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멀츠하이머mulzheimer’의 추상적 고백에 의한 '모퉁이의 머릿돌kephale gonias'

나뭇잎숨결 2023. 10. 6. 07:00

 

이 단풍나무는 원래 이런 붉은 잎을 지닌 나무라는 순애데레사의 설명과 사진; 탱큐!

 

 

멀츠하이머mulzheimer’의 추상적 고백에 의한 '모퉁이의 머릿돌kephale gonias'

-연중27주, “주인은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를 중심으로

 

 

 

 

 

 

1. 라이너 마리아 릴케, 「가을날」

 

 

주여, 때가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얹으십시오./들에다 많은 바람을 놓으십시오.//마지막 과실들을 익게하시고/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그들을 완성시켜, 마지막 단맛이/짙은 포도주 속에 스미게 하십시오 //지금 집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고독한 사람은 이후로도 오래 고독하게 살아/ 잠자지 않고, 읽고, 그리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바람에 불려 나뭇잎이 날릴 때, 불안스러이/ 이리저리 가로수 길을 헤멜 것입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가을날」은 ①연과 ②연에서는 절대자에 의한 충일한 아름다움을 기도하는 반면 ③연에서는 절대고독의 시간에 처한 화자의 내면에 대해 고백한다. 화자는 절대자 앞에선 자연과 인간을 상반된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것을 릴케의 개인적인 사생활에서 추론할 수도 있겠지만, 존재론적 고독 자체가 시인에게는 더 나아가 인간에게는 충일의 그릇이라는 것으로 읽을 수 있겠다.

 

지금 집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고독한 사람은 잠자지 않고, 읽고, 그리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바람에 불려 나뭇잎이 날릴 때, 불안스러이/ 이리저리 가로수 길을 헤멜 것입니다에서

 

'지금 집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에서, 이 지상에서 영원한 노마드인 집없는 자의 고독이 충일 혹은 충만을 담는 그릇이라고 말한다. 공간이 없는 것이 아니고, 공간 자체에 안주하지 않는 본질을 찾아 헤메는 마음, 자연의 충일은 절대자가 베푸는 낮의 은혜라면, 시인의 충일은 밤의 은혜로, 충만, 집의 부재로 인한 고독예찬론으로- 멜랑콜리아의 파토스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랭보는 시인은 “견자”일 수밖에 없고, 필연적으로 시인은 “견자”여야만 된다고 말한다. 형상과 감각을 넘어서서, 드디어는 인간의 오욕칠정을 넘어서서, 육안이 아닌 심안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이 시인이라고 본 것이다. 하기에 일상적인 시선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시인은 그 과정에서 타자가 없는 고독이 아니라 절대고독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멜랑콜리아melancholia'를 겪을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멜랑콜리아는 뒤러의 3대 동판화 가운데 하나이기도 한데, 그것은 뒤러의 정신적 초상일 뿐만 아니라 예술가 일반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도의 현자들은 무쾌감증, 불면증, 조울증, 죄책감 같은 심한 우울증의 근원은 인간의 체질에서 기인하며 그것을 체액설로 설명한다. 인간에게는 네 가지 체액(혈액, 노란 담즙, 검은 담즙, 점액)이 존재하며, 이 체액에 따라 사람의 체질과 기질뿐 아니라 직업적 운명이 정해진다고 보았다. 그 가운데 ‘검은 담즙’은 ‘우울과 슬픔에 젖는 밤의 풍요’로 예술가들이 겪어내는 나르시시즘의 과잉에서 이 멜랑콜리아가 발생한다고 보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가을날」본질적인 근원을 찾아 헤메는 이들이 겪어내는 절대 고독의 이름이자, 가을날이 촉발한 밤의 충만, 멜랑콜리아melancholia를 표출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강릉 선교장, 굴뚝조차 이렇게 아름답구나!

 

 

 

 

2. 깊은 고독은 숭고하지만 두려운 방식으로 그러하다(칸트)

 

 

칸트는 모든 철학은 그가 신을 인정하든 안하든 결국 형이상학으로 수렴된다는 점에서 철학이 말하고자 하는 진리 역시  멜랑콜리아melancholia의 경험 속에서만 발견된다고 보았다. 칸트는 사유의 결절점이 바로 절대고독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이 멜랑콜리아를 겪어내는데, 그것은 예술 일반과 달리 숭고미와 결합하거나 비장미와 결합하기에 인간은 사유를 통해 아주 <아폴로적인 밝은 진리, 숭고함으로 위대해지거나, 디오니소스적 비장미로 염세적으로 아주 위태로워지는>것을 경험한다고 보았다.

