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선재적(先在的) 자기선언이 확증해 주는 ‘오늘’은 무엇인가?

나뭇잎숨결 2023. 4. 27. 20:36

 

선재적(先在的) 자기선언이 확증해 주는 ‘오늘’은 무엇인가?

-부활4주, “나는 양들의 문이다”를 중심으로

 

 

 

 

1. 황지우, 「나는 너다」

 

 

새벽은/밤을 꼬박 지샌 자에게만 온다/낙타야/모래 박힌 눈으로/동트는 지평선을 보아라/바람에 떠밀려 새 날이 온다//일어나 또 가자/사막은 뱃속에서 또 꾸르륵 거리는구나/지금 나에게는 칼도 경()도 없다/()이 길을 가르쳐 주진 않는다//길은/가면 뒤에 있다/단 한 걸음도 생략할 수 없는 걸음으로//그러나 너와 나는 /九萬里 靑天으로 걸어가고 있다/나는 너니까//우리는 自己/우리 마음의 地圖속의 별자리가 /여기까지 오게 한거다

 

 

 

황지우의 「나는 너다」는 “나는~이다"라는 <에고 에이미Ἐγώ εἰμι>의 시적 변용이다.

 

「나는 너다」가 쓰여진 시대와 현실을 시인은 생명체가 더는 살 수 없는 사막으로 인식하고, 그 현실을, 시대를 통과하는 데 화자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낙타와 하늘의 별자리뿐이라는 각성에서 시작한다. 생명체가 없는 곳을 생명과 함께 통과해야 한다는 것,

 

'지금 나에게는 칼도 도 없다'에서 알 수 있듯, 자신을 걸어가게 만드는 힘은 무력의 힘도, 이념이나 초월의 힘도 아닌 생명체와 사물의 힘이라는 것이다.

 

「나는 너다」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은유의 용법, B(너)는 A(나)가 아니고, A(나)는 B(너)라고 말하는 것에서 사막을 통과하는 화자의 엄중함을 읽을 수 있다. ‘나는 낙타다’라고 말하지 않고 ‘나는 너다’라는 것에서 낙타와 나는 생명체라는 공통분모만으로 충분하다는 인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이 왜 화자의 엄중함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내가 지닌 어떤 신념체계로 사막을 건너가게 하는 것이 아니고 너라는 생명이 있어야지만 건너갈 수 있다는 생명의 논리, 신념의 논리보다 생명의 논리가 앞설 때, 그것은 생명이 지닌 엄중함 이상의 엄중함일 것이다.

 

어떤 길을 다 알아서 가는 것이 아니라, 가면서, 가다보니 알아지는 것이고, 그럼에도 그 길 끝에서도 끝내 다 알지 못할 수도 있는 그 길을 화자는 가려는 것이다. 그것이 생명의 길일지도 모른다. 

 

생명이나 사랑은 드러난 부분만 있는 것이 아니고 봉인된 부분도 있기에 그렇다. 끝내 알 수 없는 신비의 영역이 있다. 그래서, 동반 혹은 동행이라는 말이 모든 것을 다 안다는 의미가 아닐 때도 많다. 어쩌면 사막을 걸어가는 자신조차도 자신이 왜 사막을 끝까지 걸어가야 하는지 모를 수도 있다. ‘자명하다’는 것은 어떤 ‘봉인’을 전제로 한 ‘자명’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자명함을 추구하는 이들의 운명이자, 모름의 앎일 것이다.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부분에서 이것은 신의 영역이다, 라고 페이지는 넘겨야 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기에 단 한 걸음도 생략할 수 없는 걸음으로 사막을 통과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화자에게 생략할 수 없는 마지막 조건은 바로 생명이라는 화두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나는 너다”라고 말하는 것은, 인식의 논리가 아니라 너에게 의존한 생명의 논리로써만 이해가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너를 사랑해서 네가 필요한지는 잘 모르겠으나 분명한 것은 내가 좀 더 살아야겠어서(살고싶어서), 그래야 이 현실이라는 사막을 통과할 수 있을 거 같아서, 네가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화자는 철저하게 생명과 사물의 논리로, 즉 이 땅의 논리로 九萬里 靑天으로 걸어가고 있다. 우리 마음의 地圖속의 별자리가 /여기까지 오게 한거다라고 말하고 있다.

 

너와 나는 왜 걸어서 그 사막을 통과해 九萬里 靑天으로 걸어가야 하는지, 끝끝내 모를 수도 있다. 자신도 완전하게 모르니까, 모른다.

