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주름을 넘어, 사랑은 언제나 나보다 먼저 도착한다
-au-delà des crevasses du temps, l'amour arrive toujours avant moi.
1. 여기 한 페이지 거울이 있으니, 이상의 「명경」
오늘 이 글이 풀어가려는 주제는 <왜 사랑은 나보다 먼저 도착하나?> 이다.
이상은 한국문학에 먼저 도착한 편지였다. 한국문학은 이상 전과 후로 나누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상의 시를 도저히 소화시킬 수 없었던 시대에 이상은 낯선 얼굴로 미리 도착했다. 한국문학이 본격적으로 이상을 읽게 된 것은 1980년대라고 할 수 있다. 1930년대에 도착한 편지를 1980년대에 드디어 읽게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문학의 경우처럼 상황적 맥락에서 쓴 시를 정서적 맥락으로 받아들이려 했던 이유는 수천가지 이유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상이 겪었던 시대의 아픔과 독자들이 겪어내던 시대의 아픔은 같았고, 무엇보다 동일한 한국어 사용자끼리, 다른 맥락에서 발화된 언어라는 매체가 그 동일한 아픔을 전혀 다른 아픔으로 받아들이게 했다고나 할까.
시를 읽는다는 무엇인가? 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시가 어떻게 씌어지는가?를 생각해 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시가 씌어 졌다는 것은 시인이 겪고 있는 ‘환지통’을 언어로 반복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환지통(幻肢痛)은 팔다리를 절단한 환자가 이미 없는 수족에 아픔과 저림을 느끼는 현상이다. 시인에게 환지통은 포기할 수 없는 '환(幻)'이다. 아니, 시인에게 ‘환지통(幻肢痛)’이란 ‘'환(幻)’이 없다면 그는 결코 시를 쓰지 못했을 것이므로, 환지통은 시인의 사용설명서이자, 존재증명서와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시를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시 속에 재현된 화자의 환지통을 함께 겪어 내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또 그렇다면, 시를 읽는 독자가 갖고 있는 환지통이 없다면 그 시를 읽어내지 못했을 것이라고도 말 할 수 있겠다. 시인이 겪고 있는 환지통이 시의 화자를 통해 재현되고 있다면, 환지통이 없는 사람이 어찌 시속의 화자의 환지통을 읽어낼 수 있겠는가. 시를 통한 소통이란 환지통과 환지통이 만나 그 환지통을 심화시키거나, 그것을 넘어서거나, 건너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화자가 겪는 환지통을 읽어내는 것은 시를 읽는 문법 가운 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우리 한국 시사에서도 지독한 환지통을 겪어내게 만들었던 시인들이 있었다. 죽어도 죽지 않은 시인들이 있었다. 그 시인들 가운데 지독한 환지통 ‘이상’이 있다. 이상은 고유명사이자 여전히 진행중인 하나의 문학 현상이다. 한국의 모든 시인들 아니 소설가들이 이상이라는 환지통을 겪어내지 않고 문학의 강을 건너간 적은 없어 보인다. 문학연구가, 비평가, 독자 모두 ‘이상’이란 환지통을 한번쯤은 겪어내며 한국문학이라는 도저한 흐름에 동행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상’을 모방하거나 ‘이상’을 극복하려는 부단함 속에서 아직도 ‘이상’은 죽었으나 여전히 살아 있는 문학의 ‘환지통’, 환(幻)의 유령이라 할 수 있다.
이상의 「명경(明鏡)」은 이상의 작품 가운데 그래도 독자의 정서를 배려한 시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이 독자를 배려해 시를 썼다는 것이 어불성설이지만 이상의 시 가운데 독자가 그래도 읽어내기 수월한 쉬가 바로 「명경(明鏡)」이라서 그렇게 말해볼 수 있다.
