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채색과 윤색을 거쳐, 대화적 현존으로
-연중20주,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를 중심으로
1. 정호승,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
나는 희망이 없는 희망을 거절한다/희망에는 희망이 없다/희망은 기쁨보다 분노에 가깝다/나는 절망을 통하여 희망을 가졌을 뿐/희망을 통하여 희망을 가져본 적이 없다//나는 절망이 없는 희망을 거절한다/희망은 절망이 있기 때문에 희망이다/희망만 있는 희망은 희망이 없다/희망은 희망의 손을 먼저 잡는 것보다/절망의 손을 먼저 잡는 것이 중요하다//희망에는 절망이 있다/나는 희망의 절망을 먼저 원한다/희망의 절망이 절망이 될 때보다/희망의 절망이 희망이 될 때/당신을 사랑한다
정호승의 「나는 희망을 거절 한다」 는 시는 거짓 희망, 희망고문을 유포하는 희망의 신화를 넘어 진정한 희망에 도달하고픈 시인 자신의 갈망을 대변하는 본질적 희망론에 관한 시다.
<희망에는 희망이 없다>는 전제로부터 이 시는 시작한다. 즉 절망을 거치지 않은, 절망을 통과하지 않은 희망은 희망고문이자 희망의 신화이자 진정으로 인간에게 걸어갈 힘을 주는 희망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희망은 세계를, 내일을 향해 걸어갈 수 있는 힘이다. 그 힘은 절망을 극복한 힘에서 온다는 것이 화자가 바라보는 희망의 지평이다. 하여, 화자는 <희망의 절망이 절망이 될 때보다/희망의 절망의 희망이 될 때> 비로서 당신(세계)을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한다.
시간 밖에서의 희망은 절망을 넘어설 수 없을 때도 희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실존의 현장에서 실현된 것을 보지 못하고 약속만을 믿고 떠난 이들의 희망이 있기에 그렇다. 그러나 시간 안에서의 희망은 절망이 희망을 견인하는 지렛대의 원리가 되어야 한다.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는 후자에 방점을 찍으면서, 희망고문이나 거짓 희망에 휘둘리고 싶지 않은, 절망 속에서 일어나 걸어갈 수 있는 힘에 대한 갈망의 기도라고 할 수 있겠다.
2. 타자는 나보다 더 나를 잘 보며, 매 순간 나를 넘어서는 존재다.(미하일 바흐친)
진리는 대화라는 상호작용에서 태어난다. 그리고 희망은 언제나 그 대화적 상황에서 건져낸 것이라고 말하는 미하일 바흐친의 생각을 들어본다. 오늘 우리 입에서 발화된 말의 출처를 일일이 밝힐 수 없지만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진리는 이미 누군가로부터 진리로 발설된 말들이었다.
미하일 바흐친(1895-1975)은 『민중언어와 장편소설』, 『말의 미학』에서 대화적 상상력과 카니발 이론을 통해서 말의 미학에 접근한다. 민중의 언어는 왜 몸의 언어에 가까운가?를 라블레나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분석하면서 극단적인 카오스상태를 과감하게 형상화했다고 평가한다. 카오스를 겪은 코스모스, 그것이야말로 언어의 카니발이라고 말한다. 바흐친은 대화와 카니발의 핵심을 몸에서 말, 행위에 이르기까지 ‘교체와 변화, 죽음과 갱생의 파토스’ 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①삶은 본질적으로 대화적이다. 산다는 것은 대화에 참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묻고 귀를 기울이고 대답하고 동의하는 것이 삶의 본성이다.
바흐친은 삶은 본질적으로 독백주의가 아니라 대화적이라고 정의한다. 원시종교에서부터 인류역사의 발전과정에서 인간은 혼자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생존이라는 실존교본에서 가르치고 배운다.
②진리는 개인의 머릿속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집단적으로 진리는 찾아 헤메는 사람들이 대화라는 상화작용을 할 때 거기서 태어난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것은 모든 대학, 상아탑의 존재이유다. 그런데 그 진리는 한 개인의 탁월한 머릿속에서 도출된 것이 아니라, 군중의 웅성거림, 진리의 반대편인 수많은 거짓이라는 반면교사를 통해 도출된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기에 종교적 진리는 연역이지만, 세상의 진리를 귀납적이고, 경험적이라는 것이다.
③모든 인간은 서로를 알아야 하고 서로에 관해서 알아야 하고, 서로 접촉해야하고, 얼굴을 맞대야 하고, 함께 이야기해야 한다. 모든 것은 서로를 대화적으로 비춰줘야 하고 다른 모든 것 속에서 되비쳐져야 한다.
