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이가 탱큐!
코페르니쿠스적 대전환, 추락하는 날개 위로 비상하는 날개
-연중31주,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를 중심으로
1. 이문재, 「손의 백서白書」
①기도할 때/두 손을 모으는 까닭은/두 손을 모으지 않고서는/나를 모을 수 없기 때문이다. 두 손을 모으지 않고서는/가슴이 있는 곳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두 손을 모으지 않고서는/머리를 조아리기가 어렵기 때문이다./두 손을 가슴 앞에 가지런히 모으지 않고서는/신이 있는 곳을 짐작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기도할 때/두 손을 모으는 까닭은/두 손을 모아야 고요해지기 때문이다.//②손이 손을 잡으면 영혼의 입술이 붉어진다./손이 손을 잡으면 가슴이 환하게 열린다./손이 손을 잡으면 피돌기가 빨라진다./손이 손을 잡는 순간 기억을 공유한다./손이 손을 잡는 순간 몸이 몸을 만난다.//③손이 세상을 바꿔왔듯이/손이 다시 세상을 바꿀 것이다. //나는 손이다./너도 손이다.(2014)
이문재의 「손의 백서白書」는 손에 관한 시적 보고서로 이 백서에 의하면, 두 손을 모을 때와 타인의 손을 잡을 때, 신과 하나가 되거나 타자와 하나가 되는 무드라mudra의 축복을 이야기 한다.
①에서, 화자는 기도할 때 우리가 두 손을 모으는 까닭은 손을 모아야만 나를 모을 수 있고, 손을 모아야 가슴을 찾을 수 있고, 손을 모아야 머리를 조아릴 수 있고, 손을 모아야 신(神)이 있는 곳을 알 수 있기 때문이라고 전하는 이 시는 진정한 갈망이 있어야 인간은 두 손을 모고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또한 그렇게 두 손을 모고 기도한다는 자체는 자신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가능하다.
②에서, 기도의 완성은 신과의 소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즉 기도가 나에게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타자에게서 기도는 완성된다고 바라본다. 타자의 손을 잡을 때, 영혼의 입술이 붉어지고, 가슴이 환하게 열리고, 혈액순환이 빨라지고, 기억이 공유되고, 급기야 몸과 몸이 만나 하나가 되어 소통도구로써의 손의 존재이유를
전한다.
③에 이르러 「손의 백서白書」가 궁극적으로 말하려는 지점은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것으로 모아진다.
“손이 세상을 바꿔왔듯이/손이 다시 세상을 바꿀 것이다. //나는 손이다./너도 손이다”
인간의 문명은 우리의 손이 자유로워졌을 때, 비롯되었다. 손이 세상을 바꾸는 도구가 되었을 때는 언제나 자신의 손을 활짝 펼쳤을 때 이루어지거나 이루어짐을 유예하였다. 따라서 세상을 바꾸는 것은 다시 ‘나’ 자신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어떤 지혜서들은 이렇게 전한다. 한평생 세상을 바꾸려고 했으나 그 어떤 것 하나도 바꿀 수 없었다. 그러나 나를 바꾸고자 했을 때, 내가 바뀌는 순간 세상을 향한 문을 열 수 있었다. 그래서 알았다. 바꿀 수 있는 것은 오직 나 자신이라는 것을. 나를 바꾸는 것이 다름 아닌 세상을 바꾸는 것임을!
2.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자크 라캉)
나를 바꾸기 위해선 무엇보다 내가 누군지 알아야 한다. 특히 나의 본능과, 욕구와 요구, 그리고 욕망의 관계를 알아야 한다고 심리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전한다.
그런데 손이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변화의 도구라면, 눈은 권력의 도구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권력은 도처에 있다’라고 시선의 감옥인 팹옵티콘에 대해 말한 바 있다. 푸코와는 다른 관점에서, 프로이트 연구자이자 제자인 자크 라캉은 본다는 것은 인간의 비극의 근원, '나'라는 주체의 상실로, 정치화된 시선의 욕망, <미학>에 있다고 전하기도 한다.
