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말의 신학, 원초적 말 하나하나에는 그 말로 표상된 실재의 편린(片鱗)이 들어 있다(칼 러너)

나뭇잎숨결 2023. 5. 5. 11:09

분이가 보내준 -비가 오고 있는 중계동 나비공원

 

 

말의 신학, 원초적 말 하나하나에는 그 말로 표상된 실재의 편린(片鱗)이 들어 있다(칼 러너)

-부활5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를 중심으로

 

 

 

1. 김수영의 「꽃잎1」

 

 

누구한테 머리를 숙일까/ 사람이 아닌 평범한 것에/많이는 아니고 조금/ 벼를 터는 타작마당에서 바람도 안 부는데/옥수수 잎이 흔들리듯 그렇게 조금//바람의 고개는 자기가 일어서는 줄 / 모르고 자기가 가 닿는 언덕을/ 모르고 거룩한 산에 가 닿기/ 전에는 즐거움을 모르고 조금/ 안 즐거움이 꽃으로 되어도/ 그저 조금 꺼졌다 깨어나고/ 언뜻 보기엔 임종의 생명 같고/ 바위를 뭉개고 떨어져내릴/ 한 잎의 꽃잎 같고/ 혁명 같고//먼저 떨어져내린 큰 바위 같고/ 나중에 떨어진 작은 꽃잎 같고/나중에 떨어져내린 작은 꽃잎 같고(1967.5.2.)

 

김수영의 「꽃잎1」에서 꽃은 바람과 꽃의 관계, 그 행로에 대한 바라봄이다. 바람의 고개는 자기가 일어서는 것도, 또 자기가 가 닿는 언덕도 모르지만 거룩한 산에 이르러서 꽃으로 피어난다. 바람은 꽃을 피우게도 하지만 꽃을 지게도 만든다. 꽃은 아름다움의 찰라 임종의 생명으로, 바위를 뭉개고 떨어져내릴 혁명의 상징이기도 하다.

 

김수영의 「꽃잎1」에서 누구나 멈추는 부분은 1연이다.

 

누구한테 머리를 숙일까/ 사람이 아닌 평범한 것에/많이는 아니고 조금/ 벼를 터는 타작마당에서 바람도 안 부는데/옥수수 잎이 흔들리듯 그렇게 조금//

 

<머리를 숙인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김수영이 집요하게 김춘수의 반대편에서 <꽃잎> 연작을 쓴 이유를 바라볼 수 있을 거  같다. <머리를 숙인다>는 표현은 일반적으로 누가 누구에게 머리를 숙였는가? 에 초점이 맞춰진다. 머리를 숙인다는 것은  상대에 대한 존경이거나 반대로 굴종을 의미한다. 동일한 위치가 아니라 위계의 관계가 함축된 동사다. 시인 김수영은 그런 일반적인 관계를 염두하고 머리를 숙인다고 했을까? 김수영이라는 시인은 입체적인 시인이다. 김수영에게는 참여시인라는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을 수 없는 입체적인 스펙트럼이 있다. 존재론과 실존을 아우르는 시인이다. 

 

그런 맥락에서, 김수영의 「꽃잎1」에서 <머리를 숙인다>는 것은 바람이 꽃이 된 사건이다. 그것이 바람이 머리를 숙인 사건이자, 꽃이 바람에게 머리를 숙인 사건이다. 그러니까 동시에 머리를 숙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바람과 꽃이 하나가 된 사건, 언어가 시가 된 사건이다. 자기가 쓴 시를 시인이 살아낼 때, 시인은 언어에, 언어는 시인에게 머리를 숙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때 머리를 숙이는 행위는 존경도 굴종도 아닌 제3의 의미로 넘어간다. 즉 살아있는 관계, 언어의 육화가 이루어진다.

 

우리는 그 관계를 사랑이라 부른다. 사랑은 존경도 굴종도 아니다. 그냥 서로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무한한 감사다. 그래서 모든 감사는 기적을 불러일으킨다. 감사와 사랑은 하늘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시인이 자기 안에서 불쑥 튀어난 말을 바람과 꽃이라는 이질적인 존재, 임종과 혁명이라는 실존의 언어를 한데 묶을 수 있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자기가 쓴 언어를 온몸으로 살아낼 때, 그는 자신의 말과 하나가 된다. 또는 그 시가 어떤 사람 속에서 조용한 소용돌이가 되기도 한다.

 

언어의 육화에 대해, 우리 곁을 떠난 황현산 선생은 “미지의 신비를 향해 우리의 생명 전체를 내던진다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황현산)라고 질문한 바 있다. 자신이 쓴 언어에 지불해야할 생의 대가가 있다는 것이다. 

