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생(生)의 의지, 드러난 빛과 감추인 빛, 개별자에서 보편자로의 여정

나뭇잎숨결 2023. 3. 3. 08:37

 

분이가 산책로에서

 

생(生)의 의지, 드러난 빛과 감추인 빛, 개별자에서 보편자로의 여정

-The will to live, the light revealed and hidden, the journey from the individual to the universal 

 

 

 

 

1. 문정희의 「동백꽃」 & 김훈의 「꽃 피는 해안선」

 

 

3월이다. 산천이 이제 꽃으로 덮이리라.

 

문정희의 「동백꽃」을 읽어본다.

 

나는 저 가혹한 확신주의자가 두렵다//가장 눈부신 순간에/스스로 목을 꺾는/동백꽃을 보라//지상의 어떤 꽃도/그의 아름다움 속에다/저토록 분명한 순간의 소멸을/함께 꽃 피우지는 않았다//모든 언어를 버리고/오직 붉은 감탄사 하나로/허공에 한 획을 긋는/단호한 참수//나는 차마 발을 내딛지 못하겠다/전존재로 내지르는/피묻은 외마디의 시 앞에서/나는 점자를 더듬듯이/절망처럼/난해한 생의 음표를 더듬고 있다

 

 

김훈의 「꽃 피는 해안선」의 한 부분이다.

 

동백은 한 송이의 개별자로서 제각기 피어나고, 제각기 떨어진다. 동백은 떨어져 죽을 때 주접스런 꼴을 보이지 않는다. 절정에 도달한 그 꽃은, 마치 백제가 무너지듯이, 절정에서 문득 추락해버린다. ‘눈물처럼 후드득떨어져버린다.

 

꽃이 피고지는 자연현상에서 우열을 논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동백꽃은 그 절정에서 가차없이, 가멸차게 지는 것 때문에 특별한 개별자로 자주 소환된다.

 

문정희 시인은 「동백꽃」에서 나는 저 가혹한 확신주의자가 두렵다라고 토로한다. 지상의 어떤 꽃도/그의 아름다움 속에다/저토록 분명한 순간의 소멸을/함께 꽃 피우지는 않았다"라고.

 

김훈은 「꽃 피는 해안선」에서 동백은 떨어져 죽을 때 주접스런 꼴을 보이지 않는다. 절정에 도달한 그 꽃은, 마치 백제가 무너지듯이, 절정에서 문득 추락해버린다. ‘눈물처럼 후드득떨어져버린다.”라고.

 

동백꽃은 진실로 독하게 아름답다. 시인으로 하여금 오직 붉은 감탄사 하나로 허공에 한 획을 긋는 저 가혹한 확신주의자(동백꽃)가 두렵다라고 생의 전부를 소환 할 수 있었다면 동백꽃은 얼마나 유현(幽玄)한 존재인가?

 

그럼에도 동백꽃만 아름답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동백꽃을 진실로 사랑했다면 실은 모든 꽃도 사랑하게 된다. 동백꽃의 아름다움을 보았다면 모든 꽃의 아름다움도 능히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가 전체를 포괄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진정 오롯한 하나에 도달하지 못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분이가 태백산에서

 

 

 

 

2. 아름다운 활동에서아름다운 지식으로아름다운 지식에서 아름다움 것 자체만을 대상으로 하는 저 특별한 지식으로 (플라톤의 『향연』중에서)

 

 

그렇다면, 하나가 전체를 포괄하는 개별자의 사랑에서 어떻게 보편자의 사랑으로 넘어갈 수 있을까? 플라톤의 『향연』을 읽어본다.(재인용)

 

플라톤의 향연을 읽지 않은 사람도 ‘플라토닉 러브’, ‘철인정치’ 라는 말은 들어 봤을 것이다.

 

플라톤은(기원전 427~347) 아테네의 귀족청년으로 정치적 장래가 보장된 젊은이였다.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431~404)에서 아테네가 스파르타에 패하면서 플라톤의 꿈은 한바탕 꿈이 되고 만다. 스파르타가 세운 30인 참주정치에 의해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는 28세의 미모가 수려한 청년 플라톤. 늙고 못생긴 소크라테스는 당대 아테네 젊은 청년들의 추종과 구애의 대상이었다.

