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에피쿠로스의 정원에서 에우카리스티아(Ευχαριστια감사)의 정원으로

나뭇잎숨결 2023. 6. 16. 07:00

 

분이가 보내준 보랏빛 유월~탱큐

 

 

에피쿠로스의 정원에서 에우카리스티아(Ευχαριστια감사)의 정원으로

-연중11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를 중심으로

 


1. 복효근, 「틈, 사이」에서 '하나'가 된다는 것
2. 벤야민, 『일방통행로』, 사회적 유토피아의 상태인  '우리'로
3.에피쿠로스의 정원에서 에우카리스티아(Ευχαριστια감사)의 정원으로
                 -가족주의에서 보편주의로 

 

 

1. 복효근, 「틈, 사이」

 

 

잘 빚어진 찻잔을 들여다본다/수없이 실금이 가 있다/마르면서 굳어지면서 스스로 제 살을 조금씩 벌려/그 사이에 뜨거운 불김을 불어넣었으리라//얽히고설킨 그 틈 사이에 바람이 드나들고/비로소 찻잔은 그 숨결로 살아 있어/그 틈, 사이들이 실뿌리처럼 찻잔의 형상을 붙잡고 있는 게다//틈 사이가 고울수록 깨어져도 찻잔은 날을 세우지 않는다/생겨나면서 미리 제 몸에 새겨놓은 돌아갈 길,/그 보이지 않는 작은 틈, 사이가/찻물을 새지 않게 한단다//잘 지어진 콘크리트 건물 벽도/양생되면서 제 몸에 수 없는 실핏줄을 긋는다/그 미세한 틈, 사이가/차가운 눈바람과 비를 막아준다고 한다//진동과 충격을 견디는 힘이 거기서 나온단다/끊임없이 서로의 중심에 다가서지만/벌어진 틈, 사이 때문에 가슴 태우던 그대와 나//그 틈, 사이까지가 하나였음을 알겠구나/하나 되어 깊어진다는 것은/수많은 실금의 틈, 사이를 허용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네 노여움의 불길과 내 슬픔의 눈물이 스며들 수 있게/서로의 속살에 실뿌리 깊숙이/내리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복효근, 「틈, 사이」 는 존재론과 관계론을 아우르는 시다.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자기 몸을 헤집고 새로운 생명으로 탄생하는 과정에서 틈, 사이 혹은 균혈을 내장한다. 이 틈과 사이, 균혈이 다른 재질을 만나고 받아들일 때, 날카로운 송곳이 되지 않는 이유는 존재론보다는 관계론에 방점을 찍었기 때문일 것이다. 

 

잘 빚어진 찻잔은 흙과 불과 물, 바람, 도공의 손이 만나는 과정에 그 재질의 차이 때문에 틈과 사이가 생긴다. 그 사이로 불길과 바람의 길이 만들어지고 실핏줄 같은 균혈이 흔적으로 남으면서 찻물이 새지 않는 찻잔이 된다. 잘 지어진 콘크리트 건물도 그런 양생의 과정을 겪는다.

 

하나 되어 깊어진다는 것은/수많은 실금의 틈, 사이를 허용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네 노여움의 불길과 내 슬픔의 눈물이 스며들 수 있게...

 

하물며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서 사이, 틈, 균혈은 불가피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 존재론적 충돌이다. 오히려 이 충돌이 전혀 없는 관계가 이상하다. 만약 이 충돌이 없다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 권력을 행사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이일지라도 서로가 피워내야 할 생이 다르므로 틈과 사이와 균혈은 불가피하고, 필연적이다.

 

그런 맥락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것은 틈과 사이, 균혈을 안고 깊어진 관계를 의미한다. 우리가 어떤 관계를 감당하는 것은 틈, 사이, 균혈을 두려워하지 않은 미완성에 대한 수용이라 할 수 있다.

