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저에게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놓아드리지 않겠습니다(창세기32,27)

나뭇잎숨결 2022. 10. 18. 11:22

 

 

 

 

 

 

저에게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놓아드리지 않겠습니다(창세기 32, 27)

 

-내가 원하는 것을 그분이 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그분이 원하는 것을 내가 정확히 알고 있는지?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연 중 제 29주 (다 해) 2022. 10. 16. Luc.18,1-8 ]

 

 

 

1. 김현승의 「견고(堅固)한 고독」 & 「절대 고독​」

 

 

「견고(堅固)한 고독」을 읽어본다.

 

 

껍질을 더 벗길 수도 없이 / 단단하게 마른 /흰 얼굴, // 그늘에 빚지지 않고 / 어느 햇볕에도 기대지 않는 / 단 하나의 손발. // 모든 신들의 거대한 정의 앞엔 / 이 가느다란 창끝으로 거슬리고, // 생각하던 사람들 굶주려 돌아오면 / 이 마른 을 하룻밤 / 네 살과 같이 떼어 주며, // 결정(結晶)된 빛의 눈물, / 그 이슬과 사랑에도 녹슬지 않는 / 견고한 칼날―발 딛지 않는 / 피와 살. // 뜨거운 햇빛 오랜 시간의 회유에도 / 더 희지 않는 / 마를대로 마른 목관 악기의 가을 / 그 높은 언덕에 떨어지는, / 굳은 열매 // 쌉쓸한 자양(滋養) / 에 스며 드는 / 네 생명의 마지막 남은 맛!(「견고(堅固)한 고독」. 1968)

 

 

「절대 고독​」을 읽어본다.

 

나는 이제야 내가 생각하던/영원의 먼 끝을 만지게 되었다.//그 끝에서 나는 눈을 비비고/비로소 나의 오랜 잠을 깬다.//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영원의 별들은 흩어져 빛을 잃지만,/내가 만지는 손끝에서//나는 내게로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오는/따뜻한 체온을 새로이 느낀다./이 체온으로 나는 내게서 끝나는/나의 영원을 외로이 내 가슴에 품어준다.//그리고 꿈으로 고이 안을 받친/내 언어의 날개들을/내 손끝에서 이제는 티끌처럼 날려보내고 만다./나는 내게서 끝나는 /아름다운 영원을/내 주름잡힌 손으로 어루만지며 어루만지며/더 나아갈 수도 없는 나의 손끝에서 /드디어 입을 다문다 - 나의 시와 함께(「절대 고독​」, 1970)

 

가을, 하면 김현승 시인의 「가을의 기도」가 떠오른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라고 시인은 고독을 자처했다. 굳이 고독을 자처하지 않아도 혼자 하는 작업들은 모두 고독과 벗해야 가능한 일이다. 여기서 김현승 시인의 고독은 일반적인 타자와의 간격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모든 시인들에게 언어의 화두 혹은 언어의 십자가가 있다면, 김현승 시인에게 ‘고독’ 은 시인이 평생 지고가려 했던 십자가였다.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百合)의 골짜기를 지나/마른 나무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가을의 기도」, 1956)라고 노래했던 김현승 시인은

 

「견고(堅固)한 고독」(1968년) 과 「절대 고독​」(1970년)을 통해 영원한 타자인 신 앞에 서 있는 시인 자신의 ‘한계상황’을 남김없이 목도하려고 했던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견고(堅固)한 고독」(1968년)에서 시인은 고독을 구체적인 것들로 의인화하여 바라본다. ‘얼굴’, ‘손발’, ‘창끝’, ‘떡’, ‘칼날’,과 ‘피와 살’, ‘열매’, ‘생명의 맛’ 등이 원관념인 고독의 매개어 구실을 하고 있다. 화자의 고독이 하나의 열매에 비유될 수 있다면, 그 자신은 그 열매에 자양(滋養)을 바치느라고 마를 대로 마른 나뭇가지이자 그 나뭇가지 앉아 있는 까마귀라고 할 수 있다. 성체를 상징하는 떡과 살, 피와 살이 신의 고독이라면, 신의 고독과 인간의 고독을 병치시킬 정도로 고독은 시인으로 하여금 형이상학으로 넘어가는 홀론이 된다. 그러기에 고독은 오욕칠정 너머에서 인간이 마지막 맛보는 맛, ‘네 생명의 마지막 남은 맛!’ 으로 존재의 심연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은 2년 후, 「절대 고독​」(1970년)에서 인간의 고독과 신의 고독은 나란히 병치되지 않는다는 것을 바라보게 된다. 신의 영원이 아니라 인간의 손끝에서 만져진, 경험된, 인간만큼의 영원을 영원이라고 바라본다는 점에서 첫 행의 ‘영원의 먼 끝을 만지게 되었다 와 마지막 행의 드디어 입을 다문다 과연 인간이 영원을 알 수 있나?라는 존재론적 질문 앞에 서 있을 뿐임을 고백한다. 고독을 궁구하는 것은 영원을 알려는 몸짓이라 할 때, 영원은 오직 인간의 경험의 범주라고 말할 수 밖에 없을 때, 시인은 5년후 영면에 들기전, 혹독한 고독의 시험을 당했다고 할 수 있다.

