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복되고 아름다워라! 제 십자가를 지고 J를 따르는 사람들!

나뭇잎숨결 2023. 6. 30. 07:18

 

복되고 아름다워라! 제 십자가를 지고 J를 따르는 사람들!

-연중13주,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을 중심으로

 

 

 


1. 한낱 꽃 같은 심장(心臟)으로 침몰하라(서정주)

2. 십자가는 어떤 사랑을 말하는 것인가?

3. 복되고 아름다워라! 제 십자가를 지고 J를 따르는 사람들!


 

1. 한낱 꽃 같은 심장(心臟)으로 침몰하라(서정주)

 

 

 

서정주의 「바다」를 읽어본다.

 

귀 기울여도 있는 것은 역시 바다와 나뿐.밀려왔다 밀려가는 무수한 물결 우에 무수한 밤이 왕래하나/길은 항시 어데나 있고길은 결국 아무 데도 없다.//아 ─ 반딧불만한 등불 하나도 없이/울음에 젖은 얼굴을 온전한 어둠 속에 숨기어 가지고…… 너는,/무언(無言)의 해심(海心)에 홀로 타오르는/한낱 꽃 같은 심장(心臟)으로 침몰하라.//아 ─ 스스로히 푸르른 정열에 넘쳐/둥그런 하늘을 이고 웅얼거리는 바다바다의 깊이 우에/네 구멍 뚫린 피리를 불고…… 청년아.//애비를 잊어버려/에미를 잊어버려/형제와 친척과 동무를 잊어버려,/마지막 네 계집을 잊어버려,//아라스카로 가라 아니 /아라비아로 가라 아니 /아메리카로 가라 아니 /아프리카로 가라 아니 //침몰하라침몰하라참몰하라!/오 ─ 어지러운 심장의 무게 우에 풀잎처럼 머리칼을 달고/이리도 괴로운 나는 어찌 끝끝내 바다에 그득해야 하는가./눈 떠라. 사랑하는 눈을 떠라…… 청년아,/산 바다의 어느 동서남북으로도/밤과 피에 젖은 국토가 있다.//아라스카로 가라!/아라비아로 가라!/아메리카로 가라! /아프리카로 가라!

 

서정주의 「바다」는 어떤 선택 앞에 서 있는, 질주하는 청년의, 육박하는 심장의 파열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시다.

 

길은 항시 어데나 있고길은 결국 아무 데도 없다.’에서 화자인 나(청년)는 어디나 있는 길을 선택하느냐 오직 침몰하는 길을 선택하느냐의 기로에 서 있다.

 

화자가 선택할 수 있는 하나의 길은 너는,/무언(無言)의 해심(海心)에 홀로 타오르는/한낱 꽃 같은 심장(心臟)으로 침몰하라.에서 알 수 있듯, 바다에 침몰하는 길이다.

 

또 하나의 길은 아라스카로 가라!/아라비아로 가라!/아메리카로 가라! /아프리카로 가라!에서 알 수 있듯, 모든 인연을 등지고, 피에 젖은 다른 국토로 도피하는 길이다.

 

서정주의 「바다」에서는 선택의 준거는 <눈 떠라사랑하는 눈을 떠라>고 모아진다. 내륙의 길이든, 바다의 길이든 그 선택은 오직 사랑에게 물으라는 것이다. 사랑하라, 그리고 마음대로 하라,는 아오스딩 성인의 충고와 일맥 상통한다. 

 

 

 

 

 

분이가 곰배령 계곡에서, 탱큐!

 

 

 

2. 십자가는 어떤 사랑을 말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생의 무수한 선택 앞에서 무엇을, 어떤 기준에 의해 선택해야 하나? 

싸이트에 들어가면 2023년 오늘 세계인구는  8,041,449,382명이라고 나온다. 그들이 모두 나는 왜 이 세상에 왔는가? 라는 질문을 한다면, 혹은 나를 가장 행복하게  해 줄 선택은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그 어떤 질문에 대한 답도 <십자가>라는 것을 이 글을 말하려고 한다. 그 누가, 그 어떤 질문을 해도 그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똑같다. 수십억개의 질문에 단 하나의 답이 있을 뿐이다. <생명에는 영원이라는 지울 수 없는 도장이 찍혀 있기 때문이다.> 영원이라는 도장을 지울 수 있는 사람은 그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인간 역사가 진행된 이래 그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이 십자가라면, 십자가는 대체 무엇인가?

 

다음 글은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정호승의 <봄길>)] 에서 썼던 십자가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을 인용하였다. 

 

하느님은 왜 사람이 되셨는가?(안셀무스)라는 질문은 한 개인의 질문이 아니라 인류의 질문이다. 인류 역사가 시작한 이래, 그동안도, 오늘까지도, 앞으로도 계속될 저 질문에 대해 교회는 조직신학의 인간론에서 속죄론에 대한 다양한 통찰이 반론과 반론으로 이어지면서 예수성심으로 수렴되었다. 신학적으로  속죄론의 패러다임을 바꾼 신학자들의 사유를 살펴보면,

 

오르게네스(185-254)는 『원리론』에서 총체적 구원론인 <속량이론>을 통해 강생의 원리와 인간구원을 설명하려 했다. 그의 <속량이론>에 따르면 사탄이 인간들을 인질로 잡았기 때문에 인간에게 자유를 되돌려주려고 성자께서 인간이 되시어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셨다는 것이다. 오르게네스의 이론은 교회 안팎에서 그 자신조차 위기에 처하게 했지만, 오르게네스의 영성이라는 말이 오늘날도 회자될 정도로 속량이론이 초기 교회를 끌어갔다고 할 수 있다.