미학의 근원지가 바로 시선이며, 눈은 시선의 감옥이지만, 그것은 타자를 규율하고 통제하는 권력이 아니라, 주체를 해체하는 모방과 추종의, 욕망의 감옥이라고 바라본 것이다. 그것이 욕구와 욕망을 지닌 인간에게 주체의 자리를 흔드는 중심부로 욕망은 그 자체로 중립적인 본능이지만 눈에서 눈으로 욕망의 길이 끝날 때, 욕망은 우리를 시선의 감옥에 갇히게 만든다. 그 시선의 감옥에서 우리는 ‘나’라는 주체를 망각하게 된다. 즉 욕망마저도 나의 고유한 욕망이 아니라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게 된다. 인간의 배고픔은 바로 나라는 주체의 자리를 타자에게 양도한 대가라고 본 것이다.
①주제를 분열시키는 두 개의 기본적인 작용에는 먼저 주체의 소외가 있다. 먼저 나라고 말하는 존재들이 존재한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주체가 실재계에 나타나야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점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자, 이 분열을 다름 아닌 기표의 분열로부터 시작된다(127)
②이것은 타자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 때문에 소외로 규정ㄷ회는 것이 아니라 타자가 주체를 발생시킨다는 중요한 원인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주체 자신이 주체의 발생원인이 된다. 주체의 소와의 주체가 자신의 원인이 될 수 주체의 분열에서 생겨난다(127)
③주체가 처음에 자신의 신체에 대한 시각적 게쉬탈트(Gestalt)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허구성을 역동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거울단계는 매우 흥미롭다.자아와 타자가 병합되는 거울단계가 들어있다(133)
④무의식은 타자의 담론이다. 주체가 자신도 전혀 알 수 없는 사실들에 대해 말할 때, 무의식이 드러난다. 더구나 무의식은 종종 완전히 구어적인 동음이의어 사이에 일어난다(그러므로 꿈의 무의식적 소망의 간접적인 충족이다.(272)
⑤증상, 꿈, 실수, 농담의 구조는 모두 동일하다. 압축과 전치라는 두 가지 동일한 구성방칙에 이것이 작용한다. 이 두 법칙이 바로 무의식의 법칙이다. 이것들이 언어에서 의미를 만들어내는 법칙과 동일하다.(276)
자크 라캉은 『에크리』에서 욕망은 항상 요구를 넘어서서 요구 이전에 존재하기 때문에 욕망은 결코 충족될 수 없기에 자기 안에서 주체라는 말은 애초에 성립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타자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대체하면서 자신이 주체라는 환상을 갖는다고 본 것이다.
인간의 욕망은 실제적인 원리를 주도하는 원리인데, 욕구와 본능과 욕망의 트라이앵글은 하나로 일치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주체의 소외를 필연적으로 겪게되어 있다고 보고 있다. 본능은 주로 육체적인 측면에서 욕망은 심리적인 측면에서 이 욕구를 수렴하거나 발산한다. 주체는 중심부 담론이 유포한 담론 속에서 발화의 주체와 무의식으로 분열되는 데, 그 결과 주체는 에고를 만들어냄으로써 그 자신의 언어 속에서 스스로 소외된다. 결여에서 욕망으로 넘어갈 때, 주체는 언어체계에 진입하게 되는데, 욕망에서 요구로 옮겨갈 때, 주체는 소외 속으로 진입하게 된다고 본 것이다.
욕망은 요구를 넘어선 곳에서 만들어진다. 요구에 의해서 주체의 여러 조건들에 따라 그의 삶이 표출될 때, 삶과 욕구 사이에 틈이 생긴다. 그러나 욕망은 요구 아래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캐내어 질 수 있다. 현존과 부재에 대해 제약받지 않은 요구에 의해서 무를 나타내는 세가지 형태의 존재의 결여가 촉발된다, 무는 사람에 대한 요구, 다른 사람의 존재를 부정하는 증오, 주체에서 무시되는 말로 나타낼 수 없는 무의식의 토대가 된다. 주체의 사라짐은 욕망의 부유속에서 나타난다. 정상적인 욕망의 실현이 불가능해진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모방하게 된다.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게 된다.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것은 초기에는 단순한 모방에서 시작되나 타인에게 자신을 모방할 것(추종)을 요구하는 단계까지 나아간다. 그것이 무신론이자, 자기우상숭배이다.
