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은 아름다운 만큼의 아름다움을 요구한다
-La beauté exige autant de beauté que de beauté.
1. 당신은 아름다움을 위해 당신 자신을 넘어서야 한다
조용미 시인의 「당신의 아름다움」을 읽어본다.
당신은 늘 빛을 등지고 있다/ 내가 만든 구도이다/ 당신의 아름다움은 객관적이어야 한다/ 당신은 당신 자신을 넘어서야 한다 더불어/ 당신의 아름다움은/윤리적이어야 한다/ 당신은 최종적으로 아름다워야 한다/ 당신의 아름다움은/ 빈틈없어야 한다/ 당신의 아름다움은/ 고독한 사건이 되어야 한다/ 당신의 아름다움은 나로부터 발생한다/ 당신의 아름다움은 내게 늘/가장 큰 시련이다/ 당신 뒤에는 빛이 있다/ 당신은 빛을 조금 가리고 있다
조용미 시인의 「당신의 아름다움」은, 참 아름다운 건물이다. 참 아름다운 나무다. 참 아름다운 풍경이다, 참 아름다운 글이다, 참 아름다운 사람이다, 라고 할 때, 그 아름다움은 나의 주관적인 내면 풍경의 투사인가? 아님 모두에게도 아름다움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만든다.
조용미 시인이 「당신의 아름다움」에서 말하는 아름다움은 일반적인 아름다움은 아니다. 이 시는 (당신의 아름다움은) 내게 늘/가장 큰 시련이다,로 모아진다. 아름다움이 어떻게 그 아름다움을 목격한 화자에게 시련일 수 있는가?
시인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은 나로부터 시작되지만, 나의 주관적인 투사에 멈추지 않고, 누가보아도 아름답다고 할 객관적이고 나아가 윤리적이기까지 한 아름다움의 최종적인 지점까지를 주문하기 때문일 것이다. 문제는 그런 아름다움의 조건이 채워지기 위해선 나로부터 출발한 아름다움이지만, 당신 역시 당신 자신을 넘어서야한다는 데 있다. 어쩐지 이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의 순교로 들리기까지 한다.
나는 당신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데, 그 아름다움이 타자에게도 아름다울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당신은 당신 자신을 넘어서야 하고, 그 아름다움은 윤리적이기까지 해야 한다는 것, 화자도 대상도 모두 아름다워야 한다는 것에 이르러 이 아름다움은 고독의 다른 이름으로 들리기도 한다.
당신은 계속 아름다운 사람으로 남아야 하므로, 나는 당신의 아름다움을 지켜줘야 한다. 무엇을 지켜준다는 것은 시련이다. 그 대상의 아름다움이 크면 클수록 그 시련의 강도도 커진다. 아름답다는 것은 지켜주는지도, 지키는지도 모르는 <고독> 속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 고독이란 화자의 고독이자 또한 대상의 고독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당신의 아름다움은 아니러니하게도 완전한 빛일 수가 없다. 시련과 고독을 담보한 아름다움이므로, 당신은 늘 빛을 등지고 있고, 당신 뒤에는 후광처럼 빛이 있지만, 당신은 빛을 조금 가리고 있다. 당신은 늘 빛과 동행하지만, 완전히 빛일 수 없다. 그런데(혹은 그러므로) 당신은 아름답다. 이 아름다움은 무엇인가?
2. 깊은 고독은 숭고하지만 두려운 방식으로 그러하다(칸트)
칸트는 아름답다고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숭고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 숭고미가 만들어지기 까지 거쳐야 하는 두려움을 ‘멜랑콜리melancholy’라고 바라본다. 가장 지고한 아름다움이 인간의 가장 깊은 심연에서 만들어 진다는 역설이 칸트가 바라본 숭고미의 탄생 비의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다음 글의 연장선에서 쓴 글이다.
[ 사랑, 현존의 부재에서 부재의 현존으로]
['있음'의 근원, ‘현존’이란 이름의 ‘4월의 크리스마스’]
칸트는 『판단력 비판』, 『고찰』,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에서 ‘숭고(τὸὕψος/sublime/Erhabene)’를 나르시즘, 멜랑콜리, 고독과 연결하고 있다. 모든 멜랑콜리한 존재들은 자신의 심연에서 지혜를 얻는다고 본 것이다.