 

시인이 평생 시적 대상으로 삼았던 고독이 시인으로하여금 불가지론(不可知論-우주의 본질인 물(物) 자체는 인간의 경험으로는 인식할 수 없다는 이론)으로 치닫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시인은 절대고독을 상제한후 1973년 의식분명 상태를 겪으면서 한달 후 의식을 되찾고, 신으로 돌아가는 자신의 삶을 정리한 후 2년 후에 홀현 귀천 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김현승 시인이 고독을 일관되게 시적 대상으로 삼았던 것은 시인이 처한 시대 현실을 돌파하고자 하는 자기방어벽, 정신의 울타리이자, 더 나아가 신을 떠나 살 수 없는 인간의 도정을 숙명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고독은 시인에게 필연적인 화두였다고 할 수 있다.

 

『견고한 고독』(1968)과 『절대고독』(1970)은 이러한 그의 집요한 키에르케고르적인 실존, 신 앞에 서 있는 單獨者로서의 인간 실존에 대한 자각을 의미하는 과정이자, 인간은 자신이 고독한 존재라는 것을 앎으로써 세계와 자신, 그리고 신까지 인식하게 하는 영매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김현승 시인에게 <고독>은 자신과 세계와 신을 아는 화두이자 십자가이자, 사이클로이드 곡선Cycloid curve이었다고 할 수 있다.

 

 

 

 

 

 

 

 

 

 

 

 

 

2.  사이클로이드곡선(Cycloid curve)과 홀로그래피(Holography)

 

 

 

초등학교 5학년 수학시간으로 돌아가 보자.

 

사이클로이드 곡선(Cycloid curve)은 기와지붕에서 빗물이 떨어지는 곡선면에서, 매가 사냥을 할 때 낙하포물선에서, 놀이공원에서 타는 롤러코스트 기구들이 대부분 이 원리를 담고 있다.

 

사이클로이드곡선(Cycloid curve)은 원이 직선상을 구를 때 원둘레 위의 한 점이 그리는 곡선을 뜻한다. 그런데 이 곡선은 여러가지 성질을 가지고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다른 지점에서 출발하지만 도착시간이 같은 등시곡선(等時曲線, Tautochrone curve)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 곡선은 최단강하곡선 Brachistochrone이기도 하다. 같은 위치에서 떨어진 물질이 중력만의 영향을 받으며 하강할 때, 사이클로이드 곡선을 따라 움직일 때 가장 빨리 떨어지게 된다. 그래서 사이클로이드 곡선은 최단강하곡선이라고 부른다. 현실에서 한옥의 기와지붕, 매의 사냥, 그리고 롤러코스트 등은 모두 이 사이클로드 곡선을 이용한 것이다.

 

인간이 사물의 본질을 바라보는 가장 최단강하곡선 Brachistochrone을 홀로그래피(Holography)로 바라보기도 한다.

 

 

이 글은 [홀로그래피(Holography),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의 연장선에서 재인용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 보기로 한다. 

