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실재는 위협받을 수 없고, 비실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뭇잎숨결 2022. 11. 6. 21:57

 

 

 

실재는 위협받을 수 없고, 비실재는 존재하지 않는다(헬렌 슈크만)

- Reality cannot be threatened, and non-reality does not exist.

 

 

 

 

1. 천양희, 「생각이 달라졌다」

 

 

 

시를 읽어 본다.

 

웃음과 울음이 같은 이란 걸 어둠과 빛이/다른 이 아니란 걸 알고 난 뒤/音色이 달라졌다//빛이란 이따금/어둠을 지불해야 쐴 수 있다는 생각/웃음의 절정이 울음이란 걸 어둠의 맨 끝이/빛이란 걸 알고 난 뒤 내 독창이 달라졌다//웃음이란 이따금 울음을 지불해야 터질 수 있다는 생각/어둠속에서도 빛나는 별처럼 나는 골똘해졌네//어둠이 얼마나 첩첩인지 빛이 얼마나 겹겹인지 /웃음이 얼마나 겹겹인지 울음이 얼마나 첩첩인지 /모든 그림자인지//나는 그림자를 좋아한 탓에/이 세상도 덩달아 좋아졌다

 

 

천양희 시인의 「생각이 달라졌다」는 ‘득도’보다는 ‘득음’의 시에 해당한다.

 

웃음과 울음이 같은 음이라는 걸, 어둠과 빛이 같은 색이라는 것 알고 난 뒤, 음색이 달라지고, 독창이 달라지고, 어둠 속에서도 별처럼 골똘해 졌고, 그림자를 좋아하다보니 이 세상이 덩달아 좋아졌다, 고 화자는 술회한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짐에 따라 천국과 지옥으로 나눠지던 세상이 실은 내가 나눈 카테고리라는 것을 알게 된 후에 얻게된 득음의 상태에서 시인은 이 시를 썼을 것이다.

 

천양희 시인의 「생각이 달라졌다」는 득도의 시라고 하지 않고 득음의 사라고 한 것은 일찍이 랭보가 바라본 것처럼 시인은 곧 <견자>라는 맥락에서 바라본 것이다. 득도는 삶의 소용돌이를 평정한 상태라면, 득도는 소용돌이 그 자체가 된 상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득도가 산위에 은둔의 거처를 마련한다면, 득음의 시는 산 아래 저잣거리를 거처로 삼은 시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산위라든가 산 아래라든가 하는 구획 자체가 이 천양희 시에서는 무의미하다. 그 이유는, 눈물과 웃음이 같고,  어둠과 빛이 같다는 것은 사실 의사죽음을 체험하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극단적인 평정심이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시인이 나는 그림자를 좋아한 탓에/이 세상도 덩달아 좋아졌다 를 쓰고난 후, 세상을 떠나 고고에 자신을 은둔시키지 않고 세상 속으로 흔연히 걸어들어갔을 것으로 생각된다. 세상을 나누지 않고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자크 데리다의 시선과는 다른 의미의 자기 의식의 해체에서 가능했을 것이고, 그 의식의 해체에서 시인은 자유와 해방을 만끽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자유와 해방은 현상이 바뀌어서가 아니라 시선이 바뀌어서 자신이 자신에게 준 자유와 해방의 길일 것이기 때문이다.

 

 

 

 

                                                                     Book of Hosea

 

 

 

 

2. 인간이 성스러운 이유는 스스로 속해 있는 하나의 질서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에디시옹 드 미뉘)

 

 

 

자신이 자신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었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그것은 세상과 자신을 이분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가치와 무가치를 따지지 않았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세상과 끊임없는 대화의 상황에 자신이 놓여 있다는 것을 바라보아야 했을 것이다.  

 

이 글은 「타자의 담론 대화주의와 독백주의」에서 인용했던 바흐친의 대화주의를 다시 인용해 대화적 상황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기로 한다.