 

Ⓐ악마의 권세 아래서 행동하며 악마의 사악에 복종하는 이 계층들 가운데 어떤 존재들은, 자신들 안에 자유의지와 능력으로 말미암아 미래의 시대에는 언젠가 선으로 돌아올 수 있는가? 아니면 계속되고 고질화된 사악이 습관이 되어 마침내 본성처럼 죽어지는가?

 

그러나 겐테버리의 대주교 안셀무스( 1033-1109 )는 『하느님은 왜 사람이 되셨는가?』에서 육화된 신비를 인간 구원과 관련해서 <속량이론>에는 이성적 근거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속량이론>이 악마의 권리를 지나치게 인정하여 하느님의 절대적인 권능을 위협하는 듯하다는 것에서 안셀무스는 출발한다. 안셀무스는 하느님이 인간 본성의 비천함을 회복하고자 받아들인 ‘필연적인 이유’를 이성적으로 설명하려 했다.

 

죄에 대해 하느님께 빚진 것을 사람이 갚지 않는 한그 빚은 해결 될 수 없었다그 빚은 너무나 커서 하느님만이 갚을 실 수 있었다따라서 똑같은 인물이 사람인 동시에 하느님이어야 했다하느님께서 필연적으로 자신의 단일한 인격안에 인성을 취하셔야 했다그의 본질상갚아야 하지만 갚을 수 있는 분 안에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결국 하느님은 그 어떤 것도 필연에 의하지 않는다신이 자신의 불변성으로 인해 그가 시작한 일을 완성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안셀무스는 <속량이론>이 아니라 <대속이론>을 발전시켰다. 안셀무스에 따르면 하느님이 창조하신 세상의 아름다운 질서가 파괴된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잘못 썼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인간이 저지른 이 죄악은 너무나 커서 인간의 죽음으로 보상할 수 없다. 그런데 삼위일체 하느님은 본래 인간이 하느님을 직관하는 가장 큰 행복에 이르도록 지복직관의 상태에 이르도록 계획하셨다. 이 계획이 실현되려면 파괴된 세상 질서가 복구되어야만 한다. 즉 손상된 하느님의 정의와 명예가 회복되어야만 하는데, 그러려면 하느님만큼 무한한 가치를 지닌 존재의 자발적인 보상이 필요하기에 성자의 육화가 필연적이라고 보았다. 성부께서 시작하신 구원업적을 이루기 위해 하느님의 말씀인 성자가 자원하여 인간의 구체적 역사적인 인격적 본성을 취했다는 것이다. 이 육화를 통해 신적 로고스 안에서 인간의 본성이 치유되도록 구원받게 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안셀무스의 <대속이론은> 많은 신학자들의 비판에 직면했다. 안셀무스 자신에게 익숙했던 사회법적인 정의-교환정의에 따라 구원을 축소한 해석을 내놓았다는 것이다. 게르만족의 명예회복관습에 따르면 명예가 손상된 자의 품위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 화해할 능력이 없는 인간을 위해서 인간이 되신 하느님이신 그리스도가 오직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용서와 화해를 성취했다는 것은 아가페의 무조건적 사랑을 간과했다는 반론이었다.

 

안셀무스는 강생의 이유에 더 나아가 하느님의 육화는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된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시려는 것이기에 하느님의 이 계획은 실패할 수 없는 없으리라는 것이 '필연적인 이유'라고 덧붙인다. 각 사물에는 올바름 즉 신적인 조화가 존재하므로 모든 피조물에 내재한 올바름은 하느님께서 전능하신 언제나 올바른 것을 원하시기에 최종적으로 결코 실패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이 자원하여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섭리의 필연성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조화를 이룬다는 것에 주목하여 11세기 이후, <대속이론>이 교회의 교의를 이끌게 된다.

 

그러나 성자의 죽음이 지닌 효력만을 강조하다보니 그리스도의 고통이 갖는 구원론적 가치를 충분히 조명되지 못했다는 비판이 항상 제기되었다. 또한 죄없이 돌아가신 성자의 업적과 죄지은 인간의 차이를 강조하다보니 교부들이 주장하는 그리스도와 신자들과의 관계 <머리와 지체의 관계>를 설명할 길이 실종되었다는 것이다. 안셀무스의 <대속이론>이 죄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그리스도와 인간 사이의 유기적 연결을 찾기가 어렵다고 본 것이다.

 

안셀무스 저서의 주 번역자인 박승찬 교수는 안셀무스의 <대속이론>은 하느님과 외부세계를 본질적으로 반대되는 위치에 놓고 있다는 점에서 교회사 안에서 복음주의와 자유주의는 늘 충돌했다고 설명한다. 이것은 강생의 신비와 십자가신학을 아우르는 사랑이 인간의 이성으로는 해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 신비이며 이를 해명해야 하는 숙제를 인류에게 안겨준 셈이라고 바라본 것이다.

