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이가 민둥산 갈대밭에서 탱큐!
사랑이 십자가는 아니지만, 십자가는 사랑이다(2)
-연중22주,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려야 한다”를 중심으로
1. 십자가는 사랑이다!
2021년 연중24주일(나해-마르코7,27-35) 묵상에서 [사랑은 십자가가 아니지만, 십자가는 사랑이다]는 글을 올린 바 있다. 그 글에서는 [사랑은 십자가가 아니다]는 명제를 먼저 생각해보았다, 이번 글은 [십자가는 사랑이다]는 명제를 먼저 생각해 보고, 그럼에도 하느님의 사랑은 십자가 사건으로 국한시킬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한다.
먼저 창세기 1장부터 시작한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창세기1,26)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창세기1, 27)
십자가는 창조의 사랑이 아니다. 어떤 실존의 결과물이다. 그런데, 십자가의 근원으로 돌아가면, 원인에 원인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면 그곳에 창조의 사랑을 만날 수 있다. 창조의 사랑 속에 있는 자유를 만날 수 있다. 자유의지의 남용, 그 뒤틀림이 실존의 충돌을 낳았다. 그렇기에, 십자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우리가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라는 선물이다.
십자가는 사랑이 무엇인지만 보여주는 것뿐 아니라 자유가 무엇인지를 계시한다. 십자가는 사랑과 자유의 관계를 보여준다. 사랑은 언제나 자유로운 두 존재들 사이에서 가능하다. 사랑이 인간의 본질적인 구성요소이듯, 자유 역시 인간의 본질적인 구성 요소다. 그런데 인간에게 선물로 주어진 자유는 인간이 자신을 유한자로 구성하는 요인이 되었다. 인간비극의 서막이다.
우리를 닮은 인간을 만들자!라는 창조의 사랑은 마치 유한자에게 주어진 자유처럼 오해된다. 유한자에게 자유가 주어졌다는 것은 의혹이다. 유한과 자유는 함께 동행할 수 없는 상태이기에 그렇다. 그렇다면 이 유한은 누가 준 것인가? 유한자에게 준 자유? 그 자유는 유한한 것처럼 보이기에 자유가 아니다. 여기서 유한은 인간이 선택한 결과라는 것부터 이해해야 한다. 사랑의 창조주께서 인간에게 자유를 준 것이 지고의 진선미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니라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되는 순간 인간은 죽음을 선택하여 스스로 유한에 갇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지고지선한 신은 악을 모른다. 그런데 인간은 자유의 다양한 쓰임 중에서 스스로의 선택으로 유한한 존재, 죽음에 갇힌다.
스스로에게 죽음을 주었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동시에 무한한 사랑과 행복을 추구한다. 인간은 유한자인 피조물의 상태를 스스로 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무한한 창조상태의 행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인간은 하느님을 지향하도록 창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말은 인간이 지닌 유한한 자유가 하느님을 상실했다면 완전한 충만이나 행복을 기약할 수 없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여기에 자유의지의 역설이 있다. 완벽한 충만을 추구하던 인간이 그 충만을 스스로 채울 수 없을 때, 즉 유한자로 전락한 인간이 스스로 무한한 사랑을 추구할 때, 실존의 역학관계로 인해 십자가는 만들어진다. 그 구원받지 못한 십자가는 사랑의 죽음을 만든다. 여기서 십자가는 바로 자유의지의 역설을 드러내는 축복과 죽음의 결절점이 된다.
그런 맥락에서 십자가를 창조의 근원에으로 소급해 바라보는 신학자들이 있다. 인간이 겪는 고통은 인간 존재의 유한성 자체에 근원을 두고 있으며, 창조 자체에 근원을 두고 있다고 바라보는 시선은 바로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로부터 그 원인을 소급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란 무엇인가를 해명할 수 있을 때, 십자가는 단지 인간의 고통이 아니라 신의 고통까지도 통찰된다고 본 것이다. 여기서 강생의 신학과 십자가 신학이 하나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인간이 자유의지를 창조의 질서에 맞게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었다면 굳이 신이 인간 역사에 개입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하는 점이다.
인간을 창조한 신이 인간의 고통에 무감각한 창조주가 아니라 인간 역사에 구체적으로 개입하고 계신 하느님, 신의 사랑의 자기구속성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다.
그러기에 십자가는 사랑의 사건이다. 이 사랑의 사건은 인간 구원을 위한 대속의 구원론적 관점에서 바라볼 것인가? 하느님과 하느님 사이의 관계론으로 바라볼 것인가?에 따라 십자가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러나 그 어느 관점으로 바라보든 그것은 사랑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사랑은 항상 고난당하는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은 십자가 사건을 창조에서 종말까지를 연결하여 바라본다. 인간 역사의 모든 파노라마를 인간 혼자 겪어내는 사건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위르겐 몰트만은 아우구스티누스, 에라스므스, 칼 라너, 보에티우스로부터 삼위일체론과 위격개념을 받아들여 삼위일체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십자가신학과 연결되는지, 구체적으로 인간역사 안에서 삼위일체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는지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골고타에서 일어난 십자가 사건은 하느님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미치며, 따라서 영원 가운데 계신 하느님의 삼위일체적 존재에 영향을 미친다"
칼 라너의 삼위일체론에서 하느님은 내적이며 동시에 경세적인 존재양태를 드러낸다는 것을 받아들여 몰트만은 경세적인 삼위일체의 극점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라고 바라보고 있다. 여기서 형이상학에 갇힌 정적인 삼위일체론이 아니라 인간 역사에 구체적으로 함께 하시는 역동적인 삼위일체론이 나온다. 십자가 사건을 인간의 죄를 대신하는 대속의 의미를 넘어서. 인간의 역사와 함께하는 임마누엘의 하느님, 즉 경세론적 삼위일체론을 구축한다고 본 것이다.
