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행복하여라’는 가언적(假言的)인가? 정언적(定言的)인가? 행복감인가? 선의지인가?

나뭇잎숨결 2023. 1. 28. 09:08

 

분이가  보내준 겨울산1

 

 

겨울산2

 

겨울산3

 

 

 

 

‘행복하여라’는 가언적(假言的)인가? 정언적(定言的)인가? 행복감인가? 선의지인가?

-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1. 대중의 취향에 따귀를 때려라(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의 「결론」 & 「유언」을 읽어본다.

 

 

사랑은 씻겨지는 것이 아니니/말다툼도/검토도 끝났다/조정도 끝났다/ 점검도 끝났다/이제야말로 엄숙하게 서툰 싯구를 만들고/맹세하오 /나는 사랑하오/ 진심으로 사랑하오

 

사랑의 배가/나날에 부딪쳐 부서졌다/삶과 나는 이해와 득실도 없다/그리고 서로에게 준/ 상처와/아픔과/ 멸시를 일일이 헤아려도/승부와 득점은 없구나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1893-1930)하면, 관료화된 정의롭지 못한 조국 러시아를 향해 겨눴던 총을 자신의 가슴을 향해 당긴 혁명가이자, “대중의 취향에 따귀를 때려라”라고 외친 전위파, 미래파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한 인간의 궁극적인 평가는 아오스딩 성인의 말대로 그가 무엇을 했는지가 아니라, 그가 무엇을 사랑 했는가로 평가받아야 한다면 그의 사랑은 어떤 꺾임의 과정을 겪었음을 알 수 있다. 정언적사랑에서 가언적 사랑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이다. ‘좋은 사랑’이란 어떤 조건하에서 성립하는 ‘가언적’ 사랑에서 조건을 초월하는 ‘정언적’ 사랑이라고 한다면, 블라미르의 사랑은 그 반대의 길을 갔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그의 자살에 필연성을 부여한다.

 

「결론」에서 “나는 사랑하오/ 진심으로 사랑하오에 드러난 그의 사랑은 그 어떤 조건도 따질 수 없는 맹목에 가까운, 오직 사랑이라는 본질에만 집중한 불가항력적인 정언명령 같은 사랑이다.

 

그러나 그가 자살하기 전날 쓴 시 「유언」에서 본다면 혁명가만이 니힐리즘을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랑의 배가/나날에 부딪쳐 부서졌다(..)승부와 득점은 없구나”, 라는 짙은 허무가 깔려있다. 그에게 사랑은 삶이라는 큰 틀에서 대립적인 세계를 걷는, 그래서 자신이 했던 사랑을 반추해보니 결국 ‘플러스- 마이너스 – 제로’의 상태에 이른, 가언적 계산서를 바라본 것이다.

 

마야코프스키의 「결론」 & 「유언」을 연결해, 그가 세상에 던진대중의 취향에 따귀를 때려라(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라는 명제는 그의 시학의 표제이자,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어했던 그의 분노의 표출 너머를 지시한다고 보인다. 그 자신에게 던진 운명의 명제로 바라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가 사랑했던 여인들은 대체로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로 ‘저만치’의 대상들이었다. 그렇기에 한 범부의 입장에서 대중의 취향에 따귀를 때려라 는 명제는 사랑의 집을 갖지 못한 채, 위태로운 사랑을 했던 그 자신에 대한 이해와 배수진의 화두로 들리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서 이런 질문, 의미의 발생학적 계보를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상대는 늘 ‘저만치’있었는데, 어떤 날은 그 상대가 살아야하는 이유를 주었다가, 어느 날은 그 상대가 살아야할 이유를 주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가? 왜 어떤 관계에서 파생된 사랑의 의미가 돌연 삶의 의미를 바꾸는가? 하는 점이다. 주체의 문제인가? 대상의 문제인가?

 

 

 

 

 

 

 

 

 

2. 세계는 물체들의 집합체이고 의미는 물체들의 마주침을 통해서 사후적으로 출현한다(스토아학파)

 

 

진리영역에 있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사랑은 진리영역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변할 수 없다. 그렇다면 행복은 어떤가?