 

대화는 음성언어 차원에서 1차적으로 누군가와 발화의 주고받는 상황을 의미한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대화란 서로가 서로에게 속해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관계를 맺고 있는 나 이외의 모든 상대는 우주에 속해 있는 낱낱의 존재들과 관계를 맺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바라보는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대화적 상황에 주목했던  바흐친의 대화주의(dialogoism)와 독백주의(momologism)는 무엇인가

모든 인간은 꿈을 꾼다. 그 꿈은 희망과는 다른 차원의 꿈이다. 이때 꿈은 생존본능에 해당한다. 인간이 꾸는 꿈 중에서 가장 포기하기 어려운 꿈은 이 세상 순례가 '불멸'이 되길 꿈꾸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러시아의 석학 미하일 바흐친은 이를 “존재한다는 것은 소통한다는 것이며, 나 자신을 '창시하기' 위해서는 타자가 필요하다.”에서 그 답을 찾고자 한다. '불멸'은 이  땅 너머의 초시간적 개념이다. 그 초시간이  이 땅에서 시작되며, 그 시작의 단초를 '타자성'에서 찾는다. 

 

미하일 바흐친은 ‘무엇 무엇으로 존재한다’는 말 자체가 타자성을 필요로 한다고 보고 있다. 그것은 비단 인간에게만 국한되는 존재 조건이 아니라 모든 존재하는 것들에게는 그 홀로 존재할 수 없는 존재의 운명이 내재한다고 보는 것이다. 중력의 법칙, 별의 운행, 생태계의 먹이사슬, 인간의 유전자조차도 후대의 자손들에게 자신의 유전자를 남겨준다는 것이다. 또한 신조차도 인간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이렇듯, 인간은 자신의 존재이유를 타자가 지닌 타자성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고 본 것이다. 그 타자성의 증거가 소통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하나의 목소리는 아무것도 종결시키지 않으며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최소한 두 개의 목소리가 있어야 한다."(미하일 바흐친)

 

미하일 바흐친 연구자인 앨런 스윈지우드는 『문화사회학 이론을 향하여』에서 바흐친의 대화주의(dialogoism)와 독백주의(momologism)가 나와 너라는 관계를 넘어, 어떻게 문화를 형성하고, 그 문화가 주기적인 축제문화인 카니발리즘이라는 형태로 재생되는지를 대화주의에서 찾고 있다. 카니발은 기존의 담론을 허물고 새로운 담론을 구축하게 되는가를 대화주의 정점으로 바라본다.

 

바흐친에서 자아-타자 관계는 자아가 고정되고 완성되고 완결된 주어진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부단한 활동의 상태에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대화주의(dialogoism)와 독백주의(momologism)의 구분은 바흐친의 자아이론에서 중핵을 이룬다. 독백주의는 타자를 완성되고 완결된 것, 즉 의식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반면, 대화주의는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존재하는 열려 있는 미완성된 의식으로 인간을 바라본다.

 

독백주의가 내부 지향, 자아의 봉쇄, 분리와 고립을 이끈다면 대화주의는 봉쇄를 거부하고 외부를 지향하여 타자들의 의식과 조우하고 반응한다. 이렇듯 대화주의는 타자성(alterity)에 기반한다.

 

존재한다는 것은 소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미하일 바흐친)

 

바흐친의 자아개념은 말의 미학과 관련되어 있기에 성찰적이기도 하다. 내적으로 경험된 모든 것은 타자의 말과 마주하기 위해 외부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자아는 그 자신의 의식과 타자의 의식, 즉 자신의 말과 타자의 말 간의 경계 위에 존재한다.

 

자아가 타자를 성찰하고 타자에 적극적으로 반응할 수 있게 해주고 그리하여 타자의 담론이 자신의 일부가 되게 하는 것이 바로 인간은 필연적으로 대화주의를 지향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나 자신을 '창시하기위해서는 타자가 필요하다”(미하일 바흐친)

 

타자가 존재하지 않는 나란, 과연 그것도 나라고 할 수 있는지 의문에 붙인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인간은 타자와 관계, 대화가 필요하다.

 

이 대화주의는 어떤 확산의 에너지를 동반한다. 계승의 원리다. 그것이 인류가 만든 문화다. 자아가 사회생활에서 대화적인 요소와 독백적인 요소 간의 긴장을 수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문화 그 자체도 두 개의 기본적인 지적 경향 간의 투쟁으로 이론화된다. 이것은 담론의 구심력과 원심력으로 작동된다.

