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포이에시스(Poiesis창조, 생성, 신생), 나는 ‘완전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나뭇잎숨결 2023. 2. 17. 18:00

 

 

 

 

포이에시스(Poiesis창조, 생성, 신생), 나는 ‘완전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 Poiesis (creation, creation, newborn), who can say that I am a ‘Teleios’ person?

 

 

 

 

1. 신동집, 「오렌지」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오렌지는 여기 있는 이대로의 오렌지다./더도 덜도 아닌 오렌지다./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마음만 낸다면 나도/오렌지의 포들한 껍질을 벗길 수 있다./마땅히 그런 오렌지만이 문제가 된다.//마음만 낸다면 나도/오렌지의 찹잘한 속살을 깔 수 있다./마땅히 그런 오렌지만이 문제가 된다.//그러나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손을 대는 순간/오렌지는 이미 오렌지가 아니고 만다./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나는 지금 위험한 상태다./오렌지도 마찬가지 위험한 상태다./시간이 똘똘/배암의 또아리를 틀고 있다.//그러나 다음 순간,/오렌지의 포들한 껍질에/한없이 어진 그림자가 비치고 있다./누구인지 잘은 아직 몰라도.

 

 

신동집의 「오렌지」는 김춘수의 「꽃」과 함께 존재의 본질 인식이라는 사유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일상적 사물로서의 오렌지와 본질적 의미로서의 오렌지를 대립적으로 제시하여, 존재의 본질에 가 닿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표현하는 한편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에서 대상과 주체가 나눠질 수 없음에 주목하고 있다.

 

나는 지금 위험한 상태다./오렌지도 마찬가지 위험한 상태다에서 존재의 본질을 파악할 수 없는 것이 왜 위험인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안다>는 인식이 행위를 낳는다는 점에서 그 위험의 경고표지판을 인과의 측면에서 읽을 수 있겠다.

 

이 시에서 화자는 마음만 먹으면 오렌지의 포들한 껍질을 벗길 수도 있고, 찹잘한 속살을 깔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오렌지에 손을 대는 순간 오렌지는 이미 오렌지가 아니고 만다라고 손이라는 감각기관으로는 오렌지를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오렌지는 이 세상의 사물을 대표하는 하나의 대상이며, 그 오렌지의 포들한 껍질을 누구나 벗길 수 있는 사물의 맥락으로 일상적, 표면적으로 오렌지를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는 있다. 그러나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에서 존재의 진정한 의미, 즉 본질을 파악하였다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각과 지식은 결코 같은 층에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누구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한없이 어진 그림자가 비치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존재의 본질을 인식할 수 있을 것 같은 한 가닥 가능성을 내비치고 있다.

 

 

 

 

 

 

 

 

 

 

2. 너의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법칙 수립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행위하라!(칸트)

 

 

존재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고민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존재의 본질을 고민하는 것은 행위의 방향, 삶의 궁극적 지점과 닿아 있다. 그것은 누구나 인간은 진정한 행복에 도달하고픈 갈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고 자신에게 가장 최고의 합당한 행복을 주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흔히 칸트하면 정언명령으로 철저하게 자유를 윤리에 귀속시킨 것으로 절대론적 윤리주의자로 바라보기도 하지만, 그 평가만큼 칸트에 대해 갖고 있는 오해도 없을 것이다.

 

 

 

칸트 철학의 출발점이 <자유>라는 것, 우리가 무엇을 한다는 것은 타율개념이 아니라 자율개념이라는 것이 칸트철학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칸트는 선의지에 기반한 인간의 행위를 '신성하다'고 할 정도로 자유의지의 자율성을 주목한 철학자다. 그는 인간이 어떤 경지에까지 이를 수 있는가를 바라본 철학자이다. 

 

보편을 하나의 법칙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칸트는 행위라는 결과보다 행위를 유발한 한 인간의 내면에 주목했음을 알 수 있다. 

 

칸트는 『도덕형이상학원론』(1785)에서 정언명령 다섯 가지를 제시한다.

 

이 부분은 [사랑하라, 그리고 그대 하고 싶은 대로 하라!(성 아우구스띠노)]에서 재인용했다.