 

 

그런 맥락에서 칸트는 『판단력 비판』, 『고찰』,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에서 ‘숭고(τὸὕψος/sublime/Erhabene)’를 나르시즘, 멜랑콜리, 고독과 연결하고 있다. 그런데 모든 멜랑콜리아를 경험한 이들은 자신의 심연에서 허무를 넘어설 때에만 지혜, 혹은 숭고함 진리를 얻는다고 본 것이다.

 

칸트는 『고찰』에서 “깊은 고독은 숭고하지만 두려운 방식으로 그러하다.”라고 말한다. 두려우리만치 깊은 고독은 숭고한 대상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도리어 숭고한 ‘멜랑콜리melancholy’의 핵심에 고독이 자리 잡고 있다고 바라본 것이다. 이는 그 주체가 나르시시즘에 잠기지 않으면 이를 수 없다는 점에서 멜랑콜리는 불가피하게 나르시스트의 특징적 성격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나르시스트의 고독은 칸트적 멜랑콜리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칸트에게 ‘숭고함’은 ‘나르시스트-멜랑콜리-고독’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칸트의 글을 재인용하여 읽어본다.

 

멜랑콜리한 우울한 기분을 가진 사람은 자기 자신에 관계하는 모든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며, 모든 곳에서 우울의 원인을 발견하고, 다혈질인 사람이 성공의 희망으로부터 시작하는 데 반해서, 그는 무엇보다도 어려움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래서 다혈질인 사람이 단지 표면적인 것만을 생각하는 데 반해서, 감상적 우울질을 가진 사람은 자기 내면의 심연을 침잠한다. 그 심연에는 어떤 힘이 있다.

 

칸트는 아름다움을 인간 본성과 연관되어 있고, 숭고는 멜랑콜리 기질을 가진 사람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멜랑콜리는 고대 의학에 기초를 둔 해부학적 관점에서 본 것이다. 칸트는 우리가 단지 영혼에만 어떤 개별자의 기질은 종속시킬 수 없다는 점에 착안한다. 또한 인간의 신체적인 측면을 신비스럽게도 영혼과 공동 작용 원인으로서 가질 수도 있다는 점을 주목했다. 인간을 파악하는 하나의 방법인 기질은 영혼에만 귀속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과 육체 어느 하나로 환원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으로 바라보기에 생명은 그 자체로 “신비스럽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칸트 철학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멜랑콜리는 ‘자기중심성’ 즉 ‘나르시즘’에 기반한다. 멜랑콜리는 자기중심적 인간에게서 주로 나타난다. 그에게 자신과 매개되지 않는 모든 것은 무의미하며 공허한 타자로 남는다. 물론 여기에서 ‘나’란 생각하는 주체, 이성적 주체를 뜻할 수도 있고, 한갓 주관적인 개체를 뜻할 수도 있다. 이 멜랑콜리는 미학적으로 예민한 감수성을 발현시키기도 하고 병리적인 우울증을 유발하기도 한다. 어떤 경우든 멜랑콜리는 ‘나’가 세계의 중심에 있으며, 모든 것을 ‘나’로 환원시키고 수렴시키는 나르시스트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악덕과 도덕적 위반 자체도 종종 숭고함이나 아름다움의 몇몇 특징들을 이끌어낸다. 이것을 이성으로써 증명할 수는 없겠지만, 그런 것들이 적어도 우리의 감각적인(sinnlich) 감정에서 현상하는 것처럼 그렇다. 강건한 종류의 모든 정념은 심미적-숭고인데, 예를 들면 분노, 심지어 절망이 그것이다.

 

칸트는 나르시시즘의 멜랑콜리한 정념을 숭고와 연결짓는 데 그의 주저 『판단력 비판』에서 반복적으로 제시된다. 멜랑콜리의 핵심에는 고대 의학의 연장선에서 쓸개로 상징되는 분노(절망의 다른 표현)의 정념이 놓여 있으며, 그것은 심미적으로 볼 때, 멜랑콜리의 숭고성을 주조한다고 보았다.