 

페투르스 아벨라드두스(1079-1142)는 『속죄의 본질』에서 안셀무스의 대속이론을 <창조신앙>으로 비판한다. 인간의 이성으로만 사랑이신 신 존재증명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가페 사랑은 이성의 측면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에서, 하느님이 자신을 위해 자신을 속죄제물로 바쳤다는 것에 대해 마치 십자가의 죽음을 하느님의 정의의 실현으로 둔갑시켜 구약으로 시계를 돌려놓았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피가 어떻게 인간의 죄를 정화시켜주었는지? 신의 정의가 충족되어야지만 신의 자비가 실행되는 것인지? 사랑보다 더 큰 죄가 있는지? 등을 안셀무스가 간과했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사랑입니다요한 1서에 35이나 나오는 바로 그 사랑이십니다천지를 창조하신 하느님이 사람을 살리기 위해 사람으로 나신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있겠습니까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주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있겠습니까하느님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은 하느님의 속성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속성을 행사하는 것을 포기하신 것입니다그것이 사랑입니다.”

 

페투르스 아벨라드두스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이 강생신학과 십자가신학을 아우르는 총론이라고 바라본 것이다. 하느님이 창조한 인간을 죄지은 인간으로만 국한시킬 수 없다는 창조신학이다. 인간이 죄를 짓는 순간조차도 인간은 더 큰 인간의 위의가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죄가 아무리 클지라도 하느님의 사랑보다는 클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사랑은 그 어떤 교환행위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 않는 아가페라고 바라본 것이다.

 

인간의 죄는 인간의 한계를 의미한다. 인간의 한계와 신의 사랑의 무한은 교환불가능하기에 비교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신은 분명 마리아를 통하지 않고도 이 세상에 올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같은 맥락으로 십자가의 죽음이 아니고도 당신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하실 수 있으셨을 것이라는 게 안셀무스 이론에 대한 반론의 초점이다. 굳이 십자가여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오직 조건없는 사랑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빛으로 어둠이라는 죄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으로 창조신앙의 원천인 사랑에 방점을 찍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와 동시대를 살다가 얼마전 하느님으로 품으로 가신 요셉프 라칭거 추기경(베네딕토16세교황, 1927-2023)은 십자가에서 보여준 그 사랑은 무엇인가에서 코린토전서 15장 45절에서 예수를 마지막 아담으로 규정한 바오로의 견해와 같은 선상에서 마지막 아담, 궁극의 인간상으로 이를 설명한다.

 

Ⓓ 십자가는 계시이다십자가는 아무것이나 계시하는 것이 아니라 신과 인간을 계시한다십자가는 신이 누구이며인간이 누구인가를 드러내준다(...) 액체 호모(ECCE homo) 보라이것이 그 사람이다(요한19,5) 인간이란 이런 것이다.(...) 인간적 실패의 심연에서 그보다 훨씬 그지없는 사랑의 심연이 드러나는 것이다.(159,231)

 

라칭거 추기경은 히브리서 9,12에서 그리스도의 단 한 번의 피로 인간과 화해를 이루었다는 것을, 피를 하나의 물질적- 물량적인 속죄수단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인간이 비로소 하느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다는 것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관점에서,

 

요한 13, 1절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며,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것에 방점을 찍는다,  아담이 아닌 마지막 아담인 예수가 자기 자신 이상도 이하도 아닌 사랑의 총량을 타자(인류)에게 내어준 그 사랑을 초점화한 것이다.

 

이것은 코린토전서15장45에 "첫인간 아담이 생명체가 되었다면 마지막 아담은 생명은 주는 영이 되었습니다에서, 예수를 마지막 인간, 즉 궁극의 인간으로 바라본 것이다.

 

무엇보다 빌라도가 유대인들의 고발에 편승해 예수님께 자주색 옷을 입히고 죄인으로 군중 앞에 세우며 한 말, 액체 호모(ECCE homo) 보라이것이 그 사람이다”(요한19,5)를 인간이란 이런 것이다”의 반전의 의미가 바로 예수가 사람이 되시어 오신 궁극의 이유라고 바라본 것이다.

 

예수님이 사람이 되신 이유의 총론은 하느님 사랑의 계시라는 것이다. 그 총론의 몇 번째 항에 사람의 죄를 용서하신 항목이 있을 수 있겠지만, 예수님의 공생활 전반은 인간의 모든 실존의 상황, 부자유로부터 해방이기에, 속량이론이나 대속개념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사랑을 온전히 담을 수 없다고 바라본 것이다. 마치 삼위일체 교리를 인간이 이해하는 것은 조개껍질로 바닷물을 담으려 하는 것과 같다고 본 것이다. ‘모든 이의 모든 것’이야말로 십자가 사랑이라고 바라본 것이다.

 

 

 

 

 

 

 

3. <십자가를 지지 않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연중 13주 복음 마태오 10,37-42은 ‘십자가’는 우리에게 어떤 답을 들려준다. 우리가 어떤 답을 얻고 그 답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는 복된 것이고, 그 얻은 답을 기쁘게 산다면 그 삶을 아름다울 것이다. 그렇다면 십자가는 우리에게 어떤 답을 들려주는가?

