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즉자적 존재이자 대자적 존재로서 사랑의 현상학

나뭇잎숨결 2023. 12. 29. 03:02

 

 

 

 

사진작가 분이가 대둔산에서 탱큐!

 

 

즉자(卽自, gr. kath`hauto, lat. in se, ipse in re, d. an Sichsein, e. in-itself)적 존재이자 대자(對自, d. Fürsichsein, e. for-the-itself)적  존재로서 사랑의 현상학

 

-예수마리아요셉의 성가정 축일, “아기는 자라면서 지혜가 충만해졌다”를 중심으로

 

 

 

 

 

 

 

1. 김승희의 「 장미와 가시」

 

 

 

눈먼 손으로/ 나는 삶을 만져보았네./ 그건 가시 투성이였어//가시투성이의 온몸을 만지며/나는 미소 지었지/ 이토록 가시가 많으니/ 곧 장미꽃이 피겠구나 하고// 장미꽃이 피어난다 해도/어찌 가시의 고통을 잊을 수 있을까?/해도/장미꽃이 피기만 한다면/ 어찌 가시의 고통을 버리지 못하리오//눈먼 손으로/삶을 어루만지며/나는 가시투성이를 지나/장미꽃을 기다렸네/그의 몸에는 많은 가시가 /돋아 있었지만, 그러나, /나는 한 송이이의 장미꽃도 보지 못하였네//그러니, 그대, 이제 말해주오/삶은 가시장미인가 장미가시인가/아니면 장미의 가시인가, 또는 장미와 가시인가를

 

김승희의 「장미와 가시」는 존재의 두 층위에 관한 시로 읽힐 수 있다. 우리는 모두 가시투성이인 삶이지만 사랑이라는 장미를 갈망한다. 가시가 장미를 피게 만들지 못하듯, 장미 역시 가시를 만들지 못한다. 그런데, 장미와 가시는 동시에 우리 삶에서 존재한다. 장미와 가시는 꽃이면서 나무의 운명을 살아야 하듯, 모든 인류는 즉자와 대자의 층위를 감당해야 한다. 그러기에 장미와 가시는 우리 각자가 지닌 양립하기 어려운 존재의 층위라고 할 수 있겠다.

 

화자는 자신에게 혹은 그대에게 묻는다. “그러니, 그대, 이제 말해주오/삶은 가시장미인가 장미가시인가/아니면 장미의 가시인가, 또는 장미와 가시인가를

 

어떤 질문들은 답을 얻기 위해서가 하기도 하지만, 이미 답은 알고 있는데 행위를 추동하기 위해서도 한다, 혹은 답 자체가 없는 질문인 걸 이미 알고 있지만 질문이라도 해보는 것이다.

 

김승희 시인의 장미와 가시는 답을 얻을 수 없음에도 하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장미와 가시는 선택할 수 없는 존재의 필연적 층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대에게 장미와 가시, 어디에 무게중심을 두어야 하는지? 말해달라고 한다. 이는 그대 역시 답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사랑하는 자 각각이 사랑함 속에서 ‘심연 an abysmal chasm 으로’분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순애데레사가 한라산에서 탱큐!

 

 

 

 

2. 사랑하는 자 각각이 사랑함 속에서  ‘심연 an abysmal chasm 으로’ 분리되어 있다(헤르만 슈미츠)

 

 

 

장미와 가시처럼 사랑의 층위는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일 때가 많다. 사랑을 하는 나라는 존재 자체가 안정을 추구하는 즉자적인 존재이자 자유를 추구하는 대자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안정은 수렴이고 자유는 발산이다. 안정을 추구하려면 자유를 포기해야 하고, 자유를 추구하려면 안정을 포기해야 한다. 사랑은 언제나 이 딜레마를 경험한다. 

 

괴테와 헤겔 연구자인 헤르만 슈미츠는 사랑이 배움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우리의 사랑은 왜 깨지기 쉬운가?라는 문제제기를 통해 모든 인류가 사랑을 추구하지만 그 답을 얻을 수 없는 사랑의 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에서 사랑은 하나의 현상학이라고 진단한다.