나는 타자 없이 살 수 없으며, 그렇다고 타자는 나 자신이 될 수도 없다. 그럼에도 나는 나 자신을 타자 속에서 찾아야 하고 또 타자를 나 자신 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 타자와 나는 서로에게 대화적으로 거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④내부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식과 타자의식의 경계에서 발생한다. 문지방에서 발생하는 것, 내적인 모든 것은 그 자체에서 의의를 찾지 못하며 바깥으로 방향을 바꾸고 대화한다.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자체가, 아니 생명으로 태어났다는 자체가 이미 대화적이다. 모든 생명체 중에 가장 대화적 실존에 내던져진 존재가 인간이다. 몸에서 말, 행위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자신을 바깥으로 표출하는 모든 것 안에서 나와 타자의 긴장된 상호작용이 발생한다. 침묵조차도 대화적이다. 이를테면 투쟁, 균형, 서로에 대한 순진한 무지, 고의적인 무시, 거부, 수용, 도전, 불인정, 소통이 발생한다.
⑤어떤 발화자도 자신의 화제에 대해 최초의 인물이 아니며 우리가 하는 말은 이미 다른 사람들의 연표로 가득차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발화는 보고된 발화이며, 이미 말해진 것들에 대한 대화적 응답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질적 언어들의 대화적 공존은 곧 발화의 본성과 통한다. 태초에 말이 있었다는 것이 인간은 운명적으로 대화적임을 말한다.
바흐친의 대화주의는 민중이 축제인 카니발에서 그 기원을 찾는다. 사순절이 시작되기 전 적나라하게 펼치는 축제는 대부분, 카오스 상태에 던져진 인간의 모습을 표출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된다. 자신의 카오스이자, 모든 인간 안에 내재한 카오스를 경험하는 것이 축제의 본질이다. 그런, 소란스럽고 무질서한 카니발에서 상생과 공존의 원리를 발견할 수 있는 이유는 페르소나를 벗어버리기 때문이다. 물론 많은 축제에서 가면을 쓰지만, 그 역시 익명으로 도피하고자 하는 카오스의 일면이락 본 것이다. 카니발의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세상의 가치질서를 뒤집고, 위계질서를 허물면서 인간은 좀 더 근원적 질서로 다가간다고 보고 있다.
거꾸로 된 카오스의 상태로 인간을 창조이전의 상태를 경험하게 한다. 거기서 카오스와 코스모스, 극적으로 대립하는 세계가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가를 말해준다. 카니발은 코스모스라고 일컬어지는 것, 긍정하기 위해 부정하고, 존중하기 위해 조롱하며, 올라가기 위해 내려간다. 삶으로 죽음을 내보이고, 죽음을 통해 삶을 내보인다. 카니발은 주로 사순절이 시작하기 전 이루어진 축제로 기존의 질서를 뒤집고 권위를 조롱하는 것으로 규정하는 것은 카니발의 전정한 의미가 아니다. 하늘의 질서를 받아들이기 위해 땅의 혼돈과 광기, 생명력의 분출을 경험하면서 내가 누군지, 너는 누군지, 인간에게 신은 왜 필요한지 비로소 알게 된다고 본 것이다.
Jean-Germain Drouais, Miracle of the Canaanite Woman, French, 1784, Paris, Musée du Louvre
장 제르맹 드루아, <가나안 여인의 기적>, 1784, 파리, 루브르 박물관
3.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마태오15,21-28
그때에 예수님께서 21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다. 22 그런데 그 고장에서 어떤 가나안 부인이 나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23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다가와 ㅍ말하였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24 그제야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25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26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 하고 말하였다. 28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라고 전하는 마태오15,21-28은 마르코7,24-30에 동시에 실려 있는 복음으로 가나안 여인을 통해 <믿음과 현존>이라는 두 겹의 축복의 메시지를 전해준다.
이 글은 [1]주님이라는 호칭이 지닌 의미, [2]가나안 여인을 통한 믿음의 보편성 [3]가나안 여인과의 대화적 상황이 지닌 의미를 통해 [4] <어떻게 하느님 현존을 가나안 여인처럼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기로 한다.
