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악산에서 순애가, 탱큐!
불멸의 사랑,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양인자)
-연중32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를 중심으로
1. 박정대, 「그때까지 사랑이여, 내가 불멸이 아니어서 미안하다」
⑴그날 불멸이 나를 찾아왔다/ 나는 낡은 태양의 오후를 지나, 또 무수한 상점들을 지나 거기에 갔으므로 너무나 지쳐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 등 뒤로는 음악 같은 나뭇잎들이 뚝뚝 떨어지고, 서러운 풍경의 저녁이 짐승처럼 다가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주머니 속에서 성냥을 꺼내어 한 점의 불꽃을 피워 올렸다, 영원은 그렇게 본질적인 불꽃 속에 숨어 있다가 어느 한순간 타오르기도 한다/⑵그날 불멸이 나를 찾아왔다, 아니 그날 내가 불멸을 찾아 나섰는지도 모른다, 뿌연 공기들을 헤치며 이 지상에는 없는 시간을 나는 찾아 나섰다/ 내가 한 마리의 식물처럼 고요했던 시간, 내가 한 그루의 짐승처럼 그렇게 타올랐던 시간, 바람과 불의 시간을 지나 공기의 정원에서 내가 얼음꽃을 피워 올렸던 그 단단한 침묵의 시간을 찾아 나는 나섰다/ ⑶그런데 그날 불멸이 나를 찾아왔다/ 나는 늘 불멸을 꿈꾸었지만, 그렇게 불멸을 만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으므로, 나는 오히려 불멸이 너무나 낯설었는데, 어쨌던 불멸은 내가 갔던 거기에, 그렇게 당도해 있었다/ 네가 불멸이니, 그때 너무나 당황했으므로 나는 속으로 그렇게 물어보았는지도 모른다/ 불멸이 이제 나에게 당도했으므로 나는 어찌할 줄을 모른다, 오랬동안 불멸을 꿈꾸어왔지만 불멸이 나에게 당도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불멸 앞에서 이 세계의 본질적인 사랑을 생각한다/ 불멸도, 사랑도, 내 생각으로는 그저 저 스스로 존재하는 그 무엇일 뿐이다/ ⑷그리고 그 누군가는 나에게 또 불멸의 아름다운 시를 쓰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제 쓰지 않는다, 불멸의 아름다움이란, 느끼는 자의 내면속에서 수시로 쉬고 존재하며, 자라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시가 아니다/ 시가 아니므로 불멸이 아니고 불멸이 아니므로, 이것은 불멸의 시가 된다/ 그렇다, 당신이 이 글에서 시를 읽어내려고 했다면 당신은 이미 시인이다, 그러나 시 아닌 그 무엇을 읽어냈다면 이미 당신은 또 하나의 불멸인 것이다/ ⑸나도 언젠가는 저 별들에게로 돌아갈 것이므로, 나도 언젠가는 불멸인 것이다/ 그리고 어느 먼 훗날, 태양이 식어가는 낡고 오래된 천막 같은 밤하늘의 모퉁이에서 서러운 별똥별로 다시 만난다 하더라도, ⑹나는 아직 살아있으므로, 나는 불멸이 아니라 오래도록 너의 음악이다/ 그때까지 사랑이여, 내가 불멸이 아니어서 미안하다/ 그때까지 불멸이여, 내가 사랑이 아니더라도 나를 꿈꾸어다오.
박정대 시인의 「그때까지 사랑이여, 내가 불멸이 아니어서 미안하다」에서 불멸에 대한 여섯 번의 어젠다agenda를 제시한다. 불멸을 의제화하여 여러 방면에서 불멸이 무엇인가를 모색하면서, 화자가 불멸을 정립하는 사유과정을 시화한 것이다.
첫 번째 불멸은 “그날 불멸이 나를 찾아왔다”로 시작하여, 성냥을 그어댄 순간 그 찰라의 불꽃 속에서, 영원은 본질적은 불꽃 속에 숨어 있다가 어느 한 순간 타오르는지도 모른다는 것으로부터 불멸에 대한 불을 지핀다. 두 번째 불멸은 “그날 불멸이 나를 찾아왔다, 아니 그날 내가 불멸을 찾아 나섰는지도 모른다” 라며ㅡ바람과 불의 시간을 지나 단단한 얼음꽃처럼 그렇게 단단한 침묵 속에서 만난 것이 어쩌면 불멸일지도 모른다는 것에서 불멸의 물질성을 바라본 것이다.
세 번째 불멸은 “오랬동안 불멸을 꿈꾸어왔지만 불멸이 나에게 당도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불멸 앞에서 이 세계의 본질적인 사랑을 생각한다/ 불멸도, 사랑도, 내 생각으로는 그저 저 스스로 존재하는 그 무엇일 뿐이다”에서 불멸은 언제나 본질적인 사랑과 관계가 있지 않을까를 생각하고 있다.
네 번째, 불멸은 “시를 읽어내려고 했다면 당신은 이미 시인이다, 그러나 시 아닌 그 무엇을 읽어냈다면 이미 당신은 또 하나의 불멸인 것이다. 다섯 번째 불멸은, 나도 언젠가는 저 별들에게로 돌아갈 것이므로, 나도 언젠가는 불멸인 것이다”에서 시는 모든 예술 장르에서 가장 불멸 쪽으로 기울어진 장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어, 불멸은 불가피하게 죽음 너머에서만 말해질 수 있는 어떤 상태라는 것을 바라본다. 시가 어떻게 죽음 너머의 불멸을 말할 수 있는가하는 고민이 담겨 있다.
