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승희 작, <성모의 빛> (2013), 개포동성당 이냐시오홀에서
용서의 완성(2), 사유의 공백 속에서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받는 것!
- 연중24주,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를 중심으로
1. 그대의 사랑은 사랑을 그리워하는 사랑일 뿐이다(정현종)
정현종의 「사랑의 꿈」을 읽어본다.
사랑은 항상 늦게 온다/사랑은 생 뒤에 온다/그대는 살아 보았는가/그대의 사랑은 사랑을 그리워하는 사랑일 뿐이다/만일 타인의 기쁨이 자기의 기쁨 뒤에 온다면/그리고 타인의 슬픔이 자기의 슬픔 뒤 온다면/사랑은 항상 생 뒤에 온다/그렇다면?/그렇다면 생은 항상 사랑 뒤에 온다
풍수지탄(風樹之歎·風樹之嘆)은 효도하고자 할 때에 이미 부모를 여의고 효행(孝行)을 다하지 못하는 자식의 슬픔을 이르는 말로 늘 만시지탄 (晩時之歎)과 함께 다닌다. 만시지탄은 시기가 늦어 기회를 놓쳤음을 안타까워하는 한탄이다. 여기에 애모지탄을 함께 묶으면 지탄의 트라이앵글이 만들어진다. 애모(哀慕)는 죽은 사람을 슬피 사모함. 혹은 애모(愛慕)는 사랑하고 그리워함, 우리가 다 아는 절절한 애뜻함이다.
이번주 강의가 없는 시간에 <용서>를 묵상하며, 용서라는 화두가 깔려 있는 2006년도 스페인 내전과 영적 환타지를 결합한 『판의 미로-오필리아의 세 개의 열쇠』를 보았고, 베이비몬스터의 안무를 담당하는 리정의 안무철학, <몸으로 노래가 나오게 하라>고 말하는 그녀의 안무를 보았다.
비가 왔고, 친구의 부음을 들었다. 말문이 막혔다. 친구라고 했지만, 우리는 친하기에는 너무나 먼 당신이었다. 어떤 행위를 주고받은 관계가 아니라 "있음" 자체가 껄끄러웠다. 그냥 존재 자체가 까칠한 관계였다. 그녀도 나도 서로의 인생수첩에서 깨끗이 지웠던 이름이었다. 열정이 열정을 이해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 관계였다. 그런데 그녀가 레테의 강을 건너면서 강한 부재의 파토스를 던지고 갔다. 날 기억해!
정현종의 「사랑의 꿈」은 부재 앞에서 만나게 되는 아픈 진실에 대해 시와 잠언의 경계에서 득음을 전한다. 사랑 앞에서 우리가 누구였는지를 꼭 찝어 알려준다. 사랑은 항상 늦게 온다고 말하고 싶어하는 우리에게 아니거든, 사랑은 너보다 먼저 도착했거든, 이라고 말한다. 사랑이 늦게 온 것이 아니라, 너의 사랑의 크기와 넓이와 높이가 그 사랑을 알아보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진부하다는 이유로 생(삶)에 대해 진지하게 말할 기회를 피한다. 우리 몫의 사랑을 피하듯이 말이다. 시인은 그런 우리의 방어기제를 다음과 같이 역설로 해석해 준다. “사랑은 항상 생 뒤에 온다/그렇다면?/그렇다면 생은 항상 사랑 뒤에 온다”
사랑이 항상 생 뒤에 오고, 생은 사랑뒤에 온다면, 우리는 오직 사후적인 기억의 사랑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추억으로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감당하지 못하는 것은 오직 '오늘'의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기에 자탄이라는 것은 자신이 자신에게 준 시간의 무늬, 자기를 용서하는 것 뿐이라고 할 수 있겠다.
2. 용서는 오직 불가능을 행하기 위해서만 가능할 수 있습니다(자크 데리다)
사랑에 도그마가 있다면, 용서에도 도그마가 있을까? 사랑을 내일로 미루는 것, 사랑의 주체가 나라고 생각하는 것,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것..등등이 바로 사랑의 도그마라면, 용서와 화해를 동시에 이루고 싶어하는 조급증이 용서의 도그마는 아닐까? 예수님도 부활하시기 전, 용서와 화해를 동시에 이루지 못하셨기 때문이다.
용서에 대한 어떤 저서도 우리로 하여금 용서를 하게 직접 돕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용서를 하려고 몸부림친 이들의 경험이 담긴 사유를 통해, 용서에 앞서 사유를 넘어서는 연습을 해보는 것이다. 용서는 사유의 공백 속에서 진행되는 은총의 사건이기 때문에, 사유를 넘어서기 위해 사유의 극점으로 우리 자신을 최대한 끌어올려보려는 것이다. 사유의 변곡점으로 밀어올리려는 이 몸부림이 우리에게 용서를 가르쳐 줄지는 미지수임에도 우리는 완벽하게 용서하고 싶고, 완전하게 용서받고 싶다는 갈망을 갖고 그렇게 한다.
레테의 강을 건너는 이들이 마지막 당부하는 것은 자신의 말과 행위로 상처를 받은 이들에게 용서를 청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기도해달라는 부탁이 무엇인가? 이는 용서는 공백을 넘어선 곳에서 진행된다는 것을 또한 말한다.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다 끌어모아서, 축구선수가 축구공을 차기 전에 운동장을 몇 바퀴 돌면서 몸을 푸는 것처럼 사유를 넘어서기 위해 사유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분명코, 용서는 논리나 사유의 대상이 아니다. 사유는 이 땅의 언어고 용서는 하늘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용서의 완성은 화해에 있다고 바라본 이들과 용서의 완성은 오직 화해를 포기하는 것 뿐이라고 바라보는 이들의 사유 속으로 걸어가 본다.
