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설렘’과 ‘기쁨’을 발생시키는가?
Does ‘emblepein’ necessarily generate 'flutter' and 'joy'?
1. 나희덕의 「속리산에서」 & 김남조의 「편지」
나희덕의 「속리산에서」를 읽어본다
가파른 비탈만이 / 순결한 싸움터라고 여겨 온 나에게 속리산은 순하디 순한 길을 열어 보였다./산다는 일은 더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라는 듯 / 평평한 길은 가도 가도 제자리 같았다./아직 높이에 대한 선망을 가진 나에게 / 세속을 벗어나도 세속의 습관은 남아 있는 나에게/ 산은 어깨를 낮추며 이렇게 속삭였다. / 산을 오르고 있지만 내가 넘는 건 정작 산이 아니라 /산 속에 갇힌 시간일 거라고,/ 오히려 산 아래서 밥을 끓여 먹고 살던/ 그 하루 하루가/ 더 가파른 고비였을 거라고,/ 속리산은/ 단숨에 오를 수도 있는 높이를 길게 길게 늘여서 / 내 앞에 펼쳐 주었다.
나희덕의 「속리산에서」는 등산하는 과정을 통해 외적인 시선에서 내면으로 그 시선이 바뀐다. 산다는 일은 더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 더 깊이 자신 안으로 또는 주어진 구체적인 삶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속리산은 길게 길게 늘여서 펼쳐 주었다고 화자는 말한다.
김남조의 「편지」를 읽어본다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었다./이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해준 이가 없었다./내 안을 비추는 그대는/제일로 영롱한 거울, 그대의 깊이를/다 지나가면/글썽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나의 시작이다.//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한 구절 쓰면 한 구절을 와서 읽는 그대./그래서 이 편지는 / 한번도 부치지 않는다
김남조의 「편지」는 그대를 통해 ‘시작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바라본 화자의 고백이 나온다. “내 안을 비추는 그대는/제일로 영롱한 거울, 그대의 깊이를/다 지나가면/글썽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나의 시작이다.”라고 인생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일이 누군가를 바라본 투명한 존재성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바라본 것이다.
나희덕의 「속리산에서」와 김남조의 「편지」는 '속리산'과 '그대'라는 소재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화자로 하여금 어떤 시선으로 삶과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지, 대상을 넘어 자기 내면으로 시선이 바뀐다는 점에서 같은 맥락의 주제로 바라볼 수 있다.
나희덕과 김남조 시에서 내면의 <응시>, 무엇을 본다는 것은 그들의 크기와 높이, 깊이를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오늘, 내가 바라보는 것이 바로 나의 현실이자, 나의 깊이이자, 나의 높이이며, 나의 절망이며, 나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의 시선이 머무른 곳이 어디인가에 따라 삶과 사람에 대한 나의 진정성은 가늠된다고 할 수 있다.
2. ‘본다(emblepein)’는 것은 무엇인가?
이 글은 [‘본다(emblepein)’는 것은 필연적으로 사유를 발생시키는가?]의 연장선에서 쓴 글이다
<본다>는 것으로 인해 역사의 변곡점을 바꾼 인물들이 있다. 본다는 것이 사유를 발생시키는가 아닌가에 의해서라고 진단하는 이유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본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사유’를 발생시키는가?를 역사적 사건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사유케 하는 것, 혹은 사유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를 만나게 한다.
우리는 종교적으로 유다를 비극적 인물로 바라보듯, 역사적으로는 유대인을 500만명 이상 학살한 행정 집행관인 아이히만을 희대의 범죄자로 기억한다.
아이히만의 재판기록일지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한나아렌트, 한길사, 2006)에서 사유할 수 없는 인격에서 나오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놀라운 비인격을 만나게 된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쓴 한나 아렌트는 『존재와 시간』을 쓴 하이데거의 수업을 들었던 학생이자 한때 하이데거와 연인 사이였던 철학자다. 하이데거가 나찌의 자발적 협조자였던 것을 알게 되고, 한나 아렌트는 하이데거와 이별하게 되고, 시온주의자란 주홍글씨가 붙어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는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라는 부제가 붙여있다. 이 한 편의 보고서로 한나 아렌트는 또 이스라엘의 공공의 적이 된다. 아이히만의 인격에서 도출한 ‘악의 평범성’ 이라는 한나 아렌트의 ‘시선’ 때문이었다.
