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설렘의 아르케(arche), 사건의 현상 이면에 있는 존재에의 열림

나뭇잎숨결 2023. 12. 8. 06:38

 

 

 

설렘의 아르케(arche), 사건의 현상 이면에 있는 존재에의 열림

- 대림2주,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를 중심으로

 

 

 

 

1. 로버트 프로스트, 「질문」

 

하나의 음성이 말하길/지상의 인간들아,/별들 속에서 나를 보며/진심으로 말해보라/모든 영혼과 육체의 상처들은/태어남의 대가로는/ 너무 비싸지 않은지.

 

 

로버트 프로스트의 「질문」이라는 시는 정서에 호소하는 시가 아니라, 삶의 기회가 주어진 것에 대해 지불해야 하는 대가가 만만치 않다는 것에 문득 ‘멈춘’ 시다.

 

이 시가 아름다운 것은 이 시의 화자는 적어도 자신의 상처가 어디에 새겨져 있는가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상처는 그가 세계와 충돌하지 않으면 만들어 지지 않은 생존증명서 같은 것이다.

 

그가 자신을 세계에 부단히 열려고 하지 않았다면 좀 더 적게 경험했을 생의 '흔적'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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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유는 위험하다. 하지만 사유보다 더 무서운 것은 ‘무사유’다.(한나 아렌트)

 

 

 

한나 아렌트의 『난간 없이 사유하기』는 아렌트의 정치 사유를 표현하는 대표적인 말이다. ‘난간’은 우리가 사유하고 판단할 때 기대는 전통적인 개념으로, 난간을 붙들지 않고 사유한다는 것은 우리의 정신을 지배하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완전히 새롭게, 기준도 틀도 없이 사유한다는 의미라고 볼 수 있다. 난간이 없다는 것은 자유로우나 위험하며, 언제 끝모르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부담을 안고 계단을 올라야 한다. 하지만 사유란 그런 것이다. 위험하지만 용기 있게 나아가는 것, 어디에도 의존하지 않고 치열하게 사유한 끝에야 세상과 인간, 자유와 삶, 정치가 무엇인지 가닥을 잡을 수 있고 그 속에서 인간다운 삶과 정치를 이야기할 수 있다.

 

아이히만(유대인 학살 집행자)에게는 내면의 목소리가 없었다. 아렌트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그는 ‘하나 안의 둘’이 아니었다. 이는 그에게 함께 사유할 동료가 없었다는 의미다. 사유할 동료란 자기 자신보다는 타자에게 이야기하는 ‘사람’으로, 적어도 세계에 재현되기 전까지는 아무도 들을 수 없도록 너무도 빨리 지나가는 말로 이야기해주는 사람이다. ‘아이히만은 헤아릴 줄은 알았으나 사유하지는 못했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한 일 때문에 자신의 삶을 재판받는 특수한 개인이었다. 이 사안을 두고 양심의 역할에 관해 생각한다는 것은 유일한 양심이 나쁜 양심이며 이 양심은 다만 점잖은 신사와 숙녀에게만 말을 건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이다. 실제로 나쁜 양심은 인간 존엄의 필수적인 조건이다. 이에 반해서 명료하거나 투명한 양심에는 목소리가 없으며 아무에게도 이 목소리가 필요하지 않다. 

 

아렌트는 인간이 인간에게 행할 수 있는 일은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homo homini lupus”라는 고대 개념을 훨씬 능가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고 판단했다. 정치적으로 아이히만의 평범성은 그가 쓴 가면 배후에 어떤 결정을 하도록 만든 근원이 없음을 보여준다. 그의 가면은 선택이나 우연의 강풍이 데려간 곳이 어디든 일관성이나 기대 없이 바뀌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 자신이 “악의 평범성”을 범하지 않았다는 기괴한 행위에 대해 아이히만의 책임이라고 명명했고, 우리는 여기에 동의해야 한다. 