①데나린, 쉴라린, 타애오린의 『너무 빨리 용서하지 마라』는 두 손으로 하는 '치유'와도 같은 화해까지를 다룬다.
너무 빠른 용서는 진정한 용서일 수 없다. 우리가 받은 상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다섯 단계를 모두 존중하는 마음으로 경청한다면 우리는 자신의 본질적 ‘진실성’을 회복하게 되고 따라서 용서의 창의적인 해결책도 자연스럽게 찾게 될 것이다. 『너무 빨리 용서하지 마라』의 저자 '데니스 린, 쉴라 린, 마태오 린.S.J' 세 사람은 엘리자베스 퀴블로 로스'의 죽음을 맞이하는 5단계'상태를 인용하여 용서의 5단계를 제언한다.
첫째, 내가 상처받았을 리가 없어라는 '부정'. 둘째, 내 상처는 그들 때문이라는 '화'. 셋째, 용서할 준비가 되기 전에 충족 조건을 제시하는 '거래'. 넷째, 내가 잘못해서 상처를 입었다고 여기는 '우울'. 다섯째, 이 상처를 통해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수용'입니다. 하지만 죽음을 받아들이는 5단계처럼 꼭 순서대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화를 내다가 현실을 부정하기도 하고, 우울에 빠졌다가 거래를 하기도 한다. 어떤 단계를 생략하기도 하고 한 단계가 오랫동안 지속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나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을 예수님의 가르침은 물론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기도를 포함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는데도 여전히 상처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면 어떻게 용서를 할 수 있겠는가? 상처를 입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대방이 자신을 짓밟도록 내버려 두는 수동적인 피해자가 되거나 복수를 함으로써 폭력의 악순환에 참여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너무 빨리 용서하지 마라』가 전하는 용서의 5단계 과정은 우리가 받은 상처에 대하여 『너무 빨리 용서하지 마라』는 좀 더 창의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 것을 제안한다.
용서는 오랜 시간에 걸쳐 일어난다. ‘용서의 5단계는 우리가 두 손을 내밀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한 손은 상처를 준 사람이 더 이상 그런 행동을 못하도록, 다른 한 손은 그 사람을 진정시키고 그에게 새로운 삶을 제시하도록 사용한다.’ 용서의 각 단계에서 가해자는 점점 더 가해자의 특성을 잃게 되고, 피해자는 점점 더 피해자의 특성을 잃게 된다. 이러한 일이 일어날 때 우리는 오 복된 죄여! 라고 경이로움을 경험하게 된다. 『너무 빨리 용서하지 마라』는 필자들의 경험담을 통해 용서의 5단계에 대한 깊은 내적 움직임을 들려줌으로써 우리가 진정한 의미의 ‘용서’에 보다 더 잘 다가기를 청하고 있다.
②버지니아대 에버렛 워딩턴 교수는 개인적 체험을 바탕으로 『용서와 화해』의 다섯 단계인 ‘REACH’로 제언한다.
버지니아 대학의 에버렛 워딩턴 교수는 어머니가 강도에게 살해 당한 후, 그 살인자를 용서하는 문제를 놓고 오랜 시간 자신과 씨름해 왔다. 그 결과 자신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연구과제로 삼아 용서를 연구하는 학자로 성장하여 누구나 용서의 본질을 체험할 수 있는 용서의 5단계를 발표했다. 과연, 어떻게 해야 용서의 문을 들어 갈 수 있을까? 용서의 다섯 단게를 이렇게 소개한다. 워딩턴 교수는 용서와 화해의 단계를 ‘REACH’로 전한다.
Ⓡ 상처를 다시 기억해낸다 (recall the hurt) 상처는 부인하지 말고 기억해내야 한다. 최대한 객관적으로 기억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 당신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에게 감정이입(empathize)을 하는 것이다. 감정이입이란 입장을 바꿔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것이다. 동정심을 느끼고, 연민이 생기고 심지어 사랑이 생기는 것까지 포함한다. 사랑하는 것은 말하기는 쉬워도 정말 힘든 일이다. 그래서 이 단계의 사람들은 자신이 용서해야 하는 사람의 관점으로 보기까지 적게는 4~5시간, 많게는 20시간 걸리기도 한다. Ⓐ 용서는 애타적(altruistic)선물이다. 애타심의 장점은 용서를 함으로써 자신을 자유롭게 하고, 정신을 건강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비록 상처를 입었지만 타인을 축복할 수도 있는 것이 용서가 주는 선물이다. Ⓒ 당신이 경험한 용서의 결정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commit) 사람들이 전념하는 것은 많다. 용서하려고 전념하고, 용서하려는 결정을 내리려고 전념한다. 그리고 감정적 용서를 경험하면 “이만큼의 감정적 용서를 했어요.” 라고 말하면서 결심을 바꾸지 않으려고 전념한다. Ⓗ 용서를 했는지 의심이 들 때마다 용서를 붙잡고 있는(hold on) 것이다.