 

 

우주의 감추어진 질서와 드러난 질서는 무엇인가? 이 질문은  21세기에 인류가 고민하는 키워드는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연결되어 있다. 인류는 여전히 목마르고, 여전히 배고프고, 여전히 바람앞에서 깜빡거리는 등불이자, 여전히 상한 갈대인 인류, 끊임없는 진화의 결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늘 어떤 위기의 상황 앞에 처해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 고민의 이름을 홀로그래피(Holography)에서 찾아 볼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지폐와 신용카드를 생각해 보자. 홀로그래피(Holography)란, 두 개의 레이저광이 서로 만나 일으키는 빛의 간섭 현상을 이용하여 입체 정보를 기록하고 재생하는 기술을 의미한다. 또한 홀로그램(Hologram)은 그 기술로 촬영된 것으로 '완전함' 혹은 '전체' 라는 뜻의 'Holo'와 '메시지', '정보'라는 뜻의 'Gram'이 합쳐진 말이다. 홀로그래피의 원리는 1947년에 데니스 가보르가 고안하였다. 가보르는 수은등 빛을 핀 홀(아주 작은 구멍)에 통과시킴으로써 되도록 간섭성이 좋은 광원을 얻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얻어진 상은 매우 희미한 이중상(二重像)일 뿐이어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하였다. 코히런트한 광원이 얻어진 것은 1960년대에 들어서서 T. 메이먼이 레이저를 발명한 후의 일이다. 이어서 레이저 광을 연속적으로 발진하는 헬륨 네온 레이저가 개발되었다. 오늘날 신용카드에 사용되는 홀로그램이 바로 레인보우 홀로그램이다. 1983년 마스터카드(MasterCard International)가 처음으로 홀로그램을 사용해 신용카드의 위조 방지 장치로서 도입했고, 그 이듬해에 Visa도 비둘기 문양 홀로그램을 선보였다.

 

 

 

홀로그래피와 인공지능은 4차산업혁명을 이끄는 쌍두마차에 해당한다. 인류는 기계문명을 여기까지 발전시켰다. 이것이 왜 21세기 인류 고민의 현주소일까? 물질문명과 의식의 괴리, 인간은 물질 안에 인간의 지능을 결합하는 문제를 고민하고 있다는 것은, 인간은 끊임없는 발전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으로 여전히 배고픔과 목마름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물질을 인간화하려는 그 필사적인 노력의 이면에는 인간은 물질만으로도, 혹은 인간만으로도 살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직간접으로 고백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마셜 맥루한과 장 보드리야르는 인간의 이 딜레마. 발전하면 할수록 그만큼 정신의 허기도 커지는 이유를 매스미디어나 이미지, 즉 인류의 문화코드에서 그 이중적 욕망을 읽어낸다.

 

 

 

디지털 컴퓨터가 숫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전기 기술은 말과 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전기는 의식 그 자체의 과정을 세계적 규모로, 전혀 언어화시키지 않은 채 확장하는 길을 열어 준다. … 이런 의식은 베르그송이 꿈꿨던 집단적 무의식과 매우 흡사할 것이다. 생물학자들이 육체의 불멸성을 약속해 주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무중력’ 상태는, 집단 간의 조화와 평화를 영원히 가져다줄 무언어(無言語) 상태와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마셜 맥루한)

 

 

 

마셜 맥루한은 <미디어의 이해>에서 커뮤니케이션 미디어를 인간의 지각과 인식을 바꾸거나 혹은 왜곡하는 힘을 지니고 있는 모든 테크놀로지라고 정의하고 있다. 모든 미디어에 대한 우리의 전통적인 대응, 즉 “중요한 것은 미디어들이 어떻게 사용되는가다”라는 식의 대응은 기술에 관해 전혀 모르는 이들이 보여 주는 감각 마비 상태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미디어의 ‘내용’이란, 도둑이 집 지키는 개의 주의를 딴 데로 돌리기 위해 사용하는 육즙이 흐르는 고깃덩어리처럼 우리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때문이다. 인간의 전체 비즈니스는 ‘배우는 것’과 ‘아는 것’으로 되어 가고 있다. 이런 현상은 모든 형태의 고용이 ‘급료를 받아 가며 배우는 것’이 되고, 모든 형태의 부가 정보의 이동에서 생기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각적 정보의 시대가 되면 인간은, 파편화하고 전문화하는 데 몰두하던 자신의 직업에 종언을 고하고 정보 채집자로서의 역할을 맡게 된다.

 

 

 

오늘날 정보 채집은 “문화”라는 포괄적 개념을 다시 도입하게 되는데, 이는 꼭 원시 시대의 식량 채집자가 자신의 모든 환경과 완전히 균형을 이룬 상태에서 일을 했던 것과 일치한다. 이 새로운 유목적이고 “노동 없는” 세계에서 우리가 가지게 되는 절박한 관심사는 인생과 사회의 창조적 과정들에 대한 지식과 통찰이다. 인쇄가 인간에게 부여한 선물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거리 두기와 관여하지 않는 특성일 것이다. 이는 곧 반응 없이 행동하는 힘을 인간에게 부여했다. 르네상스 시대 이래, 과학은 이 선물을 높이 찬양해 왔다. 그러나 이 선물은 먹으면 먹을수록 배고파지는 곤혹스러운 선물이 되고 말았다.