 

 

 

 

로사가 벤쿠버에서 ~ 탱큐

 

 

 

 

 

 

2. 누군가를 아무 희망없이 사랑하는 사람만이 그 사람을 제대로 안다(벤야민, 『일방통행로』)

 

 

 

벤야민은 『일방통행로』(1928)에서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는 이질적인 것, 모순, 양극적인 것으로 가득차 있으므로 실존 자체가 이미 긴장감을 내장하고 있기에, 외적인 전쟁이 없어도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과 내적인 투쟁 속에 놓여있다고 진단했다. 그렇기에 그런 내적 투쟁을 겪는 인류가 어떤 공동선을 추구한다는 것은 불가피하게 파열을 감당할 수밖에 없다고 전제한다. 

 

벤야민의 미학은 신의 아우라를 상품미학으로 끌어다 쓸 정도로 인간은 신에게서도 그 미학을 차용한다는 측면에서 기술복제시대를 예견한 미학자다. 그는 자기모순이라는 내적 긴장감과 사회모순이라는 외적 긴장감의 길항작용이야말로 실존의 현재성이라고 보았다. 그것을 <영원의 이면>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아포리즘적 단편들을 『일방통행로』에서 기록하여 남긴 바 있다.

 

토르소. 자신의 과거를 강압과 고난의 소산으로 바라볼 줄 아는 사람만이 그 과거를 현재의 순간에 최고로 가치있게 만들 줄 알 것이다. 우리가 살았던 과거는 기껏해야 은둔 중에 모든 사지가 잘려나간 아름다운 형상에 비유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 형상은 이제 우리가 우리의 미래의 상을 조각해야할 소중한 덩어리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벤야민은 그리스나 로마의 유적지에서 발굴된 ‘몸통’만 남아 있는 조각상, 토르소(torso)가 왜 19세기 조각가들에게 그렇게 강렬한 미학으로 다가왔는가를 사유하면서, 그들은 스스로가 토르소였음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라고 기록한다. 자신이 사지가 잘린 토르소임을 바라볼 때, 그는 미래를 자신의 결정으로 선택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 것이다. 모든 부조의 주름들과 구석들 속에 어떤 아우성이 있다고 본 것이다. 아우성만이 모군된 상황을 박차고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애인의 실수여성스런 변덕이나 약점에만 연연해하지 않는다. 어떠한 아름다움보다 그의 마음을 더욱더 오래 사정없이 붙잡는 것은 얼굴의 주름살, 기미, 낡은 옷, 그리고 기울어진 걸음걸이다.(80)

 

벤야민은 자신의 지적 동반자인 아샤 라치스를 통해 사상의 급진성을 배웠고, 시대를 앞서가는 그 급진성이야말로 현재성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술회한다. 벤야민에게 지적인 해방의 출구를 열어주었던 그녀를 기려 함께 산책했던 거리를 ‘아샤 라치스의 거리’라고 명명할 정도로 그녀는 벤야민에게 절대적인 존재였다. 사모하는 사람에게서 느끼는 사랑의 떨림은 지적 날카로움에 동반되는 주름살, 기미, 낡은 옷, 투박한 몸짓, 기울어진 걸음걸이 등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어쩌면 눈에 잘 띄지 않은 결점들을 찾아 숨는 것이라는 연애론을 남기기도 했다.

 

위대한 사람들에게는 완성된 작품보다는 평생을 두고 작업했으나 완성하지 못한 단편들이 더 비중있게 다가온다. 완성에서 비할 바 없는 기쁨을 누리며 삶을 다시 선물받은 것처럼 느끼는 사람은 어딘지 부족하고 더 산만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천재에게는 어떠한 단절이나 힘겨운 운명적 타격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근면함이 지배하는 작업상에 슬며시 찾아든 잠에 불과하다. 그 작업실의 세력권이 형성되는 것은 미완성 작품이다.(74)

 

천재는 근면함이다, 라는 명제를 남긴 벤야민은 아인슈타인이 만약 천재라 불려야 한다면 그의 두뇌의 수치, 얄큐가 아니고 E=mc2을 만들기 위해 소년시절부터 꿈속에서조차 에너지와 빛과 질량의 관계를 끊임없이 생각했던, 한번 실험실에 들어가면 세상을 모두 잊었던, 한결같은 그의 근면함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 인류의 모든 선각자들은 자기 생전에 자신의 신념체계가 꿏피는 것을 보지 못하고 미완성으로 생을 마쳤다는 것, 이런 아포리즘은 위로이자 도전이기도 하다.

