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거룩한 질량,고독의 물질성을 너머 타자윤리학으로
-그리스도왕 대축일, “사람의 아들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아 모든 민족들을 가를 것이다”를 중심으로
1. 프랑시스 잠, 『새벽의 삼종에서 저녁의 삼종까지-위대한 것은 인간의 일들이니』
위대한 것은 인간의 일들이니/ 나무병에/ 우유를 담는 일/ 꼿꼿하게 살갗을 찌르는 / 밀 이삭을 따는 일/ 암소들을 신선한 오리나무들 옆에서/떠나지 않게 하는 일/ 숲의 자작나무들을 /베는 일/ 경쾌하게 흘러가는 시내 옆에서/ 버들가지를 꼬는 일/ 어두운 벽난로와. 옴 오른 /늙은 고양이와, 잠든 티티새와/ 즐겁게 노는 어린 아이들 옆에서/ 늙은 구두를 수선하는 일/ 한밤중 귀뚜라미들이 날카롭게/ 울 때 처지는 소리를 내며/베틀을 짜는 일/ 빵을 만들고/포도주를 만드는 일/ 정원에 양배추와 마늘의/ 씨앗을 뿌리는 일/ 그리고 따뜻한/ 달걀들을 거두어들이는 일.
프랑시스 잠(1638-1938)의 『새벽의 삼종에서 저녁의 삼종까지-위대한 것은 인간의 일이니』는 교회력으로 한해를 마감하며, 전례주기에 맞춰 읽기 참 좋은 시이다. 읽기 좋은 시? 그렇다. 잃기 좋은 시다. 사람마다 자신을 고양하고 위로하며, 동시에 자신을 성찰하게 이끄는 시들이 있다.
“위대한 것은 인간의 일들이니” 로 시작되는 프랑시스 잠의 『새벽의 삼종에서 저녁의 삼종까지』에 실려 있는 이 시는 이미 책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작정하고 영성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시다. 그런데 신에 대한 흠숭이 아니라 인간이 하는 일에 대한 나열로 일관했다는 것이 이 시가 지닌 영성의 한 국면을 보여준다. 인간의 일과 신의 일이 다를 수 없다는 것은 범신론과는 다른 맥락에서 <모든 것 안에 모든 것> 인 신이 있다는 통찰을 그가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시에 나열된 인간의 일들은 인류의 오랜 노동의 현장, 땅에서 할 수 있는 농자천하지대본에 바탕을 둔 일들이다. 인간이 하는 일에 귀천이 있을까마는 프랑시스 잠이 나열한 인간의 일들은 카인과 아벨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노마드에서 정착민이 되는 그 분기점부터 시작되었던 천지인이 하나가 되는 일들이었다. 태양의 각도, 태양과 구름의 만남, 별들의 운행. 달의 주기에 의해 풍년과 흉년을 예측할 수 있는 피레네산맥에서의 그의 삶이 그대로 담겨 있는 시다. 프랑시스 잠의 시는 근본적으로 이 땅에서의 생존을 좌우하는 일용할 양식이 하늘의 뜻에 의해 주어진다는 감사를 일상적이고 평범한 시어로 녹여낸 것이다.
중심부 담론에서 벗어났다는 것, 그것은 고독의 힘이다. 고독은 힘이 세다. 당시 주류문학이 지향하던 상징주의의 난해함에 편승하지 않고, 자기 노동의 현장에서 경험한, 인간의 일들만을 나열하면서, 그 인간의 일들이 어떤 근원에서 연유했는지를 도저히 흐르는 강물처럼 관류시켰다는 것이 프랑시스 잠의 시의 백미라고 할 수 있겠다.
사진작가 분이가, 11월의 들판, 탱큐!
2. 철학은 충격과 망설임에서 시작된다(임마누엘 레비나스)
<주체가 무엇인가?>를 논하던 중심부 담론에 비켜서, <타자는 누구인가>를 통해 <나>라는 고독의 물질성을 사유하며, 타자윤리학의 지평을 연 임마누엘 레비나스! 그는 당시 주류철학의 메카라고 불리던 하이데거의 철학에 근원적 질문을 던진다. 인간은 존재자와 <함께 있음>이라는 형이상학적 존재론에서 출발한 하이데거의 존재론에 대해, 레비나스는 오히려 <내가 존재하는 한 나는 단자(monade)>라는 라이프니쯔의 모나드론에서 시작한다. 내가 있다는것으로부터 철학의 사유를 시작한 것이다. 신의 있음에서 나를 규명하지 않고 나의 있음에서 타자를 통해 신의 있음을 규명하려 했기에 나라는 고독의 물질성과 마주하는 불가피한 아래로부터의 존재론을 피력하기에 이른다. 여기서 인간이 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타자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타자윤리학이 낳게 된다.
