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브리엘천사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2,14)
-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를 중심으로
1.
메리크리스마스! 라는 지극히 단순하고 동화적인 인사에는 인류의 오랜 기다림 끝에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기쁨>이 모든 이에게 무의식적으로 관류하고 있는 듯하다.
성탄이 싼타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전의 날들과는 다른 그 무언가 전 지구를 들뜨게 하고, 설레게하는 그 어떤 시간 속에 안겨 있는 것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성탄은 아이러니 하게도 가장 예수적이지 않은 곳에서 더 기다리는 날이 되었다. 일종의 마게팅전략이 되어버린 장식적인 트리의 시대에,누군가에게 소외감, 박탈감, 결핍감을 더 확인시켜주는 슬픔일 수도 있는 시간앞에서, 어떻게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2,14)를 바라볼 수 있는지 생각해 본다.
이는 <성탄을 축하합니다!>라는 인사는 과연 어떤 의미로 건네지는 것일까?를 자문하는 것이다. 이 물음은 어쩌면 흥을 깨는 주제이자, 기쁨과는 좀 거리가 있는 무거운 주제라고 할 수 있다. 하늘과 땅이 동시에 기뻐하는 성탄의 축제 앞에서 이 땅의 현실을 염두한 것으로,
무엇보다 성탄은 어떤 특정한 날이 아니라, 어떤 상태, 모든 날이 성탄이어야 할 것이라는 의미에서, 무엇보다 모든 이들의 성탄이 되어야 할 것이라는 의미에서, 성탄은 원심력과 구심력을 동시에 지닌 축제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이에게 구원의 문이 활짤 열렸다는 것은 기쁨의 원심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선물로 주어진 그 은총을 모두가 받아 누리는 것은 아니기에 그 기쁨은 구심력이 작용하는 이중의 축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언뜻 미완의 기쁨을 온전한 축제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궁극적으로 메시아의 도래는 창조의 완성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그리고 그 완성은 인간의 힘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완전히 기쁘면서 동시에 완전히 기쁘다고 말할 수 없는 성탄 축제를 보내면서 <성탄을 축하합니다!>라는 인사가 내포하고 있는 몇 가지 단상을 적어본다.
[ICON] The tree of Iesse.1660-1670, Tret’Jakov Gallery, Moscow
2.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라고 전하는 요한1,1-5.9-14을 읽어본다.
1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2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3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4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5⒜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9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10⒝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11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12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13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14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라고 전하는 요한1,1-5.9-14과 <오늘 너희를 위하여 구원자가 태어나셨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2,1-14)의 인사를 연결하여 하느님 자신이 아기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강생의 신비를 어떻게 매순간 바라볼 수 있을까?
이것은 앞에서 전제하듯, <성탄을 축하합니다!>라는 의미가 어떤 시기가 아니라 매 순간 우리 마음상태라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매 순간 성탄이 우리 마음의 상태라는 것은 신의 현존은 우리의 가장 순수한 상태에서 체험되는 사건이고, 이것은 순전히 선물로 주어진 은총이기에 그렇다.
이는 요한1,1-5.9-14에서 14절의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는 문장의 아름다움은 어디에서 연유되는가?를 묻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그것은 신의 존재양식의 아름다움이자 그 아름다움에서 연유된 사람의 아름다움을 또한 의미한다고 할 때, 그 아름다움이란 대체 어디에서 연유된 것일까?를 질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군가는 이 세상의 사물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사물을 고르라한다면 그것은 <구유와 십자가>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때의 아름다움이란 형상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형상이 지닌 본질적인 아름다움, 치장과 환상을 걷어낸 순수형질의 아름다움, 즉 사랑의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강생의 신비는 예수님의 공생활 전반 그리고 십자가신학을 거쳐 부활신앙을 낳는 모태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근원적인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위대한 존재가 그 위대함을 내려놓을 수 있고, 전능한 존재가 그 전능을 내려놓을 수 있는 그 여유가 아름다움의 실체라고 할 수 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라고 전하는14절이 하느님이자 인간인 그분의 정체성이자 그것은 바로 그분의 모상으로 창조된 우리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그리고 본질적인 정체성은 그렇기에 동시에 아름답다. 본질적인 정체성이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유아독존하는 군계일학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그 아름다움은 만날 수 없는 데 만나고 하나가 될 수 없는 데 하나일 수 있는 빛과 생명이 어우러진데서 이루어진 화음이기에 아름답다고 할 수 있다.
