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당신에게 드릴테니 부디 행복하게 살아라(김재인)

나뭇잎숨결 2022. 10. 31. 10:28

 

당신에게 드릴 테니, 부디 기쁘게만 살아라(김재인)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연 중 제 31 (다 해) 2022. 10. 30. Luc.19,1-10]

 

 

 

 

1. 김용택, 「선운사 동백꽃」 & 복효근, 「왈칵, 붉은」

 

 

김용택, 「선운사 동백꽃」을 읽어본다.

 

여자에게 버림받고 /살얼음 낀 선운사 도랑물을/맨발로 건너며/발이 아리는 시린 물에 이 악물고/그까짓 사랑 때문에/ 그까짓 여자 때문에/다시는 울지 말자/다시는 울지 말자/눈물을 감추다가/동백꽃 붉게 터지는/선운사 뒤 안에 가서/ 엉엉 울었다.(김용택, 「선운사 동백꽃」)

 

김용택 시인의 「선운사 동백꽃」 은 해석이 필요 없는 시다. 그까짓 사랑 때문에, 그까짓 여자 때문에 다시는 울지 말자고 다짐하다. 동백꽃 붉게 터지는 모습을 보고, 동백꽃만도 못한 생이 너무 아파서, 다 큰 남자가 ‘엉엉 울었다’ 사랑 때문에 사랑 때문에 설렐 수 있는 남자만 사랑 때문에 울 수 있을 것이다. 동백꽃을 보고 사랑을 떠올릴 수 있는 남자, 이렇게 아름다운 남자를 알아보지 못하고 떠난 그 여자는 누구일까?

 

나이 들면, 설레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이유가 아귀처럼 시각과 미각만 남기 때문이라고 하는 이들이 있다. 그런 상식을 뒤집는 시 한 편 더 읽어 본다.

 

늦은 계절에/ 담장 위로 붉은 장미 몇 송이 피었을 뿐인데/피가 한쪽으로 몰린다//왈칵/아물 무렵 상처는 아프기보다는 가려워서/딱지를 뜯는다//피는 왜 붉은가/어쩌자고 장밋빛/피어나지 못한 꽃들이 남아있다는 듯/늦었을지라도,/늦었기 때문에 피고 싶은/피우고 싶은 그 붉은 문장/어쩌자고 딱지를 뜯어 다시 덧내고 싶은가/살고만 싶은가//왈칵(복효근, 「왈칵, 붉은」)

 

복효근의 「왈칵, 붉은」의 화자는 아마도 길을 가다 늦어도 한참 늦게 핀 장미, 철없는 장미, 열심히 누군가를 위하여 피는 듯한 장미 몇 송이를 보았을 것이다. 그 장미를 보고 촉발된 <왈칵>이라는 부사가 지시하는 억제할 수 없는 그 무엇, 애써 외면하고 있던 것을 시인은 늦게 핀 장미라는 메타포로 자기 앞에 소환한다.

 

그것을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상처 같은 ‘붉은 문장’이라고 쓴다. 철없는 장미라고 쓰지 않는다. 주책이라고 쓰지 않는다. 나이값을 하라고 쓰지 않는다. 위치를 생각하라고 쓰지 않는다. 오히려 <살고 싶은가>라고 자신에게 묻는다. 인간의 상식으로 <왈칵> 피가 한 곳으로 몰리는 것 같은 것들은, 그 감정의 격랑은 사실 자신에게조차 이해시키기 어려운 것들에 속한다.

 

이를 이성복 시인은 「숨길 수 없는 노래2」에서

 

서러움 아닌 사랑이 어디 있는가 너무 빠르거나 늦은 그대여, 나보다 먼저 그대 보다 먼저 우리 사랑은 서러움이다

 

이성복 시인은 어떤 만남에 타이밍을 말하면서, 동시에 사랑이 원래 서러움이라고 말한다. 너무 늦게 혹은 너무 빨리 만나서 서러움이 아니라, 사랑의 속도가 다르기 때문에 서러움이라는 것이다. 두 사람이 사랑을 하면서도 사랑의 기승전결을 동시에 진행하지 못한다는 것, 그래서 모든 사랑의 관계는 이별이 예정된 수순이거나 기다림으로 점철된 것으로, 실존으로 수렴되지 못하고 다만 미학적-시적으로 남을 뿐이라고 보고 있다.

