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M님께서 보내주신
가장 위대한 것으로도 위압되지 않으면서도, 가장 작은 것에도 담기는(『휘페리온』)
존재모순을 이해하기 위해!
1. 베르톨트 브레히트,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당신이 필요해요"
그래서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길을 걷는다
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면서
그것에 맞아 살해되어서는 안되겠기에.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는 1연에 나오는 “당신이 필요해요”라는 시행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는가에 의해 그 의미가 달라진다고 할 수 있다.
먼저, “당신이 필요해요”를 화자의 고백으로 읽어보자! “당신을 사랑해요” 라고 하지 않고 “당신이 필요해요!” 라는 고백으로 보아, 화자의 고백이 설 자리가 미땅치않음을 알 수 있다. 상대의 상황을 배려한 표현이다.
그 다음 “당신이 필요해요”를 대상의 고백이라고 한다면, 대상의 아픔을 짐작할 수 있다. 흔히 이 시를 브레히트의 자전적 상황과 연결하여 여성편력이 심했던 브레히트의 배수진이 담긴 시라고 바라보기도 한다.
사랑은 누구에게든 <존재이유>에 해당한다. 그 표현을 필요하다고 했든, 사랑한다고 했든, 아예 침묵으로 일관했든, 이 시는 두 번째 연이 그 모든 상황적 맥락을 뒤집는 반전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면서/그것에 맞아 살해되어서는 안되겠기에.”라는 것은 일상적인 말로 <잘 살겠다!> 는 '범우주적'고백애 해당한다. 특정 대상을 염두했던 1연과 달리 2연은 무의식적 세계지향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잘 살겠다'는 고백은 말을 넘어서고, 대상을 넘어선 표현이다. 존재 자체가 이 세상에 온 선물이자, 은혜임을 바라보지 않고는 할 수 없는 고백이다. 그 고백을 누구에게 하든, 오늘 지금 여기에서 '잘' 살겠다는 다짐은 '세계'를 향한, '근원'을 향한 자유의지의 갈망이기 때문이다.
너를 위해서든, 나를 위해서든, 익명의 인류를 위해서든, 오직 <잘 살겠다>는 것! 그러기에 '잘 살겠다'는 것은 어쩌면 스스로도 알지 못한 채, 공존의 원리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존재 선언으로, 나 하나는 결코 나 하나에 머물지 않는다는 '나비효과'를 내장하는 것이기에, 그것은 하늘과 땅을 향한 '오늘'의 고백, 혹은 '범우주적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2. 내가 기다려야 하는 시간은 물질계의 모든 역사에 걸쳐 적용되는 수학적인 시간이 아니다
이 글은 [‘오늘’이라는 ‘언제’, 그 웜홀 awormhole 혹은 인터페이스 interface]의 연장선에서, '잘 살겠다'는 고백이 어떻게 하늘을 향하고 땅을 향한 '오늘'의 고백, '범우주적 고백'인가를 생각해 보기로 한다.
'오늘'이 어떤 날인가를 알기 위해서 ‘지금, 여기'에서 '이미 그러나 아직'의 의미를 성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오늘'을 연기할 수 있는지를 성찰하는 것으로, '이미'를 유보하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과거-현재-미래가 어떻게 '오늘'이 될 수 있는지를 성찰하는 것으로, 먼저 시간에 관한 글들을 읽어보기로 한다.