 

 

 

장 보드리야는 이를 시뮬라르크, 시뮬라시옹이라고 부르는 <이미지의 대량생산>으로 바라본다.

 

 

 

시뮬라르크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 놓는 것을 말하며 그 결과물은 시뮬라시옹이다. 시뮬라시옹은 현실을 모사할 뿐만 아니라 대체해 버리고, 현실은 이 이미지에 의해서 지배받게 되므로 오히려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것이 된다. 체계 전체가 기능성의 개념에 근거를 두고 있음을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색깔·형태·재료·배열·공간, 이 모든 것이 기능적이다. 모든 체제가 민주주의적이 되고자 하는 것처럼, 모든 사물은 기능적이 되고자 한다.(장 보드리야르)

 

 

 

장 보드리야르 대중과 대중문화 그리고 미디어와 소비사회에 대한 이론으로 유명한 철학자이자 사회학자, 미디어 이론가이다. 1968년 『사물의 체계』, 1981년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을 발표하면서, 보드리야르는 뒤르켐의 지적 전통과 미디어 이론과 관련해서는 캐나다 이론가 마셜 매클루언의 영향을 받으며, 현대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이미지 과잉의 시대가 인류를 끌어가는 보이지 않는 손이자, 실재와 비실재의 경계를 허물어 인간의 삶 자체가 이미지화되었음을 바라보았다. 사물이 인간의 삶을 끌어가므로, 파편화 사물화의 경향은 필연적 산물인 셈이다.

 

 

 

이렇듯, 인류는 인간이 빵만으로도 살 수 없고 빵이 없어도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확인시켜 주었다. 그럼에도 그 중에 하나만 집어들게 만드는 편향적 사고의 습관이 고질화되었고, 이런 고민과 선택의 반복은 인류의 출현만큼이나 그 역사가 유구하다. 이미 어떤 정서로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인류의 그 고민을 역추적해보면,

 

 

 

‘좋은 상태'의 실현이 아니고서 이 우주 안에서 존속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모든 물질의 안정에는 적어도 대칭이 아닌 균형감각을 유지하는 자연의 원리가 숨어 있다.(플라톤)

 

 

 

플라톤은 『국가』에서 '좋음(善)의 이데아'를 인식론적, 존재론적 원리로 내세우고는 있으나, 그것이 왜 궁극적인 원리일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질문을 『티마이오스』에서 답한다. 우주 창조에 있어서도, 자연 및 자연 속의 모든 사물에 있어서도, 인간의 모든 기술적 창출이나 행위에 있어서도 그 이루어짐의 궁극적 목표가 되는 것은 '좋음'(善)이니, 결국 '좋음'이 그 원리가 된다고 보았다. '좋은 상태'의 실현이 아니고서 이 우주 안에서 존속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고 그는 묻는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칸트는 ‘아 프리오리(a priori, 선천적先天的)라는 개념으로 바뀐다. 밭터 벤야민이 바라본 아우라는 개념과 어떤 접점이 있지만 칸트는 예술작품을 너머 존재의 근원까지 이 영역을 확장한다.

 

 

 

 미美는 아 프리오리(a priori, 선천적(先天的))라고 부른 사고범주(思考範疇)에 속하는 것이다. 비유하건대 도덕을 대상으로 한 상징이다. 도덕상 본질로 인간의 현존은 스스로 최고 목적 자체이다. 신 개념을 발견은 이성의 도덕상 원리이며, 신 현존의 내부상 도덕에 적합한 목적 규정은 최고 원인을 사유할 일을 지시하고 자연 인식을 보충한다.(칸트)

 

 

 

모든 물질과 진선미 속에 순수 균형과 조화의 원리가 내재해있다는 것을 하이젠베르크는 불확정성의 원리로 정리한다. 양자역학의 기수인 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는 『부분과 전체』에서 플라톤 철학과 칸트의 미학에서 <부분과 전체>의 조화, 자연의 안정성과 균형감각의 원리가 무엇인가를 정리한다.