여기 한 페이지 거울이 있으니 /잊은 계절에서는 /얹은 머리가 폭포처럼 내리우고 /울어도 젖지 않고 /맞대고 웃어도 휘지 않고 /장미처럼 착착 접힌 귀 //들여다 보아도 들여다 보아도 /조용한 세상이 맑기만 하고 /코로는 피로한 향기가 오지 않는다. //만적 만적하는 대로 수심이 평행하는 /부러 그러는 것 같은 거절 /우(右)편으로 옮겨 앉은 심장일망정 고동이 /없으란 법 없으니 //설마 그러랴? 어디 촉진.........하고 손이 갈 때/지문이 지문을 가로 막으며 /선뜩하는 차단뿐이다. //오월이면 하루 한 번이고 /열 번이고 외출하고 싶어 하더니 /나갔던 길에 안 돌아오는 수도 있는 법 /거울이 책장 같으면 한 장 넘겨서 /맞섰던 계절을 만나련만 //여기 있는 한 페이지 /거울은 페이지의 그냥 표지---
이상은 「오감도」 계통에서 뿐 아니라 모든 문학교과서에 실려 있는「거울」 시편을 통해 세계와 불화하는 소통불가능성, 타자와의 차단이라는 하나의 은유를 생산한다. 이상의 시에서는 화자와 세계라는 대상은 동시에 지워진다. 화자와 대상이 지워진 시란, 두 사람이 만나 구축한 세계가 없다는 의미다. 비극의 담담함이란 구축한 세계가 없다는 비극의 비극일 것이다. 어떤 사람과 만났는데 서로를 추억할 사건이 없다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이상의 「명경(明鏡)」 에서는 “열 번이고 외출하고 싶어 하더니 /나갔던 길에 안 돌아오는 수도 있는 법” 이라며 외출한 타자와의 소통이 단절된 세계란 이미 예측가능했던 세계였음을 담담한 포기의 시선으로 그리고 있다. 없는 아픔을 과장해서 아퍼하는 것도 문제겠지만, 있는 아픔마저 느끼지 못하는 그 아픔 불감증은 무엇인가? 종교적 초월과는 다른 사물화된 상태의 감정의 정지신호!
포기의 담담함이란 포기의 예측에서 가능한 것이므로, 그 시간의 궤적을 추론하는 것은, 이상의 전기적 사실만으로도 어렵지 않다. 이상이 1930년대 겪어냈던 마땅히 아파야 하는 상황에서도 아픔마저도 느끼지 않으려는(못하는) 통증없는 환지통이라는 환(幻)이야말로 시를 쓰게 만들었던 지독한 ‘환(幻)’이므로 그 외에는 '다른 사정은 없는 게 낫다'고 할 마이너스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상이라는 환지통은 시대를 건너 수없이 많은 변종, 유사한 환지통을 만들어내며, 우리 시대 시인들이 겪는 환지통의 현주소를 추적할 수 있는 사료에 해당한다. 눈물도 없이 환지통에 취해, 차단한 '거울'을 재상산하고 있는 독자 없는 문학의 시대, 그들만의 리그로 변한 거울의 시대. 이는 다른 말로 타자가 자신에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미리 도착한 편지보다 더 불온한 편지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자신보다 너무 일찍 자신에게 도착해, 자신이 누군지 알지못하게 만들므로 이런 도착은 무엇이라 이름 붙일지 도무지 모르겠다.
2. 물질은 정신의 지극히 이완된 과거이거나 꿈이다(질 들뢰즈)
이 단락은 [겨자씨 비유의 은폐와 계시, 신앙과 믿음의 갈림길]에서 인용했던 시간의 주름에 관한 것으로 시간은 우리에게 어떤 얼굴로 도착하나?의 연장선에서 쓴 글이다.
시간의 주름이란 다름 아닌 시간안에서의 ‘반복’을 의미한다.
비켄슈타인은 『논리-철학 논고』에서 시간의 반복은 동어반복과 같은 것으로 실체없는 중심을 향한 몸짓으로 바라보고 있다.
