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Il n'y a rien en dehors du texte)-자크 데리다
1. 문정희, 「율포의 기억」
일찍이 어머니가 나를 바다에 데려간 것은 /소금기 많은 푸른 물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바다가 뿌리 뽑혀 밀려 나간 후/꿈틀거리는 검은 뻘밭 때문이었다 / 뻘밭에 위험을 무릅쓰고 퍼덕거리는 것들/숨 쉬고 사는 것들의 힘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다/ 먹이를 건지기 위해서는/사람들은 왜 무릎을 꺾는 것일까 /깊게 허리를 굽혀야만 할까 / 생명이 사는 곳은 왜 저토록 쓸쓸한 맨살일까/일찍이 어머니가 나를 바다에 데려간 것은저 무위한 해조음을 들려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물 위에 집을 짓는 새들과 각혈하듯 노을을 내뿜는 포구를 배경으로/성자처럼 뻘밭에 고개를 숙이고/먹이를 건지는/슬프고 경건한 손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문정희의 「율포의 기억」은 어린시절 화자가 어머니와 함께 간 바다, 바다가 뿌리 뽑혀 나간 뻘밭을 보고 <살아 숨쉰다는 것을 무엇인가>를 어머니는 자신에게 보여주고 싶었을 거라는 추론을 형상화하고 있다.
어머니가 어린 화자를 바다로 데려간 이유는 뻘밭에서 꿈틀거리는, 퍼덕이는 살아있는 생명체들의 모습과 뻘밭에서 무릎을 꿇거나, 깊게 허리를 굽히고 먹이를 건지기 위해 쓸쓸한 맨살을 드러내야 하는, 숨 쉬고 사는 것들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라고 화자는 회상한다.
낭만적이고 서정적이고 심미적인 바다가 아니라 생존 그 자체가 맨살을 드러내는 실존적인 삶의 현장인 바다를, 화자의 어머니는 왜 어린 화자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어머니가 알려주지 않아도 어차피 어른이 되면서 겪게 될 것들, 알려주지 않아도 알게 될 것들을 미리 보여주신 것일까?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누구나 실존의 맨살을 만져보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인간 중에서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단지 여성적인 삶이나 인간적인 삶에서 만나는 실존, 그 이상의 삶의 맨살을 만져보는 일이라고 시인을 말하고 싶은가 보다. 대체 어머니적인 삶은 무엇이고, 삶의 맨살을 만져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화자가 뻘벝이라는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바라본 삶의 맨살이 무엇일까?
“먹이를 건지기 위해서는/사람들은 왜 무릎을 꺾는 것일까 /깊게 허리를 굽혀야만 할까 / 생명이 사는 곳은 왜 저토록 쓸쓸한 맨살일까”
화자가 어머니를 통해서 보았던 삶은 사랑과 밥이,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시인이 바라본 어머니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어머니의 형이상학(사랑)은 언제나 형이하학(밥)과 하나였다는 것.
그래서, 신에게서 받은 소명 중에 가장 어려운 일은 ‘어머니’가 되는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어머니는 통합의 화두이기 때문이다. 이분법으로 나눠진 세상에서 사랑과 밥이 하나인, 자연과 문명이 하나로 통합된 존재를 찾으라 한다면 무조건 그 답은 어머니일 것이기 때문이다.
타사샤튜더의 난로
2. 텍스트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Il n'y a rien en dehors du texte)-자크 데리다
그런데, 이 세계는 아직도 통합보다는 이분법으로 나누는데 익숙하다. 이분법으로 세상을 나누다보면 중심부 담론과 주변부 담론으로 세계는 어떤 힘의 질서에 의해 재편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세상을 끌어가는 힘의 논리가 곧 희망의 원리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누구나 희망하지 않는 것을 실재라고 바라보지 않기 때문이다. 중심부와 주변부라는 분리의 논리는 언제나 힘의 논리에서 비롯되었기에 이 세계가 말하는 희망은 사실상 닫힌 개념이 된다.
세계를 이분법으로 나눈 그 근본적인 기원을 로고스 중심주의 즉 형이상학이라고 바라본 자크 데리다는 중심부 담론과 주변부 담론으로 나뉘어지는 이 거대한 세계를 하나의 텍스트로 바라본다. 그리고 그는 <텍스트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Il n'y a rien en dehors du texte)>라는 명제를 통해 세계가 질서, 혹은 힘이라고 말하는 것들이 어디에서 기원하고 있는지를 묻고 그것은 해체해야 할 그 무엇이라고 바라본다.