“삼위일체를 예수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 안에 있는 사랑의 사건으로 이해한다면 삼위일체는 결코 하늘에 있는 자기 폐쇄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비롯된 지상의 인간들을 위해서 개방된 종말론적인 과정이다"
십자가는 성부의 고통, 성자의 죽음, 성령의 탄식이 십자가 사건을 구성하는 사랑의 트라이앵글이라고 본 것이다. 그동안 인류는 십자가가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만 바라보았다. 그런데 동시에 십자가는 세 위격을 지닌 하느님 자신들에게 무슨 의미였나를 바라보아야 구원사의 큰 그림을 볼 수 있다는 견해다. 따라서 삼위일체론이 교리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전례주기에 맞춰 몇 번 가끔 조명할 차원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위르겐 몰트만은 십자가 사건을 칼라너의 삼위일체론으로터, 존재론적 삼위일체론에서 경세론적 삼위일체론을 구축하였음을 바라보았다. 십자가 사건 속에서 하느님이 예수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교회에 부여하여, 종말론적 하느님의 역사를 교회에 부여한다는 구원사의 총론이 나온다. 존재의 본질로서의 삼위일체적인 하느님의 존재양태는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에 의해 표현되고 있다는 견해다. 요한1서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요한복음에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는 것은 바로 상호침투- 상호관입의 하느님 안에서의 하나oneness라는 관점이다. (『십자가에 살리신 하느님』, 『삼위일체와 하느님 나라』)
이는 “그들도 우리 안에 있도록”(요한 17,21)에서 몰트만은 삼위일체 교리는 위격의 신비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신약성서 전반에 나타나는 십자가 사건의 요약이기에 구체적인 하느님의 역사하심으로 바라본 것이다.
경세적 삼위일체는 내세적 삼위일체이며, 그 반대의 경우도 사실이다(칼 라너)는 위르겐 몰트만에게 초기의 저서에서 동일성을 후기의 저서에서는 차별성을 전제한다. 아버지께서 늘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요한복음의 전언처럼 삼위일체 하느님은 인간 역사 안에서 늘 살아계신다. 인간 역사에 언제나 개입하여 살아계신 하느님은 성부-성자-성령(교회) 이라는 단 하나의 존재양식이 아니라 성자-성령-성부(창조), 성부-성자-성령(강생과 부활), 성령- 성자-성부(재림)으로 구체화하여 살아계신다.
하느님, 주님의 신적 위격들은 서로에 대한 관계성 속에서만이 아니라, 요한의 진술에서 보여주듯이(요한 복음16장, 17장의 긴 고별사) 성부가 성자 안에, 성령이 성부와 성자 안에, 그리고 성부와 성자가 성령 안에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로 존재한다. 서로 안에 위격들이 이러한 친밀한 내주와 완전한 침투이기에 십자가 사건은 하느님의 고난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의 고난을 의미한다. 성부, 성자, 성령은 십자가를 다르게 경험하고 사랑 안에서 ‘하나0neness’로 통합한다. 몰트만은 십자가 사건은 인성을 취한 신이 당신이 무한한 사랑의 신임을 경험하는 사건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성자는 게세마니의 기도처럼 성부의 버림 속에서 죽음의 고통을 당하지만, 성부는 성자의 죽음에 상응하는 성자의 죽음을 침묵함으로써 고난을 당하신다. 또한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해 간구해주시며 부활로 응답한다.(로마서8, 26-30)”
많은 신앙공동체의 일원이 의문시하는 것이 여기서 해명된다. 공생활 전반에서 함께 하신 하느님께서 게쎄마니아 동산에서 피땀 흘리는 그 시간에 당신 아들께 왜 침묵하셨는가?라는 질문이다. 몰트만은 그 침묵을 삼위의 위격의 차이에서 바라본다. 하느님의 침묵은 아들 죽음에 대한 수수방관이 아니라 강생이라는 육체를 지닌 예수만이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힐 수 있다는 사실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성부와 성령은 인성을 취한 존재가 아니다. 십자가는 인성을 지닌 실존의 역학관계에서 나타난 악이기 때문에 성자 홀로 그 몫을 감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십자가의 죽음은 강생하신 성자 예수만이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부와 상령은 육체의 고통으로써가 아니라, 창조의 고통에서 이를 함께 겪어낸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십자가 사건은 하느님의 죽음이 아니라 하느님이신 성자의 인성이 죽은 사건이라고 본 것이다.
“성부, 성자, 성령이 서로 안에 위격들의 이러한 친밀한 내주와 완전한 침투는 이것은 하느님의 고난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의 고난을 의미한다.”
여기서 몰트만은 인간이 겪는 십자가의 고통은 인간 존재 스스로 초래한 유한성 자체에 근원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창조 자체에 근원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여기서 “악은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도록 명하시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역설적 명제가 도출된다. 그 명제로부터 “사랑에는 오로지 무죄한 고난만이 존재할 뿐이다”는 몰트만의 사랑론이 나온다. 즉 사랑은 항상 고난당하는 사랑이다!는 결론에 결론에 이른 것이다.
그 고난당하는 사랑은, 인류가 원래의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그 날까지, 즉 원래의 은총지위를 되찾을 때까지, 항상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계속된다는 것이 십자가 신학이 우리에게 전하는 사랑과 희망의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십자가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2. 사랑은 십자가가 아니다.
타자윤리학의 철학자 레비나스의 사랑론은 사랑 자체의 사랑에서 찾는다. 오직 사랑은, 이해를 돕기 위해 유비관계를 동원할지라도 사랑 자체에 의미가 있으며, 사랑은 이미 몰아(沒我)를 전제하기에 타자에 대한 사랑뿐이라고 역설한다. 타자에 대한 사랑은 언뜻 타자를 위한 것처럼 보이나, 실은 자신이 사람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자신이 자신에게 확증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사랑은 십자가의 차원이 아니라, 아니 그 어떤 차원도 아니며, 더우기 실존의 차원도 아니고, 오직 존재의 차원일 뿐이라고 역설한다. 존재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기에, 사랑에서 사랑 아닌 그 어느 것도 구하지 말라는 영성가들의 사랑과 맥을 같이 한다. 그냥 사랑할 수 있는 심장이 있기에 사랑하는 것이라는 얘기다.
