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의 정치학에서, 십자가와 함께하는 영성의 아우라(AURA)로
- 주님의 거룩한 변모축일, “예수님의 얼굴은 해처럼 빛났다”를 중심으로
1. 왜 내가 채석 강변에 사는지 묻지 말아라(송수권)
송수권의 「여름 낙조」를 읽어본다.
왜 채석 강변에 사는지 묻지 말아라./나는 지금 만 권의 책을 쌓아 놓고 글을 읽는다./만 권의 책, 파도가 와서 핥고 핥는 절벽의 단애/사람들은 그렇게 부른다.//나의 전 재산을 다 털어도 사지 못할 만 권의 책/오늘은 내가 쓴 초라한 저서 몇 권을 불지르고/이 한바다에 재를 날린다.//켜켜이 쌓은 책 속에 무일푼 좀처럼/세 들어 산다/왜 채석 강변에 사느냐 묻지 말아라.//고통에 찬 나의 신음 하늘에 닿았다 한들/끼룩끼룩 울며 서해를 나는/저 변산 갈매기만큼이야 하겠느냐/물 썬 다음 저 뻘밭에 피는 물 잎새들만큼이야/자욱하겠느냐//그대여, 서해에 와서 지는 낙조를 보고/울기 전에./ 왜 나 채석 강변에 사는지 묻지 말아라.
송수권의 「여름 낙조」는 화자가 그대에게 ‘서해에 와서 지는 낙조를 보고 울기 전에’ ‘왜 나 채석 강변에 사는지 묻지 말아라.’라고 세 번이나 당부하는 말이 나온다. 묻지 말라는 것은 채석강에 사는 이유를 말해보았자 그대는 모른다는 의미가 다분히 내포되어 있다. 화자와 그대의 시선은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그대는 서해의 낙조를 보고 있고, 화자는 만권의 책이라 이름 붙은 채석강의 퇴적암층을 보고 있다. 그대는 하늘에 취해 있다면, 화자는 만권의 책에 비견되는 뭇 생명체의 눈물과 웃음, 기억과 망각의 집성체인 퇴적암을 보고 있다. 화자가 쓴 초라한 저서 몇 권을 불지르고서야 비로서 화자는 감상적 정서에 머물렀던 시간과 결별하고 싶어진 것이다.
송수권의 「여름 낙조」는 한 사람의 생애와 만권의 책에 비유되는 거대한 세계 속에서 개인의 왜소함을 말하려고 하는 것인가? 과연 그것이 화자가 채석강에 머무는 이유일까?
서해의 낙조나 채석강의 퇴적암층은 모두 자연현상에 해당한다. 여기서 그대는 곧 화자 자신임을 알 수 있다. 서해의 낙조를 보러와 감상에 젖었던 화자가 만권의 책이라 이름 붙은 채석강의 퇴적암층을 보면서, 하늘에서 땅으로 시선이 하강하면서 정신이 번쩍 든 것이다. 인생의 패러다임이 바뀐 것이다. 사람아, 땅으로 내려가라는 니체의 버전이다.
이에 이르러 화자는 자신이 채석강이라는 우주의 원형공간에서 뭇 생명보다 더 우월할 것도 없는 세 들어 사는 존재라는 것을 바라보게 된다. 인간이 만들어낸 문명의 집약체인 책은 생명의 흔적 앞에서 표피적인 지식의 편린에 불과하다. 그걸 대단하다고 산 날들, 설사 화자의 신음이 하늘에 닿았다한들 서해를 나는 변산 갈매기나 뻘밭에 피는 풀잎보다 더 치열한 생존이었겠느냐는 질문이자 자탄이다.
만약 이 각성을 일상적인 말로 풀어보자면, 그만 징징 거리자, 적당히 자기연민에 빠지자, 그만 쪼잔해 지자, 고통을 과장하지 말자.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자! 굳건히 땅을 딛고 살자! 무엇보다 이미지에 취하지 말자! 그러니 이제는 주제 파악 좀 하고 살자!는 말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2. 미학은 우연히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것이다.(랑시에르)
이미지에 취하지 말라니?