 

예수님의 사후, 그 제자들이 복음을 쓰고 서간문을 쓰고 순교를 하듯, 플라톤도 진리 그 자체라 일컬을 수 있는 너무나 아름다운 정신의 소유자 스승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기록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 유명한 대학의 원조인 아카데이아를 만들고 우리가 아테네 학당이라고 부르는 곳에서 그들은 스승 소크라테스의 진리를 영원히 계승하고 싶었을 것이고, 사랑을 영구히 하고 싶었을 것이다. 진리와 지식에 대한 사랑, 철학은 그렇게 태어난다.

 

플라톤의 『향연』(서광사, 2016)은 기원전 384년에 씌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비극작가 시인 아가톤이 레나이아 비극에서 우승한 것은 자축하는 술자리에서 파이드로스(신화적관점), 파우사니아스(소피스트관점), 에뤽시마코스(의학적관점), 아가톤(시인의 관점), 아리스토파네스(희극작가의 관점) 그리고 소크라테스(예언자 디오티마의 대화) 등, 이들 6명이 에로스를 중심으로 한 사랑론을 펼친 산문이다. 그 시대에 사랑은 오직 ‘에로스’라는 어휘로 기술됐던 거 같다.

 

그들 여섯 사람의 사랑론은 모두 후대, 그리고 우리 시대 누군가의 사랑론을 낳게 된다.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예언녀 디오티마와의 대화를 통해 설파한 사랑론은 왜 당시의 아테네 청년들이 열광적으로 소크라테스를 추종했는지 가히 알만한다. 이미 소크라테스는 요한네스 로쯔가 간파한 대로 ‘에로스-필리아-아가페’가 나눠질 수 없음을 직관한 듯하다. 무엇보다 사랑이 어떻게 구체화를 뛰어넘어 사랑 그 자체의 본질로 귀착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소크라테스는 ‘사랑’을 ‘진리’와 동의어로 말한다,

 

먼저, 소크라테스는 젊은 시인 아가톤에게 질문한다.(아가톤은 소크라테스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던 제자였다. 알키비아테스가 술잔치 끝에 나타나 소크라테스에게 울면서 사랑을 호소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가톤은 당시 소크라테스를 추종하던 젊은이에게 질투를 유발시킨 장본인이고,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연구자들에게 게이설을 낳은 장본인이다)

 

Q1. “에로스가 어떤 것을 원하고 사랑한다면, 자신이 원하고 사랑하는 것을 소유하고 있어서인지? 아니면 소유하지 않아서인가?” 소크라테스의 이 질문에서 사랑을 사고하는 방향과 문제설정이 달라진다. 질문으로 사랑을 다르게 사고하는 출발점이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소크라테스는 예언녀 디오티마에게 질문하는 방식을 배웠다고 얘기한다. 에로스가 ‘어떤 것에 대한 사랑’이라면 사랑에 대한 온갖 찬사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은 결핍이 된다고 말한다.

 

Q2. 소크라테스는 다시 아가톤에게 질문한다, “사랑은 아름다운 것인가?” 아가톤은 스승의 두 번째 질문에 놀라 “에로스는 추한 것입니까?”라고 되묻는다. 소크라테스는 디오티마의 말을 빌려 “세상에는 추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중간상태’ 있는 데, 바로 인간의 사랑은 선과 악의 ‘중간상태’에 있고, 빈곤과 풍요의 가능성을 모두 갖고 있다”라고 말한다. 에로스로 지칭되는 사랑의 근원은 그의 어머니가 가난하고 그의 아버지는 풍요롭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Q3. 이번엔 소크라테스가 디오티마에게 질문한다. “그렇다면 에로스는 대체 뭘까요?” 디오티마는 “에로스는 위대한 정령입니다. 모든 정령은 신과 필멸의 중간에 있어요” 라고 말한다. 요한네쯔 로쯔가 에로스에 구원이 필요하다고 한 부분과 맥락을 같이한다.

 

Q4. 소크라테스가 디오티마에게 다시 질문한다. “그렇다면 에로스는 인간들에게 무슨 쓸모가 있을까요?” 디오티마가 대답한다. “에로스는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번엔 디오티마가 소크라테스에게 묻는다.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하는 이가 사랑에게 바라는 게 뭐죠?” 소크라테스는 “아름다운 것들을 소유하는 것이지요.”라고 대답한다.

 

Q5. 벗이여, “아름다운 것들을 그가 소유함으로써 얻는 게 뭐죠?” 디오티마가 묻는다. “그건 대답하기 어렵지만 행복해지겠지요.” 그 질문 끝에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사람은 왜 행복해 지기를 바라지요?” 이런 질문은 할 수가 없겠지요. 소크라테스는 디오티마의 말을 긍정한다.