 

 

 

당신은 공자(孔子)의 격언이라는 실러의 시를 알고 있으며, 특히 내가 그 중에서 「충만만이 명석에 통할 수 있으며 심연 속에 바로 진리가 숨어 있다」라는 구절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요? 여기서 말하는 「충만」이란 경험의 충만 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문제를 제기하고 어떤 현상을 말할 때 사용하는 여러 종류의 다른 개념들의 충만도 의미하고 있습니다.(하이젠 베르크)

 

 

 

칸트의 철학에서 인과율이란 경험에 의해서 기초가 설정되거나 반증될 수 있는 그러한 경험적 주장이 아니라 반대로 모든 경험을 위한 전제이며, 칸트가 아 프리오리(a priori, 선천적(先天的))라고 부른 사고범주(思考範疇)에 속하는 것. 우리가 세계를 파악하는 감각인상은, 그 인상이 선행하는 과정에서 결과되는 어떤 법칙이 없다면, 어떤 객체도 대응할 수 없는 감각의 주관적 유희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며. 따라서 이 법칙 즉 원인과 결과의 일의적인 연결은 사람들이 어떤 지각(知覺)을 객관화하려고 할 때에, 또 사람들이 어떤 것―사물이 아닌 과정―을 경험하였다고 주장하려 할 때에는 이미 이 법칙을 전제하여야 한다는 것. 또 한편에서는 자연과학은 경험을, 바로 객관적인 경험을 취급하고. 그것은 다른 사람에 의해서도 제어될 수 있는 것이고, 엄밀한 의미에서 객관적일 수 있는 경험만이 자연과학의 대상이 될 수 있으므로. 모든 자연과학은 인과율을 전제해야 하며, 이로부터 인과율이 성립되는 한에 있어서 자연과학이 성립될 수 있다는 결론이 불가피하게 내려진다. 그러므로 인과율이란 어떤 의미에서 우리들의 감각인상의 소재를 소화하여 경험에 이르게 하는, 말하자면 사고의 도구라고 보았다.

 

 

 

이를 다시 우주의 ‘홀로그램’이라는 이론으로 정립한 사람이 2차세계대젼 당시 맨하탄 프로젝트에서 축출된 데이비드 봄이다. 하이젠베르크와 데이비드 봄은 2차세계대전 당시 핵무기를 만드는 일에 소환되거나 축출된 물리학자들이다. 데이비드 붐은 간첩혐의로 미국에서 추방당한 후, 아인슈타인과 하이젠베르크의 거시물리학과 미시물리학을 연결하여, 이 우주는 드러난 질서와 감추어진 질서가 있다고 본 물리학자이다.

 

 

 

실재의 더 깊은 차원을 ‘감추어진(implicate, 접힌 enfolded) 질서’라고 하고, 우리의 존재차원을 ‘드러난(explicate, 펼쳐진 unfolded) 질서’라고 부른다. 그러나 “인류의 의식은 깊은 차원에서 하나다”라고 한다. (데이비드 봄)

 

 

 

베이비드 봄은 상대론을 뛰어넘는 우주의 질서를 찾아서 홀로그램 우주(Holographic space)라는 이 가설로, 우주와 경험적 현상 세계는 전체의 일부분일 뿐이며, 우리가 보는 부분의 모습은 홀로그램의 간섭 무늬처럼 질서가 결여된 모습이고, 실제 의미를 가진 전체는 더 깊고 본질적인 차원의 현실에 존재한다는 이론이다. 레너드 서스킨드를 비롯한 일부 끈이론학자들은 홀로그래피 원리를 주장하기도 했다. 데이비드 봄의 기존 양자역학에 대신한 홀로그램 우주 가설은 그는 EPR 역설에서 양자역학의 측정 결과를 빛의 속도보다 빨라야만 측정할 수 있다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의문을 제기한 것에 대해서, 그것이 전자가 상호연결되어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봄은 버클리 방사선연구소에서의 실험을 통해 플라스마 속에 전자들이 들어왔을 때 전자들이 개별로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는 전체의 일부처럼 조직적인 활동을 한다는 것을 알아냈고, 이것을 플라스몬이라고 명명했다. 마치 퍼진 잉크방울처럼 홀로그램 필름에 기록된 간섭무늬는 알아볼 수 없는, 무질서한 모습이지만, 실린더를 반대 방향으로 돌리면 퍼진 잉크방울이 다시 한 방울이 되는 것처럼 홀로그램의 이미지가 제대로 보일 때에는 그것의 질서가 갖춰진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현실 세계는 홀로그램의 간섭무늬처럼 무질서한 환영이고, 더 깊은 차원에 모든 사물과 물리적 세계의 모습을 만들어내는 본질적인 차원의 현실이 존재한다는 것이 데이비드 봄의 홀로그램 우주이다. 그는 우주를 홀로그램보다는 홀로무브먼트(holomovement)라 불렀다.

