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콜, <광야에서 천사들의 시중을 받는 예수>
치명적 유혹자인 팜므파탈인 에와의 화법과 아담의 화법이 카이사르의 화법을 거쳐 유체이탈의 화법으로, 그 많던 사탄을 모두 어디다 숨겼을까?
1. ‘일 년 중에서 가장 추운 시절이 된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그대로 푸름을 간직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이근배)
이근배 시인의 「세한도(歲寒圖) - 벼루읽기」를 읽어본다.
1
바람이 세다/산방산(山房山) 너머로 바다가/몸을 틀며 기어오르고 있다/볕살이 잦아지는 들녘에/유채 물감으로 번지는/해묵은 슬픔/어둠보다 깊은 고요를 깔고/노인은 북천을 향해 눈을 감는다/가시울타리의 세월이/저만치서 쓰러진다/바다가 불을 켠다.
2
노인이 눈을 뜬다/낙뢰(落雷)처럼 타 버린 빈 몸/한 자루의 붓이 되어/송백의 푸른 뜻을 세운다/이 갈필(渴筆)의 울음을/큰선비의 높은 꾸짖음을/산인들 어찌 가릴 수 있으랴/신의 손길이 와 닿은 듯/나무들이 일어서고/대정(大靜) 앞바다의 물살로도/다 받아낼 수 없는/귀를 밝히는 소리가/빛으로 끓어넘친다/노인의 눈빛이/새잎으로 돋는다.
이근배 시인의 「세한도(歲寒圖) - 벼루읽기」는 추사 김정희의 그림 「세한도」를 모티프로 삼아 귀양지 제주도에서 만년에 느꼈을 인간 김정희의 슬픔과 절망, 그리고 그 분노속에서 빛을 보았던 김정희의 정신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세한도」는 추사 김정희가 1840년,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유배지인 제주도에서 그린 그림으로 모든 제자들이 시류에 흘러 떠났음에도 홀로 스승곁에 남아 있던 제자 이상적에게 준 그림이다.
“논어(論語)”의 ‘자한(子罕)’ 편(공자)에는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栢之後彫)”라는 구절이 나온다. ‘일 년 중에서 가장 추운 시절이 된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그대로 푸름을 간직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는 의미로 김정희와 제자 이상적의 결기를 허허벌판에 서 있는 소나무 두 그루로 표현한 것이 「세한도」다.
이를 이근배 시인은 김정희의 시간 안으로 걸어들어가 1연에서는 김정희가 유배지에서 느꼈을 절망과 분노의 감정을 ‘바람이 분다’, ‘북천을 향해 눈을 감는다’라고 하여 바람과 바다를 통해 그 분노와 절망을 초점화했다면,
2연에서는 ‘이 갈필(渴筆)의 울음을’에서 송백의 정신으로 승화시킨다. ‘빛으로 끓어넘친다/노인의 눈빛이/새잎으로 돋는다.’에서 추사가 자신의 분노를 넘어서는 그 찰라를 형상화한 것이다. 분노는 누구나 표출할 수 있다. 그러나 분노를 넘어서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자연물을 통해 그 분노를 넘어섰기에 오늘 우리는 추사체에서 소나무의 부드러운 결기를 읽어낼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는 두 연을 병치시켜, 1연의 '바다가 눈을 뜬다'는 2연에서 ‘노인이 눈을 뜬다’로 이어지면서 추사가 자신을 넘어서는 부분으로 전통적인 물아일체의 경지를 뛰어넘는다. 바다와 눈이 하나가 되는 그 찰라가 김정희가 ‘송백의 푸른 뜻을 세우는’, 즉 「세한도」를 그려냄으로써 추사 김정희라는 시간을 추락에서 비상으로 만난극복의 정신으로 사표화한다.
이 근배 시인의 「세한도(歲寒圖) - 벼루읽기」는 상호텍스트성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작품에 해당한다.
김정희-이상적-바다, 바람, 소나무 두 그루-이근배시인-독자로 이어지는 상호관입을 통해
나 한사람(김정희라는 한 선비)이 쓰러지는 것이 결코 나 하나의 문제가 아니고, 나 한 사람이 일어나 걸어가는 것이 우연히 나 한사람만의 운명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세한도(歲寒圖) - 벼루읽기」는 서늘하고도 뜨거운 ‘시혼’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2. 열하일기를 쓴 박지원은 어떻게 하룻밤 사이에 아홉 번이나 강을 건널 수 있었나?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를 읽어본다.
