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즐거움을 많게 하시고, 기쁨을 크게 하시는 플라티테라!(Plati tera ton ouranon)

나뭇잎숨결 2023. 1. 1. 13:02

 

 

 

 

 

즐거움을 많게 하시고, 기쁨을 크게 하시는 플라티테라!(Plati tera ton ouranon)

-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를 중심으로

 

 

 

 

 

1. 마리아에게 <천주의 성모>라는 화관을 씌울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루카2, 16-21을 읽어본다.

 

 

그때에 목자들이 베들레헴으로 16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 17목자들은 아기를 보고 나서, 그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알려주었다. 그것을 들은 이들은 모두 목자들이 자기들에게 전한 말에 놀라워하였다. 19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20 목자들은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 대로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갔다. 21 여드레가 차서 아기에게 할례를 베풀게되자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그것은 아기가 잉태되기 전에 천사가 알려준 이름이었다.

 

 

<목자들은 마리아와 요셉과 아기를 찾아냈다. 여드레 뒤 그 아기는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라고 전하는 루카2, 16-21을 통해  왜 마리아에게 <천주의 성모>라고 부를 수 있는지 19절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겠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19)

 

마리아가 마음에 되새긴 이 모든 일은 무엇일까?

 

성서에 나온 내용들을 통해 추론컨대, 메시아론의 파격, 전복일 것이다. 다른 말로 사랑의 역설일 것이다. 다윗왕조의 계승자라는 의미의 구세주론의 실상은 <구유>에서 그리고 <목자>들의 전언에서 거듭 확인되는 <전능의 내려놓음>이었기 때문이다. 8일 후 시메온의 예언, 동방박사의 알현, 이집트로의 피난, 가나의 혼인잔치 이전까지 은폐적 메시아상에서 마리아의 <마음에 새긴 것>이 무엇인지 거듭 확인할 수 있다.

 

 

 

 

 '기도하는 성모', 체팔루 대성당, 시칠리아, 이탈리아.

 

 

 

우리가 마리아를 그냥 마리아가 아니라 <천주의 성모>라는 화관을 씌울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천주의 성모 마리아!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라 부를 수 있는 근거는

 

[1]마리아론은 삼위일체 축일에 바라본 삼위일체 하느님의 세 위격을 전제로 하고 있다.

 

삼위일체론은 기독교의 정체성과 독특성을 담고 있다. 종교로서 기독교는 무신론이 아니며 유신론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불교와 구별된다. 유신론이지만 다신론이 아니고 단일신론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와 구별된다. 단일신론이지만 삼위일체론 때문에 유대교나 이슬람교와도 구별된다. 이처럼 삼위일체론은 대외적으로 기독교의 독특성을 드러내고 대내적으로 자기 정체성을 밝히는 주춧돌이다.

 

기독교는 거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마리아의 존재를 단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는 도구적 수단으로 볼 것인지? 예수의 인성과 신성에 동참한 인류의 표상으로 바라볼 것인지?에 의해 2세기에 영지주의가 주장한 가현설을 뒤집고, 4세기에 네스토리우스파가 주장하던 천주성모불가론을 뒤집는다.

 

그 근거는 성서의 여러부분에서 확인 할 수 있고, 무엇보다 이사야 7장과 8장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이사야7, 14)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 그의 이름은 놀라운 경륜가, 용맹한 하느님,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군왕이라 불리우리라. 다윗의 왕자와 그의 왕국 위에 놓인 그 왕권은 강대하고 그 평화는 끝이 없으리이다. 그는 이제부터 영원까지 공정과 정의로 그 왕국을 굳게 세우고 지켜 가리이다. 만군의 주님의 열정이 이를 이루시리다.(이사야8, 5-6)

 

 

[2]이사야 예언서의 예언처럼 천주의 성모, 즉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표현은 그리스도 안에 두 본성, 일치의 주체를 규명하는 것과 맥을 같이한다.

 

그리스도가 완전한 천주성과 완전한 인간성을 지닌다고 했을 때, 일치의 주체가 하느님의 말씀, 즉 성삼위의 제 2위라고 함으로써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표현은 하느님은 천주성을 지니신 말씀, 하느님의 아들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모친이란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니신 두 본성의 일치를 보장하는 동시에 일치의 주체를 동시에 드러낸다.