 

아렌트에게는 이러한 무관심이 “최악의 위험”이다. 최소한 판단의 힘을 깨달은 사람들에게 이는 사실 “전적인 판단”의 거부보다 더 위험하다. 유대감보다 무관심이 위험하다. 모든 것이 종료할 때 진리가 나타난다. 그러니까 우리는 종료 지점에 근접했을 때야 진리를 학습할 수 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반드시 우리의 삶으로 보상할 필요는 없더라도 한 시대를 풍미하는 생생한 자극으로서 진리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 

 

타자를 지배하는 그 어떤 사람도 자유롭지 않다는 주장은 보편적 평등의 사실, 즉 정의상 그 누구도 지배할 권리가 없다는 조건과 정확히 부합한다. 그럼에도 지배의 배제, 즉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오래된 구분을 없애는 것은 우리의 전통이 지배 없이는 자유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자유의 유일하고 충분한 조건에서 아주 멀리 있다. 지배받지 않는 사람들은 자유롭다고 간주했다. 이러한 자유는 평등한 사람들 사이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 

 

우리는 예술가와 식자층이라는 이른바 문화 엘리트가 야만의 정치를 상대로 어떻게 승리를 거둘 수 있을지, 모든 “끝없는 수다”, 즉 신념의 상호 공유를 남긴 지식층을 어떻게 경외하는지를 자주 목격했다. 우리는 이 같은 사태에서 어느 정도 더 잘 적응할 수 있고 단순한 ‘지식인의 배반trahison des clercs’ 그 이상을 보게 될 수 있을 듯하다. 정치의 폭력성에 대한 믿음이 결코 야만성의 유일한 특권이 아니다. 

 

사유 자체가 생각이 솟구치는 언덕에서든, 가라앉아야 하는 심연에서든 자체를 잃지 않는 것이라면 그 지침에 따라 사유의 모든 면을 지향할 수 있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사유 활동이 그리는 곡선은 원이 그 중심에 붙들려 있듯 사건에 매여야 합니다. 인간 활동 중 가장 신비스러운 이 활동에서 정당하게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장점은 어떤 정의나 이론이 아니라 오히려 천천히 진행되는 발견과 아마도 어떤 사건이 찰나의 순간에 완전히 밝혀줄 지역을 지도 제작하듯 조사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제게 자유는 철학자가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정의하고 인간의 역량 안에서 이리저리 위치시키고자 하는 인간 본성의 자질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더더구나 인간이 외적 강제에서 도피하려는 이른바 내적 자유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역사적으로 이는 뒤늦게 찾아온 현상이고 객관적으로는 부차적인 현상입니다. 자유란 원래 세계 소외의 결과물인데, 어떤 세계 경험과 주장들이 외부 세계에서 기인하고 우리가 그 경험과 주장들을 감지할 수 있는 실재로서 처음 접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자유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을 텐데도 자유는 각자 자기 자아 내부의 경험으로 변형되었습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이 아닌 타인과 교류하면서 처음으로 자유와 그 반대를 의식합니다. 

 

자유가 본질적으로 정치 현상이라는 제 주장에서 자유란 주로 의지와 사유가 아닌 행위 안에서 경험되며, 따라서 자유에는 행위에 적합한 영역인 정치 영역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정치적 자유는 “내적 자유”가 아닙니다. 이는 한 인간의 내부에 숨을 수 없습니다. 정치적 자유란 행위가 나타나고 보이며 효과적일 수 있는 공간을 이 자유에 부여할 수 있는 자유로운 인간에 달려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의지의 자기주장 역량은 이러한 정치적 자유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자유 개념은 오랫동안 정부의 목적이 자유가 아니라 국민의 복지, 즉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생각에 찬성하며 정치적 논의에서 사라졌는데, 이 개념이 다소 완곡한 형태이긴 해도 이제 국정 운영의 중심으로 돌아왔습니다. 자유는 정의, 권력, 평등과 같은 정치 영역의 많은 현상 중 하나일 뿐만이 아닙니다. 자유는 위기의 시대, 즉 전쟁 또는 혁명의 시대에만 정치 행위의 직접적인 목표가 될 수 있겠지만 실제로 인간이 애초에 정치 조직체 내에서 함께 사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정치의 존재 이유는 자유이며, 자유 없는 정치적 삶은 무의미합니다. 