 

 

 

첫째로, '보편적 법칙의 법식'(Formula of Universal Law) : "준칙이 보편적인 법칙이 되도록 그대가 동시에 의욕할 수 있도록 하는 그러한 준칙에 따라서만 행위하라"

 

 

 

둘째로, '자연법칙의 법식'(Formula of the Law of Nature) : "그대 행위의 준칙이 그대의 의지를 통하여 보편적인 자연법칙이 되어야 하는 듯이 행위하라"

 

 

 

셋째로, '목적 자체의 법식'(Formular of the End in Itself) : "그대는 그대 자신의 인격에 있어서건 타인의 인격에 있어서건 인간성을 단지 수단으로만 사용하지 말고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사용하도록 행위하라"

 

 

 

넷째로, '자율의 법식'(Formula of Autonomy) : "보편적 법칙 수립적 의지로서의 모든 이성적 존재로서의 의지라는 이념"으로 이는 곧 '각각의 이성적 존재자는 자신의 의지가 보편적 법칙을 자율적으로 수립하는 의지인 듯이 행위 하라

 

 

 

다섯째로, '목적의 왕국의 법식'(Formula of the Kingdom of Ends) : "의지가 자신의 준칙을 통해 동시에 자기 자신을 보편적 법칙을 수립하는 존재로 간주할 수 있도록 행위하라"

 

 

 

칸트의 이 다섯 가지의 정언명령은 『실천이성비판』(1788)에서 다시 두 가지로 축약한다.

 

 

 

너의 의식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법칙 수렴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행위하라.

 

 

 

너 자신의 인격에서나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에서 인간성을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고 결코 한낱 수단으로 대하지 않도록, 그렇게 행위하라.

 

 

 

이 두 개의 정언명령은 <~하라>는 당위 명제의 형식으로 제시되지만, 그 내용은 <~을 할 수 있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바로 <선의지>라는 것에서 비롯된다.

 

 

 

칸트에 따르면 인간의 <선의지>는 이타주의나 대의, 혹은 공존을 위한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위한 행위가 아니다. 그것이 옳기 때문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에 하는 것이다. 다수에게 이롭기 때문에 <선의지>가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선의지> 그 자체가 가치 있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자유의지에는 이미 선의지와 결합되어 있다는 것은 자유와 인격의 관계를 동시에 전제하는 것이기도 하다.

 

 

 

칸트는 이를 의지의 법칙에 대한 자유로운 복종의 형식은 모든 경향성에서, 이성에 의해 가해지는 불가피한 ‘강제’와 결합되어 있는 것으로 무릇 그 법칙에 대한 ‘존경’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선의지>는 감성적 욕구 충족이 아니라 이성에 의한 '실천적 강제'라고 본 것이다. <선의지>가 당위적 형식으로 나타나는 것은 당위는 강요된 행위이고, 그런 뜻에서 필연적이다. 또 이 강제는 밖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이성에 의한 <’자기강제‘>이므로, 이는 자연법칙이 아니라, 자유로운 <자기강제>의 규칙이기에 보편적이라 할 수 있다. 이 자기경제를 <자율>이라고 보았으며 인격은 이 자율의 힘에 기반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인간이 자연법칙을 뛰어넘는, 즉 사물의 질서를 넘어서는 것이야말로 그 자체로 ‘신성하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인간은 거룩한 신처럼 충분히 신성하지 못하지만 그러나 그의 인격에서 사물의 질서를 뛰어넘는 <자기강제>의 자율성이야말로 인간에게 ‘신성하다’고 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렇기에 <~하라>는 당위명제 형식의 자유의지에서 비롯된 <선의지>는 자유로부터의 법칙 즉 자율적인 인격만이 선택할 수 있는 법칙이므로, 인간과 모든 이성적 인간은 그 자체로 존엄성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자유의지가 그 자체로 존엄하기에 인간은 수단이 아니라 이성적 존재인 인간은 모두 목적 그 자체가 될 수 있다.

 

 

 

인간의 실천행위를 규정하는 자유로운 선택은, 가장 기초적인 자율적 인격으로부터 비롯된다. 인격을 지닌 인간으로서 인간은 모든 인간은 자율적 실천을 할 수 있는 인간으로서 대할 수 있다. 그것은 자기 행위에 대해 책임질 수 있는 주체가 바로 인격이기 때문이다.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자율적으로 어떤 행위를 준수함으로써 자유의지를 지닌 인격이 된다.

 

 

 

칸트 철학에서 자유의지-선의지-자기강제-자율성-성스러움-존엄성-인격은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에 자유의지를 반납할 정도로 즉 자기강제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자유로우면서 그 자유에서조차 자유로워진 진정한 자유인라고 할 수 있다. 그 자유가 인간의 본질을 규정하는 <포이에시스(Poiesis>이기 때문이다.