중심부담론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유의 장을 열어야 했던 엠마누엘 레비나스는 “철학은 충격과 망설임에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왜 그에게 철학은 충격이고 망설임이었을까? 레비나스는 철학이든, 사랑이든 타자의 얼굴을 상정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타자는 미래다,라는 명제에서 엠마누엘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 얼굴론>을 통해 ‘존재의 무게’가 무엇인지 평생 추구했던 철학자다.
레비나스의 주 저서, 『존재에서 존재자로』(1947), 『시간과 타자』(1947), 『전체성과 무한』(1961), 『존재와 다르게 본질 저 편으로』(1974), 『윤리와 무한』(1982)은, 레비나스는 사람은 어떻게 자족적 실체인 '코나투스'의 상태에 도달하고, 동시에 그곳에 계속 머물러 있을 수 없는 존재인가를 질문한다. 즉 어떻게 나는 나의 삶의 태도를 바꾸어 타자를 내 존재의 무게중심으로 삼을 수 있는가를 고민했던 철학자이다.
① 고독은 타인과의 모종의 관계를 존재할 필요가 없다. 고독은 타인과의 선행된 관계의 결핍으로 보이지 않는다. 고독은 홀로서기의 작업과 관련되어 있다. 나는 소유와 겹쳐진다. 나는 내 자신에 의해 타자와 차단된다. 물질성은 필연적으로 존재자의 자유안에서 주체의 출현에 함께 수반되는 것이다. 고독이 곧 물질이기 때문이다.(『시간과 타자』,1947)
하이데거에 있어서 타자는 서로 함께 있음의 본질적인 상황 속에서 나타난다. 그런데 레비나스에게 있어, 타자와 의 근원적인 함께라는 전치사를 통해 묘사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근원적인 입장이라고 본 것이다. 고독이 비극적인 것은 타자가 없기 때문이 아니고 자기 동일성 안에 포로로 갇혀 있기 때문이라고 본 것이다. 고독은 시간의 부재인데 시간의 부재를 인간이 견디지 못한다는 것이다.
②존재는 존재함에 의해서 스스로 고립되는 것이다. 내가 존재하는 한 나는 단자이다. 존재함은 모든 관계, 모든 복수성을 거부한다. 고독은 존재자와 그의 존재 작업 사이의 뗄 수 없는 통합으로 나타난다. 고독은 있다는 사실 자체에 있다(『시간과 타자』, 1947)
레비나스는 하이데거 철학의 극복을 통해 ‘나’를 하나의 질문으로 바라본다. ‘나’란 막연하게 ‘있다’는 사실이자, 사건이므로 <나>는 나를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서 그의 타자론은 시작된다. 그의 철학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나-있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바라보기 위해 <유한자의 존재-홀로서기-고독의 물질성-코나투스- 빛의 소환-고통과 죽음-타자의 소환-다원주의-초월>등을 통해 타자윤리학이 지향하는 형이상학적 욕망의 다리를 놓고 있다.
③존재는 그 자신으로 가득차 있다. 그는 그 자신의 모든 것을 짊어지고 다닌다(41)빛은 플라톤 이래 모든 존재의 조건이다(76)감각과 미학은 사물 자체를 생산한다(87)있음이 만들어 내는 가벼운 소리 그것이 공포다(97)익명적인 있음 속에서 주체는 스로를 확립한다.(『존재에서 존재자로』,1947)
이렇게 나의 있음이 공고히 되었을 때 나타나는 것이 홀로서기이자, 고독의 물질성이다. 내가 나 홀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서양 철학의 전통인 사유가 아니라 경제가 기반이 된 자족적 실체 때문이고, 그것을 <코나투스적 존재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는 <향유적 무아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타자와 얽히지 않는 깔끔한 홀로서기의 존재론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인간은 노동을 하고, 자신의 집을 짓게 된다. 그것이 노동이자 소유를 정초하는 집이기 때문에, 집이 거둬들이고 보관할 수 있는 이동 가능한 것들과 동일한 의미에서의 레비나스에게 집은 소유물은 아니다. 집이 소유되는 것은, 집이 이미 그 소유자를 환대하기 때문이라고 본 것이다. 이것이 집의 본질적 내면성으로, 모든 정주자에 앞서 그 집에 정주하는 정주자로, 진정으로 누군가를 맞아들이는 자로, 맞아들이는 자 그 자체로,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향유적 존재 안에는 환대적 존재가 자리한다고 보았다.