사랑자체를 사랑하지 않는 한, 사랑을 할 때는 사랑받지 못할 것을 감수해야 한다.(임마누엘 레비나스, 『존재와 다른 것, 또는 존재 사건 저편』
레비나스가 사랑이 존재의 차원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사랑은 이중적으로 구원이기 때문이라고 본 것이다. 자기로부터 자아를 해방시켜 준다는 점에서 그렇고, 자아의 자기만족과 자만심을 일깨워 준다는 점에서 구원이라는 것이다. 사랑은 이 세상에 한 존재로 ‘있는’ 이유에 해당하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다. 사랑을 행위동사로 보지 말고 그냥 명사로 바라보라는 것이다.
레비나스와 다른 맥락에서 사랑은 십자가 아니라, 그것이 행위동사일 때라도, 분명코 사랑은 행위동사이지만, 사랑은 십자가로 국한시킬 수 없다고 바라보는 통찰도 있다.
우리는 흔히 십자가는 무엇인가? 라고 물을 때 자신이 당면한 고통이라고 말하곤 한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현실에서 겪고 있는 고통을 십자가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창조의 사랑은 애초에 십자가를 전제하지 않는다. 영원 혹은 불멸의 사랑에 십자가는 없다. 부활후의 예수님을 보아도 사랑의 상처는 있지만 고통을 너머서 있다. 고통보다 더 큰 무엇이 사랑이라는 것이다.
헬렌 슈크만을 이를 “실재는 위협 받을 수 없고, 비 실재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사랑에 대립항이 없다. 실재는 대립항이 없다. 진리에도 대랍항이 없다. 그렇기에 인간이 실재를 알 때 고통과 상처에 방점을 찍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영원히 남아있을 것만이 실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기억하는 것은 그것이 사랑인가 아닌가의 차원일 뿐이다. 사랑만이 실재이고 사랑을 둘러싼 외적인 요소들은 가변적이기에 그것은 실재가 아니다. 사랑만이 영원히 남기에 사랑만이 실재다. 바오로의 코린토 13장과 연결하여 모든 것이 사라져도 영원 속에 남을 사랑이라는 실재를 앞에 두고 멈칫거리는 것이 스스로에게 고통과 갈등과 상처와 결국엔 죽음을 준다는 것이다. 그 어떤 누구도, 심지어 신 조차도 우리에게 고통과 갈등과 상처, 심지어 죽음을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에서 예루살렘 여인들을 위로하며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 때문에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 때문에 울어라(루카23,28)" 라는 의미에서, 또 바오로 사도의 통찰처럼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십자가에 못박혔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갈라디아6.14)"에서 실재를 선택한 것과 비실재를 선택한 것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난다고 보는 것이다. 인간은 환경에 언제나 정복 <당했다>는 피동형 인간이 아니다. 자신의 행복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라는 것에서 실재와 비실재로 갈린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에서 우리가 하는 사랑은 십자가와 함께하고 그것은 항상 고통과 함께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우리 각자의 실존의 조건 안에서 애주애인을 살아내는 것이 십자가라고 할 때, 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볼 차례다.
“십자가는 계시이다. 십자가는 아무 것이나 계시하는 것이 아니라 신과 인간을 계시한다. 십자가는 신이 누구이며, 인간이 누구인가를 드러내준다.”(요셉 라칭거)
라칭거 추기경은 『사도신경강해』에서 십자가는 ‘계시’라고 전한다. 신이 누구이며 인간이 누구인가를 계시한다는 것은 창조의 원래상태로 돌아가는 바로 자기 탈출이며, 다시 태어남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는 그 낳음이 바로 십자가에서 계시된 사랑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십자가의 구성원칙인 희생이 파괴가 아니라 사랑에 있다는 것이 초점이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이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요한13, 1)”에서 게쎄마니기도를 신에게 버림받은 또 다른 신의 절규가 아니고 지옥까지 확장된 사랑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역설이다.
나자렛 예수, 그분은 오직 사랑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나 하느님의 사랑에 잠겨있으면서 동시에 하느님께 버림받은 것 같은 실존의 고통을 경험할 때, 사랑과 사랑과 사랑의 거리는 하늘과 땅만큼의 거리에 비유할 수 있으며, 그것은 천국과 지옥의 거리이자, 마치 성전 휘장이 찢어지듯, 사랑의 양극의 폭이 찢어질 수밖에 없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랑이 지닌 운명이다. 사랑의 이 찢어짐은 파괴가 아니라 사랑이 지닌 운명이라는 데 초점이 놓여있다. 이것은 몰트만이 바라본 수난당하는 사랑이 아니라 하늘과 땅이라는 존재가 담겨있는 공간적 지형과 같은 것이다.
달리말해 그분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아니라 사랑에 못 박힌 것이라는 견해다. 십자가에 고통을 당한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의 존재의 구성원칙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고 바라본 것이다. 지난주 <너희는 나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의 질문은 실은 <너는 너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의 질문일 뿐이라고 바라본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가지고 온 평등한 인간 조건인 몸과마음과영혼 가운데 자신을 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분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과 닿아있다.
“실존을 확장하여 먼 것과 가까운 것을 일치시키고 하느님께 버림받은 듯한 인간과 하느님과의 연관을 지어지는 사랑의 폭이 중요하다. 사랑만이 고통에 어떤 향방과 의의를 준다. 세상에 갈라진 양극을 결합시키는(에페소2, 13)이 십자가의 궁극적인 지점으로 이것은 신의 사랑이 인간이라는 <최소의 것에 담김>을 보여준다.”
