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이유,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1코린토15, 28/9,22)
-삼위일체대축일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를 중심으로
1. ‘아무도 아닌 자Niemand’를 ‘아무 것도 아닌 것Nictts’으로부터 건져내는
파울 첼란의 「아무도 아닌 자의 장미」를 읽어본다.
흙과 진흙을 반죽하여 우리를 /만들지 않을 것이며 /아무도 티끌인 우리를 축복하지/않으리라/아무도//아무도 아닌 분이시여, 찬양 받으소서/당신에 대한 사랑으로/우리는 꽃을 피우길 원하나이다/당신을 향한/사랑으로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었으며/또한 아무것도 아니오니/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꽃으로 남아 있나이다/ 아무 것도 아닌 장미/아무도 아닌 분의 장미로//영혼의 정결함으로/황량한 사막과 같은 하늘의 휘장이/찢어지던 날/말 그대로 핏빛같이 붉은/진홍빛의 붉은 면류관을/우리는 노래하였나이다 / 가시 무성한 면류관을...
첼란의 「아무도 아닌 자의 장미」는 익명으로 돌아간, 이름을 지운 자들에 관한 시다.
이 시는 ‘아무도 아닌 자Niemand’를 ‘아무 것도 아닌 것Nictts’으로부터 건져내는 것, 즉 이름을 가지지 못한 것들에 대한 엄호로, ‘아무도 아닌 자’들에게 무명의 가치론이라는 장미화관을 헌사한 시다.
독일어 ‘아무도Niemand’는 부정의 의미로 쓰이지만 그 부정을 부정함으로써 첼란은 성경이 전하는 인간 중심주의적 창조의 의미를 부정하고, 모든 생명체의 존재 이유, 이름을 갖지 못한 아무도 아닌 자들을 생명체 일반, 미지의 누군가를 지칭하는 의미로 차용한다.
세상에는 이름을 갖고 있는 사랑만 있는 것이 아니다. 미지칭의 사랑에 대해, 이름을 벗어난 존재들을 <장미>로 호명한다. 첼란은 자신의 문학을 대화의 문학이라고 밝혔듯, 이름을 갖지 못한, 그로인해 이름으로부터 헐거워진 미지의 대상들과 끊임없는 대화를 시도한다.
A와 B라는 구체적인 이름을 갖지 않은 보편으로 넘어간 익명의 사랑이야말로 ‘가시 무성한 면류관’일 수 있다는 이 시선의 전환에서,
창조된 모든 것들이야말로 보편적 사랑에 제헌된 것이라는, 그리고 그것만이 예술의 유일한 척도라고 말하는 파울 첼란의 시론과 부합한다.
이름을 갖지 못한 생명들이 각자의 역사속에서 사라지고 지워진, 무가치하거나 무의미한 존재로 귀속시키지 않고 창조된 모든 것들의 그 찬란한 생명력, 퍼즐의 한 조각, 배경의 존재론을 부여한다.
본질이 이름을 대신한다는 것, 마치 십자가상에서 J의 이름이 지워질 때, 성전 휘장이 찢어진 것처럼, 이름을 지운 몰아의 사랑만이 진홍빛의 붉은 면류관이 무엇인지 그 본질을 노래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2. 페르소나persona에서 위격(persona)으로
이름에 대한 미망은 페르소나persona를 지닌 외적 인격을 지향한다. 익명으로 돌아갔을 때의 그 사람의 행태를 보면 그 사람의 페르소나를 알 수 있다. 골방안에서 그의 전모를 보면 그의 페르소나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외적인격이라 불리는 페르소나는 그리스 어원의 '가면'을 나타내는 말로 '외적 인격' 또는 '가면을 쓴 인격'을 뜻한다. 스위스의 심리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인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은 사람의 마음은 의식과 무의식으로 이루어지며 여기서 그림자와 같은 페르소나는 무의식의 열등한 인격이며 자아의 어두운 면이라고 보았다. 인격이라 불리는 자아가 겉으로 드러난 의식의 영역을 통해 외부 세계와 관계를 맺으면서 내면세계와 소통하는 주체라면 페르소나는 일종의 가면으로 집단 사회의 행동 규범 또는 역할을 수행하면서 외적인격을 갖게된다. 예술에서 페르소나는 종종 창작자 자신의 분신이자 특정한 상징을 표현하는 배우를 지칭하기도 한다.
