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라는 하나의 사물이 어떻게 신성과 연결될 수 있을까?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를 중심으로
1. 삶은 계란이다(김수환추기경님)
별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별이 그를 어떤 방향으로 끌고가는지가 문제일 것이다.
공현대축일 묵상을 하면서 나에게 별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내 열정을 추동시켜던 것들을 노트에다 쭈욱 써 놓고 지금까지 무슨 힘으로 여기까지 걸어올 수 있었나?를 생각해 보았다.
책일까? 문학일까? 학문일까? 도서관일까?...아님 종교일까?
열정의 선을 그어보니 나의 별이 어머니라는 것을 알았다.
이때 어머니는 나를 낳아준 그 어머니뿐 아니라 ‘어머니적’인 모든 것을 말한다.
특히 ‘어머니적’인 수많은 품성 중에
인내와 기다림, 용서와 자비를 배우지 않았다면 j라는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지 못했을 것이다.
열정의 방향을 몰랐을 것이다.
정의의 하느님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하느님을 배우는 여정에 있기 때문에
인내와 기다림, 용서와 자비가 없는 사랑은 없기 때문에
‘어머니적’인 것이 나의 별인 것을 알았다.
1월 11일(수요일)은 어머니 기일이다.
너무나 일찍 어머니는 하느님나라로 가셨기 때문에
인내와 기다림, 용서와 자비에 대해 구체적으로 어머니에게 배울 시간은 없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배울 신앙이라는 씨앗을 유산으로 주셨다.
삶을 바라보는 '시선'을 주셨다.
내 별은 무엇이고 너의 별을 무엇인가는 궁극적으로 모든 이들에게 별의 이름이 다를지라도 삶을 추동하는 것이 별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삶이 별이라고 할 수 있다.
2. 동방박사는 어떻게 별을 별이라고 볼 수 있었나?
마태오 2,1-12를 읽어본다.
1 예수님께서는 헤로데 임금 때에 유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 그러자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2 “유다인들의 임금님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하고 말하였다. 3 이 말을 듣고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 4 헤로데는 백성의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을 모두 모아 놓고,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어디인지 물어보았다. 5 그들 이 헤로데에게 말하였다. “유다 베들레헴입니다. 사실 예언자가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6 ‘유다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의 주요 고을 가운데 결코 작은 고을이 아니다. 너에게서 통치자가 나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보살피리라,’” 7 그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을 몰래 불러 별이 나타난 시간을 정확히 알아내고서는, 8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말하였다. “가서 그 아기에 관하여 잘 알아보시오, 그리고 그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 9 그들은 임금님의 말을 듣고 길을 떠났다. 그러자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 10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11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12 그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
이글은 다음 글의 연장선에서 쓴 글이다.
[상호텍스트성, 모든 사물은 벡터(vetors)다(화이트헤드)]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임금님께 경배하러 왔습니다.>라고 전하는 마태오 2,1-12에서 2절에 <그분의 별을 보고>를 중심으로 공현의 축복을 생각해보려고 한다.
[1]별이라는 하나의 사물이 어떻게 신성과 연결될 수 있는가?
이런 질문부터 하게 된다. 그들은 어떻게 그 별을 보고 어느 나라의 막연한 왕의 출현이라고 하지 않고 꼭 집어서 유다인의 왕이라고 특정 민족을 지칭할 수 있었나? 즉 그분의 별이라고 단정할 수 있었나? 그 예지는 순전히 그들이 지닌 통찰의 결과인가? 아님 하늘의 계시인가?
이런 질문을 하게 된 이유는 당시에 동방박사만 하늘의 별을 관찰하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새로운 별이 나타났을 때, 그 별을 왕의 출현과 연결하는 것은 동서고금의 오랜 전통에서 하나의 정설처럼 되어 있는 프레임이다.