 

그럼에도 너와 나는 사막 한 가운데서 '생명'이라는 공통분모에 의해 ‘우리’로 묶인 것이다. 내가 흘깃 본 <九萬里 靑天>을 설명할 수도 설득할 수 없지만 ‘우리’라는 동반 혹은 동행이 지닌 운명적 지도 속에서, 이 여행에 나는 네가 필요하다. 어쩌면 너도 그럴 것이다. 살기 위해서, 너와 나는 서로에게 수단이자 목적이자, 목적 그 이상이기 때문이다.

 

 

 

 

청년 사도요한과 노년의 사도요한

 

 

 

 

2. 은유(메타포)는 ‘원금의 완전탕진’ ‘의미의 완전부재’ ‘백색신화’(데리다의 '형이상학 해체' 중에서)

 

 

 

데리다는 철학이 현실을 재구성하는 전략은 A는 B라고 말하는 메타포에 있고, 그 은유는 언제나 “나는~이다"라는 고유한 유형, <에고 에이미Ἐγώ εἰμι>라는 형이상학의 욕망이라고 보고 있다.

 

이 형이상학의 욕망을 직조하는 것에 명사중심주의와 태양중심주의라는 두 개의 그물망이 도사리고 있으며, 이것이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인간이 사유로 더 이상 밀고 갈 수 없을 때, 사유의 길이 막혔을 때, 그 돌파구로 감각의 차원으로 넘기고 전시하는 탕진의 이유라고 보고 있다.

 

이 메타포는 비유적인가 아닌가에 의해 일반적인 용법과 절대적인 용법으로 나뉜다.

 

예컨대, 이집트 신들의 비문(Inscription)에도 "나는~이다"라는 에고 에이미 문형의 일반적 용법과 절대적 용법이 섞여서 나온다.

 

나는 물이라 불리는 오시리스다. 나는 이슬이라 불리는 이시스다. 나 이시스는 곧 모든 고을의 통치자이다. 내가 곧 전쟁의 주이며 내가 곧 우레의 주이다. 사람들에게 발견된 열매가 곧 나이다. 나는 오시리스 왕의 아내이며 누이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법을 제정해 주었다. 그것은 아무도 변경시킬 수 없다”(다이스만, 고대 동양의 빛(Light from the Ancient East)』)

 

 

또, 헤르메스 문서들 가운데는 신의 존재 양상도 이 "나는~이다"라는 메타포로 규정한다. 『포이 만드레스(Poimandres)』에서는 신은 손이 아닌 ‘로고스’로 우주를 창조하며 일곱 혹성을 만들고 사랑을 창조한 이야기가 나온다. 사람은 두 가지 속성을 갖는데, 하나는 멸망의 육체이며 다른 하나는 불멸의 본질적 인간으로 인간은 예언자로부터 신에게 올라가는 방법을 배우게 되고, 일곱별을 뚫고 올라가 구원을 얻게 된다고 기술하고 있다.

 

c. Herm 1:2 내가 곧 포이만드레스이며 근원의 이성이다. c. Herm 1:6 저 빛은 곧 나 이성이며 내 신이다. c. Herm 13:16 나는 하늘에, 땅 위에, 물 속에, 공기 중에 있다. 나는 동물에, 식물에, 모태에, 모태 이전에, 모태 이후에 어느 곳이든지 있다.(헤르메스, 포이 만드레스(Poimandres))

 

 

그런데, 역사적으로 이집트의 신도 헤르메스의 신도 그냥 한 시대를 찬란하게 빛냈던 유성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이다"라는 고유한 유형, <에고 에이미Ἐγώ εἰμι>는 따라서 오직 자기선전에 그쳤다고 할 수 있다. 이후에도 동서고금의 모든 왕, 군주, 권력자들은 ‘나는 ~이다’라는 용법을 사용해 자신의 정체성을 만천하에 선언했지만, 그러나 그들은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를 데리다는 인간에게는 근본적으로 형이상학의 욕망이 있다고 보았으며, 이를 해체해 사유의 본성을 되찾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크게 낸 바 있다.

