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사랑의 물리학, 질량의 크기는 부피와 비례하지 않는다(김인욱)

나뭇잎숨결 2023. 4. 8. 07:05

 

 

 

 

국립묘지에 피어있던 겹벚꽃

 

 

사랑의 물리학, 질량의 크기는 부피와 비례하지 않는다(김인욱)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도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1.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아가 8,6)

 

 

예수님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부활대축일에 우리가 건네는 <부활을 축하드립니다!>라는 인사는 시간과 공간, 인간의 모든 상식을 뛰어넘는 범우주적 인사다. 이 인사의 근원은 <예수는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에서 도출된 신앙고백이며, 이 고백의 원본은 <예수는 부활하셨다>와 <하느님은 예수를 부활시키셨다>는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의 일치를 전제로 한다.

 

아버지를 향해 나아가는 아들의 사랑과 아들을 향해 나아가는 아버지의 사랑의 교호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를 십자가로 이끈 온전한 인간애와 온전한 아들로서의 길이 죽음을 뚫고 아버지께 나아가고, 아버지는 이를 인류역사의 그 무엇으로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 은총으로 받아 안아 영원한 생명으로 되돌려준 사건을 우리가 건네는 <부활을 축하합니다>>라는 인사가 담지하고 있다.

 

사랑의 크기는 희망의 크기와 비례한다.

 

부활은 예수가 인류 구원을 위해 어떻게 부활했는가만 묻지 않고 바오로 사도의 통찰처럼 <희망없이 희망하여>(로마서4, 18)라는 것에서 우리에게 무엇을 희망하는가?를 묻는다.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사랑의 크기와 비례하고, 실존의 상황과 반비례한다는 것을 세 명의 교부들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위르겐 몰트만은 『희망의 신학』에서 부활은 그리스도인의 희망이다. 라는 전제하에 그런데 그 희망은 고통과 죽음을 통과한 사랑이라는 점에서 창조신앙에서 그 희망의 근원을 찾는다. 하느님의 전능은 존재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지 무에 근거를 두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고통과 죽음의 필연성을 전제하는 것이다.

 

인간이 하느님에게 선물로 받은 이 자유는 선과 악에 무차별적으로 노출된 자유이다. 선을 창조한 것이지 어둠의 심연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창조는 사랑이 근원이기에 사랑은 언제나 진정으로 자유로운 두 존재 사이에 가능하다. 그러나 인간이 비록 자유롭고 한편 사랑할 수 있는 존재라 하더라도 그는 어쩔 수 없이 어둠이라는 심연에 노출된 유한한 피조물이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무한한 행복을 추구한다는 사실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애당초부터 하느님을 지향하도록 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그 자유와 사랑이 건너야할 유한한 자유와 사랑의 돌무덤으로부터 벗어났을 때에만 우리의 생명이 하느님 없이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하느님의 사랑은 고난당하는 전능이라는 사랑의 역설임을 강조한다.

 

인간이 겪는 고통과 죽음은 인간자체의 유한성에 근원을 두고 있으며, 그 유한성은 창조 자체에 근원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악은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도록 명하시기에 존재한다는 역설이 존재한다. 따라서 사랑은 항상 고난당하는 사랑이다. 사랑에는 오직 무죄한 고난만이 존재한다. 무죄한 고난은 사랑의 고난이고 사랑받는 자들의 고난이다. 하느님의 전능이란 바로 스스로 고통당하는 사랑의 전능이다.

 

기스펠트 그라사케는 『은총-선사된 자유』에서 하느님은 인간을 죽음이라는 숙명에 넘기지 않으셨음에 대해,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희망의 이름이라는 것에 대해, 만사가 하느님의 구원의지-해방과 자유의 초대를 선물로 받아들일 때, 그리스도인의 희망의 표지를 볼 수 있다고 전제한다.

 

은총은 과실과 소외로부터 해방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은총은 이것을 능가하여,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극단적인 자기 양양도(讓渡)인 것이다. 인간은 항상 하느님께 이 은총을 추구되나 결코 온전히 달성되지 못하고, 오로지 하느님으로부터 선사될 수 있을 뿐인 자유다.”(158)

 

영원한 생명이나 부활로 표상되는 인간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느님이 인간에게 내어준 초자연적 은총의 선물이다. 하느님의 극단적인 자기 양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준 강생과 십자가 신학이다. 이 양도가 무엇인가?

