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영원한 생명의 현재성, 고백의 차원에서 인격의 차원으로

나뭇잎숨결 2023. 3. 24. 12:54

영원한 생명의 현재성, 고백의 차원에서 인격의 차원으로

-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를 중심으로

 

 

 

가끔 생각한다. 요한복음이 없었다면, 바오로사도가 없었다면 과연 그리스도 신앙은 어디로 갔을까? 나아가 요한복음이 있었어도 라자로의 소생사화가 없었다면, 바오로사도가 있었어도 고린토전서15장이 없었다면 희망없이 희망하며’, ‘절망을 모르는 현실을 뒷목이 뻣뻣한 백성인 우리가 설득당할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사순5주 <나는 부활이고 생명이다>라고 전하는 요한 11,1-45을 나인과부의 아들 소생사화(루카 7, 11-17), 회당장 야이로의 딸 소생사화(마태오 9, 18-26: 마르코 5, 21-43; 루카8, 49-56) 그리고 코린토전서15장, 라칭거 추기경의 「신약적 부활희망의 내용」, 칼 러너의 「무한한 하느님과 관계하는 인간정신의 초월성」, 토를라이프 보먼의 『히브리적 사유와 그리스적 사유의 비교』. 심상태 신부의 『신학적 인각학』을 참고하여 복음사가가 라자로의 소생사화를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 그리고 부활이 예정된 예루살렘 입성 전에 배치한 이유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본다. 

 

요한복음은 7개의 표징, 7개의 담화, 7개의 선언으로 이루어진 신약의 창세기라고 할 때, 라자로의 소생사화가 어떻게 부활의 예표일 수 있는지, 또 부활이 창조신앙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25절, 26절을 통해 생각해 본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25)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2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2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예수님의 신원선언은 강생신학 안에 이미 십자가 신학이 함께 있음을 말해 준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1,14)는 그 말씀이 부활을 가능케 하고, 그것이 영원한 생명으로 우리의 실존 안으로 들어왔기에, 우리는 그 말씀으로 인해 ‘죽음이 마지막 말’이 아님을 고백할 수 있고, 우리가 말씀의 현재성을 전인격으로 체험할 수 있다.

 

더불어, 사람의 생명이 영원이라는 초시간 속에 위치된 선물이라는 것은 우리가 매일 창세기를 다시 쓰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나는 세상의 그 무엇에 의해서 훼손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존재감이다. 나는 하느님이 창조하신 그대로이기 때문이다(M110)

 

또한 믿음은 말씀의 현전성을 믿는 것이기에, 인간과 신의 대화가 단지 소통의 매개체가 아니라 생명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말씀이 곧 생명이다. 그때 누구나 "그를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 3,15-16)는 것에서 생물학적인 생존이 아니라 죽음의 상태를 벗어난 영원한 생명을 체험하는 부활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사도신경에서 <육신을 부활을 믿으며>라는 고백을 하고 있다. 라자로의 소생은 <육체의 소생>이라는 점에서 라자로의 육체적 소생이 어떻게 육신의 부활, 그 예표인가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할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나를 믿는 사람은 / 죽더라도 / 살고,

 

부활신앙이 어려운 것은 사람을 무엇으로 규정할 것인가? 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는 바 <육체의 부활>의 아니라 <육신의 부활>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인간의 불사성의 근원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라는 근원적 질문에 해당한다.

 

육체는 물리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 가시적인 실체다. 그러나 육신을 규정하는 것은 어렵다. 육체와 육신을 구별하는 기준이 무엇인가는 더 어렵다. 그렇기에 육체의 부활이 아니라면 라자로의 육체적 소생을 왜 부활의 예표라고 할 수 있는지?에서  그 연결고리를 더듬어 보아야 할 듯하다.

 

예수님을 믿는 나, 나라는 그 사람은 누구인가? 나라는 사람은 죽을 수 있는 존재이면서 그러면서 영원히 살 수 있는 존재다. 죽을 수 있다는 점에서  누구나 경험하는 육체의 물리적 소멸을 말한다. 그런데 영원히 산다는 것은 육신의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의문에 봉착한다. 육체와 육신은 어떻게  다르게 체험하나? 또 육신은 영혼과 어떤 존재성을 갖는가?

 

종교의 역사 안에서 오랜 논쟁의 주제였던 영혼과 육신을 이원론으로 볼 것인가? 단일성으로 볼 것인가에서, 육신과 영혼을 분리된 실체로 볼 것인지에 대해 바오로 사도는, 위의 질문에 대한 답을 동시에 하고 있다. 육체와 육신을 구별하여, 고린토전서15장에서 다음과 같이 들려준다.