 

슈미츠는 사랑은 이중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그 하나는 추상적인 신비이자 환상이며, 또 다른 하나는 구체적인 감정이자 상황이라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 추상적이고 구체적인 사랑의 구조는 불가피하게 갈등을 내장하고 있으며 어느 한 쪽에 무게중심을 두면 그 사랑을 깨질 수밖에 없다는 것에 착안하여 사랑의 현상학을 기술한 것이다. 사랑 자체가 이미 형이상학인 신비이자 형이하학인 상황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슈미츠는 사랑이 깨지는 이유는 발산과 수렴의 구조가 정박하기 어려운 닻을 지니고 있다는 것에서 이미 갈등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본 것이다. 신비라는 사랑의 추상적 측면은 감각을 추구하는 인간에게는 그 자체가 이미 갈등의 소지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또한 사랑의 구체적인 측면 역시 감정과 상황이라는 구조를 지니고 있기에 어느 한 쪽에 무게중심을 두게 되면, 균혈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모든 사랑은 이 두 개의 원천적 구조를 지니는데 이 구조가 장미와 가시처럼 선택가능한 것이 아니기에 충돌가능성을 피할 수 없다고 진단한다. 사랑은 사랑하는 이들이 느끼는 감정이자 그들을 둘러싼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랑의 상황과 감정은 구체적이지만 그 존재층위가 또한 다르다. 여기에 헤르만 슈미츠는 인구에 회자되는 사랑을 예로 든다. 특히 사르트르의 즉자와 대자 개념을 예로 들면서 모든 인간의 존재 층위는 즉자(안정을 추구하는 욕구)와 대자(자유를 추구하는 욕구)를 통해 사랑의 현상학이라는 땅으로부터 시작이라고 바라본다.

 

즉자와 대자 개념은 헤겔부터 시작해 칸트 그리고 사르트르, 들뢰즈에 등에 의해 정의되곤 했던 인간의 양립하기 어려운 존재층위을 일컫는다. 즉자와 대자는 불가피하게 변증법적통합을 가져와야 한다고 본것이다.

 

슈미츠는 『사랑의 현상학』에서 사랑을 넓고 깊게 이해하려면 어떤 추상적인 관념이 아닌 우리 ‘신체’, ‘감정’, ‘상황’ 그리고 ‘인상’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 곁에 생생히 살아 있는 이러한 삶의 바탕들이야말로 사랑의 고귀한 가능성을 탐구하는 기본조건이 된다고 본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단지 사랑받고자 하는 욕구만이 아니다. 결코 쉽게 충족되기 어려운 스스로 사랑하고자 하는 욕구 또한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에 따라 슈미츠가 제기하는 문제는 이렇다. 사람들이 사랑을 찾을 때 그들은 무엇을 욕구하는 것일까?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감정을 사적인 영혼의 상태로 간주하는 방식에 익숙하다. 때때로 사적인 내적 세계를 나타내기 위해 ‘영혼’ 대신에 다른 용어를 ( ‘의식’, ‘마음’, ‘모나드’ 등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이는 사실상 아무런 차이가 없다. 이러한 통념을 따를 때, 두 사람의 상호 간 사랑이란, 두 개의 사랑이 분리된 내적 세계 안에 있으면서 서로 적응하면서 경쟁하고 있는 상태라고 얘기할 수밖에 없다. 상호 간의 사랑이 두 사람의 ‘공통적인 무엇’이어야 함에도 말이다.

 

덕성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사랑은 요리 솜씨에 좌우되는 사랑과 마찬가지로 여기서 의미하는 바의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어떤 여인이 덕성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 그녀에 대한 사랑을 지지하고 정박시켜야만 하는 남자가 있다면, 이 남자는 요리를 잘하니까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 못지않게 뒤틀린 사랑의 희생자가 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사랑을 ‘상황’으로서, 그리고 ‘감정’으로서 서로 공유하고 있다. 물론, 앞서 서술했듯이 이 소중한 보물을 지키고 확인하는 일은 쉽지 않으며, 매번 새롭게 마주 서야 하는 과제이기도 하다. 여건이 좋을 때는, 사랑과 더불어 성장한 신뢰와 그 평온함으로 인해 이 과제의 어려움이 줄어들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랑의 공동체의 곁에서 늘 함께 갈 수밖에 없는 어려움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사랑하는 자 각각이 사랑함 속에서 ‘심연적으로’abgr?ndig 분리되어 있다는 점이다.