 

부활사건을 보면 하느님은 예수님과 하나다.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다. 우리는 그분의 창조물이기에 우리는 아버지와 하나이며 동시에 예수님과도 하나다. 이것을 알게 한 성령과도 하나다. 따라서 우리는 삼위일체 하느님과 하나라는 사실이 도출된다.

 

이 ‘하나’라는 사실은 인간이 선행이나 업적 등 인간의 행위로 얻을 수 없는, 죽음을 넘어서는 지고의 사랑에서 가능하다. 그런 맥락에서 교회의 일치론은 하느님의 인격적 사랑에 직면한 인간의 자기이해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부활 사랑에 대해 라칭거 추기경(베네딕도16세교황)은 『사도신경강해』에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와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의 결정체인 부활 사랑을 아가서8장 6절의 <사랑은 죽음과 같이 강하다>는 아름다운 꿈과도 같은 표지로 설명한다. 어떻게 사랑에 비유된 그 사랑이 그리스도인의 희망일 수 있을까?

 

(그동안 여러 글에서 많이 언급했던 부분을 재인용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부분이라 거듭하여 발췌한다)

 

사랑은 무한을 갈구하고 불멸을 갈구한다. 사랑은 말하자면 그 자체가 무한을 찾는 외침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 외침이 성취될 수 없고 사랑이 무한을 갈구하면서 줄 수 없음은 어쩔수 없는 사실이다. 사랑은 영원을 요구하면서도 실은 사계에 잠겨있고, 사계의 고독 및 파괴력에 갇혀있다. 이런 입장에서만 부활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 수 있다.

 

인간은 자존하는 존재가 아니라 유한자다. 그곳에 고통과 죽음의 필연적인 이유가 있다. 따라서 오직 한 분만이 참으로 불사불멸의 그 바탕을 베풀어 줄 수 있다. 생성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고 생성과 과도의 한가운데 머무는 존재자, 내 존재의 그림자와 메아리만 간직하지 않는 자, 그의 생각이 현실이 잔영만이 아닌 산 이들의 하느님이다.

 

사랑은 죽음과 같이 강하다고 할 때 그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 사랑의 가치를 생명의 가치 위에 두는 사람, 즉 사랑을 위해서 삶을 사랑에 종속시킬 용의가 있는 사람의 경우에만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고 더 클 수 있다. 사랑이 죽음보다 위대해지려면 그에 앞서 단순한 생명보다 더 커져야 한다.

 

사랑이 예수에 있어 죽음보다 더 강해졌다면 그것은 다른 이들(모든 이들)을 위한 사랑으로서이다. 사랑은 불사불멸을 확립하고 불사불멸은 오직 사랑에서만 온다. 불사불멸의 이러한 정립은 사랑에 부수적인 그 무엇, 사랑이 이룩하려는 많은 일중의 하나가 아니라 사랑이 본질을 구성한다. 모든 이를 위해서 사랑한 자는 또한 모든 이를 위해서 불사불멸을 확립했다는 것도 동시에 뜻하게 된다. 이것이 그의 부활이 우리의 삶이라는 정확한 의미이다.

 

제자들이 부활한 주님을 알아보면서도 못 알아보며, 그를 만지지만 그를 건드릴 수 없었다. 사랑이 베푸는 저 영원에 있는 종국적 생명은 오직 그가 보도록 해주는 경우에만 보이고, 오직 그가 눈을 열어주고 마음을 열어주어야만 이 사계(死界) 가운데에서도 죽음을 극복한 영원한 얼굴을 알아볼 수 있게 되며, 이사랑 안에 새로운 다른 세계가 열린다. 부활한 분과의 만남은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명확하게 만든다.

 

라칭거추기경의 부활사건에서 보여준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을 사랑은 죽음과 같이 강하다”(아가서8, 6)에서 말하는 그 사랑이 두려워 말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오한16,33)로 모아진다. 이는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라는 신앙고백에서 <심판>이 자유와 책임, 사랑과 정의라는 저울추를 통해서가 아니라 죽음을 넘어선 예수님의 사랑에 내 맡겨진 것에 우리의 궁극적인 희망이 있다고 본 것이다. 우리 개개인으로서는 도저히 파괴할 수 없는 사랑이 하느님 사랑이라는 것으로 귀결된다. 이것은 개별적인 지복이 아니라 요한 묵시록에서 전하는 <새 하늘 새 땅>의 로드맵이라고 본 것이다.