 

 

 

 

 

가르멜수녀원 종신서원 십자가

 

 

 

 

 

3.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마태오5,38-48을 읽어본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8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39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40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41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42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43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4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45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46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 도 하지 않느냐? 47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라고 전하는 마태오5,38-48에서 48절을 중심으로 <어떻게 아버지처럼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았다.

 

이것은 마치 <너희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를 뒤집는 질문으로 <너희는 너희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를 당위명제로 제시했다고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안다는 것이 왜 완전한 사람이 되는 길인가?

 

(1)우리가 누구인지 안다는 것은 우리의 풍요로움이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이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40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41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악인에게 맞서지 말라>고 든 예들을 보면, 1차적으로는 <악은 악으로 물리칠 수 없다>는 메시지로 받아들일 수 있다, 어둠은 어둠으로 퍼낼 수 없다는 것이다. 1차적 의미에서 조금 더 나아가면, 실은 네가 누구인지 알고 있느냐를 묻는다고 할 수 있다. <너희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바꾸어서 <너는 너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의 의미까지 담겨있다고 바라보았을 때, 우리에게 요구한 <원수를 사랑하여라>의 구체적 의미에 다가갈 수 있을 거 같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이 그분이 요구하는 사랑을 과연 할 수 있을까?

 

이어지는,“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42절)에서 사람은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줄 수 없다는 점에서 <~을 주고, ~을 물리치지 말라>는 것은, 받는 누군가에게 방점이 찍혀있는 것이 아니라 주는 사람에게 방점이 찍혀 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라는 표지에서 너희는 누군가에게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라!라는 의미로 바라볼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무엇을 줄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이 물질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갖고 있어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줌과 받음의 법칙이다. 이는 "얘야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것이 다 네것이다."(루카15. 31-32)라고 전하는 그  풍요로움의 원칙을 살고있느냐의 여부일 것이다.

 

줄 수 없다는 것은 진실로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너희 사랑의 크기를 보라> 라는 의미와 같다. 주어야 하는 것이 악을 감싸고 원수를 포옹할 수 있으려면 그보다 훨씬 큰 사랑이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그 말은 다른 표현으로 <너희가 얼마나 사랑으로 풍요로운지를 알라>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빛으로 빛을 보듯, 하느님께 사랑받았음을 알때, 사랑하게 된다. 그렇게 우리의 사랑이 풍요로울 때 <악인>, 혹은 <원수>라는 말조차도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2) 풍요로운 사랑에는 울타리가 없다.

 

우리가 받은 사랑이 어떤 사랑인줄 안다면 그 사랑에는 어떤 카테고리도 없다는 것을 바라보게 된다. 여기서부터 <보편적 사랑>이 얼마나 도전에 직면하게 되는지 바라보게 된다. 

 

43절에서 47절에서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45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에서 너희는 너희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의 의미가 관계론을 통해 반복 심화된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라는 명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일단은 우리가 생각하는 나 자신보다 우리의 스케일이 너무 크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자신의 사랑의 크기를 <그렇기 때문에> 멈추게 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는 그 사랑까지 폭을 넓히라고 그분은 요구한다. 특별하고 개별적인 사랑이 아니라 보편적 사랑으로 사랑의 울타리를 없애라는 것이다. 

 

그분이 우리에게 그것을 요구할 때는 우리의 역량이 그만큼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자녀들을 키울 때 그들에게 무조건 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하물며 그분이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면서 그것 봐라, 그것도 못하는구나, 너는 지옥행이라고 하시겠는가. 너는 줄 수 있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행복하다는 이유를 그렇게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마치 이것은 너의 유전자 증명을 하라는 것으로 알아들어도 무방할 것이다. 아니 네 유전자가 무엇인지 알라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하느님이다. 그렇다면 너는 나에게 누구인가? 내가 너의 아버지라면 너도 내 자녀처럼 살아라, 그것이 너의 행복의 마중물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1)과 (2)를 통해 48절에서 말하는 완전한 사람의 의미에 다가갈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48)에서 완전한 사람이 된다는 것을 레위기, 즈카리야서, 코린토1서, 마르코, 루카, 요한 복음을 연결해서 바라보면,

 

,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기.19,1-2.17-18)

 

사람과 짐승들이 많아 예루살렘은 성벽 없이 넓게 자리잡으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예루살렘을 둘러싼 불벽이 되고 그 한가운데에 머무르는 영광이 되어주리라(즈카르야서 2,8-9)-세번째환시 측량줄

 

여러분은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이다(...)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코린토 13,16-23)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코린토19, 22)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것이 다 네것이다.(루카15. 31-32)

 

너희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마르코8, 27-33)

 

나는 너희들 친구라고 불렀다.(요한15, 15)

 

 

Ⓐ~Ⓕ에서 완전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결론적으로 <너는 영혼이 있는 존재처럼 살라>는 명제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창세기1장 27절의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에서 <포이에시스Poiesis생성, 신생, 창조>의 근원을 바라볼 수 있을 때 가능할 것이다.