 

대담하게 높이 솟아올라 있는 위협적인 절벽, 번개와 우뢰를 몰고 다가오는 하늘 높이 피어있는 먹구름,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화산, 폐허를 남기고 지나가는 태풍, 파도가 치솟는 끝없는 대양, 힘차게 쏟아져 내리는 폭포 같은 것들은 그것들이 지니는 위력과 비교할 때 우리의 저항력은 무의미하고 사소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러나 우리가 안전한 곳에 있기만 하다면 그 광경은 두려우면 두려울수록 더욱 우리의 마음을 매혹한다.

 

자연의 절대적인 세계의 크기는 연약한 인간에게 가공할만한 두려움의 대상이다. 자기를 위협하는 압도적인 대상은 자기보존 본능을 두려움이란 형태로 드러낸다. 절대적이고 무한한 크기와 그런 힘에 압도당한 상태는 두렵지만 동시에 ‘매혹적’이다. “두려우면 두려울수록” 매혹의 강도가 더욱 커진다는 것에서 멜랑콜리는 심연에서 솟구치게 된다.

 

우리가 이러한 대상들을 기꺼이 숭고하다고 부르는 것은 그 대상들이 정신력을 일상적인 범용 이상으로 고양시켜 주며 또 우리의 내면에 전혀 다른 종류의 저항능력이 있어서 그러한 저항능력이 우리에게 자연의 외관상의 절대적인 힘에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어떻게 ‘멜랑콜리melancholy’가 ‘숭고한 아름다움’과 결합할 수 있을까?

 

예컨대, 어마어마한 크기의 자연 앞에서 인간은 일단 그 스케일에 압도당한다. 그런 자연의 힘은 연약한 인간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나 ‘상대적인 크기에 유한한 위력’을 지닌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파악하게 되면서 이를 극복한다. 절대적인 크기의 무한한 힘은 자연에는 그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무한과 절대를 ‘사유’할 수 있는 인간의 ‘이성’은 자연을 넘어서는 초현상계에 접근할 수 있다. 여기서 사유할 수 있는 이성만이 멜랑콜리의 병리적 현상으로 우울에 침잠되지 않고 자신을 들어올리는 숭고미를 드러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런 숭고감정의 반전 메카니즘은 광적인 멜랑콜리의 메카니즘과 동일하다. 둘 모두 절망과 두려움에서 그것을 극복한 자기고양의 감정이기 때문이다.

 

칸트의 해석에 따르면 멜랑콜리는 자기의식이 과도하게 작동해서 생겨나지만,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이성을 통해 그 두려움을 극복한다. 그는 자신보다 크고 뛰어나고 강한 타자를 만나 어떤 방식으로든 그것을 동화시키는 자기고양(自己高揚)을 시도한다. 그리고 이런 자기고양․자기상승의 희열이 드높이 치솟는 숭고(崇高)한 감정을 일으킨다. 칸트의 멜랑콜리는 숭고한 멜랑콜리이고 그것의 정체는 이성을 통한 자기고양의 감정이다. 이런 멜랑콜리는 숭고하지만 그러나 고독하다. 왜냐하면 숭고한 멜랑콜리는 결국 자기중심적, 자기 심연으로 침잠하는 나르시스트의 고유한 감정으로 귀착되기 때문이다. 칸트는 『고찰』에서 “깊은 고독은 숭고하지만 두려운 방식으로 그러하다.” 라고 말한다. 두려우리만치 깊은 고독은 숭고한 대상 가운데 하나만이 아니다. 도리어 숭고한 멜랑콜리의 핵심부에 고독이 자리 잡고 있다. 나르시스트의 고독은 칸트적 멜랑콜리의 본질이다. 칸트의 해석에 따르면 멜랑콜리는 자기의식이 과도하게 작동해서 생겨나지만,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이성을 통해 그 두려움을 극복한다. 그는 자신보다 크고 뛰어나고 강한 타자를 만나 어떤 방식으로든 그것을 동화시키는 자기고양(自己高揚)을 시도한다. 그리고 이런 자기고양․자기상승의 희열이 드높이 치솟는 숭고(崇高)한 감정을 일으킨다. 칸트의 멜랑콜리는 숭고한 멜랑콜리이고 그것의 정체는 이성을 통한 자기고양의 감정이다. 이런 멜랑콜리는 숭고하지만 그러나 고독하다. 왜냐하면 숭고한 멜랑콜리는 결국 자기중심적, 자기 심연으로 침잠하는 나르시스트의 고유한 감정으로 귀착되기 때문이다. 칸트는 『고찰』에서 “깊은 고독은 숭고하지만 두려운 방식으로 그러하다.” 라고 말한다. 두려우리만치 깊은 고독은 숭고한 대상 가운데 하나만이 아니다. 도리어 숭고한 멜랑콜리의 핵심부에 고독이 자리 잡고 있다. 나르시스트의 고독은 칸트적 멜랑콜리의 본질이다.