 

 

 

보이는 세계를 끌어가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원리, 어느 시대든 주류 패러다임을 뒤집기란 쉽지가 않다. 인류는 미학과 철학과 사회학과 물리학모든 분야에서 이 우주와 세계에서 벌어지는 어떤 일들은 물질을 초과하는 질서의 에너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인류는 중세의 종교적인 도그마, 트라우마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라 할 수 있다. 그것이 신의 섭리라는 말을 아끼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신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낮은 하등동물이 하는 행위쯤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는 신을 믿는다고 자부하는 이들이 정작 인류로 하여금 결정적인 통찰의 순간에도 신의 이름을 부를 수 없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우리가 신과 인간 관계의 사이클로이드곡선(Cycloid curve)을 알지 못하는 이유라고 보고 있다. 일군의 학자들은 신과 인관의 사이클로이드 곡선을  홀로그래피(Holography)라고 바라보기도 한다. 신앙인들의 그것을 기도라고 말하기도 한다. 

 

 

 

 

 

 

 

 

 

 

 

3.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부르짖을 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신다.>루카18,1-8

 

 

루카18,1-8을 읽어본다.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제자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2 어떤 고을에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한 재판관이 있었다.3또 그 고을에는 과부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줄곧 그 재판관에게 가서, ‘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하고 졸랐다. 4 재판관은 한동안 들어주려고 하지 않다가 마침내 속으로 말하였다.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5 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는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어야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까지 찾아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 6 주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새겨들어라. 7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부르짖을 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신다.>라고 전하는 루카18,1-8 루카복음에만 있는 특수사료에 해당한다.

 

루카18,1-8은 <기도의 항구성>에 대해 전하고 있다고 성서해설서들은 일관되게 바라보고있다. 그렇다면 기도의 항구성을 가능케 하는 것은 무엇인가?

 

기도의 항구성이란, 청원기도에서 감사기도로, 감사기도에서 관상기도로 넘어가는 신앙의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기도의 항구성은 오래도록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 내가 누구인지 바라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도를 하지 않으면 삼위일체 하느님과 나의 관계를 결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루가 복음 사가는 그 어느 공관복음 사가들보다 더 많이 기도할 것을 권하고 있다. 그렇게 기도를 권한 것은 기도를 통해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알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고 할 수 있다. 기도는 믿음을 보존하고, 유혹을 이기며, 타인을 용서하고, 장차 재림할 사람의 아들을 믿을 수 있는 힘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특히, 예수님 친히 자주 기도하셨다는 것에서 (3,21/5.16/6.12/9,18-29/10,21/11.1/22,32-45/23,34-46), 즉 마지막 십자가상에서까지 용서의 기도를 하셨다는 것에서, 아버지께 당신 자신을 끝까지 맡겼다는 것에서 기도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축복의 매개체이자 내가 누구인지 분명히 알게되는 거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연중 17주일과 연장선에서, 연중 17주일은 기도가 필연적으로 아들의 마음에서 아버지에게로 올라가는 육화의 과정이므로 (십자가의) 고통의 과정을 경험하는 것이라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면, 연중 29주일에서 기도는 십자가의 고통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기쁨에 도달하는 것이 기도의 궁극적인 축복이라는 것을 바라보려고 한다.

