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 나리공원에서, 사진작가 분이가, 탱큐!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고, 열정은 저승처럼 억센 것!(아가8,6)
-연중29주 전교주일,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를 중심으로
1. 한용운, 「이별은 미의 창조」 & 「군말」
이별은 미의 창조입니다/ 이별의 미는 아침의 바탕(質)없는 황금과 밤의 올(絲)없는 검은 비단과 죽음 없는 영원의 생명과 시들지 않는 하늘의 푸른 꽃에도 없습니다./ 님이여 이별이 아니면 나는 눈물에서 죽었다가 웃음에서 다시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오오 이별이여./ 미는 이별의 창조입니다 (「이별은 미의 창조」)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이 석가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의 님이 봄비라면 마찌니의 님은 이태리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니라(한용운, 「군말」중에서)
한용운의 「이별은 미의 창조」를 10월의 시로 추천하고 싶다. 10월만큼 이별의 능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릴 수 있는 계절은 없을 듯하다. 이별의 능력은 만남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한용운 시에서 이별과 만남은 꼭 사람과의 관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없다. 한용운 시에서 님은 언제나 다의적으로(절대자, 조국, 독자, 가치체계 등등) 해석되듯, 기룬 것은 다 님입니다, 라고 그는 말한다. 따라서 님은 인간이 추구했던, 추구하는, 추구할 어떤 가치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세상의 가치와 이별하지 않고는 이 세상의 가치를 재배치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맥락에서 한용운의 「이별은 미의 창조」는 칸트의 <미적무관심성>과 연결하여 바라보기도 한다.
「이별은 미의 창조」 는 한용운 시의 기법인 역설을 뒤집어 역설로 돌아간다. 이별의 미는 ‘아침의 바탕(質)없는 황금과/ 밤의 올(絲)없는 검은 비단과/죽음 없는 영원의 생명과 /시들지 않는 하늘의 푸른 꽃에도’ 없습니다,에서 네 번 역설을 부정한다. 어떤 지고의 천상의 가치나 진리조차도 인간의 이별을 극복할 수 없다는 형이상학의 부정이 나온다. 그렇게 부정된 역설은 이별이 아니라면 나는 눈물에서 죽었다가 웃음에서 다시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라고 눈물-->웃음이라는 구체적 상황에서 다시 역설이 이루어진다.
이는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의 가치서열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경계를 논할 수 없다는, 한용운 시인의 말하고자 하는 <미(美)>의 본질을 바라보는 키워드가 된다. 역설은 대부분 반어 혹은 방어와 마찬가지로 어떤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수사에 해당한다.
‘이별은 미(美)의 창조입니다’---> ‘미(美)는 이별의 창조입니다’ 로 이별의 뫼비우스띠를 형성하는 한용운 시에서 말하고자 하는 <미(美)>는 칸트가 말하는 <미적무관심성>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지고의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선 수없이 많은 가치들과 이별해야 한다. 더 이상 가치를 추구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러 무엇이 가치인지 정말 몰랐다는 사실을 바라보게 될 때까지 말이다. 그동안 가치있다고 여겼던 것이 실은 내가 원하는 것이었다는 것을 바라보게 될 때까지. 그제야, 무엇이 가치있는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진정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묻게되는 그 상태가, 바로 칸트가 말한 <미적무관심성>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별은 미(美)의 창조입니다’---> ‘미(美)는 이별의 창조입니다’ 에서 한용운 시의 이별과 미는 어떻게 뫼비우스(mobius)의 띠를 만들 수 있었을까? 그것은 이별의 극복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이별 그 자체의 상태에 침잠하여, 눈물에서 죽었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상태에서 만나게 되는 어떤 진실을 의미한다. 그런 극한까지 이른 이별의 상황에서만 모든 진실을 대낮처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너울에 가려져있던 진실을 이별은 낱낱이 알려준다. 그렇듯, 모든 것은 그 자체 속에 <미(美)>의 본질을 지니고 있다고 바라볼 때, 한용운 시인의 「이별은 미의 창조」 & 「군말」은 한용운 시인의 시학이라고 할 수 있겠다.
