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새에게 독수리가 어떻게 비상하냐고 묻지 마라(헬렌 슈크만)
-자기 부정을 통해 자기 긍정에 이르는 비전(Vision)을 위한 제언
[연 중 제 27주일 (다 해) 2022. 10. 2. Luc. 17, 5-10 ]
1. 박성룡, 「과목(果木)」
시를 읽어 본다.
⑴과목(果木)에 과물(果物)들이 무르익어 있는 사태(事態)처럼/나를 경악케 하는 것은 없다.//⑵뿌리는 박질(薄質) 붉은 황토에 가지는 한낱 비바람들 속에 뻗어 출렁거렸으나//⑶모든 것이 멸렬(滅裂)하는 가을을 가려 그는 홀로/황홀한 빛깔과 무게의 은총을 지니게 되는 // ⑷과물들이 무르익어 있는 사태처럼 나를 경악케 하는 것은 없다//⑸ㅡ 흔히 시(詩)를 잃고 저무는 한 해, 그 가을에도/나는 이 과목의 기적 앞에 시력(視力)을 회복한다.
박성룡의 「과목(果木)」은 1연과 4연에 “과목(果木)에 과물(果物)들이 무르익어 있는 사태(事態)처럼/나를 경악케 하는 것은 없다”라는 발상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시적 발상은 하나의 발견이자, 감탄과 경이로움을 낳는 시의 동인이자 모태다. 자연현상을 사태와 경악으로 바라보는 것을 시인이 시력을 회복하는 것으로 바라보는 이 발상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자연현상을 경악, 사태로 바라보는 것은 시적 수사나 과장적 표현으로 바라보는 일상의 시선으로는 알 수 없는, 이 시가 내장하고 있는 ‘신의 은총’이라는 영적인 묘수에 해당한다.
박성룡의 「과목(果木)」을 읽으면, 시인은 범신론자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5연에서 “이 과목의 기적 앞에 시력(視力)을 회복한다.”에서 말하는 시력(視力)은 육체의 ‘눈’이 아니라 ‘비전’으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2. 관념의 질서와 결합은 사물의 질서와 결합과 똑같다(스피노자)
상식의 시선에서 벗어나는 이 비전(Vision)은 어떻게 생기는가?
이 글은 다음 글의 연장선에서 쓰인 글이다.
[봄-보임의 파놉티콘에서 시놉티콘 너머 무엇이 있을까?]
[본다(emblepen)는 것은 필연적으로 ‘사유’를 발생시키는가?]
비전(Vision), 하면 스피노자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스피노자(1632~1677)는 데카르트, 라이프니츠와 함께 대륙의 합리론자로 흔히 기억된다. 그는 정통 유대인이었지만 유대교리에 대한 비판으로, 이단으로 몰려 유대사회에서 추방당한 지식인이었다.
스피노자의 철학은 데카르트부터 시작된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 연구자로 데카르트의 물질과 정신의 이원론을 극복하기 위해 무한성에 대한 사상, 수학적 사고방식, 자연과학의 원리들, 자연종교적 사유, 그리고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을 종합해 심신이원론이 아니라 심신평행론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심신이원론의 대척점에 심신일원론이 있다면, 스피노자는 그들과는 다른 차원의 정신과 물질의 관계를 바라보았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지식인이 신에 대해서 말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교설로, 웃음거리가 되는 우리 시대와 비슷한 시대의 흐름 속에서 그는 신을 모든 것의 제1원리, 자기원인으로 바라보았다. 그것이 스피노자가 심신이원론도 아니고 그렇다고 심신일원론도 아닌 심신평행론을 주장한 근거라고 할 수 있다.
