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에네르기아ἐνέργεια, 너보다 ‘더’ 네 것이 무엇이며, 또 너보다 ‘덜’ 네 것이 무엇이냐?(아우구스티누스)

나뭇잎숨결 2023. 2. 11. 16:18
 
 

 

탁기형의  <푸른 봄날을 기다리며> (한겨레)

 

 

 

에네르기아ἐνέργεια, 너보다 ‘더’ 네 것이 무엇이며, 또 너보다 ‘덜’ 네 것이 무엇이냐?(아우구스티누스)

-Quid tam tuun quam tu, quid tam non tuum quam tu

 

 

 

 

1. 거의 모든 아침 당신은 내게 존재하다가 존재하지 않다가(김안)

 

 

김안의 「거의 모든 아침」을 읽어본다.

 

거의 모든 아침 당신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스스로도 알지 못한 채 당신의 눈동자 속에는 침묵이 가득한 채 한 걸음의 높이로 떠다니는 가볍고 둥근 돌들이 당신의 하얀 발 위에 앉아 천천히 모래가 되어갈 때 당신이 바이올린처럼 작게 섬세하고 헛되고 아름다운 노래를 부를 때 거의 모든 아침은 당신이었다가 당신이 아니었다가 음률에서 나온 투명한 불꽃은 나뭇가지를 두드리고 가볍게 나뭇잎 떨어져내리고 거미줄에 걸린 날벌레 하나가 고요히 날아오르고 거의 모든 아침들 속에서 당신이 내게 건네준 몇 개의 언어들이 선명히 줄을 그으며 사라져갈 때 벽 속을 달리던 사내들이 당신의 눈동자를 열어 당신의 시선으로 성냥불을 그을 때 거의 모든 아침은 당신이었다가 당신이 아니었다가 거의 모든 아침 당신은 내게 존재하다가 존재하지 않다가

 

if, 사람이 100세까지 산다면 100⨉365=36,500번의 아침이 주어진다. 3만6천5백번의 아침을 무슨 힘으로 눈을 뜰까?

 

김안의 「거의 모든 아침」에는 ‘당신’이 열한번이나 호명된다. 거의라고 말할 수 있는 대부분의 아침에 화자는 당신으로 인하여 눈뜨고 살고 있다. 당신은 화자에게 일용할 양식 혹은 만나와 비슷하다. 시인에게 당신은 삶을 근거지을 수 있는 절대적인 존재 이유에 가깝다 할 수 있다.

 

「거의 모든 아침」의 당신은 부재하는 당신을 말하는 것인지, 아님 시를 쓰게 만드는 시혼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당신은 화자에게 당신이었다가 때론 당신이 아니었을 때도 같은 존재다. 절대적이다. 거의 모든 아침 화자가 하루를 시작하면서, 당신을 호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온전한 당신이 아니어도, 당신이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설사 당신이 존재하지 않을 지라도 그 존재하지 않음마저도 화자에게는 생을 끌어가게 만드는 어떤 힘이 된다.

 

당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비존재성이 어떻게 존재이유가 될까? 한국의 시문학사의 역설법의 한 획을 그은 한용운의 “님은 갔습니다. 그러나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 하였습니다”라는 부재의 현존에서, 거의 모든 아침 당신은 존재하지 않지만, 거의 모든 아침, 당신은 부재를 초월하는 현존이 된다.

 

어떻게? 무엇으로? <나는 살고 있다>혹은 <나는 살고 싶다>는 마음이 님의 부재를 현존으로 만든다고 할 수 있다.

 

 

 

 

 

 

 

 

 

 

2. “행운 앞에 P를 붙이면 아주 좋은 말(Pluck, 용기)이 된다.”(조셉 머피)

 

 

없는 님도 존재하는 님으로, 있는 님도 존재하지 않는 님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은 우리에게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마음이 지닌 힘이 있기 때문이다.

 

히랍어 [에네르기아ἐνέργεια]를 검색해보면 종교적인 신적 힘, 이루어내는 힘, 창조의 권능이라는 의미보다는 물질적으로 중력을 거슬러 지구궤도를 벗어날 수 있는 로켓의 발사 에너지라는 정보들이 더 많이 뜬다.