④ 존재의 무게(...)아픔과 괴로움과 고통 속서 우리는 고독의 비극을 형성하는 결정적 요소를 가장 순수한 모습으로 다시 보게 된다. 이 결정적 요소는 향유의 무아경으로을 통해서도 끝내 극복할 수 없는 것이었다. 고통과 죽음은 타자의 현현과 마찬가지로 계산할 수 없는 미래다. 타자는 타자로써 높음과 비천함에 스스로 처해 있다. (『시간과 타자』,1947)
그런데 인간은 나라는 존재의 무게, 빛만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다. 나 홀로 존재하기 위해 자족적 실체의 환경을 만든다는 것은 불가피하게 유한한 자본과의 투쟁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향유적 무아경에서 빛만을 초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일하기 싫은 사람은 먹지도 말라>는 명제로 정식화한다. 이로써, 인간은 만인의 만인에 투쟁 속에 살게 되고, 고통과 죽음에 직면한 시간의 주인이라는 것과 마주하게 된다. 고통과 죽음은 인간의 무기력, 무력함, 불가항력의 환경 앞에 자신을 세우게 된다. 여기서 향유의 존재론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환대로써의 존재론이 표면화 된다. 타자를 받아들이기 된다. 타자와 고통과 죽음은 그 전모를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신비>라는 공통분모를 지닌다.
⑤다원론은 타자의 근본적 타자성을 전제한다. 이 타자성은 내가 단순히 나에 대한 관계에 따라 떠올리는 타자성이 아니라, 나의 에고이즘으로부터 출발해서 내가 마주하는 타자성이다. (『전체성과 무한』, 1961)
그런데 타자는 우리는 <하나다>로 단순하게 환원될 수 없는 나와는 다른 얼굴을 지닌 존재, 알 수 없는 신비처럼 마주한다. 더욱이 타자성은 나에게 주인과 하인의 관계, 섬김의 관계를 요구한다. 자신을 돌볼 책임을 요구한다. 타인의 타자성은 그에게 있지, 나에 대한 관계에 따라 있지 않기 때문이다. 타인의 타자성은 스스로를 계시한다. 하지만 내가 타인의 타자성에 접근하는 것은 나로부터 출발하는 것이지, 나와 타자의 비교에 의한 것이 아니다. 내가 타인의 타자성에 접근하는 것은 내가 그와 함께 유지하는 사회로부터 출발해서지, 나와 타자라는 항들을 반성하기 위해 이 관계를 떠남으로써가 아니다.
⑥내 책임에 명해졌지만 내가 놓친, 잘못한 그-자신의 흔적, 그의 죽을 수밖에 없음이 내 책임이고 내가 살아남은 것이 내 죄인 듯한 그의 흔적?-?이것이 얼굴이다. 얼굴은 직관적 지향의 올곧음에 주어진 이미지의 직접성보다 더 팽팽한 무시원적 직접성이다. 근접성 속에서 절대적인 타자, 즉 “내가 배지도 낳지도 않은” 이방인인 그를 나는 이미 두 팔로 안은 셈이다. ( 『존재와 다르게 본질 저 편으로』, 1974)
여기서 타자의 얼굴이 왜 낯선지? 그것이 무엇인가가 떠오른다. 레비나스의 사상에서 자주 언급되는 얼굴은 눈 색깔, 코의 형태, 뺨의 불그스레함 따위가 아니라 신의 말이 울려 퍼지는 방식으로의 얼굴이다. 신(무한)의 말로 격상되는 얼굴과의 관계는 초상화와 같은 조형적 형태가 아니라 처음에 타인이 나와 무슨 관계인지를 묻지 않는 비대칭적 관계이고, 절대적으로 약하고, 벌거벗은 것과의 관계이며, 극도의 외로움을 겪는 것과의 관계다. 양심을 건드리는 관계이며, 정의를 요구하는 관계이다.
⑦윤리는 자아를 통한 자아의 주권의 자리 없음에서, 가증스러운 자아의 양태에서 의미하지만 또한 어쩌면 영혼의 정신성 그 자체, 그리고 확실히 존재의 의미 곧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라는 존재의 부름에 대한 물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윤리는 무조건적이고 심지어 논리적으로 분간할 수 없는 동일성의 절정 곧 모든 기준 너머에 있는 자율의 절정에서 나로 불리는 동일성의 애매성을 통해 그러나 바로 이 무조건적인 동일성의 절정에서 또한 자기가 가증스러운 자아임을 고백할 수 있는 동일성의 애매성을 통해 의미한다.”(『윤리와 무한』, 1982)
그렇기에 타자의 얼굴 앞에서 우리는 윤리적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된다. 윤리란 “인간적인 것으로서의 인간성”이고 “인간이 자기보다 타자에게 우선권을 줄 가능성”이다. 예컨대, 성서에서 동생 아벨을 죽인 형 카인이 유지한 입장, 즉 나는 나이고 그는 그이다, 라는 존재론적 분리에 결핍된 것이 바로 윤리다. 레비나스는 윤리를 이렇게 정의한다.