①흔적은 차이/지연이다. 흔적은 어떠한 청각적 시각적, 음성적, 문자 표기적인 감각적 충만함에도 종속되지 않는다.(125)
②모든 언어는 말하기 위해서 만들어졌고, 문자 언어는 음성언어에 대한 보충으로만 쓰일 뿐이다(580)
③희망이라는 초조함으로부터 해방되어서 또 조금씩 욕망의 초조감을 잃어버릴 것을 확신하면서, 또 과거는 나에게 아무 것도 아니었음을 터득하면서 나는 새롭게 살기 시작하는 사람의 상태에 들어가려고 애썼다(594)
④우리가 어떤 작가들에 이름들에 부여하는 지시적 가치는 무엇보다 문제에 대한 이름이다.(...) 여기서 담론과 역사적 총체성의 분잘을 생각하기 위헤서 제안된 모든 개념이 형이상학적 울타리에 사로잡혀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203)
⑤우리는 어떻게 연민의 정이 우리 자신을 감동시키도록 할 수 있을까? 우리를 우리 자신 밖으로 옮겨놓아야 가능하다. 우리와 고통받은 존재를 동일시하면서, 우리는 그가 고통받는다고 판단하는 만큼 고통받는다. 우리가 고통받는 것은 우리에게서가 아니라 그 존재 속에서다.(374)
자크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1967년)는 책 제목이 독자에게 암시할 수 있는 주제 내용과 달리, 결코 하나의 문자학 이론이나 문자 철학 또는 언어철학 등의 단일 주제로 표상될 수 없으며, 생명과 죽음, 자연과 문화, 여성과 남성, 문명과 야만, 기억과 망각, 외면과 내면, 선과 악, 목소리와 그래피즘, 의식과 무의식, 현존과 부재, 충만과 소외, 고유와 은유, 욕망과 쾌락, 성욕과 자기 관능성, 역사의 기원과 과학의 성립 조건, 관음과 자위, 언어와 정치, 음악과 정치, 화성과 선율 등 인문학의 거의 모든 주제를 아우르면서 과연 무엇이 중심이고 무엇이 주변부인가를 해체하고 있다.
통상적으로 그라마톨로지에서 그 같은 사상의 전환은 크게 세 방향에서 이루어진다. 첫째, 서양 형이상학의 토대를 받쳐 주는 텍스트들에 대한 해체적 독법 또는 방법, 둘째, 에크리튀르의 학문, 즉 음성 언어와 문자 언어의 고전적 이분법을 넘어서는 새로운 문자 내지는 글쓰기의 학문, 셋째, 이로부터 창발하는 차이의 사상이 그것이다. 예컨대 문자와 관련하여 데리다에게 그라마톨로지라는 학문은 서양 2500년 동안의 역사에 대해서 전혀 다른 빛을 비추어 준다. 여기서 새로운 문자 개념이 무대에 모습을 드러낸다. 달리 말해서, 에크리튀르의 시작은 언어의 역사에서 새로운 사건이 아니라, 이미 시작부터 그 안에 각인된 그 무엇이다. 즉 언어는 이미 늘 에크리튀르였다는 것이다. 데리다가 설정한 서양의 기호 사상사는 서양 형이상학 전반의 논리에 대한 결정적인 진입 지점이다. 서양에서 온축된 기호의 로고스 중심적 사상은 현대 기호학 이후, 우리가 기표와 기의라고 부르는 것의 대립에 기초하여 서술되어 왔음을 데리다는 설파한다. 여기서 중요한 대목은 이 같은 대립은 이어서 현전의 형이상학의 전체를 구성하는 보다 광범위한 대립들의 망으로 유도된다는 것이다. 영혼과 육체, 무한과 유한, 초월과 경험, 지성과 감성 등이 그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서양 기호사상사에 대한 데리다의 독법은 그로 하여금 로고스중심주의 전체의 형이상학적 체계를 해체한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철학자 장-자크 루소의 저작들을 분석하고 해석함으로써 서양 형이상학 전통에 대한 근본적 비판을 시도했다. 책의 핵심 아이디어는 다음과 같다. 데리다에 따르면, 서양 형이상학을 관통하는 것은 음성언어와 문자언어 간 이분법의 위계다. 이분법의 위계란 음성언어를 이성·합리성과 결부되고 개인 의식 속 내면적 진리에 가까운 것으로, 문자언어를 이차적 외연, 목소리의 대리보충물, 이성에 본질적이지 않은 보조적 테크놀로지로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서구 형이상학이 갖는 특징 중 하나는 글자보다 음성이, 다시 말해 글보다 말이 로고스에 더 가깝고, 그래서 더 가치 있다고 보는 데 있다. 이러한 이분법의 위계를 그는 ‘음성 중심주의’ 또는 ‘로고스 중심주의’라고 이름 짓는다.