 

Q6. 벗이여, “모든 사람들이 항상 같은 것을 사랑한다는 것이 사실일까요?” “그 이유는 우리가 특정 종류의 사랑을 떼어내 거기에다 전체에 속하는 것을 갖다 붙이고 다른 사랑을 하는 사람들을 다른 이름들을 사용하기 때문이지요.” 결국 같은 사랑인데 말입니다.

 

Q7. 벗이여, “사랑은 자신의 잃어버린 반쪽을 찾는 것인가요?” “그것이 사랑이라면, 사랑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반쪽도 전체도 찾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스러운 것은 불완전하지만 사랑은 완전합니다.” 여기서 '사랑스러운 것'과 '사랑'이 같지 않음을 말한다.

 

Q8. “그렇다면 사람들은 좋은 것을 사랑한다고 단적으로 말해도 될까요?” 사랑은 좋은 것을 영원히 소유하기를 바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Q9. “그렇다면 어떤 열성과 노력을 다해 사랑스런 것들을 영원히 소유할 수 있을까요?” 벗이여, “모든 인간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잉태중입니다잉태와 출산은 신적인 것입니다필멸의 존재 안에 내포된 불사의 요소입니다정신적으로 임신한 자는 정신적으로 교감할 수 있는 자와 사귀고 싶어합니다그들은 몸으로 낳은 자식보다 더 아름답고 불사적인 지식들을 공유하기 때문입니다.” (벗이여! 정신의 임신, 출산이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Q10.“지혜로운 디오티마여!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먼저 한 사람의 몸을 사랑하여 그 안에 아름다운 담론을 낳아야 합니다이로 인해 아름다운 것을 식별하게 되면 사랑의 신비를 향해 올바로 나아가거나... 한 아름다운 몸에서두 아름다운 몸으로두 아름다운 몸에서모든 아름다운 몸으로모든 아름다운 몸에서아름다운 활동으로아름다운 활동에서아름다운 지식으로아름다운 지식에서 아름다움 것 자체만을 대상으로 하는 저 특별한 지식으로 나아감으로써 드디어 아름다운 것 자체가 무엇인지 알게 되는 것이라오.”

 

소크라테스는 아름다운 것과 아름다움 그 자체, 사랑스러운 것과 사랑 그 자체를 나누다가 Q10 에서 일치시킨다. 아름다운 것이 ‘보고 믿는 신앙’이라면 아름다움 그 자체는 ‘보지 않고도 믿는 신앙’의 상태라고 볼 수 있겠다. 구체적인 것에서 보편으로 어떻게 진리와 사랑이 넘어갈 수 있는지  Q9에서 보여준다. 한사람의 아름다움에서 모든 사람의 아름다움으로...결국엔 사람에서 사랑으로 수렴된다. 아름다운 것이란 구체에서 아름다움이란 관념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사랑스러운 것에서 사랑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3. <예수님의 얼굴은 해처럼 빛났다.>

 

 

사순2주 복음, 마태오 17,1-9을 읽어본다.

 

 

그 무렵 1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2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 3 그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4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5 베드로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었다. 그리고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6 이 소리를 들은 제자들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채 몹시 두려워하였다. 7 예수님께서 다가오시어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8 그들이 눈을 들어 보니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하고 명령하셨다.

 

 

<예수님의 얼굴은 해처럼 빛났다.>라고 전하는 마태오 17,1-9(마르코9, 2-10/루카9, 28-36)은 흔히 모세의 시나이산 신현사화와 종말론적 묵시문학을 결합한 예수님의 신원사화로 바라본다.

 

이 글은 변모사화를 구성하는 여섯 개의 상황이 상반된 <빛의 체험>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보려 한다.

 

상황1(세 제자와 높은 산에 오름)-상황2(예수님의 영광스런 변모와 모세와 엘리아의 출현)-상황3(영적 기쁨)-상황4(하느님을 통한 예수님의 신원확증)-상황5(영적 두려움)-상황6(하산, 수난과 부활예고)

 

그런데, 예수님의 영광스런 변모 사건은 산에 오를 때와 그 산을 내려올 때, 상반된 상황이 전개된 듯 보이지만 이 두 상황은 신앙의 여정에서 누구나 경험하는 <빛의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4절, 5절, 7절, 9절은 다음과 같이 도식할 수 있다.