500만명 이상 유태인을 치밀하게 학살할 정도의 악인에게서 어떤 악의 외적 표시도 제시하지 않았다는 것이 증오의 이름이었다. 악은 우리가 상상하듯, 혹은 기대하듯, 드라큐라나 좀비나 한국의 귀신처럼 그 어떤 외적 표지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럼에도 희대의 살인사건을 벌인 범죄자라면 평범한 사람과는 다른 악의 표지가 분명 하나쯤은 있었을 것이라는 주문을 은연중 하게 된다는 점이다. 모든 범죄 뒤에서 내 아들은 그럴 리가 없다고 절규하는 모성의 마음같은 것이다.
그러나 아이히만은 그런 어떤 악의 표지라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그는 나찌 행정부의 단순 형집행관이었므로 또한 유태인에 대한 개인적 감정도, 의지도 없었으므로 법리적으로 범죄추정원칙에도 해당하지 않았다.
이 재판과정을 지켜본 한나 아렌트는 “사유할 수 없는 것 바로 이것이 악이다”(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라는 결론을 내린다.
'생각의 무능성이 말의 무능성을 낳았고, 말의 무능성이 행동의 무능성을 낳았다'는 것이다. 생각과 말과 행위가 어떻게 하나의 스크럼을 결성하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⑴아이히만은 아르헨티나 예루살렘에서 회고록을 쓸 때나 검찰에게 또는 법정에서 말할 때 그의 말은 언제나 동일했고, 똑같은 단어로 표현되었다. 그의 말은 오랫동안 들으면 들을수록, 그의 말하는데 무능력은 그의 생각하는 데 무능력, 즉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무능력이 매우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점점 더 분명해진다 그가 거짓말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말과 다른 사람들의 현존을 막는, 따라서 현실 자체를 막는 튼튼한 벽으로 에워싸여 있었기 때문이다.(p.106)
⑵그는 단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결코 깨닫지 못했다. 그는 어리석지 않았다. 그로 하여금 그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였다. 이것이 현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과 이러한 무사유가 인간 속에 아마도 존재하는 모든 악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대 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예루살렘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었다.(p.391)
⑶ (아이히만이 교수대에서 마지막 남긴 말)잠시 후면, 여러분, 우리는 모두 다시 만날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운명입니다. 독일 만세, 아르헨티나 만세, 오스트리아 만세, 나는 이들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고 말했다. 죽음을 앞두고 그는 장례 연설에서 사용하는 상투어를 생각해 냈다. 교수대에서 그의 기억은 그에게 마지막 속임수를 부렸던 것이다. 그의 정신은 의기양양하게 되었고, 그는 이것이 자신의 장례식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이는 마치 이 마지막 순간에 인간의 사악함 속에서 이루어진 이 오랜 과정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교훈을 요약하고 있는 듯했다. 두려운 교훈, 즉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p,349)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아이히만의 재판보고서에서 아이히만의 범죄구성의 원인을 ‘악의 ’평범성‘이라고 보았다. 이는 어떠한 이론이나 사상을 의도한 것이 아니라 단지 아주 사실적인 것, 엄청난 규모로 자행된 악행의 현상. 비인격의 단면을 나타나려고 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 악행은 어떤 특정한 약점이나 병리학적 측면, 또는 이데올로기적 확신으로는 그 근원을 따질 수 없는 것으로, 그 악행자의 유일한 인격적 특징은 아마도 특별한 정도의 ‘천박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행위가 아무리 괴물 같다고 해도 그 행위자는 괴물같지도 악마적이지도 않았다”
괴물같지도 악마적이지 않는 아이히만이 희대의 범죄를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죽음마저도 장례식장의 조문사로 대신할 정도로 그의 심장의 소리를 가로막는 언어적 장애가 있었다는 점이다. 반복해서 상투적 언어를 사용할 때, 그 언어는 그의 인격이 되고 세계를 바라보는 창이 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그가 쓰는 언어, 세계를 바라보는 상투성은 아이히만의 문제인가?