 

도취야말로 우리가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것, 그리고 가장 멀리 있는 것에 스스로에게 확산시킬 수 있는 경험인 것이다. 그리고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것과 가장 멀리 있는 것은 항상 함께 확인된다. 그중 하나가 없다면 다른 하나는 확인되지 않는다. (58)

 

벤야민의 바라본 도취는 개인적이고 목가적인 취향이 아니라, 자신의 자아 속에 갇혀 외부현실의 소외에 대한 보상만을 추구하는 부르주아적 ‘상자인간’을 해체하고 자연과 인류의 어울림으로 확장되어야하기에 푸리에적 유토피아에 가까운 것이 바로 도취의 사회적 기능이라고 보았다. 자기 생에 도취가 없는 사람은 없다는 점에서 진정한 도취는 가까이에 있는 것과 가장 멀리 있는 것의 변증법이야말로 도취의 필연성이라고 보았다. 도취는 이루어지지 않은 것임에도 마치 이루어진 것처럼,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되는 것처럼 초현실주의자가 되는 것이라고 바라본 것이다.

 

예언적 능력을 가지고 있는 여인들에게 자신의 미래를 물어보는 사람은 다가올 것에 대해 자신의 내면이 들려주는 소리를 의식하지 못한 채 포기하는 것이다. 그 내면의 소리는 그 여인들에게 듣게 되는 것보다 천배는 더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다. 순간에 일어나는 일을 정확하게 인지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저 멀리 놓여있는 것을 미리 아는 것보다 더 결정적이다(153)

 

벤야민은 정신집중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흔히 저지르는 일 가운데 하나가 자신의 미래를 제3자를 통해 알고 싶어 한다는 것에 주목하면서, 언젠가 닥칠 고통이라면 미리 알면 덜 고통스러울 거라는 그런 얄팍한 정신의 바탕에는 ‘정신의 깨어있는 상태(정신집중)야말로 미래의 진액’이라는 진단을 전한다. 우리 생에 어떤 일들은 그 일이 발생하기 전에 찰라에 해당하는 어떤 징조, 암시가 이미 주어졌다는 것이다. 시선이 온통 밖으로만 쏠려 있어서 자신에게서 일어나는 일을 못 본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서 순간에 일어나는 일을 정확하게 인지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저 멀리 놓여 있는 것을 미리 아는 것보다 더 결정적이라고 말한다.

 

 

 

 

 

유마리안나선배가 보내준 스페인 파밀리아 성당

 

 

 

 

 

3.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을 보내셨다.> 마태오9,36-10,8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36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37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38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10,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2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3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스와 세리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4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5Ⓓ 예수님께서 이 열두 사람을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6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7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8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을 보내셨다.> 라고 전하는 마태오9,36-10,8은 공관복음에 모두 실려 있는 파견에 관한 복음이다. 세 복음의 공통점은 파견의 동기와 목적, 파견자에게 요구하는 태도가 비슷하다. 다만, 마태오9,36-10,8에서는 파견자의 면면, 파견지역이 명시된다는 데 차이가 있다.

 

마태오9,36-10,8을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를 중심으로 파견이 우리에게 주는 축복은 무엇인가를 되짚어 보려한다.  마태오9,36-10,8을 도식하면 다음과 같다. Ⓐ예수님의 연민 Ⓑ하느님의 능력 Ⓒ파견자의 면면 Ⓓ 파견대상 Ⓔ파견목적 Ⓕ 파견자의 태도

 

 

 

[1] 파견이란 무엇인가?

 

파견이란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가 <하나>의 근원에서 나왔다는  것과 그들을 온전히 창조의 원래 상태로 회복하도록 돕는 일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보편사제직을 수행하는 일이다.