이름을 지우고도 남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그가 지닌 본질일 것이다. 이름이 명예를 먹고 자란다면, 그렇다면, 본질 혹은 본체라 부르는 것은 무엇으로 사나? 우리는 그것을 아카페, 사랑이라 부른다. 사랑만이 그가 지닌 본질이 무엇인가를 말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신도 자신의 본체를 위해 이름을 지운다?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삼위는 각각이면서 그러나 본체적으로 하나인데 그것은 위격 내면에는 대화적 현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본 ' 요셉 라칭거추기경은 『사도신경강독』에서 삼위일체 사랑이 세 위격안에만 머물지 않고 인간을 향해 있다는 것을 다음과 같은 세개의 명제를 통해 전한다.
제1명제: <위는 셋이요, 본체는 하나>라는 역설은 단일성과 다수성의 원리에 대한 물음에 속한다.(135)
우리 믿음의 대상인 하느님은 분명 유일신이다. 그런데 성부인 하느님, 성자인 하느님, 성령인 하느님이라 부른다면 이 다수성은 무엇인가?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창세기1, 26)에서 알 수 있듯, 신의 단일성은 다수성 안에 그 창조의 풍요를 담고 있다. 이 풍요에서 사랑의 본질이 담겨있다. 사랑은 나눠진다는 것과, 사랑은 나눠짐 속에서 일치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사랑은 이름보다는 본질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사랑에서 비롯된 사람은 자족적 실체일 수 없다고 말한다.
제2명제: <위는 셋이요, 본체는 하나>라는 역설은 위격개념과 상관되며 위격개념에 함축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136)
위격(persona)이라는 언어적 의미는 <~으로부터 ~을 뚫고 들려옴> 혹은 < ~무엇을 뚫고 누구에게 >라는 것에서 신에게 부여된 인격과 차별화된 신격을 표현하는 단어다. 그런데, 그 신에게 부여된 위격이 단수일 수 없다는 것은 위격의 기원은 언제나 <우리와 같은 사람을 만들자>로부터 파생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위격을 위격이게 할 수 있는 지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있음”의 존재는 실존과 존재로 나눠진다고 보는 것이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은 실존의 용어이지 위격이 향하고 있는 존재론의 지향점이 아니라는 것이다. 위격은 신에게 부여하는 흠숭의 용어이지만 흠숭의 대상이 없다면 그 흠숭은 불교에서 말하는 <무>라고 할 수 있다.
제3명제: <위는 셋이요, 본체는 하나>라는 역설은 절대와 상대의 문제에 속하며 상대 및 상관의 절대성을 뚜렷이 해준다(137)
위격은 나눠지지만 그런데 본체(substantia)로는 하나이면서 내면에는 대화적 현실, 상대 및 상관의 절대성이 제시된다. 이것은 신의 존재방식이 창조의 사랑이기 때문이라고 본다. 사랑은 나눠진다. 생성한다. 그리고 그것은 끝을 모른다. 무한을 지향한다는 것에서 사랑은 인간의 존재방식이자 신과 인간의 존재방식이기도 하다. 사랑의 존재태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아가페만이 본체의 의미, 관계론적, 대화적 의미가 무엇인가를 해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라칭거 추기경은 이렇게 덧붙인다. '자신을 참으로 이해하는 존재는 자신으로부터 나아가서 관계로서 자신의 참 근원성을 되찾음으로써 비로서 자기자신이 될 수 있다'고 전한다. 그것이 존재이유라고 본 것이다.