우리가 예수를 믿으시오!라는 가두선교가 예수를 믿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예수에 대한 혐오를 불러일으킨다거나. 목회자의 뜨거운 설교가 단지 상투적인 구호처럼 들릴 때, 강론을 듣는 대신 주보를 읽고 있는 신자들, 이 모든 문제 안에는 언어를 상투적으로 만드는 아이히만의 유령이 있다는 점이다.
언어의 상투성에 악의 평범성이 도사리고 있다는 점이다. 악이나 어둠이 특별한 표지를 하고 나타난다면 우리는 경계의 각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악은 아주 평범하게 일상을 조금씩 잠식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감지하기가 더 어렵다는 것이다.
여기서 비트켄슈타인인의 통찰, ‘나의 언어는 나의 세계이다.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이자 세계의 한계는 나의 윤리의 한계이다’ 라는 말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그렇다면 한나이렌트의 최종 결론처럼 아이히만의 사유할 수 없는 능력이 그를 희대의 범죄자로 만들었다면, 하이데거는 왜 사유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시적이지만’ 히틀러라는 사람의 인격을 간파하지 못했던 것일까? 라는 질문이 생길 수 있다.
하이데거는 어린시절부터 사제가 되기를 꿈꾸었지만 몸이 약해 번번이 신학교에 들어갈 수 없었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은 그의 형이상학의 전모라 할 수 있고, 『존재와 시간』이 발표되었을 때 유럽의 지성사는 발칵 뒤집혔다고 표현할 정도로 그의 철학적 사유에 매료되었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나찌의 자발적 협조자라는 것이 드러나자 ‘하이! 하이데거!’라는 풍자가 철학계를 다시 강타했다. 이에 하이데거는 나치의 전체주의를 찬성한 것이 아니라, 대학 운영자로써 상식적인 차원의 싸인이었다고 해명했다. (이때, 한나 아렌트는 『존재와 시간』을 책으로 읽은 것이 아니라 하이데거에게 『존재와 시간』 강의를 직접 들은 학생이었고 그와 연인으로 발전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사유를 발생시키는 세 층의 <본다>는 것이 있음을 추론 할 수 있다. 즉 (1)하이데거의 사유는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사유, 또 하이데거와는 다른 (2)한나 이렌트나적 개별적 사유, 그리고 (3)타자를 매개로한 레비나스처의 타자의 윤리학을 통한 실존적 사유가 발생한다고 할 수 있다.
한나 이렌트는 훗날 하이데거의 ‘존재의 사유’를 이해하고 그와 화해하게 된다. 야스퍼스를 지도교수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랑>으로 박사논문으로 쓴 한나 아렌트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사유란 무엇인가』, 『사유의 경험으로부터』에서 말하는 그 사유가 “우리로 하여금 사유케 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본다>는 것은 사유의 눈으로 사유할 수 있는가? 없는가?는 한 인간의 지성적 차원이 아니라 역사에 어떤 흔적을 남기는가에 대한 휴머니즘을 낳는 모태라고 할 수 있다.
3.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마태오 11,2-11을 읽어본다.
