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나뭇잎숨결 2022. 10. 26. 11:01

 

by 분이가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연 중 제 30  (다 해) 2022. 10. 23. Luc.18,1-8 ]

 

 

1. 고정희, 「어머니, 나의 어머니」

 

 

내가 내 자신에게 고개를 들 수 없을 때/나직히 불러본다 어머니/짓무른 외로움 돌아누우며/새벽에 불러본다 어머니/더운 피 서늘하게 거르시는 어머니/달빛보다 무심한 어머니//내가 내 자신을 다스릴 수 없을 때/북쪽 창문 열고 불러본다 어머니 / 동트는 아침마다 불러본다 어머니//아카시아 꽃잎 같은 어머니/이승의 마지막 깃발인 어머니/종말처럼 개벽처럼 손잡는 어머니//천지에 가득 달빛 흔들릴 /황토 벌판 향해 불러본다 어머니/이 세계의 불행을 덮치시는 어머니/만고(萬古) 만건곤(滿乾坤) 강물인 어머니/오 하느님을 낳으신 어머니

 

 

고정희 시인의 「어머니, 나의 어머니」에는 열세번이나 어머니를 불러야 하는 상황이 나온다. 우리가 어머니를 부르는 상황이나 시인이 어머니를 부르는 상황은 거의 비슷하다.

 

자신이 한없이 약해졌을 때, 가장 작은 자로 돌아갔을 때, 더 이상 걸어갈 힘을 잃었을 때, 우리는 단말마처럼 어머니를 부른다. 전쟁 중에 죽어가던 젊은이들이 마지막으로 부른 이름도 어머니였다는 것에서 어머니는 나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화자는 이 세상에서 받은 모든 상처의 치유자이신 어머니, 마지막 귀의처이신 어머니를 부르다, 나의 개별적인 체험의 어머니에서 ‘만고(萬古) 만건곤(滿乾坤) 강물인 어머니를 바라보게 된다. 인류의 어머니, 영원 세세 대대로 모든 이의 어머니, 드디어 신을 낳은 어머니로 그 의미가 확대된다.

 

“만고(萬古) 만건곤(滿乾坤) 강물인 어머니/오 하느님을 낳으신 어머니

 

마지막 행의 “오 하느님을 낳으신 어머니”에서, 어머니를 부르다 어머니가 된 ‘어머니 되기’가 고정희 시에서 어머니가 갖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의 시선처럼 어머니는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되었다는 점에서 하느님을 낳으셨다는 표현은 어머니야말로 사랑과 자비의 모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을 바라보는 것은 어머니가 되어보지 않고는 알 수 없다. 생물학적인 어머니가 아니라 사랑과 자비의 모태가 되어보지 않고는 이 세상을 떠날 때 왜 마지막 부르게 되는 이름이  어머니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아무개를 낳은 생물학적인 어머니가 아니라, 혹은 신화적으로 각색된 어머니가 아니라, 사랑의 기능적 어머니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생물학적인 어머니든, 기능적 어머니든, 어머니는 인류의 심장을 가장 치명적으로 사로잡은 장본인이다. 나직히, 뜨겁게, 어머니를 부를 수 있는 것이 축복이기에 그렇다. 온갖 자본이 만드는 이데올로기의 난무 속에 무엇이 ‘어머니’에게 이 신적인 월계관을 씌워준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긍휼(矜恤)’이라는 모성의 속성에서 이 세상의 그 어떤 상처도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by 분이가

 

 

 

 

2. 헨리 나우웬, 상처받은 치유자가 되어

 

 

 

이 글은 [‘상처받은 인간’으로, ‘상처입은 그리스도’를 만나, ‘상처입은 치유자’가 되어]의 연장선에서 쓴 글이다.

 

영성에 관심이 있는 이들에게 헨리 나우웬 신부 하면 상처받은 치유자의 길을 걸어간 사제로 기억되고 있다. 나우웬 공동체라는 말이 있듯, 나우웬 신부의 영성을 집약하는 것은 어머니적인 치유의 힘, <긍휼>이라고 할 수 있다.