3.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마태오 23,1-12
1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3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4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5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6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7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8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9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10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11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2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라고 전하는 마태오 23,1-12(마르코12,38-40/루카11, 39-52; 20,45-47)은 공관복음에 동시에 실려 있는 말씀으로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로 지목되는 종교인들의 위선과 무지에 대해 신랄한 꾸짖음을 하고 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어지는 23장 13-36에서, 그 위선의 결과를 “너희들이 지옥형 판결을 어떻게 피하려느냐?”(33-34절)라고 영원한 생명까지 그 위선이 연결된다는 것에 대해 강력한 경고를 하고 있다. 결국 지옥행 티켓을 얻기 위해 613개의 율법을 지킨 것인가?
그런데, 예수님의 그 경고의 이면을 바라보면, 우리의 이름을 드러내려는 에고가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가 누구이며, 우리의 진정한 스승이 누구인지 바로볼 수 있을 때, 지복직관의 축복은 얼마나 큰 것인가하는 메시지가 역설적으로 내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1]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3절)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5절)
마태오 23,1-12(마르코12,38-40/루카11, 39-52; 20,45-47)의 청자는 <군중과 제자들>이다. 그리고 비판의 대상은 언제나 예수님과 대척점에 있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들이다. 우리는 여기서 단순히 항상 대척점에 있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에 대한 비판으로 마태오 23,1-12를 역사화하여 묵상한다면, 우리 역시 그 경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무엇이 하느님의 성전에서 살다시피하며, 성전을 점유했던 그들로 하여금 “너희들이 지옥형 판결을 어떻게 피하려느냐?”(33-34절)라는 영원의 상태까지 거론하게 한 것인가?
이것은 하느님으로 충만하지 못한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적인 배고픔의 근원을 바라보는 것과 관계가 있다. 그들은 왜 자신들보다 사회적 약자인 이들에게서조차 추종을 받기를 바랄 정도로 하느님을 믿는 사람의 자존감을 1도 가지지 못했나?
우리는 <몸과 마음과 영혼>을 가진 존재로 <생각과 말과 행위>로 우리 자신을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자녀로 실현한다. 그런데 “너희들이 지옥형 판결을 어떻게 피하려느냐?”(33-34절)라는 경고에서 <생각과 말과 행위>의 분열이 단지 이 세상에서의 인정결핍증의 배고픔의 차원이 아니라 더 근본적인 영적장애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바라볼 수 있다.
그렇다면,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가 전하는 말은 타당하나 그것을 전하는 이들이 그 말을 실천하지 않은 <말-행위>의 이 괴리는 무엇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말일지라도 그 말을 하는 자신에게조차 육화되지 않은 말들은 그 말이 그들을 결코 풍요롭게 만들지 못했다는 반증이기에 그렇다. 마치, "하느님 믿으세요. 그런데 전 이렇게 늘 배고프답니다" 라고 전한 것과 다르지 않다.