 

 

 

 [1] 십자가는 에우카리스티야(Eucharistia, 감사)다.

 

성체성혈대축일일 때 바라본 감사(에우카리스티야Eucharistia)는 십자가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십자가를 모르고는 자신의 생이 얼마나 감사로 이루어진 기회인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38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9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감사와 십자가의 관계를 살펴보기 위해, 먼저 ‘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무엇인가부터 생각해보아야 할 거 같다. 제 십자가는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가 아니고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십자다가. 우리 각자가 지닌 생존의 조건들이 십자가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진 십자가가 분명히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와 다를지라도 그 십자가를 관통하고 있는 사랑은 같을 것이다. 십자가의 크기도 다르고 그 무게도 다르지만 십자가를 관통하고 있는 사랑은 같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십자가가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와는 무엇이 같은지부터 살펴보아야 할 거 같다. 예수님께 십자가는 부활과 함께 떨어질 수 없는 연결고리이다. 우리가 진 십자가도 부활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십자가다. 십자가로만 끝난 고통이라면 그것은 고통의 소비와 다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통은 곧 십자가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으로 연유된 십자가는 우리가 이 세상에 온 이유를 바라보는 것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하겠다. 월드싸이트에서 알려준  세계인구는 8,041,449,382명, 그 80억이 넘는 사람들이 모두 나는 왜 이 세상에 한 생명으로 왔는가?라는 질문을 한다면 그 대답이 바로 십자가라는 것을 바라보기 위해서, 

 

제 십자가를 지는 이유는 우리 각자가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그리고 세상 구원을 위해서 맡겨진 어떤 역할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애주애인의 계명을 지키는 일이라고 말하지 않고 왜 굳이 제 십자가를 지라고 하는 것인지 그 이유를 생각해 보게 한다.

 

사도신경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에서 우리가 지고 가야할 십자가의 본질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우리가 져야할 십자가를 알기 위해서 그분의 십자가는 무엇인가 생각해 보아야 할 듯하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신앙안에서 십자가는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는가?”십자가는 계시한다. 십자가는 아무것이나 계시하는 것이 아니라 신과 인간을 계시한다. 십자가는 신이 누구이며, 인간이 누구인가를 드러내준다.(요셉라칭거추기경)(요셉 라칭거 추기경, 『사도신경강해』

 

십자가에서 계시해 주는 신과 인간은 누구인가? 위에서 살펴본 대로, 흔히 십자가는 하느님의 무한히 모독당한 정의가 하나의 무한한 보속으로 다시 화해를 찾는 형태라고들 생각한다. 즉 십자가는 당위와 소유의 정확한 균형을 기본 삼는 태도의 표면으로 인간에게 나타난다고 보는 시각이다. 하여 마치 신이 인간에게 강요한 무한한 보속으로, 가차 없는 정의 때문에 자기아들의 희생을 요구한 아버지로 그려지고 있다. 이는 신약에서 보여주는 사랑의 복음을 믿을 수 없게 하는 정의에 초점이 놓여있다. 그러나 성서에서는 십자가는 모독된 정의구조로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십자가는 하느님과 인간의 화해, 즉 그 끊어진 무한한 사랑을 회복시키는데 초점이 놓여 있다.

 

하느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세상과 화해하셨다(2코린토5,19)당신의 피를 가지고 단 한 번 성소로 들어가시어 영원한 해방을 얻으셨습니다(히브리서9,12)하물며 영원한 영을 통하여 흠없는 당신 자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는(히브리서9,14)

 

바오로 사도의 통찰은 십자가는 인간과 신의 화해에 초점이 놓여 있다. 여기서 신과 인간의 화해란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제헌, 그 제헌은 의식적 전례의 범위 안에서 거행된 것이 아니라 세상이 지켜보는 가운데 만천하에, 백일하에, 죽음의 전과정을 통해 자기 자신을 봉헌하기 위한 참 성전, 하느님의 대전에 들어선 사건을 전제한다. 이것은 한갓 세속적 십자가사건이었던 것이 인류의 참 제사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십자가에서 흘린 그리스도의 피는 하나의 물질적 예물이나 물량적으로 헤아릴 수 있는 속죄 수단이 아니라 헌신과 제헌의 온전함의 표징하며, 자기 자신 그 이상과 이하도 아닌 사랑의 제헌에서 비롯된 참 봉헌을 의미한다.

 

이를 요한복음 사가는 <끝까지 사랑하셨다>라고 표현한다. 그 끝까지 사랑한다는 표현은 또 무엇인가? 하늘과 땅을 잇는 사랑, 사람과 사람을 잇는 사랑이야말로 끝까지 사랑하였다는 표현이 담지하고 있는 사랑의 폭일 것이다. 그 끝까지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피하게 찢김을 전제로 한다. 이을 수 없는 것을 잇는 사랑이기에 그렇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요한13.1)

 