[1]주님이라는 호칭이 지닌 의미
마태오15,21-28에는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호칭이 세 번 나온다. 우리는 지금 당연히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지만, 그리고 마태오 복음사가 역시 주님을 일상적으로 주님이라고 표기하고 있지만 제일 먼저 쓰여진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른 사람은 이 가나안 여인이 처음이라고 전한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제자들도 예수님을 그냥 스승님이라고 불렀던 시대에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 호칭 자체가 엄청난 축복에 해당한다. 그것은 가나안 여인만의 축복이 아니라 오늘 우리도 주님이라고 그분을 부를 때, 우리 역시 가나안 여인과 같은 축복을 받는다. 그것은 예언자를 예언자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예언자가 받을 축복을 같이 받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축복이라는 말은 어떤 공간, 어떤 사람에게서 일회적으로 내려지는 것이 아니라. 성서에 나오는 모든 축복, 현실에서 어떤 사람이 받는 모든 축복은 그 축복이 하늘이 준 것임을 바라보는 모든 이에게 동시에 내려준 축복에 해당한다. 축복의 출처는 언제나 하늘이다. 그런 맥락에서 축복은 영원의 싸인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끔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묻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신원의식을 파악하는 신학적 의미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가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살아있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메시야이십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십니다,라는 신앙고백은 신앙의 선조 누군가의 입에서 최초로 발설되었을 것이고, 하느님의, 예수님의 극적 현존 체험 속에서 그 고백이 나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극적 현존 체험은 우리의 진실한 받아들임 속에서 시공을 초월해 여전히 유효한 현존체험이 된다. 만약 하느님의 현존 체험이 작위적으로 조작된 것이라면 축복의 혈은 그 당사자에게서 끝날 것이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은 주님이십니다! 라는 교회의 고백이 바오로 사도의 통찰에서, 또 이 가나안 여인의 고백으로 공식화되었다면, 우리가 성서를 묵상하면서 시공을 초월해 우리에게도 그대로 그 축복이 주어질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은 우리를 통해 다시 누군가에게 전해질 것이다. 그것이 축복의 연대성이자 영원성이다. 영원은 축복이다.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른 호칭은 그렇게 축복의 연대성, 영원성을 의미한다.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1고린토12,3)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필립비2,10-11)
Ⓒ그대가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그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로마10,9)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다(창세기1,5)나는 있는 나다.(...) 있는 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고 하여라(탈출기3,14-15)주 너의 하느님의 이름을 부당하게 불러서는 안 된다(탈출기20,7)
Ⓐ~Ⓒ에서 바오로 사도는 신약성서가 쓰여지기전 50년 경부터 서간문에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성령에 의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고 전한다. 바오로 사도에게, 주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는 것을 체험한 다마스커스에서 주님체험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중요한 모멘트에 해당한다. 이를 종합하면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삼위일체 하느님을 동시에 부르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기에 초대교회에서 예수님은 주님이다, 라 부른 것은 알렐루야에 버금가는 환성에 가까운 것이었다. 예수는 그리스도다(마르코8,29), 예수는 주님이시다(필립비2,11, 1고린토12,3 로마10,9),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시다(마르코1,11/9,9 /15,39/1요한4,15)는 대표적으로 예수님의 신원의식을 천명한 호칭들이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주님, 그렇습니다.”에서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이라는(1사무712-16시편132,17)호칭, 마태오 복음 1장에서 장황하게 나열된 예수님의 족보에서 보듯, 또 예리코의 눈먼 두 사람을 고쳐주신 치유기적사화에서 보듯, 마태오 복음사가는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이라는 호칭을 치유기적 사화 앞에 자주 등장시킨다. 장차 이스라엘을 이상적으로 다스릴 왕이 곧 메시야라는 것을, 곧 다윗의 가문에서 메시야가 태어나리라는 유다인들의 메시아관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이는 선택받은 민족이라 자부하는 너희들이 기다리던 메시야가 바로 너의 눈 앞에 있는데, 너희가 고백한 믿음을 스스로 배신하는 이 우매한 눈먼자들아! 라는 비판이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가나안 여인에게서 발화되는 두 번의 <주님>이라는 호칭도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불경스럽다고 생각하던 유다인들의 전통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이라는 호칭은 다윗의 가문에서 태어나신 하느님이라는 포괄적의미가 다분히 들어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은 혈연적 혈통이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되신 분이었다. 그러니 주님이라는 호칭은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가나안 여인의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주님, 그렇습니다.”에서 가나안 여인은 분명히 예수님의 정체를 바오로 사도의 통찰처럼 파악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름이나 호칭은 Ⓓ에서 보듯, 창조 질서의 아름다움을 반영하고,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근원을 밝힌다. 하느님의 이름을 부당하게 부르지 말라는 제2계명은 하느님의 이름을 정당하게 부를 때, 하느님은 하느님으로서, 아버지로서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호명-응답의 법칙, 즉 존재-축복의 법칙이 내재화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로마노 과르디니는 『거룩한 표징』에서 우리가 하느님, 혹은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신을 부르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우리의 근원적 본질에 대한 자기 고백이라고 전한다.
“‘하느님’ ‘주님’ 이라는 호칭에는 우리 영혼의 핵심도 자리한다. 우리 영혼은 필연적으로 하느님께 속해 있기 때문에 우리 본성은 하느님에 의해, 하느님을 향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느님과 결합하기 까지는 쉴 줄을 모른다. 우리의 모든 품위와 존엄, 근원, 목적, 존재의 시작과 끝, 숭배와 향수, 참회, 모든 것이 하느님, 주님이라는 이름 안에 있다.”