①자기 원인이란 그것의 본질이 존재를 포함하는 것, 또는 그것이 본성이 존재한닥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것을 이해한다.(정의1) 실체란 자신 안에 있으며, 자신에 의하여 생각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실체는 그것의 개념을 형성하기 위하여 다른 것의 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정의3)
②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 안에 있으며, 신 없이는 아무 것도 존재할 수도 파악될 수도 없다(정리15)
③사물의 본성에는 어떤 경우도 우연적으로 주어진 것이 없으며, 모든 것은 일정한 방식으로 존재하고 작용하게끔 신적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정리 29)
④신의 능력은 신의 본질 자체이다(정리34)
스피노자는 최고의 진선미의 근원은 신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인간은 그 최고의 진선미를 자연스럽게 알 수 없다는 데서 그의 인식론은 출발한다. 스피노자는 여기서 인식의 어떤 과정을 상정한다. 그 이유가 인간이 지닌 영혼의 수동성과 적극성 때문이라고 바라본 것이다.
스피노자는 영혼과 인식의 관계에 대해 첫째, 감각을 통해 인식(사유)이 생기고, 이 인식은 감각에 의해서 성립되는 원초적 인식이라고 보았다. 인식의 두 번째 단계는 사유에서 나오는 이성의 인식이다. 세 번째 인식은 사유를 넘어서는 직관적 인식이다.
스피노자에게 실체 개념은 인식을 만들어주는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그는 실체란 정의1과 정의3에서 보듯 실체는 자기 원인이자 모든 것의 원인으로 바라보았다.
스피노자의 실체 개념 때문에 흔히 스피노자를 범신론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실체만이 영원하고 무한하며 분할할 수 없으며 자유로운 데, 인간의 오성은 유한하기 때문에 인간은 사유와 연장 속에서만 실체가 무엇인가를 바라볼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실체의 본질은 속성이고, 실체의 변화는 양태라고 규정하여, 실체의 본질은 사유와 연장이라고 보았다. 영혼과 신체가 개별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양태이고, 이것은 다시 무한한 양태와 유한한 양태로 나누어진다고 바라보았다.
무한은 실체와 속성이 같을 때, 유한은 실체와 속성이 다를 때, 즉 시간과 공간에 제한을 받는 인간과 자연 모두에게 나타나는 인식이라고 보았다. 이렇게 본다면 실체는, 본질 혹은 속성은 불변하는 신의 관념이라면 양태는 변화무쌍한 인간의 관념이라고 바라본 것이다.
또한 인과율은 신체에서는 신체내에서만, 정신에서는 정신내에서만 존재하므로 신체와 정신은 서로 병행할 뿐이라고 보았다. 스피노자가 심신평행론에서 신의 불멸성을 바라보고 있으나,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회의론이 나온다. 인간의 의지와 지성은 동일한 것으로 의지 역시 자연의 인과율에 따르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지 않게 된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신을 인정한다는 것은 삼위일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다. 종교로 치자면 유대교나 이슬람교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스피노자가 유대 종교에서 유대교의 교리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추방당했지만, 유대교의 인과응보사상이 뼛속까지 스며든 자연과학적 인과율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바라볼 수 있다. 그가 말하는 신은 신앙의 신이 아니라 자연의 신, 철학의 신으로 환원되기 때문이다. 인간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상호소통하는 신이 아니다.
누가 스피노자를 싫어할 수 있는가? 라는 말이 21세기 지식인 사이에서는 정설처럼 회자된다.
그것은 이 시대의 지식인의 정신의 모순율을 드러내는 것으로, 두 가지 측면에서 그를 바라볼 수 있다.
먼저, 스피노자 철학에는 신에 대한 형이상학적 갈망이 제1원인으로 깔려 있다. (21세기에 지식인들이 신에 대해서 강의 도중 말하는 것을 거의 원시적인 상태로 바라보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형이상학적 갈망은 인과율이 투사된 자연 과학의 원리와 비슷하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설 땅이 없다.
또 하나는 스피노자 철학을 가로지르는 자연-과학적 인과율은 많은 이들을 설득하기에 충분하다. 스피노자 철학은 인간의 이중적인 정신구조의 충족이유율을 이 인과율로 해명하기 때문이다.
