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네 겹의 충족이유율을 넘어(2), 마시지 않고 또 결코 마시지 않을 것에 취한 영혼이여!(로이스브루크)

나뭇잎숨결 2023. 9. 22. 07:07

 

철원 고석정에서, 분이가, 탱큐!

 

 

네 겹의 충족이유율을 넘어(2), 마시지 않고 또 결코 마시지 않을 것에 취한 영혼이여!(로이스브루크)

-연중25주,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를 중심으로

 

 

 

 

1. 한 여자로부터 버림받은 순간 시인이 되었고, 한 여자로부터 용납되는 순간 남편이 되었다(나태주)

 

 

나태주 시인의 등단 시 「대숲 아래서」를 읽어본다.

 

1.바람은 구름을 몰고/구름은 생각을 몰고/다시 생각은 대숲을 몰고/대숲 아래 내 마음은 낙엽을 몬다//2. 밤새도록 댓잎에 별빛 어리듯/ 그슬린 등피에는 네 얼굴이 어리고/ 밤 깊어 대숲에는 후둑이다 가는 밤 소나기 소리/그리고도 간간이 사운대가 가는 밤바람 소리//3. 어제는 보고 싶다 편지 쓰고/ 어젯밤 꿈엔 너를 만나 쓰러져 울었다/ 자고나니 눈두덩엔 메마름 눈물 자죽, /문을 여니 산골엔 실비단 안개//모두가 내 것만은 아닌 가을, 해지는 서녘구름만이 내 차지다/ 동구 밖에 떠드는 애들의/ 소리만이 내 차지다/ 또한 동구 밖에서부터 피어오르는 밤안개만이 내 차지다//하기는 모두가 내 것만은 아닌 것도 아닌/ 이 가을/ 저녁밥 일찍이 먹고 /우물가에 산보 나온 / 달님만이 내 차지다/ 물에 빠져 머리칼 헹구는 / 달님만이 내 차지다(1970)

 

 

등단 50년 후에 발표한, 「내가 너를」을 읽어본다.

 

내가 너를 / 얼마나 좋아하는 지./너는 몰라도 된다 // 너를 좋아하는 마음은 /오로지 나의 것이요 / 나의 그리움은 / 나 혼자의 것으로도/ 차고 넘치니까..../ 나는 이제 / 너 없이도 / 너를 좋아할 수 있다(2020)

 

나태주 시인의 「대숲 아래서」 와 「내가 너를」은 사랑이 그리는 어떤 궤적을 보여준다. 유치환 시인의 「바위」에서 「행복」에 이르는 포물선과 비슷한 사랑의 추이를 그리는 시다. 「대숲 아래서」 는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대상에 대한 소유의지에 바탕을 둔 시라면 「내가 너를」은 사랑을 사랑하게 된 비소유의지로 넘어간 사랑시라는 점에서 그렇다.

 

소유의지에서 비소유의지로 넘어가는 이 사랑의 포물선이 어떤 이미지를 취하는 전략적인 위장이라면 그 역시 다른 이름의 소유의지일 것이다. 비소유의지 조차도 망각된 지점, 그것을 로이스부르크는 『자전적 주제에 관한 15개의 변주곡』에서 “가장 감미롭고도 취하게 만드는 최상의 포도주여, 자유롭고도 취한 영혼이여! 자신조차도 잊어버린, 잊혀진 영혼이여! 마시지 않고 또 결코 마시지 않을 것에 취한 영혼이여!” 라고 노래한다.

 

 

 

 

남마리안나 수녀님께서 고맙습니다!

 

 

 

2. 향유의 원천을 자기 자신 속에서 더 많이 발견할수록 인간은 더 행복해진다(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에서 ‘행복하게 산다’라는 말은 ‘덜 불행하게’, 즉 그럭저럭 견디며 산다는 의미일 뿐이라는 가르침으로 시작해야 한다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이데올로기나 광적인 기쁨이 아니라 동양의 중용에 가깝다. 이것을 라틴어로는 ‘그럭저럭 살아가며, 삶을 견뎌 낸다’, 이탈리아어로는 ‘그럭저럭 헤쳐 나가라!’, 독일어로는 ‘헤쳐 나갈 방도를 모색해야 한다’ 또는 ‘그는 어떻게든 세상을 헤쳐 나갈 것이다’ 등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에 행복의 충족이유율이 놓여 있다는 것이다.