'중심부'와 '주변부'의 이항대립를 해체하는 전기의 울타리 개념은, 후기에 '나(주체)'와 '타인(타자)'의 이항대립를 해체하는 유령의 존재론으로 대체된다. 우선 데리다는 후설을 포함한 기존의 철학이 '현전하는 것'과 '부재하는 것'의 이항대립에 근거하여 '현전하는 것'을 '부재하는 것'보다 높이 평가하는, '현전의 형이상학'이라고 비판한다. 그리고 데리다는 이러한 이항대립을 해체하기 위해, 현전과 부재의 울타리에 있는 존재로서 '유령'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데리다가 겨냥한 것은 이러한 로고스 중심주의에 내재된 질서다. 진리와 허위, 정신과 육체, 남성과 여성, 서양과 비서양, 현전과 부재, 문명과 야만 등의 이항대립은, 음성언어와 문자언어의 이항대립처럼, 전자를 지배적인 것으로, 후자를 종속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위계를 이뤄왔다. 그런데 후자가 전자보다 열등하다는 것은 그 근거가 부재한 착각이자 환상이라는 게 데리다의 주장이다. 이러한 이분법의 위계질서가 그동안 부당하게 이뤄진 억압들을 합리화시키고 정당화시키는 논리로 작동해왔다는 게 그의 통찰이다. 탈구축은 이러한 폭력적 위계를 해체하는 것을 말한다. 탈구축은 외부로부터의 파괴가 아닌 내부에서 그 위계질서를 전도시키고 열등한 것들을 옹호하는 것을 함의한다. 데리다에게 그라마톨로지, 즉 문자학이란 기호, 흔적, 문자 언어에 대한 학문으로 문자학은 로고스 중심주의에 맞서는, 서양 형이상학 전통을 탈구축하려는 시도인 셈이다.
모든 이들이 간파하듯, 세계는 우리가 읽든 안 읽든 하나의 거대한 텍스트다. 우리가 그 텍스트에서 무엇을 읽어냈는지가 바로 우리가 희망하는 실재라는 것을 데리다는 <텍스트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Il n'y a rien en dehors du texte)>라는 명제로 해체하고 있다. 결국 세계의 흐름이나 방향을 구축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추구하는 어떤 힘의 논리, 실재의 규정이라는 것이다.
3.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루카 21,5-19을 읽어본다.
Ⓐ그때에 5 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것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6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7 그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 8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9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10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11 큰 지진이 발생하고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다. 12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앞서,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너희를 회당과 감옥에 넘기고, 내 이름 때문에 너희를 임금들과 총독들 앞으로 끌고 갈 것이다. 13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 14 그러나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15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16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너희를 넘겨 더러는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 Ⓒ17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18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19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라고 전하는 루카 21,5-19는 우리에게 어떤 축복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을까?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는 것은, 우선 문맥적으로 바라본다면, <인내로써>라는 수단적 표지는 표면적으로는 불가피하게 세계와의 충돌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심층으로 들어가면 얻고자 하는 것, <생명> 대한 희망을 지시한다고 할 수 있다. 세계와의 충돌, 내 안에서의 희망이라는 상충되는 두 세계를 연결하는 것이 <인내>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이 <인내로써>는 우리 내면의 정신적인 힘에 관한 표지를 바라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을 수단화 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내는 단지 무엇을, 혹은 상황을 참고 견디는 관계론을 넘어, 우리 내면에서 희망을 바라볼 수 있는가의 여부와 관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세계가 사람들을 끌어가는 어떤 힘을 담지하고 있다면 그 힘에 끌리거나 혹은 끌리지 않을 힘 역시 우리 내부에 내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세계에 끌리거나 끌리지 않을 힘이란 우리가 무엇을 희망하느냐와 관련되어 있기에, 희망은 그 자체로 우리 내면의 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예루살렘성전파괴와 관련해 루카 21,5-19은 종말론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도 있겠지만, 이 글은 <인내로써>와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의 현재적 의미를 17절, 18절, 19절을 중심으로 우리가 얻고자 하는 그 생명(희망)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려고 한다.