스피노자 철학이 표면적으로 인과율을 절대화한다는 점에서 무신론자로 보이고, 실은 신은 있다고 말한다는 점에서 유신론자로도 보인다는 점에서 스피노자가 말하는 신은, 신앙의 신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신을 믿지만 신을 믿지 않는 거 같은 모호한 포즈, 이것을 <스피노자 효과>라고 말할 수 있다. 스피노자는 유대사회에서 축출되었지만 유대이즘을 결코 버리지 않은, 인과응보의 신에 대해서 말할 수밖에 없는, <자연은 신이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인과율에 기반한 범신론자로서, 이 시대의 지식인들의 정신구조와 너무나 닮은 거울상이라고 할 수 있다.
3.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루카 17,5-10
루카 17,5-10에서도 신을 부르면서 동시에 신을 지우는 이들에 대해 <믿음>이라는 신앙인의 근본 테제를 통해, 집단무의식-인과율에 기반한 유다이즘에서 벗어나는 믿음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루카 17,5-10을 읽어본다.
Ⓐ그때에 5 사도들이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 그러자 주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7 너희 가운데 누가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이 있으면,들에서 돌아오는 그 종에게 ‘어서 와 식탁에 앉아라.’ 하겠느냐? 8 오히려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그리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 허리에 띠를 매고 시중을 들어라. 그런 다음에 먹고 마셔라.’ 하지 않겠느냐? 9 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10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이라고 전하는 루카 17,5-10는 나는 그분을 믿는다라고 고백하는 그 믿음이 무엇인지 근본적인 성찰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대부분의 성서해설서들은 이어지는 6절의 내용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를 이스라엘식 혹은 예수님적인 과장법이라고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이 글은 다른 의미로 루카 17,5-10을 바라보고 있다.
이유1. 그동안 예수님의 공생활 중에 있었던 기적의 내용, 그리고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 삼위일체 사랑을 감안한다면 성서에 기록된 그 어떤 내용도 과장법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근본적인 성찰의 주제가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이유2. 우리가 읽는 성경은 예수님 시대의 누군가가 현장을 곁에서 일일이 기록해서 전해진 것이 아니다. 예수님 사후, 누군가의 기억, 누군가의 체험에 대한 어록이 만들어지면서 성경이 기록되었고, 수많은 번역의 과정을 거쳐 우리에게 도착했다. 성경에 기록된 행적들은 거르고 걸러 우리에게 도착한 어령에 해당한다.
이유3. 과장법으로 읽을 수 없는 더 구체적인 이유는 오늘 우리의 처지를 생각해보면 과장법이라고 말하는 것이 자기부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졌다는 그 자체가 이미 돌무화가나무가 뽑혀서 바다에 심겨진 것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의 기적이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6절의 내용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방점까지 찍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 일이 있으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고 장담하지는 말라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 이 시대, 물질과 자본이 끌어가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에 대해 말한다는 것 그 자체가,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으려 하는 그 자체가 무화과나무를 저 바다에 옮겨 심은 사건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루카 17,5-10에서 제자들과 예수님이 생각하는 믿음의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인가?
제자들은 믿음의 정도에 대해 말하고 있고, 예수님은 믿음의 태도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믿음이라는 테제는 같지만, 믿음을 바라보는 방향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방향이 나누어지는 지점이 집단무의식화 되어 있는 인과율에 바탕을 둔 인과응보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제자들은 믿음에서 주체인 나를 초점화 시키지만, 그런데, 믿음은 무엇을 믿는냐는 태도가 문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믿음은 <나는 너에게 말한다>는 것을 네가 듣고 있느냐고 묻는 것이다. 들었다고 말하면서 계속 듣고 있지 않는 상태가 바로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는 발언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랐으면서, 수없이 듣고 또 들었는데, 수없이 말해주고, 보여주기까지 했는데, 그런데 믿음이 무엇이죠? 라고 물은 것이나 다름없디.