칸트는 『고찰』에서 “깊은 고독은 숭고하지만 두려운 방식으로 그러하다.”라고 말한다. 두려우리만치 깊은 고독은 숭고한 대상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도리어 숭고한 ‘멜랑콜리melancholy’의 핵심에 고독이 자리 잡고 있다고 바라본 것이다. 이는 그 주체가 나르시시즘에 잠기지 않으면 이를 수 없다는 점에서 멜랑콜리는 나르시스트의 특징적 성격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나르시스트의 고독은 칸트적 멜랑콜리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칸트에게 ‘숭고’는 ‘나르시스트-멜랑콜리-고독’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①멜랑콜리한 우울한 기분을 가진 사람은 자기 자신에 관계하는 모든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며, 모든 곳에서 우울의 원인을 발견하고, 다혈질인 사람이 성공의 희망으로부터 시작하는 데 반해서, 그는 무엇보다도 어려움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래서 다혈질인 사람이 단지 표면적인 것만을 생각하는 데 반해서, 감상적 우울질을 가진 사람은 자기 내면의 심연을 침잠한다. 그 심연에는 어떤 힘이 있다.
칸트는 아름다움을 인간 본성과 연관되어 있고, 숭고는 멜랑콜리 기질을 가진 사람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멜랑콜리는 고대 의학에 기초를 둔 해부학적 관점에서 본 것이다. 칸트는 우리가 단지 영혼에만 어떤 개별자의 기질은 종속시킬 수 없다는 점에 착안한다. 또한 인간의 신체적인 측면을 신비스럽게도 영혼과 공동 작용 원인으로서 가질 수도 있다는 점을 주목했다. 인간을 파악하는 하나의 방법인 기질은 영혼에만 귀속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과 육체 어느 하나로 환원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으로 바라보기에 생명은 그 자체로 “신비스럽다”고 할 수 있다.
칸트의 저서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멜랑콜리는 ‘자기중심성’ 즉 ‘나르시즘’에 기반한다. 멜랑콜리는 자기중심적 인간에게서 주로 나타난다. 그에게 자신과 매개되지 않는 모든 것은 무의미하며 공허한 타자로 남는다. 물론 여기에서 ‘나’란 생각하는 주체, 이성적 주체를 뜻할 수도 있고, 한갓 주관적인 개체를 뜻할 수도 있다. 이 멜랑콜리는 미학적으로 예민한 감수성을 발현시키기도 하고 병리적인 우울증을 유발하기도 한다. 어떤 경우든 멜랑콜리는 ‘나’가 세계의 중심에 있으며, 모든 것을 ‘나’로 환원시키고 수렴시키는 나르시스트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②악덕과 도덕적 위반 자체도 종종 숭고함이나 아름다움의 몇몇 특징들을 이끌어낸다. 이것을 이성으로써 증명할 수는 없겠지만, 그런 것들이 적어도 우리의 감각적인(sinnlich) 감정에서 현상하는 것처럼 그렇다. 강건한 종류의 모든 정념은 ‘심미적-숭고’인데, 예를 들면 분노, 심지어 절망이 그것이다.
칸트는 나르시시즘의 멜랑콜리한 정념을 숭고와 연결짓는 데 그의 주저 『판단력 비판』에서 반복적으로 제시된다. 멜랑콜리의 핵심에는 고대 의학의 연장선에서 쓸개로 상징되는 분노(절망의 다른 표현)의 정념이 놓여 있으며, 그것은 심미적으로 볼 때, 멜랑콜리의 숭고성을 주조한다고 보았다.
③대담하게 높이 솟아올라 있는 위협적인 절벽, 번개와 우뢰를 몰고 다가오는 하늘 높이 피어있는 먹구름,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화산, 폐허를 남기고 지나가는 태풍, 파도가 치솟는 끝없는 대양, 힘차게 쏟아져 내리는 폭포 같은 것들은 그것들이 지니는 위력과 비교할 때 우리의 저항력은 무의미하고 사소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러나 우리가 안전한 곳에 있기만 하다면 그 광경은 두려우면 두려울수록 더욱 우리의 마음을 매혹한다.
자연의 절대적인 세계의 크기는 연약한 인간에게 가공할만한 두려움의 대상이다. 자기를 위협하는 압도적인 대상은 자기보존 본능을 두려움이란 형태로 드러낸다. 절대적이고 무한한 크기와 그런 힘에 압도당한 상태는 두렵지만 동시에 ‘매혹적’이다. “두려우면 두려울수록” 매혹의 강도가 더욱 커진다는 것에서 멜랑콜리는 심연에서 솟구치게 된다.
