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사랑받는(하는) 사람은 항상 부활의 상태에 놓여있다(2)

나뭇잎숨결 2023. 10. 27. 03:46

 

설악산에서 사진작가 분이가, 탱큐!

 

사랑받는(하는) 사람은 항상 부활의 상태에 놓여있다(2)

-연중30주일,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너 자신처럼”

 

 

 

 

1. 가을 하늘이 높기로 정(情) 하늘을 따를쏘냐(한용운)

 

 

한용운의 「정천한해」(情天恨海)를 다시 읽어본다.

 

 

가을 하늘이 높다기로/ 정(情) 하늘을 따를쏘냐./봄 바다가 깊다기로/한(恨) 바다만 못 하리라.//높고 높은 정(情) 하늘이/싫은 것만 아니지만/손이 낮아서/오르지 못하고,/깊고 깊은 한(恨) 바다가/병될 것은 없지마는/다리가 짧아서/건너지 못한다.//손이 자라서 오를 수만 있으면/정(情) 하늘은 높을수록 아름답고/다리가 길어서 건널 수만 있으면/한(恨) 바다는 깊을수록 묘하니라.//만일 정(情) 하늘이 무너지고 한(恨) 바다가 마른다면/차라리 정천(情天)에 떨어지고 한해(恨海)에 빠지리라.//아아, 정(情) 하늘이 높은 줄만 알았더니/님의 이마보다는 낮다. //아아, 한(恨) 바다가 깊은 줄만 알았더니/님의 무릎보다도 얕다.//손이야 낮든지 다리야 짧든지/정(情) 하늘에 오르고 한(恨) 바다를 건느려면/님에게만 안기리라.

 

 

한용운의 「정천한해(情天恨海)」는 인간이 지닌 정(情)과 한(恨)이라는 유한한 사랑이 어떻게 '님'이라는 초월자 안에서 완성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구도(求道)의 시에 해당한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정(情)만 드는 것이 아니라 한(恨)도 쌓인다. 주고 싶은 것을 다 줄 수 없고, 받고 싶은 것을 다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정(情)이 높으면 한(恨)도 그만큼 깊어진다. 정(情)이 높은 만큼 한(恨)도 깊어진다고도 할 수 있다. 정(情)만 있으면 좋으련만 정(情) 곁에는 늘 한(恨)도 함께 따라다닌다.

 

정(情)과 한(恨)은 사랑의 두 얼굴이다. 대립의 개념이자, 그것이 원만하게 풀리지 못한 채 한쪽으로 치우쳐 극에 달하면 상극(相剋)이 된다. 정(情)과 한(恨) 사이에 놓여 있는 심연을 어떻게 건너는가에 따라 정한 (情恨)과 원한(怨恨)으로 갈라진다고 할 수 있다. 정(情)이 한(恨)을 끌어가지 못하면 한의 응어리가 자신도 모르는 원한(怨恨)이 되기도 한다. 정(情)과 한(恨)이 따로 나뉘지 않을 때, ‘님’이라는 절대자를 보게되고 정한(情恨)은 모든 이의 정한을 바라보는 상생(相生)의 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한용운 시는 정(情)과 한(恨)을 대립이나 상극의 개념이 아니라 인간의 성정에서 동시에 발생하는 인간사로 어떻게 정(情)과 한(恨), 그 심연을 건널 수 있는지를 모색한다.

 

1연에서 화자는 정한(情恨)의 정서는 가을하늘 보다 높고 봄바다 보다 깊음을 바라본다. 인간의 사랑, 그 정한(情恨)의 정서가 세상 그 어떤 사물보다도 높고, 깊다고 바라본 것이다.

 

2연에서 정(情)이 싫은 것도 아니고, 한(恨)이 병 될 리도 없지만 인간은 정(情) 의 하늘도 끝내 오르지 못하고, 한(恨)의 바다도 결국 건너지 못한다고 인간의 유한성을 바라본다. 정한(情恨) 앞에서 인간의 유한성은 그 모습을 드러낸다. 정한(情恨)은 인간으로 하여금 유한, 혹은 한계가 무엇인지 알게 한다고 할 수 있다.