 

 사랑의 빛나는 순간들은 신성하다. 자기 품에 안긴 아이를 바라보는 젊은 엄마의 넘쳐흐르는 행복감, 사랑하는 두 젊은이가 서로 눈을 바라볼 때의 평온한 환희, 성숙한 사랑 안에 함께 속하고 성장하는 일이 주는 깊고 평화로운 행복감, 그 밖에 다른 충족된 사랑의 최고의 가능성들. 이러한 빛나는 순간들은 꿰뚫어 볼 수 없는 빛나는 충만함을 간직하고 있으며, 이 충만함은 그 어떤 회의적 해체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사랑은 시간과 죽음보다 강하다.

 

슈미츠가 보기에 ‘지혜에 대한 사랑’인 철학은 ‘사랑’ 자체에 대한 규명에 대해서는 미온적인 시도만을 해왔다. 이는 서양철학이 존재하지도 않는 영혼(내면)을 객관화/실체화시켜 놓고, 거기에다 주관적 신체를 사로잡는 분위기적인 지각 내용들을 강제로 집어넣은 전통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그동안의 철학은 주관적 사실 그 자체인 사랑을 성찰함에 있어 땅에서 하는 사랑을  ‘관념의 하늘’에 머문 채 이렇다 할 해명을 내놓지 못했다고 본 것이다. 철학이 의지했던 ‘이성’은 객관적 사실, 즉 논리 추론, 수학적 인식, 실증적 지식에만 그 권능을 발휘했을 뿐이었다.

 