자기 이미지를 포기하는 것은 어렵다. 자기가 만든 이미지가 어디서 만들어졌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자기 이미지에 중독되면 그것은 약도 없다. 이미지는 실재를 왜곡하고 본질을 가리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이미지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중심부 담론에 기생하여 만들어진다.
원래 사물이 내뿜는 이미지는 중립적이다. 그런데 그것을 인간이 차용하면서, 이미지는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친다. 이미지의 편재는 이미지의 중독에 해당한다.
이미지는 허구적 행위들의 배치, 중심부 담론을 해체하는 하나의 역량, 순수한 형태, 순수한 파토스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반면, 중심부 담론을 조직 선동하는 광고, 중독의 의미, 무지한 집단지성의 쏠림현상, 위계서열을 조작하는 공리주의의 의미가 있다.
미학은, 예술은, 중심부 담론이 유포하는 이미지를 통해 그 이미지를 허물기도 한다. 우리의 고전 『춘향전』에서 춘향은 유교의 이데올로기인 ‘정조’을 통해 유교의 위계적 사랑관을 허문다. 『심청전』의 심청은 ‘신체발부수지부모’라는 유교의 덕목을 허물어 유교의 오륜인 ‘효’를 완성한다.
예술은 중심부 담론이 형성되는 그 변방의 이미지를 만들면서 의도하지 않은 채 중심부담론을 겨냥하는 정치적인 기능을 수행하기도 한다. 중심부담론이 유포하는 가치관를 추구하면서 동시에 그 담론이 무너지기를 바라는 민중의 이중적인 속성이 개입한 것이다. 중심부 담론에 기생하면서 중심부 담론이 허물어지기를 바라는 쾌락을 예술은 무의식적으로 유희한다. 그것이 미학(문학)이 의도하지 않은 정치성이다.
미학은 우연히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것이다. 그러나 미학은 두 개의 상반된 장치들 사이에 해결되지 않은 긴장 안에서 정치적이다. 상반된 장치들 중 하나는 예술형태들을 집단적 삶의 형태들로 변형시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미학을 해방에 대한 약속으로 삼는 자율성을 모든 투쟁적 상업적 연루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다(랑시에르, 『미학안의 불편함』)
문학의 정치는 작가의 정치가 아니다. 그것은 작가가 자신이 사는 시대에서 정치적 또는 사회적 투쟁에 몸소 참여하는 투쟁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작가가 저술을 통해 사회 구조 정치적 운동을, 또는 다양한 동일성을 표상하는 방식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문학의 정치라는 표현은 문학이 그 자체로서 정치행위를 수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랑시에르, 『문학의 정치』)
랑시에르는 미학의 정치성을, 문학과 미학의 자율성을 감성 혹은 감각의 분할에서 찾는다. 문학의 자율성을 말할 때, 혹은 문학의 오롯한 존재성을 말할 때도 문학은 운명적으로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미지를 나눠먹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감성과 감각의 분할이라고 말한다. 정치-경제가 추구하는 물질의 소유는 중심부담론, 인류역사의 진행과정에서 가장 최고의 감각적인 것들을 끌어모으려는 싸움이다. 소유는 사랑처럼 숨길 수 없다. 그가 무엇을 소유했는지 전시하기 때문이다, 이미지의 탁월성을 천하가 알기를 바란다.
사르트르적인 정치든, 반-사르트르적이든, 직접 뛰어든 정치든 탈정치든, 문학은 소유의 역사에서 정치가 먹고 싶어하지 않는 남은 여분의 감각과 감성을 갖고 유희를 즐긴다. 반정치적인 정치성이다. 정치는 불가피하게 예술과 감각과 감성을 분할한다.
그런데, 예술의 정치성은 예술의 내용이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의 형식이 담당한다는 견해를 리오타르는 펼친다.