이것은 사랑에 대한 오해를 해소하는 것으로 사랑은 언제나 <최소의 것에 담김(contineri a minimo)>이야말로 사랑을 정의할 수 있는 유일한 규정이라고 본 것이다. 사랑은 스펙트럼한 사건도 아니고 더우기 날 잡아하는 이벤트도 아니다. 사람들이 사랑을 원하면서 사랑을 간과하는 이유는 사랑은 언제나 최소에 담기기 때문이다. 보리빵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이신 오병이어의 기적은 사랑이 최소에 담긴다는 것을 보여준 표징중의 표징에 해당한다. 사랑은 신적인 용어이자, 신의 <있음>을 규정하는 요건이다. 신이 있다, 없다는 오직 사랑이 있느냐 없느냐의 여부에 좌우한다. 신이 없다고 외쳤던 실존주의자들이 사랑을 추구하는 것은 자기모순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견해다. 사르트르와 보바르의 사랑이 바로 신이 있다는 증명이라는 것이다. 사랑을 인간이 하겠다는 것은 신이라는 무한이 인간이라는 유한에 담기는 것이기에, 따라서 담길 수 없는 데 담으려는 그 자체에 이미 사랑은 고통과 상처와 균혈이 필연적이고, 그것이 사랑이 지닌 운명이라고 본 것이다. 사랑은 인성에 신성을 담는 행위이기에 그렇다.
칼라너는 『영성신학논총』 왜 인간이 사랑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고통 아님 십자가인가에 대해, 십자가는 사랑이 아니라 고통으로 바라보는 것에 대해, 인간의 본성과 실존상황에서 야기된 인격을 좀 더 섬세하게 연결하여야 할 것을 요구한다. 본성과 인격의 관계를 통해서 이 사랑이 십자가를 넘어설 수 있음을 보여준다.
본성과 인격의 형이상학적 이원론은 고난이 가능하다는 존재론적인 가정이 된다. 순수한 본성은 자기를 반격해서 돌입하는 이 전체적 실제의 개입을 느낄 수 없다. 순수하게 유한한 인간도 고통받을 수 없다. 자유결정에 선행할 어떤 외적인 운명에 따라야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칼 라너)
인간의 순수한 본성은 고통을 모른다. 고통은 인간이 후천적으로 획득한 인격안에서 이루어진다. 실존의 모든 상황을 한 인격체가 겪을 때, 생의 조건인 십자가는 고통과 고난과 죽음이 된다. 여기서 고통의 허구성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의 이중적인 양극을 지닌 존재양식을 이해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인간이 원래 지닌 본성과 인간이 사회적으로 형성한 인격과의 관계는 인간 자체가 이미 자신 안에서 자신을 감당해야한다는 십자가를 내장하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외부적으로 주어지는 십자가 이전에 자신이 자신을 감당해야하는 십자가의 조건을 갖고 있다는 인간 이해다.
인간이 자신을 향해 육박해 오는 죽음의 현실성(유사 죽음의 형태들), 죽음의 가까움에서 자신을 인격이 아니라 본성을 기억할 때, 그는 인격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자기안에서의 자유는 바로 인격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한다. 자기가 만든 사회적 인격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인간은 외부에서 강요된 필연적인 운명이라 할 십자가를 자신의 자유로운 행동으로 수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알게 된다. 자신이 자신의 인격을 넘어설 수 있다는 가능성 앞에서만 인간은 죽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때, 죽음의 독침은 그를 찌를 수 없다. 죽음은 죽음이 아닌 것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엇엔가 저항하기 때문에 저항해야할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네>라는 수락은 자기로부터의 자유의 첫걸음이다. 자기로부터의 자유가 자유의 시작이다. 그리고 이것만이 종교적으로 온전한 봉헌이된다. 신은 우리가 행복하고 자유롭기를 원한다. 억지로 쥐어짠 사랑을 원하지 않는다. 온전한 자유의지의 발현이 온전한 봉헌이 되는 이유다. 신은 인간이 자신을 죄인이라고 인식하는 피조물의 상태를 원하지 않는다. 자신의 창조물답게 품위를 유지하고 신 앞에 당당하게 서기를 원한다.
그렇기에, 십자가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의미를 질문하는 것은 곧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의미를 질문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인간은 스스로 초래한 유한성의 결과인 죽음을 받아들일 의무가 있다. 그런 맥락에서 어떤 죽음이든 죽는다는 것은 가장 완전하고 가장 결정적인 신앙행위이다. 그것이 바로 순교의 영성일 것이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적 죽음을 미리 체험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수락, <네>라는 수용은 이 세상과 저 세상을 나누는 결절점을 무화시키는 초월의 행위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생존의 조건들, 십자가를 <네>라고 받아들일 때, 그 십자가는 고통이 아니라 다른 이름이 된다. 사랑은 십자가 아니다. 부활이다. 사랑은 오직 보시니 참 좋았다는 창조의 사랑만 있다. 다른 사랑은 없다. 그 사랑은 인간의 욕망, 인간의 유한성, 그 어떤 죽음으로도 가둘 수 없는 사랑이다. 사랑은 영원이고 불멸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사랑이다 - 사랑이 논리적으로 명제화 될 수 없는 이유다.
3.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려야 한다.> 마태오16,21-27
Ⓐ그때에 21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22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2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2말씀하셨다. Ⓑ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2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27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려야 한다.> 라고 전하는 마태오16,21-27((마르코8, 31-34/루카 9, 22)은 공관복음에 모두 실려 있는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 번째 예고에 해당한다.
지난주 마태오 16, 13-20절에서 보여준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상황과는 완연히 다른 충격과 반전 드라마에 해당한다. 대부분의 성서해설서는 예외없이 베드로의 권능의 메시야관을 일제히 비판한다. 비판하는 것은 쉽다. 비판하면 되니까.
그런데 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베드로가 더우기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를 고백한 상황에서, 십자가의 수난을 받아들일 수 없었는지를 먼저 물어야 할 듯하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을 그렇게 자명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인지? 더욱이 오늘 우리는 어떤 메시야관을 갖고 그분을 따르고 있는지?를 성찰하는 것이 더 초점일 듯하다.