 

 

'미학 이전의 미학'이라고 일컬어지는 칸트의 『고찰 』 은 임마누엘 칸트로 하여금 근대 철학의 완성자로 자리매김하는데 일조했다. 이러한 그의 업적은 미학 영역에서도 적지 않아서 칸트 미학이 집대성되어 있다고 평가받는 『판단력 비판』(1790)은 미학사에 일대 전환점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예술을 학문이나 도덕의 범주 내에서 파악하려는 기존의 시각에서 벗어나 학문과 도덕, 예술 각 영역의 근대적 분화와 독자성을 강조하고 나아가 예술의 자율성을 정립했다. 칸트는 이를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로 『판단력 비판』보다 26년 앞선 1765년에 것으로 칸트 미학의 단초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기존의 칸트의 사상이 세 비판서를 저술한 시점 이전인 ‘비판 이전’과 그 이후인 ‘비판 이후’로 단절하여 파악됨으로써 『고찰』의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간과되어왔다. 그러나 이 책에서 드러난 숭고함과 아름다움, 이에 상응하는 느낌으로서의 감정이라는 단초가 이후 비판시리즈에서 발전적으로 계승되어 보다 엄밀한 개념들을 통해 개진된다는 점에서 젊은 시절, 칸트가 평생에 걸친 미학적 고민들을 숙고한 흔적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미학 이전의 미학’으로 규정할 수 있다. 이성과 감정의 종합은 미학은 어떠한 지형도는 주관적인 감정을 아름다움의 주요한 계기로 인식하는 정감론 미학과 대상에 내재된 객관적 속성을 파악하고자 하는 이성론 미학으로 대별된다. 억압된 감각과 감정을 구제될 뿐만 아니라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두 가지 근원, 즉 이성과 감정의 종합이 시도된다. 다시 말해 칸트는 아름다움을 개념이 아닌 감정으로 전환시키면서도 감정이라는 주관적 판단을 객관적으로 정당화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개별성과 보편성을 조화롭게 양립시키고자 했던 계몽주의의 적자(嫡子)로서의 칸트의 사상사적 입지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칸트의 미학적 고민은 만약 칸트의 말대로 감정이 아름다움의 한 계기라면 어떤 이에게는 아름답게 보이는 대상이 다른 이에게는 아름답게 보이지 않을 수 있다. 칸트는 감정이 주관적인 근거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논증은 할 수 없지만 논쟁을 할 수 있는” 것이라는 말로 감정의 절대적 보편성을 주장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관적인 감각이나 느낌에 사회적 보편성이 작용한다고 보아 이를 취미라는 개념으로 규정한 경험론 미학을 수용함으로써 개별과 보편 각각의 독립적인 상황을 인정한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우리의 감정이 일상의 구체적인 내용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한, 더욱이 아름다움의 감정을 자아내는 대상들이 범람하고 물신화되어 어떤 것이 진정한 아름다움의 감정인지 알 수 없는 이 시대에 우리는 여전히 칸트의 이러한 미학적 고민을 동시에 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남마리안나 수녀님께서, 고맙습니다.

 

 

 

 

 

3. <주인은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마태오21,33-43

 

 

 

[1]<주인은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라고 전하는 마태오21,33-43은 예루살렘 입성 후, 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들려준 두 번째 답에 해당한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마태오21, 23-24)라는 질문에 대해, 지난 주 첫 대답은 세례자요한의 가르침인 의로움의 길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라는 답을 들려주었다.