제자들은 최측근에서 그분의 공생활 전반을 동행한 이들이다. 즉 그분의 말씀을 직접 듣고, 그분의 행적을 목격한 이들이다. 그럼에도 그들에게 믿음이 더해져야 할 그 무엇으로 생각되었다면 제자들이 생각하는 믿음과 예수님이 생각하는 믿음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자들은 믿음을 어떤 단계적인 것으로 바라보았다면 예수님은 <겨자씨 한 알만한>이라는 비유를 든 것을 보면 예수님은 믿음의 최소원칙을 바라보고 있고,제자들은 믿음의 최대원칙을 묻는다고 할 수 있다.
즉 제자들은 믿음에 대한 갈망과 믿음을 다른 차원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제자들의 믿음에 대한 갈망 속에는 이미 겨자씨만한 믿음이 싹트고 있는 중임에도, 그것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믿음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스스로의 믿음을 부정하는 것이, 그분이 주시고자 하는 축복에서 스스로를 멀어지게 하는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왜 그런가? 바로 제자들 역시 스피노자 이전에 이미 스피노자 효과에 전염되어 있다고 할 수 있고, 이는 인류 사회에 전염된 상선벌악이라는 집단무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신이 있다고 말하지만 스피노자처럼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고 말할 수 없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구약의 오랜 전통, 인과응보, 상선벌악으로는 예수님이 보여주는 신의 자비, 신의 용서, 신의 사랑을 바라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그 다음에 이어지는 일꾼의 소명 비유에서 거듭 확인 할 수 있다.
루카 17,5-10은 루카 17,5-10에서 마치 확연히 다른 주제를 연결한 것으로 흔히 바라보곤 한다.
Ⓐ는 믿음에 대해서, Ⓑ는 일꾼의 소명에 대해서 바라보는 이 부분이 제자들과 예수님이 생각하는 믿음의 어떤 상태를 단적으로 반영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에서
10절은 지난주 복음 <라자로와 부자의 죽음>의 비유에서 보듯, 인과응보는 없다는 것으로 바라볼 때, 일꾼의 소명 역시 같은 맥락으로 바라볼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시선의 일관성을 유지하라는 것이다. 즉 악의 인과응보가 없다면, 선의 인과응보 역시 없다는 것이다. 구원은 행위의 대가가 아니라 믿음의 대가라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말로 믿음이나 선악의 결정은 인간의 행위, 인과적인 상식, 세계해석을 뛰어넘는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자비가, 용서가, 아가페가 나온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이유가 나온다.
반복해 바라보자면,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에는 믿음에 대한 대전제 ⒜---------------->믿음의 결과 ⒝로 연결되어 있다.
⒜의 대전제는 아주 작은 믿음, 마치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처럼 아주 작은 믿음이 ⒝의 인간의 상식을 뒤집는 엄청난 결과들을 낳는다는 것이다.
제자들이 생각하는 믿음은 어떤 점층적인 단계를 밟아서 그 단계에 합당한, 상응하는 믿음에 대한 대가가 주어지는 인과응보적인 발상이라면,
예수님이 생각하는 믿음은 믿고 싶다는 그 작은 갈망에 대한 무한한 사랑의 응답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상식으로는 과장법이라고 치부해버릴 불가항력의 사건들이 우리 삶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 믿음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작은 원의들이 얼마나 큰 사건들을 잉태하고 있는지, 인간의 상식이나 인과적인 세계의 해석으로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루 종일 그분의 집에서 일한 일꾼의 삯과 한 시간만 일한 사람의 삯이 같다고 할 수 있다.