적어도 성서에 나오는 사탄은 예수님이 누군지 그 정체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의 정체조차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율법 613개를 외우고 지키면서, 성전을 사유화할 정도로 점유하면서, 그들이 누렸던 현세적 기득권이 그들의 눈을 멀게 했다는 표면적인 이유의 저변에 그들의 신앙을 눈먼 장님으로 만든 더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일까? 그 배고픔의 근원이 무엇일까를 성찰해야 할 듯하다.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3절)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5절)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어지는 23장 13-36절까지 7개의 불행 선언에서 눈먼 종교인들아, 자칭 인도자들아! 위선자들아! 불뱀들아! 독사의 자식들아! 로 종교적 위선자들을 지칭하면서 그들에게 너희는 불행하여라! 라고 직격탄을 퍼붓는다. 그 선언은 진복팔단을 뒤집는 불행선언으로 영원까지 그 불행을 연결하고 있다. 이는 종교적 위선이 행위당사자 한 사람의 불행으로 끝나지 않고, 즉 단지 타인의 시선의 감옥에 갇혀있는 인정결핍증 환자에 머무르지 않고, 무지한 이들을 함께 지옥으로 끌고가는 불행의 확대재생산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아가, 종교적 위선을 인류역사의 불행의 근원지로 지목한 것. 그렇게 확대 적용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 세계를 하느님 나라로 이끌어들여야 할 종교가 오히려 세속의 가치관으로 물든 것에 대한 통렬한 질타는 무신론자보다 하느님을 부르는 무신론은 더 무서운 무신론이라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종교지도자뿐 아니라 모든 종교인들이 자신의 행위에 대해 깊은 성찰과 회개를 요구하는 하늘의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땅에 쏟아진 무죄한 이들의 피의 값이 모두 위선적인 종교인들, 종교적 위선자인 너희에게 돌아갈 것이라며, 우매한 이들을 함께 지옥으로 끌고 들어가는 종교적 위선을 무섭게 질타하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들이 지옥형 판결을 어떻게 피하려느냐? 라는 이 꾸짖음은 종교적 위선과 그 위선을 간파하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따르는 종교적 무지야말로 종교 그 자체의 존재의의를 부정하는 지옥의 중심축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생각과 말과 행위>라는 존재의 법칙에 대해 깊이 성찰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마태오 23장 13-36절에서 종교적인 위선의 실체가 무엇인가 먼저 생각해 보기로 한다.
⒜불행하여라, 하늘나라의 문을 잠그고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나라의 문을 잠가버리기 때문이다(13-14절)
⒝불행하여라, 개종자 한사람을 얻은 다음, 너희보다 갑절이나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그들을 만들기 때문이다.(15절)
⒜, ⒝는 율법으로 하느님나라의 본질을 막는 주객전도, 목적전치 현상에 대한 경계다.
⒞불행하여라, 성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은 성전과 그 안에 사는 사람을 두고 맹세하는 것인데 너희는 성전의 금(돈)을 두고 한 맹세를 지키라고 한다(16-22)
⒟불행하여라, 박하와 시라와 소희향은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를 무시하기 때문이다(23-24)
⒞, ⒟는 성전의 존재이유를 망각한 채, 봉헌이나 제물의 의미를 물질주의로 전락시키는 세속주의에 대한 경계다.
⒠불행하여라, 너희가 잔과 접시의 컽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의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차 있기 떼문이다.(26절)
⒡불행하여라,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차 있는 회칠한 무덤같기 때문이다(27-28)
하느님 나라와 성전의 존재이유를 부정하는 것은 ⒠, ⒡로 그들의 표리부동, 외화내빈의 허세, 인간의 탐욕과 방종에 대한 내적성찰의 결여, 무절제한 욕망에 대한 경계, 영적 배고픔에 대한 경계다.
⒢불행하여라,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들을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박고 채질질하고 고을에서 추방하며 박해하였다. 의인 아벨의 피부터 성소와 제단 사이에서 살해한 즈카리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땅에 쏟아진 무죄한 피의 값이 모두 너희에게 돌아갈 것이다(29-36)
⒜~⒡는 ⒢로 수렴된다. ⒢는 진리를 방해하는 이들에 대한 총체적인 비판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14,6) 에서 말하는 그 진리를 방해하는 이들에 대해 가장 강력한 경고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마태오 복음 12장, 31-37에서 “사람의 아들은 거슬러 말하는 자는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거슬려 말하는 자는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과 직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가만히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들을 바라보면 성전을 모독하는 것이, 진리를 가로막는 것이 무엇인지 그들은 몰랐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저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 모릅니다. 저들을 용서하소서! 라고 영적 무지를 용서해 달라고 창한 십자가상의 예수님의 기도를 떠올릴 수 있다. 하느님을 불렀지만 하느님의 충만을 경험하지 못한 그들이 걸어간 비틀림에서 그들이 진정 하느님을 몰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눈에 보이는 성전을 점유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그냥 다른 데서 직업을 찾을 수 없는 이들의 안타까운 생존본능이자, 자기 보신을 위한 직업 창출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들 안에 하느님이 원하는 성전은 없었다는 말이 그것을 대변한다. 더 무서운 말은 그들 안에 성전이 없었다는 것은 그들에게 영혼이 없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영혼이 없기에 그들은 살아서 이미 사회적 약자인 타인에게서 자기 존재감을 얻으려는 지옥을 살았고, 그 거짓 허상의 지옥을 유포했고, 그들이 죽어서 영원히 돌아갈 곳을 그들은 이미 선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의 “너희들이 지옥형 판결을 어떻게 피하려느냐?”, 그 이면에 깔려있는 지복직관의 상태는 무엇인가?