『사랑의 현상학』에서 슈미츠는 이른바 그의 ‘새로운 현상학’을 통해, 사랑의 근원적인 문제들로 내려간다. 여기서 근원적인 문제들은 추상적인 사상이나 신념 같은 것이 아니라, 우리 곁에 아주 가까이 있는 살아 있는 삶의 바탕, 즉 ‘신체’, ‘감정’, ‘상황’, ‘인상’이다. 슈미츠는 철학으로써 사랑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무엇보다 우리의 사유가 영혼이나 이성이 아닌 삶의 가장 낮은 지점인 신체로 내려와야 한다고 말하면서, 더 나아가 신체를 감싸는 힘인 ‘감정’, 각각의 인간을 둘러싼 ‘상황’ 그리고 타인에 대한 소통과 이해의 출발점이자 귀착점인 ‘인상’의 의미까지 명료하면서도 유연하게 체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삶의 느낌과 체험을 늘 동반하고 있는 이러한 존재함의 요소들이야말로 사랑을 통찰하는 필수조건이라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인간의 본질 속에 근거를 둔 하나의 기획, 즉 인간 스스로 신이 되는 기획을 구성하려 한다. 이것은 인간이 자유로운 대자적 존재로서 자기 자신을 형성하는 일과 인간이 지닌 즉자적 존재로서의 안정성을 하나로 통합한다는 의미다. 사르트르는 이러한 부조리하며 도달 불가능한 목표를 실현할 수 있는 하나의 길로 사랑을 제시한다. 그가 이해하는 사랑은 사랑하는 자가 타자인 사랑받는 자의 자유를 자신에게 복종시키고 전유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인간을 선택할 수 있는 존재이고, 그럼에도 그 선택은 언제나 하나이며, 우리가 저절로 갖게되는 의식과 동일한 것이라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의식이 우리자신의 의식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또한 어떻게 사라지는 의식이 한 자아를 알 수 있을까? 그것은 물론 대자적 존재라는 사실에 대한 자각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이를 위해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존재를 즉자와 대자로 구분하기에 이른다. 즉자란 그 자체 안에 존재하는 존재이며, 그 자신의 의식을 갖고 있지 않아서 다른 의식의 대상이 되는 존재이다. 대자는 자기자신을 의식하며 자기의식을 떠나서는 그 자체로서 존재할 수 없는 존재이다. 모든 의식은 어떤 것에 대한 양식이다. 그것은 현상으로서의 존재에 대한 의식이다. 이 경우에 그것을 존재와는 다른 즉 비존재여야 한다. 그것은 본래 존재의 부정이나 무화를 통해 생겨나야만 한다. 그가 보기에 즉자는 곧 자신과 일치하며 폐쇄적 과거적이자 완결된 존재이며. 즉자는 어떤 무도 품고 있지 않게 된다. 대자 즉 의식은 일종의 활동과정이다. 대자는 즉자의 전적인 무화이다. 대자는 존재의 무화과정에서 존재성 이상의 실재성을 내포하고 있지 않다. 의식은 어떤 무엇에 의해 부정이나 무화가 야기되는 그것이다. 의식자체는 비존재이면서 무화과정으로서의 활동을 한다. 의식은 자신에 관해 실체적인 어떤 것도 소유하지 못하면서 그것이 단지 자신에게 명백해질 때에 실존한다. 그러므로 의식은 결핍과 공허와 무를 자신의 중심부에 존재하는데 무란 의식의 즉자가 아니라 바로 증명인 것이다. 의식은 무를 창조하며 이는 의식이 무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무는 존재와 동일한 것이 아니라 존재에 내재하며 존재에 기생한다. 대자의 발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즉자의 사라짐이다. 대자는 즉자의 사라짐에서 발생하며 이는 즉자를 향한 기투의 형태를 취하는데 기투된 즉자 사이에 대자는 동적인 것이 된다. 이로써 즉자와 대자는 자연스럽게 합의 될 수 없다. 무수한 상황앞에 놓인 무수한 선택에 의해서, 즉자인 대자가 자유를 지향하는 대자를 위해 사라질 때 즉자와 대자는 융화될 수 있고, 완전한 전체성을 기대할 수 있다. 대자는 즉자에 의해 결정될 수 없으며 본질적으로 인간은 대자를 추구하는 자유로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슈미츠는 인간은 즉자적 존재이며 동시에 대자적 전재라는 사르트르의 인간 조건을 수용한다. 즉자가 대자를 위해 자신의 사라짐을 억울해 하지 않기 때문이다. 거기서 사랑의 현상학을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생긴다. 그렇기에 사랑이라는 ‘상황’은 동물, 식물, 사물 등과 마찬가지로 ‘존재하는 것’에 속하는 하나의 독자적인 유형이다. 상황은 “적어도 하나의 사태가 속해 있는 절대적인 혹은 상대적인 혼돈적 다양체 상태의 전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 개념을 바탕으로 ‘인상’을 “명료하지는 않지만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함축적 의미를 잉태하고 있는 상황”으로 정의한다. 이렇듯 ‘인상’은 의미론적으로 ‘상황’ 개념을 전제하고 있다. 사랑을 성찰하기에 앞서 상황과 인상의 존재론적 성격을 이렇게 정의한다면, 우리는 사랑하는 두 사람의 대화와 신체적 교감은 철학 전통이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끊임없이 대면하고, 탐색하고, 공감하는 드라마임을, 그리고 우리는 이 혼돈적 다양체로서 사랑의 양상을 언제나 헤아려야 하는 과제 앞에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슈미츠는 자신의 불완전함을 스스로 받아들이고 대변할 수 있는 소명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사랑에 대한 환상에 빠지지 않고 깨어 있는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는 소명을 지니고 있다면, 사랑의 성숙이라는 긍정적 전망과 사랑하는 이와의 ‘깊은 신뢰’라는 가능성에 도달하게 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더불어 그 어떤 회의적 해체에도 흔들리지 않는 이러한 신뢰가 삶을 현재에 충만하게 뿌리내리도록 하는 고귀한 힘임을 일러 준다.

 

 

 

 

 

 

 

 

 

 

 

3. <아기는 자라면서 지혜가 충만해졌다>루카2,22-40

 

 

  [1]어떻게 시메온은 아기에게서 메시야를 알아 보았을까?

 

 

<아기는 자라면서 지혜가 충만해졌다>라고 전하는 루카2,22-40은 루카복음에만 실려 있는 단독 서사로 평화로운 가정을 이끄는 가화만사성에 대한 가족주의의 지침이 아니다. 이 출렁이는 세상에서 어떻게하면 평화롭고 안정된 가정을 이룰 수 있는가? 하는 누구나 추구하는 현실주의적 안정이나 가족의 위계질서에 대한 서술이 아니다. 가정은 어떻게 인류애를 잉태하고 학습하는 작은 교회의 표징이 될 수 있는가?하는 것에 그 초점이 놓여있다고 할 수 있다.