 

가장 좋고 가장 바람직한 것은 각자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고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것이 많을수록, 따라서 향유의 원천을 자기 자신 속에서 더 많이 발견할수록 인간은 더 행복해진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가 행복은 스스로 만족해하는 사람 것이다라고 한 말은 참으로 지당하다.

 

세상은 궁핍과 고통으로 넘친다. 그것을 면한 사람에게는 사방에서 무료함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게다가 세상에는 나쁜 것이 주도권을 쥐고 있고, 어리석음이 큰소리를 치고 있다. 운명은 잔혹하고 인간은 가련하다. 이러한 세상에 원래 지닌 것이 풍부한 자는 눈 내리고 얼음이 언 12월 밤에 밝고 따뜻하며 흥겨운 방에서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는 것과 같다.

 

우리의 실제 현실 생활은 열정에 의해 움직이지 않으면 지루하고 무미건조해진다. 하지만 열정에 의해 움직이면 곧장 고통스러워진다. 그러니 의지에 봉사하는 데 필요한 정도 이상의 지성을 부여받은 자만이 행복하다. 그들은 실제 생활 외에도 지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적인 생활은 지속적으로 그들을 아무런 고통 없이 활기차게 일에 매진하도록 해 준다. 지성이 의지에 봉사하는 일에 매달리지 않는 것만으로는 그러기에 충분하지 못하며 힘이 실제로 남아돌아야 한다. 그래야만 의지에 봉사하지 않고 순전히 정신적인 일을 할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예컨대 나의 철학은 내게 무언가를 가져다준 것은 없지만, 내가 매우 많은 일을 면하게 해 주었다.

 

그렇다, 삶의 노고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이 노년에는 위안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가장 행복한 운명을 타고난 사람은 정신적으로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그다지 큰 고통을 겪지 않고 살아온 사람이지, 대단히 큰 기쁨이나 엄청난 쾌락을 맛본 사람이 아니다.

 

생존 자체를 일종의 길 잃음보다 나을 게 없다고 본다. 생존에 대한 인식이 우리를 그러한 길 잃음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준다. 인간은 존재하고 인간인 한 이미 ‘잘못되어 있다’. 따라서 모든 개인도 자신의 삶을 굽어보며 대체로 ‘잘못된’ 상태에 있음을 발견하는 것은 당연하다. 인간의 구원이란 자신의 삶에 대한 일반적인 통찰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개별적인 경우에서, 다시 말해 자신의 개인적인 인생행로에서 삶을 인식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인생이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라는 오비디우스의 말은 좋은 표현이다. 하지만 인간의 일은 너무 애쓸 가치가 없다라는 플라톤의 말이 더 나은 표현일지도 모른다.

 

『쇼펜하우어의 행복론』은 독일인들의 폭넓은 사랑을 받으면서 이보다 앞서 30여 년 전에 출간됐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뒤늦게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행복론에서 쇼펜하우어는 행복한 생활을 위한 기술을 가르치는 지침을 ‘행복론’이라고 정의하면서, 형이상학적이고 윤리적인 논의에서 탈피하여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경험을 중심으로 자신의 행복론을 피력한다.

 

그가 제시하는 행복의 조건은 현실적인 충족이유율에 바탕을 둔 것이다. 첫째, 인간을 이루는 것, 즉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인격을 말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건강, 힘, 아름다움, 기질, 도덕성, 예지가 포함된다. 둘째, 인간이 지니고 있는 것, 즉 재산과 소유물을 의미한다. 셋째, 인간이 남에게 드러내 보이는 것, 즉 타인의 견해를 말하는 것으로, 그것은 명예, 지위, 명성을 의미한다. 넷째, 우리 자신에 관한 우리의 태도, 타인에 대한 우리의 태도, 세상 돌아가는 형편과 그 운명 등이 어떻게 행복과 연관되는지 설명한다. 이 네 가지를 충족 이유율을 고려한다면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행복은 현실에 대한 유연한 자기통제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3.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마태오 20,1-16