마태오 복음사가 최후의 심판기준으로 두 번이나 강조하면서 “내 아버지께서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해 준비한 나라를 차지하여라,”(마태오25, 31-46)에서 “너희가 내 형제들인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나에게 해 준 것이다”(40절)라고 연중 30주에서 율법학자의 질문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대한 대답이었던 애주애인(마태오22, 34-46)이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는 갈림길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을 모르거나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 자체가 성전, 하느님 나라를 훼손하는 것이며, 봉헌을 물질화하는, 회칠한 무덤에 불과하다는 것, 그 자체가 이미 자기 우상숭배라는 것에서, 최후의 심판을 자신에게 언도한 상태라는 경고이다.
제1독서에서 <너희는 길에서 벗어나 너희의 법으로 많은 이를 넘어지게 하였다.>(말라키1,14ㄴ-2,2ㄴ.8-10 14)라고 전하는 데서,
정녕 나는 위대한 임금이다.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민족들은 나의 이름을 경외한다. 2,1 자 이제, 사제들아, 이것이 너희에게 내리는 계명이다. 2 너희가 말을 듣지 않고, 명심하여 내 이름에 영광을 돌리지 않으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리겠다.. 우리 모두의 아버지는 한 분이 아니시냐? 한 분이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지 않으셨느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들이 결정적으로 예수님과 대척점에 선 것은 자신들 스스로 자신들의 그 결핍된 이름을 열광적으로 주고받으며, 자기 우상숭배를 했다는 점일 것이다. 하느님의 이름을 망각했다는 것. 그 망각의 근원을 거슬러,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 모두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고 그 한 분이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망각했다는 것에 이른다. 창조를 망각하는 것이 자기우상숭배의 이름이고, 결핍의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애주애인에 대해 말은 하지만, 말한 것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인류 모두의 창조의 근원이 같다는 것을 바라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영적 무지는 세속적 무지보다 더 무서운 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는, 나의 아버지는 누구인가?를 묻는 것이고, 이는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너는 누구인가?를 아는, 창조의 사랑을 알게하는(살게하는) 지복직관의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자신에게 천국과 지옥을 스스로 언도할 만큼 그렇게 강력하다면 우리는 분명 그분의 창조물인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2]"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11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2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그렇다면 지복직관이라고 부르는 하느님나라의 축복을 누릴 수 있는 그 원천은 무엇인가? 이어지는 10절과 11절에서 <섬기다>와 <낮추다>는 것에서, 우리로 하여금 선생님을 그리스도 한 분 뿐이고, 아버지는 하느님 한 분 뿐이라는 것을 알게 하고, 알게 된 것을 살게 할 수 있는 행위동사에서 그를 추론해 볼 수 있겠다.
<섬기다>와 <낮추다>는 것은 흔히 타인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행위동사로 바라보고 있다. 그렇기에 <섬기다>와 <낮추다>가 어렵다고 생각되거나 태도의 겸양으로 의미를 축소해 바라보기도 한다. 태도는 행위다. 행위를 유발하는 근원을 바라볼 수 없기에, 섬기고 낮추는 것이 늘 대단한 의지를 동반한 것처럼 이야기 된다.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에서 이 <섬기다>와 <낮추다>도 시작된다는 것을 바라보아야 할 이유이다.