언어기호가 결합시키는 것은 한 사물과 한 명칭이 아니라 하나의 개념과 하나의 청각이미지다. 예컨대, ‘나’는 담론 내에서 그 담론을 말하고 있는 주체를 지시한다. 따라서 ‘나’는 담론의 주체를 지시하는 것이지, 결코 담론의 내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리오타르, 『담론, 형상』)
선(회화)에서 의미가 현존하는 방식은 언어에 길들여진 정신이 보기에는 불투명성(La opacit)으로 보인다. 눈이 형태에 의해서만 그 의미를 파악하고 또한 그것이 포함하고 있는 에너지를 교류할 수 있기 위해서는 무한한 노력이 필요하다.(리오타르, 『담론, 형상』)
흔히 미학이나 예술이 정치적인 메시지를 가지려면, 그 작품이 정치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리오타르는 그건 사르트르적인 노골적이고 피상적인 사회참여, 앙가주망이고,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은 이미지를 통해 언어로 표출된 내용이 아니라 형식이라고 말한다. 예술의 형식이야말로 정치적 무대의 밑바닥으로 향하는 틈새이며,밑에서부터 균혈을 가해, 정치적 무대가 서서히 뒤집히고, 중심부담론이 전복되는 실천의 장소라고 말한다.
리오타르는 담론이 만들어지는 것은 언어가 아니라 형식이고 이 형식만이 담론 밖에서 중심부 담론으로부터 진정 자유롭다고 본 것이다. 리오타르는 기존의 담론 체계를 넘어서는 것뿐 아니라 아예 담론을 없애자는 것이다. 그것이 예술이 존재하는 이유라고 본 것이다. 예술은 단순히 기존의 형식을 거부해야 하는 것에 국한되어서는 안 되며, 코드화되는 모든 것을 거부해야 한다는 데 초점이 놓인다. 그러려면 형상만이 담론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예술은 기존의 담론체계를 넘어서 새로운 담론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담론 체계 자체를 무화시키고, 넘어서야 한다고 본 것이다.
3. <예수님의 얼굴은 해처럼 빛났다.> 마태오17,1-9
그렇다면, 종교는 중심부담론이 유포하는 이미지에서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을까?
<예수님의 얼굴은 해처럼 빛났다.> 라고 전하는 마태오17,1-9은 공관복음에 공통으로 실려있는 복음이며, 전승에 의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40일 전에 부활의 예표로 보여주신 표징이라고 전한다.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는 함구령에서 부활의 영광 앞에 십자가의 의미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금 생각케 한다.
마태오17,1-9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해 본다.
[1]그 무렵 1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2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 3 그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4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
예수님의 '얼굴이 해처럼 빛났다'는 것은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신적 정체성을 천명하는 것이자, 그분을 따르는 이들안에서 나타나는 빛은 하느님과 함께한다는 영광의 표징이라고 할 수 있다. 성서의 곳곳에 이 빛의 표징이 나오는데 그것은 우리가 원래 빛의 근원에서 창조된 존재임을 나타낸다.(창세기1, 3-4) 우리가 아버지의 집, 그 근원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그 빛으로 돌아간다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모세는 주님과 함께 말씀을 나누어 자기 얼굴의 살갗이 빛나게 되었으나,(...)그들(에집트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은 그에게 가까이 가기를 두려워하였다.(탈출기34, 29`30)
모세는 새 증언판을 받으러 시나이산으로 올라가 주님과 함께 밤낮으로사십일을 지내면서 그는 빵도 먹지않고 물도 마시지 않은 채 계약의 말씀, 즉 십계명을 판에 기록하였다. 그때 그에게 내린 하느님의 영이 그의 살갗을 해처럼 빛나게 한다. 이것은 모세에게만 준 은총이 아니었다. 모든 구약의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영으로 충만할 때 그렇게 얼굴이 해처럼 빛났다,
Ⓑ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고, 머리카락은 깨끗한 양털 같았다(다니엘7,9)
사자굴에서 살아나온 다니엘(다니엘14, 31-42)은 ‘사람의 아들’에 대한 환시를 보게 된다. 요한묵시록과 비슷한 영적 체험이다. 그분의 옷과 머리털에 대한 언급은 있지만 얼굴에 대한 묘사는 없다. 모세도 하느님과 얼굴을 맞대고 말하였다고 하지만 그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신은 형상에 가둘 수 없다는 것이다.