 

Ⓐ----------->Ⓑ<------------Ⓒ, Ⓓ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4)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5)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7)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9)

 

 

하느님 숨결을 받은 우리의 인생 여정은 Ⓐ~Ⓓ를 거쳐 Ⓑ로 수렴되는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높은 산을 오르는 여정과 그 산을 내려오는 두 여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누구도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사랑의 의지를 알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높은 산에 오르는 여정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개별자의 사랑을 체험하는 시간이라면, 그 산에서 내려오는 여정은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보편자의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세상과 거리를 둔 높은 산에 오르지 않고는 이 세상 안으로 걸어가기 어렵다. 또 이 세상에서 온전히 살기 위해선 자주 한가한 곳에 머물러야 한다. 우리는 그 두 과정을 반복-경험하면서 십자가의 사랑과 부활의 영광에 동참한다고 할 수 있다.

 

높은 산을 오르고 내려오는 상징적 여정이 어떻게 예수님과 동행하는 (아름다운 순례 혹은 기도의 과정) 빛의 체험인지?

 

Q1. 드러난 빛, 예수님의 영광스런 변모의 순간을 왜 12제자 모두와 동행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을까?

 

먼저, 예수님과 높은 산을(세속과 멀어진) 오르는 세 제자의 그림을 그려본다.

 

베드로의 발화에서 세 제자의 마음을 대략 유추해 볼 수 있다. 제자 일행은 당시의 상황 맥락을 정확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베드로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모르면서 다음과 같은 갈망을 피력한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4)

 

먼저, 변모사건을 바라본 베드로의 반응에서 베드로 일행이 느꼈을 영적 기쁨을 바라볼 수 있겠다. 천상의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지상에 초막을 지어 영적 기쁨에 머물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 사실 신앙생활은 어렵다. 기도할 때, 전례에 참례할 때, 묵상할 때, 우리는 세속이 주는 기쁨과 비교할 수 없는 영적 기쁨을 체험한다. 또 그 기쁨 때문에 세속 생활이 어렵게도 생각된다. 일하기 싫은 사람은 먹지도 말라는 바오로 사도의 진언이 때론 잔인하게 들릴 때도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베드로 일행은 산에 오르는 과정 전체가 기쁨이었을 것이다. 특별히 선택받았다는 기쁨이 (높은 산이니) 예수님과 함께 산의 정상까지 오르는 긴 시간동안 세 제자를 붕 뜬 거 같은 상태로 이끌었을 것이다. 스승이 왜 산에 오르자고 했는지 그 속내도 모른 채 철부지 아이처럼 마냥 기뻤을 것이다. 거기다 그들이 산의 정상에 서 본 놀라운 광경, 모세와 엘리야의 발현은 그들의 기쁨에 날개를 달아주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곳에 초막을 짓고 머무르고 싶었을 것이다. 100% 이해가 간다. 

 

우리는 여기서 개별자의 사랑을 바라볼 수 있다. 베드로와 야고버, 그리고 요한은 12제자 가운데에서도 초대교회를 끌어갈 핵심 3인방에 해당한다. 애제자다. 즉 교회의 초석을 상징한다. 그들에게 특별한 개별자의 사랑이 어떻게 보편자의 사랑으로 넘어가야 하는가를 산을 오르고 내려오는 일련의 사건이 보여주고자 하는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기도의 과정, 영적 여정과 비슷하다. 또 구약의 모세와 엘리야는 율법과 예언자의 상징적 인물로 이들 다섯은 1차적으로 하느님 숨결을 받은 개별적자아의 사랑을 의미하는 것으로 읽어볼 수 있겠다.

 

더 나아가 이 변모사화는 하늘과 땅이 어떻게 하나가 되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어떻게 '오늘'이라는 영원이 될 수 있는지, 개별자가 어떻게 보편자라고 불릴 수 있는지, 부할한 후의 모습은 어떠한지를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빅픽쳐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개별자인 우리가 체험하는 이 특별한 사랑은 어떤 의미인가? 라는 질문을 할 수 있겠다. 우리는 이 세상에 홀로 왔지만, 파견될 때 홀로 파견되지는 않는다. 영적 동반자들과 함께 파견된다. 또한 우리는 이 동반자들로 인해 영적인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순례의 여정을 완성 한다. 그런데 개별자로서의 이 기쁨은 영적기쁨의 시작일 뿐 최종목적지가 아니다. 하늘이 준 기쁨이나 사랑은 언제나 확장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영적 기쁨을 가둘 수 없다. 그것이 산을 내려가야 하는 이유이다.