 

(1)파견하면, 가장 중요한 것은 파견의 주체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파견의 주체를 기억하는 것은  파견의 목적, 그 실현여부를 가늠하는  가장 중요한 포인트라고 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열두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에서 알 수 있듯, 파견의 주체는 제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이다. 군중들을 가엾이 보신 연민의 사랑이 파견의 출발점이다. 예수성심이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에서, 군중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이유는 예수님의 정체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채 생존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채우고 싶었기 때문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파견에서 중요한 맥락은 예수성심에서 촉발된 사랑이 제자들을 파견하기에 이르렀다는 것, 어찌보면 당연하고 간단한 말인데,  아직도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보면 파견의 혈이 어디선가 분명히 막혀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파견의 주체와 파견의 대상은 곧 파견의 목적을 담고 있다. 여기서 제자들에게 준 하늘의 능력은 그들이 그 능력을 받기에 합당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먼저 하느님과 하나라는 것을 체험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 역시 자비에 힘입어 자비를 전한다는 점에서 파견자와 파견대상은 같은 은총상태여야 함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공관복음과는 달리 열두사도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마태오 사도의 의도는 무엇인가?

 

사도들의 면면을 보건데, 그들을 가까이 부르시어 그들에게 준 능력은 하늘의 권능이다. 표면적으로는 하찮은 이들에게 준 어마어마한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그들의 십자가상 앞에서의 행태를 보면 더욱 그렇다. 그런데, 성령강림이후 그들의 놀라운 변모는 보면 그들에게서 진정한 제자상을 바라보게 된다. 복음사가가 언급한 제자들의 면면을 열거하면서 마태오 자신이 세리였다는 점을 구체화하면서, 파견의 객체가 곧 파견의 대상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나를 비롯한 제자들 모두 자비를 입은 사람들이며, 우리를 파견한 분이 주님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우회어법이라 할 수 있다. 그분이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지난주 성체성혈대축일에 모세와 이스라엘 조상들의 관계를 다시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8절)라는 것은 선교의 메신저들과 선교대상 모두에게 복음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잊지 말라는 당부라고 할 수 있다. 복음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잊을 때, 그 곳에 오직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6장 32-33에는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

 

신명기 8, 2-16에서는 “그분께서는 너희를 낮추시고 굶주리게 하신 다음, 너희도 모르고 너희 조상들도 몰랐던 만나를 먹게 해 주셨다. 그것은 사람이 빵으로만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너희에게 알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을 만나는 그 한가운데 모세가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모세를 보았지, 모세를 그들에게 보내주신 하느님을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만나를 먹고도 죽을 수밖에 없었다. 바오로 사도는 선교의 최전선에서 늘 자신이 선교의 주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수없이 우리에게 상기시켰다. 

 

기뿐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마서10,15)

 

그러므로 나는 목표가 없는 것처럼 달리지 않습니다. 허공을 치는 것처럼 권투를 하지 않습니다....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나서,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1코린토9, 27)

 