여섯 번째 불멸은 “나는 아직 살아있으므로, 나는 불멸이 아니라 오래도록 너의 음악이다/ 그때까지 사랑이여, 내가 불멸이 아니어서 미안하다/ 그때까지 불멸이여, 내가 사랑이 아니더라도 나를 꿈꾸어다오.”라고 말하는 것에서 불멸은 불가피하게 죽어야지만 알 수 있는 어떤 상태일 것이라고 전한다. 그러나 나는 아직 살아있으므로, 그리고 사랑하지만 불멸의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박정대 시인의 「그때까지 사랑이여, 내가 불멸이 아니어서 미안하다」은 불멸은 필연적으로 사랑 속에서 찾아야 하며, 그 사랑은 죽음을 넘어선 사랑이라는 점에서 불멸과 사랑과 죽음은 어떤 트라이앵글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영랑호에서 순애가, 탱큐!
2. 어떤 사랑이 불멸의 사랑이 되는가?
그렇다면 인간은 왜 그토록 불멸의 사랑을 원할까? 불멸의 사랑은 분명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을 주는 사랑일 것이다. 그것이 죽음을 넘어섰다면 그 불멸은 이승에서도 기쁨이리고 말할 수 있을까? 여기서 불멸의 첫 단추는 사랑은 고통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기쁨도 있게 마련이라는 어젠다가 도출된다. 그 기쁨의 출발은 상대에 대한 앎에서부터 시작한다. 그 앎은 대상에 머무르지 않고 사랑에 대한 본질적인 앎으로 넘어간다. 그 때만이 사랑은 고통을 넘어서 기쁨이 될 수 있다, 이때 내가 안다는 것을 당신 또한 알고 있다는 것이며, 당신이 알고 있다는 것을 나 또한 알고 있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두 사람이 사랑을 했는데 한 사람만 불멸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랑은 눈을 멀게 한다는 속담은 거짓말이다. 사랑은 오히려 눈을 크게 뜨게 하며 명석하게 만든다. 나는 당신에 대해 당신에 관해 절대적인앎을 갖고 있다.(롤랑 바르트)
롤랑 바르트는 사랑하면 할수록 당신에 대해 절대적인 앎을 갖게 된다고 보았다. 그 앎이란 대상에 대한 앎뿐만 아니라 사랑이 추구하는 그 궁극의 지점, 자신이 지금 하고자 하는 그 사랑이 무엇인지, 당신이란 사람이 누구인지, 그 모든 총체적인 앎을 의미한다. 당신의 가능성, 기쁨, 고통, 좌절, 욕망, 스트레스, 고독, 절망, 소망, 외면...
가우디움(gaudium)은 현재 어떤 것을 소유하고 있거나 장차 소유할 것이 확실시 될 때 영혼이 느끼는 즐거움이라면, 래티시아(laetitia)는 원하는 것을 소유할 수 없을지라도 인격적으로 명랑한 상태를 유지하여 즐거움을 조절하려는 것을 말한다.(라이프니치)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는 '가우디움'과 '래티시아'로 사랑의 기쁨을 분류한다. 사랑할 때 두 가지 기쁨을 체험하는 것인데, 상대를 온전히 소유한데서 얻는 기쁨(가우디움)과 상대에 대한 소유를 포기하면서 얻는 기쁨(래티시아)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소유를 포기한 후자의 기쁨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는 소설에서 베르테르처럼 자살에 이르고 죽음에 이르는 고통일 수도 있겠지만, 그 고통의 이름은 엄밀히 기쁨이 내재된 고통이라고 보는 시각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 어떤 것도 아닌 바로 사랑에서 비롯된 고통이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물질을 얻기 위한 실존의 고통이 아니라서 다른 고통과 구별되는 모든 고통을 떠받치는 형이상학적 고통이라고 본 것이다. 그렇기에 그것은 고통이자 기쁨인 것이다. 최승자 시인의 시에서 나오는 사랑과 빵이 나란히 병치되어 있을 때 빵을 집어들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린 이들에게 <빵과 장미를>과 같은 맥락의 처방전에 해당한다.
사랑이 기쁨이라면 그 사랑은 어떤 자유를 주는가? 비혼론자가 대세인 이 시대,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사랑, 벤야민과 아랴라시스의 사랑에서 사랑 앞에 놓여 있는 자유(선택)에 대해 생각해 볼수 있겠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순간 나의 자유를 온전히 타자에게 맡기는 것인가? 여전히 우리는 자유로운 존재인가? 하는 질문이다.