 

3연에서 화자는 정(情)의 하늘은 높을수록 아름답고 한(恨)의 바다는 깊을수록 묘하다는 정한의 다른 얼굴을 보게된다, 일반적으로 정한(情恨)을 고통이나 상처로 바라보지만 화자는 오히려 정한(情恨)은 죽을만큼 힘들고 높고 깊을수록 아름답고 묘하다고 말한다. 그 고귀함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그 곳에 오를 수도 없고, 그 것을 건널 수도 없다. 그 이름을 알아도 다다를 수 없다는 두겹의 한계 앞에서,

 

4연에 이르러 화자는 ‘정(情) 하늘이 무너지고 한(恨) 바다가 마른다면. 즉 정한(情恨)이 너무 힘들고 사무쳐서, 정한(情恨)을 유발하는 사랑이 사라진다면 차라리 정천(情天)에 떨어지고 한해(恨海)에 빠지리라고 말한다.

 

정한(情恨)이 아무리 힘들지라도 정한이 없는 세계에 살 바에야 차라리 삶 자체를 반납하는 게 낫다고 한다. 화자는 정과 한을 존재의 이유로 긍정한다. 정(情)만 원하지도 한(恨)을 버리지도 않는다. 대부분의 초극은 현실이 변화되어서 그 상황을 넘어선다면 여기선 정한(情恨), 그 상황자체가 인간의 존재이유임을 바라본 것이다.

 

이 정도의 정의 극에 이르고 한의 극에 이르면 그 다음은 어떤 상태일끼? 현실에서 이 정도에 이르면 정한에서 손을 놓게 된다. 사랑 자체에 두 손을 들게 된다. 다시는 사랑하지 말자, 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된다.

 

여기서 한용운 시의 역설이 나타난다. 정한(情恨)에서 손을 놓게 된다는 것은 자포자기가 아니라 주의기도 할 때처럼 두 손을 하늘을 향해 들어올리는 것과 같다.

 

이 정한(情恨)은 화자로부터 시작하였으되 극한에 오른 정한(情恨)은 이제 정한 그 자체로 넘어간다. 정한(情恨)의 극은 혼자서는 능히 이루지 못하는 경지이기 때문이다. 사랑을 나눈 두 사람이 끝까지 정한(情恨)을 쥐고 있을 때, 모든 극極에 다다른 것들이 보여주듯, 다른 차원으로 넘어간다. 물이 얼게 되고 물이 끓게되는 임계점을 넘어서는 것과 같다.

 

5연과 6연에서 아아, 라는 탄식은 극極에 이른 정한(情恨)에서, 정(情)의 하늘이 ‘님’의 이마보다 낮고 한(恨)의 바다가 ‘님’의 무릎보다 얕다는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그토록 아름다운 정의 하늘이 님의 이마에 미치지 못하고, 그토록 묘한 한의 바다가 님의 무릎보다 낮다는 습명(襲明:돌연 갑자기 밝아짐)이 이루어진다.

 

님의 정한(情恨)은 얼마나 더 높고 깊기에...? 여기서 한용운 시의 역설의 미학, 그 ‘비틀림’이 시작된다. 대부분의 역설은 곧바로 인간사에서 초월자로 수직상승한다. 그러나 한용운의 시의 역설은 이 ‘비틀림’을 통해 ‘인간사-인간사- 초월자’라는 수평이동을 시도한다. 단순이 인간의 정한은 초월자에 의해서만 완성된다고 서둘러 변증법을 시도한다면 이 또한 억지스럽다. 다 줄 수도 없고 다 받을 수도 없는 저 심연 속에서, 정한(情恨)의 비틀림, 그 문이 열린다.

 

아아, 아아...라는 저 두 번의 탄식이 안고 있는 정한(情恨)의 크기를 염두해 둘 때, 인간의 정한(情恨)에서 어떻게 ‘님’이 개입되는지 바라보게 된다. 애뜻한 정이 크면 클수록 세상의 정이 무한한 것임을 바라보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천지에 모란이 떨어지듯’ 인간은 자신이 바라본 것만 이 세상에 가득한 것으로 바라보게 된다. 화자는 천지에 정한(情恨) 아닌 것이 없음을 보게 된다. 화자는 정(情)의 눈으로 정(情)을 바라보게 되고, 한(恨)이 깊어진 만큼 한(恨)의 바다가 건널 수 없는 바다임을 알게 된다. 세상의 어떤 생명도 정한(情恨)이 아닌 것이 없음을 보게 된다.

 

화자의 정한(情恨)이 극에 이르러 뭇 생명의 정한(情恨)으로 흘러가게 될 때, 화자의 눈물이 누군가의 눈물과 합쳐져 정의 손끝이 저 하늘에 닿을 듯 하고, 한의 다리가 저 바다를 건널 듯하다. 그때 화자의 정한(情恨)은 이 세상의 정한을 다 바라보지 못한 정한이요, 그로인해 화자는 자신의 정한이 ‘님’이라는 ‘세계’의 그 이마보다 낮고 님의 무릎보다 낮은 것임을 보게 된다.

