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애데레사가~ 세미원에서, 탱큐
주어 자리를 비워놓은, 자기 자신에로의 완전한 귀환(Reditio completa in se ipsum)
-연중16주,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를 중심으로
1. 전동균의 「거룩한 허기」
피네스테레 세상의 끝에 닿은 순례자들은
바닷가 외진 절벽에 서서
그들이 신고 온 신발을 불태운다 지는 해를 바라보며
나는
청둥오리 떼 날아가는 미촌 방죽에서
매캐한 연기에 눈을 붉히며
내가 쓴 시를 불태운다
전동균의 「거룩한 허기」는 대부분 시인의 어떤 ‘결기’로 읽곤 한다.
1연에서 순례자들이 산티아고의 순례의 끝에서 자신이 신고 온 신발을 바닷가 외진 절벽에서 해가 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불태우듯,
2연에서 화자는 청둥오리떼 날아가는 미촌 방죽에서 자신이 평생 쓴 시를 연기에 눈을 붉히며 불태운다.
시의 제목이 「거룩한 허기」다. 절대적세계를 지향했던 순례자와 절대적세계를 거부했던 시인이 느끼는 <허기>와 <불태운다>는 행위에서 어떤 이질성이 랑데부(rendezvous)한다.
랑데부(rendezvous)는 원래 극적인 만남이라는 지극히 사적인 어휘에서 두 개의 우주선이 무한한 공간에서 만나는 우주 용어로 확장되었다.
순례자들에게 신발은 순례를 좌우하는 준비물이다. 시인에게 시는 시인의 존재이유에 해당하는 모든 것이다. 이 세계가 주지 못하는 그 어떤 것을 채우려는 갈망은 사실 중력을 벗어나 우주를 여행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신발과 시는 결코 비슷한 무게로 재단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추상의 하늘에서 랑데부하게 되는 것은 그것이 어떤 상태에 도달하고 싶어하는 허기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 허기는 찾아질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채워질 수 없다는 거 때문에, 그 허기 자체에 무릎을 꿇는 것을, 가장 소중하게 여겼던 것을 불태우는 행위로 소환한다.
<불태운다>는 것은 치열했던 자신의 행위를 무화시키는 행위로, 그것은 자신의 욕망을 빈칸으로 남겨놓은 것이기에, 욕구에서 힘을 빼버린 상태이므로, <결기>보다는 <비허>라고 읽을 수 있겠다.
그때, 그 허기에 <거룩한> 이라는 신적 상태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며, 그 허기가 인간의 의지를 넘어서 무한하기 때문일 것이다.
순애데레사가 세미원 백련지에서, 탱큐!
2. 빛은 흰색을 만들지만 그림자 또한 만든다(라이프니츠)]
<무한하다>는 것은 <규정할 수 없다>는 것과 때론 동의어로 사용한다. 무한하고 규정할 수 없기에 인간의 주체 자리는 없거나 빈 칸으로 남게된다. 내가 무엇을 했다가 아니고 무엇이 나로 하여금 무엇을 하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무한을 가정할 수 없는 사람은 나무를 지향하고 무한을 가정할 수 있는 사람은 리좀을 가정한다. 나무, 즉 수목형은 뿌리와 가지와 잎이 위계를 가지며, 기존의 수립된 계층적 질서를 쉽게 바꿀 수 없는 반면, 리좀은 뿌리가 내려있지 않은 지역이라도 번져갈 수 있는 번짐과 엉킴의 형상을 지지한다. 인간은 나무로 태어나 리좀의 삶을 살다, 나무밑에 묻힌다. 인간이라는 다양체를 나무라는 한 문장으로 규정할 수 없어 들뢰즈는 리좀과 주름을 끌어들인다.
리좀(Rhizome)에는 나무의 마디가 있고, 뿌리에는 리좀의 발아가 있다. 리좀은 시작하지도 끝나지도 않는다. 리좀은 언제나 중간에 있으며, 사물들 사이에 있고, 사이-존재이고 간주곡이다. 나무는 혈통 관계이지만 리좀은 결연관계이며, 오직 결연 관계일 뿐이다. 나무는 ~이다, 라는 결정론적 등식을 부과하지만, 리좀은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라는 접속 부사를 무한한 조직으로 갖는다. 들뢰즈가 이항대립을 부정하면서, 리좀과 나무같은 이항대립을 끄집어내는 이유는 우리가 모델들의 이원론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모든 모델을 거부하는 과정에 도달하기 위해서일 뿐이라고 말한다.