만약 내가 타자에 의해서 사랑을 받아야 한다면 나는 사랑받는 자로써 자유로이 선택되어야 한다. 알다시피 사랑과 관련된 통상적인 용법에 따라 사랑받는 자는 선택된 사람이라고 불린다...사실 사랑애 빠진 자가 원하는 것은 사랑받는 자가 자기를 절대적으로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르트르)
사르트르는 타자가 나를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다는 것에는 언제든지 그 사랑을 철회할 수도 있다는 것도 있음을 간파했다. 사랑과 자유 그 모두를 충족할 수 있는 것, 그는 보부아르와 제도적 결혼이 아니라 자유결혼을 선택하기에 이른다. 제도권의 결혼이 아니라 제도권을 벗어난 자유결혼만이 둘의 사랑을 가능하게 한다고 본 것이다. 사회적 카테고리로 사랑도 자유도 다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그들이 바라본 사랑의 속성에는 본질적으로 자유가 있다고 본 것이다. 사랑에는 헌신이 아니라 자유가 있다는 것. 그들에게 사랑과 자유 두 개를 선택하는 길은 자유결혼이라는 길밖에 없었다. 사르트르가 바라본 것은 사랑과 관련된 중요한 난점은 타자로 하여금 나를 특별한 사람으로 생각하도록 강제할 수 없다는 데 있었다. 사랑에 빠지자마자 우리는 자신뿐 아니라 타자도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배우게 된다고 본 것이다. 사랑에 빠진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 사랑을 지속하기 위해서 할 수 없이 두 사람의 자유를 인정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사랑하는 자는 연인의 결점에만 매달리는 것도 아니고 연인의 변덕이나 약점에만 매달리는 것도 아니다. 얼굴의 주름살과 기미, 낡아버린 옷이나 기우뚱거리는 걸음거리가 모든 아름다움보다 더 오래 사정없이 그를 사로잡는다...우리의 느낌은 사랑하는 연인의 그늘진 주름살과 ㅍ위를 잃어버린 몸짓, 눈에 안 띄는 육체의 결점으로 도피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감각은 은신처인양 안심하며 움츠린다. 그냥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은 바로 이곳에, 말하자면 결함 많고 흠 있는 곳에 사랑을 경애하는 자의 화살처럼 빠른 동요가 둥지를 튼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발터 벤야민)
우리가 타자와의 사랑만 아니라 자유에 대해서도 바라보게 만드는 그 시점, 사랑에 빠졌다고 말하게 하는 이 특별한 타자는 어떻게 우리에게 오는가? 사랑은 우리가 특정한 타자를 특정한 방식으로 느끼고, 그 타자가 우리를 특별한 방식으로 생각해 주기를 바라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타자를 어떻게 만났는가? 우리가 지닌 결여 때문에 그나 그녀를 사랑한다고 보기도 한다. 자기 자신에게서 결여를 느끼는 한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고 본 것이다. 결핍이 사랑의 출발점이라고 본 것이다.
이에 대해 보드리야르는 그 결핍이나 결여의 이름은 존재하지 않은 것을 존재하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상상임신과 비슷하다고 보았다.
“시뮬라크르란 결코 진실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진실이야말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사실을 숨긴다. 시뮬라크르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놓은 인공물을 지칭한다”
반면, 발터 벤야민은 이 특별한 사랑의 관계는 객관적일 수 없고 결여일 수도 없고 시뮬라크일 수는 더더욱 없고, 순전히 내적이고 주관적인 그러나 그 누구도 주체가 될 수 없는 아예 주체라는 말이 성립되지 않는 신비한, 순전히 불가항력적인 끌림일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마치 일방통행로처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본 것이다.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거나, 당신이거나 당신이 아니거나 그 무엇도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미 사랑에 빠졌다는 자체가 자유를 무화시켰다고 본 것이다. 타자를 사랑하는 그 순간 사랑의 제단에 고스란히 자유를 봉헌하는 행위라고 보았다. 그래서 사랑은 어떤 범주화도 가능하지 않으므로 철학이나 사유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은 하나인가, 둘인가? 하나가 되었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랑은 하나가 되는 것인가? 아님 영원히 둘인 것인가? 아니 하나가 되는 것이 사랑의 완성일까? 헤겔은 사랑은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보았다면 알랭 바디우는 사랑은 끝까지 둘의 사건이라고 보았다.
사랑을 이루는 첫 번째 계기는 내가 오직 나만을 위한 독립적인 인격이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내가 스스로를 결함을 지닌 불완전한 인간으로 느낀다는데 있다. 두 번째 계기는 내가 자신을 타자 안에서 발견하고 이 타자 안에서 인정을 얻는다는 것, 그리고 역으로 그 타자도 역시 내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인정을 얻는다는 데 있다(헤겔)
헤겔은 사랑의 첫 번째 조건으로 타자와 사랑에 빠졌다는 것은 나는 더이상 홀로는 완전해 질 수 없다는 고백이라고 보았다. 두 번째 조건으로 타자 역시 그 마음 안에 내가 깃들어 있다고 바라보게 된 동시적 사건으로 보았다. 여기서 헤겔은 쉽게, 당연히, 사랑에 빠졌다면 타자와 하나라는 변증법적 합일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헤겔은 사랑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가 된다는 것이 결코 만만치 않은 것임을 알게 된다. 하나라는 결합이 생물학적이고 사회적이고 정신분석학적으로 완전히 다른 두 사람에게서 낭만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음에 주목한 것이다. 그래서 부부사이에서 사랑은 아직 객관적이지 않다고 말한다. 결국 부부는 자녀를 통해 그 객관성을 갖게 된다고 보았다. 마침내 두 사람은 자녀안에서 두 사람의 사랑의 합일을 목격하게 되므로 그는 끝끝내 사랑은 ‘하나’라는 것을 고수했다. 사랑에 대한 이런 낙관적인 견해에 대해 수많은 학자들이 헤겔의 관념론이 세계를 변증법으로 통합하려다 사랑마저도 자유를 간과한 채 변증법으로 통합하려는 기계론적변증법에 갇혔다고 지적한다.