 

마태오21,33-43에서는 두 번째 답은 네 단계의 점층적인 과정을 거쳐 대화가 전개되는데, 이는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포도밭 주인이 아니고 소작인이며,  소작인이 주인에게 바쳐야할 소출이 무엇인지, 또한 자신들이 포도밭 소작인으로 부름받지 않았다면, 얼마나 가난한 이름을 지닌 존재인가를 알게하려는 예수님의 교수법, 자비라고 할 수 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33 “다른 비유를 들어 보아라.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34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그는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 오라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냈다. 35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들을 붙잡아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였다. 36 주인이 다시 처음보다 더 많은 종을 보냈지만, 소작인들은 그들에게도 같은 짓을 하였다. 37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38 그러나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39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

 

40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41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 하고 그들이 대답하자,

 

Ⓒ4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마태오21,33-43을 도식하면 다음과 같다.

 

Ⓐ비유------Ⓑ일반화(추상적)-------Ⓒ인용(역사적)-------Ⓓ보편화

 

여기서 묵상의 초점은 결국 Ⓑ의 일반화와 Ⓓ의 보편화의 충돌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화는 이 세상의 인과율, 자연과학적인 방법에서 결론을 찾는 귀납적 사고에 해당한다. 반면 보편화는 하느님 계시에 의한 연역적 사고에 의한 지식(성령의 열매)의 드러남이다. 귀납적 사고에 의한 일반화는 대부분 취약한, 자기가 실존하는 당대 사회의 경험을 동원하여 제시되는 성급한 일반화에 해당한다. 그런데 그 성급한 일반화가 무서운 것은, <사람들은 다들 왜 그래?>라고  자신이 내린 결론에서 자신을 제외시킨다는 점이다.  자신을 제외시키는 것은 자신의 땅을 망각하게 만든다. 자기의 경작지의 넓이 크기를 모르게 한다. 주인을 모르게 한다. 

 

Ⓐ에서 예수님은 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포도원소작인의 비유를 들어 그들 스스로 자신의 행위를 성찰할 기회를 주신다. 분명히 포도밭주인이 누구이며 소작인이 누구인지 아는가? 라고 물으신 것이다.  그들은 Ⓑ의 대답에서, 성급한 일반화를 통해 나뿐 소작인이 누구인가를 규정했지만, 정작 그 포도밭에서 축출당할 그 나쁜소작인이 그들 자신이라는 것을 고백하지 못한다. 주인이 누구이며 자신들이 소작인이라는 사실을 잊었기 때문에 자신들을 제외한 추상적 성찰에 머물게 된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 자신을 축출하지 않는다면 다른 누군가를 축출해야 한다. 

 

이에 멈추지 않고 예수님은 다시 Ⓒ에서 이스라엘 역사를 인용하여 그들의 성찰을 더 구체적으로 유도한다. 그런데 그들은 그 인용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해 포도밭에 달린 소출이 포도가 아닌 들포도가 바로 자신들이라는 사실을 바라보지 못한다.  결국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라고 그들 스스로 그 예언을 성취하게 만든다.

 

여기서 성찰의 포인트는 고백의 추상성이라고 할 수 있다. 세리나 창녀, 이방인들이 하느님 나라에 먼저 들어간다는 첫 번째 답에서 세리나 창녀가 하느님 나라에 먼저 들어가는 이유는 그들의 고백이 지닌 진정성에 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았다는 것이다. 그 고백은  <나는 가난 사람입니다> 라는 구체적 자기 인식에 해당한다. 사람들이 왜 저래? 가 아니고 나는 왜 이런가?에 대한 바라봄이다. 구체적 고백은 자신이 하느님 앞에서 얼마나 가난한지 바라보는 겸손의 출발점이다. 그 고백은 <나는 하느님으로 인해서만 행복할 수 있습니다> 라는 행간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하늘나라를 차지하는 것은 그래서 마땅하고 옳은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과 나의 관계,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아는 것이 겸손이고 가난함이다. 하느님 앞에서 겸손은 곧 가난함에 대한 자기인식이다. 사실 그들이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한 일은 아무 것도 없다. 그냥 자신이 하느님 앞에서 가난하다는 사실만을 정확하게 바라보았을 뿐이다. 

 

반면, 수석사제나 백성의 원로들이 타인의 죄를 규정하는, 일반적인 고백을 낳고 그 일반화는 보편화로 넘어가지 못한 추상적인 성찰로 멈춘다. 그것은 자신들이 포도밭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은 것이고,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잊은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남의 죄를 규정할 뿐,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른다. 자칭 의인이 된다. 자신의 가난함을 바라볼 수 없는 구제받지 못한 가난이라고 할 수 있다. 