용서란 말은 그리스어로 ‘놓아버리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상대방에 대한 분노로 자신을 어찌하지 못하고 과거에만 머물러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건 자신을 위한 일이 아니기에. 용서는 이타적인 행위 속에 자기애를 실현하는 길이라고 전한다. 여러분 놓아버리세요. 그리고 용서하세요. 나 자신을 위해….에버렛 워딩턴 교수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피해를 준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도록 용서의 다섯 단계를 가르친다. 그는 사람들이 이 단계들을 기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각 단계의 첫 글자를 이어서 만든 REACH를 사용하여 가르치는데, 용서에 성공할 수 있는 정도는 각자의 노력 여하에 달려있다. 용서는 가해자의 사과 또는 피해보상과 상관없이 피해자의 심중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가해자의 사과를 받았다고 용서가 쉬워지는 것도 아니다. 모든 용서는 타인에 대한 것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가해자에게 그런 큰 피해를 입도록 방치한 스스로까지 용서할 수 있어야만 진정한 용서가 일어날 수 있다는 데 초점이 놓여 있다.
③ 자크 데리다는 『용서하다』에서 만일 용서라는 게 있다면 오직 용서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하는 곳에만 용서는 있을 것이므로 . 용서는 불가능성으로 자신을 알려야만 한다
생전에 데리다는 자신을 무신론자라고 소개했다. 그런데 용서라는 주제를 말할 때, 그는 신을 끌어들인다. ‘용서’라는 주제에서 신을 끌어들인 이유는 데리다는 ‘용서는 선물’로 규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에 직면한다.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 용서라는 아포리아에서 출발해 ‘용서’라는 행위가 내포한 다른 여러 아포리아를 하나하나 짚어나간다.
여러 아포리아 중 하나만 예를 들어봅시다. 충분히 줄 수 없게, 충분히 환대할 수 없게, 제가 주는 현재와 제가 베푸는 이 대접에 제가 충분히 현존할 수 없게 하는 아포리아 때문에, 저는 주지 않아서, 결코 충분히 주지 않아서, 충분히 베풀거나 대접하지 않아서 항상 용서받을 일이 있을 것 같습니다. 아니, 저는 이것을 확신합니다. 기증에 관한 한 우리는 무언가 늘 잘못했고, 늘 용서받을 일이 있습니다. 주지 않아서, 충분히 주지 않아서 용서받을 일이 있다면, 우리는 또한 이 일로 자신이 유죄라고 느낄 수 있고 그래서 오히려 우리는 뭔가를 줘서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준 것 때문에 구하는 용서, 그리고 이것은 어쩌면 내가 준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상대에게 호소하는 일, 다시 말해 일종의 독, 무기, 주권의 확인, 더 나아가 강력한 힘의 실력 행사 같은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 아포리아는 더 심각해집니다.
유일한 잘못이나 범죄에 그 피해 당사자가 아니라 타인에게 사죄하거나 피해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그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을까? 바로 여기에 우리를 쉴 틈 없이 둘러쌀 수많은 아포리아 중 첫 번째 아포리아가 있다. 어찌 보면 바로잡아 회복할 수도 없고 되돌릴 수도 없는 악행을 저지른 자와 그 악행의 피해자가 된 여성이나 남성이 중재 없이 ‘일대일’로 대면한다는 조건에서만 용서를 빌거나 용서해줄 수 있고, 피해 당사자만이 용서의 요청을 들어주거나 거절할 수 있을 듯하다. 용서의 장에서 오로지 두 당사자만이 마주해야 한다는 여건은 이름 없는 피해자 전체, 때로는 이미 죽은 익명의 피해자들이나 그들의 대표, 자손 혹은 생존자들에게 어떤 공동체, 교회, 기관, 조합의 이름으로 집단적으로 구하는 용서의 의미와 진정성을 박탈하는 뜻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용서의 두 당사자 간 절대적 고립성, 더 나아가 거의 용서의 비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법적 권리, 징벌과 형벌, 공공기관, 사법적 전략의 지배에서 용서의 경험을 기이한 경험으로 만든다.
실제로 속죄 불가능으로 용서할 수 없는 것이 있는 지점, 용서는 불가능해지고 용서의 역사도 끝났다고 결론짓는 지점, 여기서 우리는 매우 역설적으로 용서의 가능성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런 지점이 그 기원이 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용서가 끝난 것으로 보이는 곳, 불가능해 보이는 곳, 바로 용서의 역사와 용서의 역사로서의 역사가 마지막에 다다른 바로 그 지점에서 오히려 용서가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용서라는 것이 있다면, 용서할 수 없는 것, 속죄할 수 없는 것만을 용서해야 하고, 따라서 할 수 없는 일만을 할 수 있다는 아포리아, 형식적으로 비어 있고 말라 있지만 집요하게 까다로워서 빠져나올 수 없는 아포리아를 ‘한 번 이상’ 검토해야 한다. 용서할 수 있는 것, 사소한 것, 해명할 수 있는 것, 누구나 쉽게 용서할 수 있는 것을 용서하는 것은 용서가 아니다. 이것이 데리다가 용서를 선물로 규정하는 이유다.