 

행복은 가언적인가? 정언적인가? 하는 것은 우리가 행복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가와 관계되어 있다고 흔히 생각한다.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의 시에서처럼 어제는 그대가 화자에게 살아야하는 이유를 주었지만 오늘은 그대가 살아야할 이유를 주지 못했다면 사랑에 대한 의미부여의 주체가 의미를 좌우하는가? 아님 대상이 의미를 좌우하는가를 묻게 된다.

 

이것이 이 글의 주제인 행복은 의미부여 주체나 대상에 의해 좌우되는 것인가? 아님 행복은 의미부여자가 부여하는 어떤 의미와 무관한 절대적인 어떤 상태인가?를 바라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의미는 누가 발생시키는가?

 

스토아학파의 해석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질 들뢰즈는 『의미와 논리』에서 사건과 의미를 동시에 사유함으로써 사건이 곧 의미이고 의미가 곧 사건이 된다고 말한다. 그로인해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이 주체나 대상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사건은 물질적 차원과 문화적 차원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사건인 의미는 다만 주체나 대상이 사후적으로 경험한 것이라고 바라본 것이다.

 

 

모든 물체들은 서로와의 관련하에서 또 서로를 위해서 원인이다. 그리고 이 원인들의 통일성은 우주적 현재의 외연 안에서 운명이라고 불린다(49)사건들은 가장자리에 의해서만 생성되고 증식된다. 주름은 표면네서 만들어진다.(...)물체들로부터 비물체적인 것으로의 이행은 경계선을 따라감으로써 표면을 따라감으로써 이루어진다.(59)

 

의미는 명제로부터 추출물이다. 그러나 의미는 명제의 긍정과 부정을 유보시킨다는 점에서 또 그러면서 명제의 순간적인 이중체일 뿐이라는 점에서 구분된다. 사람없는 미소, 촛불없는 불꽃이 그것이다(92)

 

무의미란 의미를 지니지 않은 것이기도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의미 줌을 수행함으로써 의미의 부재에 대립한다. 이것이 우리가 무의라는 말에 의해 이해해야할 의미이다.(150)

 

우리에게 타인은 흐트러짐을 유발하는 요인이다. 그것은 타인이 끊임없이 뒤흔들고 우리의 지적인 사고를 뽑아버리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의 예기치 않는 등장의 가능성만이 대상들의 세계에 희미한 빛을 던지기 때문이다.(479)

 

의미란 존재로부터 솟아오르는 것이며, 주체의 구성은 그 다음의 문제다.(...)구조주의는 결코 주체를 제거하는 사유가 아니다. 그것은 주체를 분산시키고 체계적으로 분배하는 사유 주체의 동일성을 부정하는 사유, 주체를 분산시키고 여기저기로 이행시키는 사유이다.(548)

 

 

사랑한다, 행복하다는 하나의 의미이다. 그렇다면 들뢰즈의 시선에서 사람은 어떤 과정을 거쳐 ‘사랑하다’를 발생시킨다고 할 수 있을까?

 

들뢰즈는 A와 B가 이 우주안에 존재한다는 사실로부터 사랑이 발생하지는 않는다고 보았다. 사랑은 상대의 인격을 경험하기전에 폴발레리가 간파한대로 사랑은 피부로부터 시작한다고 말하는 우연적 ‘마주침’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래서 마주침(물체)은 원인이고 운명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예컨대 단테는 베아트리체를 베케오 다리위에서 우연히 마주치고 16년 동안 『신곡』을 쓴 것이 그 예라고 할 것이다.

 

그렇다고 마주치는 80억 인류가 모두 사랑이 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의미를 발생시키는 것이 타자도 주체도 아닌데 어떻게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 발생되는가? 들뢰즈는 이것은 순수사건으로 바라본다. 사랑을 하기 전에, 주체는 늘 비어있다. 대상 역시 부재한다. 비어있는 주체와 부재하는 대상이 사랑이라는 사건이 될 수 있는 것이 바로 ‘사랑하다’는 ‘잠재적 명제’(문화) 때문이라고 바라본다.