 

"꽃이 피면 다른 세상이기에 아직은 글자로만 다시 말해 개념으로만 존재하는 이 꽃, 확연히 보이는 듯하지만 떨리며 사라질 거 같은 이 글자의 끝을 모든 방향에서 살핀다는 것은 얼마나 초조한 일인가. 이 삶을 불태워버리는 게 얼마나 “싫은” 일인가. 미지의 신비를 향해 우리의 생명 전체를 내던진다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황현산)

 

 

 

 

분이가 보내준 - 오늘 그 곳

 

 

 

2.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아빠스 키아로스타미)

 

 

우리에게 모두 사랑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과 일상의 사소한 것을 나눌 수도 있지만, 어느 하늘 아래서 존재한다는 그 사실만으로 이루어지는 그런 관계도 있다. 그런데 존재만으로 이루어진 내 친구의 집이 존재론적 측면에서는 같은 집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을 수 있는 존재만으로 이루어진 그런 관계, 과연 이 생에서 그런 관계는 어떤 축복의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까? 

 

[존재의 무게, 자족적 실체에 머물러 있는 ‘코나투스적’ 존재인가? ‘부스러기-남은조각’에 의존해 있는 ‘관계론적’ 존재인가?]에서 인용했던 관계론의 정수 레비나스의 글을 재인용해 본다. 

 

타자윤리학 하면 떠오르는 엠마누엘 레비나스는 이를 “철학은 충격과 망설임에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왜 그에게 철학은 충격이고 망설임이었을까? 레비나스는 철학이든, 사랑이든 타자의 얼굴을 상정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타자는 미래다,라는 명제에서 엠마누엘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 얼굴론>을 통해 ‘존재의 무게’가 무엇인지 평생 추구했던 철학자다.

 

레바나스의 주 저서, ③ 『존재에서 존재자로』(1947), ④ 『시간과 타자』(1947), ⑤ 『전체성과 무한』(1961), ⑥ 『존재와 다르게 본질 저 편으로』(1974), ⑦ 『윤리와 무한』(1982)은,

 

레비나스는 사람은 어떻게 자족적 실체인 '코나투스'의 상태에 도달하고, 동시에 그곳에 계속 머물러 있을 수 없는 존재인가를 질문한다. 즉 어떻게 나는 나의 삶의 태도를 바꾸어 타자를 내 존재의 무게중심으로 삼을 수 있는가를 고민했던 철학자이다.

 

레비나스는 하이데거 철학의 극복을 통해 ‘나’를 하나의 질문으로 바라본다. ‘나’란 막연하게 ‘있다’는 사실이자, 사건이므로 <나>는 나를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서 그의 타자론은 시작된다. 그의 철학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나-있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바라보기 위해 <유한자의 존재-홀로서기-고독의 물질성-코나투스- 빛의 소환-고통과 죽음-타자의 소환-다원주의-초월>등을 통해 타자윤리학이 지향하는 형이상학적 욕망의 다리를 놓고 있다.

 

 존재는 그 자신으로 가득차 있다. 그는 그 자신의 모든 것을 짊어지고 다닌다(41)빛은 플라톤 이래 모든 존재의 조건이다(76)감각과 미학은 사물 자체를 생산한다(87)있음이 만들어 내는 가벼운 소리 그것이 공포다(97)익명적인 있음 속에서 주체는 스로를 확립한다.(존재에서 존재자로,1947)

 

이렇게 나의 있음이 공고히 되었을 때 나타나는 것이 홀로서기이자, 고독의 물질성이다. 내가 나 홀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서양 철학의 전통인 사유가 아니라 경제가 기반이 된 자족적 실체 때문이고, 그것을 <코나투스적 존재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는 <향유적 무아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타자와 얽히지 않는 깔끔한 홀로서기의 존재론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인간은 노동을 하고, 자신의 집을 짓게 된다. 그것이 노동이자 소유를 정초하는 집이기 때문에, 집이 거둬들이고 보관할 수 있는 이동 가능한 것들과 동일한 의미에서의 레비나스에게 집은 소유물은 아니다. 집이 소유되는 것은, 집이 이미 그 소유자를 환대하기 때문이라고 본 것이다. 이것이 집의 본질적 내면성으로, 모든 정주자에 앞서 그 집에 정주하는 정주자로, 진정으로 누군가를 맞아들이는 자로, 맞아들이는 자 그 자체로,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향유적 존재 안에는 환대적 존재가 자리한다고 보았다. 