우리가 그분의 이름 때문에 모두에게 미움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은 밖의 문제이기도 하겠지만 그 어느 시대를 불문하고 실은 우리 자신의 문제라고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 이 글의 초점이다. 그분의 이름 때문에 나에게 주어지는 삶의 양상은 나의 가치관과 신념체계로 인한 선택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희생자 코스프레 그만하라는 말처럼 우리는 일방적으로 세상에 희생당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의 가치관을 구축하는데 일조를 한 것이 우리 자신이기도 하다.
자크 데리다의 철학에서 바라본 대로 세계는 하나의 거대한 텍스트다. 그리고 나 역시 그 거대한 텍스트를 구성하는 하나의 텍스트다. 모든 문제는 나라는 텍스트 밖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실은 나라는 텍스트의 문제라는 것이 문제진단의 정석일때가 많다. 이 글은 후자에 초점을 맞추아 바라보려 한다. 종말이든 종말이 아니든, 문제의 근원을 밖에서 찾는 한 문제의 해결은 요원하기 때문이다.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기도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지만, 나를 변화시키려는 기도는 지체없이 응답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바오로 사도가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테살로니카 2서 3,7-12)는 전언이 그리스도인이 얻고자하는 생명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바오로 사도가 단지 노동의 중요성을 말하려는 것인지? 실존적인 삶의 중요성을 강조하려는 것인지? 아님 더 근본적인 어떤 시선, 그리스도인이 바라보아야 하는 궁극적인 어떤 지점을 말하려고 하는 것인가를 연결하여 바라볼 수 있을 듯하다.
그런 맥락에서 17절, 18절, 19절은 <인내와 희망>과의 관계를 바라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a)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17절) (b)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18절) (c)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19절)
의미 맥락상, 17절은 18절을 비틀고, 18절은 19절을 비튼다. 문장이 문장을 비틀고 있는 세 문장을 하나의 축복으로 연결하는 것이 <인내로써>라는 키워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17절)부터 생각해 본다.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는 이유는 우리 자신 안의 미움도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는 그 상황은 굳이 밖에서 미움의 주체를 찾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분의 이름 때문에 오는 미움은 밖에서 비롯되기도 하겠지만, 거의 대부분의 자신이 실재라고 여기는 것과 비실재라고 생각하는 실재 사이의 간극에서 비롯된, 자신의 내부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이 무엇인가를 바라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내가 무엇을 실재로 보는가? 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어떤 것을 실재화 하는 것은, 그것을 희망한다는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자신의 신념체계에 관련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멀리서 그 예를 찾을 필요가 없다. 우리가 그분 안에서 기도를 하면 우리에게 어떤 내적 평화가 즉각적으로, 지체없이 주어진다. 현실의 문제가 즉각적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내적평화가 지체없이 주어진다. 즉 지체없이 주어진 응답인 평화의 상태에 어떻게 머물고 있는지?를 성찰해 보면,
그분이 주는 평화에 우리가 왜 오래 머무를 수 없는 것일까? 우리는 우리 내면에 오래 머무를 수 없는 어떤 메카니즘의 노예 상태에 있다. 그분이 주는 내적 평화를 찰라처럼 느끼다, 곧바로 현실의 문제로 넘어가는 것이 그것을 반증한다. 내적평화에 대해 그분이 응답하지 않은 경우는 없다. 그런데, 변하지 않은 현실의 문제 앞에서 평화를 느끼기 이전보다 더 극심한 고통을 느낄 때도 있다. 평화와 갈등의 낙차만큼의 고통을 더 크게 느끼는 것이다. 그분에게서 오는 내적 평화와 반복되는 현실의 문제 앞에서 평화와 현실은 마치 화해불가능한 대척적인 관계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거기서 조금 더 나가면 평화는 현실에서 오는 고통의 문제에 대한 재해석을 하게 이끌 수도 있는데, 그 상태를 자신에게 허용하고 싶지 않은 그 무엇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단적으로 평화가 고통의 상황을 끌어가게 하고 싶지 않은 상태에 내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그분의 이름을 미워하고 박해하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분의 이름에 대한 완곡한 반대, 그동안 살아왔던 습관을 고수하는 삶의 방식. 이는 현실만을 실재라고 알고 살았기 때문에서 비롯된 자기 미움이라고 할 수 있다. 실재와 비실재와의 충돌이 미움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미움의 근원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이다. 이는 미워하는지도 모르는 미움이다.
