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수(春愁)와 춘수(春瘦)사이에서, 산수유꽃이 피었습니다!
-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는 사람이 바로 그다.” 를 중심으로
1. 춘수(春愁)와 춘수(春瘦) 사이에서
산수유꽃이 피었다.
봄이다. 봄에는 누구나 춘수를 겪는다. 춘수를 겪는 줄도 모르고 겪거나, 아님 춘수를 알기에 더 절절히 겪기도 한다. 이름을 알고도 앓는 병은 약도 없다. 춘수(春愁-좌정하지 못하고 서성이거나 뛰쳐나가게 만드는 가출의 충동)를 겪거나 춘수(春瘦-칩거, 은둔하거나 시름시름 몸이 마르는 병)를 겪는다. 그래서 봄은 누군가에게 설레는 계절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에겐 치명적인 계절이기도 하다. 삼라만상이 움튼다는 말이 자연에만 해당되는 말이 아닌 듯하다.
곽재구의 「봄 편지」를 읽어본다,
강에 물 가득 / 흐르니 보기 좋으오 // 꽃이 피고 / 비단바람 불어오고 / 하얀 날개를 지닌 새들이 날아온다오 / 아시오? / 바람의 밥이 / 꽃향기라는 것을 / 밥을 든든히 먹은 바람이 / 새들을/ 힘차게 허공중에 띄운다는 것을/ 새들의 싱싱한 노래 속에 / 꽃 향기가 / 서 말은 들어 있다는 것을 / 당신에게 새들의 노래를 보내오 / 꿂지 마오 / 우린 곧 만날 것이오
곽재구의 「봄 편지」에서 멈춘 부분은 ‘굶지 마오’ 라는 시행이었다. 바람의 밥이 꽃향기라, 밥을 잔뜩 먹은 바람이 새들을 공중에 날게 한다는 발상에 이어 그러니 새 노래를 그대에게 보내니, ‘부디 잘 사시오’가 아니라 ‘굶지 마오'라니, 울컥했다. 누군가의 춘수(春瘦)를 짐작하고, 마치 곁에 있는 사람에게 말을 건네듯, <아시오?>라고 묻는 춘수(春愁)가 ‘우린 곧 만날 것이오’라는 기약 없는 약속을 하게 한다. 그 ‘곧’이 우리 생에 언제일지 알 수 없으나, 이 봄에 그렇게라도 말해야 화사난만(花詞爛漫)과 척지지 않을 것이다.
오규원의 「순례의 서」를 다시 읽어본다.
종일 바람에 귀를 갈고 있는 풀잎. / 길은 늘 두려운 이마를 열고/우리들을 멈춘 자리에/다시 멈추게 한다.//막막하고 어지럽지만 그러나/고개를 넘으면 전신이 우는 들./그 들이 기르는 한 사내의/편애와 죽음을 지나/먼 길의 귀속으로 한 사람씩/낯 들어가는/영원히 집이 없을 사람들.//먼 길의 귀속으로 한 사람씩/낯 들어가는 영원히 집이 없을 사람들.//바람이 분다, 살아 봐야겠다.//바람이 분다, 살아 봐야겠다.//무엇인가 저기 저 길을 몰고 오는/바람은/저기 저 길을 몰고 오는 바람 속에서/홀로 나부끼는 옷자락은/나를 오래 어두운 그림자로 길가에 세워 두는 것은/그리고 무엇인가 단 한마디의 말로/나를 영원히 여기에서 떨게 하는 것은//멈추면서 그리고 나아가면서/ 나는 저 무엇인가를 사랑하면서
오규원의 「순례의 서」는 춘수(春愁)와 춘수(春瘦)를 겪을 대로 겪는 것이 순례라는 것을 아는 화자의 자가진단이 나온다. ‘우리들을 멈춘 자리에/다시 멈추게 한다’고 우리가 어디에서 멈출지 알고 있는 화자는. 오히려 바람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바람이 부는 쪽으로 온 몸을 돌린다. 바람이 분다, 살아 봐야겠다.//바람이 분다, 살아 봐야겠다.라고 순례의 모든 순간을 끌어안는다. ‘멈추면서 그리고 나아가면서/ 나는 저 무엇인가를 사랑하면서’라고 순례의 처방전까지 내린다.