아래 인용문은 [빛은 흰색을 만들지만 그림자 또한 만든다(라이프니츠)]에서 재인용했다.
①바로크는 주름을 구부리고 또다시 구부리며 이것은 무한히 밀고 나아가 주름위에 주름을 따라서 따라 주름을 만든다. 바로크의 특질은 무한히 나아가는 주름이다.
②파도의 흐름에서 파가 넘실된다. 파에는 마루와 골이 있다. 일반적으로 사건을 다루는 것은 마루의 것이고 골은 소멸한다고 여긴다. 둘 다 지나간 자국의 양면이다. 평등은 골로부터 마루로 위계질서는 마루로부터 골로 간다. (53SKI)
③나는 하나의 신체를 가져야만 한다. 이것은 정신적 필요성, ‘요구’이다. 첫째로 나는 신체를 가져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내안에는 어두운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첫째 추론에서부터 위대한 독창성을 보여준다(...)반대로 정신은 어둡고, 정신의 바닥은 컴컴한데, 신체를 설명하고 요구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어두운 본성이다. (113, 155)
④우리의 일차적 물질은 연장에 대한 요구일 뿐만 아니라. 저항 또는 대형에 대한 요구이며, 그리고 우리에게 속하는 신체를 갖기라는 개체화된 요구이기도 하다. (113, 156)
⑤우리가 신체를 갖기 때문에 우리 안에 애매한 것이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안에 애매한 것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신체를 가져야만 한다. 데카르트의 자연학적 귀납을 라이프니츠는 신체의 정신적 연역으로 대체한다. (113 156)
⑥나는 어떤 고통을 겪는다. 이 고통은 중심에서 점점 멀어지면서 원 모양으로 나가가는, 우리 살을 파낼 만한 뾰쪽한 어떤 것의 운동과 닮았다.이 논증은 매우 어려워서 많은 예비적 주의 사항을 덧붙여만 할 것으로 보인다. 고통은 ... 살 안에서 사방으로 퍼지는 수천의 작은 운동 또는 타격을 재현한다. (127, 173-174)
⑦고통 또는 색깔은 물질의 진동하는 판 위에 투사된다. 어떤 점에서는 흡사 원이 포물선이나 쌍곡선으로 투사되듯이. 이 투사는 “순서라는 연관(d’un rapport d’ordre)”의 이유이거나, 따라서 다음의 형식으로 나타나는 유비의(s’analogie) 이유이다: 미세지각들/의식적 지각 = 물질의 진동/기관. (127-128, 174)
①~⑦ 들뢰즈는 물의 소용돌이 원리에서 만들어지는 변곡을 통해, 주름의 원리를 추정한다.
수직선은 나선 모양으로 되접혀 하늘과 땅 사이에 떠 있는 운동 안에서 변곡을 연기하는데, 이 변곡은 곡률의 중심에서 무한정 멀어지거나 가까워지며, 그리고 어떤 순간 "높이 비상하거나 우리 위로 떨어질 위험을 지닌다." 하지만 수직적인 나선이 변곡을 억제하거나 연기할 때에는 언제나 수평면으로는 변곡을 예고하고 그것은 불가피한 어떤 형태를 만들게 된다.
예컨데, 물결의 소용돌이는 단독으로 만들어지지 않으며, 소용돌이의 나선은 프랙탈의 구성 방식을 좇아가는데, 이 방식에 따라 새로운 소용돌이들이 항상 앞선 소용돌이들 사이로 끼어든다. 소용돌이들이 바로 소용돌이들로부터 자라나며, 윤곽을 지우면서 오직 거품 또는 갈기 모양으로 끝맺음된다. 이런 원리로 변곡 자체가 소용돌이가 되며, 동시에 그 변동은 '요동'으로 빠져들고, 흔히 물이 '요동친다'고 말하게 되는 그 상태에 이른다. 사랑도 이런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것이다.