①시간의식의 분석은 기술적 심리학과 인식론의 매우 오래된 교차점이다. 여기에 놓여 있는 극히 곤란한 점들을 깊이 깨닫고 이러한 문제에 필사적으로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던 최초의 사람은 아우구스티누스였다. 『고백록』 11권 14장에서 28장까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시간문제에 몰두하는 모든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연구해야 하는 부분이다. 자연적 태도에서 주어지는 객관적 시간은 초월론적 주관의 의식에 의해 지향된 대상으로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에드문트 후설)
②마음은 기대. 지각. 기억이라는 기능을 통하여 기대한 것으로 지각하고 지각한 것을 기억해 두는 것이다. 사실 미래의 것이 존재하지 않음을 누가 부정하겠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미래의 일에 대한 기대를 이미 하고 있다. 또한 과거의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누가 부정하겠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과거의 일에 대한 기억을 아직도 하고 있다. 또한 현재의 시간은 순간적으로 존재하다가 지나가는 것인 까닭에 길이가 없다는 사실을 누가 부정하겠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지각하는 기능을 계속 수행하는 까닭에 미래의 존재는 그것을 통과하여 과거의 존재로 변천해 가는 것이다.(아우구스티누스)
①에서 후설은 <시간 문제>를 성찰하려면 반드시 아우구스티누스를 우회할 수 없다고 술회한다. 에드문트 후설의 『내적 시간의식의 현상학』에서 전개된 후설의 현상학적 시간론은 객관적 시간(자연적이고 사회적인 시간)을 그것이 의식에 어떻게 주어지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해명하는 것이다. 자연적 태도에서 주어지는 객관적 시간은 초월론적 주관의 의식에 의해 지향된 대상으로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따라서 시간의식의 현상학은 초월론적 현상학적 환원의 방법을 사용하여 시간과 시간의식의 상관관계를 해명하고 여러 차원의 시간과 여러 차원의 시간의식을 체계적으로 해명함을 목표로 한다. 다차원적 시간의식과 그를 통해 경험되는 다차원적 시간을 해명하는 내적 시간의식의 현상학은 체계적이고 총체적인 현상학의 전개를 위해 꼭 필요한 분야이며, 현상학의 전체 체계에서 특수한 위치를 차지한다. 시간의식은 그것과 결부되지 않은 의식이 없다는 점에서 보편적인 의식이며, 의식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작동하는 근원적인 의식이기 때문이다.
②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가 시간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것이며 ‘기대-지각-기억’, 즉 마음이라는 체에 걸러진 것만을 시간으로 인식한다고 보았다. 과거는 현재의 과거이고, 현재는 현재의 현재이며, 미래는 현재의 미래라는 관점이다. 그는 “시간은 미래에서 현재로 오는 경우, 어느 그윽한 곳에서 오고, 현재에서 과거로 갈 경우 어느 그윽한 대로 흘러, 미래인 어디로부터 현재인 어디로 해서, 과거인 어디로 흐르며, 현재인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를 통하여 지나가는가”라고 묻고 있는 것이다.
③우리들을 현실 자체에 직면시켜야 한다. 내가 기다려야 하는 시간은 물질계의 모든 역사에 걸쳐 적용되는 수학적인 시간이 아니기 때문이다...그 시간은 나의 조바심, 다시 말하면 마음대로 더 늘일 수도 없고 더 줄일 수도 없는 나에게 속하는 지속의 어떤 부분과 합치하고 있다. 그것은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체험적인 것이다. 모든 행동은 미래를 조금씩 잠식하는 것이다. 이미 더 이상 없는 것을 붙잡는 것, 아직 오지 않은 것을 예상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의식의 첫 번째 기능이다. 의식에게 있어서 현재란 없다.(앙리 베르그손)
④어떤 방식으로도 나의 손아귀에 쥘 수 없는 것은 미래다. 미래의 외재성은 미래가 절대적으로 예기치 않게 닥쳐온다는 사실로 인해서 공간적 외재성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띤다. 베르그손에서부터 사르트르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론들이 마치 시간의 본질적 특성인 것처럼 일반적으로 인식해왔지만 사실 이것은 미래의 현재에 지나지 않을 뿐 진정한 미래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미래, 그것은 타자다.(레비나스)
⑤시간을 자각한다는 것은 본래적 자신을 되찾는 행위이다. 타인의 지배에 놓여 있는 일상세계로부터 떨어져 나와 유한하고 고독하고 불안으로 가득찬 세계, 그곳이야말로 우리의 본래적인 세계이며 그곳에서 비로소 사유하는 존재의 의미를 밝힐 수 있다. 존재는 시간 속에서 주어지므로 유일하고 변하지 않으며 모든 시대의 문화에 통용되는 존재란 없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시간 속에서 존재의 부름에 각자의 방법으로 응답하는 것이다. 그 응답이 감사이며 반향이다.(하이데거)