 

루카2,22-40는 시메온을 통해 예언되는 예수의 삶 전체를 들려준다. <이 아기는 다른 민족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에 이어서 <이 아기는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의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라고 아기의 신적 정체성을 전한다. 전자의 예언은 빛이고 영광이라면 후자의 예언은 대다수의 이스라엘 백성이 그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므로 십자가 수난과 죽음이 이미 예정되어 있다고 전한다. 그래서 어머니 마리아,  당신 영혼이 칼에 꿰뚫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의 생각이 드러날 것이라고 전한다. 위대하고 서늘한, 하늘과 땅의 예언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자녀를 출산한 산부는 남아는 40일 이후, 여야는 출산한 산부는 80일 이후에 깨끗해지기 위한 정결법과 속량법을 통해 성전에 들어갈 자격을 갖추는데, 마리아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어린양 한 마리와 비둘기 한 마리를 제물로 봉헌하고 이 정결례와 속량제를 하는데,  요셉이 동행한다. 요셉은 산부가 아니므로 이 정결례와 속량법을 행할 필요가 없었다. 마리아는 속량의 제물로 비들기 한 쌍, 빈자의 제물을 바친다. 이 행위 자체와 봉헌 자체가 이미 예수마리아요셉이라는 성가정이 30년후에 겪을 표징을 예표한다.

 

그런 맥락에서 시메온의 예언은 이루어내는 힘을 지닌 말의 에네르기아, 인간의 영적 실존의 토대가 되는 원초적인 말(paroles orginelles)이라고 할 수 있다. 말 하나하나에 담긴 그 말로 표상된 된 실재의 편린을 통해 말-말씀이 되는 말의 신학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그렇다면 시메온은 가난한 목수 부부의 어린 아기가 이스라엘이 애타게 기다린 메시야라는 것을 어떻게 단번에 알아본 것일까? 그것을 루카 복음 사가는 의롭고 독실한 사람 시메온에게 성령이 늘 함께 했음이라고 증언한다. 시메온을 빛으로 인도한 것은 성령과 함께한 그 자신의 삶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예수마리아요셉의 성가정은 이런 말-말씀의 에네르기가 삶을 이끌어가는 최소이자 최초의 공동체가 가정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표징에 해당한다. 가정은 생물학적인 보호와 성장을 담당하는 양육의 공간 이상이라는 것을 말한다. 한 사람의 실존을 결정하는 토대가 되는 살아있는 말들, 최초의 발화와 들음이 발생하는 담화의 공간이 가정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한 아기가 이 세상에 와서 그 부모로부터 배운 모국어, 그 모국어 발화자들과 나누는 말-말씀의 경계, 그 말-말씀은 한 가정의 중심에 어떤 생명의 씨앗이 뿌려지고 있는가를 가늠하는 자로미터라고 할 수 있다.

 

루카 복음사가는 그 어떤 복음사가보다 스토리텔링을 중시했던 사가였다. 언어의 1차적 기능인 정보의 전달에 머물지 않고,  입체적 서사 구성을 통해 말을 육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그 상황맥락을 전하는 복음 서술에 주력했다고 할 수 있다. 복음사가는 치밀한 서사구조를 통해 박제된 말이 아니라 살아움직이는 말-말씀의 메시지를 전하려고 했다는 측면에서 이미 복음사가 자신이 말씀의 역동성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아기는 자라면서 지혜가 충만해졌다>라고 전하는 루카2,22-40은 Ⓐ프롤로그---Ⓑ본론이자 총론---Ⓒ에필로그라는 서사구조를 지니고 있다. 사랑이 신비에 머물지 않고 구체적 이 땅의 현실이라는 것을 보여준 사랑의 현상학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프롤로그Ⓐ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봉헌하다.(루카22-24)에서 22-24는 정결법을 22-23에서는 속량법을 다루고 있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그들은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

 

 

총론이자 본론Ⓑ 시메온과 한나의 예언(루카2, 25-39)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들어오자,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에 놀라워하였다.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들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뚫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한나라는 예언자도 있었는데, 푸느엘의 딸로서 아세르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해를 살고서는, 여든네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또나는 일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령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관하여 이야기하였다.

 

시메온과 한나의 예언은 이사야가 전한 보편적 구원사상(제2 이사야40,5/42,6/46,13/49.6/52.9-10)에 해당한다.