 

정한의 극에서 모든 생명이 살아낸 그 길의 이름이 다름 아니라 정한(情恨) 이었음을 보게될 때, 정의 극에서 정을 보고, 한의 극에서 한을 보는 ‘습명’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상극(相剋)에서 생극(生剋)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5연과 6연의 비약은 한용운 시인 전 생에 걸친 구도의 깨달음이 과감하게 생략되어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님'은 수평적 세계의 타자라는 그 님이자, 수직적인 세계의 초월자라는 그 님이라 할 수 있다. 정(情)과 한(恨)의 정반합(正反合)을 통해 두 ‘님’에 도달하는 변증법을 통해 정한(情恨)은 모든 이들의 정한(情恨)을 바라보는 길이 된다.

 

그로인해, 7연에서 화자의 조건이 어떠하든, ‘님의 품에 안겨서’ 정(情)의 하늘에 닿고 한(恨)의 바다를 건너 정한(情恨)을 완성 하겠다고 한다. 그때, 화자의 정은 모든 정의 정이요, 모든 한의 한이 된다.

 

이렇듯, 「정천한해(情天恨海)」는 1연~4연이 정한의 인간사를 통해 5연~7연에 이르러 ‘님’이라는 초월자의 세계 속에서 정한(情恨)이 어떻게 완성되는지를 보여준다.

 

한용운은 인간사를 무가치한 것으로 바라본 후, 그 대척점에서 절대자인 ‘님’을 예찬하는 것이 아니라 情과 恨이라는 인간사를 통해 초월자인 ‘님’을 만나는 과정을 보여준다. 정한(情恨)의 극한에서 님(세계)을 만날 수 있다는 초월의 미학이라 할 수 있다.

 

 

 

 

 

사진작가 분이가 탱큐!

 

 

 

 

 

2. 사랑 때문에 우리는 사랑하지 못한다(알랭 핑겔크로트)

 

 

 

<초월의 미학>은 <타자의 윤리학>이라고 말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한다.

 

사랑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사랑을 하지 않는 사람도 없다. 그런데 그 사랑이 무엇을, 누구를,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에 따라 사랑은 자유의 이름이 아니라 두려움이라는 이름으로 사랑하는 당사자에게 되돌아오기도 한다. 오직 자신이 사랑이라고 규정한 사랑에 빠져 있기에 원한에서 정한으로 넘어서지 못하고, 즉 아가페로 넘어가는 사랑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의 작은 사랑 때문에 우리는 진정한 사랑을 하지 못한다는 명제를 도출하기도 한다.

 

임마누엘 레비나스의 연구자이자 제자인 알랭 핑겔크로트는 『사랑의 지혜』에서 사랑 때문에 사랑을 하지 못하는 막혀있는 사랑의 혈에 대해 <있음과 타자성>으로 짚어나간다.

 

핑겔크로트는 레비나스의 『존재에서 존재자로』에서 사랑은 우리가 밖으로 나가는 통로를 발견하는 것인데,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오히려 자기 안에 점점 더 깊이 갇혀 있는 것을 실존주의와는 다른 차원의 존재의 구속이며, 이것이 첫 번째 막혀있는 사랑의 혈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언제나 실존에 한 발이 잡혀 있다고 본 것이다. 다른 모든 것의 바깥에 머물고 있는 나는 스스로에 대해서 내재적이며 자신에게 연결되어 있다는 확인에 이어 자아가 스스로가 될 수 없는 불가능성에 직면해 자아 자신이 존재에 묶여 있다는 사실을 인식(혹른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고 본 것이다. 사랑의 공포는 존재의 공포라는 것이다. 

 

밤의 고요속에서 우리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존재이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실존의 정지가 아니라, 우리가 둘러싸여 있는 쉬지 않는것은 존재인 것이다. 근원적인 속박, 그것을 부과하는 것은 타자가 아니라 존재이다.