④우리가 이러한 대상들을 기꺼이 숭고하다고 부르는 것은 그 대상들이 정신력을 일상적인 범용 이상으로 고양시켜 주며 또 우리의 내면에 전혀 다른 종류의 저항능력이 있어서 그러한 저항능력이 우리에게 자연의 외관상의 절대적인 힘에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여기서 릴케의 시에서 ‘장미’로 상징된 연약한 인간이 어떻게 거대한 세계 앞에서 자기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지 그 단초가 제공된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자연 앞에서 인간은 일단 그 스케일에 압도당한다. 그런 자연의 힘은 연약한 인간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나 ‘상대적인 크기에 유한한 위력’을 지닌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파악하게 되면서 이를 극복한다. 절대적인 크기의 무한한 힘은 자연에는 그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무한과 절대를 ‘사유’할 수 있는 인간의 ‘이성’은 자연을 넘어서는 초현상계에 접근할 수 있다. 여기서 사유할 수 있는 이성만이 멜랑콜리의 병리적 현상으로 우울에 침잠되지 않고 자신을 들어올리는 숭고미를 드러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런 숭고감정의 반전 메카니즘은 광적인 멜랑콜리의 메카니즘과 동일하다. 둘 모두 절망과 두려움에서 그것을 극복한 자기고양의 감정이다.
이렇듯, 칸트의 해석에 따르면 멜랑콜리는 자기의식이 과도하게 작동해서 생겨나지만,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이성을 통해 그 두려움을 극복한다. 그는 자신보다 크고 뛰어나고 강한 타자를 만나 어떤 방식으로든 그것을 동화시키는 자기고양(自己高揚)을 시도한다. 그리고 이런 자기고양․자기상승의 희열이 드높이 치솟는 숭고(崇高)한 감정을 일으킨다.
이와 같이 칸트의 멜랑콜리는 숭고한 멜랑콜리이고 그것의 정체는 이성을 통한 자기고양의 감정이다. 이런 멜랑콜리는 숭고하지만 그러나 고독하다. 왜냐하면 숭고한 멜랑콜리는 결국 자기중심적, 자기 심연으로 침잠하는 나르시스트의 고유한 감정으로 귀착되기 때문이다. 칸트는 『고찰』에서 “깊은 고독은 숭고하지만 두려운 방식으로 그러하다.” 라고 말한다. 두려우리만치 깊은 고독은 숭고한 대상 가운데 하나만이 아니다. 도리어 숭고한 멜랑콜리의 핵심부에 고독이 자리 잡고 있다. 나르시스트의 고독은 칸트적 멜랑콜리의 본질이다.
3.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마태오 3,1-12을 읽어 본다.
1 그 무렵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 유다 광야에서 이렇게 선포하였다. 2Ⓐ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3 요한은 예언자가 말한 바로 그 사람이다. 이사야는 이렇게 말하였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4 요한은 낙타 털로 된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다. 그의 음식은 메뚜기와 들꿀이었다. 5 그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요르단 부근 지방의 모든 사람이 그에게 나아가, 6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7 그러나 요한은 많은 바리사이와 사두가이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8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9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고 말할 생각일랑 하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 10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 11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12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
묵상을 어떻게 하느냐고 묻는 젊은 친구들에게------------------
묵상은 무엇인가? 묵상은 기억이 아니라 망각으로부터 시작된다. <모른다>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동안 수없이 들었던 말도 오늘 처음 듣는 것처럼 마음을 백지상태로 만드는 것으로부터 묵상은 시작된다. 마음을 얼마나 비웠는지가 묵상의 성패를 가늠한다고 할 수 있다. 묵상의 성패란 말씀이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냐, 내가 알고 있는 성서지식을 고정시키는 것이냐를 말한다. 이것은 자신의 신앙이 어떤 매너리즘에 빠져있는 것인지, 아닌지 성찰해보면 알 수 있다. 묵상은 처음 걸음마를 하는 아이처럼 성서의 숲으로 들어가는 것과 비슷하다. 묵상의 그 다음 단계는 어떤 문장에 머뭇거리며 멈추게 되는 과정을 경험한다. 이 세상에서 그의 사회적 위치나 신분이 무엇이든 하느님 말씀을 듣게된 이들은 공통적으로 철부지 어린아이에 불과하다. 오직 철부지 아이의 마음을 깨달음으로 이끄는 것은 성령이다. 머뭇거리며 옷자락을 붙잡는 거 같은 희미한 어떤 느낌, 멈춘 문장이나 어휘 하나가 묵상의 볼텍스(소용돌이)라 할 수 있다. 멈춘 문장이나 어휘를 천천히, 수없이 반복해 읽고 쓰다보면, 막연한 어떤 실재가 느껴진다. 크리스마스 트리가 점화되듯, 환해진다. 