 

나의 죄를 고백한다는 것은 구체적일 수밖에 없다. 보편적 은혜(나와 하느님과의 관계를 아는 것으로) 언제나 구체적인 고백 속에 무상으로 주어진다. 고백이 추상적일 때, 영원한 생명은 죽은 다음의 시간 밖으로 밀려난다. 영원이 시간 밖으로 밀려날 때, 영원은 알 수 없다. 그때,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은 고백적 차원의 믿음이지 인격적 차원의 믿음이 아니게 된다. 지난주에 살펴본 것처럼 <오늘>과 <영원>이 사라진다. <오늘>과 <영원>이 사라졌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는 현실의 가치관에 입각한 원칙에 충성하고, 그럼에도 내세를 보장받으려는 두 주인을 섬기려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즉 자기우상숭배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제1독서 이사야 5,1-7에서 좋은 포도가 맺기를 바랐는데, 들포도를 맺었다고 전한다.

 

“만군의 주님의 포도밭은, 이스라엘 집안이요, 유다 사람들은 그분께서 좋아하시던 포도나무라네. 그분께서는 공정을 바라셨는데. 피흘림이 웬말이냐? 정의를 바라셨는데, 울부짖음이 웬 말이냐?”

 

그들은 율법의 정신이 애주애인이라는 것도 다 알고 있었고, 그리고 바리사이파는 부활도 믿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려면, 그들이 주인이 아니고 소작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들이 추구하는 현실의 가치관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공정과 정의>를 아전인수로 해석하여 추상화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필리비서4, 6-9에서, 구체적으로 하느님 안에서 무엇을 추구하고 바라볼 것인가를 제언한다. 이는 <오늘>을 사는 이들만 하느님을 알 수 있다고 전한다. 

 

“아무 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걱정-감사-기도-소원-이해- 평화, 이런 구체적인 상태언어를 통해 저 하늘에 계신 하느님이 아니라 이 땅에서 구체적으로 체험되는 하느님,  우리의 삶 속에 현존하시는 아버지의 나라를 구하라고 제언한다.

 

 

 

 

 

 

 

 

 

 

[2]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42절)

 

 

그렇다면, 그들이 그토록 갈구하던 하느님 나라의 소출을 걷을 수 없었던 추상적 고백 속에 내재된 두려움은 무엇인가? 사랑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추상은 실은 두려움의 표현이다. 주인이 아니고 소작인이 지닌 두려움이다. 이것은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주 너희보다 먼저, 세리나 창녀 이방인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말을 들었다. 그렇다면 그들이 낸 소출은 대체 무엇인가? 마태오 복음 사가나 자캐오는 행위를 통해 터닝 포인트를 한 이들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그들 이외에 여전히 세리고, 여전히 창녀고, 여전히 이방인들이 내는 포도밭의 소출은 무엇인가?

 

포도밭에서 나는 소출의 의미는 <연중 25주-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마태오, 20, 1-16)>에서 본 바와 같이 <카나의 혼인잔치요한 복음 2,1-12)>와  <연중 28주: 혼인잔치의 비유>의 주제와 연결하여, 하느님 안에서의 <충만-충족의 원칙> 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 안에서의 <충족과 충만의 원칙>하느님만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그 삶을 의미한다. 무엇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하느님으로는 충만하지 않다는 고백이다. 그것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차원이 아니라 두려운 분, 벌주는 분, 즉 상선벌악의 블랙샤먼으로 인지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소출을 제때에 바친다는 의미는 또 무엇인가? 제때에 바친다는 것은 그분으로 행복하게 산다는 것으로, 이미 이곳에서 천국의 삶을, <오늘>과 <영원>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지난 주에 살펴본 <오늘>과 <영원>을 사는 것이다.