이 윤리 또는 윤리적 관계가 레비나스는 지향적 의식이라고 부른다. 레비나스는 지식과 지배와 함께 정립되는 존재 안에서의 정립의 정의(justice) 그 자체인 지향적 의식 대신에 비지향적 의식, 즉 처음부터 타자의 얼굴에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의식을 경험한다. 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의식이 바로 '내가' 되는 것이며,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나로서의 나의 존재에 대한 긍정 속에서 나의 <존재할 권리>를 책임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너를 섬기면서 내가 누군지 알게되는 것!
여기서 무한이란 개념이 나온다. 무한의 관념은 타자와 관련한 동일자의 분리를 전제한다. 그러기에 타자와의 평화가 모든 것에 앞선 나의 일이 된다. 네가 평화롭지 않으면 나는 무조건 평화롭지 않다. 네가 평화로울 때만 너를 떠날 수 있다. 이별을 허락하지 않는 관계, 무관심하지-않음, 말함, 책임, 다가감은 책임질 수 있는 유일한 자, 종속이 나의 해방이다. 그러기에 내가타자 앞에 출현하는 방식은 '출두'다. 나는 격변화할 수 없는 '소환의 수동성' 속에 그냥 나를 위치시킨다. 이것이 나 자신이다.
타자에 대해 나는 책임이 있고, 이 타자 앞에 나는 책임으로 있다. “내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타인은 이렇게 나를 강박하는 이웃이며, 이미 얼굴이며, 비교할 수 있는 것인 동시에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유일한 얼굴이자, 다른 얼굴들과 관계하는 얼굴, 정확히는 정의에 대한 염려 속에서 가시적인 얼굴인 것이다.
만약, 이것을 사랑이라 부른다면, 레비나스는 이 문제를 두 가지로 압축한다. 첫째, 신-인간 사상은 신의 낮아짐, 곧 “가느다란 침묵의 목소리처럼 자기의 비천함에서 나타나는 진리의 관념, 곧 박해받은 진리의 관념”으로서 “초월의 가능한 유일한 형태”라고 말한다. 구체적으로 신은 얼굴과 결합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신은 동화할 수 없는 타자성, 절대 차이이다. 신은 절대적으로 지나간 흔적이다. 그 흔적은 나의 이웃의 얼굴에서의 신의 근접성이다. 둘째, 신-인간 사상은 창조주의 피조물로의 실체변화로서 동일성의 원리를 훼손하는데 어느 정도 타자들을 위한 대속과 속죄, 인간의 인간성을 표현한다. 그것은 내 안에 시작하는 존재 안에서의 이 절정―‘자기의 존재를 보존하는’ 존재의 전복―이다.”
그렇다면 레비나스 타자론에서 사랑과 정의, 자비는 무엇인가. 얼굴과 유일한 타인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구성인 정의는 사랑에서 나오며, 정의와 자비는 낯설어 보이지만 분리할 수 없고 동시적이다. 정의는 자비가 없다면 변질되고 자비는 정의가 없다면 불가능하게 된다. 사랑과 정의, 자비는 동시에 출몰하는 타자론이다. 레비나스는 구체적으로 경제 정의의 활동이 정신적 존재의 서막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정신적 존재를 완성한다고 주장한다. 낯선 얼굴의 타자론을 전제로 한 레비나스의 사상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기에 찬사와 비난에 모두 열려 있다.
3. <사람의 아들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아 모든 민족들을 가를 것이다.> 마태오25,31-46
이 글은 [그대라는 이름의 사랑, 분리와 망아 사이-2020년 그리스도왕 대축일]의 연장선에서 쓴 글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1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 32 그리고 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일 터인데,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 33 그렇게 하여 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다. 34 Ⓑ그때에 임금이 자기 오른쪽에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35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36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37 그러면 그 의인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38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39 언제 주님께서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찾아가 뵈었습니까?’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37)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44).’ 40 그러면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41 Ⓒ그때에 임금은 왼쪽에 있는 자들에게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42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43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이지 않았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있을 때 ‘주님, 저희가 언제 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 44 그러면 그들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께서 굶주리시거나 목마르시거나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또 헐벗으시거나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시중들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45 그때에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46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아 모든 민족들을 가를 것이다.>라고 전하는 마태오25,31-46은 마태오사가의 종말론적 영성을 대표하는 단독문형이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로 정통유대교로부터 축출당한 디아스포라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메시야의 재림 때 양과 염소, 오른쪽과 왼쪽으로 갈리는 심판기준이 <가장 작은 이에게> 베푼 형제애임을 강조함으로써 애인이 곧 애주임을 밝힌 것이다. 39절과 45절에서 ‘너희가 내 형제들인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혹은 해주지 않은 것)’이 심판의 기준이라는 점에서 <이 가장 작은 이>와 <저희가 언제>를 연결하여 교회력으로 한해를 마감하면서 성찰해야할 축복의 메시지는 무엇인가 생각해 본다.