사랑은 그 자체가 비-관계, 탈-결합의 요소 속에 존재하는 이 역설적 둘의 결합이다. 사랑이란 그런 둘의 ‘접근’이다. 만남의 사건으로부터 기원하는 사랑은 무한한 또는 완성될 수 없는 경험의 피륙을 짠다(알랭 바디우)
벤야민의 제자인 바디우는 헤겔의 합일에 대한 관점을 ‘황홀한 하나’란 단지 다수를 제거함으로써 둘 너머에 설정 될 수 있을 뿐이며, 동일자를 타자의 제단에 올려놓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사랑은 둘이 있다는 후-사건적인 조건 안에 이루어지는 세계의 경험 또는 상황의 경험이라고 본 것이다. 차라리 비-관계, 탈-관계라고 보는 것이 실상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견해다. 사랑은 끝끝내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는 것. 하나를 주장하는 것에는 하나여야만 한다는 망상, 결혼 이데올로기에 갇힌 것이라는 지적이다. 바디우가 말하는 사랑은 두 사람이 만나 씨줄과 날줄처럼 피륙을 짜는 노동과 같으며, 그 피륙의 무늬는 같지 않고 색도 같지 않다. 바디우는 사랑예찬에서도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음에도 사랑이라는 원 안에서 두 사람이 편입되기를 바라는 것이 사랑이 지닌 자유의 혁명적 성격임을 강조한다. 따라서 사랑과 자유를 결혼과 가족으로 상징되는 기존의 결혼제도로 편입함으로써 사랑과 자유가 지닌 고유한 혁명성을 훼손하고 있다고 본 것이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주어졌다는 것은 종교적 지침이 아니라 사랑을 할 수 있는 생명의 지침이라는 주장이다.
서로 다른 타자가 사랑으로 하나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랑의 합일은 불가능한 소망인가?를 묻게된다. 이 질문은 인간은 언제 하느님 사랑으로 온전히 넘어갈 수 있나? 아니 하느님 사랑으로 넘어가지 않고도 합일에 이를 수 있을까? 아님 인간의 사랑을 경험하지 않고도 곧바로 보편적 사랑으로 수직 상승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과 닿아 있다. 그에 대한 답을 로이스부르크와 하데비치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13세기 비승비속(非僧非俗)이었던 신비가 하데비치의 영적 계보는 대략 다음과 같이 추정한다. 아우구스티누스-하데비치-로이스부르크-토마스 아 켐피스- 이냐시오...이런 영적인 계보로 이어진다. 하데비치는 귀족의 딸이었지만 교부신학을 공부하면서 하느님 사랑 그 가운데 ‘자유’에 대한 본질을 바라본 아웃사이더 신비가에 해당한다. 그녀는 자서전조차 남기지 않았다. 이름에서조차 자유로워지고 싶었던 것일까. 그럼에도 여러 책에서 인용되는 그녀의 영가를 종합해 본다면 그녀에게서 사랑의 합일은 ‘자유’에 대한 바라봄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합일이다.
가장 감미롭고도 취하게 만드는 최상의 포도주여...마시지 않고 또 결코 마시지 않을 것에 취해 버린 영혼이여!(로이스부르크) 이 세상의 모든 것들, 나를 사로잡기엔 너무나 작디작은 이 모든 것들/ 나는 이 모든 것들에 비해 너무나 위대합니다./하느님의 그 무한함 가운데 나는 창조되지 않은 것에 이릅니다./ 나는 그것에 다가가 만져봅니다./ 그것은 나를 이 세상의 어느 광대함보다다 더 광대하게 만들어버립니다./ 다른 모든 것은 나에게 그저 좁습니다. 당신은 이것을 잘 아십니다. 당신 또한 거기에 있습니다.(하데비치)
사랑의 광기여!/그 축복받은 운명이여!/만일 이를 알아차렸다면, /우리는 다른 어떤 것도 바라지 않을 겁니다./이것은 나누어진 서로 다름도 하나이게 합니다./진리란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사랑의 광기는 쓰디 쓴 것도 달콤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사랑의 광기는 낯선 이도 벗으로 만들어 버립니다./사랑의 광기는 작고 초라한 이도 높이 올려 자랑스럽게 만들어 버립니다.라고 말한다.
안트베르프의 하데비치(Hadewijch van Antwerpen)는 비승비속(非僧非俗)의 삶을 살았던 여인이다. 중세에서 수도자도 아니고, 수도자가 아닌 것도 아닌 그들을 베긴네(Begine)라 불렀다. 교회안팎 어디에도 보호받지 못했던 그들이 영적으로 최고의 기쁨을 누렸다는 데서 사랑의 합일에 대한 갈망은 인간과 신의 결합에 대한 갈망의 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의 영가에서 “그녀는 하느님과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데비치의 영가에서 드러난 합일은 제도권 교회가 아니라 지상의 나그네가 거주하는 물질적 우주와 천상교회를 동시에 살아내는 법을 발견했던 것에서 드러난다. 삶과 죽음이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는 보았고, 지상의 교회와 천상의 교회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그녀는 통찰했다. 교회가 확장되는 곳 어디서나 하느님과 인류는 사랑에 빠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녀에게서 사랑의 확장성이 곧 그분과의 합일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수많은 인류가 사랑하는 이와의 합일을 꿈꾸었지만 정작 그것이 가능하다고 체험하는 것은 그분의 사랑에 의해서만 이룰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누구나 ‘사랑에 빠졌다’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사랑하는 이와 합일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일반적인 상식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로이스부르트와 하데비치가 어떤 경로를 통해 그런 영적인 기쁨에 도달했는지 추론할 수 없지만, 로이스부르크의 저서나 하데비치의 영가에서 그들이 임마누엘의 하느님을 어떻게 하나로 체험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위의 사랑의 담론을 종합하면 불멸의 사랑은 결국 인간의 사랑을 통한 신의 사랑 속에서 하나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마리안나 수녀님께서, 고맙습니다!