그러기에 공현의 핵심은 그들에게 그 별은 단지 관찰의 차원, 인식의 차원에 머무르지 않았다는 것에 초점이 놓여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관심사, 관찰의 결과가 행동으로 옮겨지는 그 모멘트가 무엇인가?를 바라보는 것,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2절)라고 할 정도로 그별은 그들의 긴 여행, 오랜 시간의 여행을 추동했고, 그들에 의해 그분은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들의 개인적 의지가 보편의지로 확장되었다.
그렇다면, 그들의 여행을 추동하던 그 힘이 대체 무엇인가?
이어서 드는 질문, 번뜩이는 예지로 임금의 출현을 확신하였다 해도 어떻게 그분께 경배하려고 긴 여행을 감행할 수 있었을까?
인간의 조상은 별이라는 어떤 과학자들의 분석에서 보듯, 인간의 육체적 구성요소는 별의 구성요소와 아주 비슷하다. 물질적인 구성요소가 비슷하기 때문에 별은 어떤 신성성을 지니는 것인가?
별이라는 하나의 사물이 어떻게 신성과 연결되어 있는가?
그 질문은 별이라는 하나의 사물이 신성을 담지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동방박사가 신성을 담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별의 신성을 볼 수 있었나? 이런 질문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성지순례를 하는 이유가 어떤 공간은 다른 공간에 비해 더 거룩한 공간이라고 불릴 수 있는가?라고 아님 순례자가 이미 성스럽기 때문에 성스러움을 배가하여 경험하는 것인가 하는 질문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적어도 동방박사의 여행에 동행한 이들이 세사람 이상이었을 것이라는 점, 그리고 그들이 준비한 예물로 미루어보건데 그들의 여행은 그들 인생에서 관찰이나 인식의 차원을 넘어서는 어떤 힘들이 함께했음을 알 수 있다. 그 힘들이 무모하다싶은 여행길을 감행하게 만든 어떤 모멘트가 되었다.
그 힘은 그들의 시선, 일상적인 별을 그분의 별이라고 바라본 그 시선이라고 할 수 있다. 본다는 것, 그것이 신성을 가늠하는 시금석이라 할 수 있다. 그러기에 그들의 시선이 신성하기 때문에 그들은 그 별의 신성성을 확신할 수 있었다고 결론지어볼 수 있다. 미사전래 중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라는 찬미의 노래는 무엇보다 그분이 거룩하기 때문이고, 또한 찬미하는 이가 거룩하기 때문에 그 찬미는 완성된다고 할 수 있다.
거룩하다는 것은 상태형용사가 아니라 사실 행위 동사에 가까운 능동사라고 할 수 있다. <그분의 별을 보고> 의 핵심은 신성하고 거룩한 것은 사람들의 거룩한 행위를 추동하는 놀라운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거룩해져야지만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 사랑이다. 그것이 동방박사들에게는 여행이었다. 우리는 그 거룩함의 힘을 모세에게서 찾을 수 있다.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탈출기3,2)
모세가 거룩한 체험을 한 후, 신음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데려나오듯, 거룩함은 한 익명의 개인에서 그분의 힘을 체험하는 육화된 신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나의 신성이 하지 못할 일이란 없다”(M28)는 기도를 할 수 있을 듯하다.
어떻게 거룩함이 힘인가? 거룩함(신성)은 이 세상의 모든 자연법칙을 이용해 가장 고귀한 목적으로 이끌기 위해 때론 자연법칙의 상식을 뒤집는다. 거룩함은 한 익명의 개인을 공적의지에 동참하게 이끈다. 신성은 온갖 시간의 속박과 공간의 속박, 간격의 속박 등 그 어떤 속박도 넘어서게 만드는 힘이다. 왜냐하면 신성은 창조상태의 원형을 유지하는 것이자, 하느님의 권능에 동참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느님의 뜻은 거룩함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을 마리아의 수태고지에서 거듭 확인할 수 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루카, 1,37-38)
동방박사의 여행은, 별이라는 사물을 거룩하게 볼 수 있는 그들 자신의 시선. 시선의 거룩함(영안)으로 거룩함을 체험하는, 거룩함의 여행이었다고 가정해 볼 수 있다.