 

 존재의 무게(...)아픔과 괴로움과 고통 속서 우리는 고독의 비극을 형성하는 결정적 요소를 가장 순수한 모습으로 다시 보게 된다. 이 결정적 요소는 향유의 무아경으로을 통해서도 끝내 극복할 수 없는 것이었다. 고통꽈 죽음은 타자의 현현과 마찬가지로 계산할 수 없는 미래다. 타자는 타자라로써 높음과 비천함에 스스로 처해 있다. (시간과 타자,1947)

 

그런데 인간은 나라는 존재의 무게, 빛만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다. 나 홀로 존재하기 위해 자족적 실체의 환경을 만든다는 것은 불가피하게 유한한 자본과의 투쟁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향유적 무아경에서  빛만을 초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일하기 싫은 사람은 먹지도 말라>는 명제로 정식화한다.  이로써, 인간은 만인의 만인에 투쟁 속에 살게 되고, 고통과 죽음에 직면한 시간의 주인이라는 것과 마주하게  된다. 고통과 죽음은 인간의 무기력, 무력함, 불가항력의 환경 앞에 자신을 세우게 된다. 여기서 향유의 존재론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환대로써의 존재론이 표면화 된다. 타자를 받아들이기 된다. 타자와 고통과 죽음은 그 전모를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신비>라는 공통분모를 지닌다. 

 

다원론은 타자의 근본적 타자성을 전제한다. 이 타자성은 내가 단순히 나에 대한 관계에 따라 떠올리는 타자성이 아니라, 나의 에고이즘으로부터 출발해서 내가 마주하는 타자성이다. (전체성과 무한, 1961)

 

그런데 타자는 우리는 <하나다>로 단순하게 환원될 수 없는 나와는 다른 얼굴을 지닌  존재, 알 수 없는 신비처럼 마주한다. 더욱이 타자성은 나에게 주인과 하인의 관계, 섬김의 관계를 요구한다. 자신을 돌볼 책임을 요구한다. 타인의 타자성은 그에게 있지, 나에 대한 관계에 따라 있지 않기 때문이다. 타인의 타자성은 스스로를 계시한다. 하지만 내가 타인의 타자성에 접근하는 것은 나로부터 출발하는 것이지, 나와 타자의 비교에 의한 것이 아니다. 내가 타인의 타자성에 접근하는 것은 내가 그와 함께 유지하는 사회로부터 출발해서지, 나와 타자라는 항들을 반성하기 위해 이 관계를 떠남으로써가 아니다.

 

내 책임에 명해졌지만 내가 놓친, 잘못한 그-자신의 흔적, 그의 죽을 수밖에 없음이 내 책임이고 내가 살아남은 것이 내 죄인 듯한 그의 흔적?-?이것이 얼굴이다. 얼굴은 직관적 지향의 올곧음에 주어진 이미지의 직접성보다 더 팽팽한 무시원적 직접성이다. 근접성 속에서 절대적인 타자,  내가 배지도 낳지도 않은 이방인인 그를 나는 이미 두 팔로 안은 셈이다. ( 존재와 다르게 본질 저 편으로, 1974)

 

여기서 타자의 얼굴이 왜 낯선지? 그것이 무엇인가가 떠오른다. 레비나스의 사상에서 자주 언급되는 얼굴은 눈 색깔, 코의 형태, 뺨의 불그스레함 따위가 아니라 신의 말이 울려 퍼지는 방식으로의 얼굴이다. 신(무한)의 말로 격상되는 얼굴과의 관계는 초상화와 같은 조형적 형태가 아니라 처음에 타인이 나와 무슨 관계인지를 묻지 않는 비대칭적 관계이고, 절대적으로 약하고, 벌거벗은 것과의 관계이며, 극도의 외로움을 겪는 것과의 관계다. 양심을 건드리는 관계이며, 정의를 요구하는 관계이다. 

 

윤리는 자아를 통한 자아의 주권의 자리 없음에서, 가증스러운 자아의 양태에서 의미하지만 또한 어쩌면 영혼의 정신성 그 자체, 그리고 확실히 존재의 의미 곧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라는 존재의 부름에 대한 물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윤리는 무조건적이고 심지어 논리적으로 분간할 수 없는 동일성의 절정 곧 모든 기준 너머에 있는 자율의 절정에서 나로 불리는 동일성의 애매성을 통해 그러나 바로 이 무조건적인 동일성의 절정에서 또한 자기가 가증스러운 자아임을 고백할 수 있는 동일성의 애매성을 통해 의미한다.”(윤리와 무한, 1982)

 

그렇기에  타자의 얼굴 앞에서 우리는 윤리적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된다. 윤리란 “인간적인 것으로서의 인간성”이고 “인간이 자기보다 타자에게 우선권을 줄 가능성”이다. 예컨대, 성서에서 동생 아벨을 죽인 형 카인이 유지한 입장, 즉 나는 나이고 그는 그이다, 라는 존재론적 분리에 결핍된 것이 바로 윤리다. 레비나스는 윤리를 이렇게 정의한다.

 

이 윤리 또는 윤리적 관계가  레비나스는 지향적 의식이라고 부른다. 레비나스는 지식과 지배와 함께 정립되는 존재 안에서의 정립의 정의(justice) 그 자체인 지향적 의식 대신에 비지향적 의식, 즉 처음부터 타자의 얼굴에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의식을 경험한다. 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의식이 바로 '내가' 되는 것이며,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나로서의 나의 존재에 대한 긍정 속에서 나의 <존재할 권리>를 책임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너를 섬기면서 내가 누군지 알게되는 것!