 

긍휼은 우리에게 상처가 있는 곳으로 가라고, 고통이 있는 장소로 들어가라고, 깨어진 아픔과 두려움, 혼돈과 고뇌를 함께 나누라고 촉구한다.

 

긍휼은 우리에게 비참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울부짖고, 외로운 사람들과 함께 슬퍼하며, 눈물 흘리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도전한다.

 

이것은 새로운 자아, 새로운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성취할 수 있는 바에 달려 있지 않고 우리가 받고자 하는 바에 달려 있다.

 

긍휼은 태생적인 자아가 아니라 후천적 자아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하느님의 긍휼에 우리도 동참하라는 명령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경쟁적인 자아라는 환영과도 같은 가면을 벗어 버리고, 자아 정체성의 근원으로서 상상에 근거한 자신만의 특징에 집착하지 말고, 예수님이 하느님과의 사이에서 경험하셨던 것과 동일한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취하라고 요청하신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신비다.

 

 

긍휼은 직접 그 사람들에게로 다가가 고난이 가장 극심한 곳으로 들어가 거기에 자리 잡는 것이다.

 

긍휼은 특권적인 위치에서 허리만 구부려 소외된 자들에게 향하는 것이 아니다. 긍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에 있는 좀 더 불운한 자들에게 손을 뻗치는 것이 아니다. 긍휼은 상향성의 삶을 성취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동정 어린 태도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되는 것이다.

 

인내는 시계 시간을 쫓아내고 새로운 시간, 즉 구원의 시간을 드러낸다. 이 시간은 시계나 달력으로 측정되는 추상적이고 객관적인 단위의 시간이 아니라, 내면에서 충만하게 살아 내는 시간이다.

 

그러기에 긍휼의 시간은 인내의 시간이다. 이 인내의 시간이 역설적으로 인간의 가장 충만한 시간체험과도 관련되어 있다. 영원한 시간의 문이 궁휼이다. 위대한 사건들은 모두 이 충만한 시간 속에서 일어났다.

 

긍휼과 기도, 도란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하느님은 우리를 통해서 무엇이든 하실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제자된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우리의 힘, 소망, 용기, 확신의 전부-일부가 아니라-를 발견한다. 그러므로 기도야말로 우리의 가장 우선적인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

 

기도는 긍휼에 다가가는 길이다. 빈손으로, 벌거벗고 나약한 모습으로 하느님의 현존 앞에 서서, 하느님 없이는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최선을 다하라. 그리하면 나머지는 하느님이 알아서 하실 것이다”라고 충고하는 오늘날의 지배적인 분위기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많은 사람들은 기도를 생각할 때 다른 사람들과의 분리를 연상하는 경향이 있지만, 진정한 기도는 동료 인간들과 더 가까워지게 해 준다. 기도는 긍휼에서 첫 번째요, 없어서는 안 될 훈련 덕목이다. 왜냐하면 기도야말로 인간들 사이의 결속의 첫 번째 표현이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우리 안에서 기도하시는 영은, 모든 인류를 하나로 불러 모으시는 영이기 때문이다. 평화와 연합과 화해의 영이신 성령은 자신을 끊임없이 우리에게 드러내시되, 그 능력을 통해서 가장 다양한 사회적ㆍ정치적ㆍ경제적ㆍ인종적ㆍ민족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같은 그리스도의 자매요 형제로서 그리고 같은 하느님 아버지의 딸과 아들로서 한데 모으시는 분으로서 드러내신다.

 

긍휼 어린 기도는 긍휼 어린 행동을 이끌어 낸다. 그러므로 기도와 행동은 절대로 모순되거나 상호 배타적이지 않다.

 

행동 없는 기도는 무력한 경건주의가 되기 쉽고, 기도 없는 행동은 의심스러운 조작으로 전락해버린다. 기도가 우리를 긍휼 어린 그리스도와의 좀 더 깊은 관계로 인도한다면 그것은 항상 구체적인 섬김의 행위를 동반한다.

 

우리가 표현하는 모든 아니오는 우리 자신의 회심을 요구한다. 이런 의미에서 맞대결은 항상 자신과의 맞대결을 포함한다.