그때에 2 요한이,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감옥에서 전해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3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 5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6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7 그들이 떠나가자 예수님께서 요한을 두고 군중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8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고운 옷을 걸친 자들은 왕궁에 있다. 9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다. 10 그는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사람이다. ‘보라, 내가 네 앞에 나의 사자를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라는 질문은 여전히 광야의 삶을 살고 있는 21세기 믿는 이들 안에서 가장 처절하게 반복되고 있는 실존의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마태오 11,2-11에서 멈춘 부분은 3절, 4절, 6절, 11절이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3절)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4절)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6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11절)
죽음을 직감한 채, 감옥에 갇혀있던 세례자 요한의 Ⓐ의 질문과 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에 해당하는 Ⓑ, Ⓒ, Ⓓ는 구약과 신약으로 나눠지는 결절점이자, 하느님 권능에 대한, 메시야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과 답으로 <믿음은 무엇을 보는 것인가>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는 중요한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대림 3주를 기쁨주일 장미주일이라고 하는 이유에 대한, 전례적 해석이자, 무엇을 구경하러(7절), 무엇을 보려(8절), 무엇을 보려(9절)와 연결하여 신앙인들이 ‘바라보아야’ 할 궁극적인 지점이 어디인가와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믿음의 긴 여정에서 무엇을 <본다>는 것은 수시로 만나는 우리 내면의 내적갈등 혹은 내적 평화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본다>는 것은 대림3주에 전하는 축복의 메시지인 ‘설레임flutter'’과 ‘기뻐하여라Gaudete’를 낳는 영적 모태에 해당한다. 지식으로 보았는지, 지각으로 보았는지가 신앙의 중용한 모멘트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필연적으로 <본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내 삶에서 개화되기 위해서 제2독서에서 야고버 사도가 권하는 <참고 기다리십시오, 원망하지 마십시오>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설레임flutter'’과 ‘기뻐하여라Gaudete’가 무엇인지 마태오 11,2-11와 이사야서의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35, 1-10)와 마리아의 노래 Ⓕ<내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이 마음 설레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여러분은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내가 다시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필립보서 4,4)를 연결하여 생각해 보기로 한다.
이사야서를 제1이사야서(1-39장)는 바빌론 유배전, 제2 이사야서(40-55장)는 바빌론 유배 중, 제3 이사야서(56-66장) 바빌론 추방에서 고국으로 귀환한 후라고 한다면, 제1독서에서 전하는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35, 1-10)는 '선취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유배전의 혼란된 총체적 상황에서 유배중의 쓰라린 고통과 귀환후의 그 상실감을 아우르는 시선이라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 민족이 어떤 상황을 자초하든 하느님은 그들과 함께 있을 거라는 계시에 해당한다.
또 바오로 사도의 필립비서는 기원후 55-56년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로 바오로가 에페소의 감옥에서 쓴 편지로 알려져 있다. 그때 그는 필립비 교회에서 반그리스도적인 가르침이 퍼져있다는 것을 듣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바울로의 그리스도에 대한 깊은 신앙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기쁨과 확신에 차서 <어떤 상황에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하라>고 권한다.
이사야와 바오로 사도의 <기쁨>은 마리아의 노래 <내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이 마음 설레입니다.>로 모아진다. 영적 기쁨은 마리아에게서 설렘으로 표현된다. 설렘은 몸과 마음과 영혼이 온전히 하나로 일치되었을 때, 감지되고 표출되는 현상이다. 단지 하느님 나라의 도구적 존재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차원을 넘어서는 것으로, 하느님의 뜻이 곧 유일한 내 뜻일 때 경험되는 영적 희열의 상태를 말한다.
여기서 이사야, 바오로, 마리아의 기쁨은 실존의 기쁨이 아니라 영적 기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상적이고 상황적 맥락에서 자연인이 느끼는 근육의 미소가 아니라 온 인격으로 체험되는 존재의 기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실존의 기쁨이 영적 기쁨을 낳는 것이 아니라, 영적 기쁨이 실존의 기쁨을 낳는 모태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제2독서에서 <참고 기다리십시오, 원망하지 마십시오>라고 영적 기쁨이 우리의 실존을 끌어가는 그 시간을 인내하라고 거듭 촉구한다. 영적 기쁨은 인내와 믿음 속에서 그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영적 기쁨이 우리의 열악한 현실인 실존의 구체적인 상황을 끌어가, 기쁨을 낳을 수 있는가?