 

사랑을 갈망하면서도 사랑하지 못하는 두려움이란 바로 ‘나’라는 존재에 대한 공포에서 오는 두려움 때문이며, 자신의 부단한 현존은 각자가 “있음”에서 유래된 존재임을 마주하게 되는 존재의 보편성에 지불하는 대가라고 본 것이다. 끝까지 존재한다는 것은 “없음”이나 “허무”가 될 수 없다는 존재의 익명성 앞에서 느끼는 공포로, 죽어도 죽을 수 없는 “있음”에 초대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이 존재의 공포라고 말한다. 아무리 “있음”으로부터의 도피를 꾀하지만 이미 있었던 것은 없었던 것으로 나라는 존재를 지울 수 없다는 것이다.

 

타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바로 한 '있음'이 또 다른 '있음'을 존재로 인정하는 것으로 타자 역시 같은 존재의 두려움을 느끼고 있기에 그 타자의 두려움과 나의 두려움이 <얼굴>이라는 형상으로 서로에게 '출몰'한다는 것이다. 귀신이나 좀비에게 쓰는 느닷없는 '출몰'은 사랑하기도 전에 사랑을 과정을 이미 바라본 자의 두려움이라는 것이다. 

 

사랑의 감정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항상 당신으로부터 도망가는 사람으로부터, 막상 당신은 도망가지 못하는 것이다. 타자는 거기에 있어도 언제나 이웃인 채로 있고, 그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은 늘 불안하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관계에서 진실로 휴식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사랑 자체를 사랑하지 않는 한, 사랑을 할 때는 사랑받지 못할 것을 감수해야 한다.

 

성서에서 무거운 짐진 자들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는 생존의 무게는 바로 '있음'을 감당하는 나 자신에게 위임된 타자라고 본 것이다. 나라는 타자와 너라는 타자의 겹침, 따라서 타자는 나의 적수가 아니라 나에게 맡겨진 무거운 짐이다. 그런데 여기서 타자는 짐이면서 동시에 구원이 된다. 그것은 타자만이 나로부터 자아를 해방시켜 주기 때문이고, 나의 근거없는 자기만족과 자만심을 깨우쳐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사랑해서는 안 될 바람하지 않은 이유들과 그래도 역시 사랑할만한 가치가 있다는 확신이 대립되고 있다. 사랑에 있어 가치가 있는 것은 그것은 다름 아닌 약함의 시간이다. 타자의 현현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나는 주도권을 잃어야 한다.

 

사랑만이 <십자가의 무능>을 알 수 있는데, 우리가 사랑을 바치는 대상보다 우위에 서는 일은 결코 없기 때문이다. 섬기는 사람이 되라는 것은 타자를 위한 사랑을 하라는 것이며, 타자의 끝없는 도망을 저지할 수 없는 곳에서만 사랑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타자는 나에게서 도망치면서조차 나를 붙잡고 놓지 않는다. ‘있음’이라는 무언의 요구, 사랑의 채무를 끝까지 요구한다. 이는 너 자신을 잊으라는 몰아의 요구에 해당한다. 그래서 '사랑할 때는 사랑받지 못할 것을 각오해야 한다'는 명제가 도출된다.

 

사랑받는 사람은 항상 부활의 상태에 놓여있다. 나는 사랑하고 있는 상대방을 끊임없이 해석하지만, 그는 언제나 그 해석의 포위로부터 빠져나온다. 사랑받는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말해지고 있는 내용과 완전히 일치하는 법은 없다

 

그렇기에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축적된 모든 지식을 총동원해 타자의 얼굴을 해석한다는 것은 타자와 나의 고독의 물질성을 확인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합리적인 담론이 안고 있는 물질성에 대해 성서에서는 흔히 사탄이라는 용어를 쓰기도 한다. 육화되지 않은 사랑의 담론은 그 자체로 “있음”을 하나의 사물로 전환시키기 때문이라고 본 것이다. 타자를 하나의 존재로 바라볼 때, 그는 나에게서 드디어 부활한 것이며, 그때 그 부활의 매개체를 <이해>라고 핑겔 크로트는 말한다. 해석이 아니라 이해, 그것이 사랑의 지혜가 지닌 필요충분조건이라고 본 것이다.