 

나우웬 신부는 우리가 인종차별의 불의를 보고 ‘아니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의 완고함을 직시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전한다. 우리가 세상의 굶주림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부요함을 깨달을 것을 촉구한다. 우리가 전쟁에 대해 ‘아니요’라고 말한다면 우리 자신의 폭력성과 공격성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압제와 고문에 대해서 ‘아니오’라고 말하려면 우리는 자신 자신의 타인의 고통에 대해 무감각함을 솔직하게 다루어야만 한다.

 

긍휼의 영성을 끊임없이 세상에 전한 헨리 나우웬(1932년~1996년)신부는 궁휼은 무력함을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이 무력함 가운데서 하느님의 사랑의 무한함을 계시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고 전한다. 여기서 우리는 긍휼의 진정한 의미를 보게 된다. 긍휼은 우리에게 연약한 사람들과 함께 연약해지고, 상처 입기 쉬운 자들과 함께 상처 입기 쉬운 자가 되며, 힘없는 자들과 함께 힘없는 자가 될 것을 요구한다. 그러기에 긍휼이란, 인간됨이라는 상황 속에 푹 잠기는 것을 의미한다.

 

 

 

 

 

 

 

 

3.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

 

 

 

마태오 28,16-20을 읽어본다.

 

그때에 16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17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18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고 전하는 마태오 28,16-20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축복의 메시지를 주시고 있는지 생각해 보기로 한다.

 

마태오 28,16-20은 문장 맥락상 상 Ⓐ, Ⓑ, Ⓒ, Ⓓ, Ⓔ로 나누어 지기도 하지만, 실은 다섯 개의 축복으로 이루어진 마태오복음 전체의 메인 단락이라고 할 수 있다. 마태오 28,16-20이 복음사가가 최종적으로 전하려 하는 메인 축복이라는 것을 바라보기 위해 우리 안에 고정관념처럼 자리한 전교에 대한 일반적인 시선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

 

(1)전교는 하느님나라로 이 세상이 재편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특정 종교의 교세확장에 총력을 집중하라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러기에 세상이 교회를 허용했다는 것에 교회는 우선 멈춰야 한다. 허용은 수용이 아니다. 종교는 더이상 이 세상과 싸워 이길 수 없다는 치외법권적인 포기라고 보면 된다. 

 

(2)전교는 시혜의 위치에 있는 이들이 수혜자에게 다가가는 우월적인 행위가 아니다. 선과 악으로 확연히 나눠진 곳도 없다. 그러기에 교회 밖으로 나가는 행위 이전에 교회 안으로 가장 깊숙이 들어가 하늘이 우리에게 준 축복이 무엇인가를 바라보야 한다. 몇 명이 입교했는지만 물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몇 명이 교회를 떠났는지도 물어야 하기 때문이다. 

 

(3)교회는 그 자체가 전교의 주체이자 끊임없이 다시 태어나야 하는 전교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4)또한 비-그리스도적 혹은 반-그리스도적 가치관이 세상을 압도하고 있는 상황에서 신앙인으로 삶을 살아낸다는 자체가 이미 전교의 현장에 파견된 것이고, 선교의 최전방으로 투입된 거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5)21세기에 예수님을 모르는 이들은 거의 없다. 또한 예수님의 애주애인의 가르침을 모르는 이들도 거의 없다. 다만 그것이 21세기적 가치관에서 끌어당김의 법칙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선교 혹은 전교는 궁극적인 선교의 주제이자 대상인 우리 자신이 어떤 축복속에 놓여있는지에 대한 신원확인에 관한 재정립이 우선이라고 할 수 있다. 돈이 축복의 전부라고 말하다가 그런데 예수님 믿을래? 이런 영적 분열상을 노출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것을 죽어서 혹시 모르니까 천국 아니면 연옥이라는 보험을 들어놓는 것이 아니다. 내가 지금 천국을 산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를 스스로에게 자문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6)마태오 28,16-20에서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그 전교의 주체는 곧 전교의 대상이기도 하다는 것은  우리가 믿는 이가 누구이며 나는 왜 그분을 믿는가라는 신원의식에 대한 재천명과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고 있다.