강물이 두 산 사이에서 흘러나와 바위와 마주쳐 싸우는 듯 거세게 흐른다. 놀란 파도, 성난 물결, 우는 여울, 흐느끼는 돌창(온통 돌이 깔린 곳)이 굽이를 치고 뒤번지면서(마구 이리저리 뒤치면서) 울부짖는 듯 고래고래 소리를 치는 듯 만리장성을 부서뜨릴 기세다. 전차 만 대, 군마 만 마리, 대포 만 틀(수량을 나타내는 말 뒤에 쓰임. 가마, 상여 따위와 기계를 세는 단위), 쇠북 만 개쯤으로는 그 야단스러운 소리를 형용할 수 없다.
모래밭에는 큰 바윗돌이 우뚝이 떨어져 섰고, 강 둔치 버드나무 숲은 까마득하게도 어두컴컴하여 물귀신과 강 도깨비가 다투어 사람을 놀리는 듯하다. 이곳이 옛 전쟁터여서 강물이 이렇게 운다고 하나 그런 까닭도 아니다. 물소리란 듣기에 달린 것이다.
연암 산골 집 앞에 큰 개울이 있다. 해마다 여름철에 소낙비가 한바탕 지나가면 개울물이 갑자기 불어나 늘 수레 소리, 말 달리는 소리, 대포 소리, 전쟁의 북소리를 듣게 되니, 아주 귀에 탈이 날 지경이었다.
나는 언젠가 문을 닫고 누워 물소리를 다른 소리에 견주어 들어 보았다.
깊숙한 소나무가 퉁소 소리를 내는 듯하니 이는 청아한(속된 티가 없이 맑고 아름다운) 마음으로 들은 것이다. 산이 찢어지고 절벽이 무너지는 듯한 것은 분노하는 마음으로 들은 것이요, 뭇 개구리가 다투어 운다 싶은 것은 발칙스러운 마음으로 들은 것이다. 수없는 축(중국의 현악기)이 마주 어울려 내는 듯한 소리는 성난 마음으로 들은 것이다. 벼락이 치고 천둥이 우는 듯한 것은 놀란 마음으로 들은 것이요, 찻물이 보글보글 끓는 듯한 소리는 운치(고상하고 우아한 멋.) 있는 마음으로 들은 것이다. 거문고가 높고 낮은 가락으로 어우러져 나는 듯한 소리는 슬퍼하며 들은 것이요, 창호지 우는 듯한 소리는 의심스럽게 들은 탓이다. 무엇이나 제 소리대로 듣지 못하고, 더구나 가슴속에 무슨 딴 생각을 먹고 있으면 그것이 귀에서 소리가 되는 것이다.
오늘 나는 한밤중에 한줄기 강물을 아홉 번이나 건넜다. 강물은 북쪽 변방에서 흘러나와 만리장성을 뚫고 유하와 조하와 황화, 진천 등 여러 강물과 한군데 모여 밀운성 아래를 거쳐 백하가 된다. 나는 어제 배로 백하를 건넜는데, 바로 이 강의 하류다.
내가 요동에 처음 들어섰을 때는 한여름이었다. 뙤약볕 아래 길을 가다가 갑자기 큰 강이 앞을 가로막는데, 붉은 흙탕물이 산처럼 솟구쳐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런 때는 대체로 천 리 밖 상류에 폭우가 내린 까닭이다. 강물을 건널 때 사람들이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우러러보는 것을 보고 나는 하늘에 비는가 보다 생각했다. 훨씬 뒤에야 알았지만, 물을 건너는 사람이 늠실늠실(물결 따위가 부드럽게 자꾸 움직이는 모양) 소용돌이쳐 돌아가는 강물을 보면 제 몸이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고 눈은 강물을 따라 내려가는 것만 같아서, 갑자기 빙빙 도는 듯 어지럼증이 생기면서 물에 빠진다고 한다. 그러니 고개를 젖히고 우러러보는 것은 하늘에 대고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물을 보지 않으려 함이다. 역시 그렇다. 목숨이 경각(눈 깜빡할 사이. 또는 아주 짧은 시간.)에 달렸는데 어느 겨를에 기도할 수 있으랴.