 

여기서 무한이란 개념이 나온다. 무한의 관념은 타자와 관련한 동일자의 분리를 전제한다. 그러기에 타자와의 평화가 모든 것에 앞선 나의 일이 된다. 네가 평화롭지 않으면 나는 무조건 평화롭지 않다. 네가 평화로울 때만 너를 떠날 수 있다. 이별을 허락하지 않는 관계, 무관심하지-않음, 말함, 책임, 다가감은 책임질 수 있는 유일한 자, 종속이 나의 해방이다. 그러기에 내가타자 앞에  출현하는 방식은 '출두'다. 나는 격변화할 수 없는 '소환의 수동성' 속에 그냥 나를 위치시킨다. 이것이 나 자신이다.

 

타자에 대해 나는 책임이 있고, 이 타자 앞에 나는 책임으로 있다.  “내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타인은 이렇게 나를 강박하는 이웃이며, 이미 얼굴이며, 비교할 수 있는 것인 동시에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유일한 얼굴이자, 다른 얼굴들과 관계하는 얼굴, 정확히는 정의에 대한 염려 속에서 가시적인 얼굴인 것이다.

 

 만약, 이것을 사랑이라 부른다면,  레비나스는 이 문제를 두 가지로 압축한다. 첫째, 신-인간 사상은 신의 낮아짐, 곧 “가느다란 침묵의 목소리처럼 자기의 비천함에서 나타나는 진리의 관념, 곧 박해받은 진리의 관념”으로서 “초월의 가능한 유일한 형태”라고 말한다. 구체적으로 신은 얼굴과 결합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신은 동화할 수 없는 타자성, 절대 차이이다. 신은 절대적으로 지나간 흔적이다. 그 흔적은 나의 이웃의 얼굴에서의 신의 근접성이다. 둘째, 신-인간 사상은 창조주의 피조물로의 실체변화로서 동일성의 원리를 훼손하는데 어느 정도 타자들을 위한 대속과 속죄, 인간의 인간성을 표현한다. 그것은 내 안에 시작하는 존재 안에서의 이 절정―‘자기의 존재를 보존하는’ 존재의 전복―이다.”

 

그렇다면 레비나스 타자론에서 사랑과 정의, 자비는 무엇인가.  얼굴과 유일한 타인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구성인 정의는 사랑에서 나오며, 정의와 자비는 낯설어 보이지만 분리할 수 없고 동시적이다. 정의는 자비가 없다면 변질되고 자비는 정의가 없다면 불가능하게 된다. 사랑과 정의, 자비는 동시에 출몰하는 타자론이다. 레비나스는 구체적으로 경제 정의의 활동이 정신적 존재의 서막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정신적 존재를 완성한다고 주장한다. 경제적 정의가 정신의 존재론이라 바라보는 레비나스의 관계론은 <하나>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기에 찬사와 비난에 모두 열려 있다.

 

 

 

 

 

 

 

 

 

3.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요한 14,1-12을 읽어본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1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2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3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4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5 그러자 토마스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7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8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9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전하는 요한 14,1-12에서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라고 전하는  '그 때는'어느 때인가? 최후의 만찬때이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 달리 최후의 만찬에 세족례 다음에 최후의 만찬인 성찬례 대신 14장, 15장, 16장, 17장에 이르는 긴 고별사를 넣었다. 14장은 고별사의 서론이자 결론에 해당한다. 예수님의 공생활3년을 집약하는 명제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표징이나 행위에 초점을 맞춘 공관복음과는 달리 표징이 곧 선언이라는 것, 존재론과 본체론의 일치에 초점을 맞춘 그리스도론의 초석이라 할 수 있다. 요한복음은 예수그리스도라는 호칭이 지닌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을 관계론적 측면에서 전한다. 가설의 얽힘에서 믿음의 합리성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토마스의 질문과 필립보의 간청이 함유하고 있는 그 메시지를 읽어본다.

 

 

[1]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5절의 토마스의 질문과 8절의 필립보의 간청은 그분의 떠남으로 인해 제자들이 겪어내어야 할 마음의 행로- 마음이 산란해 지는 일(믿음의 흔들림)이 무엇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중요한 질문이자 간청이다. 

 

토마스의 질문부터 생각해 본다.