3.
14절이 지닌 신의 정체성과 인간의 정체성이 어떻게 만나 본질적인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는 것일까?를 주절과 종속절로 나누고 그것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해 보겠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우리 가운데 사셨다.(14절)
여기서,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가 주절이라면, <우리 가운데 사셨다>는 종속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주절과 종속절의 관계는 독립변수가 아니라 종속 변수다. 우리가 보내는 성탄축제의 이름은 <나 홀로 집에>가 아니라는 점이다.
⒜말씀이,
그리스도 신앙은 <말씀>이 우리 안에 어떻게 정립되고 있는지에 따라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는 의미를 구체적으로 바라보고, 살아낼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근본적인 기쁨의 원천이고, 이 기쁨은 훼손되기는 하지만 사라지지는 않는 불변의 내재성이다. 실재가 비실재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요셉 라팅거 추기경(「오늘에 있어서의 신에 대한 신앙고백」)은 “신에 대한 그리스도적 신앙은 무엇보다도 단순한 물질과는 다른 말씀의 우위를 말하는 결단”이라고 전한다.
이것은 말씀과 물질의 관계를 정립하는 것으로 말씀은 물질과 병치되거나 또는 물질에 끌려가는 그런 위상관계를 논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은 물질의 폄하가 아니라 물질의 제자리 찾아주기에 해당한다. 이는 <구유나 십자가>의 의미를 사랑의 이름으로 바라보게 한다고 할 수 있다. 물질과 자본을 우상숭배하는 시대에 <말씀의 우위를 말하는 결단>이란 단순히 말씀의 존재우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서 전반을 통하여 유일하게 신의 존재양식을 추론할 수 있는 것은 말씀이다. 신의 있음과 없음을 말할 수 있는 그 근거, 사람이 신의 존재를 사유할 수 있는 근거는 오직 말씀에서 비롯된다. 말씀은 존재함이다. 그 말씀은 사람이 신의 존재 방식을 추론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이자, 신의 현존을 체험하는 가장 결정적 순간의 열림이기도 하다. 이 존재방식이 창조의 근원으로, 그 창조의 근원은 빛과 생명으로 현존한다. 또한 말씀은 신의 존재양식일 뿐 아니라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창조근원에 해당한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이 종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태초>에 <한처음>에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종말과 태초가 하나라는 사실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물질의 위치와 근원를 말해주는 말씀의 우위란 사물의 이치를 깨달아갈수록 선험적으로 내재하고 있는 말씀의 운위성, 창조의 근원을 바라볼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말씀의 현존인 빛과 생명에 관한 것이다. 진리란 존재를 증명할 필요가 없으므로 반대쌍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빛은 어둠, 생명은 죽음, 죄는 사랑이라는 반대쌍으로 우리 앞에 놓인다. 마치 빛이나 생명, 사랑이 진리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상황에 처한 것처럼 말이다.
이는 가장 좋은 것을 인간에게 건네기 위해 어둠까지 불사하는 창조의 원리인 자유의지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죄가 사랑의 결핍이라면, 어둠은 빛의 결핍이다. 어둠은 죄와 마찬가지로 어떤 특별한 존재양식이 없다. 어둠, 죄, 죽음은 함께 다니는 블랙트리오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성탄을 축하합니다> 라는 인사는 <어둠, 죄, 죽음에서 해방을 축하합니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빛을 바라보기 위해 어둠에 대해 조금 더 생각을 해 보면,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5절)
그런데 그 빛이 어둠을 비추고 있는데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한다? 빛은 <보시니 참 좋았다>는 충만의 원리라면 어둠을 결핍의 원리다. 결핍의 원리로는 충만의 원리를 결코 깨달을 수 없다.
토를라이프 보만은 『히브리적 사유와 그리스도 사유의 비교』에서 빛과 어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한다.
“빛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는 어둠도 있다. 그러나 어두움은 빛의 무[無]이기 때문에 그것은 빛과는 전혀 다른 것이면서 빛의 존재에 관여한다”
빛의 없음이면서 빛에 관여한다는 이 어둠의 신비, 어둠에서 벗어나는 데는 어떤 단계가 있을 것이다. 어둠을 숨을 수 없다는 인식이다. 그 다음 단계는 설령 숨길 수 있는 능력이 있더라도 숨기고 싶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여기서 숨기고 싶다는 것은 자기환상이라고 할 수 있다. 우상 중에 가장 큰 우상은 자신이 만든 에고라는 환상이라고 할 수 있다.