전교주일 복음과 주님승천대축일 복음이자 마태오 복음의 마지막 축복에서 우리는 <섬기다>와 <낮추다>가 왜 나로부터 시작되는 것인지 바라볼 수 있을 듯하다.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오28, 20)
마태오 20장 20절은 <섬기다>와 <낮추다>가 무엇인지, 우리 안에서부터 바라보아야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을, <함께>라는 동행부사에서 찾을 수 있다. 그분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이 대체 무엇인가? 우리의 조건인 <몸과 마음과 영혼> 가운데 그분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 우리에게 영혼이 있다는 것에서 그것을 알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영혼을 안다는 것은, 나아가 자기의 영혼을 경험한다는 것은, 창조의 그 아침으로 우리를 되돌린다는 의미에 가깝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으로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창세기1, 26/27)라는 그 창조의 사랑을 바라본다는 것이 우리가 영혼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을 경험하게 되는 출발점이다. 그때 우리는 언제나 그분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것이 어떤 상태를 말하는지 감사할 수 있다.
생각해 보자! 어렴프시 자신이 영혼이 있다는 것은 말할 수 있겠지만, 그 어린아이처럼 작은 영혼은 어떻게 경험되나? 몸과 마음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 늘 나에게 주인처럼 행사하니까(경험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영혼을 알 수 있다면, 우리가 진정 섬기고 낮추는 것은 자신의 몸과 마음과 영혼의 관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이 확장되어 타자 안에 있는 그의 영혼을 내 몸과 마음이 섬기고 그 앞에서 나는 비로소 누구에게나 몸과 마음을 기꺼이 낮출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그리스도를 스승으로,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근거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영혼을 알지 못한다면 아니, 안다하더라도 자신의 영혼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스승으로 모실 수도 하느님을 아버지로 바라볼 수도 없을 것이며, <섬기다>는 것과 <낮추다>는 그 대상을 타인으로 국한시킬 때, 말만 무성할 뿐 그 말이 말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말의 육화는 자기 영혼을 섬세하게 경험하는 일이다.
나는 영혼이 있어, 라고 말은 할 수 있겠지만, 영혼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자유의지는 하느님의 존재를 무로 만드는 배고픈 이상행동을 하게 된다.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처럼 사회적 약자(타자)를 통해 자기 자존감을 확인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영혼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그분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사실을 결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우리의 영혼을 섬기고 우리의 영혼에 몸과 마음이 기꺼이 시중들 때, 우리는 비로소 그분이 세상 끝날까지 나와 <함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확고하게 믿을 수 있다.
그때, 타인과의 관계에서 그 사람이 나의 미학, 취향에 맞든 안 맞든 그를 섬기고 그 영혼 아래 나를 둘 수 있다. 나의 영혼과 그의 영혼이 같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사랑은 엄밀히 그의 영혼과 나의 영혼을 보호하고 확장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니 온 누리에 가득한 그분의 영이 곧 우리의 영임을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성서에 나오는 수많은 표징과 기적은 영혼이 무엇이며, 그 영원한 생명을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기억하라는 것임을 바라볼 수 있겠다.