 

시적으로 남는 관계가 아니라 실존으로 구체화되는 관계를 김용택 시인은 <엉엉 울었다> 라고, 복효근 시인은 <붉은 문장> <피는 왜 붉은가?> <살고만 싶은가> 라고 묻는다.

 

우리에게 도착한 편지들은 너무 늦거나 너무 이르거나, 그런 시간너머에 있는 것들, 이성이나 감성으로 제어할 수 없는 것들, 마치 다 낫고 있는 상처를 다시 헤집고 있는 거 같은 것들, 다시는 아플 일 없이 조용히 생이 마감되길 바랬는데, 복병처럼 왈칵 모든 것을 뒤집어 놓는 것들!

 

그런데 그것이 우리가 만나야 하는 생의 유일한 진실이라면?

 

 

 

 

 

 

 

 

 

 

2. 당신에게 드릴테니, 부디 기쁘게만 살아라 - 『천개의 고원』, 옮긴이 김재인

 

 

 

『천개의 고원』을 쓴 들뢰즈와 카타리라면 <너무 늦거나, 너무 빠르거나> 라는 시적인 관계들을 무엇이라고 규정했을까? 아마도 사랑의 소수자되기를 두려워한 자본주의의 유령이라고 바라보았을 것이다.

 

영토화-탈영토화-재영토화라는 용어로, 늦거나 너무 빠르다고 말하는 것은 기존의 인습에 매인 자본주의적 교환구조에 점거당한 심장의 영토화라면, 그것을 붉은 문장으로 바라보고 아물고 있는 상처를 헤집고 엉엉 울었다고 어떤 액션을 취했다면 그것은 탈영토화인데, 그것이 다시 자본주의의 교환구조에 의해 계산기를 두드리는 매너리즘에 빠졌다면 그것은 재영토화된 것이기에 그것은 자본주의가 우리 삶을 총체적으로 잠식해 버린 어떤 매커니즘의 한 예로 규정했을 것이다. 사랑마저도 자본주의를 공고히 하는 매커니즘에 종속 변수라고 바라보았을 것이다.

 

사랑이 존재론이자 동시에 윤리학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사랑은 성서에서 보듯 “소수자 되기”의 가장 근사치일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는 ‘~되기’가 진정한 윤리적 내용을 획득하려면 언제나 '소수자 되기'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가을이 아름다운 여행이 되기 위해선 내가 지금 어디쯤 가고 있나를 물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천개의 고원』은 가을에 읽기에 최적화된 책이다. 어느 계절에 읽어야할 책이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한 해를 마감하면서 죽음을 무릎 쓰고 빙하가 녹아내리는 킬리만자로의 산을 올라간 이유가 무엇인가를 자신에게 이해시켜야 한다.

 

흔히 들뢰즈의 저서를 읽은 이들은 ‘사유하는 방법에 대한 사유(noology)’라고 들어보았을 것이다. 핸드폰만 충전하지 말고 뇌도 충전하고 살아라, 라는 야유를 듣는 사람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기존의 생각에 자신의 생각을 얹어 삶을 영토화 시킨 것이기 때문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그것을 '나무형 사유'라고 부르는데, 뿌리와 줄기가 가지와 잎이 일직선으로 연결되어 있는 이러한 국가형 사유 모델이 지난 이천년 동안 서구의 현실과 사유를 동시에 지배해왔다고 보았다. 철학은 항상 감성-오성-이성으로 연결되어 일직선으로 상승되어야 하며, 이것은 정치, 종교 모든 방면에서 그대로 복제되었고 자유를 말하는 자본주의의 노예를 만들었다고 본 것이다.

 

나무형 사유가 아니라 리좀형 사유를 하라는 말이 종종 종교교에서도 제기되곤 하는데, 리좀적 사유가 무엇인가?