참고: 질 (質) ① 사물의 근본을 이루는 성질.┈┈• 양보다 ∼이 우선이다. ② 사람의 됨됨이를 이루는 바탕.┈┈• ∼이 나쁜 사람. 사 (絲) 【수사】【관형사】십진급수(十進級數)의 단위. ‘모(毛)’의 아래, 1의 1만분의 1. 곧, 10⁻⁴.
멋있는 사람, 사진작가 분이가, 탱큐!
2. 예술의 기호들만이 비물질적이다(질 들뢰즈, 『프루스트외 기호들』)
물신 혹은 물질주의가 거의 우상숭배되다시피하는 세상에서 비물질을 추구하는 것은 그 자체로 또한 미적무관성에 해당한다.
질 들뢰즈는 『프루스트외 기호들』 에서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무의식적인 기억의 나열이 아니라 인간에게는 누구나 기억의 원형이 있고, 그 기억의 원형은 바로 근원적 사랑의 그리움이라고 말한다. 과거의 시간 속에서 우연히 마주친 기호들이 그리는 추억의 궤적들이 어떻게 필연적으로 ‘오늘’ 속에서 다시 펼쳐지고 있는지 다음과 같이 바라본다. 어떤 추억의 순간들을 함께 했던 당사자들이 사라진 곳에서 만개하는 기억의 아름다움이란 실은 본질적인 아름다움을 그리워하는 것이라고 바라본 것이다.
[끌어당김의 법칙, 마주침의 우연성과 펼쳐짐의 필연성]에서 재인용하여,
①나무들이 내뿜는 기호에 민감한 사람만이 목수가 된다. 병의 기호에 민감한 사람만이 의사가 된다. 목수나 의사 같은 이런 천직은 늘 어떤 기호에 대한 숙명이다.
무엇을 배운다는 것은 기호들과 관계가 있는데, 과거를 상기시키는 기호들은 즉 우리가 과거의 어떤 시간들을 그리워하고 무엇을 찾는다는 것은 기억을 통해서지만 그 기억은 동시에 과거를 넘어서는 기재가 된다, 따라서 '찾기'는 과거의 추억이 아니라 미래를 향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어떤 기호가 방출하는 시간의 스펙트럼 속에서 시간의 통일성과 다원성을 끄집어낸다고 보고 있다.
②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어떤 사람을 그 사람이 지니고 있거나 방출하는 기호들을 통해서 개별화시키는 것이다.
들뢰즈가 바라본 사랑은 무언의 해석에서 태어나고 또 그것으로 인간은 양육된다고 보고 있다. 사랑받는 사람은 하나의 기호, 단 하나의 영혼으로 우리 앞에 예고없이 나타난다. 출몰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그 존재는 우리가 모르는 어떤 가능 세계를 표현한다. 해독하고, 해석해야할 세계는 사랑받는 사람 속에 있고, 동시에 감싸져 있어서, 우리가 모르는 세계를 기적처럼 펼쳐보인다.
③기호는 진실을 은폐하고 있다. 진실을 찾는 것은 해석하고 해독하고 설명하는 것이다. 진실을 찾는 것은 항상 시간에 관계하며 진실은 항상 시간의 진실이다.
진리는 어떤 사물과의 마주침에 의존하는 데 이 마주침은 우리에게 사유하도록 강요하고 참된 것을 찾도록 강요한다. 사유된 것의 필연성은 마주침의 우연성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그 시간은 <잃어버리는 시간-잃어버린 시간- 되찾는 시간- 되찾은 시간> 등의 시간의 동선을 그린다. 우리 안에 근원적인 머무름의 정체를 감추면서 드러낸다.