 

그 하나는 체계관념(철학, 미학, 사회학의 특정 형태들) 내에 사회-문화적 세계를 봉쇄함으로써 그것을 폐쇄하고자 하는 구심력과 연관된 경향으로, 이는 실제적으로 사회-문화적 세계를 메마르게 만드는 과정이다.

 

두번째는 체계와 경계의 관념을 거부함으로써 개방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원심력과 연관된 경향이다. 문화를 이론화하는 것은 풍부성, 다양성, 유동성, 변경(border)을 찬양하는 것이다.

 

불가피하게 나는 너를 지향하고 그 곳에서 문화라는 아이를 낳기에 이른다. 문화는 공동체 내의 차이, 상호작용 양식, 그리고 개인들의 노력─정체성을 규정하고 고정화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사회 내의 사회적·정치적 메커니즘을 극복하고 뛰어 넘고자 하는 개인들의 시도를 통해 실현된다.

 

"문화를 차이를 만들어내는 변경들에 기반해서 이루어지는 열려 있는 비완결적인 과정이다그러한 차이들은 대화를 통해 그 통일성을 발견한다"(미하일 바흐친)

 

문화의 비완결적인 형태를 완결적인 것으로 몰아가기 위해 어느 시대나 어느 국가나 때때로 축제의 형태를 빌린다. 나에서 너로, 우리는 필연적으로 대화는 카니발리즘을 동반한다.

 

"카니발적 세계관은 어느 누구도 타자를 의식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며그 자신 속에서는 결코 완전함을 발견할 수 없다는 대화적 관념 속에서 표현된다."(미하일 바흐친)

 

카니발은 기존의 질서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기능을 했다. 우리가 진리라고 맏는 담론들의 가치를 광장에 내어놓았다는 점이다. 카니발은 “모든 위계적 서열, 위세, 규범, 금지의 중지”를 의미하고, “모든 영원하고 완전한 것에 적대적이다.” 

 

카니발 군중 속의 개인은 자신이 “계속해서 성장하고 새로워지는 민중의 일원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카니발 속의 민중의 웃음은 “초자연적인 법칙 … 신성한 것 … 죽음에 대한,” 즉 억압적이고 제약적인 모든 것에 대한 집담의식을 표상한다.

 

여기서 인간을 종교에 의탁하지 않고도 불사불멸을 추구하게 된다.

 

카니발적인 것은 사실 절대적인 평등과 자유, 즉 모든 사회적 위계와 사회적 거리의 정지, 다시 말해 유토피아적 진리가 “실제로 존재하는 힘”이 되는 시대를 표상하는 하나의 유토피아적 관념이기에 그렇다.

 

그럼에도 카니발화된 힘들의 어느 것도 완전하거나 완결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거기에는 안정적인 통합된 세계에 대한 인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의 끝없는 이동만이 존재한다.

 

카니발의 형식은 심오한 역사적 인식과 현실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를 소통시킨다. 카니발은 개방성과 자기쇄신 능력을 찬양하고, 온갖 형태의 독단과 광신으로부터 개인들을 해방시킨다. 카니발적 세계관은 어느 누구도 타자를 의식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며, 그 자신 속에서는 결코 완전함을 발견할 수 없다는 대화적 상황 속에서 표현된다.

 

 

 

 

 

 

 

 

 

 

3.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루카 20,27.34-38을 읽어본다.

 

33 그때에 27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35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36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37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38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라고 전하는 루카 20,27.34-38에서 말하는 영원한 삶이 주는 축복의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기로 한다.

 

영원한 삶, 부활이라는 주제는 늘 어렵다. 부활 앞에는 죽음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J가 고통을 극복하고 부활한 것이 아니라 죽음을 딛고 부활한 것이기 때문이다. 고통에 대해서는 누구나 말할 수 있겠지만, 죽음에 대해서 누구나 말할 수 있지는 않다. 죽음과 부활은 선험적인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리스도 신자들이 온전한 죽음을 경험하지 못하고도 육신의 부활을 고백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처해있는 믿음의 혈맥(血脈)을 짚어보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부활>은 머뭇거릴 수밖에 없는 주제다. 삶의 과정에서 경험하지 않은 죽음과 부활에 대한 주제는 어디서부터 그 묵상을 풀어가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죽음과 부활이라는 선험적인 주제를 풀어가기 위해 바오로 사도의 서간문과 라칭거 추기경의 사도신경 강의를 참고했다. 