 

영원으로부터 천주성을 지니는 성삼의 제 2위격인 말씀이 마리아에게서 인간성을 취했다는 위격적 일치를 드러냄으로써 위격적 일치의 결과 중 속성 교환의 원칙도 적용되어 마리아우상론을 뒤집는다. 말씀이 마리아의 품 안에서 인간성을 취했다면 속성 교환의 원칙에 따라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라 부를 수 있는 근거로 이는 바로 예수그리스도라는 인성과 신성의 합성어에서 비롯된다.

 

프란치스코교황은 2023년 1월1일 천주의 성모마리아 대축일 메시지에서 S. Agostino의 설교를 인용하여 하느님이 인간 역사에 진입하는 방식에 왜 하필 마리아였을까에 주목한다.

 

하느님이 택한 방법은 세상 진입과 역사 진입 방식이다. 이것이 방법입니다. 그리고 이 길은 필수적이며, 그분이 오셨다는 바로 그 사실만큼이나 필수적입니다. 마리아의 신성한 모성, 즉 동정녀의 모성, 결실을 맺는 동정은 우리의 자유에 대한 하느님의 최대한의 존중을 드러내는 길입니다. 우리 없이 우리를 창조하신 분께서는 우리 없이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S. Agostino, 설교 CLXIX, 13항 참조).

 

하느님이 인간 역사에 개입하실 수 있는 방법은 수없이 많다. 그럼에도 굳이 마리아를 통해 인간 역사에 개입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단적으로 우리 없이 우리를 창조하신 분께서는 우리 없이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에서 찾을 수 있다.

 

것은 그분의 자유의지에 의해 창조된 인간이,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해 모두들 창조의 완성으로 이끌기 위함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시작에 마리아의 네!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때 마리아는 인류의 표상이 된다. 그리고 네!라는 수태고지의 수락은 인간이 지닌 자유의지의 위대함을 천명한다고 할 수 있다.

 

 

 

이를 다른 측면에서 바라보기로 하자!

 

 

 

야로슬라브의 ‘표상의 성모’, 러시아 모스크바 트레차코프 미술관.

 

 

 

 

[3]마리아 신심은 교회의 의지보다 먼저 신자들의 의지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교회가 마리아신심을 권장한 것이 아니라 마리아신심은 모두 아래로부터의 영성, 신자들의 영적 끌림과 체험에서 비롯되었다. 우리는 그것을 2세기부터 그려진 성모 도상에서 찾을 수 있다. 도상 해석은 다음 두 부분의 글을 참고했다.

 

이것은 플라티테라(Plati tera ton ouranon)에 도상에 나타나는  센수스 피텔레움(Sensus fidelium 신앙감)이 무엇인가를 바라보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장긍선 예로니모 신부, 『영혼을 여는 문, ‘이콘’』 참조]

[리길재 기자, [『호기심으로 읽는 성미술』 참조]

 

<천주의 성모>라는 호칭이 붙은 것은 에페소공의회(413년)이후지만 에페소공의회 이전 2세기에 이미 ‘하늘보다 더 넓으신 분, 더 광할하신 분, 하늘을 품으신 분’이라는 의미의 도상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교회가 에페소공의회 이전 정식으로 <천주의 성모 교리>를 선포하기 전, 이미 일반인들 사이에 성모 신심이 신앙적 감수성(센수스 피피텔레움 Sensus fidelium)으로 정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세기 이후,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 칙령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은 이후 그리스도교 미술은 급속히 발달한다. 이때부터 교회는 도상마다 적합한 이름을 지어 부르기 시작했다.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상을 ‘브레포크라투사’(Η βρεφοκρατουσα-성 소피아 대성당의 천장), 한 손에 두루마리를 들고 다른 손으로 강복하시는 아기 예수를 안고 주님을 가리키고 있는 성모님의 도상을 인도자이신 성모, ‘호데게트리아’(Η Οδηγητρια-루카사도가 그린 성모자상)라 불렀다. 또 아기 예수를 가운데 두시고 두 팔을 펼친 채 기도하는 모습을 한 성모님을 ‘하늘보다 더 넓으신 분’ ‘플라티테라’(Η Πλατυτερα των Ουρανων)라 불렀다.

