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사랑의 자기결정권, 은총의 통시성에서 은총의 즉시성으로

나뭇잎숨결 2023. 5. 25. 23:25

분이가 도봉산 창포원에서

 

사랑의 자기결정권, 은총의 통시성에서 은총의 즉시성으로

-성령강림대축일,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를 중심으로

 

 

 

 

1. 김춘수, 「서풍부(西風賦)」

 

 

너도 아니고 그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데,/ 꽃인 듯 눈물인 듯 어쩌면 이야기인 듯 / 누가 그런 얼굴을 하고 간다 지나간다./ 환한 햇빛 속을 손을 흔들며……/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라는데, /왼통 풀냄새를 널어놓고 복사꽃을 울려놓고 복사꽃을 울려만 놓고, /환한 햇빛 속을 꽃인 듯 눈물인 듯 / 어쩌면 이야기인 듯 누가 그런 얼굴을 하고…….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어떤 얼굴들이 우리 생을 지나간다. 때론 설레는 꽃같기도 하고, 때론 뜨거운 눈물같기도 하고, 때론 수없이 들어본 이야기 같기도 한, 그런 얼굴을 하고 지나간다. 환한 햇빛 속을 손을 흔들고 지나가는 그 얼굴로 인해 삶은 때론 풀냄새처럼 싱그럽고, 때론 하염없이 울고 있는 복사꽃 같기도 하지만, 그 누군가가 환한 햇빛 속을 손을 흔들며 간다, 지나간다.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어떤 얼굴들이 우리 생을 지나간다. 그 얼굴들을 붙잡지 않고, 그냥 지나가게 하면 우리는 환한 햇빛 속에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그 얼굴들을 붙잡는 순간 그 얼굴들을 볼 수 없다. 이 인연의 역설은 무엇인가?

 

김춘수의 「서풍부(西風賦)」는 결국 “간다, 지나간다”로 수렴된다. 머무는 것이 사랑이 아니고, 지나가는 것이 사랑이라니? 이 사랑은 무엇인가? 시인은 사랑에서 자유에 초점을 맞춘 듯하다. 마치 “너에게서 빠져 달아나는 이를 사랑하라. 가버리는 이를 사랑하라, 떠나고자 하는 이를 사랑하라”라고 말하는 듯하다.

 

자유가 사랑의 본질이라는 것을 이렇게 말하는 이도 있다.

 

사랑과 진리는 만지면서 밀어내는 것이다. 너는 누구도 잡거나 붙잡을 수 없다. 바로 그게 사랑이고, 그것이 진리다. 사랑과 진리는 육화를 통해 - 육화를 넘어설 때, 너는 비로서 사랑안에서 자유를 만날  수 있다.”(-뤽 낭시)

 

그런 맥락에서, 김춘수의 「서풍부(西風賦)」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조차 모르는 우리의 생이 바람처럼 자유롭지 않다면, 왜 사랑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도 읽힌다.

 

 

 

 

 

분이가 도봉산 창포원에서

 

 

 

2. 아내(남편)는 채워지지 않는 약속이다(뽈 끌로델)

 

사랑만이 자유의 궁극에 대해 말할 수 있다고 바라본 이들도 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주어졌다는 것이 그 단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을 하나가 되는 것, 일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자유라는 속성이 있는 곳에서만 사랑에 하나, 혹은 일치라는 지향점이 실현된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것을 완성된 자유가 아니라 선취된 자유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G 그레사케의 『은총-선사된 자유』에서 인용된 자유론을 생각해 본다.