 

루카 20,27.34-38에 나오는 사두가이파와의 부활논쟁은 논쟁대상자인 사두가이파만 아니라 오늘 우리 삶의 근본적인 방향설정이 하느님인가? 여전히 이 세상인가?를 묻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두가이파는 기원후 70년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 함께 이루어진 유다이즘의 몰락과 더불어 사실상 역사의 무대 뒤편으로 사라졌다. 분명, 사두가이는 역사적으로 사라진 분파에 해당하지만, 21세기 우리 삶의 현실주의적인 삶의 양태를 바라본다면 여전히 사두가이의 망령은 21세기에도 메두사처럼 남아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교회 밖의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을 부르는 이들 안에서 여전히 죽은 하느님을 부른다는 점에서 예수님만 부활한 것이 아니라 사두가이의 현실주의적 망령도 죽음을 모르는 불사신처럼 살아있다는 것이다. 특히 이어지는 39절에 율법학자들의 태도는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라고 고백하면서 그렇지만 예수님 당신은 아니라고, 부활의 열린개념을 축소하고 그분을 죽이는데 가담했다는 점에서 <부활>은 그 누구도 쉽게 이것이 부활이다, 라고 타인을 설득하기 어려운 초월적 영역임을 알 수 있다. 

 

그러자 율법학자 몇 사람이 스승님 잘 말씀하셨습니다하였다. (39)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37)

 

27, 37, 39, 모세5경을 중시하는 사두가이파와 바리사이의 신앙의 모순 논리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사두가이파는 부활을 부정하면서, 모세5경의 살아 있는 하느님을 믿는 것처럼 자신을 속이고 있으며, 율법학자는 모세5경의 내용은 긍정하면서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부활의 열린 개념을 모른다고 할 수 있다. 사두가이와 바리사이는 기득권 싸움에서 대척점에 서 있으면서, 동시에 현실적인 이해타산 앞에서 이합집산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면서, 예수님의 부활신앙을 전면으로 뒤집은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바오로 사도의 통찰처럼 사실 우리 믿음이 설 자리는 없다고 할 수 있다. 또 불사, 불멸, 영원을 논할 수는 더더욱 없다. 그것을 바라보기 위해 루카 20,27.34-38에서 멈춘 부분은 38절이었다.

 

(1)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2)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38절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바라보기로 한다.

 

(1)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1)은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알면서도 예루살렘에 입성할 수 있는 믿음의 근거, 살아 있는 아버지이신 하느님에 대한 깊은 신뢰의 천명이라고 할 수 있다. 죽어도 그것은 죽음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천명. 이것은 창조 자체에 대한 통찰이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영원, 불멸이라는 어원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영원과 불멸은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았다> 라는 창조의 대긍정에서 파생된 용어들이다. 알파와 오메가가 하나라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고, 요한복음 1장의 <한 처음>을 이해하는 단초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1)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 정립에 관한 <근원>을 바라보는 것으로 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지에 대한 그 바탕생각이며, 죽음을 체험하지 않고도 부활신앙을 고백할 수 있는 근거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우리가 부르는 하느님이 과연 살아있는 하느님인가? 아님 죽어 있는 화석화된, 성경이라는 텍스트에 갇힌 하느님인가를 묻는다고, 물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은 이들의 하느님을 부르는 것인가? 살아 있는 이들의 하느님을 부르는 것인가? 이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창조 영성과의 관계가 <하나>에서 나온 것임을 재정립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38)

 

(2)는 인류를 무한히 사랑하시는 하느님, 세세대대 그 어느 한사람도 예외 없이 사랑하시는 하느님, 어떤 종교적인 카테고리에 묶이지 않는 하느님 사랑에 대한 통찰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인간이 어떠하든 사랑할 수밖에 없는 하느님 사랑의 자기구속성을 바라볼 수 있다. 이 통찰은 나와 이웃에 대한 관계정립을 하게 만드는 기초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를 믿고 있는가? 하느님의 자비를 믿는다면 단지 나를 사랑하고 나를 용서해주신 그 협의의 하느님이 아니라 인류가 하나라는 사실은 자명하게 바라보게 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전서 15장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어떻게 죽은 이들의 부활이 가능한가? 또 부활 때에 완성되는 인간의 구원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한다.