우리 존재의 시작과 끝이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 안에 있다는 것이야말로 가나안 여인이 <주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라는 청원은 한 개인 현실의 문제해결뿐 아니라 보편적 근원에 대한 그리움의 표출이라는 두겹의 축복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름도 모르는 가나안 여인이 그 차원까지 바라보지 못했을지라도 이천년이 흐른 뒤에도 대화상황이 이렇게 생생한 드라마로 우리에게 다가온다면, 인류의 역사가 멈추는 그날까지 가나안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는 <믿음>을 거론할 때, 반드시 회자될 것이고, 마르코 복음사가의 전언대로 여인이 부른 <주님>이라는 첫 번째 호칭은 모든 존재의 소용돌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주님을 모른다면 우리 역시 어디로 가야할지 그 방향을 알 수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2]가나안 여인을 통해 믿음의 보편성에 대해
마태오15,21-28에서 전하는 가나안 여인을 통한 이방인 전교의 의미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것일 테지만 바오로사도의 이방인 선교를 기점으로 오늘날은 해외 선교가 그 어떤 이슈도 되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이방인들이 먼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게되었는지 그 통찰의 초점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당시 그분을 주님이라고 고백한 이들은 유대교 그리스도인, 이방계 그리스도인, 로마계 그리스도인,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대표적인 이방인들에 대한 전교는 게라사의 미친 사람을 고치신 예수님(마르코5,1-20/마태오8,28-34/루카8.26-39), 가나안 여인의 딸을 고쳐준 사건이 이방인지역에서 베풀어진 구마치유기적 사화에 해당한다. 악의 세력에 지배를 받던 이들에 대한 해방의 의미는 그분이 이 세상에 온 이유의 한축에 해당한다.
또 다른 이방인의 믿음에 대한 고백은 로마의 중심부에 있었던 백부장의 종을 고쳐주신 원격치유(마태오8,5-13/루카7,1-10)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집행한 백인대장 입에서 나온 “이분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시다”(마르코1,11/9,9 /15,39/1요한4,15)라는 고백은 이방인들이 먼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보았다는 대표적인 사건들이다.
이방인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 혹은 주님으로 알아보았을까? 사랑이 고픈 이들이, 사랑이라는 인간 본성을 잃지 않은 이들이 사랑을 쉽게 알아보게된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사랑은 사랑에 끌리기 때문이다. 그것이 만인이 지닌 인간의 본성이다. 사랑은 인간이 지닌 보편적 성향이다. 사랑은 보편종교다. 보편적 (普遍的)이란 의미는 사전적으로 "모든 것에 두루 다 미치거나 통하는 성질을 띤 것"이란 의미로 인간의 본성이라는 말로 이해해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예수님의 이방인 선교는 바로 인간에게는 사랑이라는 보편적 본성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사랑 속에서는 모든 구속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성향이 있다. 그럼에도 굳이 종교가 필요한 이유는 인간이 자신의 본성을 쉽게 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제자들에게 준 마태오 복음 28장의 마지막 사명에 해당한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은 제자로 삼으라는 것은 특정종교인이 되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알면 자신의 본성을 알것이고, 자신의 본성을 알면 행복할 것이니, 모든 사람들이 인간의 본성을 망각하지 않는 방법을 알려주라는 말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태오28장19-20)
Ⓕ백인대장과 또 그와 함께 예수님을 지키던 이들이 지진과 다른 여러 가지 일들을 보고 두려워하며,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하고 말하였다.(마태오27, 54 마르코1,11/9,9 /15,39/1요한4,15)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느님의 구원이 다른 민족들에게 보내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들을 것입니다(사도행전28,28)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1고린토9, 22)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것입니다.(1고린토15, 28)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5,17)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요한6,29)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요한 10,37)
Ⓔ~Ⓖ는 Ⓗ로 모아진다. 하느님이신 예수님은 인간의 창조본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사람이 되셨다. 그래서 그분은 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에서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요한5,17)에 이어서, 그분이 보내신 아들 예수를 믿는 것이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는 것, 그리고 그분은 늘 하느님이 원하시는 일들을 한다는 것, 안식일 규정을 어기면서까지 사람들을 병마에서 해방시키시려 하신 분, 유다인들의 살인 모의를 유발할 정도로 그분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모든 사람들을 구속하는 물질적, 육체적, 정신적, 종교적 구속으로부터의 해방, 즉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시며, 인간 본성을 되찾아주려는 메시야의 사명이었다. 이방인 선교의 포문은 그분이 먼저 그들에게 다가갔기에 가능하다. 사랑의 혁명에 가깝다.
그것을 바오로 사도는 궁극의 인간 해방을 죽음에서의 해방까지 연결하면서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는 것이 하느님이시듯, 예수님도 그러하시고, 바오로 자신도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려고 모든 이들이 반대하는 이방선교에 나설 수밖에 없다는 보편적 구원의 연속성을 피력한다. 단 몇 사람이라도 구원해 보려고 복음 선포를 한다는 바오로의 고백이다.