 

결국 자유가 항상 특권, 즉 소수의 특권이었음이 이제야 드러나고 있습니다. 시민권을 지닌 공적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소극적 측면에서조차 자유는 특권이었습니다. 소수만이 자유롭게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결정적인데요, 자유liberty의 소극적 의미는 이제 타인들의 제약에서 자유로운 것 이상의 훨씬 더 많은 요소로 구성되는 듯했습니다. 현재 우리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연관된 공포에서의 자유뿐만 아니라 가장 특징적이고 심지어는 우선적으로 결핍에서의 자유였습니다. 

 

저는 이를 난간 없이 사유하기라고 부릅니다. (…) 즉, 여러분은 계단을 오르내릴 때 넘어지지 않도록 항상 난간을 붙잡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난간을 잃어버렸습니다. 이건 제가 저 자신에게 이 난간을 말하는 방식이죠. 그리고 이것이 실제로 제가 하려는 일입니다. 

 

‘사유’는 이 위기에 대면하는 한 가지 방식입니다. 사유가 위기를 제거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사유가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대면하는 것이 무엇이든 대면할 수 있도록 항상 우리를 새롭게 준비해주기 때문입니다. (…) 여러분이 사유 후에 어느 정도 비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는 제가 위험한 사유는 존재하지 않으며 사유하는 것 자체가 아주 위험하다고 말할 때 의미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사유는 무슨 생각이든 비판적 검토에 부치는 작용이죠. 실제로 사유는 엄격한 규정, 일반적인 의견 등에 속할 만한 무엇이든 그 기반을 무너뜨리는 작용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유 자체가 그토록 위험한 일이라는 단순한 이유로 위험한 사유가 존재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저는 무사유, 즉 생각이 없는 편이 훨씬 더 위험하다고 믿습니다. 사유가 위험하다는 점을 부인하지는 않습니다만 저는 ‘무사유가 훨씬 더 위험하다nepas réfléchir c’est plus dangereux encore’라고 말하고 싶어요. 

 

아렌트는 무사유의 인간을 몽유병자로 취급했다. 사유에 특정한 목적이 있지는 않다. 하지만 우리 삶의 목표에 일말의 실수라도 발생하게 되면 이 실수의 원인은 무지해서라기보다는 생각이 없었거나 생각이 짧아서라고 흔히 말한다. 무지가 지식의 부정이라면 사유의 부재는 의미의 부정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다시 말해서 사유가 의미에 관여하는 반면에, 인식은 진리를 추구한다. 진리가 강제력을 지닌 데 반해서, 의미의 추구에는 강제력이 없다. “확장된 사유 방식”은 인간의 상상력이다. 일찍이 아렌트는 우리 인간은 상상력 없이는 세계에서 방향감을 가질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정신에 유일하게 내장된 “내부 나침반”이 곧 상상력이다. 그녀는 상상력, 즉 확장된 사유 방식에 의거한 판단이 칸트의 세 비판서 중 진정으로 정치적 기능을 담당하는 반면에 실천 이성으로서의 입법의 이성은 정치가 아닌 도덕성에 귀속한다고 주장한다. 

 