3.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마태오 25,1-13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1 “하늘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2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3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4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5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6 그런데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7 그러자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저마다 등을 챙기는데, 8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 다오.’ 하고 청하였다. 9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 하고 대답하였다. 10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11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지만, 12 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13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라고 전하는 마태오 25,1-13에서 12절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를 중심으로 하늘나라는 우리에게 어떤 앎의 축복을 전하는지 성찰해 보기로 한다.
[1]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을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4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5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6 그런데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라고 전하는 열처녀의 비유(마태오 25,1-13)는 마태오 복음에만 있는 단독문형이다. 복음사가는 바로 앞장에서 Ⓑ<깨어있어라>(마태오24,36-44/마르코13,32-37/루카17)에서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올지 모르니 항상 준비하고 깨어있으라고 재림과 연결하여 전해준다. 11절의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는 것에서 깨어기다리는 그 실체를 분명히 밝힌다. 여기서 슬기로운 처녀와 어리석은 처녀로 나뉘는 결절점이 바로 <기름>이라는 것에 방점이 찍혀 있다. 기름이 무엇인지를 바라보기 위해 Ⓒ혼인잔치의 비유(마태오14,15-24 / 루카22장1-14)와 Ⓓ가장 큰 계명(마태오22, 34-40/마르12,28-34/루카10, 25-28)인 애주애인의 사랑과 Ⓔ <기름>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지혜라고 바라본 지혜서 6,12-16과 Ⓕ 지혜에 대한 갈망은 곧 하느님 뜻을 갈망하는 것이며 이는 자신의 영혼이 목마른 상태에 있다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전하는 시편 (63(62),2.3-4.5-6.7-8)과 Ⓖ <이렇게 하여 우리는 늘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라고 전하는 테살로니카 1서 4,13-18 13을 연결하여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를 <등과 기름>과 연결하여 바라보아야 할 듯하다.
마태오 복음사가의 초점은 신랑의 혼인잔치에 참례하려고 누구나 자마다의 <등>을 가지고 있었다고 전한다. 모두에게 등이 있었다는 것이다. 모두에게 등이 있었고 그들은 모두 신랑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에서 인간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본성으로 이 등을 바라볼 수 있겠다. 그런데 그 본성이 신랑이 오는 시간을 알기에는 무리였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시간을 인간이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하느님의 시간을 알 수는 없지만 하늘나라의 잔치에 참례할 수 없는 조건이 다름 아닌 <기름>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이 <기름>으로 상징되는 잔치의 준비물이 인간에게 불가능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준비한 사람이 반이나 있었다는 것에서 누구나 등이 있듯, 누구나 기름 역시 준비할 수 있었다는 것에서 묵상을 시작해야 할 거 같다. 그것을 혼인잔치에 참례하거나 참례하지 못한 이유, 미리 준비하지 않은 <기름>과 연결하여 바라보자면 이 <기름>은 삼위일체 하느님과의 중요한 소통고리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지혜롭다 지혜롭지 못하다고 나뉘는 결절점이, 바로 <기름>에 비유되는 것이 지혜의 말씀이라고 신앙의 선조들은 전한다. 그리고 그 지혜는 듣고자 하는 누구에게나 주 하느님께서는 주님의 목소리를 듣는 이들에게 지혜를 주신다고 전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잔칫상에 참례하기 위해 합당한 준비로, 지혜의 말씀으로 기다림에 지치지 말고, 주님께서 오실 때에 <혼인 잔치>에 함께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고 전한다.
복음사가는 “하늘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처녀에 비길 수 있다"라고 우리에게 주어진 지상의 날들은 저마다 자기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처녀와 같은 상황이라고 보고 있다. 여기서 하늘나라의 혼인잔치는 인류 모두가 초대된 보편적인 축복, 지복직관의 행복의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늘나라의 혼인잔치에 참례하기 위해 준비한 <등과 기름>은 행복의 필연적인 조건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것은 혼인잔치라는 그 목적이 <지복직관의 자연적 열망>이라는 것을 이미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성서해설서들은 <등>은 인류가 공통으로 갖고 있는 본성과 같은 것으로, 슬기로움과 어리석음으로 갈리는 <기름>은 성령, 지혜, 사랑, 믿음 등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에서 인류는 그분을 만나기 전까지는 졸거나 잠이 든 상태와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메시야를 만나기 전에 우리는 지복직관의 상태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등만 갖고 있는 밤의 상태 속에서, 그리고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다>에서 졸다가 잠이든 상태로 우리는 행복을 찾아 헤매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 그분을 알 수 없는 인류의 무명상태, 한밤중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거듭 강조한다. 그것을 복음사가는 기름을 준비했는지의 여부와 관련하여, 어리석음과 슬기로움으로 나누어 바라보고 있다. 여기서, 기름을 준비하여 하늘나라의 혼인잔치에 참례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가 중요하다는 것과 그 자유의지를 제대로 쓸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함을 동시에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등은 모든 인류가 공통으로 받은 본성 혹은 생명으로도 바라볼 수 있겠다. 그리고 기름은 그분을 알아볼 수 있는 은총, 혜안, 영안, 일치의 어떤 상태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의 생은 지복직관의 상태에 이르기 위해 그분과의 혼인잔치에 참례하는 것과 다르지 않는 기다림과 충만의 여정이다. 우리의 여정이 지복직관의 충만에 이르는 여정이 아니라면 왜 우리가 그토록 하늘나라의 잔치에 참례할 수 있는 <기름>을 준비하기 위해 한 평생 하느님의 지혜를 찾아야 하는가? 하느님은 우리가 행복하기를, 우리가 원하는 그 이상으로 원하신다. 당신 아들을 우리에게 주실만큼 그 이상으로 원하신다. 그래서 혼인잔치의 <기름>을 준비해야 하는 것은 필연이라고 할 수 있다. 혼인잔치는 말 그대로 충만한 기쁨, 영원한 잔치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모두다 등을 갖고 있었지만 한밤중에 오는 그분의 시간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은 그분을 알아보는 어떤 영적 지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지혜가 알려주는 앎만이 충만의 문을 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영적 무지는 그 자체로 불행 혹은 고통이라고 할 수 있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을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준비하고 있었다"에서 지혜는 우리의 자유의지 위에 내리는 은총임을 알 수 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우리의 선택을 강제하지 않는 것이 하느님의 사랑법이다. 하느님은 우리의 자유의지를 그만큼 존중하신다. 그렇기에 자유의지에 의한 지혜의 찾음은 혼인잔치에 참례하는 슬기로움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에서 이 앎(지혜, 슬기)은 무엇인가?