(1)마태오16,21-27은 Ⓐ베드로의 메시아관--Ⓑ십자가신앙----Ⓒ부활신앙으로 연결된다. 여기서 먼저 짚고 넘어갈 부분이 우리를 놀라게 한 <사탄>이란 지칭이다. 베드로가 사탄이라면 누군들 사탄이 아닐 수 있을까?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기에 하느님의 자비가 없다면 누구라도 사탄일 확률이 높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23절)
제 십자가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자체가 사탄이 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이 강력한 경고, 사탄이 하는 일은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이라니? 이 세상에서 생존을 위해서 주어진 업을 하지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방향성을 묻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탄아! 라는 경고, 너는 나에게 장애물이라는 강력한 경고는 이천년전 베드로사도에게만 해당하는 경고였겠는가? 교회구성원 모두에게 너 자신의 십자가를 정말 알고 있는가? 알고 있다면 그것을 지고 있는가? 그것을 지고 내 뒤를 따르는가? 라는 엄중한 삼중의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세 개의 질문은 사랑은 어디서 왔다고 생각하는가로 모아진다.
그렇다면, 십자가의 수난이 왜 그렇게 예수님께 중요했던 것이었을까부터 생각해본다. 인류를 구원하는 다른 방법은 왜 없었을까? 인류가 경험하는 모든 형태의 죽음의 상태로부터 해방시켜,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 십자가 수난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체험하기 전에는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죽음의 의미를 모르면 당연히 부활은 알 수 없다. 그러기에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우리 역시 작은 죽음에 해당하는 십자가의 여정을 거쳐야 한다. 그래야 지금, 오늘, 이미 영원을 알 수 있다. 영원을 알아야 영원한 생명을 갈망할 수 있다. 아무리 영원한 생명일지라도 갈망하지 않으면 받을 수 없다. 육체의 죽음 다음부터가 영원이 아니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받는 그릇이 다름아닌 작은 죽음에 해당하는 십자가를 지는 일일 것이다. 우리는 그때만이 십자가의 근원을 창조의 사랑에서 찾을 수 있고, 우리에게 온 모든 사랑의 출처 역시 한처음부터 있었던 하느님의 사랑임을 바라보게 된다.
여기서, 신앙은 행위가 먼저가 아니라 믿음이 먼저다. 사랑의 실천은 감사의 행위다. 즉 우리 각자의 십자가를 지는 것은 감사의 행위다. 먼저 믿음부터 정립되어야 한다. 그 믿음은 우리가 받은 사랑을 바라보는 것이다. 우리가 받은 사랑은 어디서, 어떻게 왔는가? 그 사랑의 출처를 아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아는 것이고, 그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을 좌우한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영원한 생명으로 넘어가는 열쇠라고 할 수 있다. 베드로사도에게 주어진 열쇠는 바로 이 십자가를 지는지의 여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가 천국의 열쇠를 갖고 있는 있는지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제 십자가를 지고 그분의 뒤를 따라 영원의 문을 열었는지가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사탄은 대체 무엇인가?
‘사탄은 무엇인가? 사탄 (Satan)은 Saṭänä; 아랍어: شيطان, Šayṭān, Ge'ez: ሳይጣን Sāyṭān, 터키어: Şeytan)에서 따온 말로 ‘야훼’에게 대항하는 영적(靈的) 무리의 우두머리를 일컫는 이름이다. 그 사탄(하 사탄, Ha-Satan) 역시 같은 존재를 일컫는데, “고발하는 자”혹은 "참소하는 자" “대적하는 자” “방해하는 자” “분리하는 자”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신(사랑)과 인간을 분리시키는 자가 '사탄'이라 할 수 있다.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는 마음을 무화시켜 사랑의 출처를 왜곡하는 자가 '사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사탄'은 하느님을 믿지 않는 저 교회 밖의 사람들이 아니라, 사랑의 출처를 몰라, 제 십자가가 무엇인지 모르고, 영원한 생명의 메신저로 살지 않는 교회 안의 우리 자신에게 던져진 엄중한 질문에 해당한다. 영원을 갈망하지 않는 삶이란 무신론보다 더 무서운 무신론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생명을 모르는 '무지'야말로 진정한 사탄의 행위라고 할 수 있기에 그렇다.
이는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가? 베드로 자체가 사탄이 아니라, 신의 정체성을 ‘영원한 생명’에서 분리시키는 모든 종교적 카테고리에 대한 강력한 경고, 메시지에 해당한다. 사랑이 어디에서 왔는지 몰라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갈망도 없고, 자신이 이미 영적으로 죽었으므로, 그 누구도 도무지 살려줄 의사도 없는, 탈란트를 땅속에 깊이 묻어놓은 영적 게으름, 물신주의에 아부하는 영적 왜곡 그 모든 죽음의 상태는 사탄 혹은 안티-크리스트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2)예레미야와 바오로, 그리고 사도 요한에게 십자가는 무엇인가?
먼저 예레미아 예언자와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 1-25에서 말하는 몸과 영혼을 지닌 존재로 몸과 죄와 죽음의 관계, 율법과 자유의 관계, 이성의 법과 구속의 관계 속에서 소명이라는 십자가를 어떻게 졌는지 바라보아야 할 듯하다.
예레미야의 예언자(BC570-BC570)는 바빌론 유배를 겪는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격동의 이스라엘 역사와 함께 하면서, <주님의 말씀이 저에게 치욕만 되었습니다.> 라고 예언자로서의 사명이 바로 십자가임을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 내지 못하겠습니다.
예언자라는 사명(십자가)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는 자신의 태어난 날까지 저주했던 예언자였다. 언뜻, 예레미야의 탄식을 들어보면 왜 자신의 십자가를 힘들어 하지? 예언자 맞아? 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이를 바오로의 로마서에서 몸과 영혼을 지닌 존재가 이미 자신이라는 십자가를 지는 것임을 바라본다면,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처럼 울컥할 정도로 이해가 갈 듯하다.
예레미야는 외적인 이스라엘 역사의 질곡 안에서, 예레미야라는 자기 안의 십자가를 감수하며, 이스라엘의 바빌론 상황의 예언 뿐 아니라 예레미야31장,31-40에서 대사제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을 한다. 이는 최후의 만찬과 히브리인들에게 쓴 바오로의 편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바오로는 히브리서에서 모세의 계약을 완성하는 새계약으로, 대사제 그리스도가 단 한번 바친 십자가의 제사를 언급하여,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자신의 십자가를 질 수 있는지를 로마서 1-25를 연결하여 안내한다. 그를 바탕으로 그리스도공동체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히브리서 전반에 걸쳐 진술한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갈라놓습니다." (히브리서3,12)
바오로 사도의 간곡한 제언은 제2독서에서 아예, 이성을 법을 거슬러 죄를 짓는 이들에게 <여러분의 몸을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라고, 제언한다. 바오로 자신이 구체적으로 몸과 영혼을 지닌 바오로라는 십자가를 지면서 복음을 전파했던 제헌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권고한 것이다.