여기서 십자가는 두개의 방향성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강생과 십자가 신학의 향방은 하늘과 인간을 향한 사랑이다. 먼저 제헌이라는 의미가 인간이 신에게 나아가 속죄의 제물을 바친 것이 아니라 신이 인간이 되어 인간에게 와서 인간에게 베푼 은혜로써의 제헌이라는 점이다. 신은 사랑의 힘으로 솔선하여 창조적 자비를 통해 인간을 의화하고, 죽었던 자를 되살림으로써 침해된 정의를 스스로 바로잡아 주신 것이다. 그리스도적 제사는 하느님 자신의 사랑이 인간적 사랑에 둠으로써 단 한분만이 줄 수 있었던 사랑의 절대성으로 성립한다. 하느님이 우리를 대신하고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느님이 차지하도록 함으로써 성립한 사건이 바로 십자가의 제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교적 제헌은 우선적으로 하느님의 구원행위를 감사하게 받아들임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리스도적 제의의 본질적 형태는 에우카리스티야(Eucharistia), 감사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선사받음으로써 그 감사를 알아봄으로써 성립한다. 우리 자신의 그 무엇을 하느님께 바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바침으로써 하느님을 유일한 주님으로 알아 모시는 것이 십자가 제헌의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그에 의해서만 우리는 영원한 생명으로 존립하는 존재의 터전을 가지게 된다. 그리스도교적 제헌은 우리가 드리지 않으면 하느님이 가지지 못할 그 무엇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전적으로 받는 자가 되어 우리 자신을 하느님이 차지하도록 내어드리는 것에 초점이 놓여 있다. 하느님으로 하여금 우리에게 역사하도록 우리는 내어드리는 일이, 하늘과 땅을 잇는 십자가의 사랑, 그 양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생은 선물이다. 그래서 에우카리스티야(Eucharistia), 감사를 알지 못하면 생의 그 깊은 맛을 알 수 없다. 하늘과 땅,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감사하는 법을 십자가는 알려준다. 

 

 

 

 

 

 

 

 

[2] 십자가는 보편적 사랑이다.

 

감사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받은 것에 감사를 한다는 것은 우리가 받은 사랑을 확장하는 일이다. 감사는 우리의 사랑과 고통에 그 답을 줌으로써 나눔을 구체화 한다. 구원받은 고통, 구원받은 사랑이라는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그 답이다. 그 답이 바로 사랑의 확장으로 이어진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주어진 사랑, 우리가 겪어내는 고통의 이름을 알게 한다. 분명 고통이 십자가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겪는 고통에 대해 십자가는 그 방향을 알려준다. 우리가 생에서  하는 질문의 대부분은 바로 사랑과 고통에 대한 것으로부터 파생한다. 고통이 고통 혼자 존재할 때, 그 고통은 우리를 죽음으로 이끈다. 그러나 고통이 사랑으로 인도된다면 그 고통은 우리를 부활로 이끈다. 사랑 역시 마찬가지다. 모든 사랑이 우리를 구원하지는 않는다. 어떤 사랑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지 십자가는 그 사랑의 방향을 제시한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로마5,5-11)

 

이 오롯하게 하늘과 땅을 잇는 이 제헌은 다시 하느님으로부터 인간에게로 향한다. 사랑을 모르는, 자신의 근원을 모르는, 고통의 이름을 모르는 이들을 위해서 고통과 사랑의 의미를 들어높인다. 그분이 십자가에 돌아가시던 순간 성전 휘장이 두 폭으로 찢어진 것처럼, 하늘과 땅을 열어 놓았다는 것은 하늘과 땅이 연결된 종적인 축복만이 아니라 그 축복의 지향이 나와 이웃과의 실존의 삶안에서 새로운 이정표를 세워주신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늘을 향했던 그 사랑은 동시에 인간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정 종교를 위해서가 아니라 만민을 위한 제헌이 되었다는 것이다. 고통받는 인류를 그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그분 자신을 제헌하신 사건이 십자가다.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마태오26,28)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어, 그 적개심을 당신 안에서 없애셨습니다(에페소2, 16)

 

이에 예수께서는 큰 소리를 외치시고나서 숨을 거두셨다. 그 때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찢어졌다.(마르코 15, 33-38/ 미태오27, 45-56/루카23,44-49/ 요한19, 28-30)

 

십자가의 사랑은 인간이라는 최소에 하늘이라는 최대가 담기는 사건, 유한에 무한이 담기는 사건, 인간에게 하느님의 사랑이 담기는 사건이기에 이 사랑은 그 사랑의 폭에 의하여 저 하늘에서 이 땅의 심연까지, 닿은 사랑이기에 이 사랑의 폭은 고통이, 파열이 불가피하다. 하늘에 봉헌된 사랑에는 모두 이 십자가가 있는 이유이다. -찢김, 균혈, 파열에 의해서 하나가 된다는 사실은 고통에 어떤 방향을 제시한다. 

 

인간이 겪는 고통은 인간 존재의 유한성 자체에 대한 근원을 가지고 있으며, 창조 자체에 근원을 갖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사랑은 항상 고난당하는 사랑이다. 사랑에는 오직 무죄한 고난만이 존재할 뿐이다. (위르겐 몰트만,『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신학자 몰트만은 인간의 고통에 대해, 인간은 그 자체로 유한하기 때문에 고통이 불가피하다고 바라본다. 우리는 그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유한한 인간끼리의 생존의 현장에서 언제나 이타적 유전자가 작동되지 않기에 고통을 주고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데, 고통이 창조자체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고 바라본 것을 무슨 이유일까. 몰트만은 창조때,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는 어둠을 상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데서 고통의 근원을 찾는다. 자유의지는를 제대로 쓸 수 없는 인간에게 창조의 선물로 자유의지가 주었다는 것은 사랑의 대 모험이라는 것이다. 사랑에 자유가 없다면 그것은 사랑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유를 쓸 수 없는 사람에게 자유가 주어졌다는 것은 자유의 딜레마라는 것이다. 신에게는 선악의 대립이 문제가 되지 않지만, 인간에게는 그것을 뛰어넘고 통합할 수 있을 때까지, 사랑은 항상 고난당하는 사랑일 수밖에 없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그 자체로 고난당하는 사랑이라고 바라본 것이다. 