 

이 글의 주제인 <포이에시스(Poiesis생성, 신생, 창조), 내가 누구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에서 하늘의 아버지처럼 완전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모든 창조물의 창조의 원천을 바라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을 통한 구원을, 성령을 통한 일치를 받아들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즈카르야서 2,8-9에서 세번째환시 측량줄에서 바라보듯, 우리가 머물 집이 너무 커 울타리나 성벽이 필요없다고 전한다. 내가 예루살렘을 둘러싼 불벽이 되고 그 한가운데에 머무르는 영광이 되어주리라 , 바오로 사도는 우리의 정체성과 역량에 대해 여러분은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겠다는 것에서, 그리고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라고 전하는 요한복음에서 우리의 정체성의 완전함을 거듭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누군지 알 때, 우리가 하는 사랑은 인간적인 사랑을 초월한다. 

 

그런 맥락에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사랑의 도전이다. 나만의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게해 달라는 기도는 <보편적 사랑>을 하겠다는 천명이기 때문이다. 

 

(3)그렇다면, 마태오5,38-48에서 칭하는 <악인> 혹은 <원수>는 누구인가?

 

하느님과 나와의 종적인 사랑은 비유컨대, 은수자의 사랑, 베드로사도가 짓고 싶어했던 타볼산의 초막이다. 영적 기쁨의 포향이다. 그런데 거기에  머물려 있을 수 없다. 타볼산에서 내려와야 한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 각자의 십자가를 지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누군지 안다는 것은 우리가 <원수> 혹은 <악인>이라고 부르는 이가 누구인지 아는 것과 맞물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사랑>해야할 대상인 <악인>, <원수>를 아는 것이 완전한 사람이 되는 가장 어려운 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우리가 하느님 자비를 얼마나 공평하게, 보편적으로 믿고(살고) 있는가를 묻고 있기 때문이다. 특별하고 개별적인 사랑에 길들여진 우리에게 보편적 사랑은 자칫 추상에 머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정말 내가 누구인지 아는 <정직한> 질문이라 할 수 있다.

 

<악인>과 <원수>는 실존의 현장에서 만난 그 누구인가? 그러나 성서의 심층으로 들어가보면, 우리와 이해타산이 맞물린 사람들을 넘어서는 의미, 창조의 근원과 닿아 있음을 바라 볼 수 있다. 즉 우리 안의 <악인>과 <원수>가 무엇인가를 바라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저 밖의 악인과 원수가 아니라 내 안의 악인과 원수는 무엇인가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신앙은 취향의 저격이 아니다. 그래서 신앙은 어렵다. 이는 그분의 길을 가지 못하게 붙잡는 모든 것들을 <악인> 혹은 <원수>라 부를 수 있기에, 이를 순화된 용어로 '현상적자아(에고)'는 우리에게 무엇을 속삭이는가를 바라보는 시선의 정직함을 요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글을 마무리 해 본다.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어떤 사람, 구체적인 대상을 떠올려보자. 내 인생의 고비마다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는 어떤 사람이 있다고 하자. 가까운 지인들에게 그런 이를 <악인> 혹은 <원수>라고 칭하였다고 하자. 당연히 함께 모이는 지인들은 외로움을 감당하지 못해 만난 유유상종이니 전후 상황맥락 주고받은 그간의 사정들을 다 보았을 것이니 그 말에 당연히 동조를 할 것이다.