Ⓒ그때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마태오13, 43)
하느님께서 의인이라고 인정해 주는 모든 사람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난다고 하여, 말씀을 심장에 새긴 이들의 어떤 특징을 말해준다. 말씀을 전하는 이들에게는 영적 아우라가 있다. 혹은 말씀을 지닌 이에게서 나오는 카리스마가 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그 빛이 좋았다(창세기1, 3~4)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 왔다(요한1, 9-13)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8,12)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는 것은 창조의 아침에 삼위일체 하느님이 함께하셨음을 의미한다. 그분은 모든 어둠을 몰아내는 빛으로 오셨다.
모세의 빛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두려워 가까이가려하지 않았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베드로 일행은 그 상태에 머물러 있고 싶어 한다. 지상의 초막을 짓겠다는 것 때문에 대부분의 성서해설서에서는 베드로를 비판하지만 사실 그분의 영광의 빛을 체험한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머무르고 싶은 실재에 해당한다. 인류 모두가 아직 그 상태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산에서 내려와야 하겠지만 그런 영적 기쁨은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 상찬의 상태에 해당한다. 예수님이 영광까지도 제자들과 나누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돌아가야할 궁극의 집은 그런 빛이기 때문이다. 그 빛으로 돌아가는데 거쳐야할 지상 여정이 아직 남아있기 떄문에 영적 기쁨 조차도 봉헌하는 것이고, 천상의 예표인 그 산을 내려오는 것 뿐이다.
그렇다면 변모현장에 왜 이사야나 에례미야가 아니고, 모세와 엘리야인가? 율법과 예언서를 대표하는 모세와 엘리야의 등장은, 예수님의 완성하실 일, 앞으로 일어날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미리 알려 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루가 24,26-27).
[2]5 베드로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었다. 그리고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6 이 소리를 들은 제자들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채 몹시 두려워하였다. 7 예수님께서 다가오시어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8 그들이 눈을 들어 보니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그들은 예수님의 놀라운 변모를 보고는 환호했지만, 그러나 구룸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에는 몹시 두려웠다고 전한다. 모든 영적 신비체험에는 경외심이 있다. 시각적 체험이 아니라 청각적 체험은 신비체험의 정수를 의미한다. 우리의 장례예절 중에 고복의식이 있을 정도로 인간에게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육체의 기능이 청각이라고 말할 정도다. 그것은 눈으로 탐닉하는 이미지가 아니라 메시지의 중요성을 의미한다. 베드로 일행이 들은 소리는 이미 예수님의 세례 때 하늘에서 들려온 소리이며 삼위일체 하느님이 함께한 사건이기도 하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오16-17)
여기서 중요한 메시지는 그분은 사랑하는 아들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는 점일 것이다. 세세대대 인류는 그분에게는 사랑하는 아들들이다. 그러나 마음에 드는 아들이지는 않다. 여기서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라는 것은 무엇이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에 드는 뜻인가를 예수님의 생을 통해 배우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에수님의 거룩한 변모를 목격한 베드로 역시 변모의 영광이 지닌 시각적 빛이 아니라 하늘에서 들려온 메시지에 주목한다. "우리도 그 거룩한 산에서 그분과 함께 있으면서 하늘에서 들려온 소리를 들었다"(베르로2서1,16-19)고 전하면서 "마음 속에 날이 밝아오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어둠 속에서 비치는 빛을 바라보듯이 그 말씀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전한다. 그러니 변모축일의 핵심은 하늘에서 들려온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3]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하고 명령하셨다.