 

리좀은 시작하지도 않고 끝나지도 앖는다. 리좀은 언제나 중간에 있으며 사물들 사이에 있고 사이 존재의 간주곡이다. 나무는 혈통 관계이지만 리좀은 오직 결연관계일 뿐이다. 나무는 ~이다 라는 동사를 부과하지만 리ᅟᅩᆷ은 그리고...그리고...그리고...라는 접속사를 조직으로 갖는다.(...) 그것은 중간에서 떠나고 중간을 통과하고 들어가고 나오되 시작하고 끝내지 않는 것이다. 중간은 결코 하나의 평균치가 아니다. 반대로 중간은 사물들이 속도를 SOSS 장소이다. 사물들 사이는 한나에서 다른 하나로 가거나 그 반대로 가는 위치를 존할 수 잇는 간계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와 다른 하나를 휩쓸어 가는 수직 방향, 홍단 운동을 가리킨다. 그것은 출발점도 없는 샘물이며, 양 쪽 둑을 갉아내고 중간에서 속도를 낸다.(pp.11-55)

 

 

R. 리좀지층뿐 아니라 배치물도 선들의 복합체이다. 선의 첫번째 상태, 첫번째 종류는 다음과 같이 정해 질수 있다. 선은 점에, 사선은 수평선과 수직선에 종속되어 있다. 선은 구체적이건 아니건 윤곽을 만든다. 선이 그리는 공간은 홈이 패인 공간이다. 선이 구성하는 수많은 다양체는 언제나 우월하거나 보충적인 차원에서 <하나>에 종속되어 있다. 이런 유형의 선들은 그램분자적이며, 나무 형태의, 이항적, 원형적, 절편적 체계를 형성한다. 선의 두 번째 종류는 이와 전혀 다른 것으로, 분자적이면 "리좀" 유형을 하고 있다. 사선은 해방되거나 끊어지거나 비틀린다. 이 선은 이제 윤곽을 만들지 않으며, 대신 사물들 사이를, 점들 사이를 지나간다. 이 선은 매끈한 공간에 속해 있다. 이 선은 자신이 주파하는 차원만을 갖는 하나의 판(=)을 그린다. 따라서 이 선이 구성하는 다양체도 이제 <하나>에 종속되지 않으며, 그 자체로 고름을 획득한다. 이것은 계급들의 다양체가 아니라 군중이나 무리의 다양체이다. 그것은 유목적이고 특이한 다양체이지 정상적거나 합법적인 다양체가 아니다. 그것은 생성의 다양체 또는 변형되는 다양체이지 요소들의 샐 수 있고 관계들이 질서 잡힌 다양체가 아니며, 퍼지 집합이지 정확한 집합이 아니다-----. 파토스의 관점에서 이 다양체들은 정신병, 특히 분열증에 의해 표현된다. 실천의 관점에서 이 다양체들은 마법에서 이용된다. 이론의 관점에서 다양체들의 지위는 공간의 지위와 상호관련이 있으며, 그 역도 마찬가지다. 사막이나 초원이나 바다 유형을 한 매끈한 공간에는 서식지가 없거나 근절되지 않으며, 오히려 두번째 종류의 다양체가 서식한다.(pp. 962~964)

 

리좀적 사유란 저자들의 비유를 빌리자면 이제까지의 서양의 사유는 일종의 장기 게임과 비슷한 것이었다. 즉 각각의 개체는 특정한 이름이 부여되어 '주체'가 되지만 이 주체는 실제로는 가는 길과 역할이 고정되어 있는 노예와 비슷했으며, 게다가 장기의 모든 게임은 국가의 왕을 지키는 것을 중심으로 짜여져 있다. 저자들은 이러한 논리를 '나무형 사유'라고도 부르는데, 뿌리와 줄기가 가지와 잎이 일직선으로 연결되어 있는 이러한 국가형 사유 모델이 지난 이쳔년 동안 우리의 현실과 사유를 동시에 지배해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유 방식은 항상 위계적이고 중심적이며, 천상적인 성격을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궁정의 게임인 장기와 달리 동양의 재야 선비들의 게임인 바둑은 모든 돌=주체가 평등하며, 따라서 왕도 신하도, 주체도 객체도, 또 이미 정해져 있는 길도 없는 유목적 사유의 전형을 보여준다. 즉 최근의 인터넷처럼 모든 돌이 동일한 주체로서 다양한 연결로와 교통망을 통해 평등하게, 또 계속 새로운 사유를 함께 만들 나가며 여기저기서 즐거움을 창조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중심도, 주체도, 위계도 없는 사유의 유목민인 셈이다. 그리고 장기가 기호학의 법칙을 추구한다면 바둑은 다양한 연결선들의 봉쇄와 차단과 연결과 접속으로 짜여지는 거대한 네트(net)적 사유의 창조 행위 자체를 만든다. 이 네트워크적 사유가 리좀형 사유이며, 이것은 국가냐 아니면 아나키냐 하는 대립축으로 문제가 설정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비질서들'의 접속들이 새로운 시대의 모럴이 되어야 한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새로운 모럴이라고 부를 수 있는 리좀적 사유가 몸없는 기계와 유목적 사유가 만나 네트워크에서 어떤 질서를 만들지만, 그렇다고 그 질서가 또 다른 질서도, 또 무질서도 아닌 무수한 비질서들의 공존과 접속이라는 새로운 사유를 극한까지 밀고 나가고 있다.

