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오후 네 시쯤,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헤테로토피아(Les Heterotopies)

나뭇잎숨결 2024. 1. 12. 11:03

 

 

반지의 제왕 분위를 떠올리게 한다는 롯데타워! 사진작가 분이의 사진 설명. 탱큐!

 

 

 

 

오후 네 시쯤,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헤테로토피아(Les Heterotopies)

-연중2주, “무엇을 찾느냐?-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를 중심으로

 

 

 

1. 이성부,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린다」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는 것은/살아갈수록 내가 작아져서/ 내 눈은 작은 것으로만 꽉 차기 때문이다//먼데서 보면 크높은 산줄기의 일렁거림이/나를 부르는 은근한 손짓으로 보이더니/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봉우리 제 모습을 감춘다// 오르고 또 올라서 정수리에 서는데/아니다 저어기 더 높은 산 하나/ 버티고 있다. //이렇게 오르는 길 몇 번이나 속았는지/ 작은 산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나를 가두고 / 그때마다 나는 옥죄어 눈 바로 뜨지 못한다.// 사람도 산속에서는 미물이나 다름없으므로/또 한 번 작은 산이 백화산 가리는 것을 보면서/ 나는 이것도 하나의 질서라는 것을 알았다/ 다산은 이것을 일곱 살 때 보았다는데/ 나는 수십년이 넘어서야 깨닫는 이 놀라움이라니// 몇 번이나 더 생은 이렇게 가야하고/몇 번이나 더 작아져 버린 나는 / 험한 날들 넘어야 하나

 

이성부의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린다」는 1연 “살아갈수록 내가 작아져서 / 내 눈은 작은 것으로만 꽉 차기 때문이다.”, 5연 “사람도 산속에서는 미물이나 다름없으므로 또 한 번 작은 산이 백화산을 가리는 것을 보면서 나는 이것도 하나의 질서라는 것을 알았다”는 시행을 통해서, 화자는 단순히 산을 오르는 사람의 심사를 읊은 것이 아니라, 총론 앞에서 각론에 막혀있는 인생의 어떤 상태를 등산에 비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산 정약용이 일곱살 때 읊은 한시에서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는 것은 / 멀고 가까움이 다르기 때문이네”에서 이 “멀고 가까움”을 무엇으로 바라볼 것인가에 따라 삶의 질서가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작은 산을 정(情)이라 부르고 큰 산은 뜻(의)이라 부른다면, 왜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는지 알듯하다. 정과 뜻을 같이하는 사람을 만나기는 정말 힘들다. 정만 들고 뜻은 없는 사람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특이한 케이스이긴 하지만 때론 정은 없고 뜻만 높은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타자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정과 뜻을 어떻게 삶으로 풀어가, 삶의 질서를 잡느냐 하는 데  초점이 놓여있다고 할 수 있다.

 

 

 

 

 

 

 

 

 

2. 온갖 장소들 가운데 절대적으로 다른, 혹은 자기 이외의 모든 장소들에 맞선 공간(미셜 푸코)

 

 

어떤 산을 오르면서 혹은 바라보면서 자신의 현주소를 확인한다면, 어떤 공간이나 장소가 존재의 현주소를 담지하고 있기도 하다. 대부분의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풀어나가기 위해서 그 날 날씨 다음에 가장 많이 화제로 올리는 것이 <당신은 어디 살고 계십니까> 라는 질문이라고 한다. 우리가 거처하는 공간은 단지 우리의 실존의 상태를 말하는 것 이상으로 존재의 층위를 가늠하는 사회적 인격의 한 측면이기 때문일 것이다.

 

<권력은 도처에 있다>는 명제로 평생 공간과 권력과의 관계를 해명하려 했던 미셸 푸코는 공간은 권력 그 이상의 존재론을 담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그는 공간은 정치권력 이상이라는 명제를 『헤테로토피아Les Hétérotopies』(2014)라는 저서에 담고 있다. 공간은 한 인간의 미학, 철학, 종교, 사회심리학 심지어 그의 몸을 포함한, 그 모두를 아우르는 유토피아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푸코가 유토피아와 대비되는 공간으로 독자적인 개념화를 시도한 공간개념으로, 언어로 규정하기 어려운 공간의 성격을 헤테로토피아hétérotopie라고 불렀다.