구유위에 누워있는 한 아기와 십자가의 예수는 숨길 것이 없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표징에 해당한다. 숨길 것이 없다는 것은 두려움이 없다는 말일 것이다. 두려움이 없다는 것은 완전한 사랑을 의미할 것이다. 완전한 사랑만 두려움이 없다.
그러기에 성탄의 기쁨은 본질적인 것을 추구하는 기쁨의 본질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 기쁨은 진리의 열매라고 말할 수 있다. 진리는 시간으로 말하자면 모든 것을 밝히 볼 수 있는 한낮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에 대한 환상, 특히 자기 환상이라는 어둠이 우리 자신안에서 사라진 상태는 평화와 기쁨의 상태로 경험된다. 평화와 기쁨 속에서만 우리는 환상없는 자신과 교감하고 말씀인 하느님과 교감할 수 있는 빛의 상태에 자신을 두게 된다. 어둠의 상태에서는 신을 모르는 것만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어둠은 무명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다시 여기서 <성탄을 축하합니다> 라는 인사는 <온전히 빛으로 창조된 당신을 축하합니다!> 라는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이 되시어
말씀이 사람이 되었다, 여기서 다시 “신에 대한 그리스도적 신앙은 무엇보다도 단순한 물질과는 다른 말씀의 우위를 말하는 결단”을 일면적으로만 생각해보면, 우리는 한없이 기쁜 성탄을 보내야 마땅하다. 이는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이기에 말씀이 지닌 무한한 확장의지는 실은 말씀의 평등성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며, 그 확장의지가 바로 기쁨의 원천, 원심력이고, 인간의 품위를 논할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하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는 빛과 생명과 사랑이 사람의 존재양식이라는 것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인간에 대한 두 가지 사실을 제시한다고 볼 수 있다.
말씀이신 그분이 인간 역사에 인간과 같이 육신을 취하셨다는 것은 “여기서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창세기1, 25-26)”에서 보듯, 하느님과 인간은 종적인 관계, 모상의 근원을 보게한다. 하느님의 거룩함을 인간이 물려받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인간의 품위가 어떤 경지까지 이를 수 있는지에 대한 예견이라고 할 수 있다.
칼러너는 (「강생의 신비, 그 신학적 소고」)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었다는 즉 인성을 취하셨다는 것은 창조주와 모든 피조물의 관계를 “직접 유한한 것의 일부분이 되심으로 유한한 것 전체가 무한으로 넘어갈 수 있는 관문을 만들기 위해 아니 자기 자신을 이것의 출구이자 문으로 만들기 위이해서이며 인간의 실존이 바로 하느님 자신이 되기 위해서이다"라고 전한다.
그런데, 10절과 11절을 보면, 인간은 스스로 만든 환상을 품위라고 추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인간의 자유의지는 환상과 품위를 놓고 빛과 다툰다는 사실 앞에 서게된다. 인간이 생각하는 품위와 말씀의 품위가 다르다는 사실이 세상이 유포한 인간의 또 다른 환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중심엔 물질이 이 세상을 끌고가는 힘이라고 선택하기에 물질의 왜곡까지 가세한다.
10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11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여기서, 인간은 인간이 인정하든 안하든 그분의 창조물인데 자기의 근원 자체를 부정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것은 자기 환상을 공고히 하는 어떤 위치에 자신을 귀속시키고 싶다는 결핍의지가 작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품위유지의 도구가 자본주의가 권하는 자본의 위력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이름 앞에 붙은 어떤 사회적 위치를 유지하거나 지키고 싶어한다. 그런데 그 모든 사회적 위치를 좌우하는 것이 자본이라는 힘이다. 자본을 유일한 힘을로 간주할 때 사물은 본래의 위치를 상실한다.