이토록 위험하다 보니 물소리도 미처 듣지 못하는 것이다. 다들 말하기를 요동벌은 넓고 펀펀하기(물건의 표면이 높낮이가 없이 매우 평평하고 너르기) 때문에 물소리가 요란하지 않다고 한다. 허나 이는 물소리를 모르는 말이다. 요동 땅 강물들이 물소리를 안 내는 것이 아니라 밤에 건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낮에는 눈으로 물을 볼 수 있으니 눈이 위험한 데에만 쏠려, 눈 달린 것을 걱정해야 할 판이다. 그러니 귀에 무엇이고 들릴 리가 있겠는가?
오늘 나는 밤중에 물을 건너는지라 눈으로는 위험을 볼 수 없다. 그러니 위험은 듣는 데만 쏠려, 귀가 무서워 부들부들 떨리니 걱정을 놓을 수 없다. 나는 오늘에야 이치를 알았다. 마음이 고요한 사람은 귀와 눈이 탈이 될 턱이 없으나, 귀와 눈만 믿는 사람은 보고 듣는 힘이 밝아져서 더욱 병이 되는 것이다.
오늘 나의 마부가 발을 말발굽에 밟혀서 뒤따라오는 수레에 실려 가고 보니, 나는 하는 수 없이 혼자 고삐를 늦추어 물에 들어갔다. 무릎을 오그려 발을 모으고 안장 위에 앉았다. 한번만 까딱하면 바로 강물로 떨어져, 물로 땅을 삼고, 물로 옷을 삼고, 물로 몸을 삼고, 물로 마음을 삼을터. 이때야 나는 마음속으로 떨어짐을 각오하였다. 그러자 내 귓속에는 드디어 물소리가 없어지고 무릇 아홉 번이나 물을 건너는 데도 마치 안석(등받이가 딸린 방석) 위에서 앉고 눕고 하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았다.
옛날 우임금이 강물을 건널 때 누런 용이 배를 등으로 떠밀어 몹시 위험했다. 그러나 죽고 사는 것이 마음에 먼저 분명하게 서고 보니 용이든 지렁이든 크고 작은 것이 아무 상관없었다.
소리와 빛깔은 내 마음 밖에 있는 외물(外物)이다. 이는 언제나 귀와 눈에 탈이 되어 이렇게도 사람들이 똑바로 보고 듣는 힘을 잃도록 만든다. 더구나 사람이 한세상 살아가는 데 그 험하고 위태함이야 강물보다 더한지라, 보고 듣는 것이 번번이 병이 될 것이 아닌가?
내가 사는 연암골로 돌아가면 앞개울의 물소리를 다시 들으면서 이를 가늠해 보리라. 그리하여 제 몸가짐에 능란하며 스스로 총명한 체하는 자들에게 경계하련다.
3. <예수님께서는 사십 일을 단식하시고 유혹을 받으신다.>
마태오 4,1-11을 읽어본다.
1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시어,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2 그분께서는 사십 일을 밤낮으로 단식하신 뒤라 시장하셨다. 3 Ⓐ그런데 유혹자가 그분께 다가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4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5 Ⓑ그러자 악마는 예수님을 데리고 거룩한 도성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 6 그분께 말하였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 7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이렇게도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8 Ⓒ악마는 다시 그분을 매우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 주며, 9 “당신이 땅에 엎드려 나에게 경배하면 저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하고 말하였다. 10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11 그러자 악마는 그분을 떠나가고, 천사들이 다가와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예수님께서는 사십 일을 단식하시고 유혹을 받으신다.>라고 전하는 마태오 4,1-11(마르 1,12-13 / 루카 4,1-13)의 유혹사화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세 측면에서 생각해보려 한다.
(1) 사순시기는 어떤 은총의 시기인가?