 

여기서 무엇이 문제인가? 그 사람의 진정한 모습을 그 사람의 몸으로 규정하였다는 것이다. 나와 같은 창조주 하느님의 창조물로 그를 바라보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그도 자비를 입은 주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를 악인 혹은 원수로 비난함으로써 그 사람으로 하여금 행위의 표면으로 표출된 결과,  에고에 휘둘리는 몸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게 어떤 프레임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행위라는 결과가 아니라 그 원인인 마음을 바라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가 에고를 벗어나도록 도울 수 있었음에도 말이다. 적극적으로 그를 하나의 <육체>, <죄>에 붙잡아두었다는 것이다. 그를 보는 바로 그 시선이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을 간과한 채, 즉 '보편적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문제인가?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그분을 하느님, 예수님, 성령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삼위일체 교리를 믿는 이들만의 하느님이 아니라는 사실까지도 간과했다는 것이다. 기독교신자들만의 하느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바라보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영화 [밀양]의 한 대사처럼, "내가 그 인간을 용서하지 않았는데, 왜 하느님이 먼저 그 인간을 용서하십니까?"에서 보듯, 자비의 사랑에서 그 누구라도 제외시킬 수 없다는 것을 외면하고 싶어했다는 것이다. 사도 요한의 통찰처럼 '아버지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는 사실을 아전인수로 해석했다는 것이다. 

 

 

창조된 모든 생명체가 그분의 <숨결>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것을 부정하였다는 것. 즉, 그분의 아들을 오로지 몸으로만 이루어진 존재로 규정하였다는 것, 예수님의 십자가를 인류를 위한 사랑이 아닌 것으로 오독하였다는 것. 창조주가 그 자신의 창조물과 전혀 다르다는 프레임을 만들어, 마치 열 명 낳아서 한 다섯이나 하나 간신히 건진, 그런 우리 어머니의 어머니의 시대, 그 모정으로 국한시켰다는 것이다.

 

(위의 두 단락을 읽고 혹자는 그렇다면 지상의 교회는 왜 존재하는가?라고 질문할 것이다. (1)삼위일체 하느님의 보편적 사랑을 전하기 위하여 지상의 교회는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2)무엇보다 자비의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찬미가 그분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지만 우리의 구원에는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

 

모든 생명체를 창조한 것은 우리가 아니다. 나를 창조한 것은 내가 아니다. 

 

그렇기에 오늘 우리가 <악인>, <원수>로 부르고 있는 모든 생명체의 결말 역시 해피엔딩이라는 사실, 그분에 의해서 완전함이 완성된다는 사실, 아니 해피네버엔딩이라는 사실. 누군가를 <원수>나 <악인>, <죄인>으로 규정한다는 것은 그를 넘어서서, 그를 창조한 하느님 창조의 미완성, 그를 위한 예수님 십자가의 자비와 용서의 한계, 그를 위한 성령의 일치를 무화시키는 심판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최후의 심판은 완전한 사람의 몫이 아니다. 구원을 확신한 이들이라면 마리아처럼 끝까지 변호하는 몫만이 주어졌다고 할 수 있다. 

 

하느님 완성의 궁극은 그분의 '자비'에 의해 실현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행위에 의해 우리의 완전함이 실현된다면, 시편 저자의 탄식처럼 '주께서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감당할 자 누구오리이까?'에 그 누구라도 제외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 마음에 온전히 드는 자가 누구입니까? 를 아는 것.

 

사람의 완전함은 하느님 자비에 의해 어떤 이들 안에서 ‘이미’ 완성되었고, 어떤 이들에게는 ‘이미 그러나 아직’이지만 그러나 ‘결국’에 완성될 것이라는, 자비라는 사랑의 완성을 믿는 것이다. 그 누구에게라도 이미 게임이 끝난 것으로 구원의 문을 닫지 말아야 한다는 것. 과거를 잊어주고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도록  ‘오늘’을 그에게 돌려 주는 것, 그것만이 완전한 사람인 우리의 몫일 것이다. 그것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이들의 길, 완전한 사람이 되는 순례의 여정일 것이다.

 

나의 순례가 미처 죄를 뉘우칠 사이도 없이 사랑할 기회가 주어졌다면, 그 누구에겐들 그렇지 않으랴?

 

그런 맥락에서, 모든 사람의 본질은 창조의 <사랑>으로 같다고 할 수 있다.  <완전하다>는 것은 사랑(자비)의 완전함을 믿는 것이자, 창조의 완전성, 십자가의 완성, 성령의 친교를 믿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사랑이 모든 이에게 이미 이루어졌음을 바라보는 '선취의식'으로 우리 삶 전체를 '영원'이라는 초시간안에 위치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영안이 아니라면 볼 수 없는 하느님 나라라고 할 수 있다.

 

글을 마무리하며 48절을 다시 읽어보기로 한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48)

 

 

 

 

 

수유리 가르멜수녀원성모자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