 

포도밭의 소작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밀>이 아니라 바로 <포도>다. 우리는 여기서 성서에 자주 나오는 <포도-기쁨>의 의미를 성찰해야 할 듯하다. 성서에서 기쁨은, 상식적인 기쁨의 상황이 아닌 곳에서 느끼는 영적 충만에서 경험되는 기쁨이다. 어떤 유쾌한 정서나 근육의 미소가 아니다. 재치나 유머감각이 아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을 아는 이들도 느끼지 못한 그 기쁨을 다른 민족이 어떻게 하느님만으로 충족한 삶을 산다고 할 수 있을까? 이것은 전하는 이들까지도 전제로한 기쁨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종이나 아들을 죽이는 이들에 대한 것뿐 아니라 죽음을 당한 이전 종들의 문제도 동시에 성찰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도 기쁘지 않기 때문에, 혹시 기쁨을 전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닌지? 그 역시 성찰의 대상이라는 본 것이다. 복음은 분명 전염되는 기쁨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기쁨은 근육의 미소, 성격의 밝음, 재치, 유머, 긍정 마인드를 뛰어넘는 기쁨이다. 기쁨은, 가장 하느님적인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지혜이자, 그 어떤 기회비용을 지불해서라도 그것을 영원히 추구하려는 자유의지에 가깝다. 

 

당대 정치 종교 지도자들은 그들이 아는 바대로, 하느님을 좋아하고 그분에게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정열을 쏟았다. 그것은 인정해야 한다. 율법613조를 지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하느님 나라를 빼앗긴다는 것은, 하느님으로 인해 기쁘지 않았다는 것이고, 스스로 기쁘지 않았기에, 그 누구도 기쁘게 만들 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스스로 하느님 나라를 포기한 원인에 해당한다. 포기한 것은 빼앗긴 것이고 내버린 것이다. 자신들이 기쁘지 않아서 그들은 포도원 밖으로 그 상속자를 죽이고 내다버린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추상적 고백이 도달한 결론이었다. 하나의 행위는 그 안에 수많은 것들이 연쇄적으로 작용하여 죽음 아니면 생명으로 수렴되고, 그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면 하느님을 부정하든가 긍정하는 무신론/유신론적 무신론/유신론이라는 세 유형이 자리하고 있다. 당대의 정치-종교지도자들은 유신론적인 무신론자라고 할 수 있다. 부처의 적이 불교신자이듯, 하느님의 적은 하느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이들이라는 것이다. 

 

그로 인해, 그들의 추상적 고백은 예수님을 <모통이의 머릿돌>로 만들었다.

 

'모퉁이의 머릿돌'(kephale gonias)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비유로. 사도행전 4장 10절과 11절의 '버림을 받음'과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심'으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상징적 예언이라고 할 수 있다. 베드로1서 2장 7~8절은 시편 118장 22절과 이사야서 8장 14~15절과 연결하여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예수님은 '머릿돌'이 아니라 '차여 넘어지게 하는 돌과 걸려 비틀리게 하는 바위'가 된다.

 

또한 그들이 '내버린'(apedokimasan)'완전히 시험한 후에 버리다'는 뜻으로 집짓는 이들과 포도밭의 소작인들로 비유된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심사숙고하고 철저히 검증한 결과 그들의 결론은 예수님을 제거하는 것이었고, 그러면 포도밭의 상속이 자신들의 것이 되는 줄 알았다. 그들의 추상적 고백은 진정 '사악한' 무지에서 만들어진 왜곡의 일반화였기 때문에 기쁨의 보편화로 넘어갈 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십자가 사건은 그냥 무지가 아니라 '사악한' 무지의 결과였다. 그러기에 그들 입장에서 '내버린' 것이 하느님 시선에서는 '빼앗긴' 것이 된다

 

이 글 제목에 대해서, 

 

[‘멀츠하이머mulzheimer’의 추상적 고백에 의한 '모퉁이의 머릿돌'(kephale gonias)]

 

그들은 어떻게 현세의 기쁨과 내세의 기쁨을 동시에 모두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였을까? 두  주인을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한 이유, 그것은 ‘멀츠하이머mulzheimer’적인 영적치매 상태를 의미한다. 그들은 철저하게 모세오경에서 찾아낸 율법을 금과옥조로 여겼지만 모세가 전하고자 하는 그 메시지의 내용을 까맣게 잊었다. 메시야를 기다렸지만, 이스라엘 역사의 그 질곡을 잊었다. 그들은 주인이 누구이며 소작인이 누구인지를 잊었다. 창조주가 누구이며 피조물이 누구인지 잊었다. 그로 인해 하느님을 부르면서 하느님을 잊었다. 그것은 자기 근원을 잊은 것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자기 정체성을 망각한 것과 다르지 않다. 초심을 잊은 것이다. 총체적인 망각의 매커니즘이다. 