 

들뢰즈는 의미를 명제 안에 존재하는 순수사건이라고 정의한다. 순수사건이란 잠재적 사건, 아직 현실화되지 않은 사건이다. 예컨대, 사랑한다, 사랑할 수 있다, 사랑했다, 사랑할 것이다는 것은 잠재적으로 존속하는 ‘사랑하다’의 현실화라고 본 것이다.

 

그렇다면 <행복>은 어떻게 발생된다고 할 수 있는가? 많은 이들이 현실의 결핍으로부터 <행복>은 발생된다고 보고 있다.

 

 

 

 

 

 

 

 

3. 연중4주,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지난주에 이어 <행복>을 더 생각해보기로 한다.

 

마태오 5,1-12ㄴ을 읽어본다.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2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3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5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6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7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8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9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10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12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누군가, 지금 행복하세요? 라고 묻는다면 분명 우리는 ‘아마도’ 행복하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 늘, 100%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선뜻, 퍼펙트 완벽하다, 라고 말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왜 그럴까? 오히려 질문하는 이에게 100%로 완벽한 행복이 과연 가능한 것인지 되물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행복한지? 행복하지 아니한지?의 상태가 있을 수 있다면, 행복은 변화될 수 있는 것이라고 보아야할까? 혹은 완벽하거나 불완전한 행복이 있을 수 있다면 행복에도 체급을 나눌 수 있는 것인가? 등 결국 행복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로 귀결된다고 할 수 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전하는 마태오 5,1-12ㄴ에서 전하는 행복은 어떤 행복인가? 산상설교에서 설파된 8가지 행복은 현실의 구조가 바뀌어서 주어진 행복이 아니라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할 수 있다. 현실은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이 행복이라면 그 행복은 성취된 것이 아니라 발생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3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가난(ebiyon)’은 세상에서 ‘더 이상 기댈 곳이 없는 상태’를 뜻한다. 물질적인 가난과 영적인 가난 모두 가난한 상태지만 진복팔단에서 말하는 가난은 마음의 가난, 영적인 가난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느님을 온전히 신뢰할 수 있느냐는 질문으로 모든 행복론의 바탕생각에 해당한다. 세상이 주는 포만감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행복의 근원을 바라보는 것은 결국 자기근원을 바라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나의 근원은 사랑이라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마음이 가난한 이들이 경험하는 행복일 것이다. 이는 나는 지금껏 하느님의 사랑에 기대어 살아왔다는 것을 바라본 사람만이 느끼는 행복이라고 할 수 있다.

 

4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슬픔’(Penthountes,Klaiontes,Sapad)’은 매우 소중한 것들을 잃어서 상실감을 경험할 때, 그 극한의 슬픔에서 상실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바라보는 지고의 상태라 할 수 있다. 궁극적인 위로의 주체는 사람도 사물도 아니라는 것을 바라본 것! 모든 것이 사라져도 끝내 사라지지 않을 것이 무엇인가를 바라보는 것이 위로이기에, 위로의 문형은 그들은 ‘~에게위로를 받을 것이다, 가 된다. 내 삶의 중심, 주체의 자리에서 그분을 보게되는 것이 위로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그분과 함께 있다는 것을 체험하는 것이 위로라고 할 수 있다. 마음의 가난은 나의 선택의지인 어떤 갈망의 측면에서 볼 수 있다면, 슬픔에서의 위로는 그분의 현존체험에 초점이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5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온유(An-ab)’는 겸손함에서 파생된 단어다. 하느님의 말씀에 반응-응답하는 태도가 온유함이다. 겸손은 겸양이 아니라 온전히 하느님의 뜻에 내 의지를 내어드리는 것이라고 할 때, 마리아의 수태고지에서처럼 내 자유의지를 더 큰 하느님의 의지에 맡겨드리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땅을 차지한다는 것은 주기도문에서 '하늘나라가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를 기도하는 것처럼. 풍요로움의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하느님 뜻이 지닌 전능함에 대한 체험이라 할 수 있다. 온유하고 겸손한 자의 네!는 하늘과 땅이 같아지는 것이므로 하늘을 차지한 사람이 땅을 차지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도 마땅한 일이기 때문이다.