 

타자라는 현실이 나에게 질문을 던져오고 동작을 멈추게 하고, 멀리 도망가게 하고, 꼼짝 못하게 하는 것은 낯선 이국성에서 타자가 해방되어 내게 다가오는 그 때이다. 그를 나와 동류라고 인정했을 때 나는 그의 채무자가 된다

 

핑겔크로트는 타자를 집단화 하여 바라볼 때, 선의 얼굴로 둔갑한 죄의 집단성, 악의 집단성- 역사적으로 수많은 민족과 민족의 싸움, 계급의 갈등- 은 모든 것이 타자성이 지닌 마지막 관문이라고 규정한다. 타자의 명령이 내게 다가오고, 그 존재의 무거움이 나를 누르기 위해서 그의 얼굴은 내 앞에 보일 때, 그가 지닌 자질과 집단은 구별되어야 하고, 그 고유의 속성을 초월하지 않으면 안 된다. 타자가 나와는 다름 속에 갇혀 있는 한 그 사람의 기도, 호소, 요청에서 나는 빠져 나갈 수 있다. 결국 나는 그의 타자성을 피할 수 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사랑의 관념이 <사랑 때문에 우리는 사랑하지 못한다>라고 전하는 알랭 핑겔크로트는 『사랑의 지혜』에서 ‘있음’에서 ‘타자성’의 거리를 지우는 것이 사랑의 지혜라고 말한다. 타자와의 가까움 안에서 한 사람의 타자로 인해 모든 타자는 고유의 이름을 갖게 되며, 그때 "있음"이라는 존재-있음을 두렵지만 받아들이게 된다고 바라본 것이다. 그래서 그는 존재의 질서에 개입하지 않은 아가페가 있을까?를 질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오 22,34-40

 

 

 

그때에 34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의 말문을 막아 버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바리사이들이 한데 모였다. 35 그들 가운데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다. 36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37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8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39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40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Mt 22:34-40 When the Pharisees heard that Jesus had silenced the Sadducees, they gathered together, and one of them, a scholar of the law tested him by asking, "Teacher, which commandment in the law is the greatest?" He said to him, "You shall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mind. This is the greatest and the first commandment. The second is like it: You shall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The whole law and the prophets depend on these two commandments.")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라고, 당위명제로 제시되어 있는 사랑의 이중 계명은 공관복음에 동시에 실려 있는(마르코12,28-34/루카10,25-28/마태오 22,34-40) 하느님을 믿는 이들의 존재증명서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당연히  어렵고,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묵상하고, 온 힘을 다해 성찰해야 하는 복음이라고 할 수 있다.

 

[1]‘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7절)

 

"You shall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마음(heart), with all your 목숨(soul), and with all your 정신(mind).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는 것은 결국 우리의 존재 조건인 <몸과 마음과 영혼>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라는 것으로 수렴된다. 이는 우리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몸과 마음과 영혼>이 실은 그분에게서 연유되었기에 그분을 당연히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은 이미 도출된 것이나 다름없다. 여기서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나 자신의 근원을 알다> 라는 말과 동일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몸과 마음과 영혼>이라는 각기 다른 존재 조건이 그분을 사랑한다는 것은 <몸과 마음과 영혼>이 하나로 통일된 상태를 의미한다고 할  때 그  '하나oneness'가 무엇인가를 성찰해야 할 듯하다.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나누어 바라보게 한 것은, 하느님을 사랑해야지만 나를 사랑할 수 있고, 나를 사랑해야지만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는 연쇄적인 고리로 이 사랑이 엮이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눈에 보이는 나와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떻게, 제대로 사랑하느냐의 여부와 상관없이 무엇을 사랑해야 하는지 우리는 어렴프시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것은 <하느님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라는 것>이라고 한다면, 결국 그것은 나와 이웃을 제대로 사랑하는 것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결국 나를 어떻게 사랑하는가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자, 동시에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함유한다.

 

그런 맥락에서 사랑의 이중계명인 애주애인, 그 어떤 사랑도 결국 내가 세상과 맺고 있는 관계론임을 알 수 있다. 그 관계론은 사랑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을 이해 것이라고 할 때,

 

그렇다면 <몸과 마음과 영혼>을 지닌 존재인 내가 근원적으로 하느님과 관계되어 있다면 나는 그분이 창조한 이 세계와도 필연적으로 연결된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존재의 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무엇이 존재의 근원에서 나를-나에게서 갈라놓은 것인가?

 

그렇다면, 나를 제대로 사랑하는 것은 무엇인가? 의 성찰은 나와 세계는 어떤 관계를 지닌 것인가의 물음을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몸과마음과영혼>을 지닌 개별자인 내가 세계와 어떤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가는 나를 알고, 나를 사랑하는 데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개별자인 나를 세계와 연결시키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기도 하다. 이 능력은 내가 세계와 단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뿐 아니라 다시 나에게로 귀환한다는 점에서 나의 존재상태를 아는 순환로라고 할 수 있다. 나를 아는 것, 이것이 모든 사랑의 시작이자  '하나oneness' 가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키워드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칼 라너는 『익명의 그리스도인』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통찰을 받아들여

 

“나(인간)는 개방적으로 세계를 지향하면서 세계 안에서 소멸되지 않고 자기에게로 귀환하는 존재다. 나는 자의식 속에서 자기 자신을 조명할 수 있고, 그 자의식 속에서 다른 개별 존재자들과 세계를 인식할 수 있으며, 이 의식의 빛 안에서 세계가 자기 자신의 세계가 된다는 것을 바라보게  된다.”