 

마태오 28,16-20을 통해 전교의 주체가 곧 전교의 대상이라는 것을 살펴보아야 할 이유이다.

 

17절은 우리 자신이 먼저 정립하고 지나가야할 부분으로 유다이스가리웃을 제외한 열한 제자의 모습이 <경배와 의심>이라는 상반된 행위로 드러났다는 것에 주목해 보자.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도 ‘더러는’ 의심이 남아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단적으로 그들이 어떤 축복의 상황에 놓여 있는지 아직은 바라보지 못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17절에 나오는 경배하는 그들과 의심하는 그들은 다른 두 부류의 제자로 바라볼 수도 있겠지만, 우리 안의 두 사람으로 볼 수도 있을 때,

 

이어지는 18절과 20절은 경배와 의심 사이, 그 경계에 살고 있는 우리가 어떤 축복의 메시지를 놓치고 있는지 바라볼 수 있다

 

(삼일동안 18절과 20절에 묶여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글을 전개시킬 수 없을 정도로 18절과 20절이 주는 강력한 영적 아우라에 잠겨 내가 받은 축복, 인류가 받은 축복을 바라보느라 묵상을 진행할 수가 없었다. 점점 너무 뜨거워서져서 그것을 식히는데 시간이 걸렸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18)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20)

 

믿음의 혼란은 우리가 지금 누구를 믿고 있는지 망각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이 망각은 실체가 없어서 망각되기도 하지만 실체를 보고도 망각하기도 한다는 데에 초점이 놓여 있다.

 

왜 실체를 보고도 망각하게 되는가? 그것은 실체가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보여, 즉 이 시대의 가치관으로 온전히 흡수되지 못해서기도 하지만, 실체 자체가 너무 커서 내 품으로는 그 실체를 다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18절과 20절은 바로 후자의 예에 해당한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18)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20)

 

18절과 20절은 예수님은 당연히 하느님의 아들이니까, 라고 한번 빨리 읽고 지나갈 문장이 아니다. 곱씹어서 천천히 삼키면, 즉 그분의 육성이 들릴 정도로 묵상을 하게되면, 예수님의 강생 신학, 십자가 신학, 부활 신학이 총망라된 예수님 정체성의 전체적인 그림을 바라보게 된다.  어떤 화가가 그린 종교화 앞에서 문득 발을 멈추고, 그 그림에서 뿜어져 나오는 영적 아우라에 자신도 모르게 손을 모으기도 한 경험이 있다면. 플란다스의 개라는 어린이 만화에서 네로가 보려고 했던 성화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 축복을 보았다면. 18절과 20절은 바로 언어로 표현된 영적 불랙홀과 같은 축복의 소용돌이 문장이라는 것을 바라볼 수 있다. 18절과 20절을 예사로 지나치면 전교는 기계적인 인간의 집단확장의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된다. 전교는 예수님의 이름을 파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심장에 끌리는 것이다. 

 