이를 흔히 현존체험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씀은 본인의 삶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나와 그분, 나와 이웃이 왜 그동안 분리를 겪었는지, 자주 영적 기쁨이나 삶에 대한 열정을 잃었는지, 그 중심에 내가 있었음을 알게 된다. 즉 내 탓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알게된다. 내 탓을 분명히 알게되면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 당연하고 옳은 일이라는 것을 알게된다. 용서는 궁극적으로 자기용서이기에, 용서할 것이 더이상 없다는 것을 알게되는 지점에서 멈춘다. 이런 일련의 성찰 과정에서 묵상의 목적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이 유일한 실재라는 것을 알게되는 것을 의미한다. 나와 하느님 사이가 분리되어 있다면 나와 이웃은 당연히 분리되어 있는 상태라는 것을 알게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네 탓, 혹은 세상 탓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 묵상을 하는 것이 아니다. 나만 온전히 말씀으로 치유되면 온 세상은 치유된다는 것이 묵상의 안내표지다. 그런 자세로 오늘 주제인 <회개와 하늘나라>가 정녕 무엇인지 알게 해달라고 성령께 간절히 기도 드릴 때, 그 응답은 지체없이 주어진다.
그런 묵상의 길을 따라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전하는 마태오 3,1-12에서 회개란 무엇이고, 하늘나라는 어떤 나라인가?를 묵상하기 위해 멈춘 부분은 1절, 8절, 11절이었다.
Ⓐ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1절)
Ⓑ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8절)
Ⓒ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11절)
하느님 나라는 이미 와 있지만 그것을 완벽하게 알아보지 못하고, 안 만큼 살지 못하는 이유를 다양하게 진단할 수도 있겠지만, 이 글은 신학적이고 교리적인 회개에 초점이 놓여있지 않다. 오로지 글을 쓰는 사람의 단상에 가까운 개인적 성찰에서 바라본 회개에 관한 것이다.
세례자 요한의 외침, 회개하라,를 들으면서 떠오른 질문이 있다.
현재 나 자신의 상태, 완전한 회개의 삶을 살고 있는지 무엇으로 알 수 있는가? 당연히 종교인이니 이미 회개는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는가? 회개는 타자에게 <회개하라!>고 외치거나, 요구하는 어떤 정언명제인가?
이런 질문을 하다보면 스스로의 신앙상태에 대한 근본적인 점검이 <회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분을 향해 온전히 돌아선다는 것은 회개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님이 전제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마태오 복음사가는 세례자 요한의 목소리를 통해 다음과 같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전하고 있다.
Ⓐ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1절)
Ⓑ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8절)
Ⓒ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11절)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은 나의 그릇이라고 해 보자! 하늘나라, 성령, 불은 은총의 선물이라면. 회개에 맞먹는 합당한 열매는 하늘나라와 성령과 불, 그것을 은총으로 받아들이는 나의 영혼의 그릇을 준비하는 것이라 한다면, 내가 충분히 회개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 선물은 그냥 주어질 것이다.(굳이 자비를 상정하지 않고도 그럴 것이다)
그런데, 주어도 받지 못한다면 주어지지 않은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또 받아야 하는데 받지 못했다면 그 손실은 나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서 은총에 초대받을 수 있었던 사람들의 손실까지를 망라한, 즉 그분 나라에 치명적인 손실일 것이다. 결국 당신 자녀들의 손실은 곧 아버지의 손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나의 회개는 하늘나라의 총체적인 퍼즐이 완성되는데 빠지면 안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과격한 용어, 극단적인 여러 상황들을 열거하면서 회개하라!고 강력하게 외쳐야만 했을 것이다.
지난주에 언급한대로 2022년(가해) 대림시기를 준비하면서, 나는 좀 더 비장해졌다고나 할까? 사실 대림절 묵상주제 두 개는 숭고미가 아니라 비장미에 가까운 주제다. 그렇게 비장해진 이유는 8절에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있는가?> 라는 질문 때문이었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다른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향해 어떤 상황에도 불구하고 달리자고 해 놓고 정작 나 자신이 탈락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바오로 사도의 바리사이즘의 경계와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묵상1. “원하지 않는 것은 포기하고, 원하는 것은 간직하라.”
- "Give up what you do not want, and keep what you do."