그것이 바로 오늘 주제를 끌어가는 키워드인 <본다>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시선을 바꾸는 일이다. 지각으로 즉 육체의 눈으로 현실을 보면 자살을 해도 수백번은 할 수도 있는 그런 상황으로 내몰린 이들에게 어떻게 <기뻐하라!>고 권할 수 있는가? 하는 근거다. 그리스도의 시선(영안, 비전,지식의 은사)으로 현실의 상황을 바라보지 못한다면 몰핀 없이 대수술을 하는 것처럼 고통 앞에서 무참하게 무너지게 된다. 시선의 폭력 혹은 살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신앙은 '절망을 모르는 현실'이라고 일컫는 그분의 시선으로 모든 상황을 바라보는 것이기에 고통마저도 축복의 또 다른 측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인간에게는 그가 종교를 갖든 안 갖든 두 개의 눈이 있다. 육체의 눈과 마음의 눈인 심안 혹은 영안이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기뻐하라!>는 것은 영안으로 그 상황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그 어떤 상황도 영안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 <내가 사랑받았고 은총 속에 산 것 >을 노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순교자들이 그 증거이자 신심이 강한 이들이 보여주는 삶의 태도가 바로 그 증거다. 순교자들은 우리처럼 평범한 이들이었다. 그분들도 우리처럼 현실의 무거운 짊을 지고 산 이들이었지만 그들에게는 영안으로 모든 상황맥락을 바라볼 수 있는 은총상태에 있었다. 신앙이 없을지라도 인간은 근본적으로 선을 지향한다. 그 마음으로 상황을 바라보면 되는데 선의 지속성이 인간 혼자로는 한계적이라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모든 종교는 타력종교, 관계론이라고 할 수 있다. 영안은 사랑과 영원을 볼 수 있게 한다. 그래서 생물학적인 생명조차 영원한 생명의 찰라, 부분집합이라는 것을 바라볼 수 있다. 그로 인해 생명으로 그분께 찬미와 영광을 드릴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마태오 11,2-11로 돌아가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11절)
그렇다면 예언자 중의 예언자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서는 메시아 도래를 외쳤지만, 정작 감옥에서 일말의 회의를 갖게한 그분이 기다린 메시아는 어떤 메시아인가? 직접 예수님께 세례까지 주고서도 의심이 든 그 의심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구약의 신앙선조들이 경험한 전능에 기반한 정의의 메시아상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가장 큰 인물이었던 세례자 요한, 예언자 중의 예언자, 엘리야의 현신이라 불린 세례자 요한의 시대, 구약의 위대하고 또 위대했던 세례자 요한에게 주어지지 않은 시간, 전능의 위력을 드러내는 경외 아니면 두려움이 메시아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지 못했던 안타까움. 우리가 오늘 일상적으로 보는 그 메시아를 그분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경외와 두려움을 같은 것으로 바라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럼,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는 메시아는 어떤 메시아인가?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4절)라고 전하는 이사야 예언서의 실현- 용서와 자비, 치유와 생명, 무한한 사랑의 하느님이었다. 하느님 자신이 구유와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가장 낮은 자, 치욕과 고통,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 지옥까지 내려가는 그 무한하고 그래서 영원한 그 사랑의 하느님이었다.
그런 맥락에서 세례자 요한의 안타까운 퇴장은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는 더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항상 논란의 중심에 있던 11절은 세례자 요한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 세례자 요한의 시대(구약)를 안타까워 하신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그런 큰 선물을 받은 존재라는 사실 자체가 우리에게는 큰 축복이다. 우리가 지금 메사아를 만나려고 하면 얼마든지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렇게 세례자 요한의 시대에는 감히 상상할 수 조차 없는 영적 축복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예수님이 보여준 메시아, 절대적인 사랑의 하느님을 보지 못했다는 것! 예수님의 길을 마련하고도 안타깝게도 세례자 요한처럼 그 사랑을 보지 못했다는 것! 십자가를 통한 예수님의 그 무한한 사랑에서 신이 인간에게 보여준 사랑의 최고 정점이었다는 것을 그분들은 보지 못했다는 것!
그것이 대림3주에 전하는 ‘기뻐하여라Gaudete’의 빅픽쳐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만나려고 하면 , 세상 끝날까지 함께하는 임마누엘의 하느님을 언제, 어디서나 만날 수 있다는 것이 ‘기뻐하여라Gaudete’의 참 근원이기 때문이다.
글을 마무리하며,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육성을 다시 들어본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3절)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4절)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6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1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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