 

[에네르기아ἐνέργεια]가 영적이든 물질적이든 공통적으로 어떤 거대한 힘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50년대 이후, 많은 저서에서 그 힘의 저장고가 바로 우리 마음이라고 바라본다.

 

인류는 1. 2차 세계대전을 겪고 1950년대 이후 출판시장에는 <마음>을 다루는 책들이 대량으로 쏟아져 나왔다. 수많은 젊은이들의 생명을 앗아간 모든 전쟁의 뿌리에는 이데올로기를 종교처럼 신봉하는 어떤 <~이즘>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어떤 <~이즘>은 우리의 편향된 시각에서 시작되고, 그 시각의 근원지가 우리 마음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마음이 육체를 살해한 것이 전쟁이라고 본 것이다. 전쟁을 하지 말자!는 구호는 마음을 알자!는 구호로 대체되었고 출판시장에서 마음의 탄생에 초점을 맞춘 저서들이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유라고 할 수 있다.

 

그 중 한사람이 조셉 머피이다. 우리나라에도 머피의 저서 12권 정도가 번역되어 출판되었고, 출판되는 즉시 거의 스테디셀러로 자리잡았다. 예수회출신 조셉 머피(Joseph Murphy, 1898년 ~ 1981년) 박사는 신성 과학의 성직자이자 작가로 불린다. 그는 신(神)이라고 불리는 오직 하나의 힘이 있고 마귀(魔鬼)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마귀는 약한 마음이 만들어낸 현상적 자아일 뿐이라고 보았으며, 그렇기에 세계에는 착한 신을 숭배하는 종교와 두려움이라는 마귀를 숭배하는 종교로 나눌 수 있다고 보았다.

 

전능이라는 용어는 우주 전체의 힘과 에너지를 가리키는데, 이러한 힘과 에너지는 실상 내 안에도 있다. 우주 의지는 우주의 어느 곳에나 존재한다.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개인 안에 흐르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무한한 에너지원이기에 고갈될 일은 절대로 없다.

 

머피는 우주 에너자이저를 지칭하는 또 다른 용어를 ‘전지’라고 불렀다. 우주 에너자이저는 모든 지혜이자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보기에, 이 지혜가 온 세상과 우주의 은하 그리고 나를 창조했다고 말한다. 그 지혜는 신체의 작용 과정과 기능을 속속들이 알고 있으며, 우주 에너자이저는 모든 지혜이므로, 우주 에너자이저만이 태양 아래 모든 문제에 대한 영원한 해답을 알고 있다고 보았다.

 

의지(소망)와 상상력이 대립하면 언제나 상상력이 이긴다.” 다르게 표현하면 잠재의식은 강제하거나 강요할 수 없고 정신적 상상으로만 움직일 수 있다.

 

한 장의 사진이 백 마디 말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 땅 위에 놓인 널빤지를 수월하게 걸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 사람은 널빤지 위를 걷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고 욕망과 상상이 일치하기 때문에 그 일이 가능했다. 하지만 빌딩과 빌딩 사이인 공중에 놓인 똑같은 넓이의 널빤지 위를 걸을 수 있겠냐고 물어보면, 걷고자 하는 욕망은 있지만 떨어지는 정신적 이미지를 그리기 때문에 떨어지는 이미지가 승리하고 일부 사람만 그 위를 걸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베드로가 왜 물위를 걷다가 물에 빠졌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직관이라는 단어는 내면에서 오는 가르침이라는 의미다. 직관의 작용 범위는 이성보다 훨씬 더 넓다. 직관을 얻기 위해 이성을 이용한다고 볼 수 있다. 직관은 현재의식의 생각에 반응하여 잠재의식에서 나오는 답변이다.

 

'직관'은 아주 복잡한 상황에서 추론 능력이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할 때 직관력은 조용히 승리의 노래를 부른다. 현재의식은 추론적이고 분석적이며 탐구적이기 때문이다. 반면 직관의 주관적인 능력은 언제나 자발적이다. 이는 지성에 신호등처럼 다가온다. 계획된 여행이나 행동을 경고하는 형태로 다가오는 경우가 많다.