 

여기서 리좀’-‘기계’- '배치'-'되기'(becoming)- ‘재배치 개념이 만난다.

 

(고명섭이 바라본 것, 재인용) '배치'는 『천 개의 고원』을 떠받치고 있는 개념적 토대이자 전략적 거점이다. 이 배치 개념을 이해하려면, 배치의 요소라 할 '기계'라는 독특한 개념에 먼저 익숙해져야 한다. 들뢰즈는 각종 생명체들을 포함해 모든 개체들을 두고 '기계'라고 부른다. 왜 기계인가. 다른 것들과 접속함으로써 그 자신의 속성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개체들은 각자 변치 않는 단일한 속성을 지닌 단독체가 아니라 다른 것들과 어떤 식으로 연결되느냐에 따라 성격이 달라지는 존재다. 기계는 접속을 통해 기능이 규정되는 존재인 셈이다.

 

이 기계들이 접속하여 선을 이루고 나아가 면을 이루면, 그 장을 가리켜 '배치'라고 한다. 기계들의 배치가 말하자면 '기계적 배치'다. 그러나 배치에는 '기계적 배치' 외에 '언표적 배치'도 있다. 모든 기계들은 무작위한 배치 이면에 일정한 자기 룰을 정하는 규칙이 암암리에 만들어진다. 생명체들이 감수분열하는 과정과 비슷하다. 그 규칙이 바로 '언표적 배치'다. 이 기계적 배치와 언표적 배치가 합쳐져 어떤 고원을 성립시킨다. 세계란 기계적 배치와 언표적 배치가 합쳐진 장, 고원이다.

 

들뢰즈는 배치를 이루는 모든 기계를 가리켜 '욕망하는 기계'라고 부른다. 이때의 욕망은 '차이를 생성하는 욕망'을 뜻한다. 들뢰즈는 모든 개체에 이런 욕망이 있다고 본다. 그러니까 모든 개체의 존재양식은 '차이의 생성'이다. 스스로 변화하고 달라지는 종결 없는 과정이 개체들의 운명인데, 이 차이생성의 일시적 응결 형태가 존재이고 동일성이다.

 

"동일성의 섬들은 차이생성의 바다 위에 구성되고 해체된다."

 

이 욕망하는 기계들의 배치는 그 욕망 때문에 끝없이 해체되고 변화할 수밖에 없다. 어떤 배치가 만들어지는 것을 '영토화'라고 하면, 그 배치가 풀리는 것이 '탈영토화'이고, 그 배치에서 벗어나는 것이 '탈주'다. 욕망이 있는 한 기존의 배치를 뛰어넘으려는 움직임은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다른 삶, 다른 존재방식, 지금의 나를 규정하고 있는 울타리 바깥을 꿈꾸게 된다." 이때 "그 배치를 바꾸고 싶은 욕망, 그 욕망은 우리의 삶을 지탱해주는 생명의 불꽃과도 같은 것이다."

 

이렇게 다른 삶으로, 바깥으로 이행하는 것을 두고 들뢰즈는 '되기'(becoming)라고 부른다.  '되기'의 존재론적 지평 위에서 이제 윤리학적 사유가 펼쳐진다. '되기'는 차이를 가로지르는 실천적 활동이다. 흑인과 백인의 차이, 남자와 여자의 차이에서 볼 수 있듯 차이가 차이로 남아 그 차이들의 관계가 굳어질 때, 이 차이를 뚫는 저항과 창조의 행위가 바로 '되기'이다.