우리는 춘수(春愁)와 춘수(春瘦) 사이에서 또 이 봄을 살아낸다. 사실, 춘수는 살아있기 때문에 겪는 병이다. 나 아직 살아 있어요, 라는 존재증명의 병이 춘수(春愁) 혹은 춘수(春瘦)라고 할 수 있다.
2. 시선의 권력, 유토피아에서 디스토피아로 디스토피아에서 유토피아로
벤담의 파놉티콘
봄은 <보다>라는 동사에 <ㅁ>이라는 접미사가 합쳐져서 명사가 된 파생어다. <본다>는 것은 순례의 여정에서 <무엇을> 보았는지에 의해 생이 달라진다. 그러기에 <본다guardarla>는 것은 유토피아에서 디스토피아로, 디스토피아서 유토피아로 나눠지는 결절점이라고 할 수 있다.
[‘봄-보임’의 파놉티콘에서 시놉티콘 너머 무엇이 있을까?]에서 재인용
현대사회의 모든 권력과 욕망은 <본다>는 시선에서 만들어진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이 시대의 사랑, 이 시대의 순교, 시선의 윤리학]
http://blog.daum.net/m-deresa/12390052
에서 타자의 상투적이고 세속적인 시선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이 시대의 피를 흘리지 않는 순교라고 바라본 바 있다.
평생을 미셸 푸코의 저서를 번역하고 연구한 박정자 교수는 『시선은 권력이다』에서 파놉티콘에서 전자시놉티콘을 거치면서 <시선>이 감시체계를 작동하는 권력의 메커니즘이라고 말한다.
‘일망감시장치’는 ’봄-보임‘의 결합을 분리시키는 장치이다. 즉 주위를 둘러싼 원형의 건물 안에서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한채, 완전히 보이기만 하고 중앙부의 탑 속에서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지만, 결코 보이지는 않는다.(벤담, 『일망 감시시설』)
‘일망감시장치’는 권력을 자동적인 것이며, 또한 비개성적인 것으로 만들기 때문에 중요한 장치이다. 권력의 근원은 인격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체, 표면, 빛, 시선 등의 신중한 구분 속에, 그리고 내적인 매커니즘을 만들어내는 관계 속에, 개개인들이 포착되는 그러한 장치 속에 존재한다.(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
가시성은 권력을 생산한다. 보이지 않는 정체불명의 타인에게 바라보여진다는 두려움은 인간의 원초적 공포이다. 시선의 비대칭성에서 권력이 생산된다. 시선은 권력을 생산한다. 더 엄밀히 말하면 시선의 비대칭성에서 권력이 발생된다. 나는 바라볼 수 없는데 누군가 나를 은밀하게 바라보고 있다면 그는 나의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따라서 나는 그에게 예속될 수밖에 없다.(박정자, 『시선은 권력이다』)
빛은 권력이다. 1970년대에 뉴욕시 전체가 정전되었을 때 폭력과 약탈이 횡행하는 무정부 상태가 된 적이 있었다. 정전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기적처럼 권력 전체가 해체된 것이다. 빛이 없어지면 권력도 없어진다는 것, 빛이 곧 권력이라는 것을 이보다 더 잘 보여준 사례는 아마 없었을 것이다. 빛은 사물 혹은 사람을 가시적으로 만들어준다. 어둠 속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빛 속에서는 모든 것이 환하게 보인다. 남의 시선에 노출되어 있는 사람은 종속의 상태가 되고 가시성을 확보한 사람은 그를 지배하는 권력을 갖게 된다.
시선의 비대칭성을 가장 잘 구현한 판옵티콘이 이를 증명한다.시선의 비대칭성의 원리를 가장 잘 구현한 것이 18세기 영국의 계몽주의 철학자 제레미 벤담이 감옥 건물로 구상한 판옵티콘(Panopticon)이다. 판옵티콘은 라틴어로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다는 뜻인데, 건물 명칭에 걸맞게 중앙의 망루에서 간수 한 사람이 반지 모양의 원형 건물 전체를 일목요연하게 감시할 수 있다.