평화가 그분의 현존으로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실재라고 느껴지기 때문에 평화의 상태를 자신에게 허용하지 못하는 상태가. 지체없이 주어진 평화, 즉각적으로 나에게 응답으로 온 평화가 변하지 않은 현실 앞에서 현실의 일시적인 몰핀의 역할을 할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 그런 맥락에서 그분의 현존을 밀어낸 것은 세상이 아니라 바로 평화를 느끼는 나 자신이라고 할 수 있다. 평화를 반대하는 나를 생각해 볼 수 있는가? 이는 그분의 현존을 믿을 수 없는 상태로 만드는 실재와의 전쟁으로. 여기서 평화와 현실간의 관계를 세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다.
⑴평화<---------->고통의 반복
⑵평화----------->고통의 의미 재해석
⑶평화----------- 고통의 무화
그 다음 문장에서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18절)은 실재에 대한 분명한 규정, 그분의 평화가 실재라는 것을 보여준다.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은다는 비유는 고통은 없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다. 분명 현실에서 고통을 야기하는 어떤 문제들이 산적해 있는데,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가 인식하는 문제의 본성은, 실은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내가 고통이라 이름 붙이는 것들이 실은 머리카락 하나 잃게 할 힘도 없는 비실재라는 것이다, 현실의 고통이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실재일리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는 현실이 실재가 아니라 그분이 주는 평화가 실재라고 바라보았을 때 가능하다. 이 상태는, 이 상태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강한 간극(분노)을 불러일으키게 만든다. 문제투성이인 이 세상을 완벽하다고 바라보는 영성가들의 영적 상태와 현실의 문제를 상투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에서 비롯된 이해의 엄청난 간극이다. 여기서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겠지만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미움은 자신의 내부에서 파생된 미움과는 달리 자신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점일 것이다.
이같은 상태는 Ⓔ“수고하고 무서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오11, 28-29) 와 같은 맥락으로, 현실은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는데 그분 안에서 <쉰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생각해 보면, 그분의 현존이 실재고, 그분이 주는 평화를 실재로 받아들 수 있을 때, 가능한 은총상태라고 할 수 있다.(이 글은 이 부분을 살아서의 인내는 죽은 다음의 천국이라는 사후 천국론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그 다음 문장은 이를 다른 차원에서 바라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19절)에서 우리는 (a), (b), (c)의 상황을 반복적으로 되풀이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안과 밖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재맥락화하여 바라보게 된다. <인내로써>라는 구절은 내 안의 문제를 해결하여도 타자의 문제(세상의 문제)를 외면할 수 없다는 것을 동시에 바라보게 됨을 의미한다. 결국은 이 세상과 나는 어떤 문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는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던 시선에서(a, b)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시선으로(c) 시선의 방향을 역으로 잡아야 함으로, 이 방향의 문제가 <인내로써>와 연결되어 있음을 바라보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인내는 공존의 원리를 담고 있음을 바라보게 된다. 인내가 없다면 이 세계와 나는 연결할 필요도 없고, 또 연결하고 싶어도 인내가 없다면 연결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에 이르러 <인내>는 내 의지가 아니라 하늘의 선물로, 자비나 용서처럼 신적인 은총임을 바라보게 된다. 인내는 하느님 나라의 희망과 직결되어 있는 은총상태에서 가능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세계가 결국은 그분의 나라가 될 것이라는 희망에 대한 표지가 인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완성해 가는 주일 강론』에서 인용한 인내에 대한 아델베스타프로스의 통찰을 재인용해 본다면,