 

 

 

 

 

 

 

 

 

2. 승리가 죽음을 삼켜버렸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위의 교부들이 전하는 부활의 사랑은 우리가 사랑자체와 하나라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에서,  ‘하나’라는 일치에 초점이 놓여 있다. 그 일치는 인간이 선행이나 업적 등 인간의 행위로 얻을 수 없는, 죽음을 넘어서는 지고의 사랑에서 가능하다.

 

그런 맥락에서 부활의 사랑은 하느님의 인격적 사랑에 직면한 인간의 자기이해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바오로의 다마스쿠스 체험은 바오로의 회심만 아니라, 우리는 예수님과 하나라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케 하는 사건이었고 하느님의 인격적 사랑에 직면한 인간의 자기이해의 과정이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사도9, 1-19)

 

네가 박해하는 이들이 바로 나다, 라는 다마스쿠스 체험 후의 바오로가 말하는 희망은 죽음에 사로잡히지 않는 부활로 완성되는 인간의 구원을 의미한다.

 

승리가 죽음을 삼켜버렸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 있느냐?”(1코린토15, 54-55)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하느님께서 인간의 인격적 정체성을 보존시키면서 새로운 존재양식 안으로 죽은 자들을 일으킨 사건으로 이해한다고 할때, 이는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우리는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하게 되었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를 공의회에서는 교의로 확정한다. 

 

톨레도 공의회(675)에서는 죽은 이들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부활할 것이나 다른 육신으로가 아니라 현세적 육신을 입고 부활하리라고 가르친다.

 

라테라노공의회 (1251) 역시 모든 인간이 현세에서의 육신을 지니고 부활하게 될 것이라고 가르친다.

 

비엔나공의회(1311-1312)에서 인간을 물질적 육신과 정신적 영혼으로 구성된 합일체로 파악하고 있다.

 

5차 라떼란 공희회(1512-1517)에서 각 인간은 하나의 불멸하는 영혼을 가진다고 결정적으로 가르친다.

 

 

여기서 부활하게 될 새로운 아담인 인간은 현세적 육신의 동일성과 비동일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살아계실 적의 그분과 같은 분이면서 다른 존재로 만났던 것에서 그를 알 수 있다. (요한21, 1-14)

 

성서에서 하느님의 모상이라고 지칭되는 인간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학대전』에서 바라본 육신이나 영혼이 아니라 단일적이고 전인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이다. 인간은 육신과 영혼 속에서의 한 인간인 것이다. 이 육신과 영혼의 단일성은 인간이 살아가는 존재양식을 통해서 드러난다.(79)

 

여기서 육신 부활은 인간이 자신의 노력을 통하여 달성할 수 있는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초자연적 은총임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전한 것도 헛된 것이요, 여러분의 믿음도 헛된 것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1고린토15, 14) 만일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그리스께서는 다시 살아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1고린토15, 16) 썩을 몸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을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런 것으로 다시 살아납니다(1고린토15,42-43) 아담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모두 죽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살게 될 것입니다(1코린토15, 20-22)

 

 

바오로의 코린토1서 15장을 보면,  당시의 지배적인 부활론은 바리사이파가 생각하는 부활로,  유대사회를 지배하던 묵시문학적 사자부활을  부활로 생각했었음을 알 수 있다. 세상 종말에 죽은 이들이 부활하리라는 지평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이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바오로의 다마스쿠스 체험은 모든 신음하는 인류와 함께 하는 현존의 부활이다. 오늘, 지금 여기에서의 부활을 말한다.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사도9, 1-19)

 

그런 맥락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인간들이 열망하는 이상향이 이 세계 안에서 실현된 인격적 이상향으로 이해될 수 있다. 예수님의 부활 안에서 현세적 세계가 총체적으로 변형될 수 있는 가능성과 인간의 영원한 변형가능성을 보게 된다."(심상태,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교의 신학적 고찰』) 

 

 

 

 

 

 

 

 

 

 

 

3. 돌, 아마포, 수건 그리고 사람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라고 전하는  요한 20,1-9을 읽어본다.

 

1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2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3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4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5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6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7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8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9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 라고 전하는 요한 20,1-9은 사실적이고 , 실존적인 부활의 목격담이다. 복음 묵상하면서 세 번 울었다. 