 

이 썩는 몸이 썩지 않는 것을 입고 이 죽는 몸이 죽지 않는 것을 입으면, 그때에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승리가 죽음을 삼켜버렸다.(54)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 있느냐(55)

 

바오로 사도가 인용한 구약성경은 히브리어로 기록된 이사야 25장, 8절,(BC742 바빌론 유배전), 호세아서13장 14절(BC721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할 무렵을 가리킨다.) 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어떻게 살았든 그들을 죽음의 상태에 내버려두지 않는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에 대한 통찰, 육체의 부활이 아니라 육신의 부활이라는 인간존재의 영원성에 대한 통찰이라고 할 수 있다.

 

라킹거 추기경은 사도신경 강의 <육신을 부활을 믿으며> 편에서 이를 좀더 구체화 시킨다. 무엇을 인간으로 하여금 여타의 존재와 구별하여 결정적으로 이것이 바로 인간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지, 우리에게 죽음 이후의 궁극적인 희망이 무엇인가를 이 부활신앙에서 찾는다. 인간에 대한 규정은 (1)의 전제에서 하느님은 누구인가에 대한 규정과 닿아있기 때문이다. 인간과 신의 끊을 수 없는 존재연관성이다.(우리가 어떤 좋은 일이나 부조리한 일에 연루되면 너의 부모가 누구냐?라고 묻는 것과 비슷하다.)

 

성서가 부활에 관해 말로써 시사하는 불사개념은 위격적 불사, 단 하나의 구성체인 인간의 불사를 뜻한다(...)성서는 하나의 대화적 불사성을, 즉 불사성의 불가분적 존재에게 당연히 있는 어떤 불사속성에 기인하지 않고 죽지 않게 할 힘이 있는 사랑하는 자의 구원행위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역사의 종국에서 그리고 모든 인간의 통공 안에서 하나라는 것은 인간적 불사성의 유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철학적, 역사적, 생물학적으로 다양하게 규정할 수도 있겠지만 부활신앙은 인간을 규정하는 희망의 신학에 근거한다는 점에서, 인간은 위로부터 보면 하느님이 그에게 말은 건네온다는 사실, 즉 그가 하느님과의 대화의 상대이고, 하느님으로부터 불리운 존재이며, 아래로부터 본다면 그것은 인간이 하느님을 생각할 줄 아는 존재의 초월성에 개방된 존재라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이 하느님을 향해 자신을 얼마만큼 여느냐, 열지 않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은 본질적이며, 근원적으로 그렇게 할 능력이 있다는 것이 초점이라고 본 것이다. 인간이 실제에 있어 그 능력을 끝내 발휘하지 않게 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보고 있다. 하느님에게 인간은 모두 살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이 <영혼을 지녔다>는 것이 실체론적인 규정을 넘어 역사적이고 현실적으로 인간은 신과의 대화상대가 되었다는 것에 초점이 놓여 있다. 이는 인간의 불사불멸은 홀로 영원을 베푸는 사랑을 지닌 신을 향한 대화관계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자유의지로 부활을 쟁취하는 것이 아니고 부활은 생명처럼 선물로 주어진다는 점이다. 즉 부활이 곧 창조를 완성한다는 점이다.

 

이는 나라는 개체 안에서 육체(물질)와 정신간의 종국적 연관성에서 <육신의 부활>을 말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부활은 자연적이고 개별적인 지복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희망, 영원이 산다는 미래를 믿는, 인간의 궁극적인 희망에 대한 청사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인간의 미래가 자기가 창작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위대함을 아는 것이고, 자기로서는 도저히 파괴할 수 없는 영원으로의 초대, 그로인해 바오로 사도가 말한 절망을 모르는 인간, 희망없이 희망하는 인간이라는 규정이 바로 부활신앙에서 도출될 수 있다는 것이다. 칼 러너가 바라본 <무한한 하느님과 관계하는 인간 정신의 초월성>과 그 맥을 같이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육체의 죽음을 경험하지 않은 상황에서 부활을 어떻게 신앙으로 내재화하고 있는가?