3.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6-18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18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라고 전하는 요한 3,16-18에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다섯 번이나 언급되면서 구원 혹은 영원한 생명이 믿음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전한다.
요한 3,16-18은 ‘사랑-믿음-멸망-구원-심판’이라는 대립적인 키워드를 통해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신 삼위일체 사랑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통해 영원한 생명의 문을 연다.
먼저, 16절을 중심으로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에서 그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에 대해 생각해 본다.
[1]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16절)
16절의 전반부에 <하느님께서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부터 생각해 본다. 요한복음에서 전하는 하느님은 “하느님은 사랑입니다”로 수렴되듯, 한계를 모르는 그 사랑이다.
그 사랑이, 한계를 모르는 하느님의 사랑이라면 인간 역시 사랑일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그 사랑이 어떻게 사랑을 모를 수 있나? 아니 사랑을 부정할 수 있나? 여기서 우리에게 사랑만 주신 것이 아니라 자유의지도 주셨다는 것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다. 그때, 구원과 영원한 생명의 대척점에 있는 멸망, 심판이 의미하는 바를 보다 분명하게 바라볼 수 있을 듯하다. 지난주에 언급한대로 인간은 근원적으로 사랑으로 정향되어 있음에서 그분을 근본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는 존재들이다. 근본적으로 사랑을 부정하지는 못하면서 끊임없이 사랑을 부정하는 행위를 하는 사랑의 역설은 무엇인가?
사랑을 원하면서 사랑앞에서 굶어죽는 사랑의 역설을 이해하기 위해 ‘외아들’의 의미부터 짚고 넘어가야 할듯하다.
믿는 이들도 하느님께로부터 나고(1,13) 성령께로부터 나서(3,5)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1,12) 우리도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른다. 우리도 하느님께 아들인 셈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냥 아들이 아니고 왜 외아들(독생자, 육화된 말씀, 모노게네스(μονογενής)일까?
모노게네스(μονογενής)는 생물학적인 유전자가 아니라 마음을 의미한다. 모노게네스는 쉬코스(δίψυχος)와 대척점에서 어떤 마음상태를 의미한다. 쉬코스는 흔드리는, 의심스러운 두 마음을 뜻한다면, 모노게네스는 흔들리지 않는 오직 한 마음을 뜻한다. 그 흔들리지 않은 한 마음이 외아들-독생자로 표현된 예수를 뜻하며, 흔들리지 않는 한 마음이란 '하느님과 그 속성을 같이한, 유일하게 생명에 기반한, 즉 영원한 생명'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사랑은 처음부터 끝까지 즉 천지창조 이전부터 종말 이후까지의 영원한 사랑이다. 흔들리지 않은 마음이 확장되어 ‘외아들’이라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방식이 중요하다는 의미로 다가온다. 단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의 특수함을 강조한 것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강생을 의미하는 ‘외아들’이라는 표현 외에, ‘그 속성과 본성에 있어서 유일무이하신 분’ ‘하느님과 속성을 같이하는 분’ ‘본체가 같으신 분’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니까 우리에 온 아버지의 사랑은 아들에게ㅡ모두 주어진 사랑이다.
아가페에서 하느님과 속성이 같은 아들을 세상에 ‘내주시어’라는 말은 ‘보내다’, ‘넘겨주다’, ‘값을 지불하다’ 등의 뜻이 있다. 요한복음 1장의 말씀이 사람이 되신 강생의 신비를 표현할 뿐만 아니라 대속의 의미 ‘값을 지불하신 분’이라는 의미까지 포함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믿는 사람들에게 흔들리지 않는 사랑,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이다. 하느님은 아들에게 또 다른 하느님이라는 위격과 사랑이라는 본체를 다 주셨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의 방식이 참으로 중요하다. 하늘의 사랑을 아들에게 다 주셨는데, 그 아들이 그 사랑을 어떻게 받았는지가 중요하다. 여기서 삼위일체 사랑에서 말하는 위격과 본체론이 나온다고 할 수 있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5,19)에서 아들은 자신 밖으로 나가 자신의 뜻을 초월하는 사랑을 한다는 것이다. ~으로부터 비롯된 것만 ~을 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랑에서 비롯된 것만 사랑을 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랑 공유-확장의 법칙이다. 또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구하기 때문이다’(5,30)에서 아들은 절대적으로 아버지의 위격에 자신을 종속시킨다. 자신 안에 서지 않을 때, 자신을 넘어섰을 때, 그곳에 아버지와 아들의 몰아적 사랑이 만난다. 그것만이 구원으로 편입될 수 있는 사랑이다.