 

6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의로움(Tzedakah)’은 ‘어떤 기준에 부합하다’는 의미로 시대마다 그 기준이 달라지는 상대적인 의미였다. 그런데 예수님에 이르러 절대적인 기준으로 바뀐다. 정의, 의로움의 기준은 오직 사랑이다. 의로움 자체를 추구하는 자의 의로움이 겹쳐야 사랑이 된다. 사회의 모순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것은 의로움의 잠재태일 뿐이다. 그것은 세상의 의로움이지 하느님의 의로움은 아니다. 의로움은 일대일로 지적된 사회정의의 의로움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을 실현하고자 하는 사람의 사랑이 그가 외친 정의가 의로움이 되게 한다고 할 수 있다. 의롭지 않은 자의 심장을 향해 총을 쏘는 의로움이 아니라 용서하는 의로움, 기다리는 의로움이다. 하느님의 시간에 대한 인내와 기다림이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이가 경험하는 시간이다.

 

‘주리고 목마른’이라는 표현에서, ‘흡족’이라는 표현으로의 전이, 의로움이라는 목적 못지않게 그것을 실현하려는 이들의 수단, 기다림이 전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달리 말해 사랑은 사랑이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의가 폭력이라는 수단으로 강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만 의로움의 씨앗을 뿌리는 것이고, 그것을 수확하는 것은 그분이라는 믿음이다. 그분의 시간에 조급증을 갖지 않을 때 충분히 흡족해질 것이라는 것에서 기다림의 충만을 만나게 된다. 이것은 더 넓은 의미에서 결국 지금은 세상의 권력이 승리하는 듯 보이지만 결국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하느님 정의의 수단을 세상의 수단으로 대체하고 정의로운 자의 월계관을 스스로 만든 것은 우상의 숭배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갈망으로 인한 의로움은 의로움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의인을 구하러 오지 않고 죄인을 구하러 왔다는 말에서 그를 확인할 수 있다.

 

7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자비(Chesed)’는 연민, 공감, 관용, 용서를 의미한다, 겸손은 그들은 (~에게) 자비를 입을 것이다, 라는 문형에서 보듯, 필수부사어가 필요하다. 이것은 스스로 쟁취할 수 없는 생명일반의 존재상태를 바라볼 때 가능하다. 자비는 무조건적인 인간본성을 바라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자비로워라!는 것은 본성을 회복하라는 정언명령에 가깝다. 살아있다는 자체가 자비임을 알 때 타자에게 관용이나 자선, 그리고 용서 같은 행위가 본성을 회복하는 행위를 좀 거들어준 것임을 보게 된다. 엄밀히 자비는 선택상황이 아니다. 이것은 그냥 나의 존재와 타자의 존재가 선물임을 받아들이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태어났다는 자체가 자비이며, 살아있다는 자체가 이미 자비를 입은 것이다. 그렇기에 타자에게 어떤 형태의 자비- 정신적이거나 물질적 것을 베푸는 것은 사실 바닷물에 눈물 한방울을 떨어트린 것과 다르지 않다.

 

 