유혹사화는 예수님이 세례자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직후에 있었던 사건이다. 무엇보다 광야에는 예수님과 초월적 힘(성령, 사탄, 천사)만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 그런데, 이 유혹사화가 공생활 직전 공관복음에 모두 실렸다는 것은 예수님의 영적 체험을 예수님 스스로 제자들에게 공표하신 <육성>이라는 것에 초점이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유혹사화는 십자가의 길에서 다른 형태로 반복된다는 점에서 예수님만의 유혹사화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광야체험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우리의 지상의 모든 날들이 바로 이 광야체험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수없이, 어쩌면 매일, 이런 유혹을 받고, 헤쳐내면서 걸어간다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창세기와 예언서들, 바오로 서간문에서 예수님과 아담을 대비해서 죽음과 죄, 낙원추방의 결과를 연결시키면서 우리에게 근본적인 자기정립의 답을 주셨다고 할 수 있다.
흔히 유혹사화를 세 가지 유혹으로 바라본다. 첫 번째, 영육의 유혹(나와 나 자신 안에서의 충만과 결핍의 갈등), 두 번째, 인망의 유혹(나의 이름을 세상에 드날리고 싶어 하는 우월적 존재감), 셋째, 권능과 권세의 유혹( 스스로 신이 되고 싶은) 이 세 가지 유혹은 인간의 존재론과 실존, 모든 상황을 아우르는 총체적인 선택의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유혹자가 그분께 다가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4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치명적 유혹자인 팜므파탈인 에와의 화법과 아담의 화법이 카이사르의 화법으로, 카이사르의 화법이 유체이탈의 화법으로, 그 많던 사탄은 모두 어디다 숨겼을까?’”
Ⓑ그러자 악마는 예수님을 데리고 거룩한 도성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 6 그분께 말하였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 7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이렇게도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악마는 다시 그분을 매우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 주며, 9 “당신이 땅에 엎드려 나에게 경배하면 저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하고 말하였다. 10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와 Ⓑ에서 유혹자는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이라고 유혹의 전제를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존재성에서 찾는다. '하느님의 아들'인데 현실에서 너에게 주어지는 것이 무엇인가? 평생 하느님만 보고 걸어왔는데 그래 얻은 게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에 이르면 “당신이 땅에 엎드려 나에게 경배하면”으로 조건부 전제로 바뀐다. 이 유혹자는 두 번의 유혹에서 아무리 하느님을 네가 방어하고 있어도 얻은 게 없잖아. 넌 늘 배고프잖아, 지금도 배고프잖아, 라고 하느님의 전능의 허망함을 마지막 유혹에서 구체적으로 재점화시킨다. 이 세상의 권세와 하느님의 권능을 대비시키면서 그 타협안을 제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표면적으로는 전혀 다른 세 가지의 유혹사화가 병치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거나 점층적으로 심화시킨 유혹사화로 보이지만 실은 하나의 유혹 패턴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의 대답은 오직 하느님이었다는 것이고, 거듭되는 유혹은 유혹자에게 하느님은 없다는 것이다. 또 두 가지의 유혹은 잘 견뎠는데 하나의 유혹에서 넘어갔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유혹자는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이 단 한번 주어지는 이 세상에서 삶이라는 기회에서, 대체 너에게 무엇을 주는가? 라는 교묘한 질문이 유혹의 내용에 해당한다. 유혹자는 하느님과 분리의 화법으로 한번 살다 가는 인생인데 그렇게 배고프면 억울하지 않아?라고 세 유혹사화에 은밀히 '자기연민'의 정서를 깔아놓고 있다. 타협안이다.
우리의 이 순례의 여정은 40일간의 배고픔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 배고픔의 이름, 결핍에 대한 환기, 결핍의 원리로 유혹자는 은밀하게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를 <없다-무>로 건드리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 유혹사화에서 첫 번째 영육의 유혹이 뒤에 나오는 두 개의 유혹을 분별할 수 있는 바탕이라고 할 수 있다.
사순시기의 40일, 광야 40년, 엘리야가 호렙산을 향해 걸어간 40일처럼 우리의 이 순례의 여정은 배고픈 40일이라 해도 무방하다. 그 시간을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으로 산다>고 영육을 지닌 존재인 우리가 어디에 방점을 찍어야 하는가를 예수님이 먼저 그 답을 주셨다고 할 수 있다. 그 답은 왜 영육을 지닌 존재인 우리의 중심에 <하느님>이라는 답이 그토록 중요한가를 상기시킨다.