 

에필로그Ⓒ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나서, 그들은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2,39)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2,40)

 

<아기는 자라면서 지혜가 충만해졌다>라고 전하는 루카2,22-40은 40절의  <지혜>에 방점이 놓여 있다. 지혜는 삶으로 표출되기 전에 언어로 그 씨앗이 뿌려진다.  그 언어의 씨앗이 뿌려지는 가정, 각기 다른 성향과 취향을 가진 세 사람의 인류가 어떻게 사랑의 트라이앵글을 이뤄 가정이라는 작은 교회를 형성할 수 있었는가? 하는 사랑의 총론에 관한 조감도라고 할 수 있다.

 

성가정의 중심에 아기 예수님이 계시고, 하느님께 봉헌된 인자로써,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부분에서 모세의 율법에 따라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봉헌한다.(루카22-24) 인간을 위한 정결법과 속량법을 그 가정도 준수한다.

 

여기서 세상의 모든 아기는 하느님께 속한 생명으로 자녀는 부모의 소유가 아니며, 부모는 하느님 사랑을 위임받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모든 부모는 하느님의 뜻을 아기에게 전하는 최초의 메신저라고 할 수 있다. 

 

본론에 해당하는 부분에서, 시메온과 한나의 예언을 통해 이스라엘 뿐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전해질 보편적 구원이 언급되고 있다. 또한 보편적 구원이 “많은 사람들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다고 전하며” 그로인해 마리아가 받아야할 영혼의 고통에 대한 예언이 이어진다.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부분에서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나서, 그들은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루카2,39) 그리고,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루카2,40)”라고 전한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부분은 당시 모든 이스라엘 가정에 주어지는  각론에 해당한다면, 시메온과 한나의 예언이 나오는 본론은 메시야의 정체성에 해당하는 구원론의 핵심에 해당한다.

 

성가정의 중심은 아기 예수님이다. 그리고 아기 예수님은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25절), 예루살렘의 속령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38절)”에서 보듯,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로 오신 분이다. 모든 글에서는 총론이 중요하다. 그러나 이 성가정축일 복음으로 제시된 부분에서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에 계시도다>에서 알 수 있듯,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는 사람이 되시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22절에 그들은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는 데서,  바치다. 봉헌하다는 의미는 이후에 이어지는 소년 예수-어른 예수의 행적에서, 예수마리아요셉이라는 가정공동체의 본질적인 방향을 예수님 당신이 직접 제시한다. 진정한 가족구성원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인류애라는 것을 표명한 것이다. 말의 신학이 말씀의 신학으로 넘어간 것이다. 가정공동체의 존재이유가 다음과 같이 제시된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2,41-52)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식구들이 바로 원수이다.(마태오10, 34-36)(원수라는 표현은 혈연 보다 중요한 하느님의 뜻을 강조하기 위한 강조어법이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14, 26)

 

Ⓖ누가 내 어머니와 내 형제냐?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이다(루카8, 19-21)

 

 

예수마리아요셉이 구축한 성가정은 그 가족 구성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메온 한나라는 인물들의 생과 연결되고, 그들을 통해 다른 이들에게 그들이 전한 메시지가 전달된다.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에 놀라워하였다”는 것에서 성가정의 던지는 메시지는 당시에 얼마나 파격적 메시지인가를 추론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당시의 놀라움이 오늘 우리에게 놀라운 축복으로 전해진 것이다. 놀라움의 질이 달라진 것이다.

 

여기서 시메온이나 한나의 입에서 발화되는 말들은 그냥 말이 아니라 말씀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말의 신학이 틴생하는 순간이다. 말의 신학만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모든 생을 조율할 수 있다. 성서저자는 마리아와 요셉뿐 아니라 시메온과 한나라는 예언자를 예루살렘에 전진 배치하면서 30년 후, 한 아기가 행할 놀라운 일들을 예표한 것이다. 말씀이 사람이 된 사건을 사람이 말씀이 된 사건으로 에워싼 것이다. 복음사가의 치밀한 스토리텔링에 놀라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2] 한 가정에서 학습되고 발화되는 모국어는 어떻게 말-말씀의 경계를 넘는가?