 

살과 피는 하느님 나라를 물려받지 못하고 썪는 것은 썪지 않은 것을 물려받지 못합니다(50) 썪는 몸은 썩지 않은 것을 입고 이 죽는 몸이 죽지 않은 것을 입으면 그 때에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승리가 죽음을 삼켜버렸다(54)

 

 

바오로 사도는 살(육체)과 몸(육신)을 구분한다. 썩는 것은 육체다. 썩지 않는 것은 육신이다. 즉 육체와 육신을 구별하여, 부활에 동참하는 것이 육신임을 천명한다. 그래도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미하며"라고 할 때, 육신은 어떻게 영혼과 구별되나? 하는 것이다. 

 

어떻게 육체와 육신을 구별하는가? 또 육신은 영혼과 어떤 존재양식을 갖는가?

 

라자로의 소생사화를 묵상할 때, 만나는 신자들에게 질문해 본다. 육체와 육신을 어떻게 구별하나요? 그것을 명쾌하게 구분하는 이들을 보지  못했거니와 오히려 육체와 육신은 같은 것이 아니냐고 되묻기도 한다. 

 

예수님의 부활을 알아보지 못한 제자들, 특히 마리아막달레나가 예수님을 정원지기라고 생각한 것에서, 부활은 육체적 소생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육체와 육신의 차이를 분명히 바라볼 수 있다. 육신은 형상과 질료를 넘어서는 영적 존재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영적 존재양식에 대해, 육신과 영혼을 이원론으로 볼 것인가? 단일하다고 볼 것인가의 논쟁의 한 복판에 살았던 토마스 아퀴나스는 "육신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영혼의 세상적 <자기소여성>"이라고 규정한다. 인간은 육신과 영혼이라는 두 개의 실체로 구성된 존재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하나요, 영혼은 육신을 통해 현실적으로 존재한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육신 안에서 인간의 세계적 현전성은 인간 영혼의 실재성 안에서 존재한다는 말이다. 인간은 근원적으로 이원적 존재가 아니라 단일성이라고 본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행위는 전인-행위로 파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72)

 

루카복음 사가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의 소생사화에서 육체의 죽음 때 영혼은 그곳에 있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자 아이의 영이 되돌아와서 아이가 즉시 일어섰다"(루카 8, 52-55)

 

그렇다면 <죽더라도 살고>는 무엇인가? 여기서 죽었다는 것은 무엇이 죽었다는 것인가? 육체의 물리적인 소멸상태, 생물학적인 사망선고를 의미하는가? 아니면 루카 사가의 통찰처럼 육체의 죽음때 영혼은 그를 떠나 보편자의 운명에 동참하는가?

 

여기서 소생이 생물학적인 구성으로서의 복원이 아니라면 라자로의 소생이 어떻게 부활의 예표라고 할 수 있는가?

 

우리는 종교를 갖고 있지 않은 이들도 하늘이 무섭지 않니? 하늘이 때가 되먄 갚아주시겠지...등등...하늘이 알고 있고 땅이 알고 있다는 것을 삶으로 살고 있다. 그리고 그들도 절절한 사랑을 주고 받으며 산다. 선과 사랑은 종교 이전에 인간의 본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에서 구원의 완전성, 보편성, 나아가 종말론적인 부활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육체는 죽지만 죽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무신론자라도 무의식적으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육신과 영혼은 어떤  사람의 종교유무에 따른 인간 존재조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종교가 없는 사람이 그분을 '믿는다'는 것인가? 육체의 죽음 그 이후에의 믿음은 무엇인가? 칼 러너의 익명의 그리스도인을 끌어들이지 않아도 선과 사랑과 진리는 만인 공통의  지향점이다. 

 

우리는 여기서 창조신앙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창조의 상태는 보편적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피조물이 그분의 창조물이라면 모든 사람의 존재조건은 육신과 영혼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육체의 유한성에서 벗어난 순간(죽은 다음), 인간은 자신의 근원이 무엇인지 드디어 볼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죽어서의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이라는 우리의 존재조건 뿐 아니라 예수님의 신성, 창조이전에 계셨던 분이라는 요한복음 1장을 수긍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구원의 보편성이자, 종말론적인 불멸론을 말할 수 있는 근거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토마스 아퀴나스가 바라본 인간의 존재조건인 육신과 영혼의 <자기소여성>이라고 할 수 있다.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죽더라도 살고>를 부활의 보편성(연대성)이라고 한다면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구원의 개별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 각자의 자유의지의 실현에서 비롯된 이 순례 여정에서의 믿음, 요한복음사가는 라자로의 소생사화를 통해서 부활이 세상이 끝나는 날의 종말론적인 사건이 아니라 지금, 오늘, 여기서 일어나는 현재적인 축복임을 전하고 있다.

