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라는 ‘영원’, 우리 안의 인류, 다섯 사람의 초상
- ‘Eternity’ as in ‘Today,’ the human race in us, the portrait of five people.
1. 나는 왜 너에게서 노발리스의 <푸른 꽃>을 보았나?
시 두 편을 읽어본다.
고두현, 「달의 뒷면을 보다」
송정 솔바람해변 지나 설리 해안/구비 도는데/ 벌써 해가 저물었다//어두운 바다 너울거리는 물결 위로/별이 하나 떨어지고 돌이 홀로 빛나고/ 그 속에서 또 한 별이 떴다 지는 동안/반짝이는 삼단 머리 빗으며/네가 저녁 수평선 위로 돛배를 띄우는구나// 밤의 문을 여는 건 등불만은 아니네/ 별에서 왔다가 별로 돌아간 사람들이/ 그토록 머물고 싶어 했던 곳/ 처음부터 우리 귀 기울이고/ 함께 듣고 싶었던 그 말/ 한때 밤이었던 꽃의 씨앗들이/ 드디어 문 밖에서 열쇠를 꺼내 드는 풍경/목이 긴 호리병 속에서 수천 년 기다린 것이/ 지붕 위로 잠깐 솟았다 사라지던 것이 // 푸른 밤 별똥별 무리처럼 빛나는 것이 /오, 은하의 물결에서 막 솟아오르는/ 너의 눈부신 뒷모습이라니
이장욱, 「객관적인 아침」
나와 무관하게 당신이 깨어나고 / 나와 무관하게 당신은 거리의 어떤 침묵을 떠올리고/ 침묵과 무관하게 한일병원 창에 기댄 한 사내의 손에서/ 이제 막 종이비행기 떠나가고 종이비행기,/비행기와 무관하게 도덕적으로 완벽한 하늘은/난감한 표정으로 몇 편의 구름, 띄운다./ 지금 내 시선 끝의 허공에 걸려/구름을 통과하는 종이비행기와/종이비행기를 고요히 통과하는 구름./이곳에서 모든 것은/단 하나의 소실점으로 완강하게 사라진다./지금 그대와 나의 시선 바깥, 멸종 위기의 식물이 끝내/허공에 띄운 포자 하나의 무게와/그 무게를 바라보는 태양과의 거리에 대해서라면,/객관적인 아침. 전봇대 꼭대기에/겨우 제 집을 완성한 까치의 눈빛으로 보면/나와 당신은 비행기와 구름 사이에 피고 지는/ 희미한 풍경 같아서.
고두현의 「달의 뒷면을 보다」와 이장욱의 「객관적인 아침」은 모두 이별시다. 이별로 인해 너는 나에게 누군지, 당신은 나에게 누군지를 바라보게 되는 부재의 현존에 관한 시다.
고두현 시인에게 너는 달이다. 이별하기 전에는 별이었던 네가 이별한 이후에는 달이 되었다. 송정 솔바람해변 지나 설리 해안/ 구비 도는데/해가 지고 별이 떴다 지는 시간에 반짝이는 삼단 머리 빗으며/네가 저녁 수평선 위로 돛배를 띄우는구나 돛배를 보고 삼단같은 머리를 지닌 너를 떠올린 화자에게 너는 지상의 돛배였다가, 어느 순간 저 하늘의 달이 되었다. <한때 밤이었던 꽃의 씨앗들이/ 드디어 문 밖에서 열쇠를 꺼내 드는 풍경> 같은 그 시원의 풍경 속에서 너는 별이었다가 돛배였다가 달이 된 것이다. 너는 내가 이름 붙일 수 있는 모든 이름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달은 앞모습을 보여주는 달이 아니라 뒷모습을 보여주는 달이다.
“오, 은하의 물결에서 막 솟아오르는/ 너의 눈부신 뒷모습이라니” 라고, 화자는 부재중에 너의 또렷한 현존을 본 것이다. 함께 있었을 때도 몰랐던 너의 눈부신 뒷모습!