 

 

원금의 완전탕진 즉 의미의 완전부재를 무한 의미로 간주해온 서양철학은 빈혈을 앓고 있는 신화에 불과하다.백색신화, 따라서 고유 명칭은 명료하고 비오류적이다. 반면 차용된 명칭으로서의 은유는 다의적이고 때로 통제 불가능한 의미 산종(산포, 흩뿌림la dissémination)이라는 가능성 안으로 떨어질 수 있다. 그런데 그 대리적 명칭으로서의 은유가 그 우회적 거리를 성공적으로 지나서 원래 의도되었던 의미를 명확히 지시하는 경우, 그 은유는 좋은은유라 한다. 좋은 은유란 의미의 성공적인 자기 귀환이다. 반면 나쁜은유란 그런 의미의 자기 귀환이 실패하는 경우에 해당하거나 의도되지 않은 효과에 의하여 의미의 재현전이 방해되는 경우에 해당한다. 은유적 운동의 궤적은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감성적 언어의 관념적 이상화(idéalisation)이자 의미(혹은 진리)의 자기 재점유(réappropriation)과정이다. 데리다가 말하는 태양중심주의에서 태양은 빛의 원천이다. 이 빛은 명료성/애매성, 밝음/어둠, 보이는 것/보이지 않는 것, 생명/죽음 등등의 다양한 표현을 파생시키면서 거의 모든 철학적 은유들과 결합된다. 그래서 태양은 진리를 말하는 모든 철학적 은유의 원천인 것처럼 보이고, 나아가서 이 태양을 통한 진리 은유는 모든 '은유들 중의 은유'인 것처럼 보인다.(자크 데리다, 해체)

 

 

 

데리다의 견해에 의하면, 인간이 사용하는 은유를 보면, 철학은 사유를 먹고 스스로 크지 않고, 로고스의 무의식에 포박당해 있다는 것이다. 이를 은유가 지향하는 명사중심주의와 태양중심주의에서 찾을 수 있다. 인간은 사유보다는 감각을 중시한다는 것에서 이를 찾고 있다. 태양은 무엇보다 철학이 통제할 수 없는 마지막 감성적 요소에 해당한다. 로고스는 어떤 방식으로도 태양과 빛의 은유를 배제하거나 말소할 수 없다. 그것은 빛의 은유가 철학에서 모든 은유적 운동이 수렴되는 중심인 동시에 나아가서 철학 자체의 개념들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이론(theoria)'이라는 말 자체가 ’본다(theorein)'라는 감성적 행위에서 전유되어 굳어진 것처럼, 철학의 초보적인 개념들은 많은 경우 빛의 은유로부터 태어났거나 빛의 은유로부터 자명성(自明性)을 얻었다. 그러므로 철학은 은유적 세계와 구분된 거리에서 자신의 모습을 추스르자마자 자신의 다른 비유적 언어와 마찬가지로 태양의 상징인 로고스에 의해 형성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은유와 마찬가지로 철학은 로고스, 태양을 지향하는 향일성 식물이다. 이것이 모든 철학에 남아 있는 은유의 흔적이다. 이 흔적은 철학의 자기 의식과 정체성 자체를 조건짓는 어떤 구조적 시간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철학의 자기의식에 필연적으로 내재하는 특정한 역사 개념 자체와 하나를 이루고 있다. 다만 철학이 이 점을 스스로 사유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로고스 내면의 은유의 흔적과 이 흔적이 함축하는 역사성은 로고스의 무의식으로 표출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어의 형성과정을 교환가치체계의 경제선으로 파악한 소쉬르의 통찰을 차용했던 데리다는 은유의 속성을 고리(高利)로 인한 ‘원금의 완전탕진’으로 규정한다. 지나치게 높은 이자 지불로 인한 원금의 완전 탕진과 이자가 원금에 가산됨으로 인한 원금의 무한 증식이라는 두 가지 상반된 뜻으로 파악했다. 데리다는 은유로 철학 개념을 만들고, 이렇게 해서 생산된, 철학이 말하는 진리의 재현을 가능하게 하는 비밀스런 음모를 꾸민다고 하였다. 그러나 수사적 양식으로 되어 있는 철학은 은유, 환유 등의 비유 장치들이 언어에 만연해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명제를 실천하기에 그 에너지가 부재한다. 그래서 철학은 현실로부터 멀어지고, 데리다는 이것을 은유는 항상 자체 내에서 사유의 죽음을 운반하고 이 죽음은 진리의 죽음을 통해 철학의 죽음으로 수렵된다고 보았다. 진리가 모든 이들을 자유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는 스스로에게 점유당한다는 것이다. 