⑥현재는 과거로부터 파생한다. 그리고 현재는 미래를 조건 짓고 있으며 미래로 넘어가고 있다. 이것이 과정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주에 들어있는 냉혹한 하나의 사실이다. 미래는 현재가 그 자신의 본질 속에 그것이 미래에 대해서 가지게 될 관계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현재 속에 내재(內在)한다. 현재가 미래에 대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현재 속으로 선취(先取) 되어 내재한다. 현재는 자신을 부단히 넘어섬으로써 과거를 만들고 그것을 자신 속에 지양, 보존하면서 세계 속으로 나아간다(화이트헤드)
③에서 ‘창조적 진화’를 주장했던 베르그손은 우리가 체험된 시간(질적)과 시계의 시간(양적)을 동시에 살지만 우리가 체험하는 시간인 질적인 시간만 ‘실재적인 지속’ 이므로, 그 시간만 미래적인 의미라고 보았다. 베르그손과 같은 맥락에서 사르트르 역시 인간의 미래란 인간의 자유, 즉 미래에 기투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 때문에 미래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④에서 레비나스는 베르그손과 사르트르의 시간의 주인으로서 주체적 시간관과는 달리 시간은 어떤 방식으로든 ‘타자’에 의해 좌우된다고 보았다. 홀로있는 주체라는 사르트르의 관점이나 베르그손이 바라본 ‘순수한 지속의 의미인 시간이 아닌, 나치의 수용소에서 『시간과 타자』를 쓴 레비나스에게 시간에 대한 기대나 예측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타자라고 보았던 것은 당연하다. 타자는 항상 나의 기대나 예측을 배반하고 예측불허의 시간 속에 출현하는 존재이므로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시간을 바라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⑤하이데거는 레비나스와 다른 시간관을 통해 시간을 자각한다는 것은 본래적 자신을 되찾는 행위로 보았다. 시간 앞에서의 ‘나’의 유아론적 주관주의를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무차별적으로 ‘있음’ 속에 포섭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있음’에 주목하고 관여할 때만이 존재자에 속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가 그 자신의 존재에 속한다는 특권이 나오므로 비로소 존재자에 떠맡겨진 존재임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야말로 시간 속에서 이 세계의 모든 존재를 긍정하는 문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⑥에서 화이트헤드는 시간이란 현실적 존재가 객체화되는 과정이라고 바라보았다. 나라는 주체는 어떤 시간을 경험하고 그로써 주체로서의 존립을 끝내고 술어의 자리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인간은 하나의 우주질서의 과정을 살아내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실재로 오늘은 “히틀러는 무엇이다”처럼 주어였지만, 내일은 “어떤 사람들은 히틀러이다”로 서술어가 된다고 보았다. 물질이라는 우주의 시간은 ‘나’를 지우는 냉혹함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⑦시간이 멈추면 모든 문제가 사라집니다. 문제란 어느 시점의 지각이
빚어낸 인공물에 불과합니다. 평화의 상태는 공간이며 모든 것이 공간 속에서 공간에 의해 존재와 경험을 갖습니다. 이때 시간은 더 이상 경험하지 않으므로 미래를 우려하거나 과거를 후회하지 않고 지난일로 고통받거나 다가올 일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시작도 결말도 없기에 상실이나 비탄이나 욕망이 없습니다. 순수한 지각만이 모든 세상과 모든 우주를 넘어 시작도 끝도 없는 빛으로 ‘나’를 비춥니다. 그때 ‘나’는 몸이라기 보다 ‘그것’인 것같이 됩니다. 보편의 체험입니다.(데이비드호킨스)
⑧과거에 일어난 어떤 일도 당신이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는 것을 가로막을 수 없다. 미래가 당신을 위해 준비하고 있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의 당신의 의식 상태에 달려 있다. 어떻게 하면 지금, 평화로울 수 있을까? 지금 이 순간과 화해함으로써 가능하다. 삶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때 당신은 깨닫는다. 자신이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이 당신을 살고 있음을. 삶은 춤추는 자이다. 당신은 춤이다. 마음은 언제나 과거에 머물거나 미래를 가정한다. 그 마음을 넘어야 현존의 의식이 깨어나고 그때 받아들임, 즐거움, 열정, 이 모든 실체를 하나의 전체로 연결한다. 현존이란 바로 오늘을 사는 지혜, 오늘 이 순간을 맛보는 집중력, 그러니 현재에 머물라, 그때 세계는 이원성을 뛰어넘는 완전한 하나Oneness가 된다(에크하르트 톨레)
⑦에서 데이비드 호킨스 ⑧에서 에크하르트 톨레가 바라본 시간은 시간이 사라진 상태, ‘오늘’을 사는 존재론적 시간에 대한 통찰이다. 두 사람은 물질의 우주에서 영혼의 우주를 통합하고 넘어선 시간을 사는 현대 영성가들이다. 두 사람이 바라본 ‘오늘’이라는 시간도 우리가 말하는 과거-현재-미래라는 분절된 의미로써의 ‘오늘’이 아니라 ‘평화’라는 어떤 상태로, 영혼의 현주소를 의미한다. 이때, 시간이 사라진 상태에서의 평화란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함께 있겠다”는 J의 언명이 적시하는 바로 무시간의 시간체험과 같은 맥락이다.