 

이 세계는 주체가 통교하는 개방된 공간이다. 자유는 자신의 원초적인 주체성을 손상시키지 않고 역사적 주체들의 공간 속에서 성취 된다. 내가 나의자유를 성취하는 가운데 다른 사람의 자유로운 공간을 함께 규정하기도 한다. 내가 그의 자유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자유가 구현되는 공간을 변화시키는 것이다.(145, 칼 러너)

 

인간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구조들은 제거될 수 있으나 이로써 인간을 위한 행복의 보증이 제휴되지는 않는다. 관계와 구조의 변화없이 인격적이요, 내적인 변화는 관념론적인 환상이다. 인간이 마치 단지 영혼만이고 동시에 육신은 아닌 양, 내적 쇄신없이 외적 관계가 변화한다는 것은 유물론적인 환상이다. 인간이 단지 그의 사회적 산물이고 그 이상 아무 것도 아닌 양.(147, 몰트만)

 

자유는 한계를 부인한다. 자유인은 종결되지 않은 자유로운 것에로, 경계 없는 것에로 세워져 있는 인간이며, 자기 모든 것에서 낯선 것이 아니라 고향을 발견하는 사람이다. 진정으로 자유롭다는 것은 무한한 것에서 자신의 갈증을 해소시키고, 자신의 동일성을 획득한다는 것을 뜻한다.(G. 그레사케)157

 

자유는 정의의 최고 규정이다. 우선 그의 아주 형식적인 면에 의하면 자유의 본질은 주체가 자기 상대편이 있는 것 속에서 어떤 이질적인 것이나, 경계와 담을 지니지 않고, 오히려 자기 자신을 그 속에서 발견하는 데 있다. 이 형식적 규정에 따라서 모든 곤경과 모든 불행이 사라져 버리고 주체가 세계와 화해하며, 세계 속에서 만족하며, 모든 대립과 모순이 해소될 수 있는 것이 자유의 본질이다. (헤겔)

 

인간 체험은 사랑과 대응하는 사랑이 있는 곳에서, 자아의 제약성과 고독성이 개방되는 곳에서, 자아가 상호간에 주고받은 과정 속에서, 타자와 세계에 개방시키는 곳에서 실현된다. 이것은 사랑안에 있는 자유가 필연적으로 그 홀로의 자족적 실체가 될 수 없고 관계론에서만이 충만에 이른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자유는 어떤 관계 속에서 무한한 충족원리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인간이 극단적으로 사랑을 체험하고 이러한 사랑을 베풀 수 있을 때, 진정으로 그것을 매개하는 것이 자유라고 할 수 있다. 자유롭다는 말은 내가 자유롭기에 너를 사랑하며, 사랑하는 너를 자유롭게 만든다는 것을 뜻한다. 자유 속에서 선사된 사랑은 내가 임의로 누군가에게 조종될 수 없고, 누군가를 조종할 수 없으며, 오직 사랑은 자유로이 선물로서 건네질 수 있는 오직 선물로서 주어진다는 것이다. 사랑이 나를 속박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통해서 나는 자유롭게 풀려난다는 것이다.

 

이 자유로 인해 인간은 근원적인 목마름인 갈증이 채워지고 인간 자신이 스스로 선사하고 싶어도 선사할 수 없었던 근원적 사랑을 체험하기에 이른다. 인간의 자유를 초과하는 곳에서 근원적인 사랑이 무조적적으로 양도하는 사랑을 행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때 인간은 사랑으로 자유롭게 되고, 무능력으로 표출될 사랑의 능력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이 전적으로 그 자신이 된다는 것은 전적으로 자유로운 사랑이 된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온전히 자유롭게 된 인간만이 온전히 자신을 타자에게 내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유가 완성이 아니라 선취된 모습으로 보이는 이유는 인간에 대해서 무엇인가 진술되는 곳에서는 인간이 지금 희망에 넘쳐 기대하고 있거나 또는 그가 자신의 행동으로써 이끌어들이려 추구하는 미래를 지시하고 있음이 어디서나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사랑으로 표출된 진정한 자유가 이미 선사된 자유라는 점에서 완성의 유보가 아니라 지금 이미 작용, 작동하고 있는 선취된 자유라고 할 수 있다.

 

 

 

 

 

 

 

3.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요한.20,19-23을 읽어본다.

 

19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성령강림대축일 복음에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라고 전하는 요한.20,19-23에서 전하고자 하는 축복의 메시지를 받아 본다.