하느님에게서 온 사랑은 카테고리가 없다. 그것이 창조의 근원,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진정으로 하느님의 보편젹 사랑을 전하고자 한다면, 내가 복음의 타켓으로 여기는 사람들뿐 아니라 의도하지 다른 이들에게도 그 사랑이 전해진다는 사랑의 확장성을 바라볼 수 있는 부분이다. 내가 전하고자 하는 복음이 정말 하느님에게서 온 사랑인지, 진리인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3]가나안 여인과의 대화적 상황에 주목하여
마태오15,21-28에 가장 주목할 부분은 가나안 여인과 예수님의 리얼한 대화 장면일 것이다. 여기서 성서해설서의 대부분의 초점은 가나안 여인이 한없이 자신을 낮추면서까지(강아지) 자비를 청하였기 때문에 여인의 믿음이 상찬받았다고 바라보기도 한다.
(이건 어쩌면 이 글을 쓰는 사람의 본성일지도 모르겠으나, 은총은 존재의 관계이지 행위의 관계로 국한시킬 수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이것은 호칭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정체성의 문제고 본성의 문제다. 그럼에도 돌연 청하는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죄책감과 자기비하를 총동원하여, 혹시 나같이 죄 많은 인간이라 그런가 하는 의혹에 휩싸인다, 마치 통회가 겸손이라도 되는 듯, 우리와 하느님과의 관계가 종과 하인의 관계여야지만 자비의 은총이 주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우리가 부르는 아버지가 과연 그런 아버지인가? 우리는 종이었다가 아들이었다가 그런 탄력적인 정체성을 갖고 있어야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존재인가?)
가나안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로 돌아가서,
유다인들이 당시에 이방인을 가리키는 비유가 강아지나 개였다. 강아지 혹은 개라는 표현은 유다인들의 순수혈통을 강조하는 어법으로 오랜 유배기간동안 혼혈족이 된 이방인들이 이미 너무나 들어서 잘 알고 있었던 비하된 호칭이었다, 강아지라는 표현은 예수님이 처음 쓰신 표현이 아니다.
가나안 여인은 주님이라는 호칭을 세 번 썼는데 첫 번째 호칭에는 메시아는 다윗 가운데서 난다는 유다인의 철석같은 믿음과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주님이라는 호칭을 결합시킨 것이다. 이미 여인의 호칭에서 예수님은 여인의 메시아관을 간파하셨을 것이 분명하다. 그 이후에 이어지는 다소 모욕적인, 어찌보면 유머같기도 한 여인과 예수님이 주고받는 대화는 이 여인은 물론 제자들과 유다인을 동시에 겨냥한 대화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제자들이 다가와 말하였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메시아를 기다리는 유다인들이나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신앙의 상태는 가나안 여인과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 <누구를 믿을 것인가>를 극적으로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여인은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에서 예수님이 빠져나갈 길을 열어놓는다. 이스라엘이라는 특정민족을 위한 메시아로 오셨습니까? 라는...그리고 주님이라는 호칭에서 예수님이 빠져나갈 길을 차단한다. 주님이라면 강아지든 개든 사람이든 생명체를 구원해야 한다는 보편적구원론이다.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더욱 그러해야 한다.
이어지는 두 번의 주님, 주님이라는 호칭에서 당신은 모든 인류의 주님으로 오신 분임을 알고 있습니다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제가 당신을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 주님이시여! 자비롭게 응답하십시오! 저 깊은 구렁속에서ㅡ 심연 속에서 부르짖는 제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라는 탄원에 가깝다.
우리가 지나가는 낯모르는 사람을 불러도 뒤를 돌아본다, 하물며 우리가 그분을 간절하게 부를 때, 아버지라고 부르는 당신 자녀들의 기도를 그분이 어떻게 외면 할 수 있을까? 주님을 부르던 날 당신은 내게 응답하셨나이다라고, 시편저자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주님은 너를 지키시는 분, 주님은 너의 그늘, 네 오른 쪽에 계시다. 낮에는 해도, 밤에는 달도 너를 해치지 않으리라. 주님께서 모든 악에서 너를 지키시고, 네 생명을 지키신다. 나거나 들거나 주님께서 너를 지키실 것이다. 이제부터 영원까지.(시편121, 5-8)주님, 깊은 곳에서 당신께 부르짖습니다. 주님 제 소리를 들으소서!(시편130,1)주님, 당신 자애는 영원하십니다. 당신 손이 빚으신 것들을 저버리지 마소서!(시편138, 8)
아무리 사람이 궁지에 몰려도 아무 앞에서나 무릎을 꿇고 절을 하며 자신의 절망의 심연을 열어보이지는 않는다. 인간의 상처는 그 자체로 존엄한 것이다. 그런데 가나안 여인은 백주대낮에 모든 이들이 보는 앞에서 무릎을 꿇고 절을하며, 주님의 자비를 큰 소리로 계속 청하고 있었다. 저 분만이 나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거라는 확신이 없으면 가능하지 않은 행동이다.