위의 7명의 신학자와 철학자들이 바라본 시간은 단선적으로 실존적 시간관(후설, 베르그손, 레비나스, 하이데거)과 존재론적 시간관(아우구스티누스, 데이비드 호킨스, 에크하르트 톨레)으로 나뉘어 바라볼 수 있다.
그럼에도 이들에게서 공통적으로 실존과 존재론은 확연히 구획되는 영역이 아닌 바, 과거-현재-미래 역시 분절적 시간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그들은 물질의 우주와 영혼의 우주를 넘나들며, 시간 앞에 호명된 자로서 그들이 지닌 의식의 층위에서 어떤 내적 지평을 추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오늘, 지금, 여기라는 시간과 공간을 문제 삼거나 고찰하는 것은 자신이 지닌 ‘의식’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신을 상정하지 않을지라고 신 앞에 서 있는 자신의 의식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의 주인이 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신은 언제나 '오늘'의 님이다. 어제의 님, 내일의 님이 아니다. 그래서 '잘 살겠다'는 고백은, 신을 염두하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고백이기에, 달리 말해, '오늘'의 님을 향한 고백이기에, '범우주적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3. <너희는 준비하고 깨어 있어라.>마태오 24,37-44
그렇다면,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라는 이 범우주적 고백의 의미는 무엇인가?
마태오 24,37-44를 읽어본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7 “노아 때처럼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 38 홍수 이전 시대에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면서, 39 홍수가 닥쳐 모두 휩쓸어 갈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 40 그때에 두 사람이 들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41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42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43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44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대림 제1주(가해), <너희는 준비하고 깨어 있어라.>(마태오 24,37-44)고 전하는 기다림의 시간, 그 기다림의 시간을 결정하는 것은 그 대상이 누군지에 따라 달라질 듯하다. 또 기다리는 대상이 누군지 알게 되었다 할지라도 그 대상이 내 삶과 무관하다면 굳이 기다릴 필요가 있을까? 대상에 대한 앎이 기다림의 자세를 결정한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기다림의 대상이 내 삶의 질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앎과 희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대림절은 성탄을 준비하는 전례의 반복이 아니라 다시 한 번 <신 혹은 하느님>이라는 명제가 도대체 인류에게 무엇을 말해줄 수 있는가?를 되묻는 시간이고, 그 질문은 세계를 향해 '잘 살고 싶다'는 고백과 갈망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기다리는 그분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불가피하게 첫 인류 아담, 구약의 예언자들은 소환하게 된다. 하느님과 함께 있었던 아담의 불충족요인과 예언자들을 통한 하느님의 계시가 단선적으로 끝난 이유가 무엇인가를 바라볼 수 있을 때, 예수 성탄의 필연성이 보다 분명해질 듯하다. 예수 성탄이 전제되어야 그분의 재림 역시 필연적 사건으로 기다릴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필연적 재림이란 창조의 완성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인류가 오랜 시간 기다린 메시아가 누군지에 대한 질문이자, 메시아를 보낸 분에 대해서 묻고 있는 두겹의 질문으로, 실은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가 무엇인가?와 맞물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인류는 왜 계속 하느님 안에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완벽하게 행복하지 않았는지(못했는지)?에 대해 뼈아픈 질문을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마태오 24,37-44에서 전하는 <너희는 준비하고 깨어 있어라.>는 명제는 다른 복음서와의 연계가 필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1, 14)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 불릴 것이다(루카1, 35)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실 분이 어디 계십니까(마태오2 ,22)
예수님의 여러 호칭가운데 어떤 틀로도 규정지을 수 없고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그분을 <말씀이 곧 사람이 되신 사건>, <거룩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 혹은 <유다인의 임금>이라는 호칭 대신 <사람의 아들>이라는 인성에 초성을 맞춘 것에 주목하여 본다.