"여러분, 내가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 2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
몸을 바친다? 몸(죄와 율법, 욕망)이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몸(물질)이 영원한 생명의 그릇이 아니라는 것. 흔히 바오로 사도가 언급한 <몸>을 온 인격을 상징하는 포괄적 개념으로 바라보기도 하지만, 사실, 몸(육체)이라고 말해도 그 의미는 달라지지 않는다. <몸>이 어떻게 영원의 길을 방해하는지, 왜 죄의 율법, 구약으로 회귀하게 만드는지, 몸의 욕망을 너머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는 것이 그리스도가 없으면 얼마나 불가능한 것인지에 대한 토로가 절절하다. 그래서 몸 중심인 세속회된 교회는 그 자체로 예수님의 구원계획에 걸림돌이라고 할 수 있다. 바오로 사도는 거듭 코린토교회에 주는 메시지에서 <나는 내 몸을 단련한다>는 표현을 한다. 전교를 더 한다거나, 애덕을 더 베푸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나서,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으려 '몸을 단련한다'는 것이다. 몸이 영혼의 소통수단이지 생의 목표가 아니라는 것을 거듭 강조한것이다. 이는 우리 마음에 대한 성찰을 몸을 통해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목표가 없는 것처럼 달리지 않습니다. 허공을 치는 권투를 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 몸을 단련하여 복종시킵니다.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나서,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1코린토9, 26-27)
우리는 여기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바로 자기 <몸>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인신공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외적으로는 <몸>으로 상징되는 물신주의를 배격하고, 근본적으로는 죄와 율법, 욕망으로 회귀하게 만드는 마음을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제언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생존조건 하에서 애주애인을 하라는 제언이라고 할 수 있다. 몸(유한 한 것)을 섬기는 종으로 살지 말고, 영혼(영원한 것)의 주인으로 사는 자유인이 되라는 눈물겨운 자기경험에서 나오는 일침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바오로 사도는 복음이 쓰여지기 전, 십자가신학의 전체 그림을 통찰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서간문 전체에서 드러나는 바오로 영성의 실체가 바로 삼위일체 하느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느님이 주어일 때와 성령이 주어일 때와 예수그리스도가 주어일 때, 상황에 따라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을 자유자재로 넘나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오로의 다마스커스의 단 한 번의 체험에서 확실하게 예수님의 부활체험을 했다. 신앙은 체험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을 온 인격으로 이해하고 수용한다는 것은 바오로 사도의 경우를 보자면 삼위일체 하느님의 계시와 그것을 체험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다는 점에서 위에서 살펴본 몰트만의 십자가신학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십자가 신학은, 소명이기 앞서 이 땅의 현실이다. 인간 조건이다. 개인적으로 십자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내가 나의 십자가라고 말할 수 있겠다. 내가 지닌 인간의 조건인 몸과마음과영혼의 지닌 존재라는 사실이 이미 그 자체로 십자가라고 말할 수 있겠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나의 순례를 이 조건으로 감당하는 일이다. 우리는 육체적 현실과 영적 실재 두 개의 양극을 지니고 산다. 예레미야 예언자도 사도 바오로도 몸으로는 십자가의 죽음을 영혼으로는 부활의 삶을 지고 살았다.
그렇다면 사도 요한에게 '십자가'는 무엇인가? 사도요한은 예수님의 공생활 전반을 목격한 증인이다. 요한복음을 쓴 목적인 "예수님께서 메시야이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은 높이 들어올려져야 한다는 십자가 신학을 역설한다. 그 이유는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는다"(16, 7-8)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고 인류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애주애인의 정점을 볼 수 있다고 사도 요한은 반복해서 전한다.
사람의 아들도 들어올려져야 한다(요한3,14)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들음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요한8, 28)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한11,25-27)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14,6)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는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주실 것이다(요한16, 13) 내가 이 책을 쓴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야이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 41)
요한복음 전반에 걸친 삼위일체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십자가의 길은 필연적이다. 죽음을 넘어 부활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것은 십자가는 우리가 하는 사랑의 출처가 하느님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때문임을 분명히 한다. 그것이 요한복음의 집필목적인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이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만나를 내려준 분은 모세가 아니다"(요한6, 32-33)라고 사랑의 출처를 분명이 밝힌다. 모든 사랑의 출처는 오직, 아버지 하느님 한 분 뿐이시다. 이것은 모든 사랑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는 자유의 메시지다. 유대인들에게 하느님사랑에 대한 속박에서 벗어나는 길을 열어준 것이며, 오늘 우리에게 모든 사랑의 속박에서 벗어나 다시 사랑을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로고스다. 그것을 너희가 알려면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는다"(16, 7-8) 성령의 도음을 입지 않고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을 알 수 없고, 그 사랑을 알아보지 않고는 자신의 끊어진 영원을 이을 수 없다. 사도 요한이 전하는 십자가의 핵심은 네 생명은? 네 사랑은 어디서 오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십자가상에서 모든 것을 비운 예수의 사랑이, 사랑의 출처가 오직 아버지 하느님 뿐임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3) 이제 베드로 사도를 위시해 제자들이 십자가사건 이전에 왜 십자가를 받아들이기 그렇게 어려웠는지를 바라볼 수 있다.