 

완벽한 세계, 혹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에 반反하는 가치를 갖는 세계, 그러나 실제로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우리는 유토피아utopie라고 부른다. 그것은 인간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런데 유토피아적인 기능을 수행하면서도 실제 지도 위에서 위치를 찾을 수 있는 장소들이 있다면 그것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그것들을 어떻게 불러야 할까?

 

헤테로토피아hétérotopie! 미셸 푸코는 이것을 현실에 존재하는 장소이면서도 그 밖의 다른 온갖 장소들에 대해 “이의제기”를 하고 그것들을 전도시키는 장소, 말하자면 실제로 위치를 갖지만 모든 장소들의 바깥에 있는, 일종의 “현실화된 유토피아”라고 이야기한다. 다락방, 인디언 텐트, 목요일 오후 엄마 아빠의 침대, 거울, 도서관, 묘지, 휴양촌…… 푸코는 언뜻 유사성을 찾기 어려운 이 장소들을 ‘헤테로토피아’라는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줄줄이 소환한다.

 

푸코는 헤테로토피아에 대해 “사물들이 몹시 상이한 자리에 ‘머물러’ 있고 ‘놓여’ 있고 ‘배치되어’ 있어서, 사물들을 위한 수용 공간을 찾아내거나 이런저런 자리들 아래에서 공통의 장소를 규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언어를 은밀히 전복하고, 말과 사물을 함께 붙어 있게 하는 통사법을 무너뜨린다고 이야기한다. 그것은 우리의 사유가 자리한 불가능성, 사유의 한계, 우리의 담론 아래에서 사유할 수 없음을 증언한다.

 

 

이 반공간, 위치를 가지는 유토피아들utopies localisées. 아이들은 그것을 완벽하게 알고 있다. 그것은 당연히 정원의 깊숙한 곳이다. 그것은 당연히 다락방이고, 더 그럴듯하게는 다락방 한가운데 세워진 인디언 텐트이며, 아니면-목요일 오후-부모의 커다란 침대이다. 바로 이 커다란 침대에서 아이들은 대양을 발견한다. 거기서는 침대보 사이로 헤엄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커다란 침대는 하늘이기도 하다. 스프링 위에서 튀어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숲이다. 거기 숨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밤이다. 거기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유령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침내 쾌락이다. 부모가 돌아오면 혼날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모든 문화와 문명에는 사회 제도 그 자체 안에 디자인되어 있는, 현실적인 장소, 실질적인 장소이면서 일종의 반反배치이자 실제로 현실화된 유토피아인 장소들이 있다. 그 안에서 실제 배치들, 우리 문화 내부에 있는 온갖 다른 실제 배치들은 재현되는 동시에 이의제기당하고 또 전도된다. 그것은 실제로 위치를 한정할 수 있지만 모든 장소의 바깥에 있는 장소들이다. 이 장소는 그것이 말하고 또 반영하는 온갖 배치들과는 절대적으로 다르기에, 나는 그것을 유토피아에 맞서 헤테로토피아라고 부르고자 한다.

 

그런데 오늘날 이 위기의 헤테로토피아들이 사라지면서 그 자리를 일탈의 헤테로토피아라고 부를 법한 것들이 대체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곳에는 사회적인 규범의 요구나 평균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는 개인들이 들어간다. 요양소, 정신병원, 그리고 물론 감옥이 그러한 장소에 속한다. 아마 여기에 양로원을 덧붙여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양로원은 위기의 헤테로토피아와 일탈의 헤테로토피아의 경계에 있다. 필경 그것은 위기이지만, 여가활동이 규칙이 되고 무위가 일탈이 된 우리 사회에서 노화는 일종의 일탈이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데 17세기에, 그리고 17세기 말까지도 여전히 박물관과 도서관은 개개인의 선택이 표현되는 곳이었다. 반면 모든 것을 축적한다는 발상, 일종의 보편적인 아카이브를 구축한다는 발상, 한 장소 안에 모든 시간, 모든 시대, 모든 형식, 모든 취향을 가두어놓으려는 의지, 시간 그 바깥에 있으면서 부식되지 않는, 모든 시간을 담아둘 장소를 구성하려는 발상, 이처럼 고정된 어떤 장소에 시간을 영원하고 무한하게 집적하려는 기획, 이 모든 것은 우리의 근대성에 속하는 것이다. 박물관과 도서관은 19세기 서양 문화에 고유한 헤테로토피아이다.