 

 

연중25주일,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라고 전하는 마태오 20,1-16은 주님 포도밭에서 일하는 것이 어떤 풍요로움인가에 대한 메시지를 전한다. 연중 24주일이 얼마나 무한한 것을 용서받았는가에 대한 성찰을 요구했다면, 연중 25주는 얼마나 헤아릴 수 없는 은총을 받았는지 대한 성찰을 요구한다고 할 수 있다. 용서와 은총은 우리가 바라보는 이 세계의 실재를 무엇으로 바라보고 있는지에 대한 비전과 닿아 있다.

 

하늘나라라는 포도밭에서 일꾼으로 일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성경에서 포도는 밀, 보리, 무화과, 석류, 올리브, 대추야자와 더불어 일곱가지 축복받은 식물에 해당한다. 포도는 팔레스티나 지역의 중요한 농산물이자, 한 그루에서 약 이천송이 이상의 포도가 달릴 정도로 풍요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 풍요로움은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축복의 상징으로 주로 사용되기도 했다.

 

마태오 20,1-16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주님 포도밭에서 일한다는 것이 어떤 은총인가를 생각해 보려 한다.

 

 

[1]하늘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다.(1, 2)

 

포도밭의 일꾼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팔레스티나 지역의 여름 기후는 고온 건조하고 비가 적게 내려 포도를 재배하기에 적합한 날씨다. 특히 비탈진 밭에 심겨진 포도나무가 평지에 심겨진 포도나무보다 더 풍성한 열매를 맺었고 그 맛도 풍부했다. 비탈진 땅은 표층에 수분이 적어 땅 속 깊이 뿌리를 뻗어 대지를 움켜잡아야 질 좋은 당분을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열악한 환경이 포도에게는 풍요를 가져다주는 조건이 되었다.

 

농부인 노아는 홍수가 끝난 후, 포도밭을 가꾼 첫 농부가 되었다(창세기 9, 20) 라고 시작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있는 곳에 늘 상징처럼 심었던 포도나무는 그들의 영적인 울타리의 상징이기도 했다.

 

하느님께 봉헌된 사람은 포도로 만든 것을 먹지 말라고 한다. 술에 취해 하느님께 봉헌된 자신의 소명을 망각할 것을 경계해서다.(근본주의적 입장에서 해석 주의) 그 취함조차도 봉헌하라는 말이다. 너는 앞으로 포도주와 독주로 마시지 말라, 그 아이(삼손)는 모태에서부터 죽는 날까지 하느님께 바쳐진 나지르인이 될 것이다(판관기13, 4, 7, 14) 남자든 여자든 자신을 주님에게 봉헌하기로 하고 특별한 서원을 한 사람 곧 나지르인은 포도나무와 열매로 만든 것은 어떤 것도 먹어서는 안된다(민수기6, 2-4)

 

포도는 그 자체로 봉헌물이 된다. 가나안땅으로 들어가기 전, 그 땅이 기름진지 메마른지 살펴보아라. 그 땅의 첫 과일을 가져오너라. 그때는 첫포도가 익는 철이었다(민수기13, 20)그들은 에스콜 골짜기에 이르러 포도송이 하나가 꿰어 달린 가지를 잘라, 두 사람이 막대기에 뀌에 들러 메었다(민수기13, 23)주님을 위한 향기로운 화제물로 포도주 한 휜을 제주로 올려야 한다(민수기15, 10)

 

포도는 나그네와 가난한 이들, 들짐승을 배려하는 자비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일곱째 되는 해에는 땅을 놀리고 가난한 이들이 먹게 하고 거기서 남은 것을 들짐승이 먹게 해야 한다. 너희 포도밭과 올리브밭도 그렇게 해야 한다. (탈출기23,11) 너희 포도밭을 남김없이 따들여서는 안되고, 포도밭에 떨어진 포도를 주어서도 안된다. 그것들은 가난한 이와 이방인을 위하여 남겨주어야 한다(레위기 19, 10)