[2]그렇다면, 그들이 왜 베들레헴으로 직접 가지 않고 예루살렘을 경유해야만 했을까?
질문1에서 보듯, 공현은 인간의 의지에 하느님의 의지의 결합, 그 공적인 드러남이라고 할 수 있을 때에만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향한 이유를 바라볼 수 있을 듯하다.
1절과 2절에서 동방박사는 그들로 하여금 길을 떠나게 한 하늘의 별을 잃었다. 그로 인해 그들의 행선지인 베들레헴이 아니라 예루살렘으로 가게 되었다. 결과론적인 맥락은 잃은 것이 아니라 잃게된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인류사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현장에 그들이 성큼 들어선 것이다. 그것을 추동한 것이 천문학적인 관측의 대상인 하늘의 별이었다.
(어떤 목회자들은 결과론적인 해석으로 동방박사를 비판하기도 한다. 그들이 곧바로 베들레헴으로 가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갔기 때문에 헤로데에게 예수의 정체를 미리 발설하였고 2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이 죽는 비극적 사건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길을 떠날 때, 그들의 길을 인도하던 별은 왜 돌연 그 정체를 감지할 수 없는 상황으로 모습을 감추었나? 그것은 두가지 측면으로 바라보아야 할 듯하다. 하나는 외부적 요인이고, 하나는 그들 자신의 문제였다고 할 수 있다. 엄밀히 그 두 요인은 공현의 필연성으로 동시에 모아진다. 그 필연성은 개인의지와 보편의지의 결합으로 드러난다. 영감이나 통찰에서 시작된 여행이 상식에 의존하는 여행으로 바뀐 그 시간이 보편의지를 경험하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잃은 것이 오히려 얻게 된 사건을 불러온다.
질문 1과 연결해서. 그들이 신성하다면 그 신성은 있다가 없다가 하는 것인가? 신성하다는 것은 상태동사가 아니라 능동사인 확장의지라고 할 수 있다. 예루살렘에서 그들의 여행은 그들 개인의 취향의 선택, 개인여행을 뛰어넘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거룩함이 갖고 있는 보편의지의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나의 하느님이 아니고 우리의 하느님 체험이다. 인류사의 패러다임은 이렇게 바뀌었다.
예수님은 언젠가는 드러나야 한다. 동방박사가 아니어도 예수님에게 공현은 필연적이다. 그렇다면 동방박사를 통한 공현의 의미는 무엇인가?
무엇보다 동방박사에게 중요한 것은 별과 다윗가문에서 태어난 임금이었다. 이때, <동방박사-별-임금>은 완벽한 삼각형을 이룬다. 별은 수단이었고, 임금께 경배하겠다는 것은 그들 여행 목적이었다. 그런데, 그들을 인도하던 별이 돌연 사라졌다. 그들이 확신하던 삼각형 구조가 깨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곧바로 베들레헴으로 가지 못하고 예루살렘을 거쳐야만 했다. 그들 상식으로 임금은 당연히 예루살렘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갔기 때문에 벌어졌던 일련의 사건들은 동방박사를 통한 공현의 의미에 가장 결정적의미를 부여한다고 할 수 있다. 인류사의 패러다임이 바뀐 것이다. 거룩함은 하느님의 뜻과 결부되어 있는 영적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영적 체험은 그들의 별이 다른 별로 대체된다. 여기서 수단과 목적이 같아지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하느님의 섭리라고 부른다. 신약의 시작이라고 부른다.