 

우리 안의 마음은 하나이지만, 각기 다른 특징과 기능을 지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이를 여기서는 현재의식(conscious)’‘(잠재의식subconscious)’이라고 다르게 부른다. 물론 다른 말로 대체해도 관계없다. 마음의 이중성을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

 

머피는 잠재의식은 ‘작용과 반작용’의 보편적인 법칙에 따른다고 보았다. 먼저 일어나는 ‘작용’이 현재의식의 생각이라면, ‘반작용’은 생각의 본질에 맞게 잠재의식으로부터 나오는 라고 본 것이다. 현재의식의 생각은 무한한 지성과 지혜, 생명력, 에너지가 잠재의식에서 외부 세계로 흘러나오는 통로다. 잠재의식 속 지성과 지혜, 생명력과 에너지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흐를 수 있도록 통로의 방향을 정해 주면 무한한 에너지가 나에게 다시 돌아와 선한 열매를 안겨 준다. 이것이 잠재의식이 만들어 내는 기적이다.

 

마음은 씨앗, 다시 말하면 생각과 인상과 믿음을 뿌리는 정원이다. 성경에서는 마음을 포도밭이라고 부른다. 성경은 정신적·영적 법칙을 설명하고 물리적이고 현세적인 상징을 다룬다.

 

좋든 나쁘든 잠재의식에 남기는 모든 인상은 경험으로 나타난다. 인간은 내면을 들여다보고 종일 생각하는 대로 된다는 것을 깨닫기보다는 끊임없이 자신을 둘러싼 조건과 상황, 환경을 비난한다. 건강과 행복, 번영을 결정짓는 건 사건이나 타인의 행동이 아니라 생각하고 느끼는 나의 방식이다. 생각과 느낌은 나의 운명을 만든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하는 생각과 나에 대한 개념은 미래를 결정짓는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으로 문장을 시작할 때 나 자신을 설명하는가 아니면 감정이나 상황을 묘사하는가? “나는 가난하고 나약하고 비참하고 실패한 사람이야라고 말하는가? “나는 아프다라고 말하는 건 몸이 좋지 않다는 걸 말하는 것이다. 대신 나는 튼튼하고 강하고 사랑스럽고 조화롭고 친절하고 부드럽고 평화로운 존재입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나는’으로 시작하는 문장을 어떻게 완성하느냐에 따라 성공하고 건강하며 번영할 건지, 병들고 실패할 건지를 결정된다. 나 자신을 어떻게 인지하느냐에 따라 다른 사람이 나를 대하는 태도도 달라진다. 이것은 나르시시즘이나 과대망상이 아니라 타자성을 얼마나 갖고 있는지에 의해서 <나는> 진정한 내가 된다고 본 것이다.

 

무신론자든 불가지론자든, 아니면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이든 상관없이 모두 <나는>이라는 힘을 즉시 끌어 쓸 수 있다. 생각은 창의적이다. 내가 되고자 하는 새로운 자아상을 설정하고 믿음과 자신감을 가지고 자아상을 키워 나가면 내 안에 있는 하느님의 창조력을 발견하고. 그러면 나는 나만이 구원할 수 있음을 깨닫고, 하느님이 내 안에 거하신다는 게 증명될 것이다. 세상에는 단 하나의 창조력만 존재한다. 어떤 주장이나 논쟁, 변증법을 넘어 이러한 진리가 내면의 확신으로 자리 잡을 때까지 추론해 내고, 마음속 진리에 평화롭고 조화롭게 거해야 온전한 <나>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나의 ‘깊은 자아(Deep Self)’를 믿어야 한다. 깊은 자아를 오롯이 인정하고 그 힘을 절대적으로 믿어야 한다. 감각적인 증거를 거부하고 욕망이 실현되리라 생각하는 것,  지금 욕망과 사랑에 빠져 있고 계속 사랑할 것이라 다짐하라는 것. 사랑이 담긴 아이디어는 적이 없다는 것. 이 아이디어를 잠재의식에 깊숙이 새기면 특히 평화로운 상태에서 잠재의식에 명을 내리면 잠재의식은 반드시 무언가를 나에게 가져다준다.