들뢰즈는, 변동을 주름으로 만들고, 주름 또는 변동을 무한으로 실어나르는 주름의 원천인 변곡에 주목했다. 들뢰즈는 그 변곡이 쌓인 것을 주름이라 칭하고 변곡을 일으키는 힘을 "거듭제곱"의 역량이라고 불렀다. 역량 자체가 현실태acte이며, 주름의 행위acte가 된다.
들뢰즈는 더 나아가 겹주름이 어떻게 만들어 지는지에 주목하여, 사람들은 감지하지 못한 채 주름에서 포함으로 이행한다고 본다. 이 둘 사이에서는 어떤 간극이 생산되는데, 이것이 겹주름을 만든다. 주름잡혀 있는 것, 이것은 주름에 포함된 것이고, 이미 내속해 있는 것이다. 포함이 이루어지는 곳, 끊임없이 반복해서 이루어지는 곳, 또는 실현된 현실태의 의미에서 포함하는 것은 자리나 장소도 아니며, 시선점도 아니게 된다. 그것은 시선의 점에 머무르는 것이며, 시선의 점을 차지하는 것이며, 그것이 없다면 시선의 점이 하나일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영혼, 주체일 수밖에 없다고 본 것이다.
빛과 그림자가 어떻게 주름을 만드는지에 대해 라이프니츠는,
휘어지기 쉽고 탄력적인 하나의 물체는 또한 하나의 주름을 형성하는 결집된 부분을 갖고 그 결과 그 부분들은 부분의 부분으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응집력을 줄곳 유지하는 더욱더 작은 주름으로 무한히 분할된다(라이프니츠, 『단자론』)
라이프니치는 이 세상에 직선으로 던져져 곡선으로 휘게 되는 이유에 대해, 하나 또는 여럿의 매개변수에 의존하는 일군의 '곡선의 관념'을 제시한다. 이 세계가 직선으로 존재할 수 없는 이유다. 그것을 "주어진 하나의 곡선에 속하는 하나의 점에서 접하는 하나의 직선을 찾는 대신에, 무한한 곡선들에 속하는 무한한 점들에서 접하는 곡선을 찾는 데 전념한 것이다. 곡선은 접선에 의해 접해지는 것이 아니라, 곡선들에 의해 접하는 것이다. 접선은 직선, 유일한 것, 접하는 것이 아니라, 곡선, 무한한 군, 접해진 것이 된다."라고 그는 본 것이다.
그리하여 접하는 곡선의 "단 하나의 유일한 가변성"으로 변수들을 환원하는 '주름'이 만들어 진다. 대상은 더 이상 본질적인 형상을 통해 정의되지 않고도 순수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 만일 대상의 상태가 근본적으로 변화한다면, 주체 또한 마찬가지로 변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의 점이 아니며, 선에서 태어난 선 같은 것이라고 보았다. 들뢰즈는 이것을 시선의 점이라 부른다. 이것이 바로크 예술, 원근법의 토대가 된다. 이것은 미리 정의된 주체에 의존하지 않는다. 반대로 주체는 시선의 점으로부터 오는 것으로, 차라리 시선의 점에 머물러 있다고 본 것이다.
자신의 시선점으로부터 붙잡는 것, 변곡을 포함하는 것은 언제나 영혼이라고 말한다. 변곡은 자신을 포괄하는 영혼 안에서만 현실적으로 실존하는 이상이 되거나 또는 잠재성이 된다. 이렇게, 이것은 주름들을 갖는, 주름들로 가득 찬 영혼이 만들어진다. 주름들이 영혼 안에 있으며, 그리고 영혼 안에서만 현실적으로 주름은 실존하게 된다. 이것은 물리적인 점이나 수학적인 점이 아닌 형이상학적인 점인데, 라이프니츠는 이 형이상학적인 점인 영혼 또는 주체에 "모나드"라는 이름을 부여한다. 이것은 모든 것을 "접어ㅡ아우르는" 세계가 <영혼>이다. 안으로 <접힘ㅡ밖으로 펼침ㅡ한데 접어 아우름>을 통해 주름의 삼위일체를 형성한다.