④우리는 기호가 의미하는 것을 기호가 지칭하는 존재나 대상과 혼동한다. 우리는 가장 아름다운 마주침들을 그냥 지나쳐버린다. 우리는 그 마주침들이 우리에게 내리는 명령을 피해버린다(55)
기호의 해석이 어려운 것은 절반쯤은 대상 속에 싸여 있고, 절반은 우리 자신 속에 걸쳐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늘의 섭리라는 이름으로 준 가장 아름다운 마주침들도 그냥 지나쳐 버리기 일쑤다. 기호가 내뿜는 찬란함, 아름다움, 즐거움을 사유 혹은 관조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마무침의 의미에 머무를 수 없기 때문이다.
⑤왜 예술의 기호는 다른 모든 기호들보다 우월한가? 그것은 다른 기호들은 모두 물질적이기 때문이다. 우선 그 방출 양태 때문에 이 기호들은 물질적이다. 예술의 기호들만이 비물질적이다.
예술의 기호 외에 다른 기호들은 대부분 물질적인 것으로 환원되는 이유는 기호들이 방출되어 나온 원천 때문이다. 또한 그 기호들이 절반쯤 대상 안에 싸여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들만의 고유한 전개양식으로 펼쳐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삶 속에서 마주치는 기호들은 대부분 물질적인 기호처럼 보인다. 바로 여기서 삶에 대한 예술의 우월성, 종교의 초월성이 나온다.
예술은 존재하는 것들의 본질적인 차이를 구성하고 그 존재의 고유한 차이를 이해하고 개별적인 이름으로 불러준다. 대상의 존재이유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바로 '차이'이다. 존재의 '차이'에 싸여 있는 본질의 세계는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세계의 시작에 해당한다.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다. 박경리의 <토지>는 이전에도 없고 이후에도 없다. <베드로대성당> 건축물은 이전에도 없고 이후에도 없다. 하느님이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에게 창조물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붙여주게 한 것과 같다. 그런 맥락에서 예술의 기호는 언제나 세계의 시작이고, 우주의 시작이며, 근원적인 시작이다. 그래서 예술과 종교는 그 경계를 구분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원초적인 말을 세상에 드러내는 사제와 시인은 같다고 칼 라너가 바라본 그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⑥사랑과 관련해서 진실은 너무나 늦게 온다. 사랑의 시간은 잃어버린 시간이다. 헛되이 잃어버린 시간, 잃어버린 시간, 되찾는 시간, 되찾은 시간, 이것이 시간의 네 개의 시간선이다.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기억을 통해 감각적 기호가 주는 영원의 이미지는 시간의 영원성 뿐 아니라 영혼불멸이기도 하다.(132)
사랑의 기호는 기호의 이미지와 관련되어 있으므로 사랑에 빠진 자아가 사라졌을 때에만 어떤 세계가 펼쳐졌는지 알 수 있다. 그런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기억을 통해 감각적 기호가 주는 이미지는 시간의 영원성 뿐 아니라 영혼불멸까지도 드러낸다. '부재의 현존'이 의미하는 트랙이다. 이것은 대상을 환기시키는 어떤 기호를 통해 대상이 차곡차곡 비축해둔 사랑의 의미들을 부재중에 비로소 하나하나 바라보게 되고, 그것을 통해 무한히 사랑했고 사랑받았음을 알게된다고 할 수 있다.
⑦사유한다는 것은 그것은 그러므로 해석하는 것이고 번역하는 것이다. 이 상징은 두 겹으로 되어 있다. 마주침의 우연성과 사유의 필연성 그것이다. 기호 속에 감싸여져 있으며, 사유되기 위해 의미 속에서 펼쳐진다.
사유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바로 기호들이다. 기호는 우연한 마주침의 대상들이다. 그 우연한 마주침이 사유의 재료, 그 필연성을 보장해 주는 것은 분명히 기호와의 그 마주침은 우연성 때문이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책 넘기는 소리, 포크의 달그락 거리는 소리, 홍차와 함께 먹은 마들렌의 맛, 몸을 한쪽으로 귀우뚱 하게 했던 포석...등은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우연한 마주침들이다. 그 우연한 마주침에서 과거의 어떤 원형적 시간을 떠올리고 그 기억을 매개로 미래로 넘어간다. 관념으로 떠돌던 영원, 불멸, 사랑, 희망...이런 상황들이 자신 안에서 하나의 구체적인 세계로 펼쳐지는 순간이다.