<사람의 아들>이 누구인가?는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의 맥락과 연결하여 <이미 와 계시고, 언제나 다시 오시고 계신> 그분을 만나는 길이 무엇인가를 고민해 보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우리가 기다리는 그분이, <사람의 아들>이 바로 인류의 메시아라는 사실만을 바라보는 것 뿐 아니라, 사도신경에서 <전능하신 천주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믿나이다> 또 주의기도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존재 모순의 하느님을 어떻게 나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가? 하는 신앙고백의 문을 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기다리는 그 분이 누구신가? 하는 것은 이런 다층적인 묵상을 요구한다고 할 수 있다.
성서에서 <사람의 아들>은 아람어로 아담의 아들, 즉 보통의 인간, '어느 누구'라는 의미로 인류를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용어였다가(예레미아49장), 종말에 나타날 심판자라는 의미에서(다니엘 713-14), 고난 받고 죽고 부활한 다음에 영광을 받게되는 고통받는 야훼의 종(이사야 50장, 51장)에서,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어 지상의 활동을 위임받으신 분으로(마르코2.10),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분(마르코10,45)이자, “사람의 아들은 들어 올려져야 한다”(요한12, 27-36) 라는 십자가를 통한구원자, 구속자라는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
예수님이 쓰신 모어인 아람어로 <사람의 아들(bar-nasha)>은 <아담의 아들>, 인간 자체를 의미한다고 할때, 인간의 생노병사의 운명에 동참하시는 분, 본래의 참인간, 있는 그대로 있어야 하는 인간, 홀로 잣대가 되는 인간이라는 의미에서, 첫인간 아담의 불충족요인을 바라보는 것이자, 구약의 예언자들의 단선적인 계시를 전복시키는 그 무엇을 바라보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에게 갈 수 없다”(14. 6-7)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에게 갈 수 없다"는 것은 아담과 하느님과의 의사소통의 문제, 그 막힌 혈이 무엇인가를 바라보는 일이자, 예언자들을 통해 계시된 인류와 하느님과의 의사소통의 장애는 또 무엇이었나를 동시에 바라보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첫 인류 아담은 왜? 하느님과 에와가 있어도, 즉 완전한 유토피아의 상태에 있었음에도 만족할 수 없었던 것인가? 아담을 흔히 바라보듯 불순종이라는 윤리적 잣대가 아니라, 첫 인간 아담의 불총족요인은 한 인간 개체가 <자유의지>를 사는 과정에서 맛보는 실존의 고독은 아니었나?를 물을 수 있는 단초에 해당한다. 아담의 고독은 자족적 실체를 추구하는 인간론에서 도출될 수 있는 실존주의 모태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인간은 왜 '빛'으로 충족하지 못하고, '어둠'에 끌렸나?라는 질문을 하게되면서, '빛'과 실존 뿐 아니라, '어둠'과 실존의 관계까지도 바라보아야할 필요성을 느낀다는 것이다.
또한 예언자들을 통해 구약의 백성들은 왜 메시아를 왜 그토록 갈망했나? 신구약에 300번이상 메시아 도래를 예고한 이유에 대해, 권능의 하느님을 체험하고도, 권능의 동인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 수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체험한 '두려운' 하느님, 모세를 통해 계시된 하느님(탈출기 3장의)의 존재양식에서 아담과는 다른 맥락에서 그들은 어떤 결핍을 맛보고 있었나를 질문 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첫 인간 아담을 통한 질문, 구약의 예언자들을 통한 질문은, 분명 다른 맥락의 질문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으로 모아진다.