⒜“동어 반복은 모든 명제들로부터 따라 나온다. 그것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동어반복은 서로 아무 것도 공유하지 않는 모든 명제들에 공통적인 것이다. 모순은 말하자면 모든 명제들의 밖에서 사라지고, 동어반복은 앞에서 사라진다. 모순은 명제들의 외적 한계이고, 동어반복은 실체없는 중심점이다”
주어와 서술어를 갖춘 모든 명제는 동어반복의 형식을 내장한다 예컨대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하나의 명제다. 최초의 발화 이후에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발화는 회수될 수 없는 명제에 해당한다. 발화자에 의해 소비되고, 점유되는 동어반복이기 때문이다.
비트켄슈타인은 동어반복의 명제는 ‘신은 사랑이다’라고 말하는 주어부와 술부가 같다고 지적한다. ‘나’ ‘너’ ‘신’은 이미 ‘사랑’이기 때문에 ‘나는 너를 사랑한다’, 혹은 ‘신은 사랑이다’ 는 문형은 ‘사랑은 사랑이라’고 말한 것과 다르지 않다고 본 것이다. 이런 동어 반복은 아무 것도 말하지 않고, 오직 말하는 자신의 신념을 공고히 하는 실체없는 중심점이라고 보았다. 그렇기에 말할 수 없는 것(형이상학)은 말하지 말아야 한다고 초기 철학에서 그는 강하게 강조한다.
질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반복을 통하지 않고는 인간은 시간을 주름을 펼 수 없다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그런데 그 반복이 차이를 발생하는 반복이어야 한다는 전제를 제시한다.
⒝“물질적 반복은 독립적이면서 계속 이어지는 요소나 순간들의 반복이다. 반면 정신적 반복은 공존하는 상이한 수준들에서 일어나는 전체의 반복이다. 앞의 반복은 헐벗은 반복이고 뒤의 반복은 옷입은 반복이다. 전자는 부분들의 반복이고 후자는 전체의 반복이다. 전자는 현행적이고 후자는 잠재적이다.”
들뢰즈는 누구보다 ‘차이와 반복’에 대해 치밀한 연구를 수행한 미학자이자 철학자다. 그는 물질적인 반복은 독립적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정신적인 것은 예컨대 ‘자유’ 안에는 이미 사랑도 정의도 기쁨도 모두 있기 때문에 관념자체가 공존하는 반복이라고 보았다. 결국 모든 종교 철학 형이상학은 독립적인 반복이 아니라 차이의 반복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선행되는 연구성과가 없었다면 철학이나 미학은 불가능한 반복이라는 점이다.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이란 자신의 사유개념을 확립하는 데 수많은 철학자들의 연구성과를 참고 했고, 그가 가장 많이 주의를 기울여 바라본 철학자가 ‘모나드론’을 쓴 라이프니츠였다.
질 들뢰즈는 이 시간의 반복을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에서 원형을 찾는다.
⒞“만일 우리의 명석한 지각의 차이적 매커니즘이 고장난다면, 미세 자각들은 그 매커니즘의 선별작용을 힘으로 무너뜨리고는 수면이나 마비 상태에서처럼 인식안으로 난입한다. 검은 바닥 위에서 색깔을 가진 무수히 많은 모든 지각은 우리가 그것을 더 유심히 살펴보면 원자가 아니다. 이러한 이유로 펼침은 접힘의 반대가 아니며 그것은 주름들에 다른 주름들로 나아가는 운동이다. 때로 펼침은 내가 전개하는 것, 내가 무한히 작은 주름들을 해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작은 주름들은 바닥을 끊임없이 흔들어대는 데 이는 형상이 나타나면 면 위에 커다란 주름을 잡기 위해서이다”
모네는 수련 역작을 그린 화가다. 모네가 그린 수련 연작은 똑 같은 수련은 없다. 들뢰즈가 바라본 라이프니츠의 ‘주름’은 모네 연작과 같은 차이의 ‘반복’이다.