과학과 철학에서 지성은 언제나 먼저 온다. 연역으로 어떤 사유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성이 나중에 오는 한에서 그리고 지성이 나중에 와야하는 한에서 기호는 지성에 호소한다. 그리고 그 기호는 자립적이고 훨씬 더 많이 비자립적으로 우리에게 원형적 사유를 강요한다. 우리가 사유하도록 강요받을 때에만 본질들은 사유에 붙잡히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우연한 사건 속에 있는 필연을 알아볼 수 있기 때문에 <사유하는 존재는 아름답다>고 할 수 있다. 그 아름다움 속에서 우리는 사랑이 왜 영원을 견인하는지 그 비의를 알 수 있다.
3.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마태오 28,16-20)
이 글은 [장미학적 존재증명, 결핍에서 풍요로](주님승천대축일)-[내가 세상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겠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전교주일)의 연장선에서 쓴 것이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라고 전하는 마태오28, 16-20은 네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모두 실려 있는 전교의 파견 지침서이다. 제자들에게 유언처럼 남겨진 이 지침서는 19절의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라는 것에서 신앙인들은 전교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전교의 대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제자로 완성된 상태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면서 제자로 완성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제자로 완성된다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사랑과 열정이 있어야 그 길을 갈 수 있는 것인지?를 성찰하게 한다.
Ⓐ그때에 16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17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16절과 17절에 <경배하였다-의심하였다> 라는 것은 우리를 기쁘게 하는 동시에 우리를 슬프게 하고 놀라게 한다. 공생활과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의 과정에서 의심이 들 수도 있겠지만,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앞에서도 예수님을 의심하였다는 말은 사실 우리를 슬프게 한다. <경배하였다-의심하였다> 라고 제자들의 상반된 상황이 제시되어 있는 <그때에> 라는 시간부사는 예수님의 승천상황을 가리키는데, 예수님의 승천 앞에서도 믿을 수 없어 의심했다는 것은 부활자체를 믿지 않았다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부활을 믿지 않았다는 것은 그리스도 강생의 의미를 받아들이는 것부터 영적 혼란을 겪고 있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 믿음의 총체적인 혼란은 본인이 정직하게 감지하기도 하겠지만 대개 그 혼란은 이 세상과 저 세상을 넘나드는 합리적인 신앙으로 착시를 일으키게 한다. 우리 자신은 우리를 그렇게 감쪽같이 속일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실은 만유위에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첫 계명을 망각한 채, 두 주인을 섬기고 있다는 사실을 개방성과 포용성이라는 성격으로 합리화 시키거나, 하느님의 일 보다는 사람의 일을 먼저 생각하는 보신주의라고 할 수 있음에도 말이다. 믿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는 것은 차라리 솔직한 자기 응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두 주인을 섬기고 있음에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의심조차 하지 않는 무감증의 의심은 우리를 더 슬프게 한다. 그렇기에 제자들이 눈으로 목격한 상황에서도 믿음이 흔들린다는 것은 선교의 주체가 곧 선교의 대상이라는 것으로 바라볼 수 있겠다.
그런 맥락에서, <나는 믿나이다>라는 사도신경의 고백이 고백적 차원이 아니라 인격적 차원으로 내재화되는 것이 전교의 첫걸음이라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제2독서에서 바로오 사도는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로마서10,9-18)라고, 파견에 앞서 그런데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파견의 제1조건을 <믿음>이라고 전제한다. <믿음>은 자기구원이기 때문이다. 자기 구원을 확신하지 않고, 누구에게 복음으로 구원을 받으십시오, 라고 전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9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0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11 성경도 “그를 믿는 이는 누구나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 하고 말합니다. 12 유다인과 그리스인 사이에 차별이 없습니다. 같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으로서, 당신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13 과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4 그런데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믿음>은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음에서 비롯된다. 들음의 내용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에서, <들음과 믿음>의 관계는 거의 동의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믿나이다>라는 것은 언제나 <나는 너에게 말한다>는 것을 들었다는 것이며, 우리 생의 모든 것을 이 들음에서 결정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들으면 믿을 수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믿음이 약해, 라는 말은 나는 도무지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없어, 라는 고백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나는 그분의 음성이 아니라 내 에고의 소리만 듣는다는 자기 상태의 표출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 우리는 한 순간도 어떤 음성을 듣지 않고 살수 없기 때문이다.