 

돌, 아마포, 수건, 그리고 사람을 통해 부활을 예표한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부활체험. 사도 요한의 부활체험, 베드로의 부활체험은 자칫 이것이 부활이라고?라고 반문케 할 만하다. 

 

성서 어디에도 예수님 부활의 경위가 사실적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사실 부활 사건을 눈으로 목격한 증인은 아무도 없었고 어느 복음사가도 그것을 묘사하지 않았다. 누구도 부활이 물리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말할 수는 없었다.(심상태,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교의 신학적 고찰』)

 

예수의 부활은 현세의 인간의 조건으로는 설명할 수가 없다.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증인들에 의해, 라자로의 소생사화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체험에 의해 우리는 육신의 부활을 믿고 있다. 우리가 믿고 있다는 그 믿음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 라고 전하는 요한 20,1-9에서 그들에게 부활의 단서를 제공한 것은 돌, 아마포, 그리고 수건이었다.

 

세 사람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한 상태에서, ‘빈 무덤’을 목격했다.

 

인류역사의 패러다임이 바뀐 전무후무한 사건, 야만과 광기의 아우성으로 들끓었던 십자가 사건, 그 다음 시나리오는 너무나 '고요'하다. '고요'를 감당하는 사람만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감히 말하고 싶어진다.

 

엘리야가 <주님! 이것으로 충분하니 저의 목숨을 거둬주십시오!> 라고 예언자의 삶을 끝내고 싶었던 그 순간, 호렙산에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고요'속에서 듣듯,(열왕기상 19, 11-12) 이 세상이 결코 흔들지 못하는 '고요' 속에서 들리는 그 목소리는 누구의 목소리인가?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나와서 산위, 주님 앞에서 서라,” 바로 그 때에 주님께서 지나가시는데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할퀴고 주님 앞에 있는 바위를 부수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바람 가운데 계시지 않았다. 바람이 지나간 뒤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지진가운데도 계시지 않았다. 지진이 지나간 뒤에 불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불 속에도 계시지 않았다. 불이 지나간 뒤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이 '고요'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예컨데, 우리가 삼우제를 지내려 고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이름할 수 없는 묘지 주변의 '고요'를 경험한 일이 있을 것이다. 그 고요! 노숙자들의 이름 없는 주검을 밤새 눈이 내려 아마포같은 고요로 덮은 장면을 목격하기도 한다. 그 고요! 한 사람의 복잡다난했던 생이 '고요' 앞에서 중력이 좌우되지 않는 곳에 있다는 이 신호음, 사람이 야만과 소란과 광기는 감당해도 정적에 가까운 '고요'는 감당하지 못한다는 것을 실감하게 만드는 그 고요!

 

 

 

 

 

 

 바로 그 '고요'가 마리아막달레나가 경험한 부활체험이었다.

 

그렇게 주님의 시신만이라도 보고 싶었던 마리아막달레나가 본 것은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차마 무덤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곧바로 두 제자에게 달려간 사건의 전후맥락 안에는 이 '고요'가 있다. 마리아막달레나는 그 '고요'를 감당할 수도, 해석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고요'가 평화이며, 하느님의 현존이라는 것을 마리아 막달레나가 어떻게 그 순간 알 수 있었을까? 사랑은 언제나 우리보다 먼저 도착한다, 는 것을,

 

저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라고 속옷까지 나눠가졌던 인격살인과 육체살인을 동시에 감행했던 야만과 광기를 더 큰 재앙으로 돌리지 않고 그런  '고요'로 인류에게 돌려준 그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

 

이 '고요'한 부활사건은 예수님의 운명만 바꾼 것이 아니라, 그리고 첫 목격자인 세 사람의 운명만 바꾼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운명도 바꿨다. '고요'가 우리의 운명을 바꿨다. '고요'가 하느님의 현존이라는 것을 인류가 알게되기까지 우리는 세상의 소란과 광기 속을 통과해야 한다. 

 

돌, 아마포, 수건, 그리고 사람, 그것을 기록할 수 있는 언어적 능력이 오늘 우리에게 당도한 부활의 사랑이다.