감시의 효과를 지속적으로 만들어주는 이 항구적 가시성은 보고-보이는 한 쌍의 지각 행위를 해체하여 시선의 비대칭, 불균형, 차이 등을 극대화함으로써 가능해 진다. 일단 이런 장치를 만들어 놓으면 마치 자동 기계와도 같이 누구나 그 자리에 들어가 간단히 작동시킬 수 있을 것이다. 정보기관의 수장이 누가 되든 감시 기능은 자동적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진중권 교수는 시선의 감옥이 『유토피아에서 디스토피아』로 전이되는 현상에 주목한다.
파놉티콘의 원리는 감시와 경제성을 연결해야 하는 거의 모든 시설에 성공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 (…) 이 계획에 따라 지어진 공장은 진정한 산업 건물로서 한 사람이 수많은 작업을 감독하는 편리함을 주고, 개폐가 가능한 다양한 공동주택에는 이 원리를 유연하게 적용할 수 있다. 한편 파놉티콘식 병원은 청결함이나 환기, 의약품 관리에서 어떤 소홀함도 허락하지 않는다. (…) 마지막으로 이 원리는 다행스럽게도 학교나 병영, 즉 한 사람이 다수를 감독하는 일을 맡는 경우에는 모두 적용할 수 있다.
한마디로 감옥에서 “까다로운 주의사항 몇 개만 없애면” 이 구조를 “다른 시설에 연속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정도면 사회 전체를 파놉티콘으로 디자인하자는 제안이나 다름없다. 주목해야 할 것은 벤담이 예로 제시한 병원, 병영, 학교, 공장이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서 주요한 분석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점. 푸코는 아마도 벤담의 이 책에서 근대적 이성 비판의 아이디어를 얻었을 것이다. 학교, 병원, 병영, 공장 등 근대의 “거의 모든 시설”이 파놉티콘을 모형으로 한 것이라면, 결국 근대사회의 이상은 곧 감옥이었다는 얘기가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시놉티콘은 어떤 작동원리를 가지는가?
현대의 판옵티콘 - 전자 감시체제. 그러나 벤담의 판옵티콘은 현대의 전자 감시 체제에 비하면 차라리 목가적인 풍경이다. 판옵티콘에서 사람의 시선이던 것이 현대 감시체제에서는 CCTV의 카메라 렌즈, 하드 디스크의 기억장치, ID 카드의 기록장치 또는 인사과에 비치된 개인의 고과 명세로 대체된다.
회사의 ID 카드에 현금 카드 기능이 있으며, 그것이 사원들을 감시하는 족쇄의 역할을 한다.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할 때는 물론 신문 판매대에서 책이나 잡지를 살 때, 그리고 피트니스 센터에서 운동을 할 때도 이 카드를 사용하므로, 회사에서는 어떤 사원이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어떤 신문을 보는지, 어떤 종류의 운동을 하는지 훤히 꿰뚫고 있다.
뿐만 아니라 상사들은 마음만 먹으면 어느 사원이 자기 자리에 있는지, 화장실에 갔는지, 아니면 다른 사무실에 가 시시덕거리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회사 내에서 항상 몸에 부착하고 다니는 ID 카드가 중앙의 컨트롤 타워에 연결되어 있어 사원의 동선이 그대로 중앙에서 인식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듯, 현대 전자 감시 체제의 기원을 제레미 벤담의 판옵티콘에서 찾을 수 있으며, 시선의 비대칭성에서 발생하는 권력의 메카니즘을 사르트르의 대타(對他) 이론과 헤겔의 인정투쟁 이론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 밝혀낼 수 있다.
이를 푸코는 ‘파놉티콘은 권력을 자동적인 것이며, 또한 비개성적인 것으로 만들기 때문에 중요한 장치이다. 권력의 근원은 인격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체, 표면, 빛, 시선 등의 신중한 구분 속에, 그리고 내적인 매커니즘을 만들어내는 관계 속에, 개개인들이 포착되는 그러한 장치 속에 존재한다.(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 즉, 권력은 도처에 있을 뿐 아니라 일방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쌍방적이라고 본 것이다.
3.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이 가서 씻고 앞을 보게 되어 돌아왔다.>
요한 9,1-41을 읽어본다.