Ⓕ“다른 사람들을 참아주는 것은 사랑이요, 자신을 참고 견디는 것은 희망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참고 기다리는 것은 믿음입니다”
다른 사람을 참아주는 것인 사랑, 또 자신을 참고 견디는 것인 희망, 그리고 하느님을 참고 기다리는 것인 믿음, 이 세 가지 향주삼덕을 갖추어야 우리는 하느님을 만났다고 할 수 있고, 또 그렇게 만난 하느님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다는 것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느님을 참고 기다리는 시간이 어떻게 그분과 만날 수 있는 시간인지, 인내 중에 가장 어려운 인내의 정점을 제시하고 있다. 다른 사람을 참아주고 나 자신을 참고 견디는 것도 결국은 하느님을 참고 기다리는 시간으로 수렴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라는 의미가 던지는 묵직한 생의 비밀이자 축복을 바라볼 수 있다. 나를 견딜 수 있을 때, 세상을 견딜 수 있고, 세상을 견딜 수 있을 때, 하느님을 견딜 수 있다는 것이다. 인내는 바로 희망이자 사랑의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가 읽어야할 텍스트의 1페이지는 언제나 '나' 라고 할 수 있다. 나를 인내할 때, 세계를 인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텍스트 밖에서, 혹은 텍스트의 마지막 페이지부터 이 세계를 읽지 말라는 것이다. 이를 바오로 사도는 다르게 표현한다.
바오로 사도는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라고 실존적인 명제로 던진다. 바오로 사도의 날카로운 전언이 담긴 테살로니카 2서 3,7-12에서 생명을 얻기 위한 인내와 희망이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지를 노동과 밥의 문제로 던진다.
바오로 사도의 전언이 표면적으로 노동의 신성함, 실존의 엄정함이라는 측면을 가리키는 듯하지만, 인내와 희망이라는 주제와 연결하여, 바오로 사도의 양심이라고 바라볼 수 있겠다. 나는 우상 앞에 놓인 음식을 먹을 수도안 먹을 수도 있지만 나보다 양심이 약한 사람들을 위해서 먹지 않겠다는 바오로 사도의 양심 선언, 한 사람이라도 더 얻기 위해서,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되기 위해서, 가장 약한 자의 양심을 배려하겠다는 바오로의 이타성에서, 나의 하느님이 아니라 가장 약한자의 하느님을 불러야 할 당위를 바라보게 한다. 이는 현실을 실재라고 여겨 평화를 보류하는 것 이상으로 영적인 비약을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단지 타자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양심을 배려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분에게서 오는 내적 평화를 느낀다면, 이 세상의 삶이 정말 점,점,점 더 재미없어 진다. 힘들어진다. 하루 한끼 먹고 사는 인생에 이렇게 많은 일을 하며, 에너지를 투자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마르타의 삶을 반납하고 노마드처럼 살고 싶어진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는 그 영적인 관상의 기쁨조차 하느님 나라를 위해 내려놓으라고 말한다,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영적으로 살고자 한다면, 철저하게 세상에 속한 사람으로 살라는 것이다. 야박하다 싶을 정도로 뜨거운 영적 이타성을 우리에게 권하는 것이다. 이 이타성은 세상을 견디는 이타성이 아니라, 사실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는 사람의 이타성이라고 할 수 있다.
바오로 사도가 전하는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것은, 아델베스타프로스의 <자신을 참고 견디는 것은 희망입니다.>와 닿아 있고, 이는 루카복음 사가가 전하는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19절)>로 수렴되고 있다.
이 세 명제를 연결하여 바라보면, 우리가 참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이라는 것! <내 이름 때문에>오는 미움, 내 자신을 견디는 희망, 이 세상에서의 생존이 곧 형이상학이라는 것을 바라보는 것!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 글의 서두에서 문정희 시인의 「율포의 기억」에서 보여준 어머니의 실존 방식(사랑과 밥이 함께 있다는)은 언제나 하나였다는 것, 그것이 <인내로써> 라는 말이 지시하는 축복의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인내는 곧 희망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글을 마무리하며, 루카 21,5-19을 다시 읽어본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17절)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18절)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1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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