슬기(지혜)는 성령의 은사로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고 그것에 맛들일 수 있는 은혜”를 일컫는다. 지혜서는 <지혜를 찾는 이들은 그를 쉽게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지혜서 6,12-16)라고 전한다. 지혜를 찾으면 모든 근심이 사라진다고 전한다. 그렇다면 지혜는 곧 하느님의 뜻을 찾는 마음일 것이다. 하느님을 찾는 그 지혜의 사랑에서 그 <기름>을 준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키워드는 <찾는다>라는 행위동사일 것이다. 지고지선의 하느님의 지혜를 찾을 수 있는 것이 하늘나라의 잔치에 참여하는 은총이기 때문이다.
지혜는 바래지 않고 늘 빛이 나서 그를 사랑하는 이들은 쉽게 알아보고 그를 찾는 이들은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지혜는 자기를 갈망하는 이들에게 미리 다가가 자기를 알아보게 해 준다. 14 지혜를 찾으러 일찍 일어나는 이는 수고할 필요도 없이 자기 집 문간에 앉아 있는 지혜를 발견하게 된다. 지혜를 깊이 생각하는 것 자체가 완전한 예지다. 지혜를 얻으려고 깨어 있는 이는 곧바로 근심이 없어진다. 지혜는 자기에게 맞갖은 이들을 스스로 찾아 돌아다니고 그들이 다니는 길에서 상냥하게 모습을 드러내며 그들의 모든 생각 속에서 그들을 만나 준다.
그렇다면, 하늘나라의 혼인잔치에서 지혜는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지은 잠언(8, 22-36;9,1-6)에서는 <지혜와 창조>와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지혜는 바로 창조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려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혜라는 일곱기둥으로 하늘의 집을 지었다는 것은 창조의 시간 속에 있는 지복직관의 상태가 우리의 영원한 집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하늘나라의 찬치는 자신이 왜 창조되었는가를 알아보는 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주님께서는 그 옛날 모든 일을 하시기전에, 당신의 첫 적품으로 나(지혜)를 지으셨다. 나는 한 처음 세상이 시작되기전에 영원에서부터 모습이 갖추어져 있다. 내가 일곱 기둥으로 지혜가 머무는 집을 지었다.
지혜가 머무는 집이 창조때부터 우리를 위해 준비된 하늘나라의 잔치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지혜를 갈망해야 지혜를 찾고자 할 것이다. 지혜에 대한 갈망은 바로 자신의 영혼이 목마른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가능하다. 우리는 몸과 마음과 영혼을 지닌 존재로 이 순례의 여정을 하고 있는 길위의 노마드다.
시편저자는 이 몸은 당신을 애타게 기다리나이다, 라고 순례 여정에서 영혼을 지녔다는 것을 아는 것, 그때 내 영혼 안에서 창조의 사랑을 알 수 있음을 전한다. 시편저자는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나이다(시편 119:105)라며, 63(62),2.3-4.5-6.7-8에서는 주님, 저의 하느님, 제 영혼 당신을 목말라하나이다, 라고 전하는 것에서, 지혜와 창조의 관계를 알기 위해선 우리가 영혼을 가진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영혼으로만 바로 우리의 근원상태를 바라보는 지혜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주님, 저의 하느님, 제 영혼 당신을 목말라하나이다. 하느님, 당신은 저의 하느님. 저는 새벽부터 당신을 찾나이다. 제 영혼 당신을 목말라하나이다. 물기 없이 마르고 메마른 땅에서, 이 몸은 당신을 애타게 그리나이다. 당신의 권능과 영광을 보려고, 성소에서 당신을 바라보나이다. 당신 자애가 생명보다 낫기에, 제 입술이 당신을 찬미하나이다. 이렇듯 제 한평생 당신을 찬미하고, 당신 이름 부르며 두 손 높이 올리오리다. 제 영혼이 기름진 음식으로 배불러, 제 입술이 환호하며 당신을 찬양하나이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당신을 생각하고, 온밤 지새우며 당신을 묵상하나이다. 정녕 당신은 저를 도우셨으니, 당신 날개 그늘에서 환호하나이다.