마태오 4,1-11(마르 1,12-13 / 루카 4,1-13)은 광야라는 삶의 현장에서 우리와 똑같은 현실을 살아본 그분이 우리에게 준 삶의 영원한 답이라는 것에서, 수많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단 하나의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바라볼 수 있다. 세상에는 80억 인구만큼의 적어도 80억개의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즉 수많은 문제 상황에 문제만큼의 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류에게는 단 하나의 문제, 단 하나의 답이 있다는 것이 유혹사화를 통해 우리에게 전하는 사순절의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유혹사화는 다른 상황처럼 보이는 세 개의 유혹사화로 이루어져 있어서 마치 다른 상황맥락으로 보이지만 실은 하나의 유혹사화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무엇이 행복의 기준인가? 무엇이 풍요의 근원인가 하는 점이다. 예수님은 그 유일한 답이 오직 <하느님>이라고 알려주신 것이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4절)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7절)‘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10절)
유혹이라고 이름붙여도 좋고, 혹은 문제라고 이름붙여도 좋은, 인류가 봉착한 모든 문제의 답은 <하느님>이다. 그곳에 존재의 배고픔을 채울 진정한 충족의 원리가 있다는 것이, 사순시기 첫주에 우리에게 건네는 은총의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태중교우들이 틴식하는 것, 무늬만 열심한 신자가 아니라 진정 하느님을 더 깊이 알았드라면 엉뚱한 곳에서 그 충족의 원리를 발견하려 방황하지 않았을 것을! 하는 탄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오, 주님! 저희가 주님 안에서 쉬기까지 저희 마음에 안식은 없었나이다."
(2)그렇다면 광야라는 삶의 여정에서 단 하나의 영원한 답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
고백의 기도에서 왜 가슴을 치며 '내탓이오, 내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 라고 기도하는지 바라보기 위해서,
그 첫 번째 문이 유혹자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 인류사의 치명적인 유혹자인 팜므파탈은 모두 여성이었나? (페미니즘 관점 아님) 성서가 쓰여졌던 시기, 지금도 지구의 어느 곳에서 여성의 인권은 자신의 인격을 방어할 수 없는 약한 자의 인권을 상징한다. <모든 유혹은 에와로부터> 라는 이 유혹자의 이름은 그 많던 사탄을 숨길 수 있는 트릭스터들의 화법의 진화를 보여준다.
아담과 에와의 화법--> 카이사르의 화법-->유체이탈화법
유혹자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 유혹자가 전달하는 유혹의 내용을 들어야 한다. 들으려고 하지 않아도 우리가 사는 환경이 이미 그 내용으로 꽉 차 있지만 말이다. 그 유혹의 내용은 어떤 비슷한 화법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유혹자가 전하는 1차적인 내용을 알아들어야 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답인 메시지를 알아듣기 전 우리 자신이 어떤 유혹에 끌렸는지 그 이름을 알아들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유혹자가 건넨 팜므파탈의 정체다. 아담과 에와의 화법이 지닌 왜곡 화법이 지닌 휘말림의 전말, 끌어당김의 정체라 할 수 있다.
마태오 4,1-11에서 유혹사화는 다음과 같이 화법을 대응시킨다.
⒜(유혹자)말하였다- (예수님)대답하였다. ⒝(유혹자)말하였다-(예수님)이르셨다 ⒞(유혹자)말하였다- (예수님)말씀하셨다.
에수님은 그 유혹의 내용을 정확히 간파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혹자가 전하는 유혹의 내용을 알아들었어도 그렇게 살지 못하는 이유는 유혹자가 누구인가에 대한 해석에서 카이사르화법(유체이탈화법)을 쓰기 때문일 것이다. 아담과 에와의 화법이 진화된 것이 바로 카이사르화법이다. 아담과 에와는 선악과 사건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유혹을 합리화시킨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전기에서 언제나 주어의 자리에 자신의 이름을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제시한다.