이장욱의 시에서 당신의 부재로 인해 모든 아침은 다만 객관적인 아침일 뿐이다. 어떤 정서도 개입되지 않은, 어떤 의미도 부여할 수 없는 아침, 세상은 마치 종이비행기를 접어 공중에 던지는 놀이 같은 하루. “이곳에서 모든 것은/단 하나의 소실점으로 완강하게 사라진다.” 그런데 당신은 희미하지만 소실점으로 사라지지 않는 그 무엇이다. 구름 속으로 사라진 비행기처럼, 사라졌다 나타났다. 아 이제 다 잊었다 싶으면 나타나는 희미한 풍경이다. “나와 당신은 비행기와 구름 사이에 피고 지는/ 희미한 풍경 같아서.” 지금 그대와 나의 시선 바깥이란, “멸종 위기의 식물이 끝내/허공에 띄운 포자 하나의 무게와/그 무게를 바라보는 태양과의 거리” 와 같은 그 무게와 거리의 낙차만큼, 도덕적으로 완벽한 세계 속에서, 당신과 나의 관계란 아무 것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라는데, 그런데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닌, 그 희미한 풍경이 화자의 생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완벽한 세계가 나를 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파스텔 물감으로 그린 그림이 시간 속에서 발해지듯 그렇게 희미한 현존으로 분명히 있다.
두 시인이 바라본 만남과 이별은 부재중에 현존의 의미를 확인하는 시간으로 <안과 바깥의 교류가 거세게 일어나는 전환기>, 즉 인생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이는 비로소, 부재의 현존 앞에서 자기이해의 길을 걷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때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던졌던 질문, <나는 왜 너에게서 노발리스의 <푸른 꽃>을 보았나?>의 그 답을 이해하게 된다. 내가 이미 푸른 꽃이었기 때문에 너의 푸른 꽃을 보았다는 것을!
2. 역사에는 안과 바깥의 교류가 거세게 일어나는 전환기가 있다.(미셜 푸코)
이 글은 다음 글의 연장선에서 쓴 것이다.
[빌라도의 담론이 지닌 순환증식의 원리와 그 종언(終焉)
-The Principle of Circulation Proliferation and its End of the Pilate's Discourse]
자기 이해의 길 앞에서 우리가 갈팡질팡하는 이유는 세계의 담론, 즉 중심부 담론에 휩쓸리기 때문이다. 이것을 칼 융은 사회적 유전자, 집단무의식이라고 규정하였다. 대부분의 인류가 집단무의식에 사로잡혀 내가 누구인지 영원히 알지 못하고 살다 가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계를 끌어가는 중심부 담론이 무엇인가를 면밀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담론(談論)은 우리가 현실이라 부르는 것, 진리라 부르는 것, 우리 자신과 동일시하고 싶거나 지향하고 싶은 관념 모두를 언어로 구조화한 것이다.
담론(談論)은 사회, 정치, 경제가 가담하기는 하지만 담론을 이끌어가는 주체는 군중, 민중, 대중이라 일컫는다는 점에서 권력주체가 행사하는 이데올로기와 차별화된다. 그럼에도 ‘중심부’담론이라는 말은 주체를 규정할 수 없을 정도로 권력주체와 민심이 하나가 된 상황을 일컫는다.
미셸 푸코가 간파한 대로 담론은 침묵보다 더 권력에 봉사하거나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담론이 권력의 수단도 되고 효과가 되는 동시에 권력의 장애물, 권력이 비틀거리며 부딪히는 벽, 저항의 지점, 반대전력의 출발점도 될 수 있는 복합적이고 불안정한 과정을 고려해야 한다. 담론은 권력을 생산하고 전달하며 강화할 뿐만 아니라 권력을 소멸시키고 폭로하며 허약하게 만들고 권력을 좌절시킬 수도 있다
세상엔 무수한 담론이 생산되고, ‘나’를 망각할 정도로 그 담론이 어떤 방향성을 지닌 채 개인으로써는 넘지못할 질서를 구축하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이를 ‘중심부 담론’이라고 부른다. 이 중심부담론이 지향하는 질서는 대체로 유토피아적 질서에 해당한다.