세 번의 수난과 부활의 예고에서, 제자들이 방점을 찍은 부분은 수난이었다. 제자들은 몸이 겪어내야할 수난에서 멈춰, 더 이상 영원, 불멸, 부활로 진도가 넘어갈 수 없었다.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들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십자가를 부활과 연결하여 바라본다는 것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을 바라보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부활을 체험하고 성령의 역사에 자신을 맡기지 않고는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입니다!>를 결코 알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의 수난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의미를 풀어서 설명해 주신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2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예수님의 수난예고가 있을 즈음에 예수님의 인기는 하락 국면에 접어들었던 시기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예수님을 변함없이 따르고 있었다. 그리고 시계를 돌려 베드로 일행이 갈릴레아애서 고기를 잡았던 시간으로 돌려보면, 그들은 충분히 버리고 또 버린채 예수님을 따른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버렸음에도 그들은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외적으로는 버렸으나 내적으로는 버림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미 십자가를 충분히 지고 있으면서 십자가를 모르기 때문에 십자가를 더 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제자들의 사랑은 사랑을 받다가 지쳤고, 사랑을 하다가 지친 상태이다. 왜 그랬을까? 자신들이 무엇을 받았는지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받은 것에 초점이 맞춰진 상태였다면 더할나위 없이 행복했을 것이다. 이는 자신들이 했던, 그리고 받았던 사랑의 출처를 바라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도요한의 반복적인 진술처럼,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준 이는 모세가 아니라는 말(그 말은 사랑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를 변화시킨다. 사랑의 주체는 나도 당신도 아니라는 것. 그분이 우리를 통해서 사랑 자체이신 당신의 현존을 드러낸다는 것. 이것은 사랑의 자유다. ) 따라서, 오늘 우리에게 생명과 사랑의 근원을 바라보라는 제언에 해당한다. 우리가 했던 사랑도, 받은 사랑도 모든 사랑의 출처는 하느님이시다. 십자가의 출처가 창조의 사랑이라면 당연히 사랑의 출처도 창조의 그 사랑일 것은 분명하다.
여기서 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의 초점이 <자신을 버리고- 몰아(沒我)>인 이유를 알 수 있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자신이 했던 사랑을 잊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해야한다고 생각하고, 했다고 생각하니까 힘이 든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자신의 행위에 과장된 의미부여를 하지 않는 것과 같다. 사랑의 출처를 바라보면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면 했던 사랑도, 받은 사랑도 그분의 사랑이었음에 감사하게 된다. 사랑이 편안해 진다. 다시 말해 자기가 한 사랑을 자연스럽게 잊게 된다. 사랑을 하면서 자신이 무슨 사랑을 하고 있는지 의식하면 사랑은 힘이 들어가고, 어떤 무게감을 갖게 된다. 모든 행위는 그 행위를 의식할 때, 존재와 본성, 본질로부터 멀어진다. 사랑을 해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을 해서 불행하고, 그 사랑에 짓눌리게 된다. 그런데, 내 생명은 어디서 왔는지, 더우기 내가 한 사랑이 어디서 왔는지, 내게 온 사랑은 어디서 왔는지를 바라보면 사랑은 편안하고, 고맙고, 감사하고, 행복하다. 숨쉬는 것처럼 쉽다. 이것이 나를 통해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현존케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을 잊는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사랑은 예수님의 존재양식을 따라하는 것이다. 그것이 본성적으로 우리에게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망각한 상태다. 끊어진 상태다. 사랑의 출처가 어디인가? 를 기억하는 것은 본성이 우리의 정체성임을 아는 것이다. 본성이 아니라 사회적 인격이 우리 자신의 정체성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자주 사랑의 출처를 잊는다. 칼라너의 제언처럼 본성과 인격의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는 것은, <사람아 네 품위를 생각하라>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본성과 인격의 균형점은 사랑의 균형을 잡는 것과 같다. 즉, 본성(사랑)이 인격을 끌어갈 수 있을 때,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라는 바오로의 제언은 <그리스도를 현존케 하십시오>라는 말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사랑을 옷처럼 편하게 입으라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그리스도가 했던 십자가의 사랑의 뒤를 따라다간다고 할 것이다. 사랑의 출처가 그분이라는 것을 알면 그럴 수 있다. 그것이 하느님의 사람으로서의 품위일 것이다. 공생활 전반, 그리고 십자가에서 당신이 했던 모든 사랑을 아버지께 되돌렸던 그분, 그것이 그분의 뒤를 따라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베드로는 두 번째 수난과 부활 예고 이후, 부자청년이 가진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준 다음 나를 따르라는 말 때문에 슬퍼하면서 떠난 이후,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을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태오19, 16-26)”에 이어 복음사가는 다음과 같이 베드로의 질문을 다시 구성한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마태오19, 27-30)
베드로의 <따름과 보상>에 대한 질문도 사실은 사탄시리즈 2에 해당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질책하거나 분노하시지 않고 현세적 그리고 영적으로 엄청난 보상이 따를 것이라는 약속만을 하신다. 아마도 예수님은 수천번을 수난과 부활을 예고한다해도 제자들이 부활과 성령을 체험하기 전에는 결코 예수님 당신이 누구신지, 하느님이 누구신지 알 수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간파하셨을 것이다. 베드로의 세 번의 <나는 저 분은 모른다>는 배신은 하루아침에 돌출된 즉흥적인 행위가 아니다. 나는 저분과 아무런 연고가 없다는 <모른다>가 아니라, 진정 나는 저분이 왜 메시야인줄 아직은 <모른다>의 포인트가 누적된 것이다.