 

마르타에게 반복적으로 고백적 신앙에서 인격적 신앙으로의 초월을 예수님이 요구하신 것에서 그것을 바라볼 수 있다. 고백적 신앙은 종말론적인 신앙이다. 죽은 다음에 천국이 있다고 생각하는 오늘의 괄호치기(블랭크)다. 그래서 영원을 말하지만 영원을 결코 알 수 없고, 알고 싶지 않은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완전한 무신론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벽한 유신론도 아닌 상태로 이 세상과 저세상에서의 경계인의 잇점을 최대한 누리려는 것이다. 

 

마르타와 예수님의 대화에서

 

"주님 (라자로가)죽은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납니다(29)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40)

 

 

, 주님! ,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마르타)“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 이십니다”(마태오16, 16/ 마르코8,327/루카9, 18-21)

 

여기서, 마르타의 고백적 신앙은 배드로의 고백적 신앙과 맥을 같이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이 없다는 것은 십자가를 상징화 시키는 것이다. 이 신앙은 언제든 십자가를 블랭크 할 수 있는 신앙이다. 심하게 말해 언제든지 십자가 앞에서 사랑의 배신이 예정된 신앙이다. 오늘을 괄호치기한다는 것은 신앙의 트릭스터들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는 행위이다. 여기서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의 기도 "저들은 지금 저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라는 무지에 대한 용서를 청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몰려 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영원을 모르는데 영혼을 알 수 있을까?

 

(요즘, 일부 신자들 안에서 죽은 다음에 자녀들도 믿을 수 없으니, 미리 자기 연미사 49일 동안 바치기, 100일 바치기, 혹은 서른세대 바치기 같은 것이 있다. 참 놀랬다. 두번째 놀란 것은 미리 자기의 풍수지리적으로 좋은 납골당을 알아본다는 것이다. )

 

죽어서의 천국을 믿지만 살아서의 천국은 믿지 않는데, 너무나 열심하다는 것이다. 이쪽과 저쪽의  카테고리를 이미 정해놓은 열심을 무엇이라고 이름붙일까? 돌무덤 안에서의 열심이라고 할까? 

 

단적으로, 그것은 십자가 없는 영생을 원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라자로의 소생으로 돌아가 보자.

 

마르타와 마리아 라자로를 통해서 보여준 개별적인 축복이 라자로에게 가능했다면, 오늘 우리에게 가능해야 하고, 육체로 상징된 각자의 돌무덤을 걸어나와야 부활의 무한개방성 앞에 놓여 있다는 사실에 우리가 멈출 수 있을 것이다.

 

라자로의 소생 앞에서 나의 돌무덤이 무엇인가?를 물어야 할 이유다. 내가 가야 할 길을 가고,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고, 내가 행복해야 할 삶을 살지 못하게 가로막는 돌무덤은 무엇인가? 하는 성찰이다. 

 

아버지, 제 말씀을 들어 주셨으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41) 아버지께서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 주신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씀드린 것은, 여기 둘러선 군중이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42)

 