 

Ⓐ그러자 토마스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5)

 

예수님이 가는 길은 아버지에게로 가는 길이다. 사람들에게 아버지께 가는 길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분은 오셨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이 가고자 하는 그 길을 모른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것은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저희는 알지도 못하는데--너희는 알고 있다”

 

실증주의자인 토마스의 질문을 이 시대의 언어로 풀어보자면, "예수님, 당신께서는 3년의 공생활을 통해 7개의 표징, 7개의 담화, 7개의 선언을 통해 충분히 당신이 보여주시고자 하는 그 사랑을 다 계시했습니다. 그런데 또 무슨 사랑이 필요합니까? 당신이 가시고자 하는 그 수난의 길이 왜 필요합니까? 이 땅에서 그 사랑을 완성하시면 안됩니까?"

 

토마스의 저희는 '알지도 못하는데'는  수난의 길(세 번이나 수난 예고를 들었기에 그들은 모를 리 없다.)을 가는 이유에 설득당하지 못했다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토마스의 주님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는 질문과 필립보의 하느님을 뵙게 해달라는 간청은 결국 <예수그리스를 모른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앞에서 베드로 역시 예수님을 모른다는 것에서 그들이 3년 동안 최측근에서 그분의 표징을 보았고, 그분의 정체성에 대해 들었으면서도 그분을 알 수 없었다면, 그들의 독해력이 딸린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이 아니고서는 그 누구도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된다.

 

예수님이 아니고는 아버지를 알 수 없고, 성령이 아니고는 예수님의 사랑을 알 수 없다.

   

토마스에게는 인성에 초점이 놓여있고, 필립보에게는 신성에 초점이 놓여있는 듯한 의문들은 신앙을 어떻게든 현실의 차원에서 이해해 보려는 우리의 고민과 직접적으로 닿아있다. 우리는 지금 예수그리스도라고 당연히 부르는 융합어가 '예수' 따로 '그리스도' 따로 인식되고 있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사가는 존재론과 본체론에 대한 교회의 오랜 고민이자, 무의식적으로 신앙과 삶을 이원화해서 바라보는 인류와 그분과의 분리의 문제를 예언적으로 예측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토마스와 필립보의 의문은 오늘 21세기에도 여전히 믿음의 행로를 결정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중요한 키워드에 해당한다. 행위로서 구원을 받느냐, 믿음으로서 구원을 받느냐는 신앙정체성과 맞물린 질문으로 표출된다고 할 수 있다.

 

토마스의 신앙상태를 좀 더 생각해 보자. 라자로의 소생사화 앞에서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갑시다”(요한11,16)에서, 또 예수님의 부활발현 앞에서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직접 보고...”(21,25)에서 알 수 있듯, 토마스는 실증적인 메시아상을 요구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토마스뿐 아니라 교회가 4세기까지 이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수많은 논쟁을 거듭했음에서 확인되듯, 우리가 믿음의 여정에 만나는 첫번째 걸림돌에 해당한다.

 

⒜아돌프 폰 하르나크는 『그리스도교의 본질』에서 “아들이 아니고 오직 아버지만이 예수가 선포한대로의 복음에 들어 있다. 신앙은 분열을 일으킨데 비해 사랑은 일치를 이룬다. 그리스도에 반대하여 예수를 되찾는다는 것은 교의를 떠나 사랑으로 향함을 뜻한다”

 

⒝위르겐 몰트만은 『희망의 신학』에서 “교회 즉, 완세적 회중이 언제나 그때그때 사건으로서만 참으로 교회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천주성, 즉 신성은 언제나 그때그때의 사건으로밖에 있을 수 없다.”

 

⒞라칭거 추기경은 『사도신경강해』에서 “인간으로서의 예수의 존재는 곧 그리스도로서의 그의 사명이다. 존재와 사명의 동일성 체험이 예수그리스도이다. 자신의 실존을 바침으로써 이루어지는 말씀과 존재와 사명의 합일이다.”

 

⒟니케아 공의회에서(325년) <예수그리스도는 성부와 본체가 같은 분이다> 교의에서 알 수 있듯,

 

 

토마스의 질문은 위르겐 볼트만의 질문과 상당히 닿아 있다. 공관복음의 초점인 행위로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구원의 논리와 닳아 있다. 이것이 무엇이 문제인가? 행위는 결과다. 존재는 원인이다. 결과에서 원인을 소급해 바라보는 이원론적 믿음 체계는, 즉 자연과학적 귀납적 방법으로 믿음을 재단하는 증거주의가 된다. 믿음은 철저한 체험이지만 그러나 그 체험을 자연과학적 방법으로 증명할 수 없다. 믿음은 증거주의를 초월해 있기 때문이다.

 

진리는 증명될 수 없다. 진리 자체가 증명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필립보의 신앙상태는 어떤 산람함을 겪고 있는 것인가?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8)

 

필립보의 말도 이 시대의 언어로 풀어보자면, “스승님, 당신께서는 이미 세 번이나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셨듯 그 길을 가야 사랑의 완성에 도달한다고 하시니, 그래서 아버지에게로 가야한다고 하시니, 그냥 사랑이신 아버지를 저희에게 보여주십시오!”