아들의 사랑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지금 제자들이 감당하지 못하는 모든 진리를 알려주실 진리의 성령이 오실 것이고 그는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기 때문에,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요한16,7) 라고 삼위일체 사랑을 예고하신다.
이렇듯, 아버지를 향해 끊임없이 올라갔던 아들의 마음에서 아들을 향해 아낌없이 주어졌던 아버지의 마음이 만난다. 하늘과 땅으로 나누어졌던 사랑이 성전 휘장이 찢어진 것처럼 활짝 열렸다는 것이다. "그때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다"(마르코 15,38/마태오 27, 51/루카23,45)
여기서 아버지의 의지와 아들의 의지가 하나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본체로 하나라는 의미일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의지가 지향하는 것은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10,30)라는 일치로 수렴된다. 위격의 순종에서 본체의 일치가 나온다는 것!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10,30)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것이다(13,9)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듯, 나 또한 당신들을 보냅니다(13,20)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온전히 하나가 된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가 되는 그 사랑은 다시 세상으로, 우리에게로 흘러넘친다. 아버지의 사랑은 아들과 세상의 관계로 이어지면서 아버지와 세상의 관계로 확장된다. 이제, 아버지-아들-세상은 하나가 된다. 삼위일체 하느님과 우리는 하나가 된다. 하나는 더 큰 하나로 흘러넘친다.
그런 맥락애서, 너희는 나 없이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15,5)라는 것에서 그리스도인의 실존은 그분과의 범주안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사랑을 싫어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 안에 머무르지 못하기 때문에 못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창조는 완전한 소통에서 비롯된 확장임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실존은 아들처럼 존재하는 일, 아들이 되는 일, 자립하지도 자존하지도 않는 가운데, 모든 불일치와 분열을 종식시키는 것, 아들처럼 아버지의 뜻이 하나가 된 데서 그것을 찾을 수 있다.
‘하나’라는 말은 하늘과 땅의 뜻이 같아진 것을 의미하고 그 하나를 그분은 우리에게 원한다. 그것이 우리의 행복이기 때문이다. 수난전에 그분은 우리를 위해 아버지와 아들이 나눈 그 사랑으로 하나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신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17, 11)
하나가 되었다는 것은 하늘과 땅의 뜻이 같아졌다는 것으로 '모든 것이 되었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께서 가시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했다'16,15)
하나= 모든 것이 되기 위해선 우리 힘으론 불가하다. 우리에게 성령이 필요하다. 성령은 자신의 창조주와 직접 소통하기에 창조된 모든 생명들과도 완전하게 소통한다. (596)
여기서 <아버지와 아들> 의 관계를 통해 존재란 무엇인가?그 의미가 규정된다. 존재란 시작과 방향이 있다. 아버지로부터 비롯되고 그를 믿는 이들을 향한, 타자를 위한 존재라는 의미가 절대적으로 드러난다. <~으로부터 비롯되고>라는 근원의식과 <~을 향한> 이라는 사랑의 두 방향은 그 하나도 생략되거나 축소될 수 없다. 존재한다는 것은 하늘과 땅 양쪽으로 활짝 열려 있는 존재라야 진실로 존재했다고 말 할 수 있다. 진실로 존재하는 것만이 사랑이다. 그것이 하느님이 이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외아들을 보내주신 이유라고 바라볼 수 있겠다.