바로크 건축은, 안에 있는 사람 자신은 볼 수 없는 열린 부분으로 빛이 스치듯 들어오는 소성당과 방들을 설치한다. 그 최초의 작업 중 하나는 창이 없는 비밀스러운 방이 딸린 '스투디올로 데 피렌체 '에 있다. 따라서, 모나드엔 창이 없다. 모나드는 원자라기보다는, 하나의 독방, 제의실이다. 입구나 창이 없는 방, 여기에서 모든 작용은 내적이다. 외부 없이 순수 내부적인 상태로 닫혀 있는 것, 영혼 또는 정신의 주름 이외의 것이 아닌 자발적인 주름으로 뒤덮여 있으면서, 무중력 상태의 닫힌 내부인 것은 위층이다. 그 결과 바로크 세계는, 두 개의 벡터, 아래로 처박힘과 위로 밀어올림에 따라 조직된다. 거기서 빛은 흰색을 만들지만 그림자 또한 만들게 된다.
3.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오13,24-43
“하늘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 25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그의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 26 줄기가 나서 열매를 맺을 때에 가라지들도 드러났다. 27 그래서 종들이 집주인에게 가서, ‘주인님,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하고 묻자, 28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하고 집주인이 말하였다. 종들이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 하고 묻자, 29 그는 이렇게 일렀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30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
“밭의 가라지 비유를 저희에게 설명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37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르셨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38 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 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39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 40 그러므로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41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42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43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라고 전하는 마태오13,24-43은 마태오 복음에만 있는 단독 비유이다.
밀과 가라지의 비유는 지금까지 첫째, 밀과 가라지는 공존한다, 둘째, 마지막 날까지 그분은 인간을 기다리고 인내하신다. 인내는 곧 그분의 자비이다. 셋째, 그러나 마지막 날에 밀과 가라지는 함께 있을 수 없다. 넷째, (자기 혹은 신의)심판은 분명히 있다.
밀과 가라지, 그 비유의 청자는 군중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가 악을 양산하는 집단지성에 대한 경고 이면에, 개인의 자아실현의 궁극적인 지점에 대한 축복의 메시지로 읽을 수 있겠다.
밀과 가라지는 사람과 사람을 평가하여 바라볼 수도 있겠지만(이 사람은 밀, 저 사람은 가라지), 한 사람안에서 진행되는 신앙의 여정이라고 보는 것이 그분의 인내와 자비를 이해하는 관건이 될 듯하다. 개별적으로 밀과 가라지를 나누는 것이 얼마나 자기중심적 시선인가를 성찰해보면 이내 알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을 알곡이나 밀이라고 생각하지 가라지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 자기합리화의 어떤 틀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창조물이기 때문에 아무리 외적으로 표출된 것이 사악한 행위일지라도 그에게는 인간이라는 품위가 잠재되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과연 완벽한 사람이 존재할까를 생각해 보면 더 쉽게 수긍할 수 있는 부분이다. 내가 만난 그 누구도 완벽하지 않았고 이 글을 쓰는 사람 역시 완벽하지 않다. 그렇기에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개별화하여 바라보는 것은 대립적인 분열만 초래할 뿐, 비유의 궁극적인 목적인 자기실현에는 멀어진다. 이항대립적인 시선은 모든 문제의 출발점을 밖에서 찾기 때문이다. 밖에서 모든 문제의 근원을 바라보는 한 문제는 언제나 더 큰 문제를 낳는다. 오히려 나 자신 안에서 열매를 맺게 하는 밀과 열매를 맺는데 방해하고 지연시키는 가라지는 무엇인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인간이해의 관점, 자기실현의 과정에서 성찰의 대주제가 될 수 있을 듯하다.
