 요한 1,6-8.19-28에서, 회개의 궁극적인 지점은 <모른다>라는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30년 후,  결국 두 아기는 여기에 이른다! 

 

 

 

 

그렇다면, <모른다/안다>는 이 검증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세상의 일은 시간이 거듭되면 숙련공이 되지만 하느님의 일은 그와 정반대인것 같다. 신앙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어려워지고, 진정 나는 <모른다>는 사실에 자주 직면하게 된다. 이 정도 신앙생활 했으면 다 알 거 같은 데 그렇지 않다. 진리의 무궁무진함 앞에서 아! 그런 뜻이었구나!를 연발하곤 한다. 늘 배우는 학생일 뿐이다. 자비의 기도밖에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모른다/안다>를 성찰해보면, 우리는 여전히 우리 자신의 이해가 진리에 크게 기여하고 진리의 정체를 정한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 것도 이해할 필요가 없음 앞에 자주 서게된다. 무궁무진한 진리를 아직은 모든다는 것 앞에 서게된다. 그로인해 진리를 전하려면, 즉 하느님의 계획을 받아들이려면 하느님의 계획을 나의 계획으로 대체하지 않겠다는 용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과 마주한다. 그리고 그 하나면 진리를 수용하기에 족하다. 네! 하나면 족하다! 그런데, 우리는 그토록 적게 주고 그렇게 많이 받는다는 관념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 우리의 역할이 얼마나 작고 성령의 역할이 얼마나 큰지 배울 수 있도록 성령이 정하는 것만을 주라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 성령이 해야할 역할까지 다 하려하기에 하느님의 뜻은 실현되지 않는다.

 

하느님 뜻(목표)과 수단은 모두 하느님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목표를 자신의 목표로 삼는 사람은 하느님이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수단도 함께 제공하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에 마주한다. 목적을 바꾸는데 필요한 작은 믿음만 있다면 수단을 받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천국을 좋아하지만, 실은 천국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천국을 파하기까지 한다. 천국은 다만 완벽한 하느님의 사랑을 알아차리는 것이요,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없기에. 우리는 우리의 열정으로 하느님과 딜(deal)을 하려고 한다. 그래서 우리의 밖에는 아무 것도 없으며, 마음은 밖으로 나가지 않으며, 마음 안에는 한계가 없고, 마음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렇기에, 워크홀릭이나 열정에 취해 있는 것은 아닌가? 열정을 곧바로 사랑이라고 치환해도 되는가? 하는 문제제기를 나 자신에게 해야한다. 마음은 모든 것을 에워싸고 하느님은 당신 자신과 우리 사이에 아무런 장벽을 두지 않으셨기에 우리도 우리 마음에 장벽을 쌓을 수 없다는 것! 우리는 오직 하느님에 둘러싸여 있으며, 온 누리가 이미 그분의 빛으로 싸인 빛의 세상이므로, 모든 것을 용서받고 용서하게 된다는 것! 그러나 용서조차 끝이 아니라는 것! 용서는 치유의 근원이지만 사랑의 근원은 아니라는 것! 용서 이후에, 빛의 근원이 있고 그곳에, 창조의 사랑이 있다는 것! 용서를 완성하지 않고 천국에 닿을 수 없다는 것! 부활하신 예수님이 인류에게 공평하게 준 소명(요한20, 19-23)인 용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성령의 도움으로 용서(하느님과 나 사이, 이웃과 나 사이, 나와 나 사이)를 완성하는 것! 그 다음은 우리가 할일이 아니라 하늘이 할 일이라는 것!. 더 이상 아무 것도 용서할 것이 없는, 용서의 완성 이후에, 지각될 것도 용서받을 것도 변형될 것도 없는 하느님 나라가 있다는 것! 그렇기에 창조의 사랑은 학습되지 않으며, 더구나 우리의 열정으로 딜(deal)할 수 없으며, 사랑의 의미는 그 자체에 있다는 것!