[2]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18절)
그렇다면,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방식이 우리에게 어려운 이유는 무엇인가?
16절의 후반부는 17절, 18절에 반복되어 제시된다. 아버지와 아들, 성령의 사랑을 믿느냐의 여부가 구원과 심판으로 나눠진다. 그 나눠짐의 결절점이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18)라고 전한다.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다는 것이 어떻게 멸망이고 심판일 수 있을까? 외아들을 믿지 않았다는 것은 외아들의 사랑방식을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외아들을 믿지 않을 때, 세상은 다른 것을 믿는다. 아들의 사랑과 반대되는 것을 믿는다. 인간은 믿지 않은 상태로 자신을 그냥 두지 않는다. 세상에는 하느님이 계시다는 종교와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두 개의 종교가 있다. 삼위일체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있고 세상의 행복론을 믿는 사람이 있다는 차이일 뿐이다. 영원을 믿거나 유한을 믿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스스로 내린 선택이고 결정이기 때문에 심판은 하늘이 내린 결정이 아니라 스스로 자초한 상실, 죽음을 향한 질주라고 할 수 있다. 즉 자유의지의 자기 처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16절)
그런데 그 영원한 생명을 받지 않은 이들에게 주어지는 ‘멸망’은 단지 종교를 선택하지 않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멸망과 ‘영원한 생명’ 사이에 어떤 중립적인 선택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적당한 멸망과 적당한 영원은 없다는 말이다. 영원하거나 멸망하거나 all or nothing 이다. ‘멸망하다’라는 단어는 ‘잃다’, ‘상실하다’ 라는 뜻과 ‘없어지다’, ‘파괴되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단어는 구원과 반대되는 개념을 나타내는 용어이고 생명과 반대되는 ‘죽음’을 나타낼 때 영원히 존재하는 것과 반대되는 것을 나타 낼 때 주로 사용되는 단어이다. 그리고 무엇을 얻거나 받는 것과 반대되는 ‘상실’의 의미를 나타낼 때도 사용된다. 특히 이 단어는 하느님과의 관계와 연결하여 <하느님의 상실>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상실은 그 자체로 사랑의 상실인 죽음을 의미한다. 인간이 사랑을 좋아하면서도 사랑을 하지 못하는 이유이자, 영원을 갈망하면서 죽음으로 가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은, 하느님의 상실을 의미하고, 하느님의 상실은 사랑의 상실을 의미하며, 영원한 생명의 상실을 의미한다. 왜? 예수님이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아들을 믿지 않은 자는 <이미 심판받았다>는 것은 누가 누구에게 내린 심판인가? 단적으로 자신이 자신의 실존을 결정하여 자신을 죽음의 상태로 방치한 것, 자유의지의 실행, 작동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존재이유를 스스로 결정한 대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자신이 자신에게 내린 벌, 심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심판은 다른 말로 소통의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세계에는 두 개의 소통방식이 있다. 창조의 근원에서 나온 아들의 소통방식인 모든 이를 존재케하는 존재(being)의 소통방식이 있다. 이 소통은 모든 존재에게 근원의식을 회복시키려는 존재의 소통방식으로 보편적 사랑을 지향한다. 존재의 소통방식과는 다른 에고의 소통방식이 있다. 에고도 자신의 실존(existence)을 위해 분리를 강화하기 위해 소통한다.