 

 

예수마리아요셉의 성가정의 중심이 아기 예수님이라면, 말-말씀이 된 사건을 담지하고 있는 공간이 바로 가정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가족 구성원들을 위해 수없이 많은 말들을 통해 서로에 대한 바람을 얘기하고, 갈등하고, 갈등을 조율하고 가장 고귀한 것, 필요한 것을 이루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기도 한다. 그 기도는 신앙의 크기만큼 자라, 나 자신을 위한 기도에서, 부모와 자녀를 위한, 형재자매에서, 은인으로, 지인으로 그리고 자기가 속한 사회공동체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퍼져 나아가다, 결국 84억 인류까지 향하게 한다. 또한 살아 있는 이들을 위해서 뿐 아니라 귀천한 이들을 위해서 성인의 통공을 기도한다. 한 아기가 가정공동체에서 듣고 배운 말들의 세계, 그 스펙트럼은 그렇게 광대무변한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가정 공동체에 소속되어 학습된 말은 아이의 인생의 향방을 결정하고 이 세계를 견인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말의 중요함을 늘 경험하며 산다. 가정공동체에서 익히고 배운 말이 발화되어 중심부 담론을 형성하기도 하고,  누군가의 생을 죄우하는 스캔들을 만들기도 한다. 내게서 무심코 발화된 말이 나와 세상을 끌어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를 비트켄슈타인은 『논리-철학논고』에서 언어와 세계와 이름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가 한 말이 그가 지닌 세계를 노정하고, 그의 언어의 한계가 바로 그의 세계의 한계라고 규정한다. 그의 말이 바로 그의 생을 규정한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나의 언어의 한계들은 나의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세계와 삶은 하나다. 나는 나의 세계이다. 하나의 이름은 하나의 사물을 대리하고 다른 하나의 이름은 다른 하나의 사물을 대리한다. 그리고 그 이름들은 서로 결합하여 있으며, 그래서 그 전체는 하나의 살아있는 그림처럼 어떤 사태를 표상한다.

 

칼라너는 『영성신학논총』에서 이렇게 말이 말씀이 되는 사건을 <말의 신학>이라고 일컫는다. 다른 말로 실존과 영성의 토대가 되는 말을 원초적인 말(paroles orginelles)이라고 부른다. 말이 말씀이 되는 에네르기아의 말을 발설하는 이야말로 진정한 사제라고 일컫는다.

 

Ⓘ“말은 육화된 사고이다. 육신과 영혼의 근원적 일치속에서 발화된 말만이 에네르기아ejnevrgeia가 될 수 있다. 말이란 우리가 지금 체험하고 생각하는 바가, 언어라는 몸을 쓰고 나타남으로써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하는 육체적 상태인 것이다.”

 

우리의 입에서 발설되는 수많은 말들 가운데 인간의 영적 실존의 토대를 형성하는 말, 원초적인 말(paroles orginelles)을 시메온을 통해서 확인했다. 또 복음사가를 통해 확인했다. 자기 신앙하나 추스리기 어려운 시대에 루카 복음사가는 마리아의 수태고지를 비롯해 성가정의 일면과 세례자요한 가족의 일면을 서사적으로 구성해 인류에게 전해주었다. 루카복음사가는 마리아신심의 진정한 모태라고 할 수 있다. 

 

말은 체현된 사유이지 사유의 체현이 아니다. 말은 사유 그 이상의 것이기에 사고보다 원초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단일하고 총체적인 인간의 실재가 몸과 마음과 영혼을 지닌 그 이상의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그 자신을 초월해 신과 대화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상대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어떤 언어도 다른 언어로 대체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노리치의 율리안나는 『사랑의 계시』에서 말-말씀이 될 수밖에 없는 말(기도)의 원천에 대해, 기도의 바탕이 바로 주님이라는 것에서, 인간은 인간 그 이상이라는 것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나는 네 간청의 바탕이다. 먼저, 네가 그것을 간청하는 것은 나의 뜻이다. 그다음에, 나는 네가 그것을 바라도록 만들어준다. 그다음에 네가 그것을 간청하도록 만들어주고, 네가 그것을 간청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네가 간청하는 것을 얻지 못할 수가 있겠느냐?”