 

나는 신의 자질과 속성, 잠재력을 표현하고 끝없는 영광을 누리기 위해 이 세상에 왔기 때문에, 치유를 받고 나의 참모습을 표현하고 싶다면, 깊은 지혜와 영적 이해를 구한다면, 부를 얻고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다면, 신은 내가 원하는 모든 걸 이루길 바란다는 사실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믿음이란 아이디어나 생각, 이미지가 마음속에서 실재하는 걸 인식하는 것으로, 나의 손이나 심장처럼 책이나 연극, 음악, 발명에 관한 아이디어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 때 믿음이 생기며,  믿음은 내가 소망하던 것의 실체이자 보이지 않는 사물이 존재한다는 증거라고 보았다.

 

조셉 머피의 모든 저서의 공통 주제는 생명의 법칙은 곧 믿음의 법칙으로 수렴된다. 나를 믿는다는 것은 신의 창조력을 믿는다는 것이며, 그것이 행복의 비결이라고 보았다.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는 내가 무언가를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자연의 경고 신호이며, 내가 진정으로 믿는 것을 밖으로 드러내므로 생각의 변화만이 나를 자유롭게 할 수 있으며, 원인과 결과의 법칙은 항상 작동하고, 인간의 정신적 동의와 참여 없이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 어쩌다가 우연히 일어나는 사고는 없다는 것이다. 머피는 행복하고 싶으면 진정한 행복을 선택하라! 신의 [에네르기아ἐνέργεια]는 우리와 공유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안식일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3.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과 달리,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마태오 5,17-37을 읽어본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7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19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20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6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29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30 또 네 오른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33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네가 맹세한 대로 주님께 해 드려라.’ 하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또 들었다. 3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하느님의 옥좌이기 때문이다. 35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그분의 발판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위대하신 임금님의 도성이기 때문이다. 36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네가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37 너희는 말할 때에 .’ 할 것은 .’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과 달리,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라고 전하는 마태오 5,17-37에는 일곱 가지 대당 명제의 재정의를 통해 율법의 완성이 무엇인가를 전하고 있다.

 

(1.분노하지 마라, 2. 화해하라 3. 타협하라, 4. 마음의 간음조차 하지 마라, 5. 죄짓지도 말고 죄짓게 하지도 말라, 6. 불륜 외에는 아내를 버리지 마라, 7. 맹세하지 마라. )

 

이 일곱 개의 대당명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18)내가 너희에게 말한다.(2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26)>를 통해 17절의 율법의 완성으로 모아진다.

 

중요한 메시지를 전할 때, 예수님의 화법,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는 머리말은 율법완성의 [에네르기아ἐνέργεια]에 해당한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17)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마태 22, 34-40)

 

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니 충실하게 사는 것은 네 뜻에 달려 있다. 16 그분께서 네 앞에 물과 불을 놓으셨으니 손을 뻗어 원하는 대로 선택하여라.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있으니 어느 것이나 바라는 대로 받으리라. (집회서15,15-20)

 

행복하여라, 온전한 길을 걷는 이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 행복하여라, 그분의 법을 따르는 이들, 마음을 다하여 그분을 찾는 이들! (시편 119(118),1-2.4-5.17-18.33-34)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두셨다.”(이사야)10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그것들을 바로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그리고 하느님의 깊은 비밀까지도 통찰하십니다.(코린토 1.2,6-10)

 

Ⓕ야곱아, 돌아서서 슬기를 붙잡고 그 슬기의 불빛을 향하여 나아가라. 네 영광을 남에게 넘겨주지 말고 네 특권을 다른 민족에게 넘겨주지 마라. 이스라엘아, 우리는 행복하구나!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우리가 알고 있다.(바룩서 4, 2-4)

 

신앙의 핵심적 표현은 <나는 무엇을 믿는다>가 아니라 <나는 너를 믿는다>이다.(53)그리스도 신앙은 나자렛 사람 예수에게서 신의 얼굴을 발견하는 일의 실현이다. 나는 너를, 나자렛 예수를 이 세상과 내 삶의 뜻(Logos)으로 믿는다는 말로 전개된다(54)-요셉 라칭거 추기경(베네딕또16세교황)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18)내가 너희에게 말한다.(2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26)

 

내 가르침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가르침입니다(요한 7, 16)

 

 

Ⓐ에서 Ⓗ를 도식하면 율법완성의 [에네르기아ἐνέργεια]를 발견할 수 있다. 하느님의 힘은 우리가 선택한 사랑에서 발현된다. 그것을 지혜의 사랑이라고 예언서들은 부른다.