묵상2. 내가 원하는 것을 신도 원한다 혹은 신이 원하는 것을 나도 원한다.
- God wants what I want or I want what God wants!
위의 묵상주제가 회개에 가장 합당한 그릇인지는 알 수 없으나, 삼위일체 하느님의 현존을 더 깊이 체험하기 위한 묵상 주제 중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
묵상 주제 키워드는 <원한다>에 놓여 있다.
아직도 무언가 원하고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이 내게는 중요하다. 데카르트의 명제를 비틀어 <나는 원한다, 고로 존재 한다>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런데, 그 원하는 것이 충족될 수 있는 그 중심에 그분이 있다는 것이 내게는 그 무엇보다 더 중요하다. 중요한 것은 기쁜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이 나만 원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내 원함이 아닌 것이 되었다. 내가 원하는 것을 그분도 원한다는 확신이 들어야 <원한다>는 것의 목적을 성취한 것이 되었다. 이건 내가 선하고 착해서 내린 결론이 아니다. 그동안 내가 원하는 대로 마음껏 살아보았지만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는 인생 3분2의 생체실험결과치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나는 간절히 원하는데 그분이 원하지 않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면 나는 나의 원함을 기꺼이 접겠다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분의 뜻이 비할 데 없는 행복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걸어온 것 자체가 이미 은총상태가 아니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감사한다. 그렇기에 내가 어떤 원함을 접거나 포기하는 것에 <희생> 혹은 <고통>이라는 개념을 끌어들일 수 없다. 행복이라는 실재를 찾기 위해 비실재에서 벗어난 것을 하느님 나라를 위해 무슨 큰 희생을 치른 양 살 수는 없다. 더우기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희생양 코스프레로 남은 인생을 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포기나 내려놓음은 더 큰 행복을 바라본 결과이지, 교환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무엇을 원한다는 것은 온전히 행복하고 싶다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 나라가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원하는 것을 그분도 원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 그것이 문제다.
하느님만 하느님 나라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하느님 나라를 원하는데 마리아의 수태고지의 계시처럼 <네!>라고 그 뜻을 자명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 그분을 알아듣는데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그분의 뜻을 알아들을 수 있다면 마리아뿐 아니라 그 누구라도 <네!>라고 했을 것이다, <네!>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안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못하는 것이다. 그분의 뜻을 알아듣지 못했기에 그 대답도 알아듣지 못한 상태의 답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자명하게 그 뜻이 분명한 상황이 있을 수도 있고, 선과 선이 맞물리는 상황 앞에서, 어떤 선을 선택 하느냐가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자명하게 하느님의 뜻을 네!라고 받아들인 마리아의 곁에 있던 그 분, 어떤 계시도 받지 않은 상태에 있던 마리아의 약혼자 요셉의 입장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대림시기가 되면 모든 성당에 아기 예수가 없는 구유가 이미 안치되어 있다. 구유 앞에서 자주 대림절 묵상 주제와 요셉성인의 애매모호한 포지션을 연결해 바라보았다.
나 뿐 아니라 우리의 상황도 마찬가지일 듯하다. 마리아처럼 직접 그분의 계시를 받은 상황이 있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요셉처럼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는데, 시간이 필요한 횡적인 과정을 거쳐 그분의 뜻을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 앞에 놓여 있을 수도 있다. 누군가가 받은 계시를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시간 말이다.
(그런데 요셉성인이 어떻게 하느님의 음성을 듣게되는지를 생각해보자고 어쩌다 포커스를 요셉성인에게 맞추는 듯하면, 성모신심이 유난히 강한 이들은 마치 성모마리아의 수태고지의 네! 를 평가절하하는 것은 아닌가, 의문을 갖기도 한다. 모든 성인성녀는 인류를 성삼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하나의 길에 해당한다. 성인성녀에 대한 신심이 우상의 상태로 치우치면 안된다. 모든 인류의 갈망과 신심이 퍼즐처럼 합쳐진 곳에서 하느님 나라는 완성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유다이스카리웃도 하느님 나라의 완성에 타산지석으로 이바지한 분이라고 할 수 있다. 신심의 궁극적인 목적은 크기나 경중을 따질 수 없이, 그분 나라에서 주어진 몫에 의해 모두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바오로 사도의 그리스도지체론에서 보듯 말이다. 천국에서 윗자리 아랫자리가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큰 기적과 작은 기적은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물리적인 크기로 영적 위상을 논하는 것은 언제나 성찰을 요구하는 주제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지체의 역활에서 더 많은 사랑을 받거나 덜 받은 것처럼 보여질지라도 하느님은 창조된 생명을 편애하시지 않는다.)