 

여기서 나는 세계와 관계를 맺으면서 나에게로 돌아가는 이 능력은 감성에 대한 지성의 결정적인 탁월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나'를 사유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의 자아는 경험적 대상의 실재가 아니며, 대상적 양식으로 파악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자아는 인간의 의식적 자아 실현 속에서 지속적으로 자신을 세계에 드러낸다. 인간은 어떤 행위를 실현하는 체험으로부터 자기의 존재를 확인하며, 이 존재확인은 자아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기에 인간은 그 어떤 순간도 세계를 향한 행위를 하지 않는 순간이란 없다고 할 수 있다.

 

설사,  그가 은둔자라 할지라도 은둔자라는 사실로 세계와 관계를 맺는다. 이렇게 인간은 필연적으로, 예외없이 세계를 지향하며, 다른 사물들, 인간들, 이 우주와 교제하는 가운데(교제를 거절하는 가운데) 자신을 확인하고 드러낸다. 이렇듯, 인간의 자기실현은 그의 세계 지향과 다른 실재와의 관계 속에서 내밀하게 연계되어 있다. 그 관계 속에서 인간은 그 관계로 인해 <나는 정말 행복한가>를 끊임없이 성찰하거나 모색하게 된다. 그 성찰과 모색 속에서 인간은 자신이 빛과 어둠 가운데 ‘사이 존재’라는 사실을 바라보게 된다. 합리적이고, 때론 용의주도하게 행복을 추구하지만 늘 결핍에 시달린다는 사실이 그것을 반증한다. 어떤 행복한 상태에서도 인간은 만족을 모른다. 이 '사이 존재'인 인간은 그의 행위와 소유와는 상관없이 각기 다른 양태의 배고픔과 목마름에 헤멘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빛과 어둠을 동시에 사는 ‘사이 존재’라는 것은 인간이 필연적으로 지닌 <심연>때문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그 끝을 헤아릴 수 없는 '심연'으로 즉 깊은 바다보다 헤아릴 수 없으며, 다른 모든 사람들이 접할 수 없고, 오로지 하느님의 시선에 의해서만 간파될 수 있는 '심연'이다.”

 

파스칼은 『팡세』에서 그 심연을 건널 수 있는 길은 자신이 누구인지 사유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인간은 최대의 것과 최소의 것 사이에 매어져 있는 사이 존재다. 원자와 비교하면 거인이요, 엄청난 우주의 광활함에 견주면 갈대이되, 생각하며 자신의 약함을 아는 갈대이다“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인간이 목표가 아닌 것이 그나마 이 세상의 불행을 절감하게 했다는 논리를 펴기까지 한다. 

 

“인간은 짐승과 초인 사이에 매어진 하나의 밧줄이다. 하나의 심연위에 걸쳐진 밧줄이다 위험천만한 돌아봄이며, 위험천만한 도상에 있는 것이며, 위험천만한 전율이며, 정지함이다. 인간에게서 위대한 것은 그가 다리일 뿐 목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인간에게서 사랑받을 수 있는 것은 그가 과도이며, 과정이며, 쇠퇴라는 점이다”

 

여기서 나라는 인간은 세계와 관계를 맺으며, 필연적으로 자신이 자신을 완벽하게 행복하게 만들 수 없는 <사이 존재>라는 사실을 직면하게 된다. 나 자신조차 제대로 사랑하기에 벅차다는 것이다. 그것을 고백하는 것이 신자이며 그것을 고백하지 못하는 것이 무신론자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나를 완벽하게 행복하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사실 축복의 문으로 들어가는 길로 접어든 것이나 다름없다.

 

나는, 우리는 여기서 이런 고백을 하게 된다. 나는 진정 행복하고 싶다. 나는 나를 행복하게만들 수 없다. 이 세계도 나를 행복하게 만들 수 없다. 그렇다면 행복은 신기루인가? 이 성찰과 성찰의 끝에서 나는 나의 근원에서만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그것이 빛의 체험이다. 그렇다면 나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문은 또 어디인가?