라이프니츠가 바라본 모나드론은 형이상학의 원리다. 형이상학은 불가피하게 형이하학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다. 모나드론은 물질로 바라본 영혼론이라 할 수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죽어간다. 테어남을 모나드가 발현됐다고 한다면 죽음은 모나드의 감춤이라고 본 것이다. 우리가 생명으로 올 때 모나드가 비로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이미 모나드는 존재했다고 보는 관점이다. 모나드를 취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 모두 ‘하나’라고 할 때, 그 ‘하나’는 무엇인가? 라이프니츠가 말한 ‘모나드’이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바라본 ‘영혼’이다.
베드로대성전과 파도를 하나의 ‘주름’이라고 생각해 보면 된다. 전자는 형이상학의 상징성이라면 후자는 이 우주의 물리적 중력의 법칙이 적용된 물질의 반복이다. 베드로 대성전은 고정된 형식안에 반복을 내장하고 있으며, 세속과 천상을 분리하면서 세속과 천상을 연결하는 이중적 목적을 동시에 수행한다고 할 수 있다. 즉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을 엄격히 분리하면서 동시에 형이상학 안에 형이하학을 포섭하려는 이중의 목적을 수행한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이 갖고 있던 삼위일체의 권위를 ‘일치’ ‘사랑’ ‘권위’ ‘거룩함’이라는 말로 표현하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동원한 것이 건축물이나 교황이나 주교들의 외적 의장들이다. 사랑이라는 관념의 구체화(건축)라 할 수 있다. 불가피하게 관념은 형상을 요구한다고 할 수 있다. 그 반복들은 누구에 의해 재현되는가? 그 건축물을 바라보는 이가 누군가에 의해 단순 반복되거나 영속성을 갖고 반복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반복은 비트켄슈타인이 바라본 실체없는 중심이거나, 들뢰즈가 바라본, 차이를 수반한 정신의 연속성이거나 라이프니츠가 바라본 모나드의 물질화든 시간의 주름은 관념과 물질의 반복을 동반한다는 사실이다. 들뢰즈의 통찰처럼 ‘물질은 정신의 지극히 이완된 과거이거나 꿈’이리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반복은 차이를 발생하고, 어떤 반복은 차이 없는 단순 반복에서 매너리즘으로 귀착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성서에서는 시간의 주름을 한 순간에 펼친 인물로 마리아를 제시한다. 시간의 주름을 편다는 것은 하늘의 질서와 땅의 질서가 일필휘지로 연결된 것을 의미한다. 말씀이 사람이 된 사건, 시간과 공간이 무화되는 것으로 영원이라는 초시간의 개념이 도래한 것으로, 하늘의 질서와 땅의 질서가 한순간에 하나로 펼쳐지는 순간을 <계시>라고 말하기도 한다.
3.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자손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시리라.>
마태오 1,18-24를 읽어본다.
1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19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20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21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22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23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24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자손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시리라.>라고 전하는 마태오 1,18-24를 통해 이 땅의 질서와 하늘의 질서, 두 질서를 살아내는 우리, 시간과 공간의 주름을 경험하는 우리가 <임마누엘의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현존 체험은 어떻게 가능한가를 생각해보려고 한다.
마태오 1,18-24에서 멈춘 부분은 20절이었다. 20절을 세 부분으로 나뉘어, 마리아처럼 직접 계시가 아니고도, 수많은 표징과 상징 속에서 어떻게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는지? 20절의 <두려워하지 말고>에 초점을 맞추어 두려움과 실존, 두려움과 사랑의 관계를 생각해 보려고 한다.
“(1)다윗의 자손 요셉아, (2)두려워하지 말고 (3)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20절)
(1)다윗의 자손 요셉아
그냥 요셉이 아니고 요셉 앞에 다윗의 자손이라는 혈연적 호명이 붙었다. 이는 1차적으로 예언자들이 전한 구원의 영속성의 실현,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논란을 잠재우려는 것으로 구약의 예언자들을 통한 메시아 출현의 필연성을 상기시킨다고 할 수 있다. 유대인들의 고정관념인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에게서 니온다는 믿음에 방점을 찍는 것으로 마태오 복음사가는 도입부에 장황하게 예수님이 바로 다윗의 혈통이라는 혈연적 족보를 제시한 것에서 그것을 바라볼 수 있다.