[1]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39절)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45절)
두번이나 오른쪽과 왼쪽으로 나누어진 이들이 묻는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37)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44) 여기서 의인들로 규정된 이들과 불의한 이들로 규정된 이들이 자신들의 행위의 본질을 한결같이 몰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자는 몰아의 사랑 때문에 몰랐던 것이고, 후자는 무지의 타자론 때문에 몰랐던 것이라고 1차적으로 바라볼 수 있겠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39줄)
39절의 주절에 해당하는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에서 1차적으로 <이 가장 작은 이들>이 누구인가? 하는 것부터 해명해야 할 듯하다. <가장 작은 이>를 해명하는 것은 사실 인간은 무엇이고 생명은 무엇인가를 바라보아야 가능한 지점이다. 누구나 인간이 무엇이고 생명이 무엇인지 안다고 생각하지만 표출된 그의 행동을 보면 <모른다> 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데 <불쌍하다>는 것도 유물론적인 것으로 축소해 물질의 빈곤으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물질적으로 부유하다고 해서 그들이 불쌍한 이들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없다. 과연 저 사람이 영혼이 있는가? 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영혼 자체가 상실 된 듯 산다면 물질의 소유 여부와 상관없이 그 사람도 누군가의 케어가 절실하게 요구되는 <작은 이>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복음사가는, <가난한 이>를 특수한 계층으로 한정해 바라보고 있다는 것에서 복음사가가 바라보는 인간의 규정을 추론해 볼 수 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내가 목말랐을 때에,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내가 헐벗었을 때에 ,내가 병들었을 때에, 내가 감옥에 있을 때,...를 거듭 강조하여, 가장 작은 이가,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이들이나 사회적 강자에 해당하는 이들과의 대척점에 있는 이들로 (영적 결핍이 아니라) 중심부담론에서 배제된 생존권 자체가 위기에 몰린 사람들을 초점화 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영적으로 굶어죽는 보편적 대상이 아니라 물질적으로 혹은 사회적 약자에 초점을 맞춘 복음사가의 인간에 대한 규정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물질은 한계효용의 법칙이 작용한다. 인류의 반이 아직도 굶거나, 굶어 죽어간다는 것에서 누군가의 소유는 누군가의 비소유를 의미한다. 복음사가가 생존의 위기 앞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이들을 <가장 작은 이>로 바라본 이 시선속에는 인간에 대한 규정이 임마누엘 레비나스의 관점처럼, <아래로부터의 영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태오복음사가의 최후의 심판에 담겨있는 영성은 루카복음 4장18-19(이사야61,1-2)에서 갈릴레아의 희년선포와 같은 맥락의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마태오복음 사가가 의도했든 안했든, 우리는 이 땅에서 메시야가 출현한 이유에 대해 포괄적 시선을 가져야 함을 발견하게 된다. 즉 모든 존재는 그분에게서, 그분으로 인해 거룩한 인격을 가졌다는 인간의 품위에 관한 것으로부터 인간을 규정하였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보게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복음 4장18-19/이사야61,1-2)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에 대한 재평가이며 모든 인간의 손상된 몸과 마음속에 원래 새겨져 있는 품위에 대한 재인식임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우리 안에 항상 그리스도를 위한 자리가 만들어져야 한다. 그분을 받아들일 때만이 인간의 품위를 진정으로 증진시킬 수 있고 인간의 모든 어려움과 원의를 해결해 갈 수 있다”(조욱현 토마스 신부)
Ⓖ하느님은 위대함을 타고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작은'에 빠집니다. ‘작은’ 은 그가 우리에게 다가오고, 우리의 마음을 만지고, 우리를 구원하고, 중요한 것으로 되돌리기로 선택한 방식입니다. 그의 ‘작은’ 안에는 모든 하느님이 있습니다. "아이, 당신은 하느님이시며, 하느님-자녀"라는 그분을 알아봅시다. 이 스캔들의 놀라움에 넘어갈 수 있도록 합시다. 세상의 창조자는 노숙자입니다. 오늘날 모든 것이 역전됩니다: 하느님은 ‘작은’ 세상에 오시느니라. 그 위대함은 '작은'에서 제공됩니다.(프란치스코 교황)
Ⓔ, Ⓕ, Ⓖ에서 바라 본 <작은 이>는 중심부담론에서 배제된 이들이다. 이들 <작은 이>를 그리스도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는 인간은 몸과 마음과 영혼을 가진 삼중의 존재라는 것에서 그것을 찾을 수 있다. 우리 앞을 지나가는 수많은 군중, 저 사람을 인간이라고 할 때, 그 인간은 누구인가? 안타깝게도 우리는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영혼으로부터 그 사람을 인간을 경험하지 않는다.