Ⓘ‘있는 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14절)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신 야훼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15절)
아담과 예언자들을 통해 체험된 신 체험은 사도신경의 고백 서문에서 제시된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답을 계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답의 키워드는 예언자들을 통한 <전능>의 개념과 아담을 통한 <자유의지>의 개념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를 바라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믿나이다”
<전능>이라는 관형어가 천주, 성부, 창조주 앞에 붙는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전능>의 개념이다. 라칭거 추기경은 사도신경 강의 <하느님을 믿나이다> 편에서, 본회퍼의 고백과 휠덜린의 『휘페리온』의 서문을 인용하여, <전능과 정의>, <전능과 자유>를 연결하여 <자유의지>와 연결된 <빛과 어둠>이라는 신비체를 해명하고 있다.
Ⓚ“나는 한계가 아니라 중심에 있는 신, 허약에 의해서가 아니라 힘에 있는 신, 즉 죽음과 죄책에 의해서가 아니라 삶과 인간의 선에 대해 말하고 싶다”(76)
Ⓛ“가장 위대한 것으로도 위압되지 않으면서도 가장 작은 것에도 담기는 것- 바로 신적이다”(109)
전능하신 하느님이 자신의 가장 미약한 피조물 손에 넘겨지는 무력의 상징, <구유와 십자가>를 통해 전능 혹은 권능의 개념이 정의 쪽이 아니라 자유 쪽에 위치하고 있음을 바라보는 것, 이것이 전능을 이해하는 관건이라고 본 것이다. 이는 신이 문제삼는 관계론의 핵심으로 <있다>는 개념이 자족적 실체의 충족이 아님을 바라보는 것으로, 인간지향적인 신의 모습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전능과 자유의지의 결합이 신과 인간이 맺는 관계론의 핵심이라고 본 것이다. 여기서 신의 빛은 어둠을 배제하는 빛이 아니라 어둠까지도 수렴하는 빛이라는 것을 바라볼 수 있다.
신과 인간의 중재 혹은 관계론을 대변했던 구약의 예언자들을 통해 계시된 하느님의 권능 혹은 전능은 정의에 기반한 '두려운' 하느님이었다. 그곳에 '정의'는 실현되었을지라도 '사랑'은 설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정의와 사랑은 지고지선의 도구지만 빛과 빛이 항상 빛을 만들어내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선악구도가 분명한 곳에 사랑이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은 신과 인간의 관계론의 궁극적인 지점이 무엇인가를 성찰하게 이끈다. 이는 무엇이 인간을 소외, 박탈, 결핍에서 충족시키는지에 대한 답이라고 할 수 있다.
Ⓜ최상의 권능은 모든 권능을 포기할 수 있는 여유를 보임으로써 자신이 강력한 것은 힘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사랑에서 오는 자유에 의한 것임을 입증한다. 이 사랑은 지상의 권세가 과시하는 권력의 힘이 아니라 최대와 최소, 풍요와 궁핍의 통합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구유와 십자가는 사랑의 위대한 광명을 위해 암흑의 신비를 무릎쓰는 것이다.(112)
이를 라칭거 추기경은 <구유와 십자가>야말로 전능 혹은 권능의 전복, 최대-최소의 사랑이 바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분의 사랑이락고 말한다. 전능과 자유의지의 결합이야말로, 그분의 모상을 지닌 우리가 그분을 아버지라 부르는 이유라고 본 것이다. 그것은 암흑의 신비를 통과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의 전제는 정의가 아니라 자유의지에서 비롯된 사랑이기에 인간의 자유의지는 불가피하게 빛과 어둠을 동반한다는 것이다.