파견의 주체는 누구인가? 철저히 삼위일체 하느님이시다. 이것은 파견받은 메신저인 우리가 머리에 심장에 아로새겨야할 파견제1법칙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을 보내셨다.> 라고 전하는 마태오9,36-10,8에서 좁은 의미에서의 파견은 신자들에게 주어진 복음 선포와 치유지만, 넓은 의미에서의 파견은 생명을 받았다는 것을 바라본다는 점에서 보편적인 생명윤리가 파견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모두 하나라를 것을 모르면 사실 파견은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 된다. 우리가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라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파견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는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하고 말하였었지. 여인이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게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야49, 14-16)는 사랑의 메시지를 메시지만큼 뜨겁게 전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2)그 다음, 공관복음이 공통적으로 바라보는 지점은 파견된 자가 무엇을 전하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것은 하느님나라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바라보는 것으로 정신적 육체적으로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없는 이들을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게 하는 치유의 은총이라고 할 수 있다. 창조상태로 그들을 되돌리는 것이 바로 파견의 목적이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8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하늘나라는 치유된 이들의 나라이다. 치유된 사람만이 누군가를 치유할 수 있다. 하느님의 음성, 그 한 음성을 듣는 것이 치유의 핵심이다. 한 음성을 들을 때 모든 생명이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때 우리는 이 세계가 하나로 연결되었다는 것을 바라볼 수 있다. 파견을 통해 우리가 바라보게 되는 것은 하느님은 우리를 그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하느님 연민의 궁극적인 지점일 것이다. 파견을 통해 하느님이 창조하신 우리는 그대로이며 그것이 바로 메신저인 우리의 정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에 대한 끊임없는 연민을 느끼게 되는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신앙인의 입장에서 자신이 파견되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최고의 행복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이 자신에게 파견의 임무를 주셨다는 것은 하느님 현존의 구체적 체험이기에 그렇다. 그런데 그 현존 체험은 나에서 우리로, 우리 모두 하나라는 보편적 사랑의 체험으로 넘어간다. 그 체험에서 마주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비전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는 것이기에 치유에서 중요한 것은 용서라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 복음선포는 우리가 받은 것을 누구에겐가 주면서 우리가 무엇을 받았는지를  확증 혹은 확신하도록 이끈다. 그것을 확증, 확신할 때 우리는 나 자신이 누구인지 비로소 알게 된다. 신앙은 체험이다. 그리고 나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될 때,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도 알게된다. 복음선포는 나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것이다. 그 뜻은 인간이 행복하기를 바라시고, 모든 상처와 고통 죽음의 상태에서  완전한 창조의 기쁨 속에서 회복되기를 바라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눈으로 본다는 것이기에 그것이 어떤 형태의 교정이나 치유를 수반한다할지라도 그 바탕에는 용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교정받아야할 모든 고통의 심층에는 용서해야할 혹은 용서 받아야할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표면적으로 모든 형태의 정신적 육체적 문제들이 용서하지 않은 상태로 보이지 않는다. 내가 잘못 보거나 타인이 잘못 보거나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심층에는 용서의 상태가 깔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성서 전반에 걸친 치유기적 사화에서 네 병을 고쳤다가 아니고 네 죄를 용서한다는 말은 복음선포의 최전선에 서 있는 우리가 묵상해야할 중요한 키워드라고 할 수 있다.

 

중풍병자를 고치신 예수님(마태오 9, 1-8; 마르코2,1-12; 루카5,17-32)께서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신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들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누구의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라고 신성모독죄로 그분을 트집잡기 시작하는 부분이 나온다. 그들의 속내를 환히 아시고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고 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는 것과 무엇이 더 쉬우냐고 물으신다. 말의 맥락이 어떤 말이 하기 쉬운 말인가가 아니고 그 사람이 자신의 육체적 고통을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그 원인이 무엇인가를 바라보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파견의 궁극적인 지점인  창조의 상태인 <하나>라는 일치로 넘어가기 위해 <용서의 포괄적 의미>를 알아야 한다는 것과 마주한다. 용서할 것이 없을 만큼 용서 했을 때, 즉 용서를 완성할 수 있다면,  그때 우리는 파견의 대상이 왜 이스라엘 백성에서 모든 민족으로 확장되는지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사진작가 레어나르도 센스가 찍은 부라질의 코르코비두 언덕위의 십자가와 보름달, 유마리안나 선배가

 

 

 

 

[2] 에피쿠로스의 정원에서 에우카리스티아(Ευχαριστια감사)의 정원으로

 

 

이제, 왜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28장에서 모든 민족에게 전하라고 하셨던 복음을  이스라엘 집안의 길잃은 양들에게 국한시키셨는지를 생각해 볼 차례다. 이천년을 건너온 이 말씀은 오늘 종교를 갖고 있는 우리에게 얼마나 정확한 일침을 놓는 말씀인지,

 