아렌트는 사유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사유는 위험하다고 말한다.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대면하는 것이 무엇이든 대면할 수 있도록 항상 우리를 새롭게 준비해주기 때문이다. 사유하지 않으면 우리는 일상에서 만나는 모든 것을 그게 무엇인지도 모른 채 흘려버리게 되고 이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세상이 무엇으로 구성되고 흘러가는지 인식도 판단도 하지 못하게 된다. 비판하고 검토하면서 주어진 것을, 대면하게 되는 모든 것을 해체하고 무너뜨리는 게 사유의 과정이다. 그러니 사유는 위험할 수밖에 없고 아렌트도 그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사유보다 더 무서운 것은 ‘무사유’다. 우리가 익히 아는 아이히만이 무사유의 전형이며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는 익히 알고 있다. 사고 정지, 사유하지 않음을 극히 경계한 아렌트는 자기 안에 갇혀 있지 않고, 위험할 정도로까지 사유를 밀고 나가기 위해 일단 “멈춰서 생각해보라”고 한다. 어쩌면 아렌트의 이 말은 그 어느 때보다 지금 시대에 절실하다. 사이버 공간 속 허상에 집착하고 타인의 심상한 말 한 마디에조차 상처받는 저변에는 사유하지 않음이 있다. 혼돈과 속도의 시대에 하던 일을 멈추지 않는 한 누구도 생각에 침잠할 수 없다. 이는 아렌트가 우리 시대에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3.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마르코 1,1-8

 

 

대림2주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라고 외치는 세례자 요한의 등장은 네 복음서에 공통으로 실려 있는 말씀으로, 하느님 구원의지의 연속성과 영속성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는 부분이다.(마르코 1,1-8/미태오3,1-12/루카3,1-18/요한1,19-28) 마르코 복음사가는 세례자 요한의 출현부터 빈 무덤 발견(16, 1-8)까지 예수의 공생할에 초점을 맞추고, 예수의 선재사상과 사생활에 대한 일체 언급을 하지 않은 채, 복음을 서술했다.

 

그런데, 1절에서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라는 복합적인 표제어를 붙였다. 여기서부터 성찰을 시작해 본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라는 것은 어떤 행위다. 행위가 있기 위해서는 행위를 추동하는  동인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좋은 행위라도 동인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또한 추동하는 동인이 행위와 목적과 일치시켜야 한다. 행위가 거룩할수록 동인도 거룩해야 한다. 사랑이 어려운 이유는 사랑은 수단과 방법이 같아야 하기 때문이다. 폭력과 두려움으로 사랑을 할 수는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렇다면 누군가의 길을 여는 행위가 가능하려면 이미 그 사람은 그 길을 걷고 있어야 한다. 그 누군가가 내가 아는 아무개가 아니라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라면, 그분의 길을 곧게 하는 것이라면, 이미 그 안에서 하느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정립하는 것이 그분의 길을 곧게 하는 첫걸음, 수순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코 복음 1절에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는 복합적인 표제어부터 생각해 보아야할 이유다. 

 

복음이 쓰여지기전, 50년경에 바오로 사도의 서간문이 쓰여졌음을 감안할 때, 마르코의 복음 서술은 바오로 사도의ㅡ영성이 미처 다 담아내지 못한 그 무엇을 담으려고 했었을 것이라고 추론해 볼 수 있다. 마르코복음 사가는 베드로사도의 통역관이자, 바오로 사도의 1차와 3차 전도여행의 동반자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베드로와 바오로가 누구인가? 초대교회의 양대 산맥이 아닌가?

 

더우기, 우리가 어떤 글을 쓸 때 첫 문장이나 표제어는 그 글 전체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고뇌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마르코 복음사가는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있음>의 무게를 어떻게 감당하고 있는지 바라보기로 한다.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호칭은 바티칸사본과 베자사본 그리고 시나이 사본의 교정문에는 있지만 본문에는 없는 대괄호가 쳐져 있는 호칭이다.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이 호칭의 망설임, 혹은 심사숙고의 흔적을 살펴보기 전에 <복음의 시작>은 무엇인가부터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듯하다.