그때에 1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2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3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 4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우리는 낮 동안에 해야 한다. 이제 밤이 올 터인데 그때에는 아무도 일하지 못한다. 5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 6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땅에 침을 뱉고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 사람의 눈에 바르신 다음, 7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 하고 그에게 이르셨다. ‘실로암’은 ‘파견된 이’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그가 가서 씻고 앞을 보게 되어 돌아왔다. (...)24 그리하여 바리사이들은 눈이 멀었던 그 사람을 다시 불러,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시오. 우리는 그자가 죄인임을 알고 있소.” 하고 말하였다. 25 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 저는 모릅니다. 그러나 이 한 가지, 제가 눈이 멀었는데 이제는 보게 되었다는 것은 압니다.” 26 “그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소? 그가 어떻게 해서 당신의 눈을 뜨게 하였소?” 하고 그들이 물으니, 27 그가 대답하였다. “제가 이미 여러분에게 말씀드렸는데 여러분은 들으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어째서 다시 들으려고 하십니까? 여러분도 그분의 제자가 되고 싶다는 말씀입니까?” 28 그러자 그들은 그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말하였다. “당신은 그자의 제자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요. 29 우리는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아오. 그러나 그자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우리가 알지 못하오.” 30 그 사람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그분이 제 눈을 뜨게 해 주셨는데 여러분은 그분이 어디에서 오셨는지 모르신다니, 그것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31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의 말을 들어 주지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누가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면, 그 사람의 말은 들어 주십니다. 32 태어날 때부터 눈이 먼 사람의 눈을 누가 뜨게 해 주었다는 말을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33 그분이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으셨으면 아무것도 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34 그러자 그들은 “당신은 완전히 죄 중에 태어났으면서 우리를 가르치려고 드는 것이오?” 하며, 그를 밖으로 내쫓아 버렸다. 35 그가 밖으로 내쫓겼다는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그를 만나시자, “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 하고 물으셨다. 36 그 사람이 “선생님, 그분이 누구이십니까? 제가 그분을 믿을 수 있도록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대답하자, 37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는 사람이 바로 그다.” 38 그는 “주님, 저는 믿습니다.” 하며 예수님께 경배하였다. 39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40 예수님과 함께 있던 몇몇 바리사이가 이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 “우리도 눈먼 자라는 말은 아니겠지요?” 하고 말하였다. 4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
보아야 할 것을 본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보고싶은 사람을 본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하물며 형상이 없는 하느님을 본다는 것은 얼마나, 얼마나 행복한 일일까?
<하느님은 우리가 완전히 행복하기를 바라신다.>는 것이 우리 믿음의 대전제다. 성서에서 ~하라는 당위명제로 주어지는 모든 권고사항들이 우리들의 진정한 행복과 관계가 없다면 무엇 때문에 주어졌겠는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것도 그것이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행복과 불행의 결절점이 무엇을 <본다>는 것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에서, 행복은 상황논리가 아니라 존재조건의 수용이라고 할 수 있다. 상황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펼쳐져야지만 행복하다면 행복은 상대적 박탈감이라고 어휘를 바꾸어야 할 것이고 그런 가변적인 행복을 하늘이 우리에게 주셨을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사순4주일 복음,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이 가서 씻고 앞을 보게 되어 돌아왔다.>라고 전하는 요한 9,1-41을 통하여 <본다>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행복 혹은 기쁨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생각해 보려 한다.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이 가서 씻고 앞을 보게 되어 돌아왔다.>라는 것은 얼마나 큰 기쁨이고 행복인가? 