 

십자가는 고통에만 어떤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도 어떤 방향을 제시한다. 모든 사랑이 구원받는 사랑이 아니라는 것은 사랑의 단계를 생각하게 한다. 

 

여기서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여기서 가족애도 아름다운데 왜 그 사랑이 합당하지 않다면 그 사랑은 아가페가 아니라는 것이다. 가족애, 그 사랑은 횡의 사랑만 있지 종의 사랑은 없다. 십자가가 없는 사랑은 정화될 수 없다. 하늘의 사랑이 담기지 못하는 사랑은 만민을 위한 사랑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늘에서 온 사랑은 크든 작든 십자가가 만들어진다. 크든 작든, 아버지과 우리의 사랑, 우리와 우리의 사랑이 만드는 십자가, 그래서 혈육과 가족애, 그 사랑은 아름답기는 하지만 공유된 사랑, 사랑의 확산을 어렵게 한다. 울타리를 친 사랑은 십자가의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사랑이 어려운 것은 사랑 자체를 반대해서 어려운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사랑이 아니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다. 십자가의 사랑만 보편적 사랑으로 확산되기 때문이다. 사랑의 신비다. 하느님의 집에는 울타리가 없다. 가족애에 머문 사랑은 몰아의 사랑인 아가페로 넘어간 사랑이 아니라 필리아에 멈춘 사랑, 에로스로 회귀하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다. 육체적, 본능적, 쾌락적, 교환적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랑은 자신을 넘지 못하기에 죽음을 넘지 못한다. 부활을 모르는 사랑이다. 

 

사람과 짐승들이 많아 예루살렘 성벽 없이 넓게 자리잡으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예루살렘을 둘러싼 불벽이 되고 그 한가운데에 머무르는 영광이 되어주리라-세번째 환시 측량줄(즈카리야2, 8-9)

 

한 사람이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을 살면 살수록 그는 사랑이 절대적 줌이면서, 동시에 절대적 받음이며, 절대적 제어이며, 그리스도의 십자가형에서 처해지는 절대적 곤궁이자 동시에 부활의 절대적 기쁨이라는 것을 체험하게 만든다(요한네쓰 로쯔, 『사랑의 세 단계』)

 

진정한 감사는 그것을 나누려 한다. 그렇게 보편으로 넘어간 사랑은 열린 사랑이 된다. 울타리가 없는 사랑이다. 자신을 넘어서고, 가족을 넘어서고, 죽음을 넘어선  사랑이 된다. 

 

 

 

 

 

 

[3] 십자가는 겸손이다.

 

 

감사와 보편으로 넘어간 사랑을 하기 위해 우리에게 겸손이 요구된다. 겸손은 유교적 겸양, 자신을 무조건 낮추는 예의범절이 아니라, 자신이 이 세상에 왜 왔는지를 바라보는 역할론적 네!에서 나온 겸손을 의미한다. 그래서 겸손은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예수님은 하느님을 끝까지 믿기때문에 십자가 못박힐 수 있는 것이지 겸손해서 십자가에 못박힌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포함관계에서 믿음은 겸손을 포괄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십자가를 겸손이라고 하는 이유는 우리는 십자가를 지는 것이지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40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4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보다 분명해 진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전제는 <너희>혹은 <제자>를 해명하는 키워드라고 할 수 있다. 너희는 제 십자가를 진 사람들이자 하느님나라를 위해서 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다. 하느님과 하느님나라를 위해 자신의 역할을 통해 보편적 사랑을 확산시키는 이들이 너희이자 제자라고 할 수 있다.

 

코린토2서12장 1-10에는 셋째하늘까지 불들려 올라간 바오로 사도의 환시체험과 계시, 그리고 인간적 약점인 가시에 대한 고백이 연이어 나온다. 제 십자가를 진 사람은 누구나 그분의 전능과 자신의 인간적 약함을 동시에 경험한 이들이다. 바오로 사도는 그것을 가시라 불렀다.