 

그것을 알기 위해서 나는 내 역할을 잘 <모른다>는 고백의 문을 통과해야 한다. 성령께 내 역할이 무엇인지 알려달라고 청해야 한다. 이 <모른다/안다>를 통해 삼위일체 하느님의 역할과 나의 역할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우리만 일하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열정으로 치자면 세례자 요한의 열정이 예수님의 열정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세례자 요한의 교회 크기만으로도 그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은 <모른다>는 것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의 진리를 <알았다>. 자신은 물로 세례를 주고, 그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준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을!

 

지난 시간을 잘 성찰하다보면 누구나 알 수 있다. 삶 자체가 은총 속에서 지금까지 이루어졌다는 것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그 은총의 일부이든 전체이든 전혀 나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랑은 언제나 나보다 먼저 도착한다는 것을 말이다. 내가 그 사랑을 알아보기 전에 사랑은 이미 너무나 오래전에 이미 도착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은총은, 나를 통해서 또 누군가를 통해서 나에게 늘 함께 있었고, 일어났다. 여기서 삶이라는 은총은 나와 누군가가 이해해야지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 삶에서 성취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하다는 것에 우리는 사로잡혀 있다. 이해되지 못하는 상황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세계에서 내가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계속 일어나고 있음이 틀림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은총의 시작이다. 성모님이 성령으로 잉태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것이지, 그것은 이해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이해하지 않고도 네! 할 수 있는 것이 겸손이다. 지각의 한계를 초월하는 그 무언가가 나의 내부에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은총의 본성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은총은 나에게서, 또 우리에게서 이루어졌다는 것이 은총의 본성이다. 내 능력 밖의 그 무엇, 나에게 이루어지는 삶의 진실들, 그렇기에 삶을 존중하고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음을 오히려 네! 하고 기뻐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는 것이다. 

 

<모른다>는 것이 은총의 시작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 2023년 가장 큰 영적 기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분이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함께 있겠다>는 것에서 <함께>는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전혀 예측도, 감지도 하지 못하는 사건이나 상황에서도 진행중인 사건일 때가 많았다는 것이다. 때론 어이없는 태클로 다가온 사건들조차 큰 축복이었다는 것이다. 바오로사도의 통찰처럼 내가 그분의 사람이라면 모든 일이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사실을 믿게 된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이사야서가 전하는 희년의 기쁨, 루카복음이 전하는 성모님의 노래-마니파캇의 기쁨, 그리고 바오로의 데살로니카1서에서 전하는 영적 기쁨은 모두 사랑은 우리가 미처 알아차리기도 전에 우리와 함께 있었다고 전한다. 그 기쁨은 삼위일체 하느님과 하나가 된 상태일 뿐 아니라, 모든 인류와 하나가 된 상태, 소통의 완성에서 나온 영적 기쁨에 대해 전한다. 쓰라린 삶을 지나가는 이들에게 <기쁨>은 얼마나 큰 도전인가? 그렇기에 <기쁨>은 근육의 미소가 아니라 믿음과 희망에서 비롯된 용기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리라.> 이사야서 61,1-2ㄱ.10-11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2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10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신랑이 관을 쓰듯 신부가 패물로 단장하듯 그분께서 나에게 구원의 옷을 입히시고 의로움의 겉옷을 둘러 주셨기 때문이다. 11 땅이 새순을 돋아나게 하고 정원이 싹을 솟아나게 하듯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민족들 앞에 의로움과 찬미가 솟아나게 하시리라.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뜻이 곧 기쁨이라고 전한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라고 전한다.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영과 혼과 몸을 지켜 주시기를 빕니다.> 테살로니카 1서 5,16-24 형제 여러분, 16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17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18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19 성령의 불을 끄지 마십시오. 20 예언을 업신여기지 마십시오. 21 모든 것을 분별하여, 좋은 것은 간직하고 22 악한 것은 무엇이든 멀리하십시오. 23 평화의 하느님께서 친히 여러분을 완전히 거룩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여러분의 영과 혼과 몸을 온전하고 흠 없이 지켜 주시기를 빕니다. 24 여러분을 부르시는 분은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니 그렇게 해 주실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기 위해 즉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살기 위해서 <영과 혼과 몸을 온전하고 흠 없이 지켜 주시기를 빕니다.>라고 전한다. 영과 혼을 나누고 가른다? 바오로 사도가 왜 영 혹은 영혼이라고 말하지 않고 서간문에 자주 영과 혼을 갈랐는지 모르므로 더 이상, 그에 대해 쓰고 싶은데 쓸 수 없다. 지난 몇달간 그것을 이해하려고 부단히 노력했지만 이해하지 못했다. 무척 알고 싶었지만 알아지지 않았다. 바오로 사도가 영과 혼을 가른 이유에 대해 수많은 글들이 있었다.  그 글들을 다 읽고도 이해되지 않았다. 물론 삶에서 그것만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이제,  이해되지 못하는, 혹은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나 명제로 괴로워하지 않게 되었다. 어떤 사건 상황은 전혀 이해할 필요가 없거나, 아직은 이해의 시간이 아닐 뿐이기 때문이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수없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 그분안에서 <오늘>, <기쁘다>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게 되었다. 