푸코는 『말과 사물』의 서문에서 보르헤스의 텍스트를 읽을 때마다 보르헤스가 구사하는 유머에 따라 웃다가 섬뜩한 마주침을 경험한다고 술회한다. 그 섬뜩한 마주침은 ‘유토피아’도 아니고 ‘디스토피아’도 아니고 ‘헤테로토피아’라고 말한다. 유토피아는 실재하는 장소를 갖지 못하지만 고르고 경이로운 공간에 펼쳐지며 비록 공상을 통해 접근할 수 있을지라도 살기좋은 나라를 보여주는데, 보르헤스의 텍스트들은 화제를 메마르게 하고 말문을 막고 문법의 가능성을 뿌리에서부터 와해하고, 신화를 해체하고, 서정성을 아예 없애버린다고 말한다. 여기서 푸코는 담론의 생산성이 지닌 단절과 연속성에 주목한다.
진리는 세계에 속한 것이다. 진리는 세계 내에서 다양한 제약을 통해 생산된다. 각 사회는 그 자체 진리의 체제, ‘진리의 일반 정치학’을 가지고 있다. 담론은 대상 영역을 경계짓고, 인식행위자에게 정당한 지각을 정의하고, 이론과 개념을 변화시키기 위한 규범을 확립하는 행위에 의해서 규정된다. (미셸 푸코, 『지식의 고고학』)
인식이 합리적 가치나 객관적 형태에 대한 모든 기준과 증대하는 역사보다는 오히려 인식을 위한 가능조건의 역사가 드러나는 에피스테메(episteme)인데, 이 이야기에서 반드시 나타나게 마련인 것은 지식의 공간에서 경험적 인식이 다양한 형태를 야기한 지형이다(미셸 푸코, 『말과 사물』)
담론이 무한히 증식된다는 사실 안에 존재하는 그토록 위협적인 것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그리하여, 위험은 어디에 있는가? 모든 사회에서 담론의 생산은 -담론의 권력과 위험을 제거하고 예측 불가능한 사건을 제압하며, 무겁고 위험한 물질성을 회피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일련의 절차들을 따라 동시에 통제·선별·조직·재분배 된다.(미셸 푸코, 『담론의 질서』)
푸코가 바라본 최고의 진실은 이미 더 이상 이전에 담론이 그런 것, 또는 담론이 수행한 것 안에 거주하지 않는다. 이제 담론은 자신이 말하는 것 안에 거주하게 되었다. 이것이 "각 사회는 그 자체 진리의 체제, ‘진리의 일반 정치학’을 가지고 있다"고 할 것이다.
푸코는 “모든 사회에서 담론의 생산은 -담론의 권력과 위험을 제거하고 예측 불가능한 사건을 제압하며 무겁고 위험한 물질성을 회피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일련의 절차들을 따라 동시에 통제·선별·조직·재분배된다”고 전제한다.
푸코는 우선 배제의 절차들을 언급한다. 먼저 외부로부터 작용하는 절차들이 있다. 금지, 분할 그리고 거부, 진실과 거짓의 대립이 그것이다. 그리고 내적 절차들이 있다. 담론의 문형이 만들어지는 바로 주석, 저자, 분과학문이다.
푸코에 따르면 담론 통제에는 또한 세 번째 절차가 존재한다. 말하는 주제의 희소화, 초월적 주체의 철학들, 전복ㆍ불연속ㆍ특이성ㆍ외재성의 네 가지 방법론적 요청들이 그것이다.