 

내가 자만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 나를 줄곧 찔러 대 내가 자만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8이 일과 관련하여, 나는 그것이 나에게서 떠나게 해 주십사고 주님께 세 번이나 청하였습니다. 9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10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

 

바오로사도는 자신이 깨달은 것을 무엇이든지 행동으로 옮기는 투사형의 사람이었지만, 달변가인 베드로와는 달리 눌변가였다고 전해진다.(2코리토11.6) 또 바오로는 가시라 불리는 지병을 앓고 있었다. 바오로의 적대자들은 그의 편지는 무게가 있고 힘차지만, 직접 대면하면 그는 몸이 허약하고 말도 보잘 것 없다(2코린토10.10)고 평하기도 하였다. 하느님께 받은 엄청난 계시와 그 계시를 지키는 가시의 약함, 십자가는 전능의 무능을 바라보고, 그것을 동시에 사는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겸손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이라고 부를 때 그의 약함에 초점을 맞추면 받아들이기 어렵다. 사실, 그리스도의 메신저들은 바오로나 베드로사도처럼 인간적 약점을 지닌 <철부지 어린이> 같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사람은 자신의 치명적 약함을 알기에 그런 자신에게 하느님의 진리가 담겼다는 것도 분명히 바라본 사람들이다. 자신에게 진리가 담겼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 세속에  물들지 않은 정직한 생각은 하느님의 거룩한 전령이 된다. 그 정직한 생각위에  예수님의 평화가 머물기 때문에 자신의 약함을 알면서도 소명을 다하게  된다. 

 

따라서 자신의 인간적 약함을 알기에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으려 한다. 오히려 이름을 감춘다. 자신의 약함때문에 믿음이 없는 누군가가 걸려 넘어질 것을 염려해서다. 그래서 진리를 앞세우고 자신의 이름을 서슴없이 지운다. 가나안 땅을 앞에두고 들어가지 못했던 모세가 되지 않으려고 늘 성령의 도우심을 구한다. 가장 고귀한 것을 갈망하고 부단히 영적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를 먹고도 굶어죽어간 선조들을 따르지 않기 위해서이다.  내가 전하는 메시지가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면 그 메시지를 계속 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사람들은 세속의 가치기준으로 부족하기 짝이 없는 사람일 경우가 많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완벽주의자는 하느님을 알기가 어렵다우리는 그분으로 인해 완벽해지는 것이 아니라 완전해지는 것이다. 그분 역시우리에게 완전해지라고 요구하지 완벽해지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완전하다는 것은 하느님의 전능과 자신의 약함을 동시에 아는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 사람을 받아들이는 사람 역시 하느님의 전능과 인간의 약함을 혼동하지 않기에 하느님의 메신저를 알아보게 된다. 그들이 메신저가 받을 상을 함께 받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전능과 약함을 동시에 바라보는 것이 이미 하늘의 상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메신저들은 멀티플레이어가 아니다. 마태오 사도는 이를 <작은 이>라고 부른다.

 

그런 맥락에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세상에 올 때, 나의 역활이 있다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자, 분완전한 나 자신을 감당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나를 감당한다는 것은 나를 제헌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나의 역할이 분명히 있지만 모든 면에서 나는 멀티플레이어가 아니라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멀티는 '복수의', '다중의'의 의미를 갖는 접두어로, 영어의 접두어인 'multi-' (많은, 여러, 다중의, 복수의, 다양한, 곱절의)에서 유래되었다.)

 

바오로와 베드로 사도를 보더라도 그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완벽한 사람으로 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세는 자신은 말을 하지 못한다고 했을 정도다. 도구로 불리움을 받은 사람들은 치명적으로 약한 부분들이  있다. 하느님의 권능과 인간의 약함을 동시에 지는 것이 제 십자가를 지는 일이자, 우리의 역할을 수행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의 기준으로 아주 <작은 이>라고 할 수 있다.

 

성모마리아의 덕행을 일컬을 때, “성모님은 영혼에 관련된 일이 아니라면 외출도 삼가하셨다”는 말이 나온다. 믿음이 약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메신저들은 하느님처럼 모두 전능할 것이라는 기대를 한다. 성모님도 그 점을 염두하셨을 것이다. <비천한 이를 들어 높이셨다>는 마니피캇의 노래처럼 당신의 약함 때문에 믿음이 약한 이들이 걸려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한 지혜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그분이 주신 역할을 하는 것도 어렵지만 그런 그들을 그분의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것 역시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반복해 말하지만 주님의 사람들이 멀티플레이어로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지닌 약점보다 그들이 지닌 강함을 먼저 바라보아야 그들이 그분의 사람으로 온 메신저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예언자는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고 한 것도 그래서 나온 말일 것이다. 인간적 약점을 적나라하게 목격한 이들이 저 사람이 하느님의 메신저라고?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분을 받아들이는 이들 역시 그분의 일을 하는 사람과 똑 같이 하늘의 상을 받는 것은 너무나 하느님나라다운 상찬이라고 할 수 있다.

 

위의 논의를 종합하면 이 세상에 올 때 우리는 누구나 이 세상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역할을 갖고 왔다는 것이다. 그것이 기쁨이고 행복이다. 그것을 아는 것이 지복이다. 그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이 있다는 말로 바꿀 수 있다. 그 나의 작은 사랑이 나를 구원하고 세상을 구원하는데 일조를 한다. 내가 해야 할 사랑, 십자가는 다른 말로 내가 해야 할 사랑이 있다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기에 십자가는 진정한 겸손의 표출이라 할 수 있다. 진정한 겸손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짐을 기쁘게 받아들임>이라고 할 수 있다. 진정한 겸손은 땅에서의 모든 뜻이 세상을 구원하는 하늘의 계획임을 바라보는 것이기에, 진정한 평화를 회복시키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가르멜 수녀원에서는 종신서원할 때 꽃 십자가에 엎드린다. 진실로 십자가를 통해 자신을 제헌하는 것이 감사이며, 보편적 사랑을 하는 것이고, 겸손하게 하늘의 뜻을 받아들인 것이라면 당연히 그것보다 복되고 아름다운 것은 없을 것이다.