 

글의 도입부로 돌아가, 우리는 여기서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몸과마음과영혼>을 지닌 존재인 내가 가장 완전한 행복을 갈망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른다. 아버지가 자녀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당신 자녀들의 완전한 행복일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희생제물을 원하지 않으신다. 정진석 추기경님이 남긴 유언처럼 "행복하십시오. 하느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행복입니다!" 일 것이다. 아버지 앞에서 가장 행복한 길을 사는 것이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게 사신 분이 누구신가? 바로 예수님이시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10, 30)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요한6,28-29)

 

 

내가 나와 완전히 하나가 되었을 때, 나는 나를 사랑하게 된다. 이때, 나는 아버지와 하나다, 라는 예수님의 고백이 얼마나 큰 행복 선언인지 알 수 있을 듯하다. 이 선언은 공관복음에서 말하는 산상설교-진복팔단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사랑하는 것은 곧 아버지의 뜻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순애데레사가, 탱큐!

 

 

 

 

 

[2]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39절)

 

 

 

 

그렇다면 이웃사랑은 아버지 하느님과 하나되는 것과 어떻게 연결 되는가?

 

내가 나 자신으로 인해 완전히 행복하다면 나는 타자의 행복을 당연히 바라게 되고 타자의 행복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한, 돕고 나누게 된다.

 

이웃사랑의 전제를 공관복음은 “너 자신처럼” 이라고 명시하고, 요한 복음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이라고 제언한다. 언뜻 달라 보이는 이 사랑의 전제는 우리에게 십자가를 통한 부활체험으로 인도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39)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5, 12)

 

<너 자신처럼 =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이 같을 말임을 바라볼 수 있을 때, 여기서 우리는 다시 나를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다른 방향에서 되묻게 된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이 곧 내가 나를 사랑하는 기준점이라면 그렇다면 그분은 나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나는 지금까지 창조주 하느님으로부터 어떤 사랑을 받았는가?를 바라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하라는 것은 사랑받았음을 먼저 보라, 라는 것임을 이미 전제하고 있는 말이기에 그렇다. 사랑할 수 있는 힘을 되찾는다는 것은, 사랑받았음을 되짚어 보는 것이기도 하다.

 

그 사랑의 이름앞에 어떤 이름이 놓여 있는가? 그분의 공생활,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최정점은 그분이 우리에게 남겨준 <평화>와 <파견>에 있을 것이다. <사랑>과 <파견>은 <평화>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20,21)

 

평화가 없다면 사실 사랑은 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사랑이 먼저가 아니고 평화가 먼저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평화가 넘치면 사랑을 하지 않을래야 하지 않을 수 없고, 자신이 파견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 수가 없다. 또한 그 평화는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거친 부활의 선물이다. 

 

어떤 영성가들은 그대가 진정 사랑하기를 원한다면, 그대 사랑의 현주소를 묻지 말고 그대 이름은 평화로운가? 를 먼저 물으라고 제언한다. 그대는 사랑하는가? 를 묻지 말고 그대는 평화로운가? 를 물으라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사랑이 있기를! 이라고 하지 않으시고,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맥락의 축복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그대가 배운 것이 그대에게 자유를 주는 진리인지 알아볼 수 있는, 하느님만큼 확실한 한 가지 검증이 있다. 그대가 삶과 죽음에 대해 아무런 두려움이 없다면, 과거와 미래에서 완전히 자유로워 졌다면, 그리고 모든 이들이 그대를 만나거나, 그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대와 함께 있고 싶고, 어떤 근원적 두려움이 그들에게 몰려올 때 그대를 애타게 부른다면, 그로인해 그대의 존재가 하느님의 현존을 증명한다면, 그대가 하느님만으로도 완전한 평화를 누릴 수 있다면, 그대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주신 평화를 배웠다고 확신해도 좋다. 그 모두를 충족하지 않는다면, 그대의 마음에는 그대와 그대 주위 사람들을 다치게 하고 방해하는 어두움이 있음이 분명하다. 완벽한 평화에 있지 않다는 것은 완벽한 빛 속에 있지 않다는 말이다. 그것은 다만 그대가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에게 뜻하시는 것을 그대는 뜻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대의 뜻과 하느님의 뜻이 다를 때 평화는 없다고 할 수 있다.”