 

두려워말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요한 16, 33)

 

우리 삶을 38절과 연결하여 생각해 보자. 우리는 그분으로 하여금 세상을 이기게 하는 이들인가? 늘 세상의 가치관과의 전쟁에서 이겼다 졌다를 반복하는 끌려가는 이들인가? 아님 세상의 가치관 때문에 육체가 죽기 이전에 이미 죽어 있는 존재인가?에 대한 깊은 성찰을 요구한다고 할 수 있다.

 

(1)우리는 누구나 예외없이 우리 자신의 약함과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강함이라는 상반된 상황 앞에 서 있다. 우리는 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서 매순간 산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선택하는 것은 우리 나름대로 그것이 <실재>라고 믿고 있는 것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약함이 실재인가? 그리스도의 강함이 실재인가? 실재는 변하지 않기 때문에 실재라고 할 수 있다. 실재는 진리이기 때문에 불변한다. 변화무쌍한 것은 실재가 아니다. 오늘은 진리이고 내일은 진리가 아니라면 그것은 실재가 아니다. 오늘은 너를 사랑했는데, 내일은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이라고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우리는 매 순간 어떤 상황 앞에서 변화무쌍한 나를 선택하거나 불변하는 그리스도를 선택하거나 아무튼 우리가 실재라고 알고 있는 것을 선택한다. 바오로 사도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라고 권하는 바로 그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를 입든가 세상을 입든가, 사도 요한은 “두려워말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요한 16, 33)라고 우리에게 용기를 불어넣는다.

 

우리가 그분을 믿든 안 믿든 우리가 실재라고 생각하는 것을 우린 매 순간 선택하는 상황 앞에서. 나의 약함이 살아 있는 것인가? 그리스도의 강함이 살아 있는 것인가?를 물을 수 있다면 자명하게 그분을 선택하게 되리란 사실이다.

 

(2) 내가 나의 약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강함이 실재라고 믿고 그것을 선택했다면 나는 당연히 다른 사람의 실재 역시 그리스도의 강함이라는 사실을 자명하게 바라보게 된다. 이때, 용서할 것이 없는 용서의 상황까지 이르게 된다는 것을 보게 된다. 예컨대, 살다가 벌어지는 어떤 충돌들을 쉽게 교정될 수 있는 실수로 바라보게 되지, 그것이 평생 안보고 살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를 내 안에서 살게 하듯, 타자도 내 안에서 살게 한다고 할 수 있다. 나를 그분 안에서 살게하듯, 타자도 그분 안에서 살게 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대화적 상상력에서 촉발된 대화적 상황에서 가능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내 마음에서 지옥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여기서 상처, 고통, 희생 이런 상황들에 갇히지 않게 된다.

 

그런 맥락에서 38절은 하느님 창조의 영원성을 직관한 그리스도인의 축복의 축복의 축복의 메시지라고 말 할 수 있다, 이때, 그리스도인 나를 해방하여, 너 자신을 해방하라,는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부활은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이자 바라봄이다. 또 우리 생명이 지상의 생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창조의 영원성에서 태어난 불멸이라는 이 축복은 사실 애주애인의 상태가  아니면 바라볼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38절은 예수님만이 바라볼 수 있는 어떤 특별한 영적인 경지일까? 아니다. 우리 순례의 여정 역시 38절을 바라보고 살아야만 부활을 믿는다고 말할 수 있다.

 

(이 38절을 묵상하면서, 후회한 것 감사한 것 너무 많아 열거할 수 없지만, 그것을  부등호로 표시하면 분명 후회<감사, 이런 등식이 성립하는데, 왜 후회되는 것만, 자꾸 커져서 내탓이오!가 감사를 덮개 만드는 것인가? 왜 감사보다는 자책의 시간을 더 많이 갖게 되는 것인가? 내탓이오!는 자비로 넘어가는 마지막 결절점이다. 내탓이오!에서 멈추면, 죄책감, 자학, 피학으로, 살아 있는 하느님이 아니라 죽은 이들의 하느님을 부르게 되는 블랙홀에 빠진다는 것을 성서에 나오는 유다이스카이옷에서 찾을 수 있다.  38절 앞에서, 뼈아프게 후회한 것은 38절을 이해하는데 인생의 3분의2를 소비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살아 있는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너무나 간단한데, 너무 많은 시간을 그 축복을 바라보는데, 소비했다는 것이다. 38절을 20대 때 통찰했더라면 그때부터 만난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느님 예수님 성령 이런 종교적인 지칭을 쓰지 않고도 내 생명 자체가 걸어가는 빛이었을 것이다.)