 

빈무덤은 그들은 희망의 죽음을 상징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그들에게도 죽음이었다. 그 희망의 죽음 앞에서 그들은 여전히 그분을 찾고 있었고 그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부활의 은총은 인간의 행위로 얻어진 보상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예수님을 계속 찾고 있었고, 그분을 배신하면서 동시에 그분을 향해 달려갔다. 그것이 아마도 불가피한 사랑의 물리학일 것이다. 불학실함에도 계속 찾게 만드는 것, 배신과 절망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 쪽을 향해 달려가게 하는 것,  그 저변에 깔린 사랑이라는 자장에 의해 그들은 계속 찾고, 그리고 숨고, 그리고 다시 그들은 그분이 사랑하는 이들에게 또 그분을 향해 달려가야 했을 것이다.

 

깨달음보다 몸(돌, 수건, 아마포)이 먼저 안다, 

 

그들 세 사람은  우리에게 무엇을 전해주었는가?

 

마리아막달레나, 사도요한, 베드로, 이들은 우리에게 어떤 희망을 주고 있나?

 

그분은 이미 부활하셨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분을 찾지말라고 성서는 우리에게 계속 충고한다. <그는 여기에 없습니다 ... 그는 부활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계속 찾고 있었다. 부활하셨든 아니 했든 그분을 향한 사랑을 변경시킬 수 없다는 듯,  성 그레그리오 교황의 복음서에 대한 강론에서(Hom. 25,1-2.4-5: PL 76,1189-1193) 마리아 막달레나에게서 찾음에 대한 하나의 전형을 제시한다. 찾음은 갈망의 크기를 드러낸다.

 

거룩한 열망은 그 성취가 지체될 때 더욱 커집니다. 열망이 지체되어 시든다면 그것은 참된 열망이 아니었다는 표시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진리에 도달하게 되면 이는 그가 진리를 불타는 사랑으로 갈망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내 영혼, 생명의 하느님을 애타게 그리건만, 그 하느님 얼굴을 언제나 가서 뵈오리까."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아가에서 "나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상처를 입었도다."라고 말하고, 다시 "내 영혼이 녹아 버렸노라."고 말합니다.”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서, 예수님의 시신마저도 없는 부재를 목격한다. 그리고 베드로와 사도요한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이 문장에서 울었다. 두려운 아름다움이란 아마도 이런 것일 것이다. 베드로와 사도요한은 예수님이 사랑하는 이들이었다. 사랑하는 이들이 주로 하는 이상한 행동양식이 있다. A가 B를 사랑하는데 B가 부재하여 그 사랑을 전할 수 없을 때, 엉뚱하게 그 사랑을 알만한 C를 선택한다. 우리에게 그 C는 예수님이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상태는 지금 그런 상태가 아닌가? 예수님의 부재를 감당할 수 없어, 예수님이 사랑하던 이들에게 달려가는,

 

그녀의 전언을 듣고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먼저 도착하여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목격했다. 그러나 베드로가 오기를 기다려 무덤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이 문장에서 또 울었다.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의 수위권을 존중하는 사도요한의 마음. 너무 아름답다.  바로 사흘전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모른다고 배신한 사건, 어쩌면 베드로가 백번을 모른다고 했어도 그것이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하는 그 두려움을 감당하지 못한 것이었음을, 평생 '사랑하십시오!'를 입에 달고 다녔을 사도 요한이 몰랐을 리가 없다. 어떤 사람의 표출된 행동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행동의 저변을 볼 줄 아는 사도 요한, 너무 아름답다.

 

베드로가 도착하여, 무덤에 도착하여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베드로를 따라 사도 요한도 들어가 보게 되었고, 믿었다” 라고 복음 사가는 전한다. 이 문장에서또 울었다. 요한은 아마포와 수건에서 부활의 표징을 곧바로 읽어낼 수도 있었겠지만, 베드로가 어떻게 저 상황에서 부활을 믿을 수 있을까? 

 

그들은 그렇게 부활을 우리에게 전한다. 그들 자신도 명명백백하게 언어화 할 수 없는 부활 체험을 우리는 그들의 몸짓으로 알게 되었다. 그리고 돌, 아마포, 수건, 세사람의 끌어당김의 법칙이라는 사랑의 자장 안에서 부활은 오늘 우리에게 그렇게 왔다. 우주의 모든 창조물을 통해 전해진 부활, 예수님께 운명을 걸었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마리아 막달레나의 전언을 듣고 무덤을 향해 달려가는 베드로에게 주목한다. 베드로는 용서받은 교회의 모습이다.