 

<복음의 시작>은 우리가 알다시피 기쁜 소식이다. 복음이라는 용어는 로마서 1장에 바오로 사도가 처음 쓰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느님의 복음을 위하여 선택을 받은 바오로가’(로마서1,1), '그분 아드님의 복음을 선포하며 내 영으로 섬기는 하느님께서'로마서1, 9) '복음은 먼저 유다인에게, 그리고 그리스도인에게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주는 힘’(로마서1, 16)이라고 서술하고 있음을 참고할 때, 바오로 사도는 복음을 하느님의 복음과 예수님의 복음으로 나누어 바라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복음(euaggelion)은 헬레니즘 시대에 주로 전쟁의 승전소식을 전하는 정치적인 전문용어로 쓰였다. 마르코 복음사가가 쓴 <복음>은 예수의 행적과 예수자체를 복음으로 규정했다는 점에서 그 자체가 이미 어떤 긴장감을 유발하는 고백이자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코복음 집필연대가 70년대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기 직전이나 후이고, 베드로와 바오로의 생몰연대가  66년 전후임을 감안한다면, 그가 쓴 <복음>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가 순교용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기존의 정치권력의 질서가 아니라 하느님나라의 질서의 출현이 바로 예수라는 고백이기에 그렇다. 인류의 진정한 희망과 온전한 성취는 오직 예수에게서만 비롯된다는 복음사가의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바오로 사도는 주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과 재림에 관한 전갈을 강조할 때, 복음이라는 단어를 쓰곤 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그것을 확장해 복음의 내용을 예수께서 하신 말씀과 행적까지 포함하여 복음의 대상을 주로 예수의 공생활에 치중하여 사용하였다. 이는 바오로 사도가 사용한 하느님의 복음과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결합한 것으로 예수님은 복음을 선포하는 주체도 되고 복음의 내용으로 선포되는 객체도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복음의 주체도 되고 객체도 되는 것이 복음의 ‘시작(arche)’이라고 본 복음사가의 견해는, 창세기 1장과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한 처음에> 해당하는 ‘시작(arche)’이 인류의 진정한 '시작'이라고 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가 진정한 ‘복음(euaggelion)의 시작(arche)’이라는 것을 선포한 셈이다.

 

여기서, 마르코 복음 사가는 1세기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그리스도의 복음 선포는 창조행위, 천지개벽을 알리는 고고성으로 여겼음을 바라볼 수 있다. 복음은 창조에서부터 종말에 이르는 하느님의 영원을 여는 지평으로 예수를 통한 창조질서를 회복하고 당시 갖가지 구원의 소식 가운데 오직 예수가 전한, 예수 자신을 의미하는 말로만 복음이라는 용어를 국한해 썼음에 주목해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호칭이 왜 바티칸사본과 베자사본 그리고 시나이 사본의 교정문에는 있지만 본문에는 없는 대괄호가 쳐져 있는 호칭인지 개략해 바라볼 수 있다.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이 호칭은 역사상 예수가 바로 ‘복음(euaggelion)의 시작(arche)’이라고 할 수 있는 그 근원에 대해 통찰이기도 하지만, 복음이라는 단어자체가 정치적인 용어였기 때문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라는 것에서, 그 주님은 누구신가?에 대한 정립이 우리가 그분의 길을 무엇으로 규정할 것이며, 그 길을 <곧게 내어라>를 어떻게 우리의 당면한 신앙 여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함의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대림1주에 <예수그리스도>의 호칭의 정립이 <깨어 지켜라-깨어 있으라>를 규정한다는 것을 소략해 바라본 연장선에서, 대림2주에서는 <예수그리스도> 앞에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호칭이 겹친 것을 상식적인 차원에서 지나칠 것인가? 하는 질문이다. 우리도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니 당연히 예수님도 하느님을 아버지라 불렀을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나, 이름은 바로 그의 사명이라는 점에서 <하느님의 아들>은 예수의 본체론적 현실이고 우리가 그분의 길을 곧게 하는 것은 우리의 존재론적 현실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정립을 요한다고 할 수 있다. 정립이 곧 동인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마르코 복음 사가는 예수의 사생활이나 선재사상에 초점을 두지 않고 오직 예수님의 공생활에만 치중한 복음 서술을 하였다는 것은,  더욱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호칭을 <예수그리스도>라는 호칭과 겹쳐 사용했다는 점에서 복음사가가 예수님의 어떤 정체성을 강조하고 싶어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르코복음서에는 다른 복음과는 달리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호칭이 일곱 번 나온다. 그리고 그 호칭은 누군가의 체험, 심지어 악령의 입을 빌려서도 발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듯, 복음사가는오히려 예수님 자신의 자의식으로 표명되지 않은 호칭을 표제어로 썼다는 것이다. 오히려 <사람의 아들>이라는 호칭이 열네번이나 나온다. 호칭의 빈도수만으로 보자면 <사람의 아들>이 압도적이다. 또한 그 호칭은 예수님이 당신을 일컬을 때, 당신 스스로 발설한 자기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와 <사람의 아들예수그리스도>는 예수님의 정체성에서 무엇을 강조하고자 하는 변별적인 특징이 있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하느님의 아들:1,1/1,11/3,11/5,7/9,7/14,61/15,39