이스라엘의 길잃은 양같은 사람들은 누구인가? 하느님의 이름을 간절히 부르지만 하느님을 부르면서 굶어죽어간 라고 할 수 있다. 목마른 사람, 배고픈 사람,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은 다 나에게로 오라고 하신 그분께서 왜 그들의 배고픔을 채워주지 않으신 것일까? 그들은 왜 그분을 부르다 죽었을까? 파견받은 자가 눈먼 소경이었기 때문이자, 배고픈 자가 두 주인을 섬겼기 때문이다. 두 주인을 섬긴 이유는 비교우위의 삶에서 누리는 평정심을 평화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6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6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지키게 하여라"(마태오28, 19-20)

 

내가 아는 많은 지인들은 대부분 열절한 신자들이다. 그들 중 90%이상은 철저한 가족주의를 지향한다. 세상은 망해도 우리 가족은 안 망한다는 가족주의? 그렇다. 그들은 가족에 관한한 철두철미하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오직 가족들만을  지킨다. 그들이 늘 달고다니는 말은 <감사>다. 옆집은 이런저런 이유로 불행한데, 우리 가족은 그런 불행을 겪지 않도록 주님이 지켜주셨기 때문이라는 데서 나온 감사다. 대인관계도 가족을 지킬 수 있는 관계로 국한한다. 가정이 파괴되는 우리 시대에 가정을 지키는 것은 분명 미덕이다. 때론 아름답기조차 하다. 그러나 가족주의를 넘어서는 것은 애덕이다. 가족주의라는 카테고리를 고수하는 이들이 못들은 척 하는 성서말씀은 "누가 내 어머니며 누가 내 형제냐?" 와 마태오 25장의 "가장 미소한 형제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는 복음이고,  '면형무아'라는 성체성사의 의미이며, 성가 28 "얼마나 많은 사람이 불행히 사는가? 어둠이 내린 세상을 천주여 살피소서"라는 구절이다. 

 

그런 맥락에서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 아니라 예수님주의를 에피쿠로스주의라 부를 수 있다. 이 지상에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사실 모든 울타리를 허물고, 넘어서서 하늘나라로 붙들려 올라간  삶이라고 할 수 있다. 무중력을 견디는 삶이다. 바오로 사도는 셋째하늘까지 붙들려 올라갔다고 자신의 체험을 말한다. 지상에서 하늘로 들려올려졌지만, 그러나 완전하게 하느님나라에 착지하지 못한 노마드와 비슷하다. 

 

가족주의를 에피쿠로스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에프쿠로스는 교외에 정원을 만들고 자신들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이들과 어떤 고통도 그들에게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평정심'을 연구하고, 유지하며 살았던 지적쾌락주의자들이었다. 팍스 - 로마나를 주장하던 로마인들을 유혹한 철학이다. 

 

에피쿠로스 학파 하면 흔히 쾌락주의라고 바라본다. 그런데 에피쿠로스 학파가 지향했던 쾌락은 우리가 생각하는 방탕 혹은 육체적 쾌락이 초점이 아니라 정신적 쾌락에 가깝다. 정신적의 완전한 통제, 평정심을 의미한다. 죽음 앞에서도 초연한, 그 어떤 문제상황 앞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아타낙시아를 추구한다. 성서에서 예수님의 대척점으로 율법학자, 바라사이파를 거론하지만 철학적으로 안티-크리스트는 에피쿠로스 학파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가이파와 비슷하다. 로마의 모든 정치인들이 에피쿠로스 학파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파견이라는 주제로 에피쿠로스를 거론한 이유는 에피쿠로스는 이 시대에 평정심을 최고의 덕목으로 여기는 가족주의에 가장 가깝기 때문이다. 그들은 철저하게 현실주의자이기 때문에 영원 혹은 불멸을 인정하지 않는다.

 

에피쿠로스의 역설에서 에피쿠로스가 마지막으로 통제하려 했던 것이 바로 죽음이었다. 다른 것은 뜻을 같이하는 이들과 통제할 수 있었지만 죽음은 개별적인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죽음을 바라보는 것은 불교의 공사상과 비슷하다. 

 

신은 악을 막을 의지는 있지만, 능력이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는 전능하지 않은 것이다. 악을 막을 능력은 있는데 의지가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는 악한 것이다. 악을 막을 능력도 있고 의지도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도대체 이 세상의 악은 어디에 기인한 것인가? 악을 막을 능력도, 의지도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왜 그를 신이라 불러야 하는가?