우리가 전하려고 하는 그분이 어떤 한 나라의 대통령급이 아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으신 분이라는 사실이다. 이 스케일이 집값이 얼마나 떨어졌는지 올랐는지, 돈,돈,돈에만 신경이 쓰인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로 전달 될까? 이 메카톤급의 축복은 그 축복이 너무 커서 그냥 지나치기 일쑤다. 사실 18절의 문장이 지닌 축복을 바라본다면 언젠가는 이 세상은 하느님나라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당연하게 바라보게 된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걱정 자체를 안하게 된다. 나 또 누군가 전교의 최일선에 나서지 않아도 그렇게 될 거라는 사실 자체를 의심하지 않게 된다. 들뢰즈가 간파한 대로 모든 물방울이 결국 바다로 흘러가는 이치와 너무나 같기 때문이다. 하느님 나라는 그냥 사필귀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순례의 여정중에  선교의 최일선에서 그것을 미리 바라보고 그 축복을 기쁘게 살아낼 때,(우리가 어떤 축복 속에 놓여 있는가를 바라보는 것), 삶이 축복임을 아는 것과 삶이 축복인지도 모르는 삶은 그 자체의 빛과 질이 어떻게 다른지 목격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 나라의 선험적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떤 실체를 이해하는 것은 지식이나 표상적 인식의 차원을 너머서는 근원 인식을 바라보는 것이기에 그렇다. 근원을 바라보는 행위를 영성가들은 치유의 기적이라고 말한다. 환상을 실재화하는 것이 의심이라고 할 때 의심은 타자와 자신에 대한 공격이고 두려움이라고 본 것이다. 그 의심을 넘어 그분을 경배할 수 있다면 그는 이미 치유받은 치유자가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 부활 후, 갈릴레아로 다시 돌아간 제자들이 하늘과 땅의 권한을 다 받았다는 18절의 의미를 어떻게 한순간에 통찰할 수 있었을까?를 묻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어지는 19절과 20절에서 ‘그러므로’ 이후에 이어지는 선교의 내용은 18절이 어떤 행위가 가능하게 되는가를 보여준다. 18절을 바라보았다면 19절과 20절은 자동반사적인 행동에 가깝다. 원인과 결과는 언제나 함께 동행한다. 원인이 흔들리면 결과도 흔들린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제자들의 상황----- 그들은 얼마전까지 십자가사건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이들이다. 공생활-수난-죽음-부활-승천이라는 일렬의 사건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목격한 그들이 그리스도론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은 예수님 부활이후, 베드로의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겠오, 다른 제자들도 우리도 함께 가겠오”(요한복음)에서 그들이 처음 자리로 돌아간 갈릴레아행에서 그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게 자신조차 추스르지 못하던 그들에게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엄청난 선교의 몫이 주어졌다는 것! 이것은 언뜻, 그들에게 능력이상의 것을 요구하고 있는 거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들조차 미처 다 배우지 못한 것을 모든 민족에게 가르쳐야 한다는 전교의 사명은 기계적인 사명이 아니라, 어떤 축복의 이름이라는 것을 바라볼 수 있을 때 마태오 28,16-20의 전체적인 맥락이 제자들에게 준, 또 제자들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 온 축복의 메시지를 바라보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에서 

 

‘그러므로’는 인과접속사이다. 18절이 원인이라면 19절과 20절은 그 결과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이런 성찰을 하게 된다. 전교는 메시지와 메신저가 같지 않아도 수행된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그것은 전교의 사명이란 전교의 주체가 곧 전교의 대상이라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전교 사명을 주면서 제자들에 대한 영적 치유가 병행되고 있었음도 바라볼 수 있다. 이 치유는 과거 그들의 행위를 '간과'한 데서 시작된다. 19절과 20절이 완벽한 결론이기 위해서 20절이 그것을 받쳐준 것에서 이를 다시 확인할 수 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여기서 이런 묵상을 계속 할 수 있다. 내가 선교의 최전선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저 나는 네 주님을 전하겠습니다! 성부와성자와성령의 이름으로 전하겠다는 단 하나의 갈망만 있으면 된다. 그 갈망은 어떻게 생기나? 내가 받은 축복이 무엇인지 알면 그 갈망은 저절로 생긴다.

 

내가 어떻게 그 일을 수행할지? 내가 그 일을 수행할만한 인물인지의 여부는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진리는 진리의 길을 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분의 정체를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한 상황에서 네 주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라는 응답, 그 용기는 제자들의 어떤 상태에서 가능했을까?

 

이제, 16절로 돌아가 보자.

 

그때에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 현장에서 왜 더 멀리 도망가지 못한 것일까?를 질문해야 한다. 3년전, 고기를 잡던 갈릴레아로 다시 돌아간 그들에게 부활 후 그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 제자들로 하여금 베타니아 근처의 산으로 가서 당신의 분부를 따르도록 만든 그것! 배신과 실망, 여전히 남아 있는 의심...이런 정서의 폭풍에도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를 끊지 못하게 하는 그것!