Ⓒ참새에게 독수리가 어떻게 비상하냐고 묻지 마라(헬렌 슈크만)
이 비유는 참새는 믿음에 대한 갈망이나 추종을 의미한다. 독수리는 믿음이다. 믿음에 대한 갈망으로는 믿음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믿음에 대한 갈망이, 사실 믿음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우리는 믿음 소망 사랑을 향주삼덕이라고 부른다. 그 향주삼덕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것이 그래서 <믿음>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당신을 사랑해! 속에는 나는 당신을 믿는다!는 의미가 내포되어야 함에도 사랑과 믿음에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엄마는 아들을 사랑하지만 아들을 믿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믿음이 소망과 사랑을 떠받치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천국을 열쇠를 맡겼다. 자신을 배신할 제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맡겼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님은 베드로를 사랑할 뿐만 아니라 베드로를 믿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분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더 믿는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바로 자기부정을 거쳐 예수님 부활 후에 자기 긍정에 이른 인물의 표본에 해당한다. 그것이 베드로로 상징되는 교회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가장 선한 사람들의 집단도 아니고, 사랑을 가장 잘 하는 사람들의 집단도 아니다. 다만, 나를 믿는 그분을 믿고, 너를 믿어 주는 믿음의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이 지금 믿음의 정도를 문제 삼는 그 단계인지 겨자씨만한 믿음인지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자신을 잠시만 성찰해 보면, 스스로 진단해 보면 알 수 있다.
인간의 눈으로 어떤 사건이나 사물이나 사람의 행위를 이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 바라보고 있다면, 믿음의 정도를 문제 삼는 유다이즘의 상선벌악의 단계, 즉 판단의 단계라고 할 수 있다.
반면, 무화과나무가 바다에 심겨질 수도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은, 성령의 비전으로 총체적인 맥락으로 인생 전체를 영원으로 바라보는, 예수님이 말하는 그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세계를 끌어가는 것이 어떤 세속적인 힘이 아니라 연약한 사랑이고, 연민이고, 용서고, 기다림이고, 믿어줌이라는 사실을 바라보는 것이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 믿는 이는 행복하다.
보지 않고도 믿는다?
신앙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과 꼭 필요한 것을 동시에 주시는 아버지를 믿는 것이다. 그 아버지의 사랑이 어떤 사랑인가를 보여주신 예수님의 영원한 사랑을 믿는 것이다. 그 영원한 사랑을 오늘 우리가 알 수 있고 할 수 있도록 돕는 성령을 믿는 것이다. 그러니까 믿음은 삼위일체 사랑을 믿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우리 믿음의 내용이다. 이 사랑의 신비는 인간의 눈으로는 알 수 없는 사랑이다. 반드시 성령의 비전으로만 알 수 있고, 바라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따라할 수 있는 사랑이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가장 좋은 것과 꼭 필요한 것을 주시는 이 신비에 대한 믿음을 나눌 수 있다면 그것은 이 세상에 가장 좋은 것, 꼭 필요한 것을 나눈 것이다. 성령의 비전을 나눈 것이다. 성령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인데, 다른 말로 <사랑 혹은 자비를 믿는다>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을 부정하면서 타인을 긍정할 수는 없다. 이것이 긍정의 원리다. 자신과 타인을 부정하면서 신을 긍정할 수는 없다. 나는 믿음이 부족해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 겸손이 아니라 겸손을 사칭한 교만이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신의 사랑을 다 이해할 만큼, 그에 상응하는 은총의 그릇을 준비할 수는 없다. 미처 용서를 청할 수 없었음에도 용서가 주어지는 것과 같다. 연약한 상한 갈대 같은 우리, 작은 바람 앞에서도 꺼지기 일보 직전인 촛불 같은 그 작은 존재인 우리가,
<믿고 싶다>는 작은 바람, <저 분의 옷자락을 잡기만 하여도>에 해당하는 작은 바람에 어마어마한 은총이 담긴다는 것이 루카 17, 5-10이 전하고자 하는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글을 마무리 하며 마르코, 11, 23-25도 함께 읽어본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려서 저 바다에 빠져라’ 하면서 마음속으로 의심하지 않고 믿으면, 그대로 될 것이다.(마르코, 11, 23-25)
Ennio Morricone - The Mission Main Theme (Morricone Conducts Morric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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