 

루카18,1-8에는 Ⓐ, Ⓑ, Ⓒ에 다음과 같은 상반된 부사절이나 서술어가 나온다. 이 부분이 우리가 기도의 축복에서 이해하고 지나가야할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분명, 진리는 반대쌍이 없다. 진리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진리는 단순하게 그분의 현존을 계시한다. 모든 것인 것은 다른 그 무엇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기도를 하면할수록 정화되고 단순화 되는 것에서 그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오히려 그 단순함이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고 할 수 있다. 이미 기도의 응답은 지체없이 주어졌지만, 기도가 이루어진 것을 바라볼 수 있는 영안이 열려있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버지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청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 너무 적은 것, 작은 것을 청한다. 너무나 작은 것을 청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보지 못한다는 역설이 발생한다. 기도의 항구성은 그분과 연결되어 있다는 확인이기도 하지만 그를 통해 실은 우리가 지닌 정체성이 무엇인가를 바라보는 자로미터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할 수 있다. 오천명을 먹이신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면 예수님의 기도의 태도, 내용, 목적이 무엇인지 단적으로 드러난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배고픈 사람들을 먹인 이적사화이면서 동시에 예수님 자신이 누구인지 보여주는 정체성의 확인이었다.

 

 

그런 맥락에서 루카18,1-8에서 상반된 기도의 태도가 무엇인지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에서 낙심하지 않고, 끊임없이 Ⓑ에서 졸랐다, 귀찮게 하니, 끝까지 찾아와서 Ⓒ에서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미적거리시겠느냐? 지체없이 이 상반된 의미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 Ⓑ, Ⓒ에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졸랐다, 귀찮게 하니, 끝까지 찾아와서, 밤낮으로 부르짖는 데는 사람의 입장에서 기도의 지연에 대한 인식이 나온다. 그런데 미적거리시겠느냐? 지체없이 에서처럼 하느님의 입장에서 기도의 응답이 즉시 주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미적거리지 않고, 지체없이 기도의 응답을 주시는데, 왜 우리는 밤낮으로 끊임없이 부르짖거나 졸라대는 아이와 같은 입장에서 기도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는가? 이것은 우리가 드리는 기도의 내용, 태도, 목적이 분리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기도의 분리는 사람의 아들이 오시기전의 기도와 사람의 아들이 오신 후의 기도의 응답의 차이로 바라볼 수 있다.)

 

<미적거리시겠느냐? 지체없이>에는 반대쌍이 없다. 그런데, 에서 낙심하지 않고, 끊임없이 에서 졸랐다, 귀찮게 하니, 끝까지 찾아와서 에서 밤낮으로 부르짖는데는 반대쌍이 있다. 이것이 기도의 지연된다고 생각하는 근본 이유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루카복음 사가는 특수사료를 쓰는 것뿐 아니라 가필을 하기도 한다. 그 가필이 언뜻 앞의 복음 내용과 맥락상으로 단절어로 보이기도 하지만 실은 고도의 의도된 연결어라는 것을 바라볼 때 상반된 부사절과 서술절을 연결한 이유를 바라볼 수 있다.

 

8절에는 앞의 내용과 다른 맥락의 재림, 종말론에 대한 언급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8절의 내용은 기도는 기도는 내용, 기도의 태도, 기도의 목적을 아우르는 ‘사람의 아들’에 대한 믿음의 문제라는 것으로 수렴된다. 기도는 궁극적으로 사람의 아들에 대한 믿음의 문제로 수렴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기도만이 아들에 대한 믿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다른 의미로 기도는 삼위일체 하느님과의 관계 정립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기도하던 그 기도의 궁극적인 최종점은 그분을 믿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연중 17주에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아들의 마음에서 아버지에게로 올라가는)에 대한 정립이라면 연중 29주는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의 재정립이라고 할 수 있다.(예수님과 우리 관계의 초점은 또한 우리와 성령의 관계를 의미한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를 물론 따로 떨어져 있는 관계가 아니라 함께, 즉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가 동시에 경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상반된 부사절이나 서술절이 나온 이유는 즉 예수님이 부활하시기(성령의 강림)전의 기도는 늘 지연의 기도였다면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나서의 기도는 지체없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기도하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그분과의 관계를 아는 것은 실은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이런 자기 성찰을 하기에 이른다. 이는 우리 신앙의 여정이 줄곳 사순시기인가? 아님 수난과 고통과 죽음을 거친 부활의 시기인가? 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지연되는 기도는 사순시기에 머문 기도라고 한다면, 지체없이 응답되는 기도는 수난과 고통과 죽음을 거친 부활의 기도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다시 이런 성찰에 이를 수 있다. 기도는 그분이 응답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과정이 이미 응답을 내포하고 있구나! 하는 것이다. 그레서 지체없이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이미 삶으로 충분히 수난과 고통과 죽음을 살아냈다면, 나는 그분처럼 부활할 일만 남았구나! 하는 것이다. 내가 제대로 죽지 않았기 때문에 부활을 연기한다고 할 수 있다. 응답의 지연은 내 삶의 어떤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기도란 지체없이 그분께서 응답되는 기도만이 있다는 것을 바라볼 수 있다.