 

포도는 구체적인 축복을 상징한다. 너희에게 주시겠다고 너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땅에서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등(,,,)복을 내리시어 불어나게 해주실 것이다(신명기7,13)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너희를 좋은 땅으로 데리고 가신다...밀과 보리와 포도주와 무화과와 석류가 나는 땅이며, 올리브 기름과 꿀이 나는 땅이다. 너희가 가진 것이 모두 불어날 때, 종살이하던 곳에서 이끌어내신 주 너희 하느님을 잊지 않도록 하라. 내 손과 능력으로 이 재산을 마련하였다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신명기8,7-20) 또한 너희는 포도밭에 다른 종류의 씨를 뿌려서는 안된다(신명기22,9)

 

아비가일은 건포도 백뭉치, 말린 무화과 과자 이백개를 서둘러 마련하다윗일행에게 주었다.(1사무엘25, 18)어떤 이집트 사람이 다윗일행에게 말린 무화과 과자 한 조각과 건포도 두 뭉치도 주었다(1사무엘30, 12)솔로몬이 살아 있는 동안 내내 유다와 이스라엘에서는 사람마다 자기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마음놓고 살았다(1열왕기5, 5) 주 저희 하느님 당신께서는 땅에서 빵을, 인간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술을 얻게 하시었다.(시편104,15)

 

포도가 달릴 줄 알았는데 들포도가 달렸다는 것은 우상숭배와 유배에 대한 징계의 의미를 지니기도 했다. 만군의 주 하느님 저희를 다시 일으켜주소서 당신께서는 이집트에서 포도나무 하나를 뽑아오시어 민족들을 쫒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습니다(시편80,8-13) 내가 그대를 처음 만났을 때, 이스라엘은 광야의 포도송이 같았다(호세아9, 1)이스라엘은 가지가 무성한 포도나무열매를 잘 맺는다. 그러나 그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들도 많이 만들고 땅이 좋아질수록 기념기둥들도 좋게 만들었다.(호세아10,1) 포도밭은 주 하느님께서 주신 땅, 저는(나봇) 포도밭을 임금에게(아합) 넘겨드릴 수 없습니다(1열왕기21, 1-16) 내 친구에게는 기름진 산등성에에 포도밭이 하나 있었네. 그런데 포도를 밟아도 그들은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미카6, 15) 사람의 아들아 포도나무가 다른 그 어떤 나무보다 숲의 나무들 사이에서 있는 덩굴보다 나은 게 무엇이냐?(에제키엘12,2)

 

새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출현을 예언한다. 만군의 주님의 포도밭은 이스라엘 집안이요(이사야5,1-7)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밭가는 이를 거두는 이가 따르고 포도 밟는 이를 씨뿌리는 이가 따르리라. 산에서 새포도주가 흘러내리고 모든 언덕에서 새포도주가 흘러넘치리라(아모스9,13)

 

포도주와 포도나무는 풍요로운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마르코 12,1-12)에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너희와 함께 새포도주를 마실 그날까지 이제부터 포도나무 열매로 만든 것을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마태오26, 29) “누구든지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 놓고 손님들이 취하면 그보다 못한 포도주를 내놓는데,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남겨 주셨군요”( 요한 2, 1-11)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나에게 붙어있지 않은 가지는 모두 잘라내어 불에 던져질 것이다.”(15, 1-15)

 

⒜~⒢에서 알 수 있듯, 포도는 풍요로움의 상징,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갈 약속의 땅, 가나안의 상징이었다. 즉 이스라엘 민족을 상징하고 가난한 이와 나그네를 배려하는 자비를 상징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포도를 가꿔 술을 빚어 각종 잔치와 제사, 축제에 사용하고, 목초지를 찾아 이동했던 유목민들은 포도를 말려 여행음식으로 사용하거나 협상과 친분을 맺을 때 주고받는 선물이기도 했다.