푸코는 규율 지키기와 몸 길들이기를 통해서 그 시대를 살아가는 ‘주체’가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즉 권력이 주체를 만들어낸 장본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체는 이제 더 이상 역사를 뛰어넘는 본질이 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특정 단계에서 특정하게 형성되는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럼 이러한 권력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푸코는 개인의 몸에 작용하는 일정한 관계망 속에서 권력의 작용을 살필 수 있다고 말한다. 즉 푸코에게 있어 권력은 어떤 개인, 집단, 기구가 소유하는 실체가 아니라 관계망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권력은 우리가 쉽게 상상하듯이 단순히 금지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결코 아니다. 푸코에게 있어 권력은 작용할 대상을 일정하게 형성하고 그 대상이 스스로 권력을 수행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즉 권력은 억압하고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 생산적, 긍정적인 힘으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권력은 도처에 있다는 명제는 그렇게 도출된다.
권력의 작동원리를 바라보기 위해, 상식에 충격을 주면서도 상식에 어긋나지 않는 사유의 생산은 지극히 드물고 어려운 일이다. 무엇보다도 둘 사이의 분리가 유지되어야 하는데, 대체로 치열하게 사유하지 않은 채 상식에 안주하게 된다. 괴롭지만 사유의 실험을 극한까지 밀고 나가고 이렇게 해서 도달한 ‘다른 사유’의 공간을 특별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공동의 장소인 상식에 포함되도록 하는 양방향의 노력, 이 균형점에서야 비로소 푸코의 이른바 ‘다르게 사유하기’가 나온다.
예컨대, 미노타우로스의 비밀은 바로 그것이 사유되지 않은 것, 사유 불가능한 것이라는 말과 같다. 그러므로 미궁을 뒤집어 미노타우로스를 보여주는 것은 바로 사유되지 않은 것, 사유 불가능한 것이 어떻게 사유되기 시작하는지를 알려주는 것이다. 따라서 푸코의 『말과 사물』도 다른 저서들과 마찬가지로 뒤집힌 미궁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에는 안과 바깥의 교류가 거세게 일어나는 전환기가 있다. 푸코에게 그것은 르네상스 시대에서 고전주의 시대로, 고전주의 시대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시대다. 그는 이 대전환 또는 단절에 주의를 집중한다. 이 세 가지 전환기의 소용돌이를 통해 인식의 세계에서 무엇이 빠지고 무엇이 들어오면서 어떤 새로운 사유 방식이 형성되는가를 면밀히 관찰한다. 『말과 사물』은 이러한 관찰의 보고서다.
푸코의 고고학은 인식의 가능 조건을 추출하기 위한 방식이다. 이를 위해 푸코는 어떤 방식으로 지식이 출현하게 되는지를 묻는다. 특정한 시대에 특정한 지식이 출현하는 배경에 질서가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이 질서가 어떻게 경험되는지를 끈질기게 해명하고자 한다. 질서의 경험이 인식 가능성의 토대로 구실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푸코의 작업 방식은 칸트의 비판철학과 궤를 같이한다.
어떤 관점에서는 거꾸로 광기가 작품에 필수 요소일지도 모른다. 광기가 없으면 작품도 없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말과 사물』에서 푸코는 광기와 작품의 경계 지점에 언어의 경험을 놓는다. 이때의 언어는 언어가 말한다고 할 때의 자율적인 언어다. 푸코가 루셀의 작품들 덕분으로 깨달은 것은 바로 광기와 작품 사이에서 언어의 경험이 매개물로 구실한다는 점이다. 푸코가 즐겨 원용하는 문학은 광기의 경험으로 해석될 수 있는 언어의 존재에 대한 통찰을 내포하고 있다.
푸코에게 인간은 극복의 대상이자 넘어서야 할 일종의 장애물이다. 칸트와는 정반대로 그는 인간의 바깥에서 인식의 선험적 여건을 모색한다. 이 선험적 여건이 바로 에피스테메다. 이 개념은 지식의 지형 또는 언어의 공간으로 정의할 수 있는 독특한 장소다. 이것을 플라톤의 코라 개념과 관련지을 여지는 좁지 않다.