이를 라칭거 추기경은 하느님과 예수님의 대화적 상황(말씀의 현존)이 우리와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과의 대화적 상황의 문을 활짝 열어 놓았다라고 전한다. 돌무덤이 열렸다는 표현은, 부활은 하느님(예수님)과 우리 사이에 대변자가 필요 없음을 말한다. 창조주 아버지와 말씀으로 직접 소통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성인의 통공은 왜 필요한가? 라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우리가 신의 대화 상대가 된다는 것은 모든 창조물과의 의사소통이 가능함을 의미한다. 다른 말로  사랑은 언제나 십자가의 크로스라는 것이다. 종적인 하느님과의 사랑은 쉽지 않지만 쉽다. 어려운 것은 횡적인 동료인간과의 사랑이다. 부모 자식간의 사랑은 쉽지 않지만 쉽다. 어려운 것은 형제간의 사랑이다. 그런데 하늘이 우리에게 하라고 하는 사랑은 십자가의 크로스의 사랑이다. 여기서 하느님과의 직접 소통뿐 아니라 동료인간과의 완전한 소통인 성인의 통공이 필요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칼 러너는 인간이 그분의 창조물이라는 자체가 그냥 은혜로써만 부활이 아니라 은혜를 포괄하는 우리가 그분의 대화상대가 된다는 창조의 근원이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의 복원, 우리가 그분과의 완전한 소통을 확인하는 길은 우리가 동료인간과의 완전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을 때, 그 문이 열려있음을 스스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고백적 신앙에서 인격적 신앙으로 가는 필수적인 길이라고 본 것이다. 그것이 각자의 십자가를 지는 일이다. 애주애인을ㄹ 선후맥락이 아니라 동시적인 것이라고 바라본 것이다. 성인의 통공이 누군가를 통해서 하늘에 닿는다는 것뿐 아니라 창조이래 모든 앞선 세대, 동시에 이후의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들과도 우리는 통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하느님과의 완전한 의사소통이라는 것을 "라자로야, 나오너라"에서 보여주고, 이어 무덤의 돌을 치우고 그를 플어주어 그를 걸어가게 하라는 것에서, 부활은 애주애인의 모든 장애물이 치워진 상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이 땅에서의 영원한 생명의 표징, 부활의 현재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라자로의 소생은 <듣는다-소통한다>는 말씀의 완벽한 교환, 신과 사람의 대화적 상황의 예표라고 할 수  있다. 라자로가 부활의 예표라는 것은 육체의 소생이 육신의 부활을 가능케 하는 말씀의 능력,완벽한 말씀의 정취로 인해 모든 돌무덤을 열 수 있다는 부활의 현재성에서 찾아야 할 이유다. 라자로는 언젠가 육체적으로 죽는다. 그러나 그는 말씀이 어떻게 하늘과 땅을 연결할 수 있는가를 우리에게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말씀의 눙력, 권능------자력으로 소생했다가 아니고 소생시켰다는, 자력으로 부활했다가 아니라 부활시켰다는 피동의 소생과 부활의 은총을 바라볼 수 있다. 하느님은 예수님을 부활시켰다가 아니고 예수님은 부활하셨다라는 능동의 상태와 다른 이유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26)

 

그렇다면 , 믿는다는 것은 행위인가? 통찰인가? 성서에 나오는 다른 소생사화를 보면,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고 말씀하셨다. 탈리타 쿰!” 이는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는 뜻이다. 그러자 소녀가 곧바로 일어서서 걸어 다녔다.(마르코 5, 39-42)

 

울지들 마라,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다. “아이야 일어나라그러자 아이의 영이 되돌아와서 아이가 즉시 일어섰다(루카 8, 52-55)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 가셨다.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울지 마라하고 관에 손을 대시고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그러나 죽은 이가 일어나 안아서 말을 하기 시작했다(루카 7, 11-16)

 

소생은 분명 통찰의 영역인 존재론이다. 그렇다면 십자가는 왜 필요한가? 믿음의 통시성, 고백적 차원이 아니라 인격의 차원에 이르기 위해선 인간의 구체적 사랑체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체험이지 관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말씀은 언어적 현실이 아니라 삶의 차원이기 때문이다. 사랑을 알기 위해선 전인격이 동원되어야 하고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서 보여준 그분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라자로의 소생은 돌을 치워준 그 누군가, 라자로를 풀어주어 가게한 그 누군가와의 합작이다. 그분 혼자 할 수 없어서 우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늘과 땅이 함께한 애주애인의 사랑이 바로 부활의 예표이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님의 눈물에서 그를 거듭 확인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35절)

 

이 눈물은 단적으로 예루살렘의 성전파괴를 예고하며 흘린 신으로서의 눈물이자, 인간 예수의 눈물이라고 할 수 있다.  베타니아는 예수님에게 특별한 공간이었다.  라자로, 마르타, 마리아는(마리아는 주님께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분의 발을 닦아 드린 여자) 예수님의 쉼이자, 위로이자, 사랑의 원형공간에 해당한다. 베타니아 가족은 예수님의 죽음을 이미 알고 있는 이들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와 그 여동생과 라자로를 사랑하셨다, 라고 복음사가가 전하듯, 이들은 인류에 대한 (신의) 공감의 구체성을 보여준다. 