 

우리 시대를 같이 통과했던 요셉 라칭거 추기경은, 신앙의 힘은 <나는 무엇을 믿는다>가 아니고 <나는 너를 믿는다>의 고백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나는 너를 믿는다>는 것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를 듣는 것과 같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 것을 듣는 것이 율법 완성의 시작이자 마침이라는 것이다. 행복의 마중물이라는 것이다. <너>라는 신의 목소리를 듣는 청취의 상황에 놓여 있음을 아는 것이 창조주 하느님의 [에네르기ἐνέργεια]를 확산하는 일이라고 본 것이다.  신의 목소리를 진실로 들었다면 그는 행하기를 유예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행하지 못함은 실은 듣지 못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들을 수 있는 것이 하느님의 힘을 받을 수 있는 최우선적인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 Ⓓ, Ⓔ, Ⓕ---->Ⓖ---->Ⓗ=Ⓘ

 

Ⓐ~Ⓘ는 종적인 <애주>에 관한 것이다. 애주애인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  지혜이며 슬기로움이고 이것이 생명과 죽음으로 갈라지는 갈림길이라고 본 것이다. 그리고 일곱개의 대당명제로 제시한 횡적인 관계론인 <애인>은 <애주>로 수렴되는 통로에 해당한다.

 

(1.분노하지 마라, 2. 화해하라 3. 타협하라, 4. 마음의 간음조차 하지 마라, 5. 죄짓지도 말고 죄짓게 하지도 말라, 6. 불륜 외에는 아내를 버리지 마라, 7. 맹세하지 마라. )

 

이 일곱 개의 대당명제는 온전히 율법을 완성하는 것이 왜 관계론인가를 밝힌다. 율법의 완성인 애주애인은 진정한 나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제시한다. 대당명제로 주어진 일곱 개의 율법조항에 대한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은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그 행위를 유발한 원인에 관한 것이다. 즉 우리 마음에 관한 것이다. 그렇다면, 나로 사는 것에 타자가 왜 필요한가?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요한복은 강해에서 자신을 참으로 이해하는 존재는 자신으로부터 나가서 참 근원을 되찾음으로써 비로서 온전한 마음을 알고, 온전한 마음을 아는 것이 온전한 자신이 된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너보다 네 것이 무엇이며, 또 너보다 네 것이 무엇이냐?(아우구스티누스)-Quid tam tuun quam tu, quid tam non tuum quam tu]

 

어떤 행위나 존재성에 ‘더’나 ‘덜’이 붙으면 그것은 미완성이다. 창조의 [에네르기아ἐνέργεια]는 온전한 나를 찾는 힘으로 '밖에서 안으로'의 길항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할 수 있는 그런 본연의 내가 되는 것은 애주애인의 관계론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관계론의 실패를 아담과 카인이 보여주었듯, 또 우리가 삶에서 평화가 깨어졌을 때, 관계론의 균열에서 확인할 수 있듯. 애주애인은 하느님의 힘을 받을 수 있는 두번째 통로에 해당한다. 인간은 자립-자존하는 존재가 아니고, 타자에 의하고- 타자를 향한 존재로 개방될 때, 비로소 본연의 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라는 표현에서 신앙인의 [에네르기아ἐνέργεια]는 관계론이 지닌 인내의 시간을 전제로 한다고 할 수 있다. 인내, 기다림은 하느님의 힘을 받는 세번째 문을 여는 것이다. 나를 기다리고, 너를 기다리고, 하느님을 기다리는 시간, 나 혼자 나를 완성할 수 없다는 것이 율법 완성이 지닌 타자성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모든  완성에는 <나-삼위일체 하느님-타자> 라는 트라이앵글 구조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도 "내 가르침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가르침입니다"(요한7, 16)라고 언제나 하느님께 말씀의 근원을 둔 것처럼 말이다. 

 

글을 마무리 하며 마태오 5,17-37를 다시 읽어본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19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