그런데, 태경 소경의 상태을 보고 죄의 근원을 묻는 제자들에게 3절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에서 단적으로 그리스도인의 기쁨의 실체가 드러난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하신 놀라운 일들을 알아보지 못하고는 그리스도인의 기쁨 혹은 행복의 근원을 바라볼 수는 없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하느님의 영광을 운운하는 바라사이들이 태생소경은 물론 예수님조차도 죄인으로 몰아간다는 점에서 인류의 집단무의식 안에 <죄>가 유전자처럼 남아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기쁨과 죄는 같이 있을 수 없다. 빛과 어둠은 공존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인간의 약함을 초점화시키면 죄를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분이 하신 놀라운 일을 바라본다면 그곳에는 사랑만 보인다. 그러기에 죄의 반대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분이 사랑하는 자녀들의 행복을 원하신다는 것은 그분의 창조원리의 제1법칙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행복하지 못하다면 그분의 존재를 무화시키는 것이라고 비약해 바라볼 수도 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일을 말하고 바리사이는 하느님의 영광을 거론한다. 여기서, 하느님 나라의 가장 큰 장애는 바로 하느님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경이로운 일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졌는지 화석화된 율법주의로 하느님을 보고 있는지에 의해 그의 오늘이 달라진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을 복음에서는 심판이라고 말한다. 하느님이 사람을 심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에게 무엇을 볼 것인가를 결정해준다는 점에서 그 결정이 그가 자신이 맞이할 오늘(구속인가 기쁨인가, 지옥인가 천국인가, 행복인가 불행인가)을 규정한다는 점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는 역설적인 선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하느님 영광을 운운하는 바리사이는 왜 그렇게 죄에 집착했을까?를 묻게 된다. 바리사이의 분리의 원칙은 인간을 우열관계, 위치로 나누기를 좋아한다는 점에서 우선 찾아야 할 것이다. 하느님의 보편적 사랑을 그들은 받아들일 수 없어 예수님조차 죄인이라고 규정해야만 그들의 기득권, 위치를 고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 사랑에는 위치가 없다. 평등하다. 보편이다. 5절, 7절, 39절을 통해 이를 바라보면,
Ⓐ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우리는 낮 동안에 해야 한다. 이제 밤이 올 터인데 그때에는 아무도 일하지 못한다.(4절)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5절)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 하고 그에게 이르셨다. ‘실로암’은 ‘파견된 이’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그가 가서 씻고 앞을 보게 되어 돌아왔다(7절)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39절)
Ⓐ의 파견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기쁨의 실체라고 할 수 있다. 그 실체에 다가가는 것이 Ⓑ에서, “땅에 침을 뱉고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 사람의 눈에 바르신 다음, 실로암 못으로가서 씻어라,"에서 진흙조자도 실로암 못조차도 치유의 기적의 매체임을 알 수 있다. 삼라만상이 모두 그분의 말에 순종하여 하느님의 일을 완성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이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듣고자 했을 때, 체험하는 기쁨의 실체일 것이다. 또한 그분의 말씀을 들은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지난 시간의 상처와 아픔들을 모두 씻어낼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분이 하시는 놀라운 일을 경험할 수 있을 때, 하느님이 그분을 통해 우리에게 하신 놀라운 일을 경험할 수 있다. 믿음은 그냥 아무런 체험조차 없이 추종자가 되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영적으로는 태경소경이다. 한번은 내가 소경임을 고백해야 한다. 그때 나라는 소경을 통해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 라는 것에서 파견의 의미를 알 수 있다. 파견이란 의미의 실로암은 하느님이 하신 일을 세상에 드러내는 일이라는 것에서 우리에게 건네는 큰 위로와 격려라고 할 수 있다.
그 일은 삶에서 희생과 고통을 무조건 감내하라는 것이 아니고, 더우기 지하철 역에서 가두선교라도 하라는 것이 아닐 것이다. 예수를 믿으시오!라고 외치는 것이 아니라 근원적 기쁨을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살아내는 것이 그분이 우리에게 하신 놀라운 일을 드러내는 것, 파견의 삶이라 할 수 있다.
세상이 우리에게 물어야 한다. 너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기쁜 것인가? 너는 그토록 가난한데 왜 몸도 마음도 허물어지지 않는가? 너는 의지할 사람도 없는데 왜 그토록 화사한가? 너는 세상에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는 데 왜 그리 당당한가? 넌 왜 새벽4시에 지하철을 타면서도 왜 그렇게 뽀송한가? 뇌졸증으로 병원에 18년간 누웠있으면서 책 한권에 의지해 하느님의 빽이 있다고 웃는 이유가 무엇인가... 등등...우리에게 하신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세상에 드러내는 일이 파견일 것이다. 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기쁜 것이 아니라 그분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어서,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를 수 있어서, 그분이 하신 사랑을 조금은 따라 할 수 있어서, 성령의 인도로 이 순례를 할 수 있어서....등등...하느님의 창조물이라는 그 자체가 기쁨 중에 기쁨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어진 역할은 오직 행복하게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행복이 소명이다.