 

푸코는 이 용어의 의미 축을 ‘텍스트 공간’으로부터 ‘사회 공간’으로 옮겨놓는다. “온갖 장소들 가운데 절대적으로 다른” 공간, “자기 이외의 모든 장소들에 맞서” 그것들을 중화시키고 혹은 정화시키기 위해 마련된 “일종의 반공간contre-espace”인 헤테로토피아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첫째, 모든 사회, 모든 문화에는 헤테로토피아가 존재한다. 둘째, 그 존재방식이나 작동방식은 동일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변화한다(묘지). 셋째, 헤테로토피아는 한 장소에 복수의 공간을 겹쳐놓을 수 있다(극장, 페르시아 정원). 넷째, 헤테로토피아는 전통적인 시간과의 단절, 일종의 헤테로크로니아hétérochronie를 동반한다(박물관, 휴양지). 다섯째, 헤테로토피아는 그것을 주변 세계에 대해 고립시키는 열림과 닫힘의 체계를 갖는다(미국식 모텔). 즉 그것은 열려 있는 동시에 닫혀 있다. 여섯째, 헤테로토피아는 나머지 공간에 대해 이의제기의 기능을 수행한다. 즉 단단하게 실존하는 것으로 여겨지던 공간을 신기루처럼 보이게 한다거나(사창가), 확고하게 질서 잡힌 것으로 여겨져온 제국의 공간을 뒤죽박죽인 것으로 보이게 하는 식으로(주도면밀하게 계획된 식민지), 현실 공간을 ‘다르게 보이도록’ 한다.

 

푸코가 다른 저작들에서 보여준 논리적 엄격성이나 꼼꼼한 사료 분석을 생각할 때, 헤테로토피아 개념은 모호하고 논리적 비약이 심하며 헤테로토피아의 사례로 제시된 공간들이 일관성도 별 쓸모도 없다는 비판들이 적지 않았다. 「헤테로토피아」에 대한 해제를 쓴 다니엘 드페르 역시 푸코의 이 글들을 (푸코가 스스로의 지적 행보에서 일종의 일탈을 하여 벌인) ‘문학적 게임’에 속하는 글, (푸코 전체 저작에서) ‘부차적인 텍스트’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푸코의 헤테로토피아 개념은 그것이 ‘재발견’된 시점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문학, 예술, 건축, 도시공학, 사회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논쟁적인 해석을 낳으면서 발전을 거듭해나가고 있다. 이 원고들에 담긴 아이디어는, 그 모호하고 허술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바로 그 덕분에 새로운 사유와 연구를 자극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에 착안한 수많은 연구논문, 학술서, 예술작품이 거둔 흥미로운 성과들은 이 ‘유산된 사유’가 배태하고 있던 역설적인 생산성을 증명한다.

 

다니엘 드페르는 헤테로토피아의 탁월한 예술적 구현물의 예로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의 작품 「무제」를 든다. 그리고 “푸코는 자신이 독자들보다는 이용자들을 희망한다고 여러 번 선언하지 않았던가?”라고 말하며 여전히 이 개념에 여러 해석의 가능성에 열려 있음을 강조한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공간의 배치 양상과 경계, 그것을 낳은 상상과 그것이 간직한 합리성과 가능성을 가로지르는 공간, 한마디로 공간-존재의 한계를 위반하는 반공간. 헤테로토피아는 인간의 욕망과 충동, 미학과 철학, 실존과 종교를 상상 속에서 채워주던 유토피아가 현실의 중력에 의해 끌어당겨졌을 때 드러나는 그 균열과 틈새를 직시하게 해준다. 이를 통해 우리의 내부를 성찰하며 ‘바깥’ 공간을 다시 바라보게 되며, 여기서 공간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나는 누구인가?를 만나게 된다고 본 것이다.