 

부활의 기도는 바로 마리아의 노래 마니피캇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마리아처럼 살지 못한 이들의 기도는 늘 지체되는가? 하는 질문을 하게된다.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분이 자비에 의지한 기도 역시 즉각적으로 응답받은 기도에 해당한다. 여기서 기도는 절박할 상황에서 드리는 SOS 뿐 아니라 우리의 삶 자체가 기도라는 사실을 바라보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때, 우리의 유일한 기도가 <주님의 뜻이 그대로 저에게 이루어 지소서!> 라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행복한 기도를 드릴 수 있을 때까지, 우리의 기도는 Ⓐ에서 낙심하지 않고, 끊임없이, Ⓑ에서 졸랐다, 귀찮게 하니, 끝까지 찾아와서 Ⓒ에서 밤낮으로 부르짖는 그 상태를 반복하는 중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도는 이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행위다. 개인적으로 지인들은 내가 기도를 너무 많이 한다고 지적한다. 이것은 칭찬이 아니라 비난이다. 어떤 문제해결의 상황에서 액션을 취하기보다 기도를 먼저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인들이 오해하는 것이 있다. 내가 기도를 많이 하는 것은 시간의 양이다. 기도의 깊이 앞에서 나는 늘 절망하기 때문이다. 기도의 깊이란 <가상칠언>의 기도를 의미한다. 우리가 현실에서 해결해야할 문제 상황에서 이 <가상칠언>과 연결되어 있지 않은 것은 없다. 저 사람은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는지 모르고 그 일을 하고 있으니 그를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누군가를 용서해달라고 하는 데까지 기도할 수 있지만, 주여 제 영혼을 당신께 맡깁니다! 라고 기도 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이 믿음의 틈을 넘어서 또 내가 원하는 것을 그분이 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그분이 원하는 것을 내가 알고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삼위일체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과정이다. 하느님도 좋으신 분, 나는 그분의 창조물이니 당연히 좋은 사람인데, 참 좋은 뜻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겪어내는 것은, 좋은 뜻과 혼연일체가 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끊임없이 기도드리는 것이다. 내 뜻이 하느님 뜻에 지는 것이 행복하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지만, 마리아의 수태고지처럼 주님의 뜻을 즉각적으로 분별하고, 받아들이는 그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을 늘 뼈아프게 생각한다. )

 

 

처음으로 돌아가서,

기도의 항구성이란 시간의 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깊이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루카18,1-8은 우리의 기도가 <그분께서 미적거리시겠느냐? 지체없이> 의 즉각적으로 응답받는 축복, 은총임을 알려주고 있다.

 

글을 마무리하며, 야곱과 바오로의 기도를 생각해 보자.

 

저에게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놓아드리지 않겠습니다(창세기, 32.27)

 

나는 모든 이에게 모든 것(Omnibus Omnia)이 되었습니다.(1코린토,9.22)

 

하느님의 뜻인 기도는 인류가 하나라는 축복의 연대성을 알게 해 준다. 야곱의 기도는 야곱 개인에게 주어진 축복으로 끝나지 않았다. 야곱의 저 기도로 인해 야곱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아브라함으로 시작된 믿음의 도저한 약속이 이삭을 거쳐 요셉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까지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을 바오로는 <모든 이게 모든 것이 되는 것!> 이라고 표현한다.

 

야곱과 바오로가 받은 축복은 그들 한 개인의 축복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연대성으로 세세대대 확장되어 오늘 우리에게까지 왔고, 그것은 다른 말로  나의 기도는 또 누군가에게 축복이라는 생명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영성가들은 나라는 한 사람은 최소 천명 이상을 대표한다고 말한다. 이는 축복의 연대성을 말하며 그런데, 그 축복은 축복받은 자만 축복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도가 아니면 내가 어떤 축복을 받았는지 바라볼 수 없다. 기도는 궁극적으로 자신의 은총지위를 확인하는 자기 치유이고, 자기정체성의 확인이고, 무한한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이 <하나Oneness>라는 것을 바라보는 비전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7)

 

 

 
 
 

 

 

Andrea Bocelli - The Lord's Prayer - Live From The Kodak Theatre, USA /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