 

 

 

 

 

 

 

 

 

3. <나는 양들의 문이다.> 요한10,1-10

 

 

 

그렇다면, 요한복음에 빈번하게 나오는 “나는~이다"라는 고유한 유형, <에고 에이미Ἐγώ εἰμι>는 어떻게 예수님의 신적계시이자 그 계시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서 구현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볼 차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다. 2 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 3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4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5 그러나 낯선 사람은 따르지 않고 오히려 피해 달아난다.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에게 이야기하시는 것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하였다. 7 예수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8 나보다 먼저 온 자들은 모두 도둑이며 강도다. 그래서 양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9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10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부활4주 <나는 양들의 문이다.>라고 전하는 요한10,1-10에서 예수님의 신원의식, 자기선언, 신적 정체성은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는지 생각해 보기로 한다.

 

 

[1]Ⓐ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1-6)

 

 

"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 3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주고”에서 저 문지기는 누구인가? 문지기는 곧 목자일 것이다. 스스로 문을 열지 않고는 목자라고 할 수 없다. 곧 문지기는 문을 열 수 있는 목자라고 할 수 있을 때, “나는~이다"라는 <에고 에이미Ἐγώ εἰμι>는 하늘의 문이자, 양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신적 정체성을 천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자기계시는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히 아는 데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았기 때문에 그는 양들도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 각자의 고유한 이름을 불러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1차적으로 양들이 목자의 목소리를 알 수 있고, 목자의 뒤를 따라갈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여기서 목자와 양을 매개하는 것은 <듣다-안다>는 것이다. 

 

이어지는 목자의 뒤를 양들이 따른다, 는 것은 “나는~이다"라는 <에고 에이미Ἐγώ εἰμι>라는 일반적 용법 앞에는 반드시 기적사화에 해당하는 표징이 나온다는 것에서 어떤 확증에 해당하는 믿음의 선행이 있음을 바라볼 수 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자기계시가 아니라 하늘과 땅을 관통하는 확증에 의한 자기선언에 대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요한복음이 전하는 7개의 비유적 선언 앞에는 표징을 먼저 제시했다는 것에서 그를 확인 할 수 있다.

 

①생명의 빵이다(6:35) ②나는 세상의 빛이다(8:12) ③나는 문이다(10:7, 9) ④나는 선한 목자다(10:11) ⑤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1:25) ⑥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14:6) ⑦나는 참 포도나무다(15:1, 5)

 

요한복음에서 7번의 자기선언은 절대적 용법의 에고 에이미인 “나는 있는 나다”(탈출기3, 14)에서 도출된다. 이는 구약의 하느님의 신적계시와 동일하다. 이것은 하느님과의 절대적인 관계를 의미한다.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하느님에게 갈 수 없다는 지천명 같은 것이다. “나는~이다"라는 <에고 에이미Ἐγώ εἰμι>는 절대적인 통찰과 표징을 거쳐 일반적인 선언으로 표출되었다고 할 수 있다.

 

⑧“나다. 두려워 하지 마라”(6,20) ⑨정녕 내가 나임을 알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8,24) ⑩너희는 사람이 아들이 들어올린 후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8,28) ⑪“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내가 있다”(8,58) ⑫“그 일이 일어난 때에 내가 나임을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13,19) ⑬예수께서 그들에게 “나다”라고 말씀하셨다(18,5) 예수께서 “나다” 하실 때 그들은 뒷걸음치다가 땅에 넘어졌다.(18,6) “나다”하지 않았느냐“(18,8)

 

 

요한복음은 신성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그리스어, "에고 에이미" 선언은 출애굽기에서 "나는 있는 나다"와 같은 형태가 "나다'로 축약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요한복음에서 “나는~이다"라는 에고 에이미Ἐγώ εἰμι는 '나는 고로 스스로 존재한다!'는 에고이즘과는 다르다. 또한 현실에서 어떤 사람의 정체성은 그의 고유성만을 드러내는 것이지만 예수님의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 정체성을 하느님과 공유한다는 확장의 특징이 있다. 그런 맥락에서, 이 7개의 선언은 모두 생명과 사랑이라는 요한복음의 핵심 주제를 관통하고 있는 관계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요한복음에 나와 있는 에고 에이미의 용법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그것은 상징어가 붙어있지 않은 절대적인 에고 에이미 용법과 상징어가 붙어있는 에고 에이미 용법으로 나눌 수 있다. 이중에서 상징어가 붙어있는 에고 에이미 용법은 공관복음에서는 볼 수 없는 요한복음만의 특이한 문형이다.