창조의 아름다운 본성이 분명 영혼에 기입되어 있지만,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하느님은 나의 아버지이시자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시다>, <우리는 형제이며, 모두 하나다>, <원수마저도 하느님의 창조물이고, 원수를 위해서도 주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창조와 구원의 관점에서 <하나oneness>라는 본성의 기호를 읽지 못한다. 그것은 영혼으로만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읽으려면, 스스로의 몸과 마음이 어느 정도의 궤도에 진입해 있어야 한다. 그러기에 몸과 마음은 영혼을 읽을 수 있는 입술이라고 할 수 있다. 몸과 마음과 영혼이 모두 그분을 향해 정향되어 있다면 그 사람은 지복직관의 상태를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가난한 이들, 소외된 이들, 중심부 담론에서 아웃사이더가 된 이들이 구약에서 모세의 출현을 필연적으로 만들었듯, 그분의 강생의 신비는 바로 중심부담론에서 제외된 아웃사이더들에 의해 그 필연성을 담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몸과 마음이 부서져 울부짖는 이들, 자신의 울음조자 자신이 듣지 못하는 이들, 자신이 영혼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조차 까마득히 모르는 갇혀 있는 이들이, 그분을 이 땅으로 오시게 했다고 할 수 있다. 이 땅이 그분의 창조의 목적에 맞는 그런 유토피아였다면 그분이 왜 이 땅에 사람의 모습으로 오셔야 하겠는가?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39줄)
생존의 위기에 내몰린 이들이 자신이 어떤 존재의 인간인가를 알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이제 ⒝에서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39줄)를 바라볼 준비가 되었다. <그들에게 해 준 것이 나에게 해준 것이다>는 우리에게 구원이 행위인가? 믿음인가? 하는 질문을 하게 만든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복음선포와 믿음(16,15-18)을, 루카 복음사가는 용서(23,34)와 믿음(24,25-26)을, 요한복음 사가는 믿음(11, 25-27/21, 31)을, 바오로의 서간문은 믿음(로마서5장,6장)을 구원의 제1조건으로 거론하고 있다.
마태오사도는 ⒝에서 '가장 작은 이,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39줄)라고 규정하여, 행위가 구원을 담보한다고 말한다. 믿음이 원인이라면 행위는 그 원인이 외적으로 표출된 자기 증명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믿음과 행위가 분리되지 않고 동시적인 것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 사람이 무엇을 믿었는지는 그 사람의 행위(열매)로 알 수 있다는 복음사가의 전재하고 있는 진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아 모든 민족들을 가를 것이다.>라고 전하는 마태오25,31-46을 묵상하다 보면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37)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44)에서, 행위자도 행위하지 않은 자도 왜 자기 행위를 몰랐는가? 하는 원래의 질문으로 되돌아간다.
여기서 과연 완전히 자신을 잊고 가장 보잘 것 없은 이가 그분과 동일하다하는 것을 알면서 <몰아의 사랑>을 하는 이는 누구인가?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39절)라는 몰아의 사랑을 한 분은 주님 한 분이 아니신가?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이 세상에 <가장 작은 이>들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는 이들이 분명히 있다. 아주 많다. 우리도 조금은 하고 있다. 그런데, 세상을 속일 수는 있지만 나를 속일 수는 없다. 그 행위를 곰곰 성찰해 보면, 행위는 있지만 자기를 온전히 잊은 몰아의 사랑 있었나? 하는데서 멈칫 한다. 진정 몰아의 사랑이었나? 하는 것이다.
예컨대, 21세기에 가장 작은 이들을 위해 산 분을 꼽으라 한다면, 누구나 마더데레사를 꼽는다. 그분은 이미 살아서 성인의 호칭을 받은 분이다. 그분이 매스컴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사람은 어떤 행위를 하는 순간에 누구나 자신을 잊는다. 그러나 행위가 끝난 후에는 자기의 이름을 기억한다는 것이다.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하지만, 칭찬은 사람을 자기 우상으로 만들게도 한다.
그렇기에, 자기를 완전히 잊고 <가장 작은 이들>의 인간적 존엄성만을 바라보는 행위를 하는 이들이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에 33절은 오직 자비로써만 얻을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가장 작은 이를 위하여 사랑의 행위를 한 사람조차도 그분의 자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아 모든 민족들을 가를 것이다.> 마태오25,31-46 이 전하는 최후의 심판 기준은 결국 하느님의 자비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33) 하느님의 창조적인 사랑을 실패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자비라는 것을 조금 더 생각해 본다. 마태오25,31-46에서 최후의 심판은 마태오복음의 구원의 결어인 28장20절과 연결하여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는 것과 연결하면 우리의 구원은 창조의 사랑에서, 그리고 예수님의 구원의지가 우리의 자유의지보다 큼에서 그 희망을 찾을 수 있다.