 

 

 

 

 

 

 

 

 

3. <그들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분과 함께 묵었다.> 요한 1,35-42

 

연중 2주 복음을 읽어본다.

 

Ⓐ그때에 35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서 있다가, 36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37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38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라삐’는 번역하면 ‘스승님’이라는 말이다. 3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시쯤이었다.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다. 41 그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이다. Ⓓ42 그가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가자, 예수님께서 시몬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 ‘케파’는 ‘베드로’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1]  “무엇을 찾느냐?-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그들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분과 함께 묵었다.>라고 전하는 요한 1,35-42은 연중 3주 소명사화(마태오4,18-22/마르코1.16-20/루카5,1-11)와는 구조와 내용면에서 사뭇 다른 부르심의 신학에 해당한다. 세례자 요한의 두 제자가 스승의 말을 듣고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 그것은 세례자 요한의 증언이 성공적이었음을 시사할 뿐 아니라 사도로부터 이어지는 교회의 초석을 놓는 계기가 된다. 이어지는 안드레아의 증언에 의해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 역시 증언이 또 다른 증언을 낳았다는 것으로 복음의 확산성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다음 주에 살펴볼 공간복음의 소명사화가 예수님의 절대적인 부르심과 그에 대한 응답이 초점이라면 요한복음 사가는 사도로부터 이어지는 교회론, 믿는 이들의 증언, 인간의 자유의지에 더 큰 방점을 찍은 듯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증언의 내용이 <하느님의 어린 양>, <메시아>라는 것에서 이런 통찰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은 한 개인의 능력을 능가하는 성령의 은사라는 점에서 소명사화의 안팎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의 정체성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을 때, 자신이 누군지 알게 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세상의 모든 민족을 그분의 제자로 삼으라는 파견의 완성에 도달하게 된다는 점이다.

 

요한 1,35-42을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축복인가를 세 부분으로 생각해 본다.

 

그때에 35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서 있다가, 36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37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세례자 요한의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시다>라는 선언을 듣고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간 사건은 그분을 따르는 길은 정이 아니라 의라는 뜻(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교회사를 살펴보면, 세례자 요한은 그의 사후에도 요한 교회라고 불릴 정도로 큰 세력을 떨치고 있었고, 세례자 요한을 메시야로 생각할 정도로 그를 따르던 제자들에게 절대적인 추앙의 대상이기도 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다>는 세례자 요한의 증언이자 선언은 예수의 십자가신학을 천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를 파스카의 양(1코린토5,7)으로, 온 인류의 죄를 없애는 대속의 유일한 제사(1요한3,5/1베드로서1,19/묵시록5,6,9,12)로, 고통받는 야훼의 종(이사야52,13-53,12)으로 선언했다는 점에서 이를 추론할 수 있다. 나아가 정과 뜻 사이에서 일말의 뒤돌아봄도 없는 스승과 제자의 이별 장면은 하느님의 뜻에 담긴 큰 뜻을 바라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정과 뜻 사이에서 멈칫 거리는 것은 엄밀하게 하느님의 뜻을 정확히 간파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두 제자가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는 것은 제자됨을 가리키는 전형적인 동사이다. 공관복음에 나오는 그물을 버리다와 동행어로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과거의 삶의 방식을 버린다는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 옛스승을 버리고 진정한 스승을 따른다는 의미에서, 예수님을 따라갔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그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며, 본질적으로는 예수님을 따라, 예수님의 걸어가신 그 여정을 함께한다는 의미까지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즉 마치 양이 착한 목자를 따르듯(10,4-5,27/8,12)그 분의 목소리를 알아들었다는 것이며, 길이요 진리며 생명(14,6-7)이신 그분으로 인해 진리로 인해 자유롭게 되어(8,31-32) 아버지의 집에 이르겠다는 것이며, 그분이 주는 평화를 얻기 위해서 세상을 이겨야 한다는(17,25-33) 복합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35-37절이 예수님의 정체성의 한 국면, 십자가신학을 예표했다면 이어지는 38절과 39절은 요한복음사가의 특징적인 서술방식인 드러냄과 감춤을 통해 십자가신학은 궁극적인 지점이 인류 구원에 있다는 메시야사상을 바라볼 수 있는 부분이다.