 

성서에는 363번 이상 나오는 포도, 포도밭, 포도주, 포도밭 주인은 예수님의 첫 기적이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사건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말해 준다. 그분이 아니라면 우리는 빈항아리와 다를바 없이 메마르고 척박한 삶을 산다고 할 것이다.  그러기에 포도밭에서 일한다는 것은 봉헌, 자비, 행복, 풍요, 기쁨, 축복의 상징이자, 하느님께 선택받은 민족 혹은 백성된 삶을 의미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가 하느님 나라의 상징인 포도밭에서 일할 수 있는 일꾼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그 자체가 큰 은총 속에 살게 된 것임을 의미 한다.(주님 포도밭에 성실한 농부가 되게 하소서!) 포도밭을 하늘나라에 비유한 이유는 인간은 세례에 의해 거룩한 포도나무가 되며, 하느님과 일체를 이루는 자는 그 풍요로운 말씀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퇴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12)

 

그렇다면, 이른 아침부터 포도밭에서 일한 일꾼들이 추복, 기쁨, 풍요로움에 방점을 찍은 것이 아니라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에 방점을 찍은 이유가 무엇일까? 나아가 그것은 이른 아침에 온 그들만의 문제일까?라는 점이다.

 

연중25주일,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라고 전하는 마태오 20,1-16은 바로 19장 앞절의 두 부분과의 맥락속에서 바라보아야 할 듯하다.

 

먼저,  예수님과 부자청년(마태오19, 16-26)과의 대화에서 “스승님,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에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야 하늘의 보물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슬퍼하면서 떠나간 사건과의 맥락 속에서,

 

그 다음, 그 상황을 지켜본 제자들이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답에 이어 ‘따름과 보상’(마태오19, 27-30)에 대한 베드로의 질문에 대한 부연 설명과의 맥락에서 바라보아야 할 듯하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19, 27)

 

베드로의 질문은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랐으니 언뜻 당연한 질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사후와 생전에 어떤 보상을 받게될 것인가를 설명한 후에, 하느님께 부르심을 받은 모든 이들에게, 즉 하느님나라의 포도밭에서 일하게 될 모든 이들이 어떤 은총을 받게 될 것인가에 대해 비유로 말씀하신다. 베드로가 듣고 싶어하는 대답과 베드로가 들어야 하는 대답이 비유로 이어진 것이다.

 

이는 세리였던 마태오 복음사가는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를 통해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 그 <무상의 은총론>을 우리에게 전한다. 이, 무상의 은총은 낮 시간을 대략 세 시간 간격으로 다섯 등분하여 점층적인 은총의 확장이 나온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은총의 양이 초점이 아니라 은총을 받아들이는 태도, 즉 기쁨과 충만이 달라졌다는 것이 초점일 것이다.

 

12절에 나오는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가 16절에 나오는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를 해명하는 구절로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부른 순서는 은총의 풍요로움이 무엇인가를 역설적으로 되짚어 보게 한다.

 

Ⓐ1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 2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다.

 

Ⓑ3 그가 또 아홉시쯤에 나가 보니 다른 이들이 하는 일 없이 장터에 서 있었다. 4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자, 5 그들이 갔다.

 

그는 다시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나가서 그와 같이 하였다.

 

Ⓔ6 그리고 오후 다섯 시쯤에도 나가 보니 또 다른 이들이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 하고 물으니, 7 그들이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하고 말하였다.

 

거시적 관점에서 Ⓐ~Ⓔ에서 <6시(이른 아침)-9시-12시-3시-5시>의 각기 다른 시간은 인류가 구원을 체험하는 어떤 시대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다. Ⓐ는 모세의 율법으로 주님 포도밭의 일꾼으로 일했던 유대인들의 하느님 체험이라고 한다면, Ⓔ의 5시에 포도밭으로 간 이들은 마태오복음사가를 비롯한 세리와 창녀, 이방인 등, 가장 늦게 구원의 은총에 합류한 아웃사이더들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른 아침에 온 일꾼이 문제삼은 1데나리온에 있지 않고, 품삯을 정하는 <합의>와 <정당>이라는 기준에 있다고 하겠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가 전한바대로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이사야55, 6-9)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비유라고 할 수 있다.