 

육체라는 한계에 갇혀있는 인간이 울 때, 함께 울 수 있는 예수님, 하느님과의 완전한 소통뿐 아니라 사람과도 완전한 공감을 하시는 예수님, 그분이 흘리신 눈물이 주는 위로, 인류와 사랑에 빠진 신의 격려, 희망없이 희망하며’, ‘절망을 모르는 현실’인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나는 영원히 너희와 함께 한다!'를 어떤 순간에도 기억하라는 신의 지문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 바치는 깊은 공감의 기도와 행위는 그가 스스로 열지 못하는 돌을 치워주고, 그를 풀어주어 그가 가야할 길을 가게하는, 라자로의 소생같은 기적을 하늘과 땅에 돌려드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글을 마무리하며,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고 전하는 요한 11,1-45을 다시 읽어본다.

 

그때에 1 어떤 이가 병을 앓고 있었는데, 그는 마리아와 그 언니 마르타가 사는 베타니아 마을의 라자로였다. 2 마리아는 주님께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분의 발을 닦아 드린 여자인데, 그의 오빠 라자로가 병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3 그리하여 그 자매가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병을 앓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4 예수님께서 그 말을 듣고 이르셨다. 그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 병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5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와 그 여동생과 라자로를 사랑하셨다. 6 그러나 라자로가 병을 앓고 있다는 말을 들으시고도,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르셨다. 7 예수님께서는 그런 뒤에야 제자들에게, 다시 유다로 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8 제자들이 예수님께, “스승님, 바로 얼마 전에 유다인들이 스승님께 돌을 던지려고 하였는데, 다시 그리로 가시렵니까?” 하자, 9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낮은 열두 시간이나 되지 않느냐? 사람이 낮에 걸어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어디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 10 그러나 밤에 걸어 다니면 그 사람 안에 빛이 없으므로 걸려 넘어진다.” 11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이어서, 우리의 친구 라자로가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12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님, 그가 잠들었다면 곧 일어나겠지요.” 하였다. 13 예수님께서는 라자로가 죽었다고 하셨는데, 제자들은 그냥 잠을 잔다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14 그제야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분명히 이르셨다. 라자로는 죽었다. 15 내가 거기에 없었으므로 너희가 믿게 될 터이니, 나는 너희 때문에 기쁘다. 이제 라자로에게 가자.” 16 그러자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가 동료 제자들에게,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 하고 말하였다. 17 예수님께서 가서 보시니, 라자로가 무덤에 묻힌 지 벌써 나흘이나 지나 있었다. 18 베타니아는 예루살렘에서 열다섯 스타디온쯤 되는 가까운 곳이어서, 19 많은 유다인이 마르타와 마리아를 그 오빠 일 때문에 위로하러 와 있었다. 20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고, 마리아는 그냥 집에 앉아 있었다. 21 마르타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22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23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니, 24 마르타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26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27 마르타가 대답하였다. “,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28 이렇게 말하고 나서 마르타는 돌아가 자기 동생 마리아를 불러, “스승님께서 오셨는데 너를 부르신다.” 하고 가만히 말하였다. 29 마리아는 이 말을 듣고 얼른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30 예수님께서는 마을로 들어가지 않으시고, 마르타가 당신을 맞으러 나왔던 곳에 그냥 계셨다. 31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으면서 그를 위로하던 유다인들은, 마리아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그를 따라갔다. 무덤에 가서 울려는 줄 알았던 것이다. 32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계신 곳으로 가서 그분을 뵙고 그 발 앞에 엎드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33 마리아도 울고 또 그와 함께 온 유다인들도 우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지셨다. 34 예수님께서 그를 어디에 묻었느냐?” 하고 물으시니, 그들이 주님, 와서 보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35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36 그러자 유다인들이 보시오, 저분이 라자로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하고 말하였다. 37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몇은,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신 저분이 이 사람을 죽지 않게 해 주실 수는 없었는가?” 하였다. 38 예수님께서는 다시 속이 북받치시어 무덤으로 가셨다. 무덤은 동굴인데 그 입구에 돌이 놓여 있었다. 39 예수님께서 돌을 치워라.” 하시니, 죽은 사람의 누이 마르타가 주님,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납니다.” 하였다. 40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41 그러자 사람들이 돌을 치웠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제 말씀을 들어 주셨으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42 아버지께서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 주신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씀드린 것은, 여기 둘러선 군중이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43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큰 소리로 외치셨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44 그러자 죽었던 이가 손과 발은 천으로 감기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싸인 채 나왔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그를 풀어 주어 걸어가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45 마리아에게 갔다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본 유다인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