 

악의 문제 중 대표적인 예로 항상 언급되는 에피쿠로스의 역설은 3세기 초 그리스도교 신학자 락탄티우스의 기록에서 처음 등장하며, 이설이  많지만 에피쿠로스학파의 학설로 전해진다. 그에 대해 신은 죽었다고 외친 니체는 왜 그들이 영원 혹은 불멸을 믿지 않았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은 주석을 붙인다.

 

 에피쿠로스는 이미 이런 종류의 선행 형식과 싸운 적이 있었다. 에피쿠로스가 무엇과 싸웠는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루크레티우스를 읽어보라. 그는 이교도와 싸우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리스도교'에 맞서 싸웠다. 말하자면 죄 개념에 의한, 벌과 불멸 개념에 의한 영혼의 타락에 맞서 싸웠다. ㅡ 그는 지하적 제의들, 잠복하고 있던 그리스도교 전체와 맞서 싸웠다 ㅡ 불멸을 부정한다는 것은 당시에 이미 진정한 구원이었다. ㅡ 그리고 에피쿠로스가 이겼을 수도 있다. 로마 제국의 존경할 만한 사람은 전부 에피쿠로스주의자였기에(니체, 『안티크리스트』)

 

 

가족주의에서 말하는 감사는 예수님 보시기에 합당한, 충분한, 진실한 감사가 아니다. 언제든지 이 감사는 취소될 수 있는 두려움이기 때문이다. <감사=사랑=모든 사람은 하나>라는 보편적 사랑이 감사이기 때문이다. 지난주 <면형무아>의 정신이라 일컬었던 성체는 '에우카리스티아(Eucharistia, 감사)'라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한다. 그런데 가족주의에서 나오는  감사는 자신의 상황이 남들보다 낫다는 비교우위에서 나온 감사이기에 상황이 유리한 자의 방어의 형태이지 하늘에 봉헌되는 감사가 아니다. 성체성사가 지향하는 감사는 생명체 모두는 하나라는 보편주의를 알게된 것에 대한 감사다. 이 우주의 모든 인류는 하나라는 사실에 대한  감사다. 이 감사는 하느님 창조에 대한 감사함이라고 할 수 있다. 창조의 사랑을 바라보는 것이 감사라고 할 수 있다. 감사는 평정심이라는 가족주의를 넘어서야 만나는 진정한 평화의 세계이기에 그렇다. 

 

파견은 용서의 완성을 통해 감사로 표출된다. 용서할 것이 남아있다면 충분한 감사로 표출되지 않는다. (용서와 감사의 관계는 연중12주 묵상에서 보충)그렇기에 감사는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길의 안내표지다. 감사는 모든 창조의 근원인 사랑의 한 측면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당신의 아들인 우리가 아버지께 진실로  감사드릴 때, 하느님 당신은 당신의 완성이요, 당신과 함께 사랑이 되고자 하는 우리에게 감사하신다.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감사는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감사와 '하나'이다. 사랑은 오직 감사의 길만을 걸을 수 있으며, 그리하여 우리는 하느님의 길, 하느님의 집으로 갈 수 있다. 우리가 형상이  없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은 감사뿐이다. 진정한 감사는 하늘과 땅이 같아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른 제자들에게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38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라고 한 이유를 여러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겠지만, 일꾼은 우리의 선택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창조 계획이라는 것, 또 가족주의를 버린 제자들에 대한 상찬의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개별적이고 가족주의적인 사랑에서 보편주의로 넘어가는 것이 선교이고 파견이기에 그렇다. 보편사제직을 수행하는 것이 파견이기에 그것은 <면형무아>의 정신, <하나>가 된 것에 대한 감사, 하느님의 집인 에우카리스티아(Ευχαριστια감사)의 정원에서 사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글을 마치며,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36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37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38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10,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2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3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스와 세리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4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5Ⓓ 예수님께서 이 열두 사람을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6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7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8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