베드로의 <나는 저분을 모른다>는 고백은, 나는 사랑의 출처를 모른다는 고백에 해당한다. 교회의 수장인 베드로가 인류에게 준 역설적 축복에 해당한다. 반면교사다.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의 제자교육에서 퍼백트 A+를 받았다면 사실 우리가 설 자리가 없다. 한스킹의 신랄한 교회론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베드로 덕분에 우리는 교회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어떤 <모른다>의 상황에도 놀라지 않을 강심장을 갖게 된 것이다. 실망과 절망은 교만이라는 것까지도 알게 되었다. 우리도 언젠가는 오롯한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 자신을 포함한 환상과 거짓과 위선을 용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 모두 삼위일체 하느님의 자비 안에서 사랑을 배우는 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베드로를 비판하는 것도, 세상과 구별되지 않는 세속화의 길로 가고 있는 교회를 비판하는 것도, 물신주의의 세상을 비판하는 것도, 비판으로는 그 어떤 변화도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나 자신에게 그래 좋아, 네 말처럼 교회도 썩고, 세상도 온통 다 썩었다치자, 그럼 너는 어떤가? 너는 삼위일체 하느님사랑에 오로지 집중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네가 했던, 네게 왔던 그 사랑은 누구의 것인가? 네가 지고갈 십자가가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 아나라 몸과마음과영혼을 지닌 네 자신이 너의 십자가라는 것을 알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 답해야 한다. 네가 나눌 사랑이 보리빵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한사람의 오롯한 성화는 적어도 오천명의 영혼을 책임지고도 그 사랑의 조각이 12광주리가 넘는 것이라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오병이어의 기적에서도, 분명 보리빵다섯개와 물고기두마리는 어떤 소년이 내놓은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기전 소년에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감사를 한다는 것이다. 좀 매정해 보이고 이상하지 않나? 이것도 이스라엘 백성이 먹은 '만나'와 같은 연장선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사랑의 출처는 하느님이시라는 것, 예수님의 사랑은 일관되게 하느님 아버지로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이 기적의 원리인 사랑의 능력이다. 그때, 이름도 모르는 어린 소년은 모세처럼 사랑의 메신저가 된 것이다. 이것이 그분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사랑의 자유다. 사람끼리 칭찬과 영광을 주고받다 멀어지는 그런 사랑이 아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을 오로지 안다는 것은 인간의 육체적 시선으로는 알 수 없다. 영의 눈이 떠져야 사랑의 출처를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의 비전으로 세상을 볼 수 있어야 이 세계의 궁극적인 작동원리를 알 수 있다. 그것이 바오로 사도의 제언, 몸을 단련하고, 몸을 제물로 바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내 앞에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들을 육의 눈으로 보지 않고, 그리스도의 시선으로 보겠다는 선택, 이 또한 성령의 빛으로만 가능하다. 그 빛 속에서 내 생명은 어디에서 왓으며, 그 사랑이 어디에서 왔는가를 알고 그 사랑이 최소에 담긴다는 것을 알 때, 그때 내가 한 모든 사랑, 나 자신 조차도 잊을 수 있다. 소유나 행위가 아닌 오직 존재상태에서 사랑했으므로 진정 행복했음을 알게 된다. 네 믿음이 너를 살리듯, 사랑의 보상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인용했던 성서를 다시 묵상해 보면 어떤 글에서 <예수님은 절망을 모르는 현실>이라고 했던 통찰은 진리임을 알 수 있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이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요한13, 1)”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 때문에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 때문에 울어라(루카23,28)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십자가에 못박혔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갈라디아6.14)"
삼위의 위격에 머문 사랑이 아닌 이 땅을 향한 삼위일체 하느님이 우리에게 알려준 사랑에 절망은 없다. 그러기에 십자가는 사랑이지만, 사랑이 십자가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위의 논의를 종합해,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생존의 조건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따라 애주애인을 하는 것이 우리 각자가 지고 가야할 십자가이며, 엄밀히, 몸과마음과영혼을 지닌 나라는 존재 자체가 이미 십자가를 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십자가를 지는 과정에서 고통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잘 성찰해보면 고통이 중심이 아니다. 예컨데, 사랑의 출처를 안다는 것은 행복 중에 행복이고, 기쁨 중에 기쁨이고, 자유 중에 자유라고 할 수 있다. 창조의 근원, 그 총론을 보았기 때문이다. 고통은 시야가 좁아져 총체적인 그림을 볼 수 없을때 가중된다. 사랑이 모든 인간의 본성이자,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예컨데, 상대가 내가 했던 사랑을 알아주었는지, 받아주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그 사랑의 출처는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한 사랑이 상대에게 제대로 전달되었다면 그건 보너스다. 전달되기는커녕 오히려 뼈아픈 아픔으로 되돌려졌다면 그것도 참 좋은 것이다. 사랑이 원래 있던 자리로 간 것이기에 그렇다. 하늘과 땅이 사랑의 증인이 된 것이기 때문이다. 거듭 반복하지만 사랑의 출처는 사람이 아니고 하느님이시다, 그리고 사랑 자체가 사랑의 보답이다. 십자가의 사랑은, 우리에게 온, 우리가 했던 모든 사랑이 어디에서 왔는가를 예수님은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그런 맥락에서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르고자 <네!>라고 수락할 때, 그것은 생존의 무거운 짐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문을 여는 축복의 열쇠가 된다. 거듭말하지만 베드로 사도에게만 하늘나라의 열쇠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이미 이 땅에서 하늘나라의 열쇠가 주어져 있다. 그런데, 내가 열어야 하는 문은 내가 열어야 한다. 그 누구도 나 대신 그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우리 각자 해야할 몫의 사랑이 있다는 것이다.
누구나 자신이 지고 가야할 십자가가 가장 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십자가의 크기와 무게는 우리가 지고 갈 만큼 주어진다. 우리는 예수님이 지고가신 그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실존의 십자가를 지고, 나라는 십자가를 지고, 애주애인을 하며 그분을 따르는 것이다. 십자가의 크기가 다르게 보여도 그 지는 무게는 같다. 내가 십자가를 지고 가느라 쓰러지고 힘들 때 나 혼자 걸었던 것이 아니라, 나를 업고 그분이 걸었거나, 혹은 내가 어린 아이인 그분을 업고 물을 건넜다는 것을, 크리스토포로스 성인이 받은 메시지에서 힘을 얻기를!
“너는 지금 전 세계를 옮기고 있는 중이다. 나는 네가 찾던 왕 예수그리스도이다!”
마태오16,21-27의 수난과 부활의 첫 번째 예고가 주는 축복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엄청난 은총의 초대다. 이 긴 글을 읽으신 모든 분들이, 우리의 생명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기를! 그리하여 사랑의 출처가 어디인가를 분명히 알기를!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그분의 뒤를 따르기를!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이 주시는 사랑을 넘치도록 받기를! 그리하여 그분 현존의 메신저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글을 마치며,
그때에 21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22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2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2말씀하셨다. 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2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27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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