이사야는 믿어야지만 한 인격으로 그분 앞에 설 수 있고, 그분 앞에 설 수 있을 때에만 세상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음을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너희가 믿지 않으면 정녕 서있지 못하리라'(이사야7,9) '내가 너를 땅 끝에서 데려오고 그 가장자리에서 불러와 너에게 말하였다'(이사야41,9)
네 복음서는 언제나 이 믿음의 시작이 <내가 너에게 말한다>는 것을 듣는 것으로부터 이루어짐을 강조한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루카, 7, 11-17)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마태오, 6, 25-34)
믿음과 들음의 이 구조는 언제나 <너는 나를 믿느냐?- 나는 믿나이다>라는 담화구조로 진행된다. 믿음은 우리가 하늘의 뜻을 받아들여, 하늘의 뜻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그대로 이루어지는 뜻이 되도록 <네>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늘의 뜻이 모든 이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보편적 행복의 길임을 알기에 <네!>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요셉 라칭거 추기경(베니딕토16세교황)은 『사도신경강해』에서 다음과 같이 <네>라는 믿음의 구조에 대해 전한다.
“그리스도적으로 믿는다는 것은 나와 이 땅의 바탕이 되어주는 뜻에 의존하고 이 뜻을 아무 두려움없이 딛고 설수 있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믿음이 우리가 만들지 못하고 받아들일 수만 있는 뜻이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데 대해 <네>하고 답함으로써 이 뜻을 받아들여 우리 자신이 이 뜻에 자신을 맡기는 것을 말한다. (...) 신앙적 핵심의 뿌리는 <나는 무엇을 믿는다>가 아니고 <나는 너를 믿는다>는 말이다. 믿음은 인간 예수와의 상봉이고 이 상봉 안에서 세계의 뜻이 인격(Person)임을 체험하는 하는 것이다(53)”
믿음이란 1차적으로 가시적인 세계에서 즉 감각세계의 무한을 뛰어넘는 것이다. 믿음은 불가시세계를 실재하는 현실로 받아들이는 결단이다. 가시와 불가시 세계를 넘어서야 과거와 미래를 오늘에 수렴시키는 시간의 심연을 건너게 된다. 그때, <오늘과 영원>을 알게 된다. 그때 우리는 이 세상의 소음 속에서 나에게 말하는 분이 누구인지 알게 되고 그 말씀에 나 자신을 기쁘게 맡기게 된다. 믿음은 그 말씀을 듣고 <네!>라고 응답하는 것이다.
우리가 <나는 너에게 말한다>를 알아듣고 네! 혹은 아멘!이라고 응답할 수 있음에 대해 기스벨트 그레사케는 『은총-선사된 자유』에서는 우리에게는 지복직관에의 자연적인 열망이 있기 때문이라고 토마스 아퀴나스의 통찰을 인용한다.
“믿음은 곧 은총이다, 인간의 본성이 스스로 자신에게 줄 수 없는 어떤 것에로 열리어 있고 정향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인간 본성은 하느님의 의하여 은총을 입어 자기 자신을 넘어서서 자신의 충만을 발견한다. 은총은 창조의 본성을 전제하며 이를 완성한다. 예수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체적 세계를 결정적으로 각인하고 변형시키기 위해서 우리 세계로 들어온 위격 속에서의 새로운 자유이며 존재적 긍정이고 무조건적 사랑이며 희망이다.”