 

브레포크라투사와 호데게트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로서 성모님의 신원과 품위를 드러내지만 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원을 확연히 드러내는 도상이라고 할 수 있다. 플라티테라, 역시 주님과 성모님의 신원을 드러내지만, 무엇보다 하느님 뜻에 순명하는 마리아의 신앙 고백 네!-주님의 뜻이 그대로 이루어지소서!를 담고 있다. 마리아의 이 기도는 교회가 드리는 기도의 전형이다.

 

기도하시는 성모님의 도상은 초대 교회 때부터 이어온 전통적인 도상으로 ‘플라티테라’로 이후 ‘기도하는 동정녀’의 도상이 자주 등장한다. 이 도상은 성모님 혼자서만 두 팔을 위로 벌려 올리시고 기도하는 모습으로 ‘오란스’(Orans)라 불린다. 플라티테라와 오란스 도상의 공통점은 성모님께서 정면을 향해 기도하는 자세를 취하고 계시고, 그 차이는 아기 예수와 함께 있느냐의 여부다. 아기 예수가 그려진 도상을 ‘표상의 성모’라 부른다. 이는 성모님이 두 손을 모두 들고 있기에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품고 있는 형상으로, 이사야서 7장 14절에 근거한다.

 

이사야서 7장 14절의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라는 구절을 나타낸 것이다.

 

이 성경 구절에 나오는 표징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표징’, 또는 ‘표상의 성모’라고 부른다. 이는 때로는 ‘지극히 거룩하신 분 The Great Panagia’(All Holy) 또는 “당신의 자궁은 하늘도 다 담지 못할 분을 품었기에 당신은 하늘보다 광활합니다”라는 비잔틴 찬가를 근거로 “하늘보다 광활한(Platytera ton ouranon) 분” 이라고도 불리 운다. 이 형태의 이콘은 반신상으로도 그려지고, 성모님이 서 있는 형태의 전신상으로도 그려진다. 이는 동방교회에서 널리 불리던 성모찬가에서 연유한다.

 

 

"대천사 가브리엘은 찬미합니다. 기뻐하소서, 동정녀여! 이 세상의 만물의 창조자께서는 거룩한 궤이신 당신께 머무십니다. 성왕 다윗도 노래합니다. 당신은 하늘 보다 더 넓은 분(Plati tera ton ouranon)이시며, 창조주를 품으신 분이십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분 The Great Panagia’(All Holy) 또는 “당신의 자궁은 하늘도 다 담지 못할 분을 품었기에 당신은 하늘보다 광활합니다”라는 비잔틴 찬가는 “하늘보다 광활한(Platytera ton ouranon) 분” 마리아의 역설적 위치를 가리킨다. 이 신심의 전래는 신앙적 감수성(센수스 피피텔레움 Sensus fidelium)이고, 무엇보다 마리아 생애의 두 측면을 의미한다.

 

하늘보다 더 넓다는 플라티테라(Plati tera ton ouranon) 도상의 성모는 현세적으로는 <텅빈 충만>을 상징하는 도상에 해당한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바라본 대로 <가득차 있으면서 동시에 텅 비어 있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바오로 사도의 통찰처럼 마리아론은 그리스론과 일치한다. 이는 다른 말로 사랑의 역설과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코린토2, 8.9)

 

성모님의 사랑뿐 아니라 모든 이의 사랑은 고귀한 기쁨과 가장 쓰라린 고통 두 의미가 동시에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랑이 기쁨만 있다면, 혹은 사랑이 고통만 있다면 사랑이 어떠하다고 세상에 대고 할 말이 참 많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동시에 기쁨이면서 고통임을 알기에, 사랑의 역설 앞에서 마리아처럼 모든 일을 마음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길 수밖에 없다고 할 수 있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19)

 

그런 맥락에서 교회가 성모께 ‘상경지례’를 바치는 이유는 성모의 칠고칠락에서 찾을 수 있다.

 

[4] 천주의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의 기초는 무엇보다 성모님의 삶 성모칠고와 성모칠락에서 찾을 수 있다.