그런 맥락에서 밀과 가라지의 비유는 자신의 신앙이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점검하는 성찰의 중간점검표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이 중간점검표는 누군가의 수련과정을 모델링하여 따라갈 수도 있겠지만 될 수 있으면 그 점검과정 역시 자기 스스로 진단하면 좋을 듯하다. 아프다는 것은 같지만 아픈 부위는 다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주어졌다는 것은 우리는 가장 고귀한 것을 생각할 수 있고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역량이 있음을 전제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적으로 인간은 어떤 사물처럼 ‘현전’하는 존재가 아니라 세계와 길항과정을 거쳐 ‘현존’하는 존재이기도 하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마태오13,24-43은 대략 다섯 단계의 성찰 과정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1단계, 나 아닌 것이 아니고서는 나도 없다.
‘주인님,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2단계, 나의 행복이나 충만함을 나는 결정할 수 있다.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
3단계, 유일한 실재 관계는 무엇인가?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4단계, 나는 아무 것도 결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결정할 수 있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5단계, 주어 자리를 비워놓은, 자기 자신에로의 완전한 귀환(Reditio completa in se ipsum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
1단계, 나 아닌 것이 아니고는 나도 없다,
우리가 이 세계를 이해하는 많은 시간은, 무엇보다 자신을 이해하는 단계의 대부분은, 비교우위에 할애한다. 이항대립적인 세계로 우리의 현존환경과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 이해는 우리의 생존과 직결된다. 이미 여러 글에서 언급 한 것이지만, 이는 어둠을 통해서 빛을 발견하는 것처럼, 현상을 통해서 말씀을 찾는 과정이다. 빛을 찾지만, 빛이 주어 자리에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빛으로 빛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길들여진 문화적 유전자에 의해 이 세상을 이분법으로 빛을 규정하고, 사람 역시 좋은 사람 나쁜 사람으로 일도양단하여 이분법으로 바라본 유아기의 세계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무엇이 나의 생존에 유리한가에 의해, 가치서열을 매기게 된다. 가치있는 것과 가치 없는 것을 분별하려는 강한 분별심이 작용한다. 이는 자연과학에 주로 사용하는 귀납법에서 일반화를 도출하는 것으로, 덕있는 사람의 처세술에 가까운 상태라고 할 수 있다. 현상에 초점을 맞추는 단계로 밀과 가라지가 분명히 구분된다고 생각하는 단계다. 우리는 그것을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리야에게서 바라볼 수 있다.
‘주인님,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라는 질문과
즈카리야가 천사에게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저는 늙인이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말습니다(루카5-25)라는 질문은 다른 맥락에서 나온 발화지만 거의 비슷한 어떤 가치판단의 사회적 유전자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가브리엘 천사의 세레자 요한의 출생예고에서 드러난 즈카리야의 태도는 우리가 생존의 최적화된 합리성을 자연과학에서 찾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신앙과 자연과학을 동의어로 바라보는 시점이다.
2단계, 나의 행복이나 충만함을 나는 결정할 수 있다.
누구나 가치판단을 하는 이유는 나에게 가치있는 것과 가치 없는 것을 결정하여 나에게 최적화된 행복이나 충만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엄밀히, 가치의 서열을 논하는 그 중심에는, 가치있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고, 가치 없는 것은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이 지배적이기에 이는 자기기만 혹은 욕망에 가깝다. 이것은 이 세계가 생산하는 일반화이지 보편화는 아닐 것이다.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기준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 희생관념이 끼어든다. 이 희생관념에는 가치기준에 두려움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라는 것에서, 나는 밀이다. 열매고, 소금이고, 빛이다, 라는 강한 확신이 지배적이다. 이것은 그분에게서 나온 정체성이 아니고 비교우위에서 나온 가치서열에 가깝다. 이 강한 확신은 나 자신을 이해하지 못할 때 나오는 주체성이다. 이 지배적 가치서열의 문제를 하느님의 뜻을 피땀을 흘리며 찾으셨던 그분의 기도를 통해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22, 42)
피땀을 흘리다, 라는 것은 수사적 차원의 고통의 정도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극한에서 나오는 생물학이다. 지옥까지 내려간 상태에서 인간은 실제로 피땀을 흘리게 된다. 자기체온보다 높으면 땀을 흘릴 수 있다. 그러나 피땀은 체온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가치체계를 송두리째 바꿀 때의 상태를 의미한다. 가장 지고한 것이 자장 치욕스러움과 함께 있다는 것을 바라보는 순간이 아마도 '피땀'일 것이다.