사람의아들:2,10/2,28/8,31/8,38/9,9/9,31/10,33/10,45/12,26/13,31/14,21(두번)/14,41/ 14,62/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호칭은 주로 타자의 입을 통해 발설되었던 예수님의 정체성이었고, <사람의 아들>은 예수님을 통해 발화된 자의식적 정체성이었다. 마르코 복음 사가는 철저하게 이 공식을 적용하면서 예수님의 공생활이 <사람의 아들>로서의 길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하느님의 아들>이었기에 가능했다는 점에서, <하느님의 아들>과 <사람의 아들>을 서술과정에서는 분리하면서 결국은 <하느님의 아들>이었기에 <사람의 아들>로서의 길을 갈 수 있었다는 점에서 두 호칭이 하나로 의미통합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호칭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생각해 볼 차례다. <하느님의 아들>은  하느님과 가까운 이들, 천사, 이스라엘백성, 임금, 황제, 의인을 칭하던 호칭에서 나의 아버지와 너의 아버지가 구별되는(요한20,17) 것으로 독보적인 예수님의 자의식의 결정체, 신원의식의 볼텍스가 된다. 주님만 세속의 권력 앞에서 <너는 누구인가>를 답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역시 이 순례의 여정에서 <나는 누구인가>를 답해야 하기 때문이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나에게 청하여라. 내가 민족들을 너의 재산으로, 땅 끝까지 너의 소유로 주리라”(시편2,7)주님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립비2, 6-11)

 

⒞진정 여러분이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하고 외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그리고 자녀라면 하느님께서 세워주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갈라디아서4, 4-7)

 

⒜에서 나오는 아버지와--아들 개념에는 생물학적인 생성과정이 아니라 아버지의 의향이 새로운 존재를 낳는다는 것과, 선택된 백성에 대한 약속과 사랑과 소명이 집약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 대한 희망의 전언이 <아버지-아들-낳았다>는 데 초점화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하느님의 아들은 사람의 아들이 돠어야 한다는 점에서, 마르코복음사가의 이 표제어는 필연적으로 정체성의 낙차를 받아들여야 한다. 아들은 종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핍립비서2장 5-11절을 연결하여,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다른 맥락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그 아들이 어떤 아들인가? 하는 점이다. 라칭거 추기경은 『사도신경강해』 하느님 아들로서의 <충만>은 바로 <비움>에서만 가능하다고 전한다.

 

⒟“예수그리스도는 마땅히 동등한 존재로써의 존재를 고집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을 비웠다(exinanire)는 종의 비천한 신분을 취함으로써 위아존재(Seinfursich)를 버리고 위타의 움직임(Bewegung des fur)이 되었다”

 

위아존재가 아닌 위타 존재로서의 그 비움속에서,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는 다시 역설의 역설을 거듭한다.

 

⒞에서 아빠 아버지!”라는 외침은, 예레미야스의 『신약성서신학』에서, 예수는 당신의 모어인 아람어로 기도하는 가운데 하느님을 압바-아버지라고 불렀다는 점에서 이를 바라볼 수 있다. 압바-아버지라는 호칭은 탈리다쿰, 에파타, 레마레니사박타니처럼 단발마에 가까운 발화, 심장에서 즉물적으로 튀어나오는 예수의 모국어다.