묵상으로 넘어가서, 묵상 1과 2는 같은 주제를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묵상1. “원하지 않는 것은 포기하고, 원하는 것은 간직하라.”
- "Give up what you do not want, and keep what you do.“
묵상1은 마리아처럼 직접 계시로 어떤 선택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의 선택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 원하지 않는 것을 포기하고 원하는 것을 선택하라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그분의 뜻인지 아닌지 의심 혹은 판단하지 말자는 것이다.
묵상2. 내가 원하는 것을 신도 원한다 혹은 신이 원하는 것을 나도 원한다.
- God wants what I want or I want what God wants!
묵상1과 2는 같은 맥락을 다르게 표현한 것으로, 내가 원하는 것에 어떤 상식에 기반한 사회적, 인습적 잣대로 판단을 하지 말자는 것은 <가치있는 것과 가치없는 것>을 내가 살아온 가치관으로 재단하지 말자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하자는 말과 같다. 그것은 내가 살아 온 삶에 대한 존중이자, 자녀들의 행복을 누구보다 원하는 그분을 아버지라고 믿는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 원함을 다시 한 번 아버지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되는 것, 이것은 또 무엇인가? 무엇이 최선인가를 묻게되는 상황앞에서, 신이 원하는 것을 나도 원한다는 것, 이 원함이 분명 나에게는 선이기에, 그것이 분명 선이라면 행복도 분명할 것이지만, 나에게서 멈추는 선, 나에게서 끝나는 행복인가? 아님 확장하는 선인가, 행복인가 하는 상황 앞에서 어떻게 최선의 답을 알아들을 수 있나 하는 것이다.
(묵상하면서, 이 부분에서 오래 머물렀던 이유는 (1)‘나’ 라는 최소의 법칙을 최대다수의 법칙으로 환원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과, (2)하느님의 계시는 왜 마리아처럼 쌍방향적이지 않고, 때로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와 다시 수평이동을 하는 요셉의 경우처럼 일방향적인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림시기 동안 이 주제를 더 묵상하려고 한다.)
이 글의 주제를 다음과 같이 정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아름다움은 아름다운 만큼의 아름다움을 요구 한다
-La beauté exige autant de beauté que de beauté.
그동안 가장 아름다웠던 대상이나 장면, 혹은 상황을 고르라 한다면 이제는 서슴없이, 하느님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거 같다. 그동안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는데 한 점 의혹도 없었다. 그분이 사랑이라면 그 사랑의 표현 역시 아름다움이 분명할 것이라는 것 역시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느님의 무한한 속성 가운데 하나면 든다면 <하느님은 아름답다> 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창조된 모든 것이 아름답다. 그리고 그 분의 아들 예수님은 얼마나,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리고 그분의 메신저 성령은 얼마나 아름다운 길로 우리를 이끄시나?
그런데, 그분의 아름다움을 보았다는 것은 그것을 본 사람에게 그 아름다움만큼의 아름다움을 요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요구는 외부에서의 강제가 아니라 그처럼 아름다움이고 싶다는 갈망이 모든 갈망을 능가하기 때문이다. 100%의 아름다움을 보았는데, 30%의 아름다움에 만족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즉 그 요구란 외부의 목소리가 아니라 내가 나에게 요구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은 아름답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뜻도 아름답다!> 이것이 묵상 1과 2를 통해서 알아들은 말이다. 회개가 하느님 나라와 연결될 수 있는 이유는 그분에게로 돌아서지 않고 그분의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세례자 요한의 외침도 그런 맥락에서 나왔을 것이다. (하느님이 아름다움이라면 하느님 나라도 아름다움일 것인데, 이 과격한 세례자 요한의 분노는 어떤 아름다움인가?) 너무나 자명한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지 못해 헤매는 이들이 가엾다가, 그 가여움이 사무쳐서, 자신도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지 못하면서 정작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들을 율법을 빌미로 <두려운 하느님>의 개념으로 가로막는 바리사이즘에 대한 분노가 하늘을 찌르고 땅을 가를 만큼 외침으로 표출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글을 마무리하며. "요한은 낙타 털로 된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다. 그의 음식은 메뚜기와 들꿀이었다"라고 전해지듯, 자신의 삶과 메시지를 일치시켰던 세례자 요한의 외침을 다시 들어본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1절)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8절)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1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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