 

Ⓑ38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라삐’는 번역하면 ‘스승님’이라는 말이다. 3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시쯤이었다.

 

요한1, 38-39절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시몬 베드로가 배에 올라 그물을 뭍으로 끌어올렸다. 그 안에는 큰 고기가 백쉰세마리나 가득 들어 있었다“(요한21, 11)와 대응되는 부활의 예표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세례자 요한이 35-37절까지 수난과 죽음 대속의 어린양으로 그분을 선언했다면 두 제자는 예수님과 함께 묵으면서 인류가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야>로 예수를 증언한 것이다.

 

38절과 39절은 생략과 비약으로 이루어져 있는 고도의 문학적 수사에 해당한다. 어떤 사람의 일생이 바뀌는 어떤 순간, 찰라의 심장박동수를 느끼게 하는 문장이다. <무엇을 찾느냐?>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첫 발성이다. 우리는 모두 무엇을 찾는 사람들이다. 왜 나를 따라옵니까?가 아니고 무엇을 찾는냐는 질문은 행위가 아니라 그들 내면의 본인도 인지하지 못하는 찾음이 있음을 바라본 것이다.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라는 질문의 서두에 랍비라는 일반적인 스승에 대한 호칭이 메시야로 변하기까지의 시간은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시간의 충만이 오후 네시쯤으로 폭발한다.

 

⒜무엇을 찾느냐?-⒝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와서 보아라-⒟그분께 함께 묵었다-⒠때는 오후 네시쯤이었다.

 

찾다, (묵고)계시다, 보아라, 함께 묵었다는 동사는 오후 네시쯤이라는 충만과 완성의 시간으로 모아진다.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라는 장소와 거처의 의미는 오후 네시라는 절대적 시간으로 표현된다. 공간의 시간화가 의미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 존재한다는 의미에 대해, 성서신학자인 발레리오 만누치와 살바또레 알베르또 파나몰레는 『요한복음강해』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그리스도인으로 존재하기란, 예수의 곁에(1,38-39)-예수의 생명 안에(6,56)-예수의 말씀 안에(15,4-8)-예수의 사랑 안에(15,9-10)-예수를 따름 안에(12,26)-아버지의 집으로(14,2-4/17,22-24)가는 여정이며, 이는 삼위일체 하느님과 함께 있을 때까지 이어지는 ‘함께’의 여정이다. 예수 곁에- 예수 안에- 예수와 함께는 존재하고-거처하고-머물다의 여정으로, 믿다-따르다- 보다- 머물다는 오후 네시 쯤, 시간의 충만, 완성을 의미한다.

 

두 제자가 예수님과 함께 묵었던 그 시간은 오후 네시쯤으로 그 충만의 완성을 경험했다면, 그 충만은 세상을 향해 나갈 수밖에 없는 강력한 추동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선교, 전교, 파견은 타의에 의한 숙제나 신자의 의무라는 차원을 넘어서는 충만의 완성으로, 예수와 함께 머물렀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 안의 충만의 자발적인 표출로 인해 세상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존재론적 층위라고 할 수 있다.

 

이어지는 40_41절에서는 오후 네시쯤을 구체화한다.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다. 41 그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이다. 42 그가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가자, 예수님께서 시몬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 케파베드로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때는 오후 네시쯤이었다>는 충만한 기쁨은 <우리는 메시야를 만났소>로 구체화된다. 그 충만을 경험한 두 제자 중 한 사람인 안드레아는 형 베드로를 예수님께 데려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시몬을 눈여겨보며에서 시몬 안에서 새로운 베드로의 인격이 창조되는 순간이 메시야라는 의미를 구체화한다. 우리 모두 부모에게서 태어나고 사회적으로 학습되면서 어떤 타자와 구별되는 인격을 형성하게 된다. 그런데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예수의 눈여겨보며 속에서 새로운 영적 인격으로 태어남을 의미한다.