 

Q2. 감추인 빛, 산을 내려가는 것이 왜 보편적 사랑의 의지인가?

 

예수님께서 그들이 결코 이해할 수 없었음에도 그들에게 굳이 함구령까지 내리면서 변모사건을 보여주셔야 하셨던 이유를 생각해 볼 차례다.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9)은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마지막 함구령에 속한다. 그런데 상황적 맥락에서 그들이 예수님의 신원을 정확히 간파했기 때문에 내린 함구령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 입장에서는 당신이 가야할 길에 대한 확신이고, 제자들에게는 훗날 오늘 보고 들은 것들이 이미 성취된 약속이었음을 함구령이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영광스런 변모의 의미를 그 상황을 목격한 세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였음에도 내려진 함구령은 그 상태의 정황이라고 할 수 있다. 본 사람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건을 들은 사람이 이해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의 이해력 혹은 직관력의 부족보다는 전무후무한 신의 죽음을 어떻게 인간의 지각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라는 측면에서 바라보아야 할 거 같다.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즉 성령의 시대가 되기까지는 예수님이 인류에게 보여줄 보편적 사랑의 축복, 그 의미를 인간의 지력으론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 정황적 이해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제자들이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을 다시 한 번 더 생각해 봐야할 이유다. 그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3)라는 부분을 다른 공관복음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루카 복음사가는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루카 9, 11)라고 전한다.

 

마르코복음사가는 그러나 죽음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저희끼리 서로 물어보았다(마르코9, 10)라고 전한다.

 

그렇다면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는 것이 산을 내려가야 하는 이유라고 할 수 있겠다. 5절에서 이를 세 부분으로 들려준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5)

 

5절은 세례사건 때도 들린 내용에 네 어절이 첨가되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만 하느님이 사랑하는 아들이 아니라 모든 창조물과 인류는 하느님의 사랑하는 존재, 아들이다.

 

바오로 사도는 제2독서 티모테오2서 1,8-10에서 은총은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것으로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행실이 아니라 당신의 목적과 은총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하게 살게 하시려고 우리는 부르셨습니다라고 전한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의 행실,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진 사랑이 아니다. 하느님의 창조물이기 때문에 무상으로 주어진 선물이다.

 

내 마음에 드는 아들- 변모사화의 궁극적인 의미는 <내 마음에 드는 아들>로 모아진다고 할 수 있다. 모든 창조물이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일 수는 있겠지만 모든 창조물이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아들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느님 마음에 든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느님의 창조의지와 인간의 생의 의지가 같아지는 지점이 마음에 든다고 할 수 있다.(마리아의 수태고지처럼)

 

내가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삶을 사는가 그렇지 못한가를 알기위한 자가진단 키는 분리의지인 두려움이 나에게 있는가의 여부일 것이다. 그렇기에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7)는 신비체험의 경외심에서 유발된 두려움이라기 보다는 <마음에 든다>는 문맥과 연결하여 <설득당하지 못한 상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제1독서 창세기 12, 1-4에서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주는 땅으로 가거라에서 아브라함이 익숙했던 모든 개별적 인연을 뒤로 하고 보편적 인연의 길을 떠난 노마드의 여정에서 하느님의 의지와 아브라함의 의지가 일치했기 때문에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 축복의 이름으로 기억한다.

 

무엇인가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하느님 없이도 인간은 행복하게 살 개별자의 의지가 있다고 생각할 때 든다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의 의지와 인간의 의지가 다를 때,(4절처럼) 그 곳에 여러 형태의 분리의 상태인 두려움이 생긴다. 성서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이 365번 이상 나온 이유를 다시 한 번 복기해보면 되겠다. 인간은 자신이 무엇인가를 두려워할 때, 하느님의 의지와 상관없이 살고자 할 때, 은밀하게 방어기제를 작동한다. 즉 자신도 감지하지 못하는 은밀하게, 치밀하게, 용의주도하게 세상을 공격하게 된다. 두려워하는 자만 공격할 수 있다.