이를 루카복음사가는 플라보시효과라는 측면에서, 다르게 제시한다.
Ⓕ사람들이 그에게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 하고 알려 주자, 38그가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루카 18,37-38)
루카 복음 사가는 소경걸인을 통해, 사람들이 <나사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고 전해주니, 소경걸인은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당시 유대인들의 메시아상에 대한 믿음을 그대로 고백한다. 이는 예수를 어떻게볼 것인가?에 대한 물음으로 예수님을 나사렛 출신의 한 사람으로 볼 것인가? 소경걸인의 고백처럼 예수님을 예언의 실현으로 볼 것인가?의 메시아의 정체성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도 가끔 사람들이 당신을 무엇이라고 부르는지 물어보셨다. 그때 베드로의 고백 <하느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라는 호칭이야말로 예수님의 정체성을 온전히 포괄하는 대답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 자주 칭했다.
그렇다면, 천사의 발언도 유대인들의 고정관념이라는 맥락에서 바라보아야 할까? 인간의 혈통으로 오지 않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인간의 혈통이라는 연속성으로 바라볼 것인가? 이는 역설적으로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어의 강조어법에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기가 얼마나 어려운 상황이었나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두려워하지 말고>에서 다윗의 혈통을 갖고 있는 요셉의 고민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요셉의 갈등은 모든 시대에 선한 사람들이 마주치는 갈등으로, 인간이 진정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해준다는 점에서, 요셉 앞에 붙은 혈통적 호명은 일종의 설득어라고 할 수 있다. 믿음은 혈통을 초월하는 다른 문제, 땅의 질서로부터 배운 하늘의 질서에 대한 수용, 즉 절대 사랑의 크기를 바라보는 자기이해라고 할 수 있다.
(2)두려워하지 말고
마태오 1,18-24을 묵상하는 핵심 키워드는 20절의 <두려워하지 말고>에 좌우된다고 할 수 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성서에 365번 이상 나오는 중요한 단어로 하느님 계시를 받거나 하느님 현존 체험 앞에는 늘 <두려워하지 말라>는 금지어가 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만약, 두려워하고 있다면 사실 우리는 하느님을 우리 삶에서 충분히 임마누엘의 하느님으로 체험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자신에게 인식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두려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마음의 기능이다. 마음은 엄청난 에너지의 진원지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고, 성서에서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반복 제시에서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모든 기적은 마음으로부터 시작된다. 무언가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그것이 위험에 빠지게 할 힘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야 가능하다. 이것은 잘못된 것을 가치있게 여길 때, 나타나는 현상으로 실재하지 않는 것을 실재하는 것으로 바라보는 우리 내부의 충돌 때문에 일어난다고 할 수 있다. 비본질적인 것이 우리 삶에서 다 떨어져나갔을 때, 우리는 오히려 그동안 두려워 했다는 것에 놀라기조차 한다.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이 우리 안에서 충돌할 때, 우리는 두려움의 원인도 미처 파악하지 못한 채, 불안해 하거나 두려워한다. 이 두려움은 여러 가지 양상으로 나타난다. 실재하지 않은 것이 현실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일 때는 쾌락으로, 실패한 것으로 보일 때는 고통으로 경험된다. 또 행복은 반드시 누군가의 희생을 담보한다는 개념은 종교적인 두려움을 낳는다(이 개념은 상선벌악의 하느님, 심판하는 하느님, 대가를 요구하는 하느님, 두려운 하느님으로 인식케 하는 종교적인 방어체계, 집단 무의식을 공고히 한다. 십자가의 심각한 훼손이고 왜곡이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뜻이 결국 모든 이에게서 이루어질 것을 믿고, 용서하고, 참고, 견디고, 기다리는 속죄가 전제된 '희망'이라고 할 수 있다. ). 또 다른 두려움의 행태는 자기환상이 파괴되었을 때, 즉 신비주의가 깨졌을 때, 아우라의 상실에서 비롯된 적나라한 현실 앞에서 두려움을 느낀다. 또 고통과 쾌락의 반복이 거짓임을 희미하게 감지했을 때, 무기력(매너리즘) 혹은 허무감(니힐리즘)에 빠진다. 아무 것도 할 수도 없고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은 상태 역시 두려움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이를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불렀다. 쾌락과 고통, 희생, 환상, 무기력(매너리즘) 혹은 허무감은 실재하지 않은 것을 실재화했다는 점에서 두려움의 다른 이름에 해당한다.