그런데 우리가 믿음의 여정에서 분명 <나는 천주성부를 믿습니다> 라고 고백한 후에 믿음이 자주 흔들리는 것은 우리가 지복직관에의 자연적 열망을 지닌 창조본성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가 태어난 시대, 그의 생물학적인 유전인자, 그의 생존 환경인 역사적 자아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본질과 실존 사이에 근본적으로 자력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운 이원론으로 다가오는 것에서 그 이유를 찾기도 한다.
그렇기에 <경배와 의심> 사이에서 딜레마를 겪는 이들이 실은 수난과 고통 죽음에 대한 혼란을 겪고 있다는 것에서 그 맥락에서 바라보기도 한다. 당시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구천에 떠도는 원한의 출몰로 바라보았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를 칼 러너는 『영성신학논총』에서 본성과 인격이라는 이원론에서 고통과 죽음을 바라볼 것을 제언한다. 믿음은 믿는 이들이 고통과 죽음을 피하라고 말하지 않고, 고통과 죽음을 수용하고 재배치하라고 권한다.
“순수한 창조본성을 지닌 인간은 자기를 반격해 들어오는 실존의 선택, 전체적인 실재의 개입을 느낄 수 없다. 순수하게 유한한 인간도 고통을 받을 수가 없다. 이는 자유결정에 선행할 어떤 외적인 운명에 따라야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통은 인간의 인격이 있는 곳에서만 스며들 수 있다. 인격이 한편으로는 그의 본성을 어느 면에서 집중 시키고 그것을 외부에 떼어 대치시킬 때, 인간적으로 파악한 본성 속에 외부의 개입을 경험하는 거기에 고통이 있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와 교부들의 견해를 종합하면 믿음은 그분을 듣는 결단이고, 그 결단이 바로 우리를 믿음이라는 성화은총으로 이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은총 안에서 우리는 하늘과 땅의 권한을 지닌 그분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고, 그 현존 체험 안에서 세상의 가치관을 재배치 할 수 있다. 전교의 첫 단계는 그런 믿음을 전제한다는 것에서 우리는 전교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전교의 대상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전교의 주체이면서 대상이라는 것은 우리의 신앙 여정이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는 그분의 제자로 완성될 수 없음에서 그것을 찾을 수 있겠다.
Ⓑ18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우리가 믿어야 하는 그 내용은 부활하신 주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는 의미는 또 무엇인가? 연중28주에 바라본 주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충만함>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그분으로 인해 충만하지 않다면 우리가 전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공소함을 전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선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온전히 충만한 신성이 육신의 형태로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분 안에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모든 권세와 권력들의 머리이십니다(콜로사이2장6-19)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 안에 있습니다(콜로사이3,11)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 풍성하게 머무르게 하십시오(콜로사이3, 16)만물은 하느님을 위하여 또 그분을 위히여 존재합니다(히브리서2, 10) 우리가 선포하는 것은 우리가 아닙니다(2코린토3,5) 우리의 자격은 하느님께서 옵니다(2코린토5-6)
그런 맥락에서 하늘과 땅의 권한을 그분이 가지셨기 때문에, 제자들은 파견자가 될 수 있다는 인과가 성립된다. 하늘과 땅의 권한을 그분이 가지셨기 때문에 그분의 제자가 된 우리 역시 하늘과 땅의 권한을 받았고, 그 권한의 충만함을 전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세 가지 조건이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고, ⒝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세례축일) ⒞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서 지키게 하는 것(연중30주일)이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라는 마태오 28,16-20에서, 나의 제자됨이 끝이 아니라 모두가 제자됨의 문을 열어야 한다는 것은, 그분으로 인한 <충만함>은 누군가의 <충만함>으로 확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모든 민족을 제자disciple로 삼는다는 것이 전교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스스로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확신이 없다면 어떻게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는다는 것이 가능할까? 그렇다면 그분의 제자가 되기위해 갖추어야할 덕목은 무엇일까?를 성찰하지 않을 수 없겠다.