 

신과 인간의 격절의 거리를 없앤 이 친밀감의 호칭은 유대인들의 종교관습에는 신성모독죄의 혐의를 가중시키는 것이었기에, 아버지라는 호칭자체가 하나의 종교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는 말은 사람의 아들이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가게 하는 필연적인 신원의식의 표출이라는 점에서, 신과 인간의 관계설정에 혁명을 가한 통찰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표제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호칭은 ⒜~⒟에서 보듯, 행위와 인물의 동일성, 행위와 일을 통해 자신을 남김없이 주는 인물과 전적으로 합치되는 데 있다. <하느님의 아들>은 필연적으로 <사람의 아들>과의 병치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라는 첫 번째 의미를 마르코 복음은 1절에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에서부터 바라볼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2]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설정이라면 이어지는 세례자 요한의 증언과 행위는 인간과 신의 관계 설정을 넘어서 인간과 인간의 관계설정까지를 포함한 광의의 관계설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광의 관계설정을 하였던 세례자 요한의 영적 에너지의 근원은 무엇이었을까? 

 

 

마르코 복음 사가는 예수의 사적인 생활은 생략하고 공적인 예수의 행적을 기록하면서. 왜 요한 세례자의 활약부터 시작했을까?(탈출기23,20/말라기3,1/이사야40,3)를 질문하게 되는 이유다.  그것은 예수님의 구원의지의 연속성(혹은 영속성)과 함께, 그 인간의 자유의지의 결합의 필연성을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요한이 서기 27년경에 베푼 물세례 장소는 광야, 요르단강 동부에 위치한 베타니어였고, 그가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상대로 베푼 이 물세례의 특징은 죄의 고백이 필수적이었다. 그 죄의 고백이 종적인 것이든 횡적인 것이든 죄는 하느님으로부터 분리를 조장하는 그 모든 것이라는 점에서 궁극적으로 하느님으로 채워지지 않은 인간의 결핍상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의 사적생활을 과감히 생략하고 공생활이 초점인 복음 서술에서, 즉 객관적이고 기사송신처럼 단문으로 주로 서술했던 서술방식에서 '요한은 낙타 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둘렀으며,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다.(6절)'라는 표현은 잉여적이기에 가히 파격적이라고 할 수 있다. 6절로 마루어 요한은 사막의 유목민처럼 먹고 살았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요한교회라고 불릴정도로 그를 따르던 군중들이 압도적이었다는 것에서 요한은 예수님과는 다른 그러나 같은 비움의 삶을 살았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겠다. 이어지는 7절과 8절이 복음사가의 의도된 서술이라 할지라도 요한은 철저하게 자신의 소명에 집중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자신이 이 세상에 온 이유를 그는 아주 철저하게 알고, 그렇게 살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사두가이파나 바리사이파에게 세례를 거부할 정도로 위선을 경계했음을 알 수 있다. 그 어떤 정치권력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사명에 집중했기에 자신은 길을 닦는 사람이지 길이 아니라는 자기 소임을 분명히 알았다. 그렇듯, 자신의 소명을 안다는 것은 예수님의 정체를 분명히 안다는 말이기도 하다. 너는 누구인가는 곧 나는 누구인가라는 신원의식을 확증한다는 말이다. 

 

성서의 내용을 조금 더 살펴보면,

 

(e)그리고 이렇게 선포하였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닦아라.>라고 전하는 이사야서 40,1-5.9-11에서는

 

(f)"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너희의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 2 예루살렘에게 다정히 말하여라. 이제 복역 기간이 끝나고 죗값이 치러졌으며 자기의 모든 죄악에 대하여 주님 손에서 갑절의 벌을 받았다고 외쳐라. 3 한 소리가 외친다.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사막에 길을 곧게 내어라. 4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거친 곳은 평지가 되고 험한 곳은 평야가 되어라. 5 이에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리니 모든 사람이 다 함께 그것을 보리라."  