 

그런 아쉬움을 누군가는 하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마무리하며, 이런 제안을 해본다.

 

모든 상황에서 특히 고통스럽고 절망스럽고 상처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상황들은 모두 나의 약함이다. 우리는 상처도 주지 않아야 하지만 사실, 상처도 받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여기서 배운다. 상처와 고통은 예전의 그 상황을 곱씹고 있는 과거 지향적 내면화라고 할 수 있다. 때론 현실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 수 있다. 이것은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고통의 가불이다. 과거나 미래는 모두 고통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엄습하고 그것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언명이 365번이나 성서에 나온 이유에 해당한다. 그 약함에서 벗어나 그분의 시선으로 모든 상황을 바라보는 것, 그분을 현존케 하는 것. 내 육체의 눈이 아니라 그분의 시선으로 모든 상황을 바라보는 것. 행동의 주체인 나 역시도 객관화 할 수 있는 시선, 그런 시선으로 모든 상황을 바라보았다면 그 모든 상황을 초래한 것이 내탓이라는 것을 자인하게 된다. 이 내탓이오는 상대가 99% 잘못을 하고 내가 1%의 잘못을 했을지라도 그 1%가 99%를 야기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있음’에 대한 통렬한 반성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책과 자학으로 넘어가면 그런 내탓이오가 죄보다 더 무서운 죄책감을 유발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내탓이오를 하는 이유는 자책감 혹은 죄책감을 느끼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분의 현존을 느끼기 위한 것이다. 유다의 통회와 베드로의 통회, 바오로의 통회를 생각해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거기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한 그분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상황들은 고통마저도 축복을 주기위한 어떤 기회라는 생각까지 들게 한다.

 

그런 맥락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벗어나야 할 <난 이만큼 했는데> 라는 '희망고문'에 관한 것을 자신에게 이해시켜야 한다, 난 이만큼 했는데는 자신이 아는 범위에서 최선을 다한 것이지 부활의 필연성 앞에 놓인 죽음을 감행한 것이 아니다.  부활은 죽음 다음의 사건이다. <사흗날>을 간과하면, 부활은 자칫 교리에 머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에서 주는 메시지를 읽어내는 것이 38절을 묵상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부분이다. ‘사흗날’이라는 신이 죽음을 체험할 만큼의 죽음의 시간, 그것은 충분히 이 세상의 가치관이 내 안에서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바라보는 시간이다. 내가 이만큼 열심히 했다는 것은 중요치 않다는 것이다. 그런 시간을 통과한 후에 바오로 사도가 핍리피인들에 준 위로의 전언이 내 것으로 들릴 수 있다.

 

난 어떠한 처지에도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줄도 압니다(필립피서4,11-12)

 

부활의 은총 상태가 온전히 나에게 정착되기 위해서 모든 것이, 그러하듯 늘 깨어 있는 훈련이 필요하다. 깨어있는 상태가 내 피부나 옷처럼 되었다 할지라도 말이다. 그때, 모든 것을 다 태워버린 후(죽음의 상태를 거친 후)에 주어지는 <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는 부활의 선물, 그 평화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그분이 주는 평화와 현실이 주는 안락감의 차이는 하느님께서 오는 평화는 <평화를 나눌 수 있는 권능>까지 함께 주어진다는 것이다. 평화의 파동이 에너지처럼 확산된다는 것이다.

 

이 모든 은총 상태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의 대화적 상황에서만 가능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로 인해 나의 약함을 뛰어넘는 그분의 승리를 사는, 구체적인 부활체험 속에서 38절이 주는 축복의 메시지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이미-영원히 살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38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