 

필립보의 견해는 아돌프 폰 하르나크의 견해와 유사하다. 하느님(사랑)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낙관적인 견해다. 필립보가 부르는 아버지는 목가적인 아버지다. 이는 단순히 사랑의 근원이신 아버지를 뵙고 싶은 갈망이라기보다는 역사적 맥락을 건너뛰고 싶은 갈망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의 맥락을 뛰어넘는 초월적 그리스도론을 그는 원하고 있는 것이다.

 

필립보의 질문은 역사적 맥락을 뛰어넘어 곧바로 아버지의 사랑으로 가고 싶어하는 신앙상태를 보여준다.

 

토마스와 필립보는 공통으로 십자가의 수난이라는 역사적 맥락을 이해할 수 없다는 점에서 같지만, 필립보의 청은 아버지가 왜 아들의 수난을 필요로 하는가? 라는 혼란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토마스와 필립보가 놓친 것은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그 말씀의 육화가 왜 필요한가? 라는 부분이라고 힐 수 있다.

 

그리스도인 예수에게 수난이 필요한 것은 하느님이 설정한 무대가 아니다. 인간실존의 역사가 꾸민 시나리오다. 십자가 사건은 신앙의 극적 성격 및 그리스도 신앙의 역사적 자기초월을 이해하는 문제와 맞물려 있다. 예수의 참 신성이 아들의 신앙이 되는 이 충격은 토마스나 필립보가 바라본 이중 결론에 해당한다. 이는 요한복음 1장 1절의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의 반복 계시의 간과라고 할 수 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전적으로 아들이며, 전적으로 말씀이며, 전적으로 사명 그 자체였다. 그의 행위는 그의 존재에 근거까지 미치며 그와 하나라는 니케아공의회의 견해와 부합한다. 존재와 행위의 합일이 예수그리스도의 특성이다. 존재 자체가 사명과 존재의 동일성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존재자체를 행위로 규정하고 그는 아버지와 일치된 전형적 인간 본연의 인간이라고 본 것이다. 존재가 행위가 된다는 것, 행위가 존재를 규정한다는 것은 삶과 신앙을 아우르는 순례의 여정에서 정말 중요하다. [2]에서 다시 실펴보기로 한다.

 

아버지는 곧 나라는 말은, 수난현장에서 도망갈 길이 없어 수난을 당하는 자의 정신승리의 표현이 아니다.  수난이라는 역사적 사실의 수용(인성)과 초월(신성)을 통해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것은 곧 내가 아버지와 하나이기 때문이라는 의미다. 철저하게 사람이자 철저하게 신이라는 표현이다. 너희들은 세세대대 역사적 현장에서, 실존의 현장에서 자기초월의 길을 갈 것이기 때문에 나도 간다(나처럼 가라)는 의미에 가깝다. 내가 그 엄존하는 실존의 현장에 있는 너희들을 벗이라 부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너희는 내가 누군지 알아야 하듯, 나를 주님이라 부르는 너희 자신도 자신이 누군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너희는 이 땅에서 생명체로 존재하는 한,  역사적 존재이며 동시에 영적 존재라는 사실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다.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뵌 것이다, 라는 표현은 나는 아버지로부터 온 존재이며, 그러기에 너희를 위한 존재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예수의 길, 아버지에게 가는 길은 <~로부터의 존재>와 <~을 위한 존재>라는 이 관계성을 철저히 준수했다고 할 수 있다. 아버지와 예수의 관계, 예수와 인류의 관계는 관계 그 자체로 십자가다. 이 애주애인의 길,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예수그리스도의 길을 이해하는 것은 철저하게 종적인 관계론과 횡적인 관계론을 수용하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사건은 여덟번째  표징에 해당한다. 누구도 예외없이 그분을 따르는 이들이 가야할 길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단지 신성을 지닌 예수님의 길일 뿐 아니라 인간의 길이라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라는 융합어는 역사적이며 초월적인 두 길의 크로스로, 라칭거추기경은 이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이 인간은 전적으로 그가 행하는 것 자체이고 말하는 것의 바탕이며, 온전히 남을 위해 있으면서도 그런 헌신 안에서 온전히 자신이 신이라면 즉 자신을 잃음으로써 되찾는 자다.(마르코8, 35) 그렇다면 그는 인간 중에 가장 인간다운 인간 인간현실이 성취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인간 현실의 성취. 인간이면서 동시에 인간을 벗어날 수 있는 존재, 역사적이며 동시에 영적인 현실, 그래서 그분은 나는 너희를 종이라 부르지 않고 벗이라 부르겠다,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세상에  한 생명으로 산다는 자체가 이미 하느님과의 관계, 동료 인간과의 관계를 그 어느 것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가장 고귀한 자신을 성취 하는 것,  내 뒤를 따라 성취하라는 것,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너희들이 이해하고 너희가 나의 벗으로서의 삶을 살기위해선, 생이라는 십자가를 지기 위해선  반드시 성령의 이끄심이 필요하다는 것에 이른다. 그래서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은 물론, 나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하신다. 왜? 우리는 인성만으로 그 두 길을 가기 때문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12)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시지 않으신다.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요한16, 7)