Ⓗ<너희 나의 양 떼야. 나 이제 양과 양 사이의 시비를 가리겠다.>(에제키엘 34,11-12.15-17 11) 나 이제 내 양 떼를 찾아서 보살펴 주겠다. 캄캄한 구름의 날에, 흩어진 그 모든 곳에서 내 양 떼를 구해 내겠다. 내가 몸소 내 양 떼를 먹이고, 내가 몸소 그들을 누워 쉬게 하겠다. 잃어버린 양은 찾아내고 흩어진 양은 도로 데려오며, 부러진 양은 싸매 주고 아픈 것은 원기를 북돋아 주겠다. 그러나 기름지고 힘센 양은 없애 버리겠다. 나는 이렇게 공정으로 양 떼를 먹이겠다. 너희 나의 양 떼야, 나 이제 양과 양 사이, 숫양과 숫염소 사이의 시비를 가리겠다.
Ⓘ시편(23(22),1-2ㄱ.2ㄴ-3.5.6)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네.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 돋우어 주시고, 당신 이름 위하여, 나를 바른길로 이끌어 주시네. 원수들 보는 앞에서 제게 상을 차려 주시고, 머리에 향유를 발라 주시니, 제 술잔 넘치도록 가득하옵니다. 제 한평생 모든 날에, 은총과 자애만이 따르리니, 저는 오래오래 주님 집에 사오리다.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마라,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마테오6, 1-4)
Ⓗ,Ⓘ,Ⓙ에서 주님의 구원의지가 우리의 자유의지보다 더 크고 강하기에 우리는 구원을 받았음을, 받고 있음을, 결국 받을 것임을 에제키엘서, 시편, 마태오 복음사가는 다른 표현의 같은 맥락의 의미를 전하고 있다. 우리가 가장 작은 이들을 바라볼 수 있었다면 그 자체가, 그리고 그들을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었다면 그 자체가 우리에게는 놀라운 자비의 은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대에 가장 작은 이들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이들 뿐 아니라 무언가를 한 이들도 한결같이 자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2]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37)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연결하여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를 보편적 관점에서 바라보기로 한다.
[1]에서 바라본 대로 1차적으로 <가장 작은 이들>은 중심부 담론에서 밀려난 생존의 위기에 몰린 이들로 바라볼 수 있다. 나아가 그분과 작은 이들이 동일시 됨으로써 인간은 그분에게서 그분의 의해서 그분처럼 거룩한 존재의 품위를 갖게된다는 것도 바라보았다.
그런데, 작은 이들에 대한 사랑이, 몰아의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내 안의 가장 작은 이는 누구인지 바라보아야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모든 출발점은 나 자신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몸과 마음과 영혼을 가진 존재이다. 그런데 그 조건 가운데 가장 작은 이는 누구인가?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에서 이웃을 사랑하기 어려운 이유는 바로 우리 자신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에서 그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 자기와 우정을 맺어라, 라는 것으로부터 작은 이에 대한 사랑은 시작된다는 것을 말이다.
애주애인의 사랑의 혈이 막혔을 때, 우리가 돌아가야 할 부분은 마태오22장 36-39절이다. 예수님을 떠보려고 던졌던 율법교사의 질문,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한다.”(순서를 바꾸어)
마태오 복음 사가는 이중 계명 가운데, 최후의 심판기준을 <사람의 아들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아 모든 민족들을 가를 것이다.>라고 전하는 마태오25,31-46에서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보편화하여 바라볼 수 있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는 것이 실은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이라는 이웃사랑의 계명에서 왼쪽과 오른쪽으로 갈린 이유는 실은 <네 자신처럼>에서부터 사랑의 단추가 잘 못 끼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것입니다.> 라고 전하는(코린토 1서 15,20-26.28) 것에서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알기 위해서, 그분의 형제이자 우리의 형제인 가장 작은 이를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를 보편적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바오로 사도는 서간문에서 <그리스도를 입다>라는 표현을 한다.