세 세자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라고 함구령의 시한이 제시된 것으로 보아, 부활을 체험하기 전까지는 결코 그분이 겪으셔야할 십자가 수난을 이해할 수 없었음을 알 수 없다. 에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은 이미지로 그분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
우리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사건, 그리고 수많은 치유기적 사화들, 세 번의 수난과 부활 예고를 통해서도 십자가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알고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영적 어려움일 것이다. 우리도 삼위일체 하느님을 부지불식간에 어떤 이미지로 따르고 있는지 성찰이 필요한 부분이다.
Ⓖ모세가 공야에서 뱀을 들어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올려져야 한다(요한3,14)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 번째 예고하시다(마태오16,21-23)-->영광스런 모습으로 변모하시다(마태오17,1-9)--->수난과 부활을 두 번째 예고하시다(마태오17, 22-23)----> 수난과 부활을 세 번째 예고하시다(마태오20, 17-19)--->출세와 섬김(마태오20, 20-28)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오16, 24-25/마르코8,34-9,1/뤀9,23-27)
이 중요한 변모사건을 왜 예수님의 열두제자와 함께 동행하지 않았는지, 변모사건의 목격자인 요한 사도는 복음 저술에서 왜 변모사화를 생략하였을까? 이런 일련의 질문들이 9절에 나오는 함구령이 지닌 의미- 부활의 영광에 앞서 십자가가 무슨 소용이 있었는지를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우리도 곰곰이 생각하게 만든다. 주님!주님! 부르는 우리는 온전히 그분을 이해하고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미지를 환호하는 것인가? 예수님의 실재를 사랑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베드로는 초대교회의 반석이 될 인물이다, 야고보는 열두제자 가운데 첫 번째 순교를 했던 제자였다. 그리고 사도요한은 태초부터 종말까지 삼위일체하느님의 모든 것을 기록해야 하는 기록자이다. 베드로, 야고버, 사도요한은 12제자 둘 중에 사랑하는 베스트3가 아니다. 그들은 지상교회와 천상교회를 연결하는 역할의 중요성을 의미한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영광에 인류도 함께 한다는 사실을 전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에게 어떤 역할이 주어진 것은 80억 인류가운데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고 마음이 드는 아들의 길이 진정 무엇인가를 먼저 깨우치고, 세상에 알려주라는 메신저의 소명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베드로 야고버, 요한, 그들은 보았고(1~4) 그들은 들었다(5~9) 그들이 본 것에 대한 함구시한이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라고 명시된 점에 비추어 부활을 체험하지 않으면 십자가의 필연성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는 제자들의 몰이해 곧 우리의 몰이해와 연결해야 할 거 같다.
여기서 변모사건을 목격한 증인이었던 사도요한은 정작 그 목격담을 복음에 싣지 않은 이유를 생각해 볼 차례다. 십자가 밑에서 성모님과 거룩한 여인들과 함께 있었던 사도요한의 십자가체험은 십자가 없는 영광을 바라는 것이 얼마나 큰 위험인가를 말해준다. 예수님의 실재를 지우고 예수님을 이미지로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이미지로 신앙할 수 없다는 것은 십자가가 신앙의 걸림돌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수난예고를 세 번이나 들었던 예수님의 제자들, 그 들 가운데 두 사람, 야고버와 요한 형제, 그리고 그들 어머니가 자기의 두 아들이 예수님의 오른쪽과 왼쪽 자리에 앉게 해달라는 청원은 출세와 섬김(마태오20, 20-28/마르코10, 35-45/루카22,25-27) 이라는 제자론의 필수덕목을 낳을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체험은 수난이나 죽음이 끝이 아니란 것을 보여주는 부활의 예표일 뿐, 십자가의 생략이 아니기 때문이다. 십자가 없는 영광은 없고, 십자가 없는 사랑도 없다. 변모사화에 대한 자가당착에 해당하는 해석은 사도 요한의 일생 중 가장 뼈아픈 충격이었을 것이다. 수난예고를 세번이나 듣고 변모의 현장에 동참한 자신도 십자가 없는 예수님의 영광에만 되취해있었다는 것, 예수님의 정체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은, 성모님과 거룩한 여인들과 함께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있었던 사도 요한에게 신앙의 길은 무엇인가?를 온 영혼에 돋을새김으로 각성시켰을 것이다. 지옥까지 내려가는 십자가의 사랑이 아니고서는 저 하늘까지 닿을 수 없다는 것! 하느님에게서 온 사랑은 그 사랑의 크기만큼 십자가도 비례한다는 것! 그래서 사도요한은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체험이 아니라 복음 서두에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들어올려져야 한다는 십자가론을 기록한 것이 아닐까 추론해 본다.