따라서 두려움은 평화와 공존할 수 없다. 두려움은 어떤 오류를 가치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므로 오류가 수정되기 전에는 계속 두려운 상태로 생존한다고 할 수 있다. 오류를 수정하는 진리가 마음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두려움은 교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두려움이라는 어둠은 퍼낼 수 없다. 빛이 들어와야 어둠은 사라진다. 그렇게 마음만이 오류를 범하거나 물리칠 수 있다. 어둠이 두려움이고 두려움이 곧 어둠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메시아의 도래, 성탄을 기다리는 것은, 그 모든 오류(어둠)를 한순간에 사라지게 할 진정한 <빛>을 기다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마리아의 두려움과 요셉의 두려움, 베드로의 두려움은 어떤 두려움인가?를 생각해 볼 차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루카1, 26-38)
마리아의 두려움은 하느님이 인간 역사에 직접 개입하실 때, 일어나는 초자연적 현상에 대한 경외심이다. 두려움과 경외심이 자주 혼동되어 쓰이는 이유에 해당한다. 이 개입은 하늘과 땅의 시간과 공간이 만드는 주름이 없는 일필휘지의 상태를 가르킨다. 우리는 그것을 직접계시라고 부른다.
반면, 요셉이 느끼는 두려움은 전통적인 사회관습에 길들여진 집단무의식의 표출로 땅의 질서가 무너질까 하는 생존의 고통을 예견한 데서 비롯된 두려움에 해당한다. 현실의 질서 안에서의 균열을 감당하지 못하는 실존의 두려움이라고 할 수 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27-28)
물위를 걸으신 예수님을 보고 베드로가 물위를 걷다가 느낀 두려움 역시 요셉이 느끼는 두려움처럼 우리가 일상에서 겪어내는 두려움이다. 하늘의 질서와 땅의 질서 사이의 간극, 틈새에서 느끼는 두려움이다. 베드로는 성서 전반에 걸쳐 가장 급격한 빛과 어둠의 낙차를 겪어낸 인물로 시간의 깊은 주름을 어떻게 펼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도에 해당한다. 베드로는 빛과 어둠의 급격한 상승과 추락이라는 시간의 주름을 겪어내면서, 교회의 수장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의 깊은 주름을 만드는 인류에게 준 희망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우리로 돌아가서, 두려움을 느낀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지각에 속은 것이므로 성령을 초대할 수도 알 수도 없다. 성령에 힘입지 않고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할 수 없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은 너의 지각을 치유 받고 영안으로 하느님의 질서를 바라보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두려움은 전적으로 우리 자신의 선택, 마음의 힘, 자유의지에 달려 있다.
그렇기에, 우리가 생존의 현장에서 어떤 두려움을 느낄 때, 두려움에서 해방시켜 달라는 기도는 사실 두려움의 책임을 외부에 전가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음을 함부로 어둠에 내 준 책임 전가라고 할수 있다. 우리는 행위보다는 마음에 너무 관대하다고 할 수 있다. 행위는 마음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그렇기에 두려움은 전적으로 우리의 마음, 책임에 관한 것이다. 두려움은 우리 스스로 사라지게 할 그 무엇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을 마음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자유의지는 신이라 할지라도 마음대로 개입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자유의지가 인간에게 주어졌다는 것은 양날의 칼을 쥐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기에 두려움 앞에서 두려움을 초래한 상황을 어떻게 다룰지 도와달라고 청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두려움은 왜 생기는가? 두려움은 실존의 현장에서 <원함과 행함> 사이에서 일어난다. 두려움은 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이 충돌할 때 일어난다. 상충하는 일들을 계속 행할 때, 그 압박감은 잠재적 분노나 육체적 병으로 표출된다. 하고 싶지 않지만 해야만 하는 일들을 거듭 행할 때, 그 억압은 잠재태개 아니라 분노라는 두려움으로 표출된다.