 

여기서 또 이런 질문이 생긴다. 왜 그분은 공생활 중에 성령을 보내주시지 않고 부활승천후에야 인류에게 성령을, 보편적 은총으로 내려주시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성령을 한 개인의 구원론적 관점보다는 교회론적 관점, 즉 관계론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 할 때 수긍이 된다. 요한복음을 묵상하다 보면 요한이 없다면 교회도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요한은 부활의 빈무덤에서 베드로의 위상을 염두해두었듯, 철저하게 지상의 교회가 천상교회의 예표임을 서술한다. 즉 성령의 개인적 은사보다는 삼위일체의 관계론에서 공동체의 이익을 위한 은사로서 이를 바라볼 때 본체론적 관점과 존재론적 관점의 통합을 이룬다는 것!  은총의 위격적 인격적 일치-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를 바라볼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토마스의 질문과 필립보의 간청은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길이 무엇인지에 대한 믿음의 표지 속에 십자가의 필연성, <애주애인>의 관계론에 관한 것이다. 그 표지는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10,30)라는 창조의 근원의식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말의 신학, 원초적 말 하나하나에는 그 말로 표상된 실재의 편린(片鱗)이 들어 있다(칼 러너)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10,30)라는 근원의식은 말이 말씀이 된 사건을 의미한다.

 

우리가 발설하는 모든 말은 어떤 운명을 지닌다. 가벼운 말은 그의 생을 한없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부평초로 만든다. 자기 내면에서 긴 두레박을 내려 밤새 길어올려진 말은 즉 심연에서 솟아오른 말은 샘물과 같고 정화수와 같다. 어령-이루어내는 힘이 있다.  치유한다. 따라서 순결한 말은 말을 발설하는 그의 영을 지고의 지성소에 들게 한다.

 

따라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10,30)라는 말씀은 기독인에 독점된 말이 아니라 인류를 구원하는 생명의 근원이 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실존의 현장에서 예수그리스도가 <길이며 진리며 생명>이라고 고백했다면,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10,30)라는 것을 현실에서 체험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체험이 없으면 그것은 단지 하나의 아름다운 명제로, 박제된 역사적 맥락으로, 고백적 신앙으로 그친다.

 

그렇다면, 실존의 현장에서 어떻게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10,30)라는 것을 체험할 수 있는 것일까?

 

우리는 토마스처럼 역사적 실존적 맥락 속에서 그분을 실증적으로 체험하고 싶어하거나, 혹은 필립보처럼 역사적이고 실존적 현실을 생략하고 하느님으로 곧바로 넘어가고 싶어 할 수도 있다.

 

토마스와 필립보는 다른 두 사람이 아니라 신앙의 여정에서 누구나 믿음의 흐들림 속에서 겪어내는 우리 내면의 현실적 자아의 분열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토마스적인 것이든 필립보적인 것이든 어떤 믿음의 흔들림은 우리가 이 세계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는가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세계를 분리된 것으로 보는냐? 하나로 보느냐?

 

⒠‘나 아닌 것’이 존재하지 않고서는 ‘나 인 걸’ 체험할 수 없다. <---> ⒡거기에 이르는 길은 이미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냥 자신이 이르고자 하는 곳에 있어라.

 

우리는 물질로 구성된 생명체다. 우리가 경험하는 이 생물학적인 생명은 우주의 법칙과 아주 비슷하다. 순환과 회전과 반복을 경험하면서 생명의 진화를 경험하는 것이다. 자신의 진화 과정을 목격하는 것이다. 이 진화의 과정을 대립으로 본다면 우리는 이 세계를 빛과 어둠으로 이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세계는 생명과 죽음으로 상징되는 대립쌍들만 존재한다. 

 

위의 토마스와 필립보도 같은 맥락으로 예수님을 바라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혼란은 토마스는 표징을 통해서 필립보는 선언을 통해서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본 것으로 이분법으로 표징과 선언을 바라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표징은 곧 선언이다.선언이 표징이듯,

 

예컨대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은 나는 생명의 빵이라는 선언과 동시적인 존재론이라 할 수 있다.  선언과 표징을 동시적인 사건으로 바라볼 수 없을 때, 우리의 신앙은 자연법칙에 갇히거나 아님 역사적 맥락을 생략하고 싶어한다. 분리된 세계를 통합할 수 있는 능력이 사라진다. 