 

우리가 알다시피 사도요한은 12제자 가운데 누구보다도 예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은 애제자이자, 성모님을 어머니로 모시고, 초대교회가 어떻게 형성되고 발전되고, 동료들의 순교의 현장속에서, 홀로 천수를 누리며, 제4복음서, 묵시록과 서간문을 남긴 삼위일체사랑의 증거자라고 할 수 있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 사도행전과는 달리 주님승천의 40일(은총의 통시성)을 생략하고 부활과 성령강림을 동시적인 은총으로 서술한 것에서 복음사가는 ‘은총의 즉시성’을 바라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한.20,19-23의 축복의 메시지는 <평화-상처-평화-성령-용서> 라는 네 개의 키워드가 연결되어 있다. 평화와 성령은 하늘의 선물이라면 상처(치유)와 용서는 실존의 사랑이다. 우리가 평화와 성령의 선물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상처와 용서를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통해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상처와 용서는 우리가 자유인인지 여전히 종살이를 하는 종인지를 가늠한다고 할 수 있다.

 

[1] 성령은 치유한다----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진실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은 상처받을 수 없다. 상처를 받지 않았다는 것은 자신의 에고를 보호하기 위해 방어기제를 작동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방어기제가 작동되는 곳에 상처가 있다. 또한 상처받지 않았다는 것은 상처의 흔적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물리적인 시간의 흔적은 있지만 그것을 마음과 영원에 돋을새김하지 않았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마음으로 상처받지 않음이 진정한 찬미와 찬송이라고 할 수 있다.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하나? 육체는 상처받을 수 있지만, 지식의 저장고인 마음은, 영혼은 결코 상처받을 수 없다는 것을 어떻게  말해야 하나?

 

육체는 역사적이고 실존적 상황에서 물리적인 흔적을 남긴다. 그런 맥락에서 모든 인연은 상처와 사랑으로 우리에게 온다고 할 수 있다. 가장 고귀한 인연인 한 아이가 어머니에게서 태어나는 것도, 성장하는 것도 그것은 상처와 사랑이라는 이름을 동시에 갖고 온다. 그렇다면 우리가 선택할 수 없는 인연의 여정인 이 삶에서 상처와 사랑없이 통과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이 흔적으로만 남아있는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이유, 제자들이 그것을 보고 기뻐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하느님과 인간의 역사가 어떻게 사랑으로 크로스 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 표징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만이 상처줄 수 있지만, 사랑만이 상처에 매이지 않게 한다는 역설이다.

 

따라서, 진실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랑은 상처받을 수 없다. 따라서, 누구든지 전적으로 도움이 되는 사랑을 할 때마다 하느님은 진실로 찬양받으신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그분이 주시는 평화를 받아 누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분명 상처투성이일 것이고, 우리는 그 상처에 매몰돼,  사실 우리는 그분을 찬미찬송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시간의 흔적, 인연의 흔적, 역사의 흔적이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가는 우리가 무엇을 용서해야 하는지에 대한 표지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이 상처의 흔적만 보여주셨다는 것은 이 세상을 완벽하게 용서하셨다는 의미이자 육체에 사로잡히지 않았다는 증거다. 우리는 역사적이고 실존적인 존재만으로 규정되는 존재가 아니라 더 포괄적인 존재, 육체를 넘어설 수 있는 생명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 무한을 의미한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소경이 소경을 이끌 수 없듯, 상처받은 사람이 누군가의 상처를 치유할 수는 없다. 파견이 두 번째 평화의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파견은 곧 평화를 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교인 평화는 상처에서 진정 자유로워 졌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그분의 사랑을 전하는 것은 우리가 누리는 평화를 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평화를 전한 사람만 사랑과 평화를 알 수 있다.