 

"되기론은 동일성의 고착, 그리고 그렇게 고착된 동일성들 사이에 성립하는 차이의 윤리를 극복하기 위한 사유다."

 

'흑인 되기' '여성 되기' '아이 되기' '장애인 되기'가 되기의 구체적인 모습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소수자되기’라고 할 수 있다. '소수자 되기'는 모든 되기의 보편적 지평이며, 정치적 실천의 윤리적 토대가 된다. 소수자 되기를 통해, 자기 내부의 '다수자'를 극복하고 기존의 지배질서를 바꿔 새로운 배치를 창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카19,1-10

 

 

사랑의 ‘소수자되기’의 원본은 바로 예수님이다. 그 사랑이 ‘돌무화나무’를 통해 ‘자캐오되기’를 낳는다,

 

복음을 읽어본다.

 

 

그때에 1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들어가시어 거리를 지나가고 계셨다. 2 마침 거기에 자캐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세관장이고 또 부자였다. 3 그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 애썼지만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 4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 그곳을 지나시는 예수님을 보려는 것이었다. 5 예수님께서 거기에 이르러 위를 쳐다보시며 그에게 이르셨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6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였다. 7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8 그러나 자캐오는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10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라고 전하는 루카19,1-10은 루카복음에만 있는 특수사료로 ‘잃었던 이들 되찾기’를 통해 우리에게 어떤 ‘축복’의 메시지를 주시는지 생각해 보기로 한다.

 

자캐오라는 입체적 인물을 통해 우리에게 주는 축복은 오늘, 지상의 교회가 십일조 혹은 재물의 사회적 환원, 혹은 자선에 대한 태도, 재물의 재배치라는 점에서 중요한 사료에 해당한다.

 

자캐오가 자신의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다른 사람의 것을 횡령했다면 네 곱절로 갚겠다고 하는 8절을 구원의 대전제로 바라본다면 이는 중세의 면죄부나 유물론적 사고, 유전무죄 무전유죄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 글은 구원을 받기 위한 대 전제는 돌무화나무에 올라간 사건이라는데 초점을 맞춰본다, 자캐오가 기쁘게 예수님을 집으로 맞아들였다는 것이 구원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결과에서 원인을 소급하지 말자. 원인이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 원인과 결과는 함께 동행한다는 사실이 구원에도 예외없이 적용된다.

 

루카19,1-10 주체는 Ⓐ자캐오, Ⓑ예수님, Ⓒ사람들, Ⓓ자캐오Ⓔ예수님, Ⓕ돌무화나무다. 어느 성서해설서에도 돌무화나무의 메타포는 주목하지 않는다. 키가 작았다에서 곧바로 자캐오의 재물반환으로 직진한다.

 

루카 19장, 1-10절은 루카 18장 18-27에 나오는 <부자가 추종을 거부하다>고 전하는 하느님 나라와 부자의 관계를 다시 한 번 다른 각도에서 재조명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복음 사가가 가난한 이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기도 하거니와 부자와 라자로의 관계처럼 언뜻 부를 폄하하는 듯한 이런 시선들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루카, 1825)

 

왜 사람들이 동네 동백꽃이 피는데, 굳이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가는가?를 자신에게 물어보면 그 답을 알 수 있다. 그 어떤 것에서도 충족될 수 없는 존재의 목마름을 부와 가난이라는 대척점에서 제시한 것이라고 바라볼 때, 우리의 시선은 다른 차원의 구원을 바라보게 된다.

 

부 자체의 폄하가 아니라 부든 명예든 세속의 그 어떤 가치관도 우리 자신의 궁극적인 충족이유율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부는 하나의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 라고 하신 것이다. 하느님과의 유일한 관계를 먼저 정립하라는 것이다.

 

다시 자캐오로 돌아가서,

 

신약성서에서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인물은 아마도 자캐오가 아닐까 싶다. 자캐오가 예수님을 만나는 과정은 아이들의 상상력을 충분히 자극하고도 남을 만큼 천진난만한 명랑성이 내재해 있다. 아이들이 언제나는 아니지만, 대부분 옳다.