『말과 사물』은 내부의 세 가지 핵심적인 요소, 즉 고고학 방법론·에피스테메 개념·언어의 존재가 바깥으로 투영되어 합쳐지는 지점이다. 이 지점에서야 『말과 사물』의 세 가지 핵심적인 개념에서 출발하여 그것들의 연원을 밝히고 있다. 요컨대 『말과 사물』의 선험적 여건을 따지고 있다. 이 점에서 고고학의 고고학이자 바깥의 사유에 대한 바깥의 사유임과 동시에 검은 태양이 빛나는 언어 공간 속으로의 여행이다. 이것이 『말과 사물』의 이해를 위한 지렛대에 해당한다.
푸코는 사회적 담론이 만들어지는 내적이며 외적인 구조, 일련의 절차들에 주목한다. 특히 담론이 형성되는 그 토양, 에피스테메(episteme)에 주목했다. 수많은 담론 중에 주류 담론 혹은 중심부 담론이 되는 것은 이 담론을 배양하고 증식하고 순환시키는 어떤 토양위에서 서식한다는 것이다. 그 토양이 인간은 모두 권력, 힘을 지향한다는 점으로 본 것이다. 정치권력만 권력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 집단무의식화된 이 권력은 우리 자신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것들이다.
3. <주님,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루카23,35ㄴ-43을 읽어본다.
Ⓐ그때에 지도자들은 예수님께 35 “이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 하며 빈정거렸다. Ⓑ36 군사들도 예수님을 조롱하였다.그들은 예수님께 다가가 신 포도주를 들이대며 37 말하였다.“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 38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라는 죄명 패가 붙어 있었다. Ⓒ39 예수님과 함께 매달린 죄수 하나도,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 하며 그분을 모독하였다.Ⓓ40 그러나 다른 하나는 그를 꾸짖으며 말하였다.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41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42 그러고 나서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하였다. Ⓔ4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주님,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라고 전하는 루카23,35ㄴ-43에서 그리스도왕 대축일, ‘오늘’ 이 우리에게 어떤 축복의 이름일까?를 생각해 보기 위해 몇 개의 질문으로 시작해 본다.
질문1. 2022년 11월20일, 21세기 지금, 여기, 우리(세계 인구 8,000,870,862명(www.worldometers.info/kr 세계 인구, 정부, 경제, 사회, 환경, 건강 통계, 수치 제공)는 J를 어떤 ‘왕’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인가?
질문2. 오랫동안 메시야를 기다린 이들이 그분을 메시야로 알아보지 못한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아니 인간은 신을 자명하게 알아볼 수 있는 그런 존재인가?
질문3. J. 그분은 왕처럼 태어나지도 못했고, 왕처럼 살지도 못했고, 더욱이 왕처럼 죽지도 못했는데, 왜? 우리는 그분을 왕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인가? 그것도 특정 종교의 왕이 아니라 <온 누리의 왕, 임금>이라 불러야 하는 것인가?
이를 묵상하기 위해 루카23,35ㄴ-43에서에 멈춘 부분은 43절이었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43절)를 중심으로 우리에게 그분은 어떤 ‘왕’으로 오셨는지, ‘오늘’과 ‘낙원’을 연결하여 생각해보려고 한다.
루카23,35-43에서 십자가 사건의 목격자는 백성들, 지도자들, 군사들, 십자가에 매달린 죄수 두 명이었다.(우리가 그분을 만난 사람처럼 완벽하게 살지 못한다는 점에서, 이들은 누구인가? 낙원을 뛰쳐나와 헤매고 있는 우리 안의 인류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십자가에 달린 한 사람만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보았다는 놀라운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 루카 7장 18~35절에 나오는 세례자 요한의 메시아에 관한 질문과 예수님의 대답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기로 한다.
Ⓕ오실 분이 선생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19절)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화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22-23절)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크다(24절)
당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데 앞장선 종교지도자들이 하는 말과 세례자 요한의 질문은 메시아에 대한 비슷한 질문과 회의와 의문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 앞에서,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그러나 하느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크다"(24절)는 의미를 연결하여 묵상해 본다.