우리는 자신의 몸과 마음의 상태는 감지하지만 자신의 영혼이 목말라 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지 못한다. 자신의 영혼이 목마른 상태라는 것을 알 때 우리는 하느님 말씀인 지혜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 그때 우리는 우리가 준비해야할 <기름>이 무엇인지 보다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때 기름을 준비하고 뒤늦게 문을 두드리는 다섯처녀에게,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고 한 이유를 좀 더 깊이 성찰할 수 있을 듯하다. 여기서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는 것은 몇 겹의 앎이 중첩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을 알 수 있도록 모든 인류에게 등을 주었지만, 기름을 준비하는 것은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의지의 선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간청했지만, 그는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11-12절)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13절)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라는 이 앎과 모름에 대해,
그렇다면 안다는 것이 혼인잔치에 참례하는 기름이라면. 지혜는 우리에게 결국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 길을 알려준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분이 나를 안다는 것은 그분이 걸어간 십자가의 사랑을 안다는 것으로 수렴될 수밖에 없다. 열처녀는 모두 저마다의 등을 들고 있었다는 것에서 인간은 누구나 자기 몫의 사랑을 어느 정도는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어떤 사랑인가가 하늘나라의 잔치에 참례하는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사랑은 예수님이 했던 바로 그 십자가의 사랑일 것이기 때문이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죽은 이들을 그분과 함께 데려가실 것입니다.>(테살로니카 1서 4,13-18 13)에서 이렇게 하여 우리는 늘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라고 전한다. 함께있는 것이 사랑이다. 따라서 하늘의 사랑은 곧 그분과 함께 있는 그 사랑을 강조한 것이다.
형제 여러분, 죽은 이들의 문제를 여러분도 알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14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죽은 이들을 그분과 함께 데려가실 것입니다. 15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근거로 이 말을 합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늘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18 그러니 이러한 말로 서로 격려하십시오.9
그런 맥락에서,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신랑과의 혼인잔치로 비유되는 그리스도와의 완전힌 일치의 상태에서 느끼는 충만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기름을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그리스도와의 일치의 기쁨을 아는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면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라고 닫힌 문 앞에서 문을 두드리는 이들은 그분의 사랑의 문을 열 수 없는 이 세상의 사랑, 혹은 사랑의 결핍을 의미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생은 이 순례의 여정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통해서 하느님과 나와의 사랑, 나와 이웃과의 사랑이라는 사랑의 크로스가 무엇인지 알게 해 주셨다. 저마다의 등이 있다는 것에서 사랑 역시 저마다의 사랑이 있다는 것으로 사랑을 모르는 인류도 사랑을 하지 않는 인류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랑은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모든 사랑이 하늘나라의 잔치에 참례할 수 있는 사랑은 아니라는 것이 복음사가의 초점일 것이다. 요한 복음 사가와 솔로몬은 이렇게 우리에게 그 사랑을 알려준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요1서 4:8) 사랑하지 않는 자는 죽음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습니다.(요1서 3:14)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셨다. 너희도 내 사랑안에 머물러라(요한 15, 9-10)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사랑의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요 14:15) 나를 사랑하는 이들을 나는 사랑해 주고, 나를 간절히 찾는 이들을 나는 만나 준다.(잠언 8:17)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교 교양』에서 다음과 같이 인간은 그가 알고 있는 것에서가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것에 의해서 평가되어야 한다고 전한다. 사랑만이 인간을 평가하는 기준이라고 본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랑이 모두 혼인잔치에 참례할 수 있는 그런 사랑은 아니라고 거듭 강조한다. 선한 사랑은 그를 선하게 만들고 악한 사랑은 그를 악하게 만든다고 본 것이다. 선한 사랑만이 하늘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랑이라는 전언이다.
사물들을 온전히게 보는 사람은 의롭고 거룩하게 사는 사람이다. 그는 또한 이치에 맞는 사랑을 품은 사람으로서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을 사랑하지 않고,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하지 않는 일 없고, 덜 사랑할 것을 더 사랑하지 않고, 더 사랑해야 할 것과 덜 사랑할 것을 동등하게 사랑하지 않고, 동등하게 사랑할 것을 덜 사랑하거나 더 사랑하는 일이 없다. 모든 죄인은 인간으로서는 사랑해서는 안되고 사람으로서는 하느님 때문에 사랑해야 하며 하느님은 당신 자신 때문에 사랑해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사랑과 사람의 사랑을 나눈다. 하느님을 당신 자신 때문에 사랑해야 한다면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다른 사람을 우리 육체보다 더 사랑해야 한다. 하느님 때문에 모두 사랑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을 우리처럼 하느님을 향유할 수 있지만 우리의 육체는 하느님을 향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육체는 영혼을 통해서 살고 우리가 하느님을 향유하는 것은 영혼을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영혼을 통해서 한 사랑만이 하늘나라의 혼인잔치에 참례하는 바로 그 사랑이라고 본 것이다.
요셉 라칭거 추기경(베네딕토 16세)은 『사도신경강해』에서 부활의 사랑만이 불멸의 사랑이고, 그 불멸의 사랑만이 하늘나라의 혼인잔치에 참례하는 사람들이 준비한 기름에 해당하는 사랑이라고 말한다.