예루살렘에서 별은 저 하늘에 있는 별이 아니라, 이사야 예언자와 비슷한 시대에 살던 미카예언자가 기원전 780년경에 기록한 예언서가 된다. 이것이 공현이 하느님의 의지라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바라보아야 하는 별은 저 하늘의 별이 아니라 예언서였다. 이때 미카서는 불타는 책이 된다. 그동안 율법학자들의 서가에서 무생물적으로 누워있던 히브리어의 문자들이 돌연 소용돌이의 근원으로 되살아난 것이다. 거룩함은 신성한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성서의 문자들이 살아있는 생물로 만드는 것이 공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동방박사에게 예루살렘은 역설적인 공간, 역사적인 공간, 구세사의 공간이 돤다. 그들이 믿던 별이 보이지 않았을 때, 그들은 예언서라는 새로운 별을 보았다. 그들을 인도하던 별을 잃었을 때, 그들은 다른 별을 보았다. 그 별은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이 전해준 미카서였고, 그들이 만나려는 왕은 상식을 뒤집는 구유에 누워있는 왕이었다.
삶이라는 여행의 돌발변수들은 그렇게 우리가 꼭 알아야하는 것들을 곳곳에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복병처럼 마주치게 하기도 한다.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유다인들의 임금님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동방박사의 소용돌이 질문은 별이라는 수단을 잃었지만 그들은 왕을 만나겠다는 목적은 잃지 않았다는데서 그 진정성을 얻는다. 그리고 예수님의 공현은 헤로데와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예루살렘 시민들 앞에서 공식화된다. 개인의지가 보편의지로 확장되는 순간, 굿사의 두르마리가 그렇게 펼쳐졌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였는지 거부했는지의 여부는 이차적인 것이다. 메시아, 그분이 이 세계에 드러났다는 자체가 이 세계에 대한 축복이라는 사실이다. 동방박사라는 이방인들에게 도 그 축복이 알려져야 하겠지만 예루살렘의 모든 이들도 알아야 하는 축복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축복이 축복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건이 된 것이다.
‘유다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의 주요 고을 가운데 결코 작은 고을이 아니다. 너에게서 통치자가 나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보살피리라,’(6절)
미카의 예언을 전한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그 예언을 믿지 않았지만, 이방인인 동방박사들은 그것을 믿었다. 믿음이 축복이다. 이것이 공현이 전하는 축복의 빅픽쳐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임금을 경배하겠다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예언서가 말하는 그 전언을 새로운 별로 삼아 베들레헴이라는 목적지로 갈 수 있었다. 여기서 본질이 수단을 결정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방박사는 그들의 별에 의존하지 않고 미카서라는 별에 의지해 베들레헴으로 향했고, 그들은 다시 하늘의 별을 보게 된다. 정확한 목적지를 그 별이 가리킨 것이다. 그들이 여행을 떠나게 했던 그 수단과 목적이 베들레헴에서 완벽하게 일치한 것이다. 그분이 인류의 유일한 별이라는 사실은 그렇게 드러난다. 예수님이라는 사랑이 수단이자 목적이 되었다는 것이다.
[3]“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10절)
여기서 10절을 읽고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왜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기뻐하지 않고(목적)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춘 별을 보고(수단) 그들은 기뻐했을까?