여기서 궁금한 점은 어떻게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의 정체를 그렇게 정확하게 간파할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여러 가지로 추론할 수 있겠지만, 여인은 당시 이민족의 사이비 신들의 정체와 유다인들의 신관을 정확히 간파하고 그들에게서 구원은 없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았을 것이다.
그런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어머니의 절박함과 간절함, 인간의 본성이 사랑이다. 사랑은 사랑을 알아본다. 그 절박함과 간절한에서 비롯된 사랑이 모든 위선과 신화, 가치의 피상적인 껍질을 벗겨냈다고 할 수 있다. 백주대낮에 계속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다는 것에서, 여인의 절박함이 극한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때론 절박함은 진실과 거짓을 정확하게 보게 만든다. 어마어마한 용기도 화산처럼 뿜어져 나오게 한다. 자신을 낮추고 자존심을 굽혔다는 시각은 덜 절박했을 때 나오는 인간의 심리상태에 대한 해석이다. 절박해지면 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대상에게 천번도 만번도 더 무릎을 꿇을 수 있다. 관찰자에게 자존심이 문제로 부각되겠지만, 당사자에게 오직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딸을 살리기 위해 그 여인은 어머니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을 것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을 때, 하늘의 뜻을 기다리는 진인사대천명 밖에는 남은 것이 더 있을까?
바로 그러한 리얼한 대화가 기도라고 할 수 있다. 기도는 리얼할 수밖에 없고, 리얼해야 한다. 라칭거 추기경은 『사도신경 강의』에서 다음과 같이 인간과 하느님의 대화적 상황을 피력한다.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실존 안으로 실제로 들어오셨다는 것은,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가 생명을 뜻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누구나 믿는 사람은 자신이 생명이며, 죽음을 초월하는 불멸의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께 가는 방향이 동시에 인류공동체로 들어가는 방향이며, 이 공동체를 받아들이는 것은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길이 된다.”
지난주에 사랑은 보편종교 자연종교라는 말을 썼다. 이번주에는 생명 역시 보편종교 자연종교라는 말을 쓸 수 있겠다. 내 생명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를 아는 것이 불멸에 대한 갈망일 것이다. 살고 싶어서도 살고, 살고 싶지 않은 순간에도 사는 모든 생명이 그 자체로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신앙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생명은 그런 보이지 않는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과의 무언의 대화, 연대의 장이다. 대화는 바로 기도다. 우리의 간절한 기도가 들어지는 과정은 여인과 예수님과의 대화와 아주 비슷하다. (여기서 이 가나안 여인에게서 성모님이 인류를 위해 기도하는 어떤 전형을 보게 된다.)
[4]어떻게, 어디서, 하느님 현존을 체험할 수 있을까?
위의 논의를 종합해 어떻게 가나안 여인처럼 하느님의 현존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을까를 정리해 볼 차례다. 우리가 그분의 현존을 체험하지 않고도 그분을 믿는다고 할 수 있을까? 가나안 여인은 딸의 원격 치료를 경험하면서, 주님의 현존을 생생하게 체험 한다. 무한한 현존 체험 가운데 가나안 여인과 연결하여 현존체험 몇 가지 사례를 정리해 보면,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1)가나안 여인의 경우처럼 성서에 나오는 믿음의 상찬자들은 대부분, 생존의 극한 상황에서 그 어떤 선택의 여지도 없었던 인물들이 대부분이다. 실존의 극한 상황에 내몰린 절박한 이들이었다. 자신도 자신을 도울 수 없고, 그 어떤 사람도 도움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 스스로 자기존엄과 품위를 지킬 수 없는 이들이었다. 여기서 절박한 생존과 고통은 ‘때론’ 현존체험과 직결되기도 한다.(물론 고통과 가난이 절대적인 현존체험과 연결된다는 것은 아니다.) 고통에 대한 재해석, 첫 번째, 현존체험은 모든 것을 다 빼앗긴 것 같은 상황에서의 현존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부잣집 문앞에 누워있던 라자로처럼, 완벽하게 빈손의 영성이다. 죽음 이전에 죽음을 체험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부활의 체험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사라질 때, 오직 한분만이 영원히 함께 하신다는다는 것을 바라보는 것으로, 죽음을 통과하고 만나는 임마누엘의 현존체험이다. 그분이 유일한 실재관계라는 바라보는 것이다.
(2)그렇다면 삶의 풍요로움을 누리며 사는 이들은 어떻게 하느님 현존은 체험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나올 수 있다. 여기서 삶의 풍요로움이라는 것은 물질적 기준이 아니라 정신의 가치배열 문제임이 대두된다. 이 세상 풍요도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부자청년이 모든 계명을 다 지켰지만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코10,21/마태오19,16-26/루카18,18-27)라는 말을 듣고 그 부자청년은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고 전한다.