“이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
당시 모든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들은 정작 메시아를 죽이는데 앞장섰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분을 도저히 메시아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유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꺼릴 것 없는 그 무엇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라고, 가장 버림받은 이들을 위한 기도처럼 그들 역시 변호해 주어야 할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단지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이해타산, 그 이상의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를 세례자 요한의 질문으로부터 하게 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들은 예수님이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음에도 메시아에 대한 의문을 갖고 있었다. 그들의 무지를 단지 구약의 메사아관으로 치부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세례자 요한에게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7장 22절)와 연결해, ‘오늘’ ‘낙원’의 의미를 십자가에 매달린 한 사람처럼 알아볼 수 있는 어떤 표지를 발견해야 하는 문제 앞에 서 있음을 고백하게 된다.
우리가 살면서 수없이 ‘보고 들은 것’이 ‘오늘과 낙원’으로 연결될 수도 있고, 연결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온 누리의 왕’ 이라는 축복의 문을 열어보기로 한다.
세례자 요한마저도 “오실 분이 선생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라고 물었다는 것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보는 것이 그렇게 자명하고 당연시 할 수 일이 아니라는 것에 멈추게 된다. 신을 이해하는 것은 그 선행조건으로 인간이해와 맞물려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당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유대종교지도자들과 세례자 요한의 질문에서 중첩되는 부분을 살펴보아야할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지금 당연히, 예수님은 우리의 메시아라고 고백한다. 그 고백이 우리의 삶과 얼마나 먼 거리에 있는지 차치하고라도 고백 자체를 의심하지는 않는다. 당신은 우리의 메시아라는 고백을 하면서도 당시 다섯 부류의 사람처럼 살고 있다는 것이, 이것은 메시아관의 문제가 아니라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기이해와 맞물려 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유의지를 지닌 나, 자기이해를 하지 않고는 결코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온 인격으로 고백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메시아다---나는 아무개다.>
이 두 문장은 언뜻 맥락상 연결고리가 없는 듯하지만,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아본 한 사람과 다른 목격자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의 질문의 차이를 바라보면,
<예수님은 메시아다---나는 아무개다.>는 것은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와 연결해서 그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동일한 현장에서 같은 사건을 듣고 목격했을지라로 상반되는 반응이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다름 아닌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메시아라는 고백은 나는 아무개다라는 자기이해와 동시적인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행위의 주체가 자신이 하는 일을 모른다는 것은, 용서가 간과(overlook)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낳는다. 이는 인간이해의 한 단면을 다시 한번 바라보게 한다. 내가 한 행위임에도 실은 나조차 그 행위의 원인을 모른다는 것이다. 행위를 한 사람이 그 행위를 낳은 원인을 모른다는 것, 위에서 소략해 본 푸코가 바라본 인간이해, <주체는 없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
(우리가 죄를 고백할 때, 생각과 말과 행위로 자주 죄를 지었으며라고 고백한다. 모든 종교의 출발점은 행위라는 윤리적인 잣대가 아니다. 마음이라는 근원에 대해 묻고 있다. 예컨대, 원효대사가 당나라에 가다 한밤중에 마신 물을 생각해 보자. 왜 원효대사는 당시 대승들의 필수코스인 당나라행을 포기하고 유턴했나? 밤에 마신 물과 낮에 마신 물이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 것은, 물 때문이 아니라 '마음' 때문이었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선행되어야 할 것은 메시아 이해가 아니라 인간이해라고 할 수 있다. 아니 인간의 마음이해다. 아니 인간의 마음을 좌지우지하는 근원에 대한 이해다. 이 인간이해의 지평 안에서 예수님은 자명하게 메시아라는 고백이 나오게 된다.
우리는 <몸과 마음과 영혼>이라는 삼중의 조건을 지닌 존재로 이 지구별에 소풍왔다. 그 삼중의 조건을 지닌 존재인 우리는 자유의지라는 선물을 받았다. 우리가 자유의지를 지니고 있다고 할 때, 그 자유의지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이 세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마음의 선택을 의미한다. 그 마음의 선택은 몸을 도구삼아 실재를 선택하느냐 비실재를 선택하느냐로 갈라진다.
세계를 실재 혹은 비실재라고 파악하는 선택조건은 <지각과 지식(앎)>이라고 할 수 있다.