자크 데리다는 자신을 무신론자라고 생각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용서’라는 아포리아는 신이 없으면 성립될 수 없는 차원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데리다는 ‘용서(pardon)'라는 단어의 음절(par-don)에 포함된 의미를 성찰하면서 용서 행위에 포함된 논리적 난점들에 주목한다. 예를 들어 ’용서를 빌지 않는 자를 용서해야 하느냐‘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에서부터 ’피해자 각자가 아니라 집단을 상대로 용서를 구할 수 있느냐, 그럴 권리가 있느냐, 그것이 과연 용서의 의미에 부합하느냐‘는 문제, 피해 당사자가 아니라 피해자를 대신해서 제삼자나 국가가 가해자를 용서할 권리가 있느냐’는 문제, 유대인 학살처럼 ‘저지른 죄가 너무 커서 ‘인간의 한계’를 넘었을 때에도 용서가 가능하냐‘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철학적·윤리적으로 대답하기 까다로운 주제로 확대해 성찰을 전개한다.
용서 문제로 칸트의 사유를 확장하면, 이 중대한 논의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최소한의 가르침은 일반적으로 용서는 피해자만이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용서의 문제는 제삼자에 ‘의해’, 제삼자를 ‘위해’가 아니라, 반드시 가해자와 피해자 두 당사자 간에 혹은 둘의 대면에서 이뤄져야 합니다. 이것이 가능할까요? 둘만이 대면하는 일, 이런 단독 대면이 가능할까요? (...) 어떤 피해자가 근본적으로 용서의 장에 부재하는 경우, 예를 들어 그가 죽었다면, 우리는 이 피해자의 이름으로 절대 용서해서는 안 됩니다. 피해자들이 죽은 범죄를 두고 살아 있는 자들, 생존자들에게 용서를 구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그 가해자들도 죽었습니다. 얼마 전부터 공적인 분야에서 늘어나는 모든 광경, 공식적 참회나 사죄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그에 대한 하나의 접근이 바로 여기에 있을 겁니다.(...)용서는 오직 용서할 수 없는 것만을 용서합니다. 우리는 용서할 수도 없고, 용서해서도 안 되겠지만, 만일 용서라는 게 있다면 오직 용서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하는 곳에만 있을 것입니다. 용서는 불가능성으로 자신을 알려야만 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용서는 오직 불가능을 행하기 위해서만 가능할 수 있습니다.
데리다는 용서를 “교환도 조건도 없는 은혜로운 선물”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신에 의해 주어진, 또는 신적인 규정에 의해 계시된 선물이다. 이러한 순수한 용서, 은혜로운 선물이 인간의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조건 속에 들어 올 때 혁명을 일어난다. 그 순간 사태가 변화되고 효과가 발휘된다. 데리다에게 용서는 항상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제공하는 순간적이고, 기적적인 ‘선물’과도 같은 사건이다. 이러한 새로움 때문에 용서는 화해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데, 화해는 용서를 새롭게 계속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종결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정한 용서는 무조건적이다. 그에 따르면 용서는 변명할 수도 없고 용서할 수도 없는 자를 용서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용서는 용서를 위한 어떤 이유를 찾아서도 안 된다. 이런 용서는 적용에 있어서 보편성을 원칙으로 하고, 그러므로 어떤 불가능성이나 한계를 알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용서는 ‘광기어린’ 용서에 가깝다. 데리다에게 용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논리와 상식이 들어맞지 않는 역설을 발생시킨다. 일단 우리들에게는 용서 불가능한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용서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무슨 말인가? 만일 용서할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용서의 개념이 작용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들이 흔히 정말 용서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3.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오18,21-35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23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24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25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26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7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28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29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30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31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32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33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34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35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라고 전하는 마태오18,21-35은 용서받았음을 아는 것이, 용서하는 길임을 우리에게 전한다. 용서의 한계를 두지 말고 무한히 용서하라는 이 언명은 우리의 힘이 닿지 않는 곳까지 이르는 은총의 통로가 바로 용서라는 것을 말한다. 용서가 하늘의 문을 여는 열쇠라는 것을 말이다. 영성가들은 용서를 알지 못하고는 아가페를 알 수 없고,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알 수 없다고 단언하기조차 한다.
마태오18,21-35을 두 방향에서 생각해 보기로 한다.
[1]용서의 주체는 누구인가?
차라리 은총을 기억할 수 없다면 상처도 기억할 수 없으면 좋으련만 우리는 기억과 망각의 어떤 매커니즘 속에서 용서할 것으로부터 수시로 호출당하며, 압박당하며, 용서의 상황 속에 놓이며, 용서로부터 자유롭고 싶어한다.
‘용서’는 오롯이 ‘용서’해야 하는 사람의 몫이다. 과연 그런가?
22절을 읽어본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22절을 보면 데리디가 간파한 대로 용서의 주체는 오직 피해자라는 것에 혼란이 온다. 일흔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무한에 대한 요구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용서의 범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용서는 이유나 합당한 근거를 찾을 수 없는 곳에서 진행되는 은총의 사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부터 공소시효를 반대하는 사후보상의 원칙에 길들여진 우리에게 커다란 도전을 던진다.
23절을 읽어본다. "그러므로 하늘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23절에서 35절까지의 비유를 보면 우리는 누구나 갚을 길 없는 어마어마한 빚을 용서 받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누구나 알고 있는 말이고, 모든 기독인이 외우다시피 발설하는 말이다. 그런데 정작 용서를 하지 못한다? 그 비유의 내용을 정리해보면,
주인 <----A는 주인에게 1만 탈렌트를 빚진 상태 <-----B는 A에게 백데나리온을 빚진 상태다. 1탈렌트는—6,000데나리온(20년치) 노동자의 1일 품삵은 1데니리온, 오늘날 기준으로 A가 주인에게 갚아야할 일만 탈렌트는 금 삼십사만 킬로 정도에 해당된다고 하니, 금 한 탈렌트는 3억 원이라면, 그러니 A가 주인에게 갚아야 하는 빚은 3조원에 해당한다. 반면 B가 Ⓐ에게 갚아야할 빚은 100데나리온, 500만원이다. 누가 봐도 A가 3조원에 해당하는 빚을 갚을 길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A는 갚을 길 없는 그 많은 빚을 탕감받았다는 사실을 왜 망각한 것인가? 용서는 여기부터 스텝이 꼬인다고 할 수 있다.