여기서 <성탄을 축하합니다>라는 인사는 <하느님만으로, 예수님만으로, 성령만으로, 삼위일체만으로 인간의 품위를 유지할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라는 의미가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가운데 사셨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우리 가운데 사셨다.(14절) 종속절에 이르러 우리의 기쁨에 대한 깊은 성찰을 요구한다. 기쁨의 원심력에서 기쁨의 구심력으로 우리의 현재 상태를 가감없이 바라보게 된다고 할 수 있다. 빛 앞에 서 있는 우리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
(개인적으로 성탄 묵상은 그 어느 시기보다 어렵다. 부활 시기보다 성탄 시기에 자비의 기도를 더 많이 바쳤다고 할 수 있다. 나 자신이 교묘하게 은폐하고 있는 심연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빛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아 성탄 고백성사도 세 번이나 봤다. 결론은 모두가 내탓이었다.)
인간이 어떤 위치를 갖고 싶어한다는 것은 함께가 아니라 홀로를 지향하는 단독의지에서 파생한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사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본래적인 타자성을 요구한다고 할 수 있다. 낙원이라는 구조가 함께라는 구조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함께는 어떤 게토화된 함께가 아니라 그 게토화를 무화시킨 함께다. 이것은 윤리적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근원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타자성은 선택 상황이 아니다. 이것은 마치 인간의 자유의지와 상충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 타자성에 관한 요구는 <삼위일체 하느님>이라는 신의 관계성에서 찾을 수 있다. 성탄의 핵심 키워드가 타자성을 담지하고 있고, 종적인 그분과의 관계를 완성하는 것은 횡적인 테제인 타자성이라고 할 수 있다. 사막의 은수자라는 말이 성립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삼라만상이 인간에게는 타자라고 할 수 있다.
신이 인간역사에 개입할 때 마리아를 통하고 요셉의 보호를 필요로하는 신이었다는 것에서 그것을 알 수 있다. <말씀>은 혼자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를 함유한다. 들을 사람이 없다면 말한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냥 신은 있다,가 아니다. 신에게 인간의 찬미와 감사가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인간이 없는 신은 생각할 수 없다. 하이데거는 이를 <인간과 신은 필연적으로 서로에게 내 맡겨진 존재>라고 규정하기도 한다. 홀로 존재하는 신이 아니라 이제 우리 가운데 존재하는 하느님이 되셨다! 이것이 성탄 축제를 마냥 표피적인 축제로 만들 수 없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우리 가운데는 인간과 동료인간과의 횡적인 관계에서 그분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 가운데 그분이 있다는 것이다.
12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13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그분을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이라는 표현에서 관계론의 핵심은 바로 나와 신의 관계는 나와 너의 관계로 치환할 것을 요구한다. 80억 인구가 예외없이 그분의 창조물 이기에, 그 창조물들의 생존을 담보하는 것은 80억 인구가 서로에게 위임된 존재라는 존재일치성을 의미한다. 용서 혹은 자비라는 개념은 단적으로 공존의 존재라는 사실을 염두하고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용서와 자비는 하느님을 통해서 행해지지만 동료인간과의 관계를 복원시킨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구원자가 태어나셨다.>라고 전하는 루카2,1-14의 구원의 첫 번째, 메신저인 목자들을 통해 <우리 가운데 사셨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다음 주 묵상 주제지만 조금 살펴보기로 한다)
그 고장에는 들에 살면서 밤에도 양 떼를 지키는 목자들이 있었다.(8절)
이를 프란치스코 교황은 <밤의 거룩한 질량과 주님 출생의 엄숙함>에서 “그들은 원하는 대로 살 수 없었고, 그들이 돌보는 양의 필요에 따라 조정되고, 무엇보다 가난하고, 무리에 의존하고, 전체의 운행, 자연의 리듬에 따라 살아내야 하는, 인간 존엄보다는 최소에 생존에 맡겨져 있는 사람들”이라고 목자들을 아웃사이더의 표상으로 규정한다.
그렇다면, 최소의 생존의 상황 속에 놓여 있던 목자들이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에 대한 최초의 계시, 그것을 목격할 수 있었던 것은 <성틴을 축하합니다>와 어떤 관계에 놓이는가?
가난한 이들, 소외된 이들, 중심부 담론에서 아웃사이더가 된 이들이 구약에서 모세의 출현을 필연으로 만들었듯, 그분의 강생의 신비는 바로 중심부담론에서 제외된 아웃사이더들에 의해 그 필연성을 담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땅의 울부짖음이 그분을 이 땅으로 오게 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땅이 그분의 창조의 목적에 맞는 그런 유토피아였다면 그분이 왜 이 땅에 사람의 모습으로 오셔야 하겠는가?