 

"베드로가 일어났습니다" 그는 생각에 앉아서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집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는 당시의 침울한 분위기에 굴복하지 않았으며 의심에 압도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양심의 가책, 두려움 또는 아무데도 인도하지 않는 지속적인 험담에 사로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아니라 예수 찾고 있었다. 그는 만남과 신뢰의 길을 선호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대로 일어나서 "놀라서돌아올 무덤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부활, 그의 마음의 부활의 시작을 표시했습니다. 슬픔이나 어둠에 굴복하지 않고 그는 희망의 여지를 만들었습니다 : 그는 하나님의 빛이 그것을 질식시키지 않고 그의 마음에 들어가도록 허용했습니다.

 

우리는 세 사람을 통해 교회가 만들어지는 그 신비한 과정을 바라볼 수 있다. 우리는 그 신비한 코드를 읽을 수 있도록 성령의 시대를 산다. 그런데, 교회의 구성원이 되었다고 현실의 문제가 패스되지는 않는다. 우리 앞에 산적한 문제상황을 어떻게 바라보고 극복하는지가 부활 신앙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문제의 복음화'를 요구한다.

 

"우리는 안팎의 문제를 보고 계속 보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항상 거기에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밤 부활하신 주님의 빛을 우리의 문제들에 비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그것들을 "복음화"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를 복음화하기 위해. 어둠과 두려움이 우리를 산만하게 하고 지배하도록 허용하지 맙시다. 우리는 그들에게 부르짖어야 합니다: 주님은 "여기 계시지 않고 부활하셨습니다!"

 

 '문제의 복음화'가 대체 무엇인가? 문제라는 어둠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이다. 사라지게 할 것과 견뎌야 하는 것을 분별하는 지혜를 사는 것!

 

이 세 사람의 전혀 다른 빈무덤 체험을 통한 부활체험을 우리에게 그렇게 봄처럼 왔다. 그들이 완벽해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죽음까지 함께한 공동체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그들 역시 끝까지 걸어갔기에 아름다운 것이다. 마리아 막달레나, 사도 요한, 베드로 이 부족한 인류가 모여 지상의 교회가 만들어지는 순간이 바로 빈무덤이고, 그들이 본 돌, 아마포, 수건 그리고 사람이 그 증인이다.

 

그렇다면 부활은 우리에게 어떤 사랑을 구체적으로 요구하는가?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다시는 죽음도 없고 다시는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묵시21, 1-4)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오28, 20)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114)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마르코16, 20)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 있다고 요한은 전한다. 보라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오28, 20)고,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1,14)고, 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 고 전한다. 부활은 끝나지 않은 사랑이다. 각자의 빈무덤 앞에서 절망하는 이들을 찾고, 베드로와 요한처럼 달려가라고 전한다. 교회 안의 부활이 아니라, 세상의 부활이 되게하라고 촉구한다. 

 

그분의 현존을 우리를 통해 우리의 생존현장에서 계속 현존케 하는 것. 물론 이 사랑은 우리의 힘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선사된 자유에 해당한다. 그러나 불확실 앞에서 주저앉지 않고 계속 확실함을 찾아 헤메는 것, 그분이 사랑하는 이들에게 달려갔던 막달레나, 사도 요한, 베드로처럼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실존의 상황에서 계속 그분을 찾고, 그분의 부재 앞에서 절망하는 누군가에게 달려가는 것. 문제를 복음화 하는 것!

 

우리가 계속 그분이 어디에 있는지를 찾고, 그리고 달려가는 것은 최소의 땅에 최대라는 하늘의 사랑이 담기는 사랑의 역설이다. 기적이다. 나라는 사람에 하느님의 사랑을 담는 행위다. 그래서 부활의 사랑은 벅차다. 그 사랑의 물리학은 최소-최대법칙을 우리에게 말한다. 돌, 아마포, 수건이라는 사랑의 크기는 자본주의가 말하는 거대한 교환의 법칙에 종속되지 않는다. 광기와 야만을 잠재우는 '고요' 속에서 우리의 가난이 풍요의 근원이라는 것을,  보리빵 다섯개와 물고리 두마리가 오천명을 먹일 수 있다는 기적을  부활은 말한다. 그것이 바로 부활의 사랑이 담고 있는 사랑의 역설, 사랑의 물리학일 것이다. 그러기에 한 시인의 통찰은 옳다. "사랑의 물리학, 질량의 크기는 부피와 비례하지 않는다"(김인욱)

 

 

글을 마치며,

 

80억 인류에게 고개 숙여 인사한다.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