여기서 내가 가치있다고 여기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지, 즉 차선이지 최선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바라보는 것, 이 부분이 신앙생활하면서 가장 어려운 자기 성찰의 단계라고 할 수 있다.
3단계, 유일한 실재 관계는 무엇인가?
2단계를 지나면 우리는 우리가 진리를 모른다는 사실을 쉽게 인정하게 된다. 우리가 무엇을 모르는지를 안다는 것은, 무엇을 안다고 하는 것과 때론 동의어이기도 하거나 더 탁월한 앎이기도 하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지만, 우리의 신앙은 언제나 <모른다>라는 축복 앞에 서 있다. 모른다는 것이 축복이다? 그렇다. 우리의 열정이 우리의 무지에 바탕을 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분의 뜻을 정확히 모른다, 는 것을 인정할 때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고 우리 삶의 주어 자리를 비우게 된다.
가라지와 밀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을 인식하기 까지 도덕적 우월성을 신앙심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는 것을 바라보게 된다. 이 단계는 내가 가치있다고 여긴 것과 가치없다고 여긴 것이 실은, 길들여진 사회성, 이분법적인 가치판단이었으며, 귀납적 일반화였음을 알게되는 시점이다. 그 일반화가 보편적이지 않은 어떤 상대주의에 바탕한 것임을 알게되었을 때, 그때, 나에게 유일한 실재관계는 무엇인가를 진실로 묻게 된다. 이 단계에서 나를 결코 떠나지 않을 관계, 나 역시 결코 떠나지 않을 관계란 무엇인가를 동시에 묻게 된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1, 14)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10, 38-42)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강생의 신비는 우리가 갖고 있는 이분법적인 세계관을 전복시키는 <모른다>의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축복을 알아듣기 위해서 우리는 그분의 발치에 앉아 마리아처럼 그 어떤 활동보다 더 많이 머물러야 한다. 그 머무름에서 생각과 말과 행위가 도출되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사랑이라 부른다. 이때, 워크홀릭과 사랑을 다른 차원이라는 것을 바라보게 된다.
4단계, 나는 아무 것도 결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결정한다.
나 아닌 것이 아니고는 나도 없다, 고 명확하게 빛과 어둠을 나눌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에서 나 자신에게 진정 가치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묻게되는 단계다. 이때 나는 하느님의 뜻이 과연 나의 뜻이고 나의 뜻이 하느님의 뜻인가를 진정으로 성찰하게 된다. 그분의 뜻을 아는 유일한 길은 아무 것도 결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결정을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결정으로 나에게 주어졌다는 것, 운명론이 아니라 섭리를 믿게 된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을 재림이라는 종말론적인 미래의 어느 시점으로 바라본다면 복음은 언제나 추상적인 익명성으로 돌아간다. 수확은 자기 생의 기회, 주어진 삶의 날들로 바라볼 때, 이는 개별적인 자기 실현의 로드맵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누구인가를 아는 것은 그분이 누구인가를 아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분이 누구인지, 내가 누구인지 안다는 것은 너는 누구인지 안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 귀환의 과정은 밀과 가라지가 공존하는 여정이고. 밀도 자라고 가라지도 자라고 있음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것을 바라본다면 우리 자신의 주어자리를 비우게 된다. 내가 아니고 그분이 나에게, 라고 나는 부사 자리로 옮겨 앉게 된다. 우리가 주어자리에 있을 때, 무엇이 밀이고 무엇이 가라지인지 명확하게 구분하지도 못하고, 그것을 어떻게 재배치 할 수 있는 지는 더욱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선물로 주어졌다는 것은 창조주의 무한한 인내심을 전제로 한다.