따라서 어떤 갈등이든 갈등은 사랑과 두려움 사이의 갈등이라고 할 수 있다. 두려움의 해제에서 두려움은 스스로 두려움이라는 상황을 종식시키지 못한다. 오직 완전한 사랑으로만 두려움은 사라진다. 두려움은 표출된 결과다. 사랑은 그 원인이다. 결과는 원인에 의해서만 치유가 가능하다.
두려움은 없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기에, 여기서 아무 것도 없다는 ‘무無’와 ‘모든 것’은 공존할 수 없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두려움은 진정 ‘무無’이며, 사랑은 ‘모든 것’이다. 그러기에 두려움은 하늘과 땅의 틈, 혹은 분리에서 일어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분과 우리 사이의 분리, 하느님 없이 살아보겠다는 아담의 오류를 반복하는 것이 두려움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의 뜻이 나의 뜻임을 인식할 때, 비로소 두려움이 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느님의 뜻은 가장 완전한 사랑이다. 하느님의 뜻이 가장 완전한 사랑이라는 것을 바라보기 위해, 나의 원함이 곧 하느님의 원함이라는 것을 바라보기 위해, 하느님은 우리에게 고통이나 희생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통찰하고 믿어야 한다.
마리아와 요셉 그리고 성인성녀들의 삶을 희생과 고통의 차원에서 바라보는 것은, 영적 차원이 아니라 몸의 눈, 상식에 기반한 지각의 차원이다. 두려움의 차원이다. 하느님의 일은 이 세상의 그 어떤 원함보다 더 강한 원함, 갈망에서 이루어진 것이지, 하느님 나라를 위해 볼모로 잡혀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뜻은 하늘을 향해 빛의 속도로 올라가는 갈망에 비례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예컨데, 예수님 시대의 모든 병자들을 예수님은 치유하지 않았다. 강렬한 갈망을 갖는 이들 안에서 치유는 이루어졌다. 하느님께 선택받았고 소명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명심해야 할 마음가짐이다. 왜냐하면, 불안과 두려움은 자신이 자신에게 준 오류이기 때문이다. 반면 하느님의 뜻은 오직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태고지를 받은 마리아는 기쁘고 설렐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두려움과 사랑, 이 두 개의 상반된 길은 전염성이 그 어떤 바이러스 보다 강하므로 그 전파력 또한 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진정한 갈망, 원함에서 하는 일들은 기적을 낳는다. 그것이 하늘의 뜻이고, 하늘의 질서이고, 완전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마음과 믿음이 결합하면 산을 옮길 수 있는 기적까지 이룰 수 있다는 것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경험할 수 있다. 마음은 이렇게 기적과 두려움을 만들 수 있는 에너지의 근원이라고 보면 된다.
그런 맥락에서, 의로운 사람으로 불리던 요셉이 어떤 두려움을 느꼈을지를 추론할 수 있겠다.
(3)(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요셉은 세례자 요한과는 달리 (구약에서) 의로움의 하느님에서 (신약의) 사랑의 하느님을 매개하는 사랑의 결절점이 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단락은 요셉의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를 살펴본 [하데비치를 위한 사랑의 가능성(불가능성)에 대한 시론(試論)]과 연장선에서 쓴 것이다.
요셉의 두려움은 땅의 질서 안에서 하느님의 질서를 살고 싶어하는 선한 사람들이 겪어내는 두려움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하느님의 사랑이 그 사람의 크기보다 더 크게 먼저 도착한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지 몰라 갈등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의 사랑은 언제나 우리 사랑보다 크고, 내 시야보다 넓고 높고 깊다. 무한한 사랑이라는 표현이 그래서 나왔을 것이다.