 

여기서 바올로 사도가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라고 전하는 그 기도의 스킬이 나온다. 기도할때 그 결과를 예단, 예측, 판단하지 않는 것이다.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안 들어주시면 말고' 식으로 빠져나갈 구멍을 먼저 파지 말고(두려우면서 쿨한척 하지말자!) , 배수진을 치지 않고 드리는 것이 기도이다. 하느님을 시험하는 기도가 아니라 하느님을 신뢰하는 기도를 해야 한다. 그러면 기도는 언제나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게된다. 저 하늘까지 갈망이 닿으려면 다른 것이 개입하면 안된다. 기도는 사랑이다. 아들의 마음에서 아버지의 마음에 닿으려는 사랑이다. 사랑에 무엇이 끼어드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래서 내가 갈망하는 것만 그분께 집중적으로 아뢰는 것이다. 그 갈망이 트라이앵글을 만드는지만 생각하는 것이다. 나의 갈망이 나에게만 좋은 것은 하늘의 뜻이 아닐 것이다.  <나-하느님-타자>, 이 갈망의 트라이앵글이 습관화되면 기도뿐 아니라 일상에서, 모든 관계에서 비롯된 사건, 상황도 예측하지 않게 된다. 언제나 하느님의 뜻이 이긴다. 하늘의 뜻이라는 목표가 분명하면 그 기도가 이루어지는 수단은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령을 불렀다고 성령기도가 아니다. 성령이 할일을 내가 하지 않는 것이 성령기도이고, 내가 할일을 성령께 떠 넘기지 않는 것이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는 길이다. 구세사에서 세례자 요한이 할일이 따로 있었고, 예수님이 할일이 따로 있었다는 것이다. 세례자 요한의 뛰어난 점은 바로 그것을 명확히 알았다는 것이다. 

 

위의 성찰들을 종합해보면, 완전한 이해에서 완전한 기쁨이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리라.>라고 전하는 이사야서 61,1-2ㄱ.10-11, 그리고 루카 1,46ㄴ-48.49-50.53-54(이사 61,10ㄱ 참조)에서 전하는 성모님의 기쁨, 내 영혼이 내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고, 내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내 마음 기뻐 뛰노네!,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영과 혼과 몸을 지켜 주시기를 빕니다.> 라고 전하는 테살로니카 1서 5,16-24을 종합하면 우리가 대림3주에 느끼는 기쁨은 기쁨을 누리는 것 그 자체가 선물로 주어진 은총이자 그것을 지키는 것이 기쁨이라는 것을 거듭 상기시킨다. 알 수 없음 조차도 은총이고 기쁨이라는 것이다. 