8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깨끗함(Katharos)’은 결백, 거룩함을 의미한다. 깨끗함은 ‘카타르시스(katharsis)’ 와 그 어원이 같다. 마음의 결백은 눈물로 씻어내고, 회개로 씻어내는 정화가 일어난 상태를 의미한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이것은 꿈이나 환시로 하느님의 형상을 본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느님의 뜻을 직관하거나 통찰이 가능하다는 것으로 하느님의 뜻, 사랑, 진리 등 하느님에 관한 것들을 자명하게 보고 들을 수 있는 영안의 열림이라고 할 수 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평화(Eirene. Shalom)’는 죄나 허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를 가리킨다. 평화의 시작은 자기로부터의 해방이라고 할 수 있다. 전쟁은 언제나 마음에서부터 시작한다. 세상이 주는 안락함과 평화는 근본적으로 다른 의미의 편안함이다. 전쟁과 갈등이 없는 사랑이란 두려움이 없는 상황을 의미한다. 평화는 강한 주파수를 가진 에너지의 상태로 존재한다. 성인의 통공이 가능한 것이 바로 이 평화의 자장이라고 할 수 있다. 평화의 자장은 인류 역사를 지킨 에너지이기에, 내가 평화의 상태에 존재한다는 자체가 이미 평화를 위해 일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연히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부활의 일성에서 알 수 있듯 평화의 상태에 있을 때만 하느님이 진정, 온전히 나의 아버지임을 알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10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의로움으로 인한 박해는 사랑의 힘을 믿는 이들이 어떻게 삶을 사랑에 종속시킬 수 있는지에 관한 부활 체험이라 할 수 있다. 사랑이 생물학적인 생명보다 우위에 있다는 진복팔단에서 전제하는 궁극적 영원성, 시간 너머의 영원한 삶까지를 언급한 것이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은 하느님의 정의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라면, 의로움 때문에 박해받는 사람들은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서 구체적인 행동까지 불사한 사람들이다. 존재의 차원에서의 행위의 차원까지 이른 것이기에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은 이미 하늘나라를 그들의 유일한 거처로 삼은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물질의 가치를 뛰어넘고, 이 세상의 가치에 갇히지 않은 사람들! 그들은 드디어 생물학적인 생명조차도 옳은 것을 위해 내어놓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으니, 사랑을 삶의 우위에 두는 부활의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마태오 5,1-12ㄴ에서 전하는 행복은 <행복하여라>에 그 초점이 놓여있다. <행복하여라> 속에는 이미 행복할 수 있는 절대 권리가 내장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행복하여라>는 가언적이 아니라 정언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상황논리가 하느님에게서 주어지는 행복을 좌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행복하다 혹은 행복하지 않다는 것은 오직 우리의 선택사항일 뿐이라고 할 수 있다. 행복은 참과 거짓을 따질 수 없는 불변의 명제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누구도 불행을 원하는 이들이 없기 때문에 이는 갈망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행복추구권은 다른 말로 행복의 자기결정권이라 말 할 수 있다. 들뢰즈의 논리대로 사물과 문화가 만났을 때 그 틈, 결핍에서 행복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행복은 모든 사람의 권리임에도 행복지수가 낮거나 행복하거나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행복을 가언적이라 보기 때문일 것이다. 행복이 타인이나 세상이 나에게 줄 수 없는 것이 행복이라 한다면. 그렇다면 왜 나 자신의 권리를 세상에 위임한 것처럼 살게 되는가? 행복에 관한 일관적인 태도를 취하지 못하는가에 대해 다음 몇 가지 상태를 진단해 볼 수 있겠다.

 

(1) 행복하지 않기로 결정한 사람은 없지만 자신이 그런 결정을 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수 있다.

 

(2) 행복하거나 행복하지 않은 어떤 때가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진정 행복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상황에 따라 바뀌는 행복은 행복이 아니라 이 세상이 주는 환상이다. 행복은 불변의 상태래야 하니, 행복은 변하는 것을 원하지 않음으로써 얻기 때문이다.

 

(4)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은 행복은 진리이기 때문이다. 행복은 진리이기 때문에 불변하는 것이며, 불변하는 것들은 열망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

 

(5)행복의 불변성에는 예외가 없고 행복의 창조주가 아시는 것을 확신하듯, 행복은 자신이 보는 것을 확신하며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이 같음을 아는 것이다.

 

(6)행복의 열망은 흔들릴 수 없으므로 세상의 그 무엇도 행복의 불변성을 꺾지 못한다. 그러기에 행복은 행복감을 느끼는 것에 종속되지 않는다. 행복은 어떤 느낌보다는 선의지에 가까다고 할 수 있다. 

 

(7)우리는 열망하는 것을 자신에게 주며, 행복이 일관된다면 행복하기 위해 한번만 청해도 행복하다. 우리가 늘 행복하지 않다면 행복의 속성상, 행복을 진실로 갈망하지 않은 것과 같다. 하느님은 우리가 진실로 원하는 것을 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8) 행복은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고 그 뜻이 가장 좋은 것을 아는 것이기에, 행복은 감성의 차원이 아니라 선의지의 차원이라고 할 수 있다. 행복한 사람이 불행을 야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진정 행복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글을 마치며 그리스도인의 행복론을 다시 읽어본다.

 

3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5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6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7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8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9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10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