<지각>은 육체의 눈과 귀로 어떤 정보를 수용하는 과정이기에 지각하는 자의 염원과 욕망과 일치하는 것만을 인지하도록 허용한다. 그래서 타자는 경쟁과 투쟁의 대상이 된다. 여기서 투사, 고통, 슬픔, 상실, 시기, 질투, 분노, 실패, 분리 등이 도출된다. 이 지각은 몸이라는 개별 도구로부터의 세계해석이자, 인간 역사에서의 학습효과이자, 칼융이 바라본대로 집단무의식이 전제되어 있다.
<지식>은 피조물을 향한 하느님의 뜻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영안으로 타자와 세계와 어떤 분리도 존재하지 않는 시선으로 모든 피조물을 바라본다. 지식의 본성은 확장에 있다. 그래서 하나, 일치, 사랑, 진리, 평화, 용서, 자비의 확산에 이바지한다. 지식은 성령칠은의 은사 가운데 하나로 영혼을 가진 존재는 모두 이 지식의 은사를 갖고 이 세상에 왔다고 할 수 있다. 영혼이 우리의 실재이기에, 인간을 성선설로 바라볼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하다.
<지각>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한, 이 세계는 결핍의 원리로 가득차 있다. 그러나 <지식>으로 이 세계를 바라본다면 충만의 원리로 <오늘, 낙원>을 이미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죽어서 천국이 아니다. 이미, 지금, 이 곳에서 너무나 충만한 삶이기에, 다른 이들에게 나누고 퍼줄 것밖에 없는 삶을 살게 만든다.
흔히 신앙은 합리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하지만 그분을 내 존재이유의 ‘왕’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단지 전례주기의 한 호칭에 불과하지 않다. <예수님은 메시아>라는 고백은 지각과 지식을 분별하고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의 자기이해에서 나온 합리적인 진리수용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설명하기 어렵고 설명해도 모르니까 그냥 무조건 믿어야하는 믿을 교리는 아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행적을 보고 들었는데 누군가에게는 오늘이 낙원이 될 수도 있었고, 누군가에게는 오늘이 지옥이 될 수도 있었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런 맥락에서, 루카23,35-43에서 십자가 사건을 바라보는 지도자들, 군사들, 죄수 한 명은 <지각>으로 이 세계를 파악하는 사람들이었다면, 오늘의 낙원을 바라본 사람은 <지식>으로 세계를 바라본 이라고 할 수 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백성들과 세례자 요한은 <지각과 지식>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어떤 상태의 인류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메시아’는 단지 예수님의 신원의식을 규명하는 차원이 아니라, 인간이 근본적으로 충족되어야할 것이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존재이유, <낙원> 귀의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분을 <온 누리의 왕>으로 우리가 바라볼 수 있는 이유는 지식의 근원이 바로 그분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분만이 이 세상의 근본적인 충족원리라는 것을 바라보는 것, 그것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른다. 온누리에 가득찰 수 있는 것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달러도 아니고 엔화도 아니고 사랑밖에는 없다. 그것을 가르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십자가에 처한 한 사람의 간원에서,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당시 십자가형을 받는 사람들 가운데 이 사람을 통해 <죄는 사랑의 결핍>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즉 죄수라고 일컫는 그 한 사람은 지각을 치유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지각을 치유 받을 때만 우리는 그분이 사랑의 메시아라는 것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행위는 하느님을 두려워할 만한 죄라는 것과 그러나 이분은 무죄하다는 것을 동시에 바라보는 통회가 바로 자기치유 행위에 해당한다. 자기이해는 자기치유인 통회와 관련되어 있다. 고백성사의 은총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고백자체가 그 사람에게 오늘이 곧 낙원임을 보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십자가상의 예수님이 진실로 통회한 그 사람에게만 <오늘-낙원>의 축복을 들려주었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진실로 통회할 때, 우리도 그분의 육성을 들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부재의 현존이다.