 

여기서, 부활의 일성이 왜 <사랑이 너희와 함께!>가 아니고 <평화가 너희와 함께!> 인지 묵상할 필요가 있다. 그분이 우리와 함께 세상끝날까지 함께! 계시겠다는 것은 우리가 누리는 내적평화로써만 알 수 있다. 우리에게 온 인연은 모두 사랑과 상처의 이름으로 온다. 부모자식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받은 상처만 클로즈업해서 보는 한, 그분의 현존을 알 수 없다. 그분의 현존을 산다는 것은 사랑과 상처 가운데 사랑을 보겠다는 자기 결정권을 행사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평화가 건네는 존재론이다. 관계론은 인격과 인격의 건넴, 자칫하면 상처와 상처의 교환일 때도 많다. 다사랑과 평화는 명사이기 전에 행위동사이자 상태 형용사다.  존재가 먼저고 행위는 그 결과다. 평화가 먼저고 사랑이 그 다음이라는 말이다. 자신이 전쟁상태인데 사랑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는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을 줄 수밖에 없다. 평화의 상태일 때만, 우리는 그분이 알려준 애주애인의 사랑을 할 수 있고, 전할 수 있다.

 

그렇다면, 상처는 어떻게 치유되는가? 상처의 치유는 기억의 망각이 아니고, 한 목소리만 들으면 상처는 치유된다. 어둠을 퍼내는 것이 아니고 빛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수님 공생활 전체, 십자가상의 수난과 죽음의 한가운데서 그분은 하느님께서 오는 한 음성만 언제나 한결같이 들으셨다. 우리는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따라가면 된다.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님은 <내 영을 당신께 맡기나이다>라고 오직 한 음성만 들었다. 오직 한 음성만 듣는 것이 사랑의 자기 결정권을 행사하는 일이자 자기치유능력이다. 오직 한 음성만 들었을때, 세상에 한 음성만 전할 수 있다. 

 

그렇다면, 상처는 두 목소리를 듣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두 주인을 섬기는 것이다. 상처의 원래 이름은 분리, 자기분열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목소리도 듣고 세상과 결합된 에고의 목소리로 듣는 것이 상처를 만들고 그 상처를 부풀린다. 그래서 자신의 은총생활에 영원을 연기하기에 이른다. 주시겠다는 데도 받지 못하는 즉천당을 연기하거나 유예한다.

 

두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 여기서 루카복음사가가 은총의 통시성을 말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부활에서 승천, 성령강림을 어떤 시간차로 규정한 이유라고 바라볼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겪은 광야 40년이란 '통시적인 은총'을 해명한 것이자 대부분의 인류가 두 목소리를 듣게될 것이라는 것을 예언적으로 간파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처럼 끊임없이 세상의 목소리와 하늘의 소리를 주름을 잡으며, 단 며칠만에 갈 길을 40년을 우회하여 간다는 의미다. 이것이 오늘날 그분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이들이 처한 현실이다.

 

요한 복음사가는 우리에게 '오늘' '한 목소리만' 을 들으라고 요구한다. 그것이 부활과 성령의 동시적인 축복이 지닌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오늘, 여기에서 주님의 목소리만을 듣는 '은총의 즉시성'을 살라는 것이다. 그것이 성령의 은사인 사랑의 자기결정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시공간에 사로잡히지 않는, 세상의 그 무엇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내적자유야말로 성령강림의 궁극적인 축복일 것이다.

 

주님의 목소리를 오늘듣게 되거든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말라. 므리바와 마싸의 그날처럼.(시편94(95)

 

요한 복음 사가는 은총의 즉시성, 사랑의 자기결정권을 "오늘 내가 세상을 이겼다" 라고 전하기도 한다. 세상을 이겼다는 것은 더 이상 세상의 소리를 듣지 않겠다는 자기결정이다. 내 인생을 세상의 소리에 의해 좌지우지 하지 않겠다는 자유의 대 선언이다. 실재하지 않는 소리를 듣지 않겠다는 결정, 실재는 위협받지 않는다는통찰, 실재가 아닌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직시. 그곳에 신의 평화가 놓여있기 때문이라고 전하는 그 바로 그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2] 성령은 용서한다---

 

용서는 관계의 치유이자, 생명이 무엇인가를 규정하는 초월의 시선이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관계의 치유인 용서는 세상에, 타자에게, 그리고 나에게 ‘오늘’을 돌려주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은총의 즉시성을 돌려주는 것이다.