비슷한 맥락으로 마리아는 엘리사벳을 만나 다음과 같이 마니피캇에서 노래한다.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치십니다(...)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루카1, 46-55)
바오로는 다른 맥락으로 가난과 부유함을 바라본다. 물론 바오로는 가난과 부유함을 물질적인 것에 국한시키고 있지 않음을 감안애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2고린토8.9)
표면적으로 가나안 여인은 모든 현실적 조건을 박탈당한 상황에 내몰린 상태였다. 그렇다고 그 당시나 지금이나 생존의 코너에 몰린 사람들이 모두 그분에게 자비를 청하고 구원을 경험한 것은 아니다. 고통이나 가난이 구원의 필수조건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같은 맥락으로 모든 현실적 풍요가 그분과 대척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당신이 주시고 당신이 주신 것을 미워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럼에도 왜 부자는 낙타가 바늘구멍을 뚫고가는 것처럼 어렵다고 하신 것일까?
재물이나 명예 등 현실적으로 풍요로운 사람들은 그것을 스스로 내려놓아야 한다는 재배치의 문제 앞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내려놓는다는 것은 재물이든 명에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사용하겠다는 용의를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가르멜 수도원으로 들어가라는 것이 아니다. 재물이나 명예는 선을 행할 수 있는 참 좋은 기회다. 재물과 명예는 그 자체로 하느님께서 허락한 것이고, 풍요로움을 누리고 나눌 수 있는 참 좋은 기회다. 그럼에도 재물과 명예는 항상 하느님과 대척점에 놓인 것으로 치부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현세적으로 주어진 모든 것이 내 능력 밖이라는 것을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둘째, 제물과 명예는 누군가의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그 모든 현세의 풍요가 그분으로 인해 주어진 것이기에 그 모든 것을 그분 뜻대로 쓰겠다는 용의를 가질 수 있다. 재물과 명예가 내 능력으로 주어졌다고 생각한다면, 내려놓을 수도 나눌 수도 없다. 그분 뜻대로 주신 능력들을 사용하겠다는 재배치의 갈망은 소유의 원천을 바라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재물도 하느님이 주신 것, 명예도 하느님이 주신 것, 생명도 하느님이 주신 것이라는 소유에 대한 본질적 통찰이 우리의 행위를 결정한다, 그 다음에 행위에 대한 통찰이 이어진다. 그것을 내려놓고, 나눌 수 있는 것, 청빈하게 살 수 있는 마음도 하느님이 주신 것, 나눔도 하느님이 주신 것, 봉사도 하느님이 주신 능력이라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 내려놓음과 나눔이 비할 수 없는 기쁨인 이유는 소유와 행위의 원천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이것은 내 것이고, 이것은 내가 했다고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다. 오직 감사할 일 뿐이다. 그 감사의 기쁨을 다른 말로 경외심에서 비롯된 여백이라고 바라볼 수 있겠다.
하느님이 함께할 여백이 있어야,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다. 하느님의 현존은 선사된 선물이기 때문이다. 그분의 손길 그분의 현존을 체험하고 싶다는 절대적인 갈망이 있을 때, 모든 것을 아시는 성령은 그 사람 안에 역사하신다. 하느님 현존 체험조차도 하느님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른 그 자체가 바오로 사도가 전한대로 성령의 감도하에서 가능한 일이다. 빛 없이는 그 빛을 볼 수 없다. 하느님의 현존 체험은 소유와 행위와 존재가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아는 것’이자, 창조의 근원에서 ‘하나’로 정향(定向)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현세적 부요함을 사는 이들의 현존 체험, 두번째 현존 체험은 소유와존재와행위가 하나라는 것을 아는 것에서 느끼는 달란트의 봉헌에서 주어지는 현존 체험이다.
(3)글의 주제를 [믿음에의 희망, 채색과 윤색을 거쳐, 대화적 현존으로] 정한 이유를 부연하자면, 하느님의 손길과 현존을 체험하고 싶다는 이 절대적인 갈망은 다른 말로 불멸에의 희망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불멸에의 희망은 삼차원적 기독론을 넘어서, 무엇이 진리인가? 라는 근본적인 진리문제와 닿아 있다. 하느님의 손길과 현존체험은 구체적인 것이기에 우리가 알고 있는 메시야관의 재정립을 요구한다. 가짜 주님을 체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앙 선조들이 믿던 어제의 예수와 오늘의 그리스도 그리고 재림 때에 오실 내일의 인자가 그것이다. 예수는 주님이라는 것을 선포하는 모든 복음사가의 편집의도가 얼마간 다르듯, 우리도 어떤 환경에서 믿음의 대열에 합류했는지에 따라 이미 어떤 희망의 색깔이 덧칠해진 채색(彩色)된 예수관이 있다, 또 종교인들이 호교론적으로 윤색(潤色)한 예수가 있다. 공생활-십자가-부활을 구체적으로 사신 역사상의 예수는 그 속에 숨어 계시다. 이 삼차원의 기독론을 뚫고 그분의 손길과 현존을 체험하는 것은 위에서 살펴본 대로 성령의 도움으로 그분과의 끊임없는 대화적 상황(기도)에서 무엇이 진리인지 자명하게 알게 된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것을 체험하는 것, 세 번째 현존체험은 가장 난이도가 높은 현존 체험이고 이 세상이 빛속에서 환해졌다고 느끼는 빛의 세례, 깨달음에서 오는 현존체험이다.