 

공관복음에서 <하느님 나라는 ~와 같다>는 것에 초점이 놓여있다면, 요한복음에서는 <나는 ~이다>라는 예수님의 정체성에 초점이 놓여 있다. 공관복음은 하느님 나라를 이룩하기 위한 행위에 초점이 놓여 있다면, 요한복음은 그 행위를 있게 한 근원에 초점이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에고 에이미라는 표현을 빈번하게 사용한 요한은 선재적인 그리스도론을 통해 하느님과 예수가 결코 다른 분이 아니라는 종적인 관계론을, 또한 인류구원을 위한 십자가상의 죽음과 부활이 하느님 창조의 완성이라는 횡적인 관계론을 동시에 천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요한복음을 7개의 선언, 7개의 담화, 7의 표징으로 구성된 생명과 사랑의 책이라고 할 때, 선언과 담화와 표징은 모두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이라는 조건을 함유하고 있는 관계론의 실체라고 할 수 있다. 대응시키면 <예수님이-> 모든 피조물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이라는 애주애인[愛主愛人]의 관계를 도식한다. 또한 자기선언을 할 때 그 앞에는 분명한 표징을 먼저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이 에고 에이미의 청자는 제자들이자 군중들이자, 유대사회의 종교지도자들이자, 오늘 우리이다. 그렇다면 '오늘' 예수님의 자기계시의 선언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7-10)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나는~이다"라는 <에고 에이미Ἐγώ εἰμι>는 예수님의 자기선언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나눠진다는 것에 방점이 찍힌다. 나눠지지 않는 자기선언은 그 영원을 보장할 수 없다. 또한 나눠진다는 것은 선언의 육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이고 그것은 언제나 피가 묻어 있다는 것이다. 전한자의 피와 그것을 들은 자의 피가 동시에 묻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인류 역사의 모든 자기선언도 사실 피가 묻어 있었다. 그런데 그 선언의 주체들이 역사의 인물로 남겨진 것은 자신의 십자가에서 만들어진 피가 아니라 민중의 피 혹은 백성의 피로 만든 선언이었다는 데 있다.

 

“나는~이다"라는 <에고 에이미Ἐγώ εἰμι>의 충분조건은 십자가 사건과 그 사건을 죽음으로 끝내지 않은 부활의 권능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의 자기 선언, 자신의 정체성은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예수님으로 하여금 구원사업을 완수하게 하는 강력한 힘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이다"라는 에고 에이미Ἐγώ εἰμι가 지닌 이 힘은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 의지로부터 유래된 자기선언이기 때문에 세상의 그 어떤 힘으로도 막을 수 없는 난공불락의 권능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십자가 죽음을 거친 부활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신적 정체성은 하느님과 나의 관계를 정립하는 것이라면, 그 관계 안에서 나와 세상과의 관계도 정립된다고 할 수 있다. 이 순서는 바뀔 수가 없다. 성호를 긋는 순서와 같다. 이 십자가는 플러스+ 기호가 아니다. 종의 길이가 횡의 길이보다 길다는 것도 하나의 경청을 요구한다. 우리가 서서 두 팔을 양 옆으로 폈을 때와 비슷한 모습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정체성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신자정체성을 형성하게 돕는가. 그리고 그 정체성이 부활신앙과 어떤 연관이 있는가?

 

우리도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는 “나는~이다"라는 에고 에이미Ἐγώ εἰμι에서 연유된 신자정체성을 갖고 있지 않다면, 사실 우리 자신이 구원 받았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없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 파견되었다는 것은 이미 이 그리스도의 정체성으로 무장되어 있다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생존 현장으로 들어가 보기로 한다.

 

이 세상 자체가 우리에게는 십자가다. 이 세상에 살고 있다는 그 자체가 십자가를 지는 일이다. 우리가 그 십자가를 지는 과정에서 세상 가치관과의 충돌로 인해 혹은 자기 욕망의 과잉으로 인해 상처와 실패, 시련, 고통과 죽음이라는 자신의 약함을 수시로 목격하게 된다고 생각해 보자. 이것은 작은 죽음이자, 유사죽음의 경험이다. 그러나 이 죽음이 진정한 죽음은 아니다. 