카이사르는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포에니전쟁에서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한 이후)
자신의 행위를 관찰자시점으로 서술하는 것, 언뜻 자신을 객관화시킨 거처럼 보이지만 <나는> 이라는 주어 자리에 제3자를 위치시면서 자신의 욕망을 일반화시키는 책임전가의 화법에 해당한다. 사람이라서 그렇지 뭐, 그렇지 않은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등등...일종의 피장파장의 오류를 만드는 화법이다. 카이사르의 화법은 21세기 정치권에서 널리 쓰이는 유체이탈화법으로 진화된다. 주어자리를 아예 텅 비어놓는 것이다. 영혼이 없는 사람의 말투다. 이런 화법의 공통적인 특징은 유혹의 실체를 네탓, 세상탓 즉 <밖>의 문제로 치환한다는 데 있다.
유혹자(마귀, 사탄)라 불리는 이 유혹자는 누구인가? 유혹자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 마음에서 속삭이는 그 소리의 주인은 대체 누구인가? 주어의 자리를 빈 공란으로 남기는 유체이탈화법은 바로 우리에게 영혼이 없어도 되는 것처럼 유인한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화법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와 반대로 예수님의 화법은 언제나 화자와 청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도록 <나는 너에게 말한다>는 분명한 화법을 쓰셨다는 것이다.
이 에와와 아담의 화법, 카이사르화법, 유체이탈화법은 모든 유혹자를 나의 <밖에> 있는 그 무엇이라고 말하는 화법으로 유혹자를 없애거나 숨기는데 일조한다. 그 많던 사탄이 사라진 이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신이 선택한 행위를 마치 타인에 의해 저지른 것으로 책임전가 시키는 피동형화법이라고 보면 된다. 희생양코스프레가 만연된 이유다. 이는 창조의 근원인 자유의지의 반납자들이 쓰는 화법으로 언제나 죄의 근원은 유혹을 당했다는 데 방점을 찍는다. 나는 순결하고 너는 유혹자라는 낙인은 자신을 죄의 울타리에 가두게 된다.
<나의 욕망이 나를 유혹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유혹에서 벗어나는 지름길이기에, 우리는 고백의 기도에서 가슴을 치며 '내탓이오, 내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 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김수환 추기경님 생전에 천주교신자만이라도 <내탓이오!>를 하자고 제안하기도 한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3) 그렇다면 유혹자는 어디에 있는가??
이 단락은 다음 글의 연장선에서 쓴 것이다.
['테사라코스테'(40일, Τεσσαρακοστή), '영원'을 여는 암호]
유혹자는 나의 마음의 표층 지각이라고 할 수 있다. 신명기와 요엘서에서는 마음의 선택이 지옥과 천국으로, 죽음과 불행 혹은 생명과 행복으로 갈리는 그 지점이 바로 나의 마음임을 거듭 강조한다. 수많은 상황과 상황 속에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는 우리에게, 요엘 예언자는 <옷이 아니라 마음을 찢어라> 라고 전한다.
Ⓓ신명기 30, 15-20 “내가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 놓는다”
Ⓔ요엘서 2, 12-13에서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그렇다면, 유혹자는 우리 마음, 전체인가, 부분인가? 유혹자는 우리 마음 어디에 있는가?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4절)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7절)‘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10절)
4절, 7절, 10절은 예수님이기 때문에 가능한 대처였나? 요엘 예언서가 전하는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라는것에서 우리는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마음을 찢는다>는 것은 마음의 심층으로 들어가라는 것으로, 위에서 언급한 대로 유혹자의 말을 듣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우리 마음을 이해하는 수순이다. 우리 마음의 흐름을 바라보는 수순이다.
우리 마음은 수많은 층으로 이루어진 겹층이라고 보면 될 거 같다. 표층은 <지각의 층>이라고 한다면 그 심층은 <지식의 층>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지식은 세속의 지식을 의미하지 않는다. 지식의 층위는 하느님 계시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빛의 영역이다.) 지각의 층은 행위를 유발하는 층이다. 지식의 층위는 이미 선물로 주어진 통찰의 층위라고 할 수 있다. 지각의 층위는 다시 <올바른 지각>과 <올바르지 않은 지각>으로 분열된다. 마음의 표층은 세상의 소리에도 끌리고 마음의 심층에도 끌리기 때문에 지식의 층위에 완전히 도달하지 않는다면 자주 불안과 두려움에 시달린다. 누구에게나 지각의 치유가 필요한 이유이다. 영성가들은 <세상이 치유되려면 너만 치유되면 된다>고 전하는 바로 그 부분이다.