Ⓚ이제 우리가 처음 믿을 때보다 구원이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밤이 물러가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있게 살아갑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로마서13, 11-14)
Ⓛ이 썩을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고 이 죽을 몸이 죽지 않을 것을 입으면 그 때에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승리가 죽음을 삼켜벼렸다. 죽음아, 너의 승리는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은 어디 있느냐?(1코린토15,54-55)
Ⓜ사실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이 이득입니다. 그러나 내가 육신을 입고 살아야 한다면 나에게는 그것도 보람된 일입니다. 그래서 어느 쪽을 선택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필립비1, 21-23)
Ⓝ여러분은 옛 인간을 버리고 그 행실과 함께 벗어버리고, 새 인간을 입은 사람입니다. 새 인간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모상에 따라 끊임없이 세로워지면서 참 지식에 이르게 됩니다(콜로사이3, 9-10)
Ⓞ지난날의 생활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 가는 옛 인간을 벗어버리고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인간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에페소4, 22-23)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고 의로움의 갑옷을 입고, 굳건히 서십시오(에페소6, 14)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입니다(갈라디아3, 26-29)
Ⓚ~Ⓟ에서 바오로 사도가 전하는 <그리스도를 입다>는 표현은 자기가 한 사랑을 잊은 몰아의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가 한 사랑은 자기를 온전히 잊은 아가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몰아의 사랑은 우리 안에서 누가 주인인가? 하는 질문과 닿아 있다. <그리스도를 입다>라는 표현은 우리 삶의 주인이 우리 영혼이라는 말과 다르지 않은 통찰이다. 우리 영혼은 우리 안에서 가장 감지하기 어려운 작은 아이와 같다. 사실, 우리 영혼이 우리 삶의 컨트럴타워임에도 그렇다. 자신의 변화무쌍한 마음이 자신의 주인 혹은 영혼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부지기수이다. 그렇게 자기 영혼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철부지 아이들에게 하늘나라가 맡겨졌다는 것이다. 그보다 더 큰 자비가 어디 있겠는가?
따라서 1차적으로 그리고 모든 성서해설서들이 말하는 <작은 이>를 실존의 위기에 몰린 이들이겠지만, 그들이 그렇게 실존의 위기에 내몰린 근본 이유를 바라볼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언제>라는 질문속에서, 우리 삶의 컨트롤타워가 무엇인지 모르는 이들이 모든 곳에서 중심부 담론을 이끌어간다는 진단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오른쪽과 왼쪽으로 나누어지는 몰아의 사랑을 한 이들과 무지의 탕진을 한 이들은, 더 근본적으로는 저 밖의 그 누구이기도 하겠지만, 우리 자신 안에서 몸과 마음은 왼쪽으로 영혼은 오른쪽으로 분열되어 있다는 것을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 자신의 분열은 곧 타자의 분열로 이어지고 두 분열은 불가피하게 하느님 아버지와의 분열을 의미한다.
자신의 영혼이 생명의 컨트럴타워 라는 것을 안다면, 우리 자신에게서 오른쪽과 왼쪽으로 나눠지는 부분은 어디인가?를 성찰할 수 있다. 우리는 원래 그분의 오른쪽에 있었던 존재다. 그 근원적인 창조 때의 사랑을 기억하는 것, 그것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뭇생명의 자리를 당연히 오른쪽으로 재배치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옷처럼 입게 될 것이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창세기1,26)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창세기1, 27)
Ⓡ다시는 물이 홍수가 되어 모든 살덩어리들을 파멸시키지 못하게 하겠다.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드러나면 나는 그것을 보고 하느님과 땅 사이에 사는 온갖 몸을 지닌 모든 생명 사이에 세워진 영원한 계약을 기억하겠다(창세기9, 15-16)
우리가 그분을 닮아 창조되었다는 존재의 거룩한 무게는, 하느님의 약속 안에 내재한 기다림에서 계속되었다. 자비가 아니라면 그 무엇도 이해되거나 설명될 수 없는 무한한 인내, 무한한 자비의 사랑이다. 영혼이 없는 것처럼 마치 살덩어리처럼 사는 사람들과 영혼을 바라보는 이들의 생존이 얽혀있다는 것이 하느님의 놀라운 자비다.
그런 맥락에서, <사람의 아들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아 모든 민족들을 가를 것이다.>라고 전하는 마태오25,31-46 의 최후의 심판은 우리에게 큰 축복의 메시지를 던진다.
먼저, 자신이 영혼이 있다는 것조차 바라볼 수 없을 만큼 생존의 위기에 몰린 사람들에게 자신이 진정 누구인가를 알려주는 몰아의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과, <가장 작은 이>의 인간적 품위가 그분과 같다는 존재의 품위를 바라보는 것이 축복의 첫번째 메시지다.
나아가 무엇보다 자신 안에서 몸과 마음, 영혼을 지닌 존재인 우리가 그분에게 돌아갈 때 무엇으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지,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23,46)라는 마지막 일성에서, 우리도 같은 기도, 같은 조건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이,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대축일]에 준 두번째 축복의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그분은 평화, 기쁨, 사랑, 자비의 왕으로, <가장 작은 이>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이미' 오셨고,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나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글을 마치며,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1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 32 그리고 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일 터인데,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 33 그렇게 하여 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다. 34 그때에 임금이 자기 오른쪽에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35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36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37 그러면 그 의인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38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39 언제 주님께서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찾아가 뵈었습니까?’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40 그러면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41 그때에 임금은 왼쪽에 있는 자들에게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42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43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이지 않았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있을 때 ‘주님, 저희가 언제 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 44 그러면 그들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께서 언제 굶주리시거나 목마르시거나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또 헐벗으시거나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시중들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45 그때에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46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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