하늘나라는 어떤 사람이 길을 떠나면서 종들을 불러 재신을 맡기는 것과 같다. 그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태오25, 14-30/루카19, 11-27) 주님께서 각자에게 정해주신 대로, 하느님께서 각자를 부르셨을 때의 상태대로 살아가십시오(1코린토7, 17-24)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지체입니다(1코린토12, 1-31)
제자가 된다는 것은 자신이 무엇을 그분으로부터 받았는지를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분의 나에게 준 달란트를 안다는 것은 그분의 권능도 함께 주셨다는 것을 동시에 아는 것이다. 그래서 그 달란트를 땅속에 묻어두지 않고 만인을 위해 쓰도록 하는 그 길을 갈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이 세상에 그냥 파견하신 것이 아니고,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18절)라고 그분이 갖고 있는 권능(마태오10, 5-15/루카 9, 1-9/마르코6, 7-13)을 동시에 나눠주셨다는 것에서 그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열두제자를 불로 모으시어, 모든 마귀를 쫒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셨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주라고 보내시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길을 떠날 때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쫒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게 하셨다.”
바오로 사도는 1코린토4,7에서 “그대가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 그대가 그것을 받았다면 마치 받지 않은 것처럼 무엇을 자랑하는가?”라고 말한다. 우리가 전교의 최일선에 서있다면, 우리는 그저 할 일을 했습니다라는 감사가 나오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 감사가 아니라 나의 바벨탑을 쌓았다면, 우리가 그분으로 충만하지 않고, 우리가 그분을 전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을 전하였기 때문이며, 그 마음의 바탕에는 아직 그분으로 채워지지 않은 세속의 가치관이 주인으로 남아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그렇기에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는 그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선 달란트와 그분의 권능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 권능이 권능으로서 작용하기 위해선 우리에게 아직 끊어버려야 할 것이 남아 있다는 것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끊어버립니다>를 약속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마태오 복음 사가가 전하는 파견된 제자의 길을, 베드로를 중심으로 따라가 보면, 베드로가 밖으로 나가 슬피울었다(마태오26, 69-75)는 것과 만나게 된다. 베드로의 눈물은 베드로가 다시 태어나는 모태가 된다. 전교는 예수님으로 충만해 지기 위해 자기 자신이 무엇을 사랑하는지, 자신의 열정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거듭 성찰하는 눈물의 길임을 알 수 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 것이다”.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아버지와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다, 예수님은 갈릴래아 전도시작 이후, 어부 네 사람을 부르시다(4, 18-22) ⒝수확할 것은 많은 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일꾼들을 보내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오9, 35-38/마르코6,6-34/루카10,20)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여라, 병든 이들을 고쳐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환자를 깨꿋이 하고 마귀를 쫒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오10, 5-15)-박해를 각오하여라(마태오10, 16-25)-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선포하여라(마태오10, 26-32)-너희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마태오10, 40-42)-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먹기 시작하였다(마태오12, 1-8)-스승님을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오16, 16)-수난과 부활을 처음으로 에고하시다, (베드로에게)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오16, 21-23)-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마태오20, 27-30)-오늘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마태오26, 31-35)-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으로 나가 슬피울었다(마태오26, 69-75)
우리가 잘 알다시피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성령을 체험한 후에 완전히 그분의 제자로 거듭난다. 베드로의 행보는 사도행전 1~8장에서 걸쳐 어떻게 제자로 거듭나게 되었는지 상세하게 루카복음사가는 전하고 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만 쳐다보며 서 있느냐?(사도행전1.11)-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사도행전2,14-41) 여러분은 이 타락한 세대로부터 자신을 구원하십시오(2, 40)-베드로가 불구자를 고치다, 베드로가 솔로몬 주랑에서 설교하다- 배드로와 요한이 최고의회에서 증언하다.(사도행전3,1-4,37)-사도들이 빅해를 받다(5, 17-42)-베드로와 요한은 주님의 말씀을 증언하고 전파한 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면서 사마리아의 많은 마을에 복음을 전하였다(사도행전 8, 25)