유혹자는 바로 지각의 층에서 세상의 쾌락과 권세로 유인하는 우리 마음의 이름, 현상적자아(에고)라고 할 수 있다. 지식의 층인 본질적자아와 마음이 분열되어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불안, 공포, 여러가지 이름의 두려움, 고통으로 경험한다.
여기서 우리의 자유의지는 그 어떤 것을 선택하여 나 자신에게 줄 수 있다. 자유의지는 하느님이 대신해 주지 않는다. 그것이 창조의 딜레마다. 우리는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해 살기위해서 어둠을 무릎 쓴 지각을 먼저 경험하기 때문이다.
현상적자아인 에고는 우리 욕망을 우리 마음의 표층에 전달한다. 그 유혹자의 소리를 올바른 지각이 단지 현상이라고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는 4절, 7절, 10절을 갈등없이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선택이 늘 자명하지 못하거나 어떤 흔들림을 겪거나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세상을 경험하는 것이 바로 이 지각의 층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마음의 표층인 지각의 층에서 늘 좋은 것을 선택함에도 어떤 파장을 경험한다. 그 파장은 현상을 인식하기 때문에 흔들림이고, 그 흔들림을 분별해서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려는 흔들림이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끌어당김의 강력한 에너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의 중심에 하느님만이 그 답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는데 종종 불안 혹은 두려움을 느끼는 이유가 바로 지각의 층에서 지식의 층으로 전이되는 과정에서 겪는 지각의 파동을 느끼기 때문이다. 현상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겪는 에너지의 파동이라고 할 수 있다.
지각의 층에서 평화는 없다. 평화를 느끼는 층은 마음의 심층인 지식의 층이다. 세상의 권세와 하느님 권능으로 갈리는 부분은 지각과 지식이 갈리는 층이라고 할 수 있다. 지각의 층에서 지식의 층으로 우리 마음이 이동하는데 얼마나 힘든지, 성인성녀들, 그리고 수많은 영성가들은 중력의 힘만큼, 로켓이 지상을 탈출하는 그 만큼의 힘이 든다고 고백한다. 마음만 바꾸면 된다는 말이 그렇게 어려운 결단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힘으로 어떻게?라고 바라볼 수 있다. 그렇다. 우리의 힘만으로 지각의 차원을 떠나기는 어렵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의 긴 고별사에서 내가 가서 나보다 더 큰 협조자(성령)를 너희에게 보내겠다. 내가 가는 것이 너희에게는 더 이롭다는 위로를 제자들에게 하셨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던 제자들, 그 길을 갈 수 없었던 제자들의 상황은 바로 우리 힘만으로 우리가 그분을 따르려 할때 경험하는 두려움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우리를 결핍의 수렁으로 끌고가는 유혹자가 어디 있는지 아는 것도, 그것을 분별하고 삶의 진정한 충만의 답인 하느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둘 수 있는 것도 모두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가능하다. 빛으로만 빛을 볼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부활의 일성이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그 평화의 층이 바로 지식의 층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성령의 은사로 받는 지식의 은사는 우리에게 평화의 조건을 다음과 같이 알려준다. –피조물을 향한 하느님의 뜻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 혹은 하느님만이 우리의 행복에 대한 갈망을 체워주는 분임을 깨닫는 것, 그것을 마태오 4,1-11, 11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러자 악마는 그분을 떠나가고, 천사들이 다가와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11절의 <떠나가고- 다가와>라는 표현, 천사가 예수님의 시중을 드는 부분은 바로 마음의 표층인 현실적자아가 아닌 마음의 심층인 본질적자아로 바라보게 된 상황, 즉 영원을, 영혼을, 총체적인 영안으로 바라보게된 은총의 시간, 지식의 은사, 심안으로 바라보게 된 평화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지금 어떤 상태인가를 가늠하는 자로미터는 바로 '내적평화'를 살고 있는가의 여부라고 할 수 있다.
글을 마무리하며, 예수님의 육성을 다시 들어본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4절)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7절)‘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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