3조원을 갚아야 하는 그는 누구인가? 바로 우리 자신이다.
윤리도덕적으로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세상이 규정한 용서의 범주에서 적극적인 악만을 악이라고 길들여진 우리에게,
탈렌트를 땅속에 묻어둔 채, 적극적으로 빛이 되지 않은 우리의 영적 게으름은 단연코 죄가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우리는 용서받을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의인이다, 아무리 털어봐도 용서받을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바리사이즘의 유령에서 벗어나는 길이 용서의 출발점이다. 우리는 창조주에게 3조를 빚진 A를 절대로 자신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기회있을때마다 자신의 희생을 부풀리고, 상처를 전시하는 피해자코스프레 속에 살고 있는 시대에 결단코 자신은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라고 생각한다. 용서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나 자신이 용서받아야할 대상이라는 사실과 맞닥뜨려야 한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기 어려운 것은 자신이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용서의 개념을 사람과 사람으로 국한시키기 때문이다. 사회, 윤리, 정치적인 모든 잘못을 세상의 윤리적 잣대로 재단하기 때문이다. 용서받아야하는 모든 것은 -사회 정치 역사적인 모든 것은 사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분리, 형이상학의 범죄로 수렴된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 용서는 은총의 사건으로 진행된다. 용서는 영적 사건이다. 제1,2독서 시편은 모두 우리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에 초점이 놓여 있다. 그래, 나 죄인이다, 라는 그런 고백적 차원의 냉소가 아니다.
(원한을 풀고 가지 못한 이가 셋째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고 구천을 맴돈다는 말은 단지 설화나 문학적 수사가 아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용서받은, 용서받을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까? 용서는 누가 누구를 용서하는 것인가? 라는 주체의 문제에서부터 매듭을 풀어야 한다는 것을 성서는 일괄적으로 전한다.
이미 인간의 역사는 용서의 역사임을 알 수 있다. 용서가 아니었다면 인간의 역사는 진행될 수 없었다. 인간의 역사가 용서의 역사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용서의 주체는 우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귀뜀한다.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과 그의 아내에게 가죽옷을 만들어 입혀 주었다(창세기3,21) 주님께서는 카인에게 표를 찍어주셔서, 어느 누가 그를 만나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다(창세기4, 15) 다시는 물이 홍수가 되어 모든 살덩어리들을 파멸시키지 못하게 하겠다.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드러나면, 나는 그것을 보고 하느님과 땅 위에 사는, 오갖 몸을 지닌 모든 생물 사이에 세워진 영원한 계약을 기억하겠다(창세기 9, 16) 소돔 성 안에 의인 쉰 명을 찾을 수만 있다면(...)마흔 다섯명을 찾을 수만 있다면(...)그 마흔 명을 보아서(...)서른 명을 찾을 수 있으면(....)그 스무명을 보아서(...)그 열 명을 보아서라도 내가 파멸시키지 않겠다(창세기18, 16-33)
그런데 그 용서받았음을 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요한복음 사가는 그 이유를 인간 스스로 용서는 할 수 없고 오직 성령의 도움을 받았는지의 여부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용서는 아오스딩 성인이 간파한 대로 신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신적 행위인 용서를 하지 않고는 하느님께 닿을 수 없다는 은총의 황금률과 만난다. 용서는 영안을 뜨는 것이다. 눈이 먼 상태로 빛이신 주님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네가 용서를 받으려 한다면 네가 용서를 하라는 것이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20,23)
부할하신 주님께서 평화-성령-용서를 연결하신 이유를 보면 용서는 인간이 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용서가 안된 상태에서는 평화를 알 수 없다. 잠시 용서해야할 상황을 망각한 것이지 주님이 주신 부활의 평화를 느끼낀 상태는 아니다. 그러니 마음이 아프고 몸은 절로 따라 무너진다. 설상가상이라고 할 수 있다.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인간은 결코 동료 인간을 용서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본인이 용서받은 상태임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교회는 단연코 용서위에 세워진 공동체다. 12사도가 그렇고, 베드로, 바오로도 그렇다. 바오로 사도가 무한한 은총의 원심력에 의하여 인간이 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 복음을 이방인에게 전한 이유는 그가 받은 용서의 크기를 말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글을 쓰는 사람도 주님으로부터 무한한 용서를 받았기에 천주학쟁이라는 비아냥을 무시할 수 있는 것이다.
용서에 대해 그 어떤 복음사가보다 더 예민한 영적 감수성을 작동했던 분이 루카복음 사가였을 것이다. 탕자의 비유,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 뿐 아니라 <죄많은 여자를 용서하시다>(루카7, 36-50)에서 용서의 어떤 표본, 메뉴얼을 제시한다. 이보다 용서의 기승전결을 하나의 화면에 담은 복음은 없을 것이다.