 

용서는 결과에 대한 바라봄이 아니라 그 결과를 유발한 원인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들이 혹은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고 한 행위를 문제삼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가 용서하기 어려운 것은 결과(행위)만을 보기 때문이다. 원인(존재)을 볼 수 있다면, 용서하지 못할 상태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과 너머, 행위 너머, 그 원인을 보게 하는 것이 바로 성령의 은사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번이 아니라 일흔일곱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오18, 22)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일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 34)

 

일흔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용서에 한계를 정하지 말라는 것은 사랑이 무한하듯, 용서도 무한다는 의미에서 용서는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신적행위에 속하고, 그렇기에 성령을 받지 않고는 누구도 용서하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혼자 용서하려고 하니까 용서가 안 되는 것이다. 육안은 오직 결과만을 보기 때문이다.

 

모든 답은 예수그리스도에 있다. 우리는 십자가상의 예수님에게서 용서의 원본을 찾을 수 있다.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을 위한 용서의 기도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금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는 행위를 하고 있다는 한결같은 연민에서 우러난 변호의 시선,

 

여기서 용서는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비전을 회복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육안으로 바라보는 한 그를 용서하거나 그 또한 나를 용서할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눈으로 그를 바라볼 수 있을 때, 용서하지 못할 것이 없다는 것도 알게 된다. 행위의 원인만을 보기 때문이다. 그때, 그런 상태를 유발하는 그라는 사람의 역사까지 총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왜 부활하신 후, 성령의 숨결을 불어넣으신 후, 용서를 하라고 했는지 생각해 볼 수 있다. 용서하는 자가 바로 용서받는 자라는 주기도문처럼 용서의 순환 은총을 바라볼 수 있다. 평화처럼 용서도 준 사람에게 그 은총을 배가시킨다는 것이다. 용서는 준대로 받는다는 줌의 법칙에 해당한다.

 

여기서 용서란 크기, 경중과도 상관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용서할 것이 얼마나 큰 것인가가 초점이 아니고 용서할 것이 있느냐만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세상의 용서의 원칙이 아닌 용서의 다른 차원을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타자의 과실을 너그럽게 봐주거나, 또는 망각하는 그런 차원을 넘어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기가 어디서 왔는지,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심지어는 자기가 실제로는 누구인지를(572) 알지 못하는 사람의 생각에서 야기된 행위의 오류작동에 반응하지 말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컴퓨터가 오류를 범했다고 컴퓨터를 고소하지는 않는다. 인간의 행위는 거의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무엇을 입력했는지에 대한 출력의 결산이라고 보면 된다. 무지를 입력했으므로 무지의 결과만 나온다는 것, 사정이 그러니, 그가 살아온 역사와 환경과 유전자가 종합된 행위오류작동을 그냥 바람처럼 지나가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용서는 행위에 대한 간과(over look)라고 할 수 있다.

 

성령의 도움으로 그리스도의 시선으로 그의 존재가 무엇인가하는 근원을 바라볼 수 있을 때, 그와 나는 같은 빛의 자녀라는 것. 창조의 근원이 같다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기에, 그의 과거와 미래를 규정하지 않고 ‘오늘’을 돌려줄 수 있다. 누적된 그의 행위가 아니라 ‘오늘’의 그만 바라볼 수 있다. 오늘만이 영원의 얼굴이다. 

 

그럼에도 용서의 마지막 장벽 앞에 우리는 서게 된다. 십자가상의 예수님처럼, 의인들의 죽음처럼, 순교자들처럼, 무고한 아이들의 순교처럼, 전쟁의 무고한 젊은이들의 희생처럼, 인재처럼, 삶의 기회를 박탈한, 육체를 무화시킨 수많은 사건사고를 어떻게 바라보고 용서할 수 있을 것인가?

 

용서는 인간이 할 수 없는 신적행위이기에 용서는 궁극적으로 생명을 무엇으로 규정할 것인가와도 맞물리는 고도의 영성적인 차원을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을 육체를 포함한 존재로 규정할 것인가? 아님. 육신의 부활에서 보듯, 순전히 영적으로 규정할 것인가? 하는 생명의 포괄적 존재론과 맞물려 있는 질문이다.