 

여기서 예수님의 정체성,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10,30)는 근원의식은 모든 기적의 바탕이고 부활의 마중물이다. 이 근원의식은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하나라는 것을 내포한다. 대립되어 보이는 것이 하나라는 것, 이 '하나는 천국'을 의미한다. 이리와 어린양이 같은 풀밭에서 논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진리는 대립쌍이 없다는 것이다. 진리는 대립쌍이 없다. 진리는 대립쌍이 없다는 것이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는 비의라고 할 수 있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것으로 확연히 갈라지는  대립적인 세계는 갈등의 소산이자 전쟁의 기름부음이고 죽음의 문화다. 진리가 아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10,30)에는 분리되지 않았기에 시간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이 존재하지 않으면 공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라는 표현은 공간 개념으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상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어떤 상태에 있어도 너희는 아버지와 하나라는 격려의 메시지라 할 수 있다. 흙투성이 지상의 교회가 백합으로 상징되는 천상교회의 예표가 될 수 있는 이유에 해당한다. 

 

우리가 시간이라고 경험하는 과거현재미래는 선적인 시간이다. 이 시간은 중력장이 작용하는  공간이 규정한 시간이다. 그러나 중력을 벗어난 곳에서는 빛이 휘어진다. 시간은 상대적인 개념이 된다. 이미 아인슈타인과 같은 과학자들이 해명한대로 사람이 빛의 속도로 달릴 수도 있는 공간,  그런 무중력  상태다. 여기다, 저기다를 규정할 수 없는 어떤 상태만이 존재하는 곳. 이미 누구나 알다시피 오늘 밤하늘에서 바라본 볓빛은 그 행성이 존재했던 그 시간을 알 수 없는, 수억년전인지, 수천년전인지, 수백년전인지 알 수 없는 우주에서 이미 소멸한 빛이 오늘 우리에게 도착한 광선이다. 자연과학적으로도 대립쌍을 갖고 있지 않는 어떤 상태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나 아닌 것이 아니고도 나를 알 수 있다는 명제가 도출된다. 이것을 삶에서 체험할 때, 우리는 모든 문제를 그분의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무엇을 실재라고 보아야 하는지를 자명하게 알게 한다는 것이다. 대립쌍이 없는 것이 실재다. 실재는 진리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10,30)에서, 다음의 기적이 도출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지도록 하겠다.(14,13-14) 나는 너희를 종이라 부르지 않고 친구라고 불렀다"(15,15)

 

아버지와 내가 하나라는 진리는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이루어주겠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바라볼 수 있는 근거에 해당한다. 무엇이든 다 이루어주신다는 것을 믿기 위해선 우리가 그분만큼의 하느님과의 분명히 하나라는 사실 또한 믿어야 한다. 그것을 믿을 때, 우리의 삶의 패턴이 달라진다.

 

(오천명을 먹이신 빵의 표징을 본 군중들이)“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합니까?” 하고 묻자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요한, 6, 28-29)라고 말한다. 하느님을 알기 위해서, 혹은 하느님 나라를 이룩하기 위해서 우리가 할 그 무엇보다 우선적인 것은 믿음(존재하기)임을 알 수 있다. 믿음은 행위를 뛰어넘는다. 간과가 아니다. 행위를 포괄한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수없이 올린 삶의 패턴, 존재하기-행하기- 소유하기, 라는 이 패턴에서 너희는 자신이 누군지 알기 위해서 결과가 아니라 그것의 원인이 되라는 것이다. 무엇을 행해서 그분과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믿는 존재하기가 산을 옮길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믿음밖에는 요구하지 않는다. 이것은 행하기와 소유하기를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재배치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엄청난 패러다임의 변화를 동반할 수 있는 말의 육화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마치 나는 아무것도 가질 필요가 없고, 나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고, 다만 이 순간 내가 되는 것이다, 라는 선언과 같다. 존재하기에서 행하기가 나오고 그것이 진정으로 소유할 가치가 있는 것을 소유하게 한다는 것, 그것이 '오늘'의  믿음이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10,30)라는 말씀이 어떤 힘을 갖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부활신앙이다. 그 부활신앙의 원본이 바로 요한복음 1장에서 전하는 창조신앙이다. 

 

따라서, 생각에서 나온 말이 나의 인생을 규정한다는 것은 자신의 인생을 단 몇 분간만 성찰해 보면 알 수 있다. 칼러너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은 모두 시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 말은 시를 쓰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세상에 내어 놓는 말, 발설한 말을 먼저 살라는 것이다.  그것을 말의 신학이라고 전한다. 그 말 하나하나가 이 생에 자기 인생을 규정하는 비늘조각 같은 '편린'이라고 본 것이다.  환상이나 허상이 아니라 실재를 가리키는 말, 말의 신학, 원초적 말 하나하나에는 그 말로 표상된 실재의 편린(片鱗)이 들어 있다(칼 러너)

 

 

글을 마치며,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2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7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