 

요한복음사가는 머물다-본다는 키워드를 통해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다’(3, 1-21) ‘태어나면서 눈먼 소경을 고치다’(9장)에서 <본다>는 것을 통해 영적 인격으로 태어나는 재창조가 이루어져야 함을 역설한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에서 인간이자 사람인 요한의 아들이 아니라, 영적인 사람으로 재창조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케파(베드로)라는 그의 이름으로 분명히 한다. 영적 인격의 탄생은 교회의 탄생을 의미한다. 교회는 단순히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을 아는 이들이 모인 추종의 집단이 아니라 그분으로 인해 새롭게 창조된 영적 아들들의 본질적인 함께함이라고 할 수 있다.

 

 

 

 

 

 

 

 

 

 

[2]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충만의 ‘헤테로토피아(Les Heterotopies)’

 

 

자신을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게 한다는 본질적인 의미에 대해 다른 측면에서  더 생각해 보기로 한다.

 

이를 사물엘기, 시편,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사무엘기 상권 3,3ㄴ-10.19)에서,

 

사무엘이 자라는 동안 주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어, 그가 한 말은 한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셨다.

 

 

시편 40(39),2-10에서,

 

당신은 희생과 제물을 즐기지 않으시고, 도리어 저의 귀를 열어 주셨나이다.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바라지 않으셨나이다. 저는 큰 모임에서 정의를 선포하나이다. 보소서, 제 입술 다물지 않음을. 주님, 당신은 아시나이다.

 

<여러분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코린토 1서 6,13ㄷ-15ㄱ.17-20)에서,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 그 성령을 여러분이 하느님에게서 받았고, 또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님을 모릅니까? 하느님께서 값을 치르고 여러분을 속량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

 

<듣다-말하다>는 <머물다 –보다- 파견하다>와 같은 의미로 자신이 단순이 몸과마음과영혼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몸이 곧 성령이 담긴 성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사건이 된다. 그러기에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라는 바오로의 전언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정확히 알 때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시편저자는 “당신은 희생과 제물을 즐기지 않으시고, 도리어 저의 귀를 열어 주셨나이다. (그분의 말씀과 사랑을) 선포하고 입술을 다물지 않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또한 그분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준비가 되었을 때 주님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들렸고, 그분이 늘 함께 하셨기에 “그래서 그가 한 말은 한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셨다”라고 전하기도 한다.

 

연중2주 <그들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라는 요한 1,35-42은 사무엘기, 시편, 바오로의 서간문을 종합하여 묵상해보면, 분명한 것은 예수님과 함께 머무를 때, 존재의 충만, 그 완성에 이른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복음전파는 필연적인 은총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주 공관복음이 전하는 소명사화에서 예수를 따르기 위해서 현실적인 포기의 신학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다면,

 

연중2주 요한복음이 전하는 소명사화는 영적인 포기의 신학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물음을 하게 한다. 물론 이 질문은 결과론적인 답이 이미 주어진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요한복음 1장에서 서술된 세례자 요한의 면모와 함께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가신다>라는 증언을 할 정도로의 세례자 요한의 통찰이(구약의 모든 예언자들은 성령과 함께 했으므로) 있었음에도 <때는 오후 네시쯤이었다>는 충만의 완성을 세례자 요한이 당신 제자들에게 주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이는 사도로부터 이어지는 교회론을 이해하는 필수적인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요한14,26)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는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요한16,7)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주면 그가 용서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20, 21-23)

 

여기서 사도행전(1장~28)과 바오로 서간문을 참고했을 때, 그것은 성령의 임재와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분 안에서 새로운 영적 인격이 부여되는 은총의 사건임을 알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단지 삼위일체의 제2위격인 예수만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하느님을 모두 체험하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다>는 증언은 고통받는 야훼의 종, 죄의 대속개념을 포괄하는 창조의 스펙트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칼 러너는 『영성신학논총』에서 복음선포는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는 이롭다’는 것을 드러내는 복음적 포기의 현시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하느님의 사랑이 세상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거기서 결과적으로 나오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의 우주적 성격이다. 현세적 의의가 있는 인간의 행동이 우주적 사랑의 발로요 표지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의 일원이 된 사람들이 사랑의 일치를 보이되, 그 행동에 담긴 ‘포기’를 보고 세상 사람들이 사랑은 초월적이고 종말론적인 것이라고 느끼게 해야 한다.