“사랑은 무한을 갈구하고 불멸을 갈구한다. 사랑은 말하자면, 그 자체가 무한을 찾는 외침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 외침이 성취될 수 없고 사랑이 무한을 갈구하면서도 불 수 없음을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사랑은 영원을 요구하면서도 실은 사계에 잠겨 있고 사계의 고독 및 파괴력에 갖혀 있다. // 부활은 그 자체가 죽음에 대한 사랑의 우세이다. 아울러 사랑은 어떠한 것만이 불사불멸을 이룰 수 있는가를 가리켜 준다. 사랑의 가치를 생명의 가치 위에 두는 사람, 즉 사랑을 위해서는 삶을 사랑에 종속시킬 용의가 있는 사람의 경우에만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고 더 클 수 있다.”
인간의 원초적인 갈망은 사랑받기를 원하는 것이고 인간의 원초적인 공포는 사랑을 잃지 않을까하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사랑에 의존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불멸의 사랑을 원한다. 그런데 그 불멸의 사랑은 부활의 사랑이라는 점에서 십자가의 사랑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하느님과 나와의 사랑, 나와 이웃과의 사랑이 크로스된 그사랑 말이다.
우리가 영원한 사랑, 불멸의 사랑을 갈망하면서 실은 죽음의 세계에 잠겨 있고 고독 및 파괴력에 갇혀 있는 것은 우리가 하는 사랑이 십자가의 사랑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십자가를 만들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사랑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한쪽으로 치우친 사랑이란 결국 이웃과의 사랑인 인격교환적 사랑인 필리아적인 사랑이지, 하느님과의 사랑인 신적 은총적인 아가페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아가페의 사랑만이 그분을 알고 그분이 나를 아는 바로 그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너희들을 모른다는 것은, 너희들은 나의 사랑을 모른다>는 말이기에 그렇다.
[불멸의 사랑,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양인자)-연중32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를 중심으로]
우리는 모두 불멸의 사랑을 원한다. 아니 사랑 자체가 이미 불멸과 영원을 갈망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는 사랑이 불멸의 사랑이 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등>만 갖고 있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요한네스 로쯔가 <사랑의 세 단계>에서 말하는 에로스와 필리아에서 멈춘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분이 원하는 사랑은 아가페에 이른 사랑이고 그것이 하늘나라의 잔치에 참례할 수 있는 기름까지 준비한 사랑이라고 힐 수 있다. 그 기름까지 준비한 사랑은 애주애인의 크로스가 완성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기름까지 갖고 있는 사랑이 <네가 나를 아니, 나도 너를 안다>라고 그분이 말하는 그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그런 발화의 말이 음성적으로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사랑은 같은 사랑으로 모인다는 사랑합일의 법칙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요한네스 로쯔는 <사랑의 세 단계>에서 이 '사랑'을 삼각형으로 일체화한다. 하나의 사랑이 에로스(감각적 가시적 아름다움)--->필리아(정신-인격적 사랑) --> 아가페(신적-은총적)의 세 가지 양식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이 세 양식들은 다시 하나의 사랑 안으로 삼투한다. 이 상호-삼투를 통해서 사랑이 비로소 계발된 전체로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이 전체 속에서 오직 사랑이, 온전한 사랑 자체가 된다. 그 사랑이 그분이 <안다>라고 말하는 <기름>에 비유된 그 사랑이라고 전한다.
"한 사람이 이 삼각형 속에서 직관화되는 사랑의 충만 속에서 깊이 생활할수록 그는 사랑이 절대적 시여(absolutes Geben)이면서 동시에 절대적 수혜(absolutes Empfangen)이며, 절대적 제어이자 동시에 절대적 자유이며, 그리스도로부터 십자가형에 처해지는 절대적 곤궁이자 동시에 부활의 절대적 기쁨이라는 것을 더 확실하게 체험하게 될 것이다."
사랑의 세 단계 속에서만 비로소 인간은 지복직관의 상태인 충만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사랑의 세 단계란 매 단계가 다른 두 단계들을 배제하거나 또는 한 단계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다른 한 단계를 희생해야하는 그런 의미의 단계가 아니다. 이 단계들은 오히려 하나요, 동일한 사랑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다른 부분 국면들은 서서히 계발되고 서로 보완함으로써 성숙되며, 이 성숙의 정도에 따라 서로 더 내적으로 깊이 침투하며, 그럼으로써 인간을 전면적으로 사랑하는 자로 성숙하기에 이른다. 관건이 되는 것은 에로스에 대한 모든 부당한 편견을 없애고 꼭 필요한 생산적 힘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 중심 역할은 필리아가 수행한다. 필리아는 한편으로는 에로스를 정화하고 에로스의 온전한 인간적 면모를 보전시키며 인격적 사랑으로서의 아가페를 위한 길을 마련한다. 인간으로부터 상승하고 자체적으로는 구원을 필요로 하는 에로스와 필리아라는 이 두단계의 사랑과 하느님으로부터 은총으로 내려오는 아가페가 만나고 유대된다. 이 아가페는 다른 두 단계의 사랑에게 구원을 가져다줄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사랑의 새로운 공간을 열어준다. 그 사랑만이 우리에게 불멸의 사랑, 영원한 사랑이 무엇인지, <네가 나를 알듯, 나도 너를 안다. 네 사랑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하늘나라의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기름>끼지 준비한 그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글을 마치며,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1 “하늘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2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3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4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5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6 그런데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7 그러자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저마다 등을 챙기는데, 8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 다오.’ 하고 청하였다. 9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 하고 대답하였다. 10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11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지만, 12 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13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속초에서 순애가 탱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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