여기서 그리스도적 겸손이란 진정 삼위일체 하느님을 아는 것이며, 자신이 영혼을 가진 존재임을 아는 영적 정체성과 맞물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혼의 눈, 영안이 열린 것이 겸손이고, 그것이 지복직관의 천국이며, 그분이 함께하는 것을 경험하는 현존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노리치의 율리안나는 『사랑의 계시』에서 영혼의 눈, 영안이 열려야지만 하느님의 뜻인, 하느님이 원하는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때 주님께서는 제 영혼의 눈을 열어주시고 제 마음 한가운데 있는 저의 영혼을 보여주셨습니다. 제 영혼이 그분의 거처였습니다. 저는 끝없는 세상처럼 넓은 그 영혼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영광스럽게 그분 안에서 바로 지금 평화와 안식 안에 그분은 앉아 계십니다. 그 신성이 하늘과 땅을 다스리고 지키십니다. 그 신성은 절대 권능, 절대 지혜, 절대 선성입니다(286)
⒤ 하느님 안에서 모든 것을 가지리라. 그분 아래 있는 모든 것은 우리를 충족시켜주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창조된 모든 것을 무로 여길 때까지 어떤 영혼도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모든 것이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모시기 위하여 가까이 모든 것을 무로 여기는 그 때에 영적인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42)
⒥그것이 나다. 가장 드높은 그것이 나다. 네가 사랑하는 그것이 나다. 네가 기뻐하는 그것이 나다. 네가 섬기는 그것이 나다. 네가 열망하는 그것이 나다. 네가 갈망하는 그것이 나다. 네가 의미하는 그것이 나다. 모든 것이 나다. 거룩한 교회가 선포하고 가르치는 것이 나다. 바로 여기서 보여주는 그것이 나다.(123-124)
⒦너는 이러한 일에서 네 주님의 뜻을 배우고자 하느냐? 그것을 잘 배워라. 사랑이 그분의 뜻이다. 누가 그것을 너에게 보여주었느냐? 사랑이다. 그분께서 너에게 무엇을 보여주셨느냐? 사랑이다. 무엇 때문에 그분께서 그것을 보여주셨느냐? 사랑을 위해서다. 너는 그 사랑 안에 붙잡아 두어라. 그 사랑 안에서 너는 더 많이 배우고 알아야 한다. 그러나 너는 결코 그 안에서 끝이 없는 다른 것을 알지도 배우지도 못한다.(342)
⒧나는 네 간청의 바탕이다. 먼저 네가 그것을 간청하는 것은 나의 뜻이다. 그 다음에 나는 네가 그것을 바라도록 만들어 준다. 그 다음에 나는 네가 그것을 (거듭) 간청하도록 주고, 네가 그것을 간청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네가 간청하는 것을 얻지 못할 수가 있겠느냐?(172)
노리치의 율리안나가 『사랑의 계시』에서 전하는 메시지를 묵상해 보면, 하느님 이름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드높이려는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적인 것이 보여주는 자존감 제로 상태인 인정결핍증은 하느님의 뜻인 사랑을 알지 못한 상태이며, 그것은 결국 자신이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영혼을 지닌 존재이며, 그 영혼이 하느님의 성전이라는 사실을, 그로인해 세상 끝날까지 함께 계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은 그분을 알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녀는 <하느님은 우리의 영혼보다 더 우리 가까이 계시며, 창조 이전에 이미 우리는 그분의 사랑이었다>고 전한다. 그 사랑은 결코 철회될 수 없다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제2독서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과 함께 나눌 뿐만 아니라, 여러분을 위하여 우리 자신까지 바치기로 결심하였습니다.>라고, 테살로니카 1서.2,7ㄴ-9 .13에서 죽음을 무릎쓰고 복음을 전하는 그 사랑을 어머니의 자녀 사랑에 비유한다. 같은 맥락에서 노리치의 율리안나는 『사랑의 계시』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어머니”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에서, 자녀들을 품에 안은 어머니처럼 온화하게 처신하였습니다. 8 우리는 이처럼 여러분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과 함께 나눌 뿐만 아니라 여러분을 위하여 우리 자신까지 바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여러분은 그토록 우리에게 사랑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또한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과 늘 대척점에 있었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를 포함한 모든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에 대해 로마서 11,1-29에서 이런 변호와 계시의 통찰을 들려준다.