 

하느님의 의지 외에 그 어떤 의지도 없다는 것이 바로 예수님이 타볼산으로 올라가고 그 산을 내려와 예루살렘에 입성하게 된 궁극적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지의 궁극은 하느님 의지와의 일치라는 것이다. 변모사화에서 보여준 개별자에서 보편자로 넘어가는 사랑의 과정이 바로 산을 오르고 내려오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영적 기쁨이란 탈혼상태, 혹은 영적 황홀경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느님의 의지와 내 의지가 같아지는 지점이 진정한 영적 기쁨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그곳에서 아들아,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루카15, 31)라는 픙요의 의미와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면(...)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8, 31-32)는 자유의 의미를 동시에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듣는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볼 차례다. <본다-듣는다>는 것은 영적 직관의 과정으로 분리될 수 없는 통찰의 표현에 해당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개별적인 사랑을 알기 위해서도 그리고 보편적인 사랑으로 확대하기 위해서도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공생활 3년 동안 예수님이 하신 모든 행적과 말씀은 <하느님은 보편적 사랑이시다>로 모아진다. <무엇을 듣는 것인가><왜 들어야 하는가>와 맞물려 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잃은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오18, 24-26)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서 10, 17)

 

보고 맛보고 만져 보아도 알길 없고, 다만 들음으로써 믿음 든든해지오니 믿나이다 천주성자 말씀하신 모든 것을 주님이 말씀보다 더 참된 진리 없나이다(성토마스의 성체찬미가중에서)

 

특히 영광스런 변모 사건과 관련해 우리가 들어야 할 말씀은 바로 앞 장에 있었던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 와 맞물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른다>는 것은 <들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들음에서 우리는 본성적 사랑의 머무름에서 초성적 사랑(보편적 사랑)으로의 떠남을 할 수 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것은 예수님이 한 그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다른 의미로 우리 각자의 십자가를 졌다, 혹은 십자가 사랑을 하게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바오로 사도는 Ⓕ<믿음은 들음에서 온다>는 것을, 성체 찬미가에서는 Ⓖ<다만 들음으로써 믿음 든든해진다>는 것을 거듭 강조한 이유일 것이다.

 

글의 서두로 돌아가서, 우리의 신앙의 여정은 상반된 <빛의 체험>이라고 전제했다. 세 제자가 목격한 변모된 예수님의 모습에서 해와 같이 빛나는 드러난 빛과 두려워하는 제자를 다독이며 산을 내려오는 예수님의 내면에서 나오는 숨은 빛, <드러난 빛과 숨겨진 빛>, 우리의 신앙 여정은 바로 두 빛을 체험하는 빛의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드러난 빛이 기쁨이라면 숨겨진 빛은 위로와 격려라고 할 수 있다. 

 

글을 정리해 보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을 본성을 바꾸겠다는 의지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회개라고 말해도 좋을 듯하다. 회개는 윤리적인 죄의 차원이 아니라 개별자의 사랑에서 보편자의 사랑으로의 대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전환은 희생이나 고통이 아니라 사랑의 의지이자 생의 의지이다. 기쁨의 체험이다.

 

예컨대 알려지지 않은 음지에서 엄청난 일들을 하는 분들이 많다. 그분들은 봉사, 고통, 희생이라는 말을 싫어한다.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기사화 되는 것 자체를 기피한다. 그분 자녀들도 모르고 그 부모들도 모른다. 그들은 그들에게서 빛나는 그 빛을 감춘다. 그분들을 보고 저분들의 희생이나 고통이 없었다면, 이라고 바라볼 수도 있겠지만, 실은 저분들의 사랑의 의지와 생의 의지, 영적 기쁨이 얼마나 큰 것인가로 바라보아야 하지 않을까?

 

인간의 힘으론 어떤 누구도 능히 그 보편적 사랑의 의지를 알 수도 없고, 알 수 없으므로 할 수도 없다. 성령을 체험하기 전에는 누구도 보편의지인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와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절대 하느님의 보편적 사랑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적어도 그 사랑을 완벽하게 따라 살지는 못하지만 그 사랑이 어떤 사랑인가를 알 수 있는 성령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공관복음에 동시에 실려 있는 예수님의 영광스런 변모사화는, 하늘과 땅, 개별자에서 보편자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시간개념에서 '영원'의 열림, 구약과 신약에서 보여준 율법이 완성되는 빅피쳐라 할 수 있다.

 

우리의 신앙 여정은 높은 산을 올라가고 내려오는 두 상황의 반복으로(기도와 활동/마리아이면서 마르타인)개별자이면서 동시에 보편자의 사랑에 초대받은 빛의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글을 마무리하며, 마태오 17,1-9이 주는 축복의 메시지를 다시 읽어 본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2)“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4)“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5)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7)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