 

자캐오에서 뿜어져나오는 친진난만한 이 명랑성은 사실 그의 삶과는 일치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알다시피 당시 로마인들에게 부역하여 동족에게 과도한 세금을 걷는 세관장이고, 그것을 수단으로 부를 축적한 부자. 그의 이름이 공공연하게 불렸다는 것에서 그는 죄인으로 멸시받으면서 동시에 유명세를 타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의 천진난만한 명랑성은 아니러니 하게도 자캐오의 가시, 약점으로 생각했을 그의 윤리적 육체적 콤플렉스에서 가능했다는 것이 축복의 문을 여는 중요한 포인트에 해당한다. 자캐오의 아킬레스건, 그 약점이 그를 구원으로 인도했다는 것.

 

그런 맥락에서 루카19,1-10에서 묵상의 핵심은 4절부터라고 할 수 있다. 4절은 ‘보다’라는 동시에서 파생한 어절들이 연쇄적으로 나온다. -보려고 애썼지만, 볼 수가 없었다. 보려는 것이었다. -위를 쳐다보시며, - 보십시오. 자캐오로 하여금 그토록 간절하게 예수님을 보려고 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현실에서 그는 그 무엇으로도 충족되지 않은 결핍을 느꼈다는 것이다. 그 존재의 배고픔이 그로 하여금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는 호기심을 낳았고 그로 하여금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가게 만들었다.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4)

 

루카19,1-10에는 예수님, 예수님을 따르는 군중들, 그리고 사람들, 자캐오가 나온다. 아무도 돌무화나무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주목하지 않는다. 자캐오는 돌무화나무 위에서 예수님을 내려다보고, 예수님께서 거기에 이르러 위를 쳐다보시며(5) 구원의 증인이 돌무화나무다. 오 복된 나무여!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5)-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였다.(6)

 

그렇다면, 4절과 5절, 6절 사이에 무엇이 있었을까? 그 많은 군중에 둘러싸인 예수님은 어떤 외적인 군중들의 환호를 듣거나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듣고, 보고 계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구원이라 부른다. 8절의 자캐오의 재산 환원의 결단에 이어 9절과 10절에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라고 하는 이유에 대해 성서해설서들은 그가 자발적으로 재물을 나눴기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굉장히 유물론적인 해석이고 중세적 해석이 아닐 수 없다.

 

우리의 행위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는 것일까? 악의 인과응보가 없다면 선의 인과응보도 없다고 할 수 있다. 자캐오의 구원은 3절~7절 사이에서 연쇄적으로 나오는 <보다>라는 동사의 변형 어절에서 이미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보려고 애썼지만, 볼 수가 없었다. 보려는 것이었다. 위를 쳐다보시며, 보십시오.

 

8절에서 자신이 부당한 방법으로 축적한 재산에 대한 환원은 자신이 이미 구원받았음을 알게 된 사람이라면, 감사의 예로 당연히 나오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구원받은 사람은 누구나 그렇게 할 수 있다. 재물이 있으면서 타자에게 인색한 것은 사실 자신이 구원받았는지를 실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감사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어린이들이 자캐오를 좋아하는 이유에서 그것을 다시 학인 할 수 있다. 아이들이 자캐오를 입체적으로 기억하는 이유는 8절에서 <보십시오> 이후에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이들과 나눴다거나 착취한 이들과 나눴다는 부분이 아니라(교리교사는 그러니까 착하게 가진 것을 나눕시다에 방점을 찍겠지만, 이것은 정의지. 구원의 사랑이 아니다.) 3~6절에서 예수님을 보려고, 알려고 하는 그의 역동적인 행위 때문에 아이들은 자캐오를 입체적으로 기억할 것이다. 그렇게 많은 군중에 둘러싸인 예수님이 자신의 옷자락 끝을 잡은 여인을 알아차리듯, 자캐오를 알아보았다는 그 신비스런 만남 때문이다. 그 만남이 구원이고 그 구원이 아이들로 하여금  ‘자캐오되기’ 를 꿈꾸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자캐오가 왜 그렇게 예수님을 만나려고 했는지 알 수 있을듯하다. 그는 자신의 진정한 존재감을 알고 싶었던 것이다. 이것은 누구나 갖고 있는 존재이유이다. 어떤 글에서처럼, 그가 의지하고 살았던 것이 무엇인지? 그가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 그런 맥락에서 그분으로 인해 내가 누군지 알게 되는 것, 내가 진정으로 그리워했던 것은 그분이라는 것을 바라보는 것, 세상이 주입시키는 나, 내가 욕망하는 나가 아니라, 즉 세관장 자캐오, 부자 자캐오, 키가 작은 자캐오, 죄인 자캐오가 아니고 예수님을 알고 싶어 하는 자캐오, 그래서 자신이 누군지 드디어 알게되는 자캐오 예수님과 자캐오 사이에 그 어떤 것도 개입되지 않은 그 상태, 그 상태가 구원이다. 루카복음에서 ‘잃었던’ 이라는 형용사는 자기 존엄성에 대한 <잃음-되찾기>라는 키워드는 통해 내가 누구인가를 알게 되는 사건을 구원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누군지 알게 된다는 것은 내가 진정 의지할 것이 무엇인지, 내가 그리워 할 것이 무엇인지 알게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4절에서 돌무화나무를 다시 생각해 볼 차례다.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4)