요셉은 어떤 상황에 놓여 있었나?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19절)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20절)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21절)
요셉은 먼저 도착한 예수님(빛)을 알아보기까지 두려움(갈등)의 시간을 겪어낸다. 그런 요셉이 개인의 의로움을 내려놓고(땅의 질서가 만든 작은 선), 성령의 계시(땅과 하늘이 하나로 연결된 큰 선)- 인류구원을 위한 하느님 사랑을 선택한 인물이 되었다. 그래서 요셉은 모든 교회의 수호자라 불릴 수 있을 것이다. 교회가 무엇인가?는 요셉이 누구인가?를 묻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요셉의 선택은 <하느님과 그 창조물들은 전적으로 서로에게 의존한다>는 것을 예표하는 상징적 인물에 해당한다. 이 세상이 하느님 나라가 되기 위해 요셉이(우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가 소년으로 성장하기까지 목수 일을 하던 요셉의 울타리가 있었음을 알고 있다. 나자렛에서, 예루살렘으로, 이집트에서 나자렛으로 성가정을 보호하기 위해 요셉의 삶이 길위의 날들이었음을 알고 있다. 여기서, 요셉의 시간을 희생과 고통의 시간이라고 바라볼 것인지? 인류구원의 울타리가 되신 분으로 바라볼 것인지?가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의 얼굴, 시간의 주름이라고 할 수 있다.
마리아도 사랑이고 예수님은 사랑 그 자체인데, 그분들의 사랑의 울타리가 되었다면 요셉의 사랑의 크기란 대체 얼마나한 크기의 사랑인가?를 한번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요셉은 교회의 수호자이자, 모든 사랑의 수호자, 하느님의 현신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기까지 한다.
이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는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요셉이 어떻게 인간적인 두려움을 극복하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을까? 요셉의 마음과 성령이 만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땅의 질서와 하늘의 질서가 만날 때, 그것을 중재하는 것은 두려움을 모르는 완전한 사랑이고, 그 매개자는 성령이었다.
마리아와 요셉의 역할은 성가정에서의 부부이자 부모로서의 역할이었다. 그들 가정을 지키는 것은 그들이 지닌 인간의 힘이 아니었다. 하느님의 힘, <성령으로> 이루어진 가정이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순전히 하느님 나라를 위한 도구적 존재인가? 그렇지는 않다. 동정녀냐, 아니냐, 예수님의 형제라는 표현이 무엇이냐는 것은 본질적 규명이 아니다. 호기심에 기반한 풍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한 가정이 성가정으로 지켜지는 이유는 매력적인 남녀의 만남과는 다른 차원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백년해로라는 말도 그렇다. 인간의 힘으로 가능하지 않은 시간의 주름, 은총의 역사에 대한 표현이다. <성령>으로 지켜지고 있는 성가정의 의미가 무엇인가는 신앙 안에서 성령을 진실로 경험했다면, <하느님께서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1, 37-38)는 것을 믿게 된다.
이 글은 두려워하지 말라! 두려워하며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다, 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요셉의 경우처럼 진정한 사랑은 두려움이 없다는 것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 사랑만이 현재에서 과거를 해제하고, 그리하여 미래를 놓아준다, 는 것도 바라볼 수 있었다. 우리에게 도착한 사랑은 언제나 우리가 지닌 사랑, 우리 인격보다 더 크다. 그래서 미리 도착한 그 사랑을 알아보기가 참 어렵다. 그것을 알아보기 위한 지난한 사랑의 역사가 이 땅에서 시간과 공간의 주름을 펴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간의 주름을 넘어, 사랑은 언제나 나보다 먼저 도착한다 au-delà des crevasses du temps, l'amour arrive toujours avant moi.]
글을 마무리하며, 임마누엘의 하느님께서 이미 우리와 함께 계심을 알아보기 위해 성서를 다시 읽어보기로 한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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