 

이사야와 성모님은 희년의 소식처럼 애주애인이 기쁨임을 강조한다. 특히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 최소한의 생존위기에 몰린 이들에 대한 사랑이 기쁨의 출처라고 전한다. 바오로 사도는 그 애주애인을 실천하기 위해서 <나 자신의 영과 혼을 지키라>고 전한다. 기쁨은 은총으로 주어진 선물이지만 지켜야하는 선물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기쁨의 ‘성채’(城砦), ‘모른다’는 해자(垓字)와 ‘안다’라는 커룹(Cherub)]

 

고성으로 들어가기 위해선 해자(垓字)를 건너야 한다. 해자는 건축용어다. 해자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주위를 둘러서 판 못이나, 호수,  성 주위를 감싸는 강이라고 할 수 있다.

 

『신약성경용어사전』에서 커룹의 역할은 정리해 보자면. 커룹은 천사의 단수로, 첫째, 그들은 무엇을 지키거나 관리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하느님은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신 다음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목에 커룹들을 세워 지키게 하셨다.(창세기3,24) 또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세운 만남의 천막, 솔로몬이 지은 성전에 만들어 놓은 커룹들도 계약의 궤를 지키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열왕기1, 8,7) 둘째, 그들은 하느님과 그분의 옥좌를 나르는 병거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 구약 성경에서는 하느님께서 커룹을 타고 만군을 거느리시는 광경을 여러 번 언급해 주었다.(시편80, 2/다니엘 3,52) 셋째,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예루살렘 도성 위에 뿌릴 숯불을 내어 줌으로써 그분의 심판에 참여하는 커룹들의 모습을 묘사해 주었다.(에제키엘11,22) 네째, 그들은 만남의 천막이나 성전을 꾸미고 장식하기 위해 동원되었는데, 이는 커룹들이 하느님을 모시는 존재들임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장막의 지성소 안에 있던 계약의 궤 위에 있는 순금 속죄판 양 끝에 커룹을 세워 놓았다. 하느님께서는 이 두 커룹 사이에서 모세를 만나시겠다고 밝히셨다. 성막과 휘장에는 커룹 무늬를 수놓았다. 종합하자면, 커룹은 하느님의 생명을 지키고 관리하는 영적 에네지라고 할 수 있다.

 

<기쁨의 성채>는 ‘모른다’는 해자(垓字)를 건너야 한다. 해자는 건축용어다. 해자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주위를 둘러서 판 못이나 호수, 성주위를 감싸는 강이듯. 영적 기쁨은 이쪽과 저 쪽을 분명히 가른다. 이쪽에 길들여진 상식의 가치로는 저쪽의 가치와 기쁨을 <모른다>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상식을 내려놓으려 할 때, 기쁨은 주어진다. 나의 열정까지 의문에 부쳤을 때, 열정에서 촉발되는 정서까지 내려놓았을 때, 기쁨은 주어진다. 그런 맥락에서, 성서에서 말하는 기쁨은 희희낙낙이나 성격의 낙천성이 아니라. 성모님의 수태고지에서처럼  거의 자유의지의 봉헌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내 열정의 방향을 나는 모른다는 고백을 할 수 있을 때, 주어지는 은총이 기쁨이기에 그렇다. 그때 ‘안다’의 은총 상태에 이른다. 그것이 기쁨이다. 기쁨은 영적 생명이기에 모든 생명을 지키는 <진리>라는 커룹(Cherub)에 둘러싸여 있다.

 

 

 

글을 마치며,

 

내 영혼이 내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고, 내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내 마음 기뻐 뛰노네.(루카 1,46ㄴ-48.49-50.53-54(이사 61,10ㄱ 참조) 그분이 비천한 당신 종을 굽어보셨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복되다 하리라. 전능하신 분이 나에게 큰일을 하셨으니, 그 이름은 거룩하신 분이시다. 그분 자비는 세세 대대로 그분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미치리라. 굶주린 이를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시고, 부유한 자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셨네. 당신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돌보셨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