반복해서 말하자면, 동방박사가 아니어도 예수님의 공현은 <때가 차자>에서 알 수 있듯, 필연적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굳이 동방박사를 통해 공현의 의미를 초점화 시키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와 함께 공현이 완성된다는 점일 것이다. 그리고 공현을 완성하는 이들은 그들 안에 내재된 신성성을 발견하게 된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분의 별을 보고>라고 자신들이 무심히 했던 말들의 의미를 분명히 알게 되었기 때문에 , 인류의 별은 곧 그분이었기 때문에(어쩌면 이것도 훗날 깨달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1절과 2절을 10절과 연결하여 바라보아야할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은 모두 자신의 신념체계로 인해 길을 걸어간다고 할 수 있다. 여행을 시작할 때, 별은 동방박사에게 어떤 신념체계를 상징한다. 그러나 여행의 끝에 그 별은 개인의 신념체계를 넘어 인류사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현장에 자신을 있게한 신성한 목적지가 되었다. 이렇듯, 나를 통해 예수님이 드러나는가 아닌가는 나의 신념체계와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21세기에 예수의 이름을 모르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다만 예수라는 이름이 나를 통해 나의 온 생애를 투신할 정도로 유일한 끌림의 이름인가? 그래서 그 이름을 세상에 넘치도록 드러냈는가, 아닌가는 공현대축일에서 그 무엇보다도 주요한 질문의 키워드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공현의 의미는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로 모아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이 별의 신성에 이끌려 여행할 수 있고 경배할 수 있었던 것은 육안으로는 할 수 있는 여행이 아니다. 그것은 영안으로만 결행할 수 있는 여행, 라칭거 추기경이 바라본 <자기에게로 가는 여행-내면의 여행>이라고 할 수 있다.
별이 신성하다는 것은 그들이 그 별의 신성함을 감지할 만큼 그들 역시 신성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성이 신성에 끌렸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 신성의 근원 앞에서 기쁘게 경배할 수 있었다.
그들이 별을 보고 기뻐했다는 것은 질문1과 질문2와 연결해서 그들의 신성에 대한 기쁨으로 모아진다. 그 기쁨이 진정으로 경배할 수 있게 했다고 할 수 있다. 경배는 신성한 자가 그 신성의 근원에 대한 당연한 기쁨과 경외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교황은 공현대축일 강론에서,
우리는 자주 기도하고, 무언가를 구하거나 반성합니다... 그러나 보통 우리는 숭배의 기도를 잊어버립니다. 우리는 쉴 새 없이 질문하는 것을 잃어버렸고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여행을 계속할 용기를 잃었기 때문에 예배 감각을 잃었습니다. 오늘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동방 박사를 본받으라고 부르십니다. 동방 박사들처럼 엎드려 경배의 경이로움 속에서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맡깁시다.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을 경배합시다. 명성이나 권력의 유혹이나 거짓 뉴스의 유혹으로 유혹하는 거짓 우상이 아니라 하느님을 경배합시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매혹적이면서도 공허하고 공허한 것들과 악한 생각 앞에 엎드려 절하지 맙시다.
그들이 여행 중에 한 불안한 질문들과 예측할 수 없는 여행의 끝이 경배로 수렴되는 것이 별의 신성함을 볼 수 있는 그 시선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도는 누구라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경배를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기도와 경배는 조금 다르다. 경배는 자신의 신성함을 알고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거룩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신성하다면 그래서 상식을 뒤집는 여행길에 오를 수 있는 것은 결국은 그분이 이 모든 축복의 시나리오를 지휘했다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자, 자기 생의 총체적인 축복의 디테일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동방박사가 마리아와 함께 있는 예수님에게 경배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의지를 추동하는 그들의 내적 존재론-거룩함의 체험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이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그 신성을 바라볼 수 있다면, 누구라도 세상에 그분을 드러내는 여행을 떠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행위 이전에 우리 존재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먼저라고 할 수 있다. <~하라> 앞에는 언제나 <~을 알다>라는 것이 전제된다는 사실이다. <나는 너를 안다/모른다>는 문형은 신자 고유식별번호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얼마나 고귀한 존재인지를 모르는데 어떻게 그분의 고귀한 사랑을 전할 수 있겠는가? 그러기에 동방박사를 통해 '행위'가 먼저가 아니고 '존재'가 먼저라는 사실을 다시금 바라보는 것이다. 어떤 사물의 신성함을 목격하였다는 것은 사실 자신의 신성함을 확인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육안이 아니라 영안의 확인이다.
글을 마무리하며 축복의 문장들을 다시 읽어본다.
‘유다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의 주요 고을 가운데 결코 작은 고을이 아니다. 너에게서 통치자가 나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보살피리라,’(6절)그러자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10절)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11절)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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