그때 Ⓒ에서 말하는 심판의 의미가 보다 분명해 진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자신이 자신이 자신에게 준 벌, 어둠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기쁨과 행복의 상실을 의미한다.
태경소경과 바리사이파를 대조시켜 오히려 눈 먼 사람이었으면 죄가 없었을 것이라는 것에서 육안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육안으로는 마음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마음을 볼 수 없을 때, 형상을 갖고 있지 않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죄란 하느님이 하신 놀라운 일들을 볼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지각으로 이 세계를 바라보는 한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우리 각자에게 하신 그 놀라운 사랑을 볼 수 없는 것이 바로 죄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파견은 기쁨이고 행복이고 평화라고 할 수 있다. 이사야서, 사무엘상권, 시편, 에페소에선 그 기쁨을 즐거움, 영안, 충만, 빛이라고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체험을 전한다.
Ⓓ즐거워하라, 예루살렘아. 그를 사랑하는 아들아, 모두 모여라, 슬퍼하던 아들아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이사야66, 10-11)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사무엘기상권 16, 1-13)
Ⓕ원수들 보는 앞에서 제게 상을 차려 주시고 머리에 향유를 발라주시니, 제 술잔 넘치도록 가득하옵니다(시편, 23, 1-6)
Ⓖ은밀히 저지르는 일들은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일입니다. 밖으로 드러나는 것은 모두 빛으로 밝혀집니다. 밝혀진 모든 것은 빛입니다.(에페소 5, 8-14)
이사야서는 바빌론 유배이후의 기쁨에 대해 <예루살렘아 즐거워하라>고 외친다. 사무엘은 외모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보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다윗을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부음을 한다. 다윗은 모든 허물을 용서받은 후, 그 기쁨을 <제 술잔 넘치도록 가득하다>고 노래한다. 바오로 사도는 어둠 속에서 한일은 모두 부끄러운 일이기에 모든 행위가 빛으로 드러나야 함을 말한다. 빛은 그리스도인의 행복이기에 빛의 삶을 살기 위해 <무엇이 주님의 맘에 드는지> 가려내라고 권한다. 주님의 맘에 든다는 것은 하느님의 의지에 우리의 의지를 결합시키는 일이고 그때, 우리는 기쁨 행복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다고 전한다.
그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나의 행복을 바라시는 하느님의 의지를 알고 있다. 이제 나는 그분이 원하시는 행복을 나의 역할로 받아들이겠다(M102)
그러기에 주님의 뜻이 그대로 제게 이루어주소서!를 기도할 수 있는 것은그분만을 위한 기도가 아니다. 태경 소경으로 태어나 성전에서 쫒겨 났고, 눈을 떠서 다시 쫒겨 난 눈뜬 사람과 예수님의 대화를 통해서 행복의 비결은 너무나 단순하게 제시된다.
"넌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 선생님 제 눈을 뜨게 해주신 그분이 누구십니까? 제가 그분을 믿을 수 있도록 말씀해주십시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는 사람이 바로 그다. 주님 저는 믿습니다"(35-38)
그분을 믿는 것이 바로 기쁨이고 행복이다. 간단하고 명쾌하다. 그러기에 왜 우리는 삼위일체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사람들인데 완벽하게 행복하지 않은가? 혹은 기쁘지 않은가를 자신에게 질문해야 한다. 예수님 시대에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 역시 율법의 근본정신이 애주애인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들을 비판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바리사이파나 율법학자는 사라진 역사의 유물이 아니다. 변종에 변종을 거듭하며 하느님의 영광, 혹은 애주애인을 운운하는 어느 시대에나 여전히 살고 있는 종교적 메두사에 해당한다. 내가 바리사이파나 율법학자의 변종인지 아닌지를 성찰하는 것은 간단하다.