 

‘멀츠하이머mulzheimer’는 멀티+알츠하이머의 합성어로, 영적 치매를 의미한다. 영적 치매는 모든 것, 즉 이 세상의 것과 저 세상의 것, 둘 다를 다 얻으려는, 두 주인을 섬기려는, 존재의 배고픔과 실존의 두려움에서 발생한다.

 

바오로 사도가  “나는 어떻해서라도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1코린토9,22), 또  "하느님은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입니다"(1코린토15,28)에서 ‘모든 것’은 ‘모든 이들을 위한 모든 것으로’ 취하거나 소유하기 위한 모든 것이 아니고, 이타적 무소유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이 세계의 가치관이 던지는 고독의 강을 건넌 다음에 만나는 진정한 기쁨이고 감사에 해당한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수많은 고독의 강을 건너 그리스도에 온전히 취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세상과 저 세상을 가르는 그 강의 이름은 절대고독이다. 이 세상과  저 세상을 구분하는 것은 분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모든 세계를 다스리고 끌어간다는 것을 바라보기 위한 필연적 과정에 해당한다.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하는 은총의 기회비용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강 이편에서는 그리스도가 걸려넘어지게 하는 바위였다면. 강 저 건너에서 그리스도는 하느님 나라의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두 세계를 가르는 결절점이 기쁨의 교체인 절대고독이다. 절대고독은 거짓 기쁨이 진정한 기쁨으로 교체되는 기회비용을 의미한다. 이것은 거룩함의 차원이 아니라 자유의지, 그 선택과 결정의 차원에 해당한다. 또한 이것은 언제나 기억과 망각의 매커니즘과 연결된다.

 

선택과 결정은 언제나 기억과 망각의 매커니즘과 연관되어 있다. 자신의 기억과 망각을 뇌에 훈련시키는 것은 타인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다. 더 정확하게 자신의 열망이고 욕망이고 꿈이고 배고픔이고 두려움이다. 그것이 자신이 지닌 자유의지의 선택이자 결정이다. 그 자유의지를 실현하는 것은 누구나 예외없이 고독이라는 기회비용을 지불한다. 그 기회비용을 철학자나 미학자들은 절대고독이라고 부른다. 본질적인 것을 추구하는 이들은 예외없이 이 절대고독이라는 강을 건너야 했다. 

 

F.뵈클레는 『기초윤리신학』에서 그것을 ‘자유의지’의 실현, 자신이 하느님의 모상을 지닌 존재임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으로,  '자기정체성'에서 비롯된 ‘자기표현’ 이라고 말한다.

 

“소극적 의미에서의 자유의지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강박을 받고 있지 않은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나 적극적 의미에서의 자유의지는, 자기행동을 스스로 결정-선택하여 자기에게 줄 수 있는, 품위의 표현으로, 하느님 모상을 지닌 사람의 자기결정권의 행사, 자기 정체성을 아는 이들이 드러내는 자기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마태오21,33-43은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을 성찰하는 추상적인 고백들이 얼마나 큰 사건의 단초가 되는가하는 묵직한 메시지를 던져준다. 추상적 고백과 구체적 고백 사이에 처한 우리에게 건넨 진정한 은총의 초대라고 할 수 있다. 누가 주인이고 누가 소작인인지, 누가 창조주이고 누가 피조물인지? 이것은 두 주인을 섬기려는 배고픔과 두려움- 재물과 하느님, 권력과 하느님, 명예와 하느님, 게으름과 하느님, 무지와 하느님, 쾌락과 하느님, 자기우상과 하느님, 과거와 하느님, 무사인일주의와 하느님, 워크홀릭과 하느님...등등... 두 주인을 섬기려는 얇은 마음을 두드리며, 모든 것을 아시는 그분이, 어떻게 자연과 역사적 교훈, 사건과 사람, 이 우주를 총 동원해 <오늘> 우리 모두에게 <그대 삶의 빈 항아리에, '있는 나'로 인해 삶의 포도주가 넘치도록 채워졌는가?>라는 질문을 건넸다고 할 수 있다. 

  

 

글을 마치며,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38 그러나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39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 40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41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 하고 그들이 대답하자, 4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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