 

세례자 요한이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님에게 떠나보내듯, 예수님은 모든 이들에게 성령을 보내기 위해 제자들 곁을 떠나야 하듯,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정을 뒤로 하고 뜻을 찾는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거룩한 이별에 익숙해져야 함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으로 살기위해선 세상을 포기하는 그 이상의 복음적 포기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선악의 대립이 아니라 선과 선의 만남에서 더 큰 선을 선택하는 결정앞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내 뜻(작은 산)을 그분의 뜻(큰 산)에 넘겨주어야 한다는 것. 완덕의 객체는 항상 어디서나 오로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요, 하느님 안에서 이뤄지는 이웃사랑이기에 그렇다. 그 애주애인이 세상사람들 눈에 이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지고하고 아름다운 사랑으로 현시되어야 한다는 점이 그분을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주어진 이별과 만남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그분과 함께 묵었다(머무르다)는 표현 속에는 영적 차원의 들어올림은 표면상 이별이지만, 그 이별은 슬프지 않은 유일한 이별이이라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작은 선을 큰 선에 포함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포기의 신학은 희생이 초점이 아니라 기쁨이 초점이라는 것을 다음주 묵상주제로 넘긴다)

 

지난주에 살펴본 ‘머무르다(μενειν, menein)’는 표현에서 우리가 포기한 작은 선과의 이별들이 왜 슬프지 않은지 알 수 있다. ‘머물다, 살다, 묵다, 함께하다, 일치하다, 소통하다, 깨닫다, 보다, 감화되다, 교감하다, 섬기다, 충만하다, 채우다, 느끼다. 하나되다’ 등의 의미로 쓰이는 이 <머무름>은 공간적인 머무름과 시간적인 머무름을 아우르는 것으로 영적 소통의 채널이 완전하게 가동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특별한 이들과의 차별화된 소통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의 소통이 머무름이 주는 기쁨이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가 누군가를 만날 때, 날씨 얘기 다음에 당신은 어디 사세요? 라고 묻는 것이 대화의 통상적인 순서다. 그 어디에는 말을 부드럽게 풀어가는 대화의 수순이기도 하지만, 그가 거처하는 공간을 통해 그 사람의 사회적 위치를 어림잡아 보기도 한다. 성서에 나오는 모든 공간은 그가 거처하는 공간, 그의 현실을 넘어서 그의 존재론적 신원에 해당한다. 성서에 나오는 특별한 공간들은 그 공간이 담지하고 있는 충만의 표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분과 함께 묵었다.>라고 전하는 요한 1,35-42은 “무엇을 찾느냐?-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를 통해, “때는 오후 네시쯤이었다”로 수렴되면서 공간의 시간화는 은총의 충만함을 드러낸다. 이것은 "주 하느님께서 사람을 부르시며,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창세기3,9)라는 것과 같은 맥락의 은총의 현주소를 묻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축복의 땅이 가나안이라는 장소로 표징되거나, 타볼산에서 거룩한 변모의 상황을 체험하거나,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는다든가, 하늘과 땅이 연결된 베델 체험 등은 모두 어떤 특정 공간과 관련되어 있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상의 거처는 단지 생물학적인 보호의 차원을 넘어서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충만의 이름, 하느님과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헤테로토피아(Les Heterotopies)’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과 사랑에 빠졌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그 말씀에 머물수 있어, 말씀이 자기 삶에서 사람이 되신 신비를 체험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글을 마치며,

 

그때에 35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서 있다가, 36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37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38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라삐’는 번역하면 ‘스승님’이라는 말이다. 3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시쯤이었다.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다. 41 그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이다. 42 그가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가자, 예수님께서 시몬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 ‘케파’는 ‘베드로’라고 번역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