 

이 부분이 대단히 중요한 거 같다. 우리가 자신의 약함이나 실패를 목격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다음이 중요하다. 관성적으로 우리는 세상의 가치관에 의해 자신의 행위를 재단하고 규정하는가? 아님, 그리스도의 시선으로 그 상황을 바라보는가에 의해 삶의 질이 달라진다. 세상의 가치관으로 죽음의 상태에서 벗어나려 시도하는 한 우리는 고통의 재생산자가 될 뿐이다. 반면, 그리스도의 시선으로 우리의 실패와 약함을 바라보고 그 문제를 그리스도의 시선으로 해결하려 하는가?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두 길, 전자인가 후자인가의 선택은 무엇을 실재로 보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나의 약함이 실재인가? 그분의 강함이 실재인가? 변화무쌍한 것이 실재인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 실재인가?

 

우리의 약함----> 그리스도에게 가져감---> 그리스도의 힘

 

우리의 선택이나 결정이 바로 우리가 그분의 제자로서, 신자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있는지를 가늠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실재라고 여기는 것을 선택한다. 나의 약함과 그리스도의 강함 중에서 실재라고 생각하는 것을 선택한다.

 

어떤 행동을 지시할 때, 결코 나의 약함이 아니라 그분의 강함을 선택할 때, 그리스도의 빛이 우리 안의 행함을 담당할 때, 고통의 근원을 치유 받을 수 있을 때, 진실을 가리는 그 어떤 형상이나 이미지나 상황에 매이지 않을 때, 우리가 기쁨의 제단이라는 것을 발견할 때, 우리는 그분을 실재로 선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때, 그리스도의 얼굴을 가리는 모든 것에서 해방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때 그리스도의 부활의 힘이, 우리의 약함으로 인한 고통이 어디에서 일어났든, 우리의 선택이 되었을 때, 바로 그분의 부활이 실재라는 사실을 믿게 된다.

 

나의 약함이 실재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  부활한 그리스도가 유일한 실재이며, 권능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때 그리스도의 힘이 곧 나의 힘이며, 그런 과정 속에서 하느님의 의지와 뜻을 알 수 있다. 영안을 갖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처럼 세상을 본다는 의미이기에 그리스도와 분리된 듯한 자신의 약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의 힘으로 우리의 약함을 뛰어넘는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우리 역시 그분과 함께 세상을 속량한다는 것, 하느님의 뜻이 모든 권능 안에서 결합되어 있음을 바라보게 된다. 하느님의 힘을 결코 실패할 수 없다는 것을 바라보는 것, 거짓된 구분은 사라지고, 허울뿐인 대안이 치워지며, 진리를 방해는 것이 사라질 때, 나는 하느님이 창조하신 그대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때,  모든 생명도 하느님이 창조하신 그대로임을 평등하게 바라보게 된다.

 

여기서 나의 약함이 실재가 아님을 바라볼 때, 우리가 삶에서 이분법으로 바라본 것들조차 실은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예컨대, 부유함이나 가난이나 그분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외적 상황이 나를 규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의 사회적 위치가 나를 규정하지 못하듯, 모든 슬픔은 기쁨의 다른 이름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신명기 32장 39절에서 그것을 이렇게 전한다.

 

이제는 잘 알아라. 내가 바로 그이다. 나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 죽이는 것도 나요, 살리는 것도 나다. 찌르는 것도 나요, 고쳐준 것도 나다. 내 손에 잡은 것을 빼낼 자 없다. 내가 손을 하늘로 들고 맹세한다. 내가 영원히 살아 있다.

 

 

“나는~이다"라는 자기 계시의 <에고 에이미Ἐγώ εἰμι>는 누구나 쓸 수 있다. 이건 독점적 문장이 아니다. 그러나 그 자기선언이 누구에게나 유효하지는 않다. 데리다가 바라본 대로 진리의 원금탕진일 수도 있다.

 

“나는~이다"라는 자기 계시의 <에고 에이미Ἐγώ εἰμι>, 자기계시는 항상 피가 묻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타자의 피인지? 자신의 피인지에 따라 그 방향이 달라진다. 죽은 문장이 될 수도 있고 살아있는 어령이 될 수도 있다. 또한 그 선언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넘어설 때, 우리는 그것을 신적 자기계시로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고, 삶이라는 십자가의 현장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오늘’을 삼위일체 하느님과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체험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신의 현현, 에피파니는, 또 세상 끝날까지 함께한다는 그리스도의 현존은 그분의 목소리를 들은 '오늘' ,  우리의 몫이라고 할 수 있다. 

 

 

글을 마치며.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 3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