 

이 전언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분의 뜻이 곧 평화이며, 자유이고, 그것이 사랑을 할 수 있는 근원적인 에너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이제 누군가를 사랑할 힘이 없다는 것은 나는 지금 평화롭지 않다는 말과 같다는 것이다. 그것은 나는 그분의 뜻을 모른다는 말이기도 하다. 만약 그렇기에 사랑할 힘이 없다는 것은, 나는 진정 나를 평화롭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그분께서 나온 진리를 모른다고 고백을 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나를 가르친 것은 결코 나를 평화로 이끌지 못했다는 고백! 그렇기에 평화롭지 못하다는 고백은 내가 사랑하기 힘들어하는 그 막힌 혈의 이름을 고백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분은 누구인가? L.J 수에넨스는 『성령은 나의 희망』에서 시편 62, 4-6을 인용하여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희망할 것을 희망하고, 사랑할 것을 사랑하게 이끈다. 성령은 예수님을 위격으로, 말씀으로 계시하신다. 그 계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이 어떻게 아들 예수의 안에서 사랑으로 현존하며 우리 안에서 언제나 살아 계신지 계시하신다. 그 사랑 안에서만 타인에 대한 두려움 없는 개방이 가능하며 우리의 마음 속 깊은 데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만날 수 있다. 그때 우리는 영원한 생명, 무한한 평화를 느낀다.”

 

이는 우리에게 묻는다. 그분의 뜻은 어디에 있는가? 왜 우리는 직접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는가? 그것은 우리에게 아직도 평화를 온전히 누릴 수 없는, 태워버려야 할 것이 남아 있다는 말이 아닌가. 아버지가 당신 자녀들을 당신 아들을 내어줄 정도로 사랑하시면서, 굳이 당신의 음성을 차별화하여 전하실 리가 있는가? 그렇기에 하느님을 전인격으로 사랑하라는 것은 그분의 음성(뜻)을 듣고, 그분의 뜻이 나의 유일한 뜻이 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돌아간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37)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39)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5, 12)

 

 

그런 맥락에서 우리는 애주애인의 전제가 평화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 준 부활의 선물이라는 것에서 우리 스스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님도 알 수 있다. 평화는 성령의 인도로 우리가 사랑을 할 수 있는 에너지로 주어진 선물이기 때문이다. 평화가 사랑의 대전제라는 것에서 사랑은 행위 이전에 우리의 어떤 존재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애주애인은 행위 이전에 자신의 존재상태인 원래의 근원을 바라볼 수 있는 축복이라는 것도 알 수 있다. 따라서 빛과 어둠 사이의 심연을 사는 사이존재인 우리가 완전한 자기자신에로의 귀환이란, 바로 평화의 에너지에서 나온 힘으로 애주애인을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랑받는(하는) 사람은 항상 부활의 상태에 놓여 있다]

 

사랑을 포기한 사람도 없고 사랑을 하지 않는 사람도 없다. 또한 사랑받지 않고 사랑하는 사랑도 없다. 그런데 그 사랑이 부활의 체험 속에서 나온 사랑인지 이 세상이 가르쳐준 사랑인지에 따라 애주애인은 그 방향이 확연히 달라진다고 할 수 있다. 부활의 사랑을 바라본다는 것은 자신이 어떤 사랑을 받았는지를 안다는 것이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은 실은 하느님께 사랑받은 것을 바라보고, 이웃으로부터 사랑받은 것을 바라보라는 말과 같다. 사랑은 분명 행위동사다. 그런데 그 행위동사가 가능하기 위해서 우리의 상태가 부활의 선물인 평화의 상태여야 한다는 것을 마태오 22,34-40은 전하고 있다. 

 

그래서 요즘은 이런 기도를 바친다.

 

평화의 주님! 제가 완벽하게 평화롭지도 못하고, 완벽하게 평화를 전하지도 못하는 것을 보면 분명 저는 저 자신을 잘못 가르친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당신이 주신 평화로 진정 평화로웠다면 사랑에 이렇게 서툴 리는 없을 것입니다. 하오니, 제게 당신의 평화를 알려주소서! 제가 설사 평화가 아닌 다른 것을 구하더라도 실은 당신께서 알려주신 평화를 구하는 것입니다. 제가 구하는 그 어떤 것을 갖더라도 평화가 없다면 저는 또다시 길을 잃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당신께서 부활하신 후, 첫 일성으로 제자들에게 선물로 주신 그 평화만을 원합니다. 아멘!

 

 

 

글을 마치며,

 

그때에 34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의 말문을 막아 버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바리사이들이 한데 모였다. 35 그들 가운데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다. 36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37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8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39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40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