Ⓑ그 여자는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서,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루카7, 36-50)
한 죄많은 여자가 있다. 주님은 바리사이파의 집에서 초대를 받아 음식을 드시고 계신다. 식탁에 앉으신 그 주님앞에 한 여인이 나타나 용서의 퍼포먼스를 펼진다. 그 무례함 자체가 우리 사회에서는 용서받아야 할 일이다.
모든 이들의 질시와 경멸의 시선을 감당하며, 여인은 자신의 죄와 주님의 죽음에만 오로지 집중한다. <눈물-발-머리카락-발-향유>, 누군가를 용서하기 위해 한 20년 이상 몸부림친 사람은 알 것이다. 용서는 온 몸으로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눈물이 발을 적신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용서의 시작은 자신의 가장 비참한 처지를 알게된 상태를 바라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최후의 만찬전에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예수님과 오버랩되는 부분이다. 눈물은 위선으로도 꾸밀 수 없다. 누군가의 발을 씻을 정도로 눈물을 흘렸다면 그 여인은 얼마나 큰 비참의 강물을 건너고 또 건너 왔는가? 그것도 눈물로 누군가의 발을 씻어줄 정도로? 하필이면 왜 발인가? 발은 땅의 육체다. 땅에 무릎을 꿇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땅에 누워버린 상태라고 생각하면 된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여인에게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그분의 발을 닦아드린다? 눈물-발-머리카락, 위에서 아래로 자신의 비참함 때문에 누군가 앞에서 밸브라도 열려고 혹여 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그 눈물에 젖은 발을 다시 씻는다? 여기서 여인은 자기 고유의 식별기호를 없애고 있다는 것을 바라볼 수 있다. 용서는 자기를 지우는 몰아의 사랑이다. 나를 지우지 않고는 용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이것은 불가능의 가능을 타진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 자신 뿐 아니라 그 누구도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여인은 그냥 죄많은 여인이라는 기호일 뿐이다. 충분히 자신의 죄에 대해 익명의 흙이 되어, 바닥에 누울 정도로 울 수 있을 때, 자신이 흘린 눈물을 거슬러 그분에게 기어서라도 다가가는 행위에서 이미 자신이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그 다음 여인은 그분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바른다는 것에서 그를 알 수 있다. 여인은 이제 자신에게서 예수님으로 시선이 바뀐다. 자신을 옭아맺던 죄의 사슬에서 자유로워진 것이다. 이미 여인은 스스로의 죄를 용서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눈물-발- 머리카락은 자신의 죄의 크기에 해당한다면, 입맞춤-발-향유는 주님의 죽음의 크기를 의미한다. 여인은, 자신의 죄의 죽음 앞에서 주님의 죽음을 만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용서라고 할 수 있다. 용서는 예수님의 죽음을 만나는 사건이다. 나의 죄가 십자가에서 창에 찔려 마지막 한방울까지 쏟은 그리스도의 피와 물(죽음)을 만나 정화와 자비의 은총을 경험하는 시간이다.
이런 질문이 들 수 있다. 그런데 그 여인은 무슨 정보를 예수님께 드렸나? 음식을 먹는 초대장소에 느닷없이 나타나, 자신이 왜 예수님 발을 씻어줄 정도로 울었는지? 왜 머리카락으로 눈물에 젖은 발을 닦아드렸는지? 왜 발에 입맞춤했는지? 왜 향유를 그 발에 발라드렸는지? 여인은 아무런 설명도 정보도 제공하지 않았다. 그런데 예수님은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신다. 그 여인은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고 말씀하신다> <나아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편안히 가거라> 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통찰을 하게 된다. 여인의 죄는 분명 동료인간들 사이에서 벌어진 불협화음이었을 것이다. 또 죄라는 것이, 용서받아야 하는 상황들이 일방적으로 한 사람은 완벽하게 무죄한 피해자와 100% 유죄한 가해자와의 상황에서는 벌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 앞에서의 여인의 통회의 행위가 모든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이다. 여인과 예수님 사이에는 용서할만한 사건이 없다. 그런데 용서는 믿음이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그 여인이 바리사이파의 집을 나가 자신의 실존의 현장으로 돌아갔을 때, 상황은 어떠했을까를 추론해 보면 용서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하는 이유를 알게 된다.
용서 앞에서 어쩔줄 몰라하는 우리에게 여인은 아주 중요한 은총의 메시지를 전해준다. 용서는 반드시 동료인간들과의 화해를 담보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용서 앞에 있는 우리에게 영적 혁명에 동참하라는 요구와도 같은 주문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용서의 은총은 하느님과 여인(인간) 사이에서 이루어 졌다는 사실을 바라보아야 한다. 이것이 용서고, 곧 믿음이다. 그런 맥락에서 믿음은 그 자체로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그 인간을 용서하기 전에 어떻게 하느님이 용서할 수 있어요?"라고 울부짖던 영화 <밀양>의 절규는,
이 시대, 우리에게 던지는 용서의 파토스에 해당한다. 용서는 나와 그 인간 사이가 아니라, 용서는 나와 하느님 사이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가해자와 피해자로 나뉘어지는 동료인간끼리는 용서가 아닌 화해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땅에서 푸는 것은 화해고, 하늘에서 푸는 것은 용서다. 주님과의 사이에서의 용서보다 동료인간과의 화해가 더 어렵다. 주님은 우리에게 무한히 용서하라고 하신다. 너는 빛이기에, 빛을 살라는 것이다. 주님조차도 십자가상의 죽음으로 인류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지만, 그럼에도 인류와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인류와의 화해는 아직도 진행중이라고 할 수 있다.