 

우리의 기도가 즉물적으로 발화되든 대자적으로 발화되든 모든 기도의 바탕은 주님이라는 것! 이 얼마나 큰 위로인가? 우리가 기도하는 것들은 모두 기쁨과 충만과 행복과 보상이 이미 주어진 것들이다. 갈망과 지향은 모두 고귀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 고귀한 것들을 원하게 한 것이 바로 주님이다. 그래서 그 어떤 기도도 이루어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기도가 마치 유예되는 듯한 이유는 어떤 바람들을 간청하고, 간청하는 이유는 기도하는 내가 그만큼 하느님 나라의 고귀한 것들을 갈망하는지 기도하는 자신이 알게되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의 치유와 소생, 그리고 나눔의 기도는 언제나 즉각적으로 이루어졌다. 예수님 자체가 갈망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큰 격려인가? 가정공동체에 누가 중심인가는 그렇게 위로와 힘이 되는 기도의 원천, 지혜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예수마리아요셉으로 표징하는 이 가정공동체는 이 세상은 망해도 우리 가족-가정만 행복하자!는 가족주의가 절대 아니다. 말-말씀의 관계를 배우는 최초의 공동체이자 지상의 교회와 천상의 교회를 연결하는 열린-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그 가정의 중심에 누가 있느냐에 따라 말이 그냥 소음에 해당하는 소리로 끝나거나, 말이 그 뜻을 이루지 않고는 결코 그분에게 돌아가지 않는 쌍날칼을 지닌 말씀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증명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예수마리아요셉이라는 성가적의 표징이 보여주는 사랑을 [즉자적 존재이자 대자적 존재로서 사랑의 현상학]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즉자란 의식없이 단순히 이미 완전무결하고 충만한 본질로써 존재하는 이미 있는 존재라면, 대자는 즉자존재와 대립된 그 자신에 대한 충분치 못한 자신을 의식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대자존재는 부단히 자기를 아직 그것이 아닌 바의 것이 되게끔, 현재를 박차고 나가 그것이 아니게끔 되고자 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의식 속에 즉자와 대자의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의식 속에는 즉자존재 즉 사물과 같이 안정을 추구하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더 지고한 것, 다른 것을 지향하고 끝없이 밖으로 나아가서 그 무엇이 되지 않으면 안될 만큼 그 자체로 불충분하고 불완전한 존재의 결여태로 자신을 의식하기도 한다. 모든 인간은 자신이 충만하다는 것과 그럼에도 자신이 가난하다는 사실을 시시각각으로 경험한다.

 

우리 안의 인격인  즉자와 대자의 이중성을 지니듯, 세상의 모든 가정 역시 이 즉자적 안정과 대자적 자유속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즉자적 안정을 추구하면 우리 가정만 행복하자는 가족주의가 될 수 있다. 우리 가족만을 추구하는 근시안적 안목은 거시적 측면에서 우리 가족조차 없어지는 경우를 결국엔 초래한다. 이 세상의 모든 원리는 공존의 원리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세상의 모든 인류를 바오로 사도가 전한대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지체로 바라본다면 즉, 인류를 하나의 가정공동체라 생각한다면 공존하는 사랑의 현상학에 주목하게 된다.

 

<아기는 자라면서 지혜가 충만해졌다>라고 전하는 루카2,22-40은 시메온과 한나의 예언을 통해 가정공동체의 궁극적 지향점인 보편적 구원론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또한 예수마리아의 울타리가 되어준 요셉을 서사의 표면에서 침묵함으로써 사랑의 사랑이 되어준 요셉에게서 진정한 아버지를 읽을 수 있기도하다.  예수마리아요셉의 성가정이 보여준 은총은, 즉자적 존재이자 대자적 존재로써 살아가는 우리에게  인류애라는 보편적 구원론의 소명을 예외없이 주었음을 상기시킨다. 그런 맥락에서  세상의 모든 가정은 가족주의를 넘어 그 너머에 있는 공존하는 범 우주적인 가족의 완성을 향한 도정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나의 가족 구성원들에게, 내가 속한 공동체에, 더 힘이되고 위로가 되는 말을 건네지 못한 것에 깊이 반성하며 이 글을 썼다!)

 

 

글을 마치며,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그들은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들어오자,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에 놀라워하였다.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들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뚫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한나라는 예언자도 있었는데, 푸느엘의 딸로서 아세르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해를 살고서는, 여든네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또나는 일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령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관하여 이야기하였다.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나서, 그들은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