 

Ⓕ8 저녁때가 되자 포도밭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말하였다.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이들에게까지 품삯을 내주시오.

 

반복하지만, 여기서 주인의 입장에서, 품삯 계산법인 어느 시간에 오든 1데나리온이라는 똑같은 품삯이 문제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은총은 은총이지 그것은 자를 수 있거나 위치나 크기를 제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은총은 은총을 주시는 분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은총을 받는 이들 입장에서 <합의>와 <정의>가 합당한 기준인가가 진정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이 글의 초점이다. <합의>나 <정당함>은 계약당사자인 갑과 을이 동등한 위치였을 때 나올 수 있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품삯이라고 비유된 구원의 은총은 그 누구든, 무상으로 받은 선물이기 때문에 합의나 정당함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12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퇴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14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15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2절과 13절에는 일꾼의 품삯에 대해 <합의>라는 단어가 두 번이나 나온다. 이른 아침에 온 이들이 그들이 받을 품삯은 <합의>에 의해서라고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합의>는 무엇인가? 하느님이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계약이다. 그리고 9시 이후에 온 이들이 받을 품삯은 <합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주인이 정한 삯으로 <정당함> 이라는 것이다. 유다인들이 자신들이 받을 구원이 계약에 의한 것이므로 당연하고 마땅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렇다면 다른 이들이 받을 삯은 정당하겠구나, 라고 할 수 있을 때, 따라 나올 수 있는 대응관계의 용어다. 이는 우리가 받은 은총을 제대로 바라보았다면,  그분에게 받은 삯인 구원의 은총은 <합의> 일 수도 없고, 더구나 <정당함>일 수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베드로가 한 질문은 아직 은총이 무엇인가를 모르는 이들이 할 수 있는 질문을 대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마태오19, 27)

 

 

우리는 여기서 이른 아침 주님 포도밭에서 일한 일꾼들의 투덜거림에서 우리가 받은 은총의 이름이 무엇인가 성찰해 볼 수 있겠다. 투덜거림은 툴툴거림뿐 아니라, 카인이즘인 질투와 시기이며, 더 나아가 하느님이 아닌 다른 데 취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받은 은총은 행위에 대한 공로로 마땅이 받을만 하기에 받는 것인가? 아님 오후 다섯시에 온 사람처럼 믿음과 기다림에 대한 무상의 선물로 받은 것인가? 하는 점이다.

 

생각해 보자. 중동이든 어디든 인력시장은 새벽에 이미 일자리가 다 정해지고 그 때 일자리가 정해지지 않은 사람들은 인력시장을 떠난다. 그런데 9시, 12시, 3시, 5시까지 장터의 인력시장 근처에서 누군가 자신들을 사주기를 간절히 기다리며 서성이고 있었던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누구인가? 그리스도가 오기 전에 진정한 메시야를 애타게 기다리던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이른 아침에 포도밭으로 일하러 간 사람은 기다림을 모른다. 그분은 수고에 대한 응답도 해주시지만, 기다림에 대한 응답도 해 주신다. 그런데 그 응답의 삯은 누구에게나 1데나리온이었다. 그분이 그들을 사려고 지불한 십자가상 수난과 죽음의 대가는 인류가 이 땅에 존재하는 그 날까지 누구에게나 한결같이 1 데니라온으로 동일할 것이다. 1데나리온,  노동자의 하루 품삯만큼 우리는 그분 포도밭에서 일한 셈이다.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일이 아무리 어렵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받은 은총은 일만달란트 그 이상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렇기에 늦게 온 순서대로 품삯을 계산한 이유가 1데나리온에 있지 않고 이른 아침에 온 그들의 투덜거림은 그들 내면을 들여다보고, 솔직한 자기 이유를 바라보아야 하는 것에 초점이 놓이게 된다. 나는 모든 것을 바친 거 같은데 왜 하늘나라의 포도밭에서 일하는 것이 행복하지 않은 것인지? 라고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이들에게까지 품삯을 내주시오.' 에서 품삯을 받은 순서는 하늘 나라의 포도밭에서 일한 일꾼들의  기쁨과 충만과 감사의 순서라고 할 수 있겠다. 기다림이 크면 기쁨도 크다. 