(4)지난주에 살펴본 대로 매사에 그분을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영적 감수성을 작동시키는 것이 네 번째 현존체험으로, 생의 모든 순간에 그분이 함깨하신다는 것을 바라보는 영적 감수성이다. 스펙타클한 사건의 현장에서 만나는 하느님이 아니라, 평범한 일생의 모든 순간에, 생각해 보니 그럭저럭 살았어! 라고 말하는, 숨을 쉬는 모든 일상의 순간에 만나는 하느님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사랑이 최소에 담긴다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온 누리에 주 천주>라는 미사 감사송에서 나오는 영안의 개안에서 비롯되는 현존 체험이다. 찰라 같은 순간들이 가져오는, 일상적인 모든 순간에 임재하는 들꽃 같은, 바람 같은, 별 같은, 미소 같은, 들길 같은 모든 곳에 계시는 하느님을 만나는 영적 감수성의 만개다. ‘나는 있는 나’, 어디에나 ‘있는’ 분! 모든 ‘있음’의 근원인 분!을 바라보는 데서, 모든 날들이 좋았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5)그 어떤 현존체험이든 하느님과의 대화적 상황에서, 즉 깨어 기도할 때 가능하다. 진실로 하느님을 아버지로 생각할 때, 가능하다. 다섯번째, 현존체험은 바오로 사도의 통찰처럼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로마서 4,17~18) 말씀의 육화를 경험하는 것이다. 바이러스가 감염된다면 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감염되지 않겠는가? 성서를 묵상한다는 것은 성서 속 인물과 나를 동일시하고 그 인물에 감염되어 감정이입하는 것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할때, 내가 수없이 모른다고 한 상황을 대입해 보는 것이다. 때론 예수님과 동일시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실 때 나도 부활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서 묵상이 기도로 넘어갈 때 격하게 울 때가 많다. 이번주에는 가나안 여인을 묵상하면서, 주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느님 아버지를 부르며 울면서 통성 기도를 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불행히 사는가. 지인들이 힘든 삶들을 어렵게 털어놓았는데, 그들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용기를 내자고, 희망을 잃지 말라고 해준 말들이 너무 상투적이고 힘이 없었다. 내 무능과 한계를 통탄하며, 그들을 도울 수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아버지 뿐 이라는 것을 기도하다가 울면서 잠이 들었다. 작은 모기 한 마리가 잠을 깨웠다. 습관적으로 머릿맡에 놓인 성서를 펼쳤다.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계속 전하라는 말씀이었다. 문학을 가르치는 사람이냐, 예수쟁이냐는 비아냥을 무릎쓰고, 네가 나를 안다고 모든 사람들 앞에서 증언했기 때문에, 나도 너를 안다고 하늘의 천사 앞에서 너를 증언할 것이라는 위로의 말씀이었다. 말씀을 꿀꺽 삼켰다. 내가 그 위로를 꿀꺽 삼킬 때 잠들기 전 함께한 지인들도 같은 위로를 받았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나에게만 좋은 것은 하느님의 위로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기조차도 하느님의 도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말씀을 묵상한다는 것은 말씀을 삼키고 먹어서,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그분의 이름이 희망의 소용돌이가 되게 하는 것! 네가 나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선택했다는 것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가나안 여인을 통해 오늘, 복음을 묵상하는, 모든 이에게 나눠진 믿음의 축복이 아닐까?
글을 마치며,
그때에 예수님께서 21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다. 22 그런데 그 고장에서 어떤 가나안 부인이 나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23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다가와 ㅍ말하였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24 그제야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25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26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 하고 말하였다. 28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마니피캇(Magnificat)'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이 십자가는 아니지만, 십자가는 사랑이다(2) (0) | 2023.09.01 |
---|---|
사랑에 빠진 자의 원천적인 의지, 역설적 신비, 계시의 아름다움 (0) | 2023.08.25 |
바람, 지진, 불이 지나간 뒤 들리는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는 누구의 음성인가? (0) | 2023.08.11 |
이미지의 정치학에서, 십자가와 함께하는 영성의 아우라(AURA)로 (0) | 2023.08.04 |
현행적 지향과 잠재적 지향 사이에서 지향의 순수성에 대하여 (0) | 2023.07.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