모세가 공야에서 뱀을 들어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올려져야 한다.(요한3,14)
사람이 아들이 들어올려져야 한다는 것을 바오로 사도는 십자와 영광의 동시성으로 바라보고 있다. 바오로 사도는 십자가와 부활의 체험을 종말론적인 시간의 선후관계로 바라보지 않는다. 오늘, 지금, 여기에서 십자가도 있고 부활도 있다고 본 것이다.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이들은 십자가와 부활의 영광을 동시에 사는 <질그릇에 담긴 보물>이라고 전한다.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은데, 이는 “어둠 속에 빛이 비추어라,”라고 이르신 창조주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비추어 예수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주셨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피를 흘리는 순교는 아닐지라도 이 땅에서 그분을 온전히 따르며 산다는 것이 참 녹녹치 않구나! 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읽고, 묵상하고, 필사하는 부분이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2코리토4, 1_15)
빛으로 빛을 본다. 빛으로 어둠을 물리치는 것이지, 어둠을 퍼내어 빛을 만들지 못한다. 이는 다른 말로 빛으로 빛을 본다는 그 자체가 은총이요, 감사할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에게 빛이 가려진다면 우리는 한 순간에 어둠 속을 헤메는 불쌍한 에고의 먹잇감이 될 것이다. 십자가 사건은 감추어진 빛을 체험하는 것이라면, 부활의 영광은 드러난 빛을 체험하는 사건이다. 그런데 그 어떤 체험이든 빛으로 빛을 사는 은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는 것도 바로 그 십자가를 질 수 있는 빛이 은총으로 주어졌기에 가능하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은 미사 전례중의 감사송과 본기도에서 전해주는 축복에 초점이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은 '십자가 죽음의 걸림돌을 극복하도록, 제자들의 마음을 준비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감사송). 그러나 이 변모사건은 '세례와 마찬가지로, 모든 믿는 이를 하느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 상속자가 되게 하실 하느님의 놀라운 선택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본기도) 그리스도는 수난만 아니라 영광까지도 제자들과 함께 나누셨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깊이 성찰해야 할 메시지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오16-17)라는 하늘의 소리일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사랑받는 아들임을 혹시 의심하는 것인 아닌지? 정작 내가 고민하고 성찰하고 나를 더 다듬어야 하는 것은 내가 과연 그분의 ‘마음에 드는 아들’의 삶을 살고 있는지의 여부일 것이다. 그렇다면 마음에 든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 되살아날 때까지”라는 함구령에서처럼, “유한자로 하여금, 자신의 유한성을 수락하고(십자가), 무한한 사랑을 향해 나아가는 것(부활)”(장 뤽 낭시)이라고 할 수 있겠다.
평일 영성체송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마라!”(시편103,2)
글을 마치며,
그 무렵 1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2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 3 그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4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5 베드로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었다. 그리고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6 이 소리를 들은 제자들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채 몹시 두려워하였다. 7 예수님께서 다가오시어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8 그들이 눈을 들어 보니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하고 명령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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