신을 흠향할 수 있는 자유와 신을 배신할 수 있는 자유, 인간 스스로 품위를 잃지 않을 자유와 동시에 자신을 타락시킬 자유를 주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신의 권능>이라고 본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바라보자면. 대림시기는 어쩌면, 인간이 신을 기다리는 시간이 아니라 신이 인간을 기다리는 시간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사랑의 위대한 광명을 위해 암흑의 신비를 무릎쓰는 것!>
이것이 우리가 기다리는 하느님 아버지의 진정한 모습이고, 생명이 지닌 신비라고 할 수 있다. 사랑에 기반한 무한한 자유의지와 권능의 만남이 신과 인간의 관계론, 인간과 인간의 관계론의 밀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대림은 빛과 어둠, 낮과 밤의 신비체를 동시에 바라보는 시간, 인류의 첫 사람 아담과 구약의 백성들을 통해, 인간이 근본적으로 결핍에서 벗어나 충족할 수 있는 근원이 무엇인가를 바라보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그분의 모순된 존재양식을 전능의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때, 불떨기 앞에서 모세가 들은 <나는 '있는' 자로다> 라고 하신 그 <있다>의 의미와 <신발을 벗어라, 그곳은 거룩한 땅이다!>라는 '거룩함'의 의미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론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신과 인간의 관계론은 예수가 보여준 <구유와 십자가>의 사랑에서 그것을 예표하며, 우리가 하느님을 왜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지, 그 이유에 한발 더 다가갈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빛과 어둠의 신비를 뚫고 오는 그분을 왜 쉽게 바라보지 못하는 것인가?
무신론자의 입장에서, 여러 방향에서 문제를 진단할 수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21세기 모든 것이 물질로 환원되는 유물론적 가치관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유물론적 사고는 최대와 최소가 분명히 나눠지고, 가난과 풍요가 나눠지고, 행복과 불행이 극명하게 보이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행위가 물질의 법칙- 에너지 보존의 법칙으로 귀속된다. 결국 유물론은 인간은 죽으면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으로 끝이 난다. 부활과 영생은 없다. 이것은 첫 인간 아담처럼 우리에게 준 자유의지를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 역사의 모든 흐름을 지각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유신론자의 입장에서, 믿는 이들 역시 그분 때문에 완벽하게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현존과 실존의 거리를 지각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항상, 성령의 비전으로 바라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상과 현실의 문제 앞에서 자신이 드린 기도의 힘을 믿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불의가 난무하는 세상을 어떻게 <전지, 전능, 전선 하신 하느님>이 창조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스스로 답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탄생과 공생활, 죽음과 부활 사건에서 연역된 “가장 위대한 것으로도 위압되지 않으면서도 가장 작은 것에도 담기는 것- 신적인 것!”(『휘페리온』) 그분의 존재양식을 결코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말씀이 사람이 되신 사건을 일회적인 성서적사건으로 닫아버리는 것으로 유신론과 무신론의 시선을 오락가락하는 영적 혼란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말씀이 말씀으로 끝나는 거 같은 의심이 창조이전의 깊은 심연, 두려움을 낳기 때문이다.(창세기1장)
그런 맥락에서 <너희는 준비하고 깨어 있어라.>라는 대림절의 전언은, 사도신경의 서문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믿나이다>와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에게 갈 수 없다>(요한 14. 6)를 연결하여 온 인격으로 그 축복을 알아듣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전례주기 가운데 개인적으로 사순절보다 대림절이 더 긴장된다. 기다려진다. 왜? 태양나이 50억년, 지구나이 46억년이라고 과학자들은 규정하는데, 인류는 그 오랜 시간 동안 기다린 그 분을 만나고, 알아보고 그분으로 인해 완벽한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가?라는 질문과 질문이 끝이 없기 때문이다.
이번 대림시기에 개인적으로 묵상 주제 두 개를 잡아봤다. 잘 살고 싶어서다. 묵상1은 그분이 창조한 인간과 사물과의 관계에 관한 횡적인 관계론에 관한 것이고, 묵상2는 그분의 뜻이 무엇인가에 관한 종적인 관계론에 관한 것이다. 묵상1과 묵상2가 어떻게 십자가라는 크로스를 만드는지 묵상이 충분하다 싶으면 글을 올리려고 한다.
묵상1. “원하지 않는 것은 포기하고, 원하는 것은 간직하라.”
- "Give up what you do not want, and keep what you do."
묵상2. 내가 원하는 것을 신도 원한다 혹은 신이 원하는 것을 나도 원한다.
- God wants what I want or I want what God wants!
글을 마무리하며, 그분의 육성을 다시 들어본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41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4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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