 

제자들에게 예수님과의 이별이, 이별이 되지 못하게 한 ‘그것은’ 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3년 동안 주었어도 다 주지 못한 사랑이었을 것이다. 3년동안 받았어도 다 받지 못한 사랑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준 사랑, 그들이 예수님에게 준 사랑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믿음도 희망도 아닌 그냥 순수한 그 사랑이었을 것이다. 아무 것도 개입되지 않은 그 순수한 사랑이 그들을 치유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제자들에게 준 전교소명은 그들이 불굴의 의지로 네! 하겠습니다!고 답한 것이 아니라, 전교의 주제가 전교의 대상이라는 것을 그들이 이젠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세상과 교회는 선과악으로 극명하게 나눠진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을 치유하면서 동시에 전교의 주체 역시 치유받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전교의 소명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을 축복하면서 자신도 축복받는 여정이 전교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세상을 축복하기 위해 먼저 축복받았음을 바라보라는 것이 마태오 28,16-20이 전하고자 하는 메인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축복을 바라보는 것은 사랑의 크기에 비례한다. 그 사랑을 가능케 하는 것이 성령이다. 성령의 그 사랑이 그분이 가신 길을 그들도 가게 만들었고. 그 길을 가다보니 예수님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고, 그리스도론을 그들도 쓰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글에서처럼 사랑은 사랑에 끌린다.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사랑 밖에는 없다. 사랑은 사랑에 끌릴 뿐만 아니라 사랑은 모든 것을 치유한다. 그 사랑이 그들로 하여금 그분을 온전히 믿게 만들었고, 그분 나라에 대한 희망을 유일한 희망으로 갖게 만들었을 것이다. 사랑의 묘약이다. 그것이 전교의 최일선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바라보아야할 비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고 전하는 마태오 28,16-20은 거대한 축복의 메시지, 치유기적 사화에 해당한다. 제자들은 예수님 공생활 동안 수많은 치유기적 사화를 목격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준 사명은 그들이 치유받지 않으면 결코 단 한 걸음도 나갈 수 없는 사명이었다.

 

전교는 그분이 공생활 중에 하신 일들을 제자들이 그대로 수행하는 일이다. 제자들이 치유받아야 할 부분은 그들의 몸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이었다. 마태오 28,16-20은 그들의 옛 마음을 새 마음으로 치유하신 사건, 공생활 중에 하신 모든 치유사화의 총체적인 그림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글의 도입부에서 비-그리스도 혹은 반-그리스도교 가치관은 사실 21세기 상처의 이름에 해당한다. 주어진 생존의 풍요로움에 결코 만족할 수 없는 채워도, 채워도 배고픈 소유욕망에 시달리거나 상대적 박탈감에 소유의 빈곤에서 공포를 느끼는 것 자체가 이미 몸과 마음이 무차별적으로 물질의 공격 앞에 상처받고 무너졌다는 단적인 증거라 할 수 있다.(은인과 지인들의 이름을 써놓고 그들은 어떤 고통에 시달릴까?를 기도하다보면 영적인 갈증 때문에 괴로워하는 이들이 없다. 모두 돈의 고통, 병의 고통을 안고 있다. 다 물질로 환원하는 고통을 안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리스도교 가치관으로 살라고 전하는 전교는 몸과 마음과 영혼이 총체적으로 상처난 인류에게 상처받은 치유자인 우리가 다가가 그분의 사랑을 전하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전하는 사람이 먼저 그리스도교 가치관으로 치유받지 않으면 세상은, 의사여 네 병이나 고쳐라, 라고 말할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서두에서 언급한대로 전교는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영성의 깊은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현장이 바로 전교의 최전선이기 때문이다. 

 

마태오 28,16-20은 문장 맥락상 상 Ⓐ, Ⓑ, Ⓒ, Ⓓ, Ⓔ로 나누어 바라볼 수도 있지만, 전교의 소명은 다름 아닌 다섯 개의 축복이 한세트로 우리에게 전해졌음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전교의 주체이자 대상으로, 우리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하면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가지신 분이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함께 있겠다는 고백을 만천하에 하는 것일까?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