 

그렇다면, 왜 이른 아침에 그분의 포도밭에서 일한 사람들이 하느님에게서 오는 그 충만과 기쁨을 누리지 못한 것일까?

 

이것은 인류역사가 그리스도의 은총을 체험해야 하는 당위성을 거시적으로 바라볼 수도 있겠지만, 미시적으로 우리 각자의 인생을 다섯 등분해 바라보면 그 답을 알 수 있다. 우리 역시 이른 아침부터 5시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균일하지 못한 영적 충만, 기쁨을 산다는 것이다.

 

이른 아침에 온 ‘우리’는 누가 봐도 이스라엘 백성이고 당시 유다종교인들이었을 것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역사 전체가 우리에게 준 교훈은 엄청나다. 그들은 하느님이 어떻게 우리 삶에서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시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그들은 하느님의 포도밭에 늘 일하고 있었지만 목마르고 배고팠다는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으로 인해 충족되지 않은 그 무엇에 끌려다녔다는 것이다. 그들은 바빌론 유배뿐 아니라 자기 안의 욕망의 유배때문에 갑절의 유배를 감당하며 늘 배고픔과 뜨거움과 허기에 시달렸다는 것이다.

 

이 부분이 신앙의 여정에서 우리가 성찰해야할 가장 중요한 포인트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만으로도 충만하지 않다면, 우리 역시 욕망의 유배를 경험하는 중이고, 광야 40년의 여정 중에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점이다. 나아가 하느님 안에서 말씀의 풍요로움을 체험하지 않은 이들이 전하는 복음에 과연 누가 귀를 기울일 것인가? 하는 것이다.

 

“애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루카15, 31-32)

 

이른 아침부터 포도밭에서 일한 그들은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큰 아들처럼 늘 하느님 곁에 있었으면서도 하느님으로 인해 만족한 삶을 살지 못했던 이들이다. 율법준수로는 결코 하느님 나라의 충만을 알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카나의 혼인잔치의 기적처럼 인생이라는 빈항아리에 그리스도라는 술이 채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른 아침에 온 사람은 일하느라고 뜨거웠다면, 5시에 온 사람은 기다리느라고 뜨거웠을 것이다. 그분을 따르는 삶이든 그분을 따르지 않는 삶이든, 사실 살아낸다는 생 자체는 뜨겁다. 어떤 뜨거움은 투덜거림을 유발하고 어떤 뜨거움은 인내와 감사와 기쁨을 낳는다.

 

시편저자는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사는 것이 유일한 기쁨이고 충만이라고 전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만 하늘나라의 풍요로움 속에서 행복하게 살 것이라고 전한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시편49, 6-20) 저는 일생토록 주님의 집에서 사오리라(시편22, 3) 주님께 청하는 것이 하나 있어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을 우러러보고 그분 궁전을 눈여겨보는 것이라네.(시편27,4) 주님의 집으로 가세! 사람들이 나에게 이를 제 나는 몹시 기뻤노라.(시편122,1)

 

반면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 포도밭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자기정체성이 없다면 공동선을 위한 거시적 관점은 관철될 수 없다는 점에서 영적 충만과 기쁨을 간직하기 위하여 그에 못지않은 영적투쟁을 수행해야한다고 당부한다.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서 권고합니다(2코린토6, 1-13)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거기에서 방탕이 나옵니다(에페소5,18) 자족할 줄 알면 신심은 큰 이득입니다(...)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디모테오1서, 6,2-12)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고 의로움의 갑옷을 입고 굳건히 서십시오.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위한 준비의 신을 신으십시오. 무엇보다 믿음의 방패를 잡으십시오. 구원의 투구를 받아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에페소6, 14-17)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필리비4,4)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앞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리비4,13)

 

성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마태오복음 강해』에서 하느님 일꾼들의 유일한 기쁨은 공동선에서 찾아야 한다고 전한다.