 

그래서 용서는 구원의 마지막 관문이라고 할 수 있다. 선한 이들이 겪는 고통에 대한 이해, 더 이상 용서할 것이 없을 정도로 용서의 상황을 넘어섰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용서의 마지막 관문은 ~을, 누구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고, 즉 용서의 주체를 나로 보는 것이 아니고, 즉 타자에 대한 시혜적인 행위가 아니고, 사랑의 자기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사랑을 세상에 내다판 나 자신에 대한 것으로 귀착된다, 즉 내탓이오!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애주애인의 삶을 살 수 없는 것은, 상처와 용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누가 사랑과 평화와 치유를 싫어하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묶여있을 때, 아무리 좋은 사랑이라도 우리는 할 수가 없다. 하고 싶지 않아서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없어서 하지 못하는 것이다. 안하는 것은 곧 못하는 것이다. 의지부정이 아니라 능력부정이다. 그렇기에 치유와 용서의 궁극적의 지점은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 나의 현주소를 묻는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성령은 모든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를 준다----

 

두려움이라는 이름의 이 묶여있음은 무엇인가? 두려움은 분리의 근원이다.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자유를 이렇게 전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주셨습니다. 그러니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매지마십시오(갈라디아, 5, 1)

 

주님은 영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2코린토, 3, 17-18),

 

 

주님은 영이고 그분의 영이 있는 곳에는 자유가 있다. 그러니 그 무엇에게도 종살이를 하지 말라는 바오로 사도의 전언! 종살이는 바로 두려움의 정체다. 생존 앞에서 인간의 약함이야말로 두려움의 실체다.

 

그리스도인의 해방과 자유를 여러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겠지만, 앞에서 언급한대로 그것은 방어기제를 작동하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무방비란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항상 보아야 할 것을 보는 것(하늘을), 그것이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우리의 약함(세상)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강함(하늘)을 바라보고 선택하는 것이 바로 해방과 자유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현존하는 오직 하나의 목소리를 듣는 것, 현존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방어기제를 작동하지 않았다는 것은 자유의 영이신 그리스도의 현존을 체험했다는 말이다. 해방과 자유는 우리가 성령을 통해 주님의 현존을 살고 있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사랑의 창세기를 다시 쓰게 되었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믿는 것은 내가 아니라 그분이다. 

 

두려움으로 문을 걸어 잠갔던 제자들이 담대하게 세상속으로 걸어가 <주님은 사랑이시다>를 알릴 수 있었던 그 원본사고가 바로 창세기다.

 

그때에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기2, 7)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22)

 

우리가 누구로부터 기인된 생명인지, 무엇으로 창조된 존재인지, 자신의 근원을 바라본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무한한 자기 양도를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이 있는 그대로 하느님께 받아들여졌음을 체험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무조건적인 사랑의 체험, 사랑의 사랑을 선사받았다는 체험은 또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한다. 그러기에 하느님을 조건없이 받아들인 사람은 다른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다. 우리는 그 무조건적인 아가페의 표징을 그리스도의 전생애를 통해 보았고, 들었고, 살려고 한다.

 

성령에 의해 작용된 이 사랑이란 이름의 내적 자유는 이 세계를 끌어가는 종국의 질서가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육안으로 보면, 세상의 가치관이 득세하고, 이기는 것 같지만 궁극의 질서는 사랑의 충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랑이 결국 세상을 이긴다. 

 

예컨대, 신은 죽었다라고 공공연히 말하는 무신론자조차도 후손들에게 풍요를 남기고 싶어 하고, 죽어서 제삿상, 무덤 혹은 납골당에서라도 영원히 누군가에게 기억되기를 바란다. 즉 자신이 불멸이기를 소망한다는 것이다.

 

이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불멸의 사랑인 그리스도(사랑)로 정향(orientation , 定向) 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우리 생애에 가장 좋은 것을 결정하고, 갈망하고, 선택하고, 그것을 가능하게 돕는 분이 바로 성령이시다.

 

 

오소서! 성령이시여! 믿는 이들의 마음을 충만케 하시고 그들 안에 사랑의 불을 놓으소서!

 

글을 마치며,

 

19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