 

 또 베드로 사도는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베드로 2서 3,8-14)에서

 

(g)"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 가지를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9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언약에 따라,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러한 것들을 기다리고 있으니,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

 

 

여기서 우리는 이사야 예언서, 말라기서, 베드로 후서, 그리고 마르코 복음서를 통해, 하느님의 구원의지는 언제나 인간의 자유의지와 결합을 통해 구원을 완성한다는 구원의 연속성과 영속성을 바라볼 수 있다.

 

그것을 우리는 강생의 신비앞에서 느끼는 범 우주적인 <설렘>의 실체가 무엇인가를 바라보게 하는 동인이 된다. 세례자 요한을 통해 용서와,회개, 세례라는 대림2주에 등장하는 은총의 사건들,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는 명제는 당위때문에 하게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가장 고귀한 행위들을 < ~해야한다>는 당위때문에 하지는 않는다. 주님이 원하는 고귀한 모든 행위는 아이들이 성탄을 기다리는 것처럼 <설렘>이라는 동인이 잠재되어 있어야 한다. 그분의 길을 곧게 하라는 것은 그 길을 걸으면서 설레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은 행위다. 좋은 말은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설렘이 없는 발화는 그냥 소리일 뿐이다.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는 말은 그 누구도 변화시킬 수 없는 소리일 뿐이다. 그렇기에 설렘이 없으면 인간의 고귀한  행위는 추동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설렘은 감상적 차원이 아니라 의지를 추동하는 힘의 차원으로 넘어간다. 살아있다는 것은, 생의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은, 이세상에 가장 큰 사건이다. 설렘은 살아있다는 사건의 현상 이면에 새로운 존재에의 열림이 있다는 것을 포착하는 것이다. 영적으로 성령의 감도라고 말할 수 있다. 

 

 '요한은 낙타 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둘렀으며,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다.(6절)'라는 표현을 위에서 잉여적이기에 파격적이라고 썼다. 객관적 서술에 치중했던 복음사가가 세례자 요한의 저 입체적인 생생한 묘사는 세례자 요한의 죽음과 함께 그분이 얼마나 자신의 사명에 집중하고 있었는가를 추론할 수 있게 해 준다. 자신이 이 세상에 왜 왔는지를 아는 집중은 하느님께로부터 온 사랑이다. 설렘은 사랑의 집중에서 시작된다. 애인이 많은 이들은 쾌락은 경험할 수 있을지 모르나, 사랑의 설렘을 경험할 수 없다. 대상에 집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설렘은 존재의 열림을 경험하는 고귀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사랑하는 그분에게 집중했던 분! 세례자 요한은 존재의 열림을 뜨겁게 경험한 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강생의 신비앞에서 설렘이라는 표현은 말씀이 사람이 된 사건의 예형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경험하는 설렘은 말씀이 사람이 된 사건의 예형이고, 그렇게 설렘을 경험한 사람만 설렘의 에너지를 확산시킬 수 있다. 21세기는 설렘을 아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 설렘을 모르는 사람은 다시  멀티 아니면 의지를 반납한 사람으로 나눌 수 있겠다.  전자는 모든 것을 하려는 병이고, 후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는 병이다. 병의 이름은 다르나 병의 증세는 같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이 사랑해야할 분의 이름을 모른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름은 알고 있으나 집중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모든 것을 하려는 것이나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 하는 이들은, 타자를 위해 설렘의 길이 되지 못한다. 자신에게서 존재의 열림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존재의 열림, 설렘은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에서 '곧게'라는 부사의 의미를 은총속에서, 존재론적 의미로 재해석한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설렘의 아르케(arche), 사건의 현상 이면에 있는 존재에의 열림]

 

글을 마치며,

 

1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2 이사야 예언자의 글에 “보라, 내가 네 앞에 내 사자를 보내니 그가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3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기록된 대로, 4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5 그리하여 온 유다 지방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모두 그에게 나아가,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6 요한은 낙타 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둘렀으며,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다. 7 그리고 이렇게 선포하였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