에고의 소통은 자신을 보호하려는 욕구에 지배를 받기에 에고를 보호할 수 없다는 판단이 서면 소통을 중단한다. 이 중단은 특정한 사람이나 특정한 상황에서 보이는 반응이다. 에고가 작동시키는 것은 구체성을 기반으로 한 일반화다. 그 구체성이란 세상이 주입시키는 일반화된 행복론에 기반을 한다. 이 일반화는 보편화에 이르지 못하는 성급한 일반화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 일반화는 구체적 논거를 지니기에 에고의 소통을 지지하는 세상에서 강력한 설득력을 지니게 된다. 세상의 가치관은 에고가 추구하는 행복론을 주입하는 방식으로 그렇게 만들어진다. 보편적 사랑이 아니고 위계를 지닌 일반화된 삶의 행태다. 여기서 초점은 사랑이 아니고 소유다. 그것은 스스로 사랑할 기회와 능력을 상실하는 것이기에 멸망, 혹은 자기 심판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삼위일체 사랑이 우리에게 주는 힘은 사랑을 회복할 수 있는 능력을 받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지난주에 바라본 대로 상처와 사랑 중에 사랑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받는 것이다. 수많은 소리 가운데 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비전이다.
그렇게 하늘과 땅으로 온전히 개방되어 있을 때, 우리는 죽음을 건너갈 수 있고 영원한 생명을 알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그를 믿는 사람이라는 것은 이 사랑의 개방성과 관계성을 받아들였는가의 여부로, 멸망과 영원한 생명으로 나눠지는 결절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는 그렇게 양날의 칼과 같은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이를 이렇게 전한다.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은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외치는 것입니다(로마8,14-15)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28)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것입니다.(1코린토15, 28)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1코린토9, 22)
삼위일체 사랑은 무엇이 존재이유인가를 우리에게 답해준다.
삼위일체 사랑을 안다면 바오로 사도의 통찰처럼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기 위해선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신 삼위일체 하느님의 그 사랑에 대한 체험이 있어야 한다. 성령은 우리에게 그 체험을 하도록 도와주신다.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 그분의 선물이 우리에게 모두 주어졌다는 것! 그분이 우리에게 두는 무한한 신뢰, 우리의 행복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예외없이 내어 주셨다는 것! 그런데 그런 선물을 받기 위해선 우리의 의지와 그분의 의지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 이는 성인성녀들만 받는 선물이 아니라 무엇이 실재인가를 바라보려는 갈망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내가 실제로는 누구인지를 알기위해서 삼위일체사랑을 받아들일 때,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요한1서, 4,16)라는 고백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늘과 땅이 하나로 열려있는 그 일필휘지의 사랑!
삼위일체하느님의 사랑은 실재에 관한 실체적인 믿음이다. 삼위일체사랑은 무엇이 영원한 사랑인가에 대한, 어떤 사랑이 영원불멸한 사랑인가에 대한, 어떤 사랑이 하늘과 땅을 연결할 수 있는 사랑인가에 대한, 어떤 사랑만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을 수 있는가에 대한, 사랑에 관한 사랑론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 사랑은 어렵다. 어려운 만큼 아름답다. '나'라는 에고를 지우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내 이름 석자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본질을 추구하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특별한 사랑이 아니라 보편을 추구하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십자가 상에서 제자들이 다 도망간 사랑이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인가를 물었던 사랑이다. 삶을 사랑에 종속시키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밀알이 되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언젠가 수확할 것을 믿고 씨뿌리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되겠다는 것은 아무 것도 되지 않겠다는 의미다. 몰라서도 못하고 알아도 스스로는 못하는 사랑이다. 성령의 도움으로만 가능한 사랑이다. 그분의 현존으로만 가능한 사랑이다.
삼위일체 사랑은 타자지향의 사랑이다. 성부성자성령의 세 위격 안에만 머무는 사랑이 아니라 인간을 향한 사랑이라는 데 그 초점이 놓여있다. 인간의 사랑이 하느님께 정향되어 있다면,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을 향해 있기에, 하느님과 하느님의 관계가 결국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라는 그 관계의 축복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하늘과 땅이 연결된 그 사랑을 바라보고 사는 것이 유일한 존재이유라고 할 수 있다. 사랑만이 우리에게 무엇때문에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삼위일체 사랑,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모든 이들에게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이 벅찬 기쁨과 감사가 하늘나라의 빅빅쳐, 대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글을 마치며,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18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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