"그런데, 그들의 잘못으로 세상이 풍요로워졌다며느 그들의 실패로 다른 민족이 풍요로워졌다면, 그들이 모두 믿게 될 때에는 얼마나 더 풍요롭겠습니까?(12절)그들은 복음의 관점에서 보면 여러분이 잘되라고 하느님의 원수가 되었지만, 선택의 관점에서 보면 조상들 덕분에 여전히 하느님께 사랑받는 이들입니다. 하느님의 은사와 소명은 철회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28-29)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을 안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영혼을 지닌 존재임을 알았을 때,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누군가를 위해 우리 자신을 기쁘게 나누는 것은 그것이 영혼을 지닌 우리의 본성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섬기다> 혹은 <낮추다>는 것은 창조의 본성대로 살다,라는 말이기도 하다. 그 연장선에서 <애주애인>은 우리의 본성대로 사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섬기다>, 혹은 <낮추다>는 행위동사가 지닌 궁극의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들어 올리다>는 것은 몸과 마음 위로 내 영혼을 <들어 올리다>는 말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예컨데, 현실 속에서 우리는 기쁨(지복직관의 상태)과 슬픔(고통)이 교차되는 것을 자주 경험한다. 그때, 우리는 슬픔이나 고통의 감정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슬픔이나 고통에 밥을 먹여서 하마로 키우는 것이 아니라) 슬픔과 고통의 상황을 그냥 그분과 함께 인내한다. 몸과 마음이 우리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슬픔과 고통은 유한하고 기쁨은 영원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따라 내 영혼을 당신께 맡깁니다! 라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성인성녀들은 우리의 앞을 밝혀주는 빛인 것이다. 이 순례의 여정 자체가 우리 영혼 안에서 그분이 나와 함께 대속의 현재진행형을 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즉 빛과 어둠의 '주름'을 잡을 수 있는 것이, 자기 영혼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지옥과 천국은 우리 각자의 선택이다. 그것은 창조의 선물인 자유의지의 결정이며, 그 원인은 자신의 영혼을 아는 존재가, 얼마나 영혼의 모상이신 하느님을 갈망하는 가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갈망의 크기는 바로 은총의 크기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주인이 영혼이라는 것을 안다면, 몸과 마음은 당연히 그 영혼을 섬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때 우리도 “나는 네 기도와 갈망과 간청과 존재의 바탕이기에 그렇다"는 그분의 음성을 들을 것이다.
시편저자는 131(130),1.2.3에서 영혼에 대해 이런 간절한 기도를 바친다. “주님, 제 영혼을 당신의 평화로 지켜 주소서. 오히려 저는 제 영혼을, 다독이고 달랬나이다. 제 영혼은 마치 젖 뗀 아기, 어미 품에 안긴 아기 같사옵니다.”라고. 우리가 돌보고 보듬어야 하는 영혼의 상태를 엄마 품에 안긴 아기라고 노래하기도 했다.
글을 마무리하며, [코페르니쿠스적 대전환, 추락하는 날개 위로 비상하는 날개]라는 것에서, 날개의 이름은 자유의지와 갈망이다. 그렇다면, 추락하는 날개는 무엇인가? 나의 몸과 마음이다. 이름이라는 허상을 붙잡고 있는 현실주의, 물질주의에 매몰된, 오욕칠정에 묶여있는 바로 그 유한한 몸과 마음이다. 죽기 전에 영혼 이탈을 초래한 그 몸과 마음이다. 하느님은 없다는 결핍을 조장하는 그 몸과 마음이다.
반대로 비상하는 날개는 나의 영혼이자, 그대의 영혼이다. 하느님 나라를 간절하게 갈망하는, 이 세계가 하루빨리 하느님 나라가 되기를 무엇보다 애타게 갈망하며, 수시로 두 손을 모아 아버지께 간청하는 그런 영혼이다. 우리 영혼안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을 체험하고, 감사하고, 기뻐하고, 찬미하며, 평화와 충만을 사는 아버지와 하나된 아들의 상태이다. 어느 시대에나, 세상의 가치관을 거슬러 자신의 영혼을 경험하고 그 영혼안에 그리스도가 현존한다는 것을 아는 것은 영적인 코페르니쿠스적 대전환에 해당한다.
그런 맥락에서, 11월, 위령성월을 보내는우리에게, 마태오 23,1-12은 <그대의 영혼은 지복직관의 상태인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진정 평화로운가?>를 묻는다고 할 수 있다.
글을 마치며,
1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3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4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5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6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7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8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9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10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11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2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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