여기서, 그 사람은 어떻게 그분을 메시야로 알아본 것일까? 그의 통회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고 할 때, 그 통회를 가능하게 한 그 무엇은 무엇인가? <보라 여기 십자나무 여기 구원이 열렸네>라는 사순절의 정점에서 드리는 기도처럼, 십자가상의 그분을 보고 자신을 바라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진정한 통회의 정석(자기치유과정)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아마도 그 사람은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분노, 죽음의 두려움 너머에서 울리는 그분의 음성을 비로소 들었을 것이다. 이 세계가 들려주고 보여주던 것이 결국 자신의 삶을 죽음으로 이끌었다고 바라본 순간, 그로 하여금 들어야 할 것과 보아야 할 것을 듣고-보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지각에서 지식으로 패러다임이 바뀔때, 우리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그 언명이 실은 치유의 문장임을 바라보게 된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그런 맥락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용서는 치유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글에서 이 부분을 <사랑은 운명을 바꾼다>고 표현하였다. 이 글은 <진정한 통회는 운명을 바꾼다> 라고 말해야겠다. 진정한 통회는 바로 자기치유과정의 최종 관문이고, 그곳에서 자기이해의 정점을 바라보게 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진정한 통회에 대한 응답이,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낙원은 분리가 없는 상태다. 분리가 일어나기 전에는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필요하지도 않았다. 진리의 속성은 그래서 언제나 풍요롭다. 낙원은 다른 말로 진리라고 말할 수도 있다.
글의 도입부로 돌아가서,
그분은 메시아다-나는 아무개다(창조 때의 바로 그 사람이다.)
그분을 메시야로 고백하는 것은 자신에게 낙원의 상태를 회복시켜주는 것이다. 아무 것도 필요치 않는 풍요의 상태를 바라보는 것이다. 있어도 가난하고 없으면 더 가난한 상태가 아니다. 있는 사람은 더 받고, 없는 사람은 있는 것마저 빼앗기는 곳이 바로 낙원이다. 낙원의 삶의 방식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창조의 원형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하느님이 창조하신 그대로이다- 하느님의 아들은 고통받을 수 없다-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라는 고백이 바로 오늘-낙원을 산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래서 통회의 즉시성을 <오늘> 이라는 축복으로 그분은 우리에게 지체없이 응답하신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그분의 행적을 보고 듣고도 그분을 모독하는 것은 실은 자신의 존재를 모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창조를 모독하는 것이며, 이 모독은 분리이자, 이 분리는 자신을 낙원으로 돌아가는 것을 힘들게 만드는 장애요인으로, 스스로 자신을 산산히 조각난 상태로 방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바오로 사도를 통해 왜 그분을 <온누리의 왕, 임금>이리고 할 수 있는지 거듭 확인 할 수 있다.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다(콜로새서 1,12-20) 하느님은 우롱당하실 분이 아니십니다(갈라디아서6, 7)에서,
그분이 <온 누리의 왕>이라는 것은 그분은 알파요 오메가라는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빈정거렸다, 조롱하였다, 모독하였다>라는 것은 인간의 행적을 일일이 적어두었다가, 그가 한대로 갚지 않고, 그분은 끝까지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면서 인류역사가 진행되는 한, 세세대대 박해했던, 박해한, 박해할 모든 인류를 하느님과 화해시킴으로써 하느님 창조를 완성하셨다는 것이다. 창조의 완성이란 모든 인류의 종말은 죄의 심판이 아니라 창조의 완성 <해피엔딩>이라는 낙원 귀의를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그리스도왕대축일> 앞에 <온 누리의 임금이신>이라는 3어절은 하늘이 준 <계시적인 은총어>라고 할 수 있다.
글을 마무리하며, 한 사람의 진정한 통회가 어떻게 인류로 하여금 낙원귀의의 볼텍스(vortex, 소용돌이)가 되는지, 태초에 하느님이 하신 창조를 완성하신 그분의 현존을 오늘, 지금, 여기에서 우리도 지체없이 체험 할 수 있는지, 십자가상의 육성을 들어보기로 한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42절)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4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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