베드로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달란트와 그분이 주신 권능을 실현시키기 위해, 자기 믿음의 현주소를 수시로 성찰- 경험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버림과 따름>의 과정을 수없이 겪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아이,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이와같이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마테오 10, 37-38) 제 14, 25-33/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오10, 37-38/루카14,33)너희가운데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이렇게 자신이 그분으로부터 받은 <달란트와 권능>, <버림과 따름>, <포기와 십자가>를 통해 예수님의 제자로 거듭났다는 것은 무엇으로 알 수 있을까? 진리로 진정 자유로워졌는지와 우리 삶에서 맺는 성령의 열매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진리가 자유롭게 하리라(요한8, 31-32/ 18, 38/요한14, 6)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그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세상으로 나가 전교를 할 수 있는 영적 에너지의 내재화, 충만화, 즉 끊임없는 기도와 그분의 말씀에 머무르는 것이 필수의 과정으로 요구된다. 그것은 성령의 인도에 우리 자신을 맡겼음을 의미한다. 즉 마르타가 되기 전에 마리아가 되는 길이 전교를 하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물러 있을 때, 우리는 내적으로 자유로워지며, 우리가 내적으로 자유로워졌을 때, 우리는 타인을 해방할 수 있는 그분의 진정한 메신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선 성령이 우리 안에서 어떻게 생활하는지? 성령이 어떻게 우리를 인도하는지? 그것이 어떻게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인지? 를 끊임없이 성찰하는 것이 제자의 필수과목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어떠한 죄를 짓든,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을 하든 다 용서 받는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은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용서 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거슬려 자는 용서 받지 못할 것이다(마태오 12, 31-32)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에페소5, 30-32) 성령의 불을 끄지 마십시오.(1테살로니까, 5, 20)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십시오. (갈라티아5, 16)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고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
결국 전교의 주체가 되는 제자의 길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을 알고, 믿고, 살아내는 일임을 알 수 있다. 그 살아냄은 실은 우리 혼자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현존을 체험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 현존체험은 실은 우리가 전교의 주체일 뿐 아니라 전교의 대상임을 다시금 바라보게 만든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18절)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20절)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라고 전하는 마태오 28,16-20에서 18절과 20절을 연결해서 바라볼 수 있을 때, 하늘과 땅의 권한을 받은 그분이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전교의 최일선에 두려움없이 설 수 있음에 감사하게 된다. 그렇지 않다면 사도들의 경우처럼 경배와 의심 사이에서 우리는 전교의 주체로 거듭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우리 자신이 전교의 주체이자 대상이라는 것을 어느 순간도 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분이 우리와 함께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늘과 땅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고,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세울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가 선교의 주체이면서 선교의 대상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 안에서 부활의 사랑이 가능해야 한다. 그 말은 부활의 사랑에서 나오는 열정이 기득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때, 누군가의 인정이 없어도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진정 우리 스스로 바라보게 된다.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고, 열정은 저승처럼 억센 것!(아가8,6)]
우리가 전교의 주체인 그분의 제자로 거듭난다는 것은 우리 역시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온몸으로 짊어지고 가는 부활의 여정을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다른 말로 삶을 사랑에 종속시킨 부활의 사랑을 살겠다는 다짐이라고 할 수 있다. 아가서는 그것을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다고 전한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수난과 죽음을 극복하고 부활하신 그분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느님나라에 대한 갈망과 열정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아가서는 그 상태를 열정은 저승처럼 억세다고 전한다. 바오로 사도는 그 열정의 아름다움을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마서10. 15)라고 예찬하기도 했다. 또한 우리 자신이 선교의 주체이면서 대상이라는 것을 망각하지 않기 위해 “나는 내 몸을 단련시킵니다.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나서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1코린토9,27)라고, 나는 하느님의 메신저다! 고로 나는 1코린토9,27 를 언제나 기억하겠다!고, 노트에 꾹꾹 적어 놓기도 한다.
글을 마치며,
그때에 16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17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18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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