5단계, 주어 자리를 비워놓은, 자기 자신에로의 완전한 귀환(Reditio completa in se ipsum
진정으로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고 주어 자리를 비워놓았을 때, 그분에게서 오는 평화와 기쁨을 알게 된다. 여기서 부활의 일성이 왜 평화와 기쁨인지? 왜 사랑이 아닌지를 알게 된다. 평화와 기쁨은 존재의 어떤 상태를 의미한다. 사랑은 행위다. 존재하기에서 행하기가 나온다는 것을 알게되는 것이며, 이는 존재하기가 곧 사랑하기란 것을 바라보는 것이기도 하다.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
여기서 밀과 가라지를 구분할 수 있는 것도, 그것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재배치하는 것도 우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오직 천사라고 일컫어지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세상에서 두 번의 평화를 산다. 하나는 칼을 경험하는 평화고, 하나는 칼이 사라진 평화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오10,34) 성령을 받아라! 평화가 너희와 함께!(마태오28, 16,20/마르코1614-18/루카24, 36-49/요한2019-29)
밀과 가라지의 비유에서 보여주는 성찰의 1~3단계 까지는 우리가 마치 모든 것을 결정하고 선택하는 우리 삶의 주어자리를 차지한 듯하다. 이때 우리는 칼을 쥐고 있는 평화의 시대를 산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삶의 주어가 될 수 없는 이유는 들뢰즈와는 다른 관점으로 주체는 없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서 칼이 사라진 명백한 평화를 살 수 있다.
왜 이런 이원적 평화의 차원을 살아야 하는가는, 밀과 가라지를 명확하게 분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왜 그분의 전능이 빛과 어둠을 공존하게 하셨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우리가 늘 선을 추구하지 못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주어졌는지 사랑때문이라고 두리뭉실로밖에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창조의 모든 신비를 알고 그것을 재배치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삼위일체 하느님의 영인, 성령이시다.
여기서 우리는 기꺼이 우리 삶의 주어자리를 비우게 된다. 한손에 평화, 다른 한손엔 칼을 들고 주체가 되려했던 그 칼을 기꺼이 버리게 된다. 주제성과 정체성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아마도 그것이 불태운다고 할 수 있는 어떤 자기 인식의 결단일 것이다. 자유의지를 봉헌하는 것, 아무 것도 내 스스로 결정하기 않겠다는 결정이야말로 우리가 그토록 갈구하는 평화와 기쁨을 아는 즉 부활의 삶을 사는 길일 것이다. 부활하신 그분의 사랑이 언제나 이긴다. 그때, 사랑을 원하지 않고 사랑을 믿게 된다. 청원의 기도를 하지 않게 되었을 때, 그때, 느끼는 충만함이 곧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믿음이 곧 사랑이고, 희망이 곧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주어 자리를 비워놓는 자기 자신에로의 완전한 귀환(Reditio completa in se ipsum)]
“자기 자신에로의 완전한 귀환(Reditio completa in se ipsum)”은 토마스아퀴나스가 『신학대전』에서 인간이해의 정점에 관한 발언으로, 인간의 삶은 자기 실존의 이중성을 지닌채, 결국 완전한 자기자신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바라본 데서 비롯된다. 인간은 세계내 존재로서 감성적으로 이 세상을 체험하지만 그 체험된 대상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킬 때에만 자신이 결국 신으로 정향된 존재임을 알 수 있고, 그것이 인간의 궁극적인 자기 실현이라고 바라본 것이다. 인간은 결국 감성의 힘으로 성취되지 않고, 정신적 실체인 지성으로 자신을 대상화하여, 성찰하고 사유할 수 있는 한에서 ‘현전’이 아니라 ‘현존’이라고 바라본 것이다.
밀과 가라지의 비유는 온전한 너 자신으로 돌아가라. 사랑을 원하지 말고 사랑을 믿어라! 너라는, 자기 자신에로의 완전한 귀환(Reditio completa in se ipsum)을 하는 과정에서 밀과 가라지를 스스로 분별하고 소멸하려 하지 말고, 하느님의 시간을 믿어라. 성령께 온전히 의탁하라! 스스로 네가 될 수 없으므로, 네가 너를 비울 때, 너는 비로소 네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밀과 가리지의 비유는 내가 너에게 무한히 인내하듯, 너도 너 자신을 믿고 무한히 인내하라는 격려의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주님의 사랑을 원하지 말고, 창조의 , 부활의 그 사랑을 믿어라!
글을 마치며,
“밭의 가라지 비유를 저희에게 설명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37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르셨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38 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 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39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 40 그러므로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41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42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43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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