바오로 사도는 이를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라고 전한다. 우리가 동료인간들하고 깨어진 관계조차도 하느님과 깨어진 관계로 바오로 사도는 바라보았다는 것이다. 하느님과의 관계가 깨어졌기에 동료인간들하고도 관계가 깨어졌다는 것이다. 이는 위의 창세기 인용문에도 그대로 나온다. 그렇다면 용서는 결과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 결과를 야기한 근본 원인에 대한 치유가 초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곧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면서, 사람들에게 그들의 잘못을 따지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습니다(...)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2코린토5, 11-21)사실 내가 무엇을 용서하였다면, 그리스도 앞에서 여러분을 위해 용서한 것입니다.(2코린토2.10)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에페소서4장32) 나는 그들의 불의를 너그럽게 보았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리라. 나는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히브리서8,12/예레미야31,34)
우리는 여기서 계속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용서의 문제가 왜 하느님께 지은 죄일까? 하는 것이다. 바오로의 다마스쿠스 체험-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다 빛으로 눈이 먼 사건- 주님은 누구십니까? 라는 질문에 네가 박해하는 사람은 바로 나다, 라는 것에서 동료인간은 바로 그분임을 바라보아야, 용서를 하려고 다른 방향을 시도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라고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다고 거듭 전한다. 그리스도의 죄의 대속은 그분을 믿는 우리가 나눠지는 대속의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누군가는 오늘도 지고가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게 하소서! (9월15일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미사 영성체 후 기도 중에서)
Ⓐ는 마치 사람이 용서의 주체인 것처럼 보이지만 성령을 통하지 않고는 용서할 수 없다는 점에서 성령이 용서의 주체임을 알 수 있다. Ⓑ와 Ⓒ에서 용서의 주체는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알려준다. 이는 인간은 용서의 대상이지 용서의 주체가 결코 아님을 알 수 있다. 용서는 결과에 대한 치유가 아니라 원인에 대한 치유이기에 그렇다.
[2]그렇다면, 용서와 화해의 관계는 무엇인가? 좀 더 생각해 본다.
위에서 인용했던 무신론자로 자처했던 데리다의 견해를 다시 읽어본다
"용서는 오직 용서할 수 없는 것만을 용서합니다.우리는 용서할 수도 없고,용서해서도 안 되겠지만,만일 용서라는 게 있다면 오직 용서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하는 곳에만 있을 것입니다.용서는 불가능성으로 자신을 알려야만 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용서는 오직 불가능을 행하기 위해서만 가능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역설적이게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을 때 ‘용서’라는 말을 떠올린다. 우리 각자 생긴 것만큼 마음의 모습도 다르기에 ‘용서’의 범위는 일반화 될 수 없는 것 같다. ‘나’에게는 아주 사사로운 일이 ‘너’에게는 굉장히 큰 상처일 수 있다. 살아온 이력에 새겨진 기억들에 따라 건드려진 것 또한 여진의 범위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함부로 다른 이에게 “그까짓 것 가지고 왜 그래?” 라고 말 할 수 없으며, “잊어버려” 내지는 “너 자신을 위해 용서해”라고 쉽게 얘기해서는 안 된다. ‘용서’는 오롯이 ‘용서’해야 하는 사람의 몫이기 때문이다. 누구보다도 내게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고 가슴에 품고 있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는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더 잘 알고 있다. 끊임없이 기회가 닿으면 고개를 내밀어 아무리 잊고자 해도 잊히지 않는 것이 숙명처럼 따라 붙어 고통을 안기고 있는데도 말이다.
용서로 마음과 몸이 서서히 무너지고 있는 이유는 용서와 화해를 동시에 바라기 때문이다.
성서에는 용서가 화해로 이루어진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로 나눠진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는데 있어 난관에 부딪히는 이유는 용서와 화해가 동시에 이루어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용서와 화해를 동의어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용서했다는 정신적인 보상, 대리충족만이라도 느끼고 싶어한다. 그런데 용서에서 곧바로 화해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용서하겠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빛속에 있게 하겠다는 수많은 선택지중의 하나의 선택이다. 그런데 우리와 용서로 얽혀있는 대상 역시 빛 속에 있고자 갈망하지 않는다면 화해는 보류된다. 그래서 용서는 불가피하게 누군가의 인내, 대속을 요구한다. 많이 인용했던 글이다.
하느님을 인내하는 것은 믿음이고, 나를 인내하는 것은 희망이고, 타자를 인내하는 것은 사랑이다.