 

자캐오와 예수님의 만남에 동원된 돌무화나무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우주가 동원되었다는 영성가들의 표현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확인하게 한다.

 

(4절을 읽고, 산책을 했다. 우주의 모든 것이 다 나에게 반짝이며 말하고 있었다. 하늘과 땅에 있는 온갖 사물, 그리고 산책로에서 지나가는 사람들, 냉이를 캐고 있는 할머니까지...구체적으로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 학문의 길에서 만났던 상호텍스트성의 길을 걷게 만들었던 선학들, 종교안에서 만났던 모든 성인성녀들, 형제, 재매들, 모두가 그분이 누군지 보려고 하는 나에게 기꺼이 돌무화나무가 되어주었다. 지난날 내가 했던 어처구니없는 실수조차 그분이 누군지, 내가 누군지 알게 되는데 꼭 필요했던 돌무화나무라는 생각이 들어서 걷다가 멈출 수밖에 없었다. 산책로에서 잡목을 제거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 옆을 지나갈 때 훅 하고 나는 풀냄새와 나무 냄새에서 오래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만났다. 내 기억의 시냅스층의 99.9%는 어머니가 차지하고 있다, 기일이나 기억할까 잘 웃지 않으시던 아버지가 너무나 가깝게 계셨다. 아버진 가을에 늘 행복하셨고, 잘 웃으셨다, 특히 등산하고 오시면 식물도감에나 있을법한 산열매나 버섯을 잔뜩 가지고 오셨다. 그 아버지를 통해 받은 생물학적인 유전자는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엄청난 돌무화나무였던 셈이다.)

 

그런 맥락에서 루카19,1-10에서 우리 삶에서 구원의 퍼즐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볼 수 있는 축복의 그림,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구원은 내가 추구하는 것이, 내 결핍을 내 뜻대로 채울 수 없다는 것을 바라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때 내 결핍은 나도 또 그 누구도 해결해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런데, 그 결핍이, 약함이, 가시가 그분을 만나게 한다는 것을 바라보는 축복의 역설, 이것을 바라보지 않고 그분을 만나려했다면 얼마나 좋은 일일까? 그런데 그런 사람은 없다. 복음사가는 자캐오를 ‘잃었던’ 사람으로, 그분을 잃었기 때문에 자신도 잃었던 사람으로, 그분을 만나고 자신도 만난 사람의 전형적인 인물로 우리에게 소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잃었던 것은 그분과의 만남을 상실한 것이고, 그분을 만나는 것은 곧 내가 누군지를 알게 되는 사건이고, 그분과 나를 알 때, 내가 의지하고 위로받아야 하는 그 유일한 실재가 무엇인지, 그것을 알려주기 위해 이 우주는 우리의 인생여정 중에 모든 것을 동원하고 있었다는 것. 또 그것을 바라보았다면 기꺼이 타자에게 자신의 것을 무엇이든지 나눌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캐오를 통해 결핍이나 약함, 죄나 가시가 곧 축복으로 가는 문이라는 사실을 바라보는 것, 그리고 그 기쁨을 타자와 기꺼이 나누게 되는 것! 그것이 루카19,1-10이 전하는 대-축복의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 애썼지만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3)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4)예수님께서 거기에 이르러 위를 쳐다보시며 그에게 이르셨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