여기서 <사셨다>는 그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더욱이 그분이 우리 안에서 <말씀>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물질과는 다른 말씀의 우위성을 선택하는 주동적인 행위의 궁극적인 지점은 말씀으로 타자를 <살게 한다>는 사동적 의미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네가 말씀으로 살아 네 이웃 역시 말씀으로 살게하라는 것. 누군가는 대속의 짊을 함께 지라는-케레네사람 시몬이 되라는 요청이라고 할 수 있다.
복음묵상 [우리 가운데 계시는 하느님-박용욱 미카엘 신부]는 성탄 시기는 싼타클로스가 되어버린 하느님을 동화적으로 환호하는 시기가 아니라 ‘모든 사람’안에 하느님의 빛을 깃들게 하는 시기라고 전하고 있다.
“성탄 신비를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 어디 계시는지 비춰주십니다. 하느님은 우리 누추한 일상 안에 계시고, 자주 흔들리고 넘어지는 우리 안에 계십니다. 하느님은 가난한 이들 안에, 고통을 대물림하는 이들 안에, 죽음의 절망 앞에 선 이들 안에 계십니다."
모든 이에게 빛이 되는 하느님이시기에, 우리는 그 빛을 생명의 빛으로 감지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다가갈 수밖에 없다. 내가 빛이라면 어둠 곁으로 다가가는 것이 당연하고 필연적이다. 다가가지 못했다면 내가 아직 말씀을 입고 빛이 되지 못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우리가 완성해야 하는 성탄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 빛이 되어 다가가기 위해,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를 우리 안에 진정한 기쁨으로 내재하게 하는 일이 <우리 가운데 계셨다>를 가능하게 한다고 할 수 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는 <글로리아 인 엑첼시스 데오>가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사셨다>는 것은 < 오! 베들레헴 작은 고을 너 아직 잠들었는냐>를 묻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가운데 그분이 살도록 하는 일, 그것이 <성탄을 축하합니다!> 라는 인사의 제의적 성격일 것이다. 우리는 이미 누군가에게 빛(별은 별과의 거리가 있듯)이므로, 이미 살고 있는 분을 진정으로 살게 하는 일!에 오늘을 봉헌합니다, 라는 제헌의 의미가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14절 후반부는 그것을 영광이라고 밝히고 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14절)
14절은 공생활, 십자가죽음, 부활을 염두한 복음사가의 표현이 <영광>이라는 말로 수렴된다. 인간은 궁극적으로 십자가에 머무르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극복하는 영원한 생명이라고 할 수 있다. 말씀안에, 즉 성탄 안에 예수님의 전생애가 이미 포괄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성탄을 축하합니다!>라는 의미가 내포하고 있는 중요한 키워드가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14절)라는 한 문장 안에 오롯이 담겨 있다고 할수 있다. 이 문장은 모든 창조의 근원이며 십자가와 부활과 연결되어 구원으로 완성될 것임을 의미한다. 그것이 말씀으로 창조된 창조의 궁극적인 아름다움일 것이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세계가 그리스도의 가치관과는 무관하고 판이하게 다르게 우리 눈에 비칠지라도 인류가, 우주가 아직도 존재한다는 그 자체가 이미 그리스도라는 오메가 포인트를 향해 진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역사는, 인류가 보편적으로 원하는 인간상태를 다각도로 인간을 극단의 상황속에 처하게 하여 그 보고서를 제출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은 인간 스스로 인간을 완벽한 기쁨 속에 머물게 할 수 없다는 보고서의 다름 아니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가 구원을 원하고, 행복을 원하고, 기쁨을 원하고, 사랑을 원하고, 평화를 원하고, 영원불멸을 원하고 있다는 그 자체가, 가장 좋은 것, 가장 아름다운 것, 가장 거룩한 것을 원한다는 그 자체가, <성탄을 축하합니다!>라는 인사에 모두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미래의 어느 시점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갈망이 이미 선취된 것임을 바라볼 때,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2,14)라는 천사의 인사는 이 세상을 끌어가는 궁극적인 축복임을 받아안을 수 있을 것이다.
글을 마무리하며, 14절을 다시 읽어본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1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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