여기서 용서는 이루어졌지만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 또 화해는 이루어졌지만 용서가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에도 용서는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를 생각해볼 차례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저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 34)
루카복음 사가는 용서의 근본을 십자가의 죽음 직전에 다시금 짚어준다.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용서는 우리가 용서하는데 큰 길을 열어준다. 주님은 지금 형이상학적 테러를 당한 상태다. 다른 그 누구도 아닌 하느님을 열렬히 부르는 사람들에 의해서 하느님 당신이 테러를 당한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변호의 기도를 아버지께 하셨다는 것이다. 우리 인생에 가해지는 테러는 모두 무지의 소산이다. 용서 앞에서 그 테러에 가까운 린치를 합리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용서는 마치 공사중인 건물 밑을 지니가던 사람이 위에서 떨어진 벽돌을 맞은 상황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길을 가다가 이유도 모른채 따귀를 맞은 상황과 비슷하다. 그런데 십자가상의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의 무지를 용서하고, 그냥 지나가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내가 진실로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42_43)
십자가상의 우도는 용서와 화해가 동시에 이루진 상태임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는 자신의 죄를 인정한다. 자신이 십자가형에 처할말큼 죄를 지었다고 생각한다. 세상의 잣대로 윤리적인 인과응보라는 것을 받아들인다. 그런데, 그는 그 윤리를 넘어서고 싶다. 그래서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갈 때, 기억해 달라고 청한다. 즉 우도가 청한 용서의 완성은 사후완성이었다. 우도는 이 세상에서 용서는 인과응보에 갇혀있다는 것을 간파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용서의 즉시성으로 그를 풀어준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라고 '오늘'의 용서를 말씀하신다. 여기서 용서를 내일로 미루지 말라는 용서의 법칙이 나온다. 이것은 죄많은 여인의 눈물과는 다른 차원의 용서가 이루어진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사후용서가 아니라 '오늘'의 용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다윗의 용서를 예로 든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용서의 선물이다. 다윗은 탕자의 비유의 작은 아들처럼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순간, 그에 합당한 보속을 면죄받은 대표적인 유형의 인물이다.
Ⓕ행복하여라, 불법을 용서받고 죄가 덮어진 사람들! 행복하여라, 주님께서 죄를 헤아리지 않으시는 사람!(로마서4,7-8/시편32,1.2)
바오로와 시편저자인 다윗은 용서, 그 은총의 즉시성을 경험한 인물들이다. 타인의 죄뿐 아니라 그분 앞에 자신의 죄를 갖고온 모든 사람들은 그 불법을 용서받았음을 알려준다. 통회하는 순간 용서는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용서는 용서 당사자 간에 이루어진 용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다윗이 죽인 우리야는 이미 용서의 맥락 속에서 다윗을 지나갔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용서, 대속이 나온다.
Ⓓ는 용서는 이루어졌지만 화해는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다. Ⓔ와 Ⓕ는 용서와 화해가 동시에 이루어진 경우에 해당한다.
화해를 통해 용서로 가는 과정에 놓인 관계도 있다. 용서의 주체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이들 안에서 이루어진 선택적 화해가 그것이다. 인간의 사랑을 믿지만 하늘의 자비를 믿을 수 없는 이들 안에서 이루어진 잠정적인 화해를용서라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아직 하느님과의 용서는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다. 그럼에도 용서한다. 화해의 메신저들이 실은 하느님의 메신저였다는 것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인간에게 감응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하느님과의 용서와 동료인간과 화해가 이루어지까지 우리 역시 대속에 참여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을 바오로 사도는 화해의 말씀이 우리에게 맡겨져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용서의 완성은 무엇일까? 모든 완성이 그렇듯, 용서의 완성도 우리가 모두 그 몫을 다하는 것은 아니다. 용서의 주체는 먼저 그분임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용서가 신적 행위인 것은 용서는 우리의 힘만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용서의 주체가 그분임에도 불구하고,우리가 그 용서를 온몸으로 받아들일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일만 탈렌트를 빚진 상태이고 그것을 탕감받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용서함으로써 비로서 용서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용서의 완성이다.
누구에게나 용서는 도전이고 혁명이고 눈물이고 상처고 고통이고 때론 죽음이다. 나는 다 용서해도 그 인간만은 절대 용서할 수 없다는 용서의 적정선을 정한다면, 미안하지만 아직 자신이 일만 탈렌트를 탕감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본인에게 용서해야할 부분이 크다는 얘기겠지만, 자칫, 그만큼 용서할 것이 크다면 2차가해자는 자신이라는 사실 또한 분명하다. 용서는 어떤 인간을 놓아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무엇보다 나를 놓아준다. 용서의 열매는 자유다. 용서할 것이 크다면 마음만 그것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그것을 함께 감당한다. 용서하지 않는 마음을 찾아오는 것이 분노고 체념이다. 분노와 체념은 몸을 조금씩 부서트린다. 외상이 아닌 내상은 거의 모두 용서의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타인에 대한 용서뿐 아니라 자기용서까지를 성찰해보면 그렇다. 타인이든 나든 용서하지 못할 때, 몸이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하고,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종합병원이 된다.
용서는 그렇기에 치유고, 빛이고, 믿음이다. 피를 흘리지 않은 백색순교다. 죄많은 여인처럼 바닥을 기어 눈물의 바다를 건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신이 주신 빛이겠습니다! 를 선택하는 파스카다. 세상이 온통 어둠이라고 나도 어둠일 수는 없지 않는가?
용서의 완성은 분명 화해다. 용서가 우리 힘의 범위를 넘어 있듯, 화해는 더욱 그러하다. 비유컨데, 용서는 골방에서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정립하는 것이라면, 화해는 대낮에 사람들과 함께 거리를 조율하는 것과 비슷하다. 따라서, 화해는 못했을지라도 용서는 해야한다. 용서는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를 정립하는 것이라면, 화해는 나와 이웃과의 관계를 정립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용서와 화해는 모두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자비안에서 이루어진다. 그것은 은총의 초대이고 기적의 경험이다. 용서는 사유의 공백 속에서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받는 것이라고 2023년에는 말할 수 있을 거 같다. 용서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 받는 것이다. 용서는 은총 중에 하늘로부터 받는 것이고, 화해는 빛 속에서 땅에서 푸는 것이다.
글을 마치며,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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