 

마태오 10,37-42를 묵상하면서 아름다운 한 자매와 그리고 아름다운 지인들을 생각했다.

 

아름다움1-한 자매, 그녀는 선천성 신체불구로 태어나 해맑은 미소에도 불구하고 평생 누구도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은둔의 삶을 살았다. 그녀의 영혼은 너무나 아름다웠지만 그녀의 감성 그 어느 것도 꽃피지 못했다. 그녀는 가끔 이런 말을 들려준다. 너무 힘들어요. 죽고싶어요. 주님 이제 저를 제발 데려가 주세요, 왜 저를 이런 모습으로 세상에 보내셨습니까? 라고 기도하면 ‘네가 하루를 살았다는 것이 바로 기도다.’ 라는 응답을 받는다고 한다. 살아있다는 자체가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 그런 십자가는 그 자매 홀로 졌을 수는 없다. 언제나 함께 그 십자가를 지고 가셨던 그분이 계셨기에  가능한 아름다움이었을 것이다. 아름다움은 때론 심장이 그대로 찔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 

 

아름다움2- 지인들과 일주일에 한번 지방의 어느 지하철역 근처의 카페에서 스터디모임을 한다. 우리는 영적으로 인격적으로 다듬어지지 않은 20대 때 만난 이들이라 서로의 인간적 약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서로의 약점에 걸려 넘어지지 않으려 노력한다. 각자, 하늘이 맡겨주신 역할이 있다는 것만을 받아들이려 한다. 그 역할을 더 잘하기 위해, 그리고 우리의 순례가 어느덧 7부 능선을 넘어섰다는 것을 알기에, 언제든지 너 이제 와라, 라고 그분이 귀천을 명하셔도 네! 라고 하기 위해, 서로에게서 영적 피드백만 주고받는다. 우리는 스터디모임이 끝나고 밥도 먹지 않고 헤어진다. 우정을 돈독히 하는 친교가 중심이 아니라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가 우리에게 주어진 역할의 키워드라는 것을 공감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 가운데 누군가에게 힘든 일이 생기면 말로 위로하지 않고 사순절 묵상기도를 같은 시간에 40일 동안 한다. 십자가의 사랑이 아니라면 그 시간에 어떻게 다른 성향을 지닌 사람들이, 이미 사회적으로 할 일이 태산인 사람들이 함께 모여 하느님 보시기에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하겠는가. 모임 끝나고 서울로 돌아올 때, 그들이 얼마나 겸손하고, 숭고하고, 뜨겁고, 열린 사람들인지 그들이 너무 고맙고 아름다워서, 복된 만남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신 그분께 말로 표현할 수 없이 감사해서 뜨겁게 운 적도 많았다.

 

내가 지고가야 할 십자가가 무엇인지 아는 것, 이 땅에서 이 순례의 여정에서 내가 해야 하는 사랑을 아는 것, 그리고 그분의 일을 하는 것, 또 그분이 보낸 사람들을 알아보는 것, 아니 인류를 모두 형제로 알아보는 것, 이 모든 것은 사실 인간의 눈으로는 불가능하다. 오직 그분의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가능한 일이다. 여기서 겸손은 물위를 걷는 기적을 믿는 것처럼 굳건한 믿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성령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제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고 지고 갈 수 있다. 성령이시여! 우리를 이끄소서!

 

자신의 십자가를 알때, 그 십자가는 인생의 모든 것을 답해준다. 자신이 왜 한 생명으로 왔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이 사랑은 무엇이고, 이 고통은 무엇인지? 답을 모르고 가는 인생은 참 고달프다. 그러나 예수님으로부터 답을 듣고 가는 인생은 복되고, 참으로 아름답다!

 

지금 인류가 80억이라면 누구에게나 주어진 고통과 사랑의 이름이 있을 것이다. 복되고 아름답다는 것이, 오직 십자가에 그 답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  짓눌리는 고통에도 답이 있고, 애달픈 사랑에도 답이 있다. 하늘과 땅을 잇기 위해서 하는 사랑은 그 자체로 제헌이라는 답이 있다.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고 묵상하고 그 십자가가 알려주는 사랑을 하려고 한다면,  십자가는 우리에게 가장 아름다운 사랑을 하도록 돕는다. 심장에 화살이 박힌 것 같은,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성심이여! 라는 기도가 저절로 나오는  높고 귀한 사랑을 알려준다. 유한한 우리가 영원한 사랑을 할 수 있도록 말이다. 불멸의 사랑, 그 불가능해 보이는 아름다운 길로 성령은 우리를 이끈다. 

 

허연 시인은 「조개무덤」이라는 시에서 “살고 싶을 때 바다에 갔고, 죽고 싶을 때도 바다에 갔다.”라고 쓴다. 나는 "살고 싶을 때 십자가를 바라보고, 죽고 싶을 때도 십자가를 바라본다" 라고 읽는다.

 

 

 

글을 마치며,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8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9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40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41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4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아멘!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