삼위일체 하느님으로 인해 내가 진정 행복한가? 아닌가를 성찰해 보면 된다. 내 삶의 중심에 그분이 계신가?를 물으면 된다. 부모가 자식에게 원하는 것은 간단하다. 너도 행복하고 네 형제와도 행복하게 지내라, 그러니 자신이 왜 그분의 의지로 인해, 그분의 뜻으로 인해 행복하지 않은지를 묻기 위해 우리가 삶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성찰할 필요가 있다. 우리 모두는 행복을 원한다. 출발점은 그곳이다. 행복은 근육의 미소가 아니다. 행복은 내면의 환함이다.
행복은 사랑의 속성이다. 행복은 사랑과 분리될 수 없다. 또한 행복은 사랑이 없는 곳에서는 경험될 수 없다. 사랑은 한계가 없고 어디에나 있다. 그러므로 기쁨 또한 어디에나 있다. 기쁨은 평화의 속성이다. 그러나 마음은 사랑의 기쁨 대신 고통을 바라보게 된다. 십자가에서 사랑 대신 고통에 초점을 맞추는 것과 같다. 고통은 죄가 끼어들 수 있는 틈을 만든다. 이것은 사랑은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순환오류를 범하게 한다. 한계가 없고 반대쌍이 없는 곳에 행복을 제한하는 유한성을 끌어들인다. 변화무쌍하고 유한한 것이 두려움의 실체다. 그렇게 되면 사랑은 두려움이 된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자신의 마음이 만든 모든 환상을 실재라고 인식하게 된다. 이 생각은 하느님을 정의의 하느님으로 제한하므로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을 낳는다. 그때 하느님은 아버지가 아니다. 인정사정 모르는 상선벌악의 신이 된다. 하느님이 두려움이라는 잘못된 믿음이 율법주의를 낳는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며 또한 행복이시다. 따라서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행복과 기쁨을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M103)
그런 맥락에서 인간의 집단무의식에 가까운 바리사이가 보지 못했던 것, 하느님의 영광을 운운하는 그들이 진정 몰랐던 것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결코 알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행복하게 사는 것만을 원하신다. 따라서 행복이 우리의 유일한 역할이고 파견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그분으로 인해 행복할 때 무엇을 지켜야하는지, 애주애인에 관계된 것을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지킬 것은 지키고, 할 것은 하고, 갈것은 가고 멈출 것은 멈추게 된다. 그렇기에 애주애인이 인생의 모든 것에 대한 정답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주에, 내가 누구이며, 누구일 것이고, 누구이고 싶은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 역설했다. 이번주는 하느님을 알아야 한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그런데 하느님을 아는 것과 나를 아는 것은 선후관계가 아니다. 동시적인 통찰이다. 하느님만큼 커지지 않으면 하느님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또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나를 안다는 것이고 너를 안다는 것이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조차 죄인으로 규정했다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왜곡, 자신에 대한 왜곡의 결과만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총체적인 모름, 무지의 병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개인적으로 이런 기도를 자주 드린다. 주님 제가 진정 누구인지 알게 해주십시오. 사회적인 어떤 기능을 수행하는 자가 아닌, 왜 이 우주에 한 생명으로 왔는지 알게 해주십시오. 때로는 하느님, 당신이 누구인지 알게해주십시오. 어째서 제가 당신을 아버지라 부르는지 알고 싶습니다. 문자의 하느님이 아니라 진정 아버지이신 하느님이신 당신을 알게 해주십시오. 그런데 그 답은 언제나 같았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너는 나의 자녀이다. 그러므로 너는 사랑이다. 그 사랑은 영원하다.라는 답이었다. 어떻게 기도해도 답은 같았다.
태경소경으로 태어난 이가 실로암 못가에서 예수님에 의해 눈을 떴을 때, 느낀 그 행복을 나의 눈뜸으로 체험하는 것, 제가 꼭 보아야 하는 그 무엇을 아직 보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도 눈을 뜨게 해달라고 예수님께 그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청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영적으로 태경소경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글을 마무리하며 파견된 자의 기쁨이 무엇인지 다시 읽어본다.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 4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우리는 낮 동안에 해야 한다. 이제 밤이 올 터인데 그때에는 아무도 일하지 못한다. 5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선생님 제 눈을 뜨게 해주신 그분이 누구십니까? 제가 그분을 믿을 수 있도록 말씀해주십시오.“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는 사람이 바로 그다. 주님 저는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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