 

이는 일찍이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바라본 대로 당신은 <가득차 있으면서 동시에 텅 비어 있다>는 표현에서 압축적으로 제시된다. 시메온이 예언처럼 당신은 예리한 칼날에 찔리듯 아플 것이지만 엘리사벳의 찬송처럼 당신은 이 세상 여인 중에 가장 복되시기도 하다는 것이다.

 

성모 마리아가 겪으신 7가지 고통은 ① 시므온의 예언(루가2,35) ② 이집트로의 피난(마태2,13-18)③ 예수를 성전에서 잃음(루가2,41-50) ④ 예수 십자가를 짊(루가23,26-32) ⑤ 예수 십자가에서 죽음(루가23,44-46) ⑥ 예수를 십자가에서 내림(루가23,53) ⑦ 예수 무덤에 묻힘(루가23,53)

 

성모 마리아의 칠락(七樂)은 ’ ①천주의 모친으로 간선된 것을 대천사 가브리엘이 전해줄 때 받으신 기쁨 ②엘리사벳을 방문하여 천주의 모친으로 인정받았을 때 느끼신 기쁨. ③동정을 잃지 않고, 또 조금의 아픔도 겪지 않고 아들 예수를 낳아 모실 때 맛 본 무상의 행복. ④구세주탄생을 찬미한 목동들의 방문과 아기예수를 예배하기 위해서 세 동방박사가 찾아 왔을 때 느끼신 기쁨. ⑤ 삼일간을 애통하게 찾아다니던 사랑하는 아들을 성전에서 찾아 만났을 때 성모님의 기쁨. ⑥죽음에서 부활한 아들을 보았을 때의 기쁨과 성령강림을 제자들과 함께 누린 교회의 시작을 문을 연 기쁨, ⑦성모님이 충만한 영광중에 하늘에 올림을 받고 하느님의 어머니로서 면류관을 받으셨을 때의 기쁨.

 

성모칠고와 칠락을 묵상해보면 아름다움이 아름다움만큼의 아름다움을 요구하듯, 사랑은 사랑만큼의 사랑을 요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사랑은 한없는 기쁨과 비할 데 없는 고통이라는 무늬로 짠 옷을 입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하는 이들에게 <어제도 사랑했고, 오늘도 사랑하고, 내일도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발설하지 못하고 삼키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천주의 어머니 마리아에 대한 상경지례의 이유를 조규만 바실리오 주교는 『마리아론』에서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첫째, 많은 사람들이 성모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둘째, 예수님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샛째, 성지 중에 성지이기 때문이다.

넷째, 모범적인 신앙인의 표상이기 때문이다.

다섯째,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요한사도를 통해 원하셨기 때문이다.

 

이 다섯가지 성모신심의 신학적 근거의 핵심은 신자들의 신앙감수성인, 센수스 피텔레움(Sensus fidelium)에서 찾는다. 신앙감수성은 다른 말로 현상을 재맥락화 혹은 재해석 할 수 있는 능력, 영안을 의미한다. 신앙감수성은 신학적 근거가 충분하다. 아무리 믿으라고 해도 믿을 수 없고, 아무리 믿지 말라고 해도 믿지 않을 수 없는 근거는 바로 신앙감수성에 바탕하기 때문이다.

 

마리아의 생 자체는 칠고칠락에서 보듯, 현실적, 육체의 시선, 지각으로 바라본다면 결코 기쁨과 즐거움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영안으로 본다면 “하늘보다 광활한(Platytera ton ouranon) 분”이자  "모든 축복의 전구자, 매개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느님보다 커지지 않고는 하느님의 축복을 온전히 담아 전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찬가들이 불려졌을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마리아를 "성지 중에 성지"라고 일컫는 것이자, "천주의 성모"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마리아를 천주의 성모라 부를 수 있는 궁극적인 이유는 일찌기 카스퍼주기경의 제언처럼 <사람아 너의 품위를 생각하라!>에 있을 것이다.  

 

글을 마무리하며 복음을 다시 읽어 본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목자들은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 대로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갔다. 여드레가 차서 아기에게 할례를 베풀게되자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그것은 아기가 잉태되기 전에 천사가 알려준 이름이었다.

 

 

 

 

 

 

 

 

 

 

 

 

 

 

 

 

표상의 성모

 

 

터키 이스탄불, 코라 구세주 수도원, 표상의 성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