 

“공동선을 위해 사는 것만큼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은 없습니다. 바로 이 목적으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언변, 손과 발, 육체적 힘과 정신력 그리고 이해심을 주시어 이 모든 것을 우리 자신의 구원과 이웃의 선익을 위해 사용하도록 하셨습니다”

 

이렇듯, 공동선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가 자주 결핍에 시달리는 이유에 대해서 성찰하다 보면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라는 것은 우리 안의 어떤 충족-결핍 마인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포도밭의 일꾼으로 부름을 받은 삶을 성찰하다 보면 우리 역시 <이른 아침-9시-12시-3시-5시>의 구간을 오락가락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 이유는 그분 안에서 모든 것이 행복한 결말을 맺을 것이라는 사실을 완벽하게 믿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이유의 갈피 속에는 십자가와 죽음은 어렴프시 아는데, 부활을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고, 한 겹을 더 열고 들어가면 실재와 비실재를 혼동하기 때문이고. 또 한 겹을 더 들어가면 지난주에 살펴본 용서의 완성을 경험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용서는 우리의 시선을 그리스도의 비전으로 완전히 바꾸기 때문이다.

 

분명히 자신의 행복이 하느님 외에는 없고, 하느님의 뜻이 유일한 충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즉 다른 세상이 없음을 알면서도, 마치 다른 세상을 추구하는 듯, 살아서 구천을 떠돌며, 사막의 체험, 배고픔의 체험, 목마름의 체험을 수시로 경험한다는 것은. 하느님과 함께 있으면서, 하느님을 찾아 헤메고 있다는 것은.(연중26주 ‘두 아들의 비유’에서 보충) 자신이 아직 완벽하게 실재와 비실재를 살지 못하고 있다는 고백이기에 그렇다. 그것은 용서받은 눈으로 즉 그리스도의 비전으로 세상을 볼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쇼펜하우어가 전하는 현실주의자의 충족원리인, 네 겹의 충족 이유율을 넘어서지 못했다고 말 할 수 있겠다. 그로인해 누구에게나 한결같이 후한, 그리스도라는 이름에 취할 수 없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자기 내면의 욕망에 취했고, 세속에 취했기 때문이다.

 

바오로 사도는 제2독서에서 “사실 나에게는 삶이 그리스도이며 곧 죽는 것이 이득입니다. 나의 바람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필리비서1, 20—27)라고, 이 세상의 가치관에 전혀 취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해 고백한다. 이 육신 속에 머무르는 삶이 자신에게가 아니라 타인에게 유익하기 때문에 산다고 전한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 자체에 완전히 취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고백이다. 저 고백을 할때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를 믿어 영생을 얻겠다는 그 목적조차도 넘어선 것이 아닌가 싶다. 온전히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을 때의 기쁨에 대한 토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느님나라라는 포도밭에서 일하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완전히 취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일찍이 로이스부르크는 그 상태를 다음과 같이 고백한 바 있다.

 

포도주여! 마시지 않고 또 결코 마시지 않을 것에 취한 영혼이여!(로이스브루크)

 

마태오 20,1-16은 우리에게 무엇에 취해 사는지 묻는다. 현실에 취했는지? 욕망에 취했는지? 그분의 풍요로운 말씀에 취했는지? 어디서 오는 무슨 에너지로 아침에 눈을 뜨고 이 순례를 하고 있는지? 오늘, 어떤 충족과 충만을 추구하는지? 무엇을 행복이라고 생각하는지? 묻고 있다. 달리 말해, 하느님의 영이 엄존하는 것을 알고 있는지? 그리스도의 영의 에너지가 우리 삶 속에서 생생하게 현존함을 알고 있는지?를 묻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누릴 수 없고, 자기 것이 아닌 것을 가지고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글을 마치며,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1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 2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다. 8 저녁때가 되자 포도밭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말하였다.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이들에게까지 품삯을 내주시오.’ 9 그리하여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이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10 그래서 맨 먼저 온 이들은 차례가 되자 자기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